陽火出於氷水 (양화출어빙수)

양화출어빙수(陽火出於氷水)

양기를 지닌 불이 얼음에서 나오다. 얼음을 볼록렌즈처럼 깎아서 불을 일으키는 것.


장화, 張華, 박물지, 博物志

若烹小鮮 (약팽소선)

若烹小鮮(약팽소선)

치대국약팽소선(治大國若烹小鮮)의 준말.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무엇이든 가만히 두면서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란 뜻

楊州鶴 (양주학, yángzhōuhè)

楊州鶴(양주학)

杨州鹤(yángzhōuhè)

楊 버들 양 | 州 고을 주 | 鶴 학 학,흴 학 |


이룰 수 없는 욕심.


양주학(楊州鶴)은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의 <학조(鶴條)>편에 실린 이야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이다. 옛날에 여러 사람이 모여 서로의 소망을 이야기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양주의 자사(刺史)가 되고 싶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재물을 많이 얻기를 바랐으며, 어떤 사람은 학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신선이 되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마지막 사람은 자신은 양주의 자사가 되어 십만 관(貫)의 돈을 허리에 차고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싶다고 하였다. 부귀공명을 모두 누리고 신선까지 되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낸 것인데, 이는 인간세상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헛된 욕망이다. 양주학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하였는데, 이룰 수 없는 욕심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이 시에서는 선비의 절개를 지키면서 부귀영화까지 함께 누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여 세속적 욕망을 해학적으로 경계한 것이다.


관련 한시

於潛僧綠筠軒(어잠승녹균헌) |


古今事文類聚,고금사문유취, 鶴條, 학조, 욕심, 鶴, 학(鶴)

量體裁衣 (양체재의)

量體裁衣(양체재의)

量 헤아릴 양(량) | 體 몸 체 | 裁 마를 재 | 衣 옷 의 |

몸에 맞게 옷을 고친다는 뜻으로, 일의 처한 형편(形便)에 따라 적합(適合)하게 일을 처리하여야 함을 이르는 말


남제서(南齊書) 장융전(張融傳)의 이야기.

남북조 시대, 남제(南齊)에 글재주가 좋은 장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가 사광(思光)으로, 소도성(蕭道成:훗날 남제의 태조)의 막하로 들어가 벼슬이 사도우장사(司徒右長史)에 이르렀다. 그는 비록 요직에 있었지만 평소 생활은 검소하였으며, 항상 오래되고 낡은 의복을 입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나라 태조는 사람을 시켜 자신이 입던 옷을 장융에게 보냈다. 당시 황제가 자신이 입던 옷을 하사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상이었다. 제나라 태조는 옷을 보내면서 친서(親書)도 함께 보냈는데, 태조는 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이 입고 다니는 옷이 낡은 것을 보니 참으로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을 알 수 있소. 그러나 경과 같은 고위 관리가 남루한 옷을 입고 다니니 조정의 명망이 훼손될까 염려스럽고, 백성들로부터 과인이 경을 천하게 대우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소. 지금 오래된 옷을 한 벌 보내니, 오래되었다고는 하지만 새옷보다 나을 것이오. 짐이 입던 옷인데, 경의 몸에 맞게 줄여서 고쳐 놓도록 하였소[是吾所著, 已令裁減稱卿之體]."

여기서 유래하여 양체재의는 몸에 잘 맞도록 옷을 지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상황이나 처한 형편에 따라 적합하게 일을 처리하여야 함을 의미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남제서(南齊書) 장융전(張融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稱體裁衣(칭체재의)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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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劉長卿 (유장경, Liú Chángqīng)

유장경 [劉長卿, 725?~791?]

異名: 刘长卿, Liú Cháng Qīng, 자 문방(文房), 유수주(劉隨州), 오언장성(五言長城)
국적: 중국
활동분야: 정치, 시
출생지: 안후이성[安徽省] 선성(宣城) 또는 후베이성[河北省] 하간(河間)
주요작품: 《유수주시집(劉隨州詩集)》《외집(外集)》


오언시(五言詩)에 능하여 ‘오언장성(五言長城)’이라는 칭호를 듣던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시의 동일표현이 돋보이며 관리로서도 강직한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 자주 권력자의 뜻을 거스르는 언동을 했다. 주요 작품에는 《유수주시집(劉隨州詩集)》,《외집(外集)》등이 있다.


