杜審言 (두심언, Dù Shěnyán, ~708)

두심언(杜審言, 648?~708)

별칭: 杜审言, Dù Shěn yán, 자 필간(必簡)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중국 당나라 초기의 시인. 국자감 주부(國子監主簿), 수문 관 직학사(修文館直學士)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젊어서부터 문명을 떨쳐 이교(李嶠) ·최융(崔融) ·소미도(蘇味道)와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라 불렸다. 무후조(武后朝)의 궁정시인으로서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과 견주었다.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출생이라고 하나, 일설에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이라고도 한다. 자는 필간(必簡). 진(晉)의 명장이고 학자이기도 하였던 두예(杜預)의 자손이며, 성당(盛唐)의 대시인 두보(杜甫)의 조부이다. 670년 진사에 급제하고 측천무후(則天武后)와 중종을 섬겼으나, 한때 북(北)베트남의 교지(交趾)에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죄에서 풀려나온 후 국자감 주부(國子監主簿) ·수문관 직학사(修文館直學士)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젊어서부터 문명을 떨쳐 이교(李嶠) ·최융(崔融) ·소미도(蘇味道)와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라 불렸다고 하며, 또한 무후조(武后朝)의 궁정시인으로서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과 견주었다고 하나, 오늘날 시 43수만이 전할 뿐이다.


두심언 관련 한시

和晉陵路丞早春游望(화진능노승조춘유망)

杜甫 (두보, Dù Fǔ, 712~770)

두보 [杜甫, 712~770]

이름: 본명 두보(杜甫, Dù Fǔ), 호 소릉(少陵), 자 자미(子美)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시
출생지: 중국 허난성[河南省] 궁현[鞏縣]
주요작품: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널리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주요 작품에는 《북정(北征)》,《추흥(秋興)》 등이 있다.


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 ·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東四川]의 쯔저우[梓州] ·랑저우[閬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東端)의 쿠이저우[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 ·후난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 ·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訓뭍)에 뛰어났으며,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두보(杜甫) 관련 한시/b>

春望(춘망)
春夜喜雨(춘야희우)


참조

성당(盛唐)

중국 당(唐) 300년은 시에 있어서 황금시대로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의 4가지로 당시(唐詩)를 구분하고 있다. 그 중에 성당(盛唐)은 시문학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로, 현종(玄宗)의 개원(開元) 원년(713)에서 숙종(肅宗)의 상원(上元) 2년(761)에 이르는 48년간을 말한다. 성당 전반기에는 이백(李白), 후반기에는 두보(杜甫)가 활약하였고 대표적 시인에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고적(高適), 왕창령(王昌齡) 등이 있다.

杜牧 (두목, 803~853)

杜牧(두목, 803~853)

이름: 호 번천(樊川), 자 목지(牧之), 별명 소두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경조부 만년현(京兆府 萬年縣:陝西省 西安市)
주요작품: 《아방궁의 부》 《강남춘(江南春)》 《번천문집(樊川文集)》(20권)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불리는 중국 만당전기(晩唐前期)의 시인. 산문에도 뛰어났지만 시에 더 뛰어났으며, 근체시(近體詩) 특히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잘 했다. 만당시대의 시인에 어울리게 말의 수식에 능했으나, 내용을 보다 중시했다. 주요 작품에는 《아방궁의 부》,《강남춘(江南春)》등이 있다.


자 목지(牧之), 호 번천(樊川). 경조부 만년현(京兆府 萬年縣:陝西省 西安市) 출생.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불리며, 또 작품이 두보(杜甫)와 비슷하다 하여 소두(小杜)로 불린다. 26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굉문관교서랑(宏文館校書郞)이 되고, 황주(黃州) ·지주(池州) ·목주(睦州) 등의 자사(刺史:지방장관)를 역임한 후, 벼슬이 중서사인(中書舍人)까지 올랐다. 매사에 구애받지 않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당나라의 쇠운을 만회하려고 무한히 노력하였다. 정치와 병법을 연구하고, 《아방궁(阿房宮)의 부(賦)》라는 시를 지어 경종왕을 충고하려고 애썼다. 산문에도 뛰어났지만 시에 더 뛰어났으며, 근체시(近體詩) 특히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잘 했다. 만당시대의 시인에 어울리게 말의 수식에 능했으나, 내용을 보다 중시하였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소재를 빌어 세속을 풍자한 영사적(詠史的) 작품이 나오고 함축성이 풍부한 서정시가 나왔다. 대표작으로 시 《아방궁의 부》 이외에 《강남춘(江南春)》 《번천문집(樊川文集)》(20권) 등이 있다.


참고

만당(晩唐)

중국 당시(唐詩)의 4시기(時期) 구분 중 마지막 시대. 문종 개성연간(文宗開成年間:836∼840)에서 당나라 후기에 이르는 약 70년간을 말한다. 약 70년간의 중당시대(中唐時代)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심각해진 시기로서 특히 환관(宦官)의 횡포가 심하여 그 결과 천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지방에서는 번진(藩鎭)의 세력이 커지는 등 조정은 붕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문화면에 있어서도 볼 만한 것은 거의 없고 문학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겨우 두목(杜牧) ·이상은(李商隱) ·온정균(溫庭筠) 등의 작가가 나왔는데 이들의 특징은 근체시(近體詩)의 기교와 섬세함을 본체로 하고 찰나적인 감각을 표현함으로써 자기만족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