자는 문방(文房)이다. 안후이성[安徽省] 선성(宣城) 출신이라는 설과 후베이성[河北省] 동남쪽에 위치했던 하간(河間)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젊었을 때는 뤄양[洛陽] 남쪽의 숭양(嵩陽)에서 살면서 청경우독(晴耕雨讀)하는 생활을 하였다.

733년(개원 21)에 진사가 되었다. 회서(淮西) 지방에 있는 악악(鄂岳)의 전운사유후(轉運使留後)의 직에 있을 때 악악관찰사(鄂岳觀察使) 오중유(吳仲儒)의 모함을 받아 육주사마(陸州司馬)로 좌천당하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수주자사(隨州剌史)를 지내 유수주(劉隨州)라고 불렸다. 강직한 성격에 오만한 면이 있어 시에 서명할 때는, 자기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는 자부심에서 성을 빼고 ‘장경(長卿)’이라고만 표기하였다.

오언시(五言詩)에 능하여 ‘오언장성(五言長城)’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시의 동일표현이 돋보이며, 전원과 산수묘사는 도연명(陶淵明)과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과 통하는 바가 있다. 관리로서도 강직한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 자주 권력자의 뜻을 거슬리는 언동을 하였다. 그래서 2차례나 유배를 당하여 실의의 세월을 보냈다. 그의 시에 유배당하여 실의 속에 보내는 생활과 깊은 산골에 숨어 살려고 하는 정서를 그린 것이 많은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또, 일부의 작품에는 동란의 시대의 사회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작품에 《유수주시집(劉隨州詩集)》(10권)과 《외집(外集)》(1권)이 있다.


劉 죽일 유(류) [부수]刂 (선칼도방, 2획) [사성음] liú
㉠죽이다, 살해하다 ㉡베풀다 ㉢이겨내다, 승리하다 ㉣돌아다니다 ㉤예쁘다 ㉥도끼


유장경 관련 한시

彈琴(탄금)

弱肉强食 (약육강식, ruòròuqiángshí)

弱肉强食(약육강식)

弱肉强食(ruòròuqiángshí)

弱 약할 약 | 肉 고기 육, 둘레 유 | 强 굳셀 강 | 食 밥 식, 먹을 식, 먹이 사, 사람 이름 이 |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다는 뜻으로, 생존(生存) 경쟁(競爭)의 살벌함을 말함

the weak are usually the prey of the strong — the law of the jungle


한유(韓愈)의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는 한유가 문창이라는 승려에게 써 보낸 글로서, 한유의 불교에 대한 관점이 잘 나타나 있다.

한유는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도(道)에 있어서 인(仁)과 의(義)보다 더 큰 것이 없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예약과 형정(刑政)보다 더 바른 것이 없습니다. 그것들을 천하에 시행하면 만물이 모두 합당함을 얻게 되고, 그것들을 그 자신에게 적용하면 몸은 편안하고 기운은 평온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불교라는 것은 누가 만들고 누가 전한 것입니까? 새들이 몸을 숙여 모이를 쪼다가 몸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고, 짐승들이 깊은 곳에 있으면서 드물게 나타나는 것은 다른 것들이 자신을 해할까 두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도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약한 자의 고기를 강한 자가 먹고 있는 것입니다[猶且不脫焉, 弱之肉, 强之食].

弱肉强食(The weak become the victim of the strong)이란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잡아 먹힌다는 뜻이다.


출전

한유(韓愈)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弱肉强食(약육강식) | 優勝劣敗(우승열패) | 適者生存(적자생존) |

有耶無耶 (유야무야)

有耶無耶(유야무야)

있는지 없는지 흐리멍덩한 모양, 흐지부지한 모양.

良藥苦口 (양약고구)

良藥苦口(양약고구)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忠言(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자신에게 이롭다는 말이다.


천하를 통일했던 秦(진)나라도 始皇帝(시황제)가 죽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漢(한)나라 劉邦(유방:뒤에 고조가 됨)과 楚(초)나라의 項羽(항우)는 진나라의 수도였던 咸陽(함양)에 먼저 입성하고자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 이긴 유방은 성안에 들어서자마자 진나라 왕궁(아방궁)으로 향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방마다에 둘러쳐진 비단휘장, 산처럼 쌓여있는 금은보화, 게다가 수많은 후궁의 미녀들을 보는 순간 유방의 눈은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황홀경에 넋을 잃은 유방은 이 아방궁에서 시황제의 호사를 누려보고 싶은 강렬한 유혹에 스스로 빠져들었다. 이런 유방의 욕망을 눈치챈 勇將(용장) 번쾌가 간곡히 간해보았지만 유방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한걸음 물러선 번쾌를 대신해서 軍師(군사)인 張良(장량)이 나섰다.

『相公(상공)께서는 무도한 진나라를 무찌르고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몸에는 유익한 것이며 양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을 고칩니다(忠言逆耳利於行 良藥苦口利於病). 제발 번쾌의 말에 따라 주십시오』

유방은 이 충언을 받아들여 지체없이 왕궁을 나서서 陣地(진지)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若要人不知除非己莫爲 (약요인부지제비기막위)

若要人不知,除非己莫爲(약요인부지 제비기막위)

若要人不知,除非己莫为 [ruòyàorénbùzhī, chúfēijǐmòwéi]

若 같을 약 | 要 바랄 요 | 人 사람 인 | 不 아닐 불, 아닐 부 | 知 알 지 | 除 제거할 제 | 非 아닐 비 | 己 자기 기 | 莫 없을 막 | 爲 할 위 |

남이 모르게 하려면 스스로 일을 저지르지 마라. 무슨 일이든 사람을 속일 수는 없다.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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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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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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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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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上君子 (양상군자)

梁上君子 (양상군자)

① 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으로, 도둑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 ② 천장의 쥐


後漢(후한) 말엽, 陳寔(진식)이란 사람이 태구현의 현감으로 있을때의 일이다. 진식은 학문을 좋아할 뿐 아니라 매사를 공정하고 관대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현민들한테서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흉년이 들어 현민들이 몹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어느 날 밤 진식이 책을 읽고 있는데 도둑이 살며시 들어와 대들보 위에 숨었다. 그는 짐짓 모르는 척하고 책읽기를 끝내고는 아들과 손자들을 불러들여 訓戒(훈계)를 했다.

『사람들은 모름지기 스스로 힘써야만 한다. 악을 행하는 사람도 본래는 악한 사람이 아니다. 나쁜 습관이 성품이 되어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도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니라』

도둑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대들보에서 뛰어내려와 이마를 방바닥에 조아리며 사죄했다. 진식은 도둑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렇게 깨우쳐 주었다.

『너의 얼굴 모습을 보아하니 악한 사람 같지는 않구나. 깊이 반성하여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죽 살기에 힘겨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나』

진식은 도둑에게 비단 두 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 일이 알려지자 태구현에는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한다.


후한서 진식전(陳寔傳)

藥房甘草 (약방감초)

藥房甘草(약방감초)

무슨 일이나 빠짐없이 끼임. 무슨 일에나 반드시 끼어야 할 필요한 물건.

陽奉陰違 (양봉음위)

陽奉陰違(양봉음위)

보는 앞에서는 순종(順從)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딴마음을 먹음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表裏不同(표리부동) | 羊質虎皮(양질호피) | 笑中有劍(소중유검) | 笑面虎(소면호) | 笑裏藏刀(소리장도) | 似而非者(사이비자) | 似而非(사이비) | 似是而非(사시이비) | 面從腹背(면종복배) | 同床異夢(동상이몽) | 同床各夢(동상각몽) | 口有蜜腹有劒(구유밀복유검) | 口蜜腹劍(구밀복검) |

羊頭狗肉 (양두구육)

羊頭狗肉(양두구육)

羊頭狗肉[yángtóugǒuròu]

羊 양 양 | 頭 머리 두 | 狗 개 구 | 肉 고기 육, 둘레 유 |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으로 “懸羊頭賣狗肉(현양두매구육)”의 줄임말. ①겉은 훌륭해 보이나 속은 그렇지 못한 것②겉과 속이 서로 다름③말과 행동(行動)이 일치(一致)하지 않음

crying out wine and selling vinegar, using a better name to sell inferior goods, all outside show, making an extravagant advertisement


안자춘추(晏子春秋) 내편(內篇)의 이야기.

춘추(春秋)시대 제(齊)나라 靈公(영공)은 좀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다름아니라 예쁜 여자에게 남자 옷을 입혀놓고 觀賞(관상)하는 일인데 궁중에 있는 미인들을 붙잡아 男裝(남장)을 시키곤 좋아했다. 이같은 작태는 궁중에만 머물지 않고 민간에까지 퍼져 제나라 거리 거리에는 남장한 미녀들로 넘쳐났다. 이에 놀란 영공이 궁중밖에서는 여자가 남장을 못하도록 엄한 禁令(금령)을 내렸다. 그러나 자신은 여전히 남장여인을 보며 즐겼으니 금령은 있으나 마나였다. 그런데도 영공은 금령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답답해진 영공은 그 이유를 재상인 晏子(안자)에게 물어보았다. 안자의 대답은 이러했다.

"전하께서는 궁중에서만 여자에게 남장을 하게 허락하시면서 백성들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양의 머리를 문에다 내걸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파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猶懸牛首于門而賣馬肉于內也] 전하께서는 어째서 궁중에서만 남장하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까. 궁중에서도 금한다면 밖에서 남장하는 여자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영공은 안자의 말을 듣고 궁중에서도 남장을 못하도록 했다.그러자 한 달이 못되어 제나라 전국에서 남장하는 여자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본시 소머리와 말고기였던 것이 후에는 양머리(羊頭)와 개고기(狗肉)로 바뀌었다.


출전

안자춘추(晏子春秋) 내편(內篇) | 항언록(恒言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羊頭狗肉(양두구육) | 懸羊頭賣狗肉(현양두매구육) | 懸羊頭賣馬脯(현양두매마포) | 현우수매마육(懸牛首賣馬肉) |

表裏不同(표리부동) | 羊質虎皮(양질호피) | 笑中有劍(소중유검) | 笑面虎(소면호) | 笑裏藏刀(소리장도) | 似而非者(사이비자) | 似而非(사이비) | 似是而非(사시이비) | 面從腹背(면종복배) | 同床異夢(동상이몽) | 同床各夢(동상각몽) | 口有蜜腹有劒(구유밀복유검) | 口蜜腹劍(구밀복검) |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Cry up wine and sell vinegar
포도주 대신 식초 팔기


중요도 ★

夜郞自大 (야랑자대)

夜郞自大(야랑자대)

夜 밤 야, 고을 이름 액 | 郞 사내 랑(낭) | 自 스스로 자 | 大 클 대, 큰 대, 클 태, 클 다 |

야랑이 스스로 크다한다는 뜻으로, 중국(中國) 한(漢)나라 때의 오랑캐 중(中)에서 야랑국이 가장 세력(勢力)이 강(强)하여 오만(傲慢)하였으므로, 용렬(庸劣)하거나 우매(愚昧)한 무리 중(中)에서 세력(勢力)이 있어 잘난 체하고 뽐냄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사기(史記)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의 이야기.

전국 시대가 종언을 고한 뒤 진(秦)나라가 통일 시대가 되고 다시 그 진나라가 망하여 한(漢)나라가 서고 나서도 중국 서남 지방은 뚜렷한 주인도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나라가 북방의 강력한 오랑캐 흉노(匈奴)에 대처하느라 그쪽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지역의 부족들은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10여 개의 집단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것이 귀주(貴州)의 야랑국(夜郞國)으로서 그 임금 다동(多同)은 야랑후(夜郞侯)를 자처하고 있었다. 아량국의 크기는 한나라의 현(縣)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동은 자기 세력권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야랑국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인 줄 알았다. 그래서 어느 날 부하들을 이끌고 영지를 순시하다가 짐짓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가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다동의 심중을 꿰뚫어보고 있는 부하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야 전하께서 다스리고 계신 이 야랑국이지 어디겠습니까.”

흐뭇해진 다동은 눈 앞의 높은 산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세상에 저 산보다 더 높은 산이 있을까?”

“저렇게 높은 산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윽고 흐르는 물가에 다다랐다. 강이라 하기에는 뭣하고 큰 시내라고 함이 적당한 물이었다. 다동이 다시 물었다.

“이 물보다 더 넓고 긴 물이 있을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아첨의 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은 다동은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의 임금이라 생각하고는 기고만장했다.

한나라 무제(武帝) 때인 기원전 122년, 인도(印度)로 가던 사신 일행이 야랑국에 들렀다. 오랫동안 중국과 사실상 교류가 끊어진 상태였으므로, 다동은 중국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기회다 싶어 반겨 맞아 환대했다.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다동이 사신을 보고 물었다.

“공께서 보시기에 이 나라가 어떤 것 같소? 중국과 견주어 어느 쪽이 크다고 생각하오?”

사신은 기가 막혀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 한나라에는 군(郡)이 수십 개나 되고, 그 군 하나만 해도 이곳 야랑국보다 몇 배는 큽니다.”

그 말을 들은 다동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지금까지 자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는가를 깨달았다. 그는 나중에 남월(南粤)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무제로부터 왕의 작호를 하사받고 완전한 한나라 신하가 되었다.



출전

사기(史記)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坐井觀天(좌정관천) | 井中之蛙(정중지와) | 井中蛙(정중와) | 井中視星(정중시성) | 井中觀天(정중관천) | 井底之蛙(정저지와) | 井底蛙(정저와) | 坎中之蛙(감중지와)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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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藥籠中物 (약농중물)

藥籠中物(약농중물)

藥 약 약| 籠 농 롱| 中 가운데 중| 物 만물 물

약농속의 약품이란 뜻으로, 항상 곁에 없어서는 안 될 긴요한 인물(심복)을 이르는 말.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고종:628-683)의 황후였던 측천무후때의 이야기이다. 14세 때 2대 황제인 태종의 후궁이 된 그녀는 26세 때 태종이 죽자 여승이 되었으나 재색을 탐낸 고종의 명에 따라 환속(還俗), 그를 후궁으로 있다가 고종 6년에 황후가 되었다.

그 후 고종이 중풍에 걸리자 무후는 스스로 천후(天后)라 일컫고 수많은 명신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고 전 황후의 소생인 태자를 폐하는 등 포악한 정치를 했다. 고종이 죽은 뒤 무후의 친아들인 중종(中宗:4대), 예종(睿宗:5대)을 세웠으나 곧 폐하고 67세 때(690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周, 690-705)로 고쳤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제(女帝)가 출현한 이 정변을 무주혁명이라고 한다.

그 무렵, 적인걸이라는 청렴 강직하고 식견이 높은 명재상이 있었다. 그는 더 없이 잔인하나 명석한 무후를 직간(直諫), 보필하여 어지러웠던 정치를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유능한 선비를 추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했다. 그래서 그는 조야(朝野)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적인걸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는데 그중에는 원행충과 같은 박학다재한 인물도 있었다. 그 원행충이 어느날, 적인걸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공댁에는 '맛있는 것(훌륭한 인재)'이 많습니다. 혹 과식하시어 배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저 같은 쓴 약도 곁에 놔 두십시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 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자 적인걸은 웃으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바로 내 약농중물일세[君正吾藥籠中物]. 암, 하루라도 곁에 없어서는 안 되고 말고[不可一日無也]."

良禽擇木 (양금택목)

良禽擇木

어질 량 | 새 금 | 가릴 택 | 나무 목 |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는 뜻으로, 현명한 사람은 자기 재능을 키워 줄 훌륭한 사람을 가려서 섬김의 비유.

춘추시대, 유가의 비조인 공자가 치국의 도를 유세하기 위해 위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공문자(孔文子)가 대숙질(大叔疾)을 공격하기 위해 공자에게 상의하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사 지내는 일에 대해선 배운 일이 있습니다만, 전쟁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물러나온 공자는 제자에게 서둘러 수레에 말을 매라고 일렀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한시라도 빨리 위나라를 떠나야겠다' 며 이렇게 대답했다.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良禽擇木]고 했다. 마찬가지로 신하가 되려면 마땅히 훌륭한 군주를 가려서 섬겨야 하느니라."

이말을 전해 들은 공문자는 황급히 객사로 달려와 공자의 귀국을 만류했다.

"나는 결코 딴 뜻이 있어서 물었던 것이 아니오. 다만 위나라의 대사에 대해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니 언짢게 생각말고 좀 더 머물도록 하시오."

공자는 기분이 풀리어 위나라에 머룰려고 했으니 때마침 노나라에서 사람이 찾아와서 귀국을 간청했다. 그래서 고국을 떠난 지 오래인 공자는 노구(老軀)에 스미는 고향 생각에 사로잡혀 서둘러 노나라로 돌아갔다.

楊貴妃 (양귀비, 719~756)

楊貴妃(양귀비)

양귀비(楊貴妃, 719년 6월 1일 ~ 756년 7월 15일)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다. 성은 양(楊), 이름은 옥환(玉環)이며, 귀비는 황비로 순위를 나타내는 칭호이다. 현종 황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정도가 지나쳐 안사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경국의 미인이라고도 부른다.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http://ko.wikipedia.org/wiki/양귀비_(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