沐猴而冠 (목후이관, mùhóu'érguàn)

沐猴而冠(목후이관,mùhóu'érguàn)

沐猴而冠(mùhóu'érguàn)

沐 머리 감을 목 | 猴 원숭이 후 | 而 말 이을 이,능히 능 | 冠 갓 관 |


1. 원숭이가 관을 쓰고 사람처럼 꾸미다. 《사기·항우본기(史記·項羽本紀)》에 나오는, “사람들이 초(楚)나라 사람은 관을 쓰고 사람 행세를 하는 원숭이 같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구나.”라는 말에서 유래함. 2.[성어,비유] 덕도 없고 무능하면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


초(楚)나라의 패왕인 항우(項羽)가 진(秦)나라의 서울을 불태워버리고 유방(劉邦)을 추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며 자기는 금의 환향(錦衣還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생(韓生)이 항우는 그런 의관을 할 사람이 됨이 못 된다고 비꼬아 한 말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말이다. 홍문(鴻門)의 연(宴)으로 유방으로부터 진(秦)의 수도 함양을 넘겨받은 항우는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여 함양을 폐허로 만들었다. 함양이 폐허로 변하자, 자기의 성공을 고향에서 뽐내기도 할 겸 해서 초(楚)의 팽성(彭城)으로 천도를 서둘렀다.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금의환향(錦衣還鄕)의 욕심 때문이었다.

함양은 주(周)와 진(秦)이 일어났던 패업의 땅으로, 관중(關中)이라고도 불리는 천혜의 요지이다. 그럼에도 항우가 천도를 고집하자, 간의대부(諫議大夫) 한생(韓生)이 이를 간하였다.

“관중은 예부터 천혜의 요지로 패업의 땅이었고, 토지 또한 비옥합니다.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천하의 왕이 되십시오. 지난 번 범승상(范丞相:范增)이 떠날 때도 결코 함양을 버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 말을 들은 항우는 화를 벌컥 내면서 한생의 말을 막았다. 한생은 크게 탄식하며 물러나서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원숭이를 목욕시켜 관을 씌운 꼴이군[沐猴而冠].”

그런데 이 말을 그만 항우가 듣고 말았다. 항우가 옆에 있던 진평에게 그 뜻을 묻자, 진평이 답하였다.

“폐하를 비방하는 말이온데,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원숭이는 관을 써도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과 원숭이는 꾸준하지 못해 관을 쓰면 조바심을 낸다는 것, 그리고 원숭이는 사람이 아니므로 만지작거리다가 의관을 찢고 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듣고 격분한 항우는 한생을 붙잡아 펄펄 끓는 가마솥에 던져 죽였다. 한생이 죽으면서 말했다.

“나는 간언하다가 죽게 되었다. 그러나 두고 보아라. 백일 이내에 한왕(漢王)이 그대를 멸하리라. 역시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와 같아 관을 씌워도 소용이 없구나.”

결국 천도를 감행한 항우는 관중을 유방에게 빼앗기고 마침내는 해하(垓下)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 목숨을 끊고 말았다.

[유래]
史記(사기) : 項羽本紀(항우본기)


관련 한자어

참조어

錦衣還鄕(금의환향) | 四面楚歌(사면초가) |


史記(사기) : 項羽本紀(항우본기) |

孫綽 (손작)

손작(孫綽)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간에서 사안 , 왕희지(王羲之),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 등과 청담(淸談)을 나누었다.

또한, 진(晉)나라 때인 353년에 손작(孫綽)을 포함 왕희지(王羲之), 사안(謝安) 등 41명이 중국 저장성[浙江省] 샤오싱시[紹興市] 서남쪽에 있는 유명한 정자인 란팅 [蘭亭(난정), Lan Pavilion] 에서 악신(惡神)을 내쫓는 의식을 치렀다.


손작(孫綽) 관련 한시

情人碧玉歌(정인벽옥가)

邵雍 (소옹, 1011~1077)

邵雍(소옹, 1011~1077)

異名: 邵雍(Shào Yōng), 호 안락선생(安樂先生), 자 요부(堯夫), 시호 강절(康節)
국적: 중국 송(宋)
활동분야: 철학
주요저서: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관물내외편(觀物內外編)》


중국 송(宋)나라의 학자 ·시인.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었다. 그는 음(陰) ·양(陽) ·강(剛) ·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하고, 4의 배수(倍數)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호 안락선생(安樂先生). 자 요부(堯夫). 시호 강절(康節). 소강절(邵康節)이라 불릴 때도 많다. 허난[河南]에서 살았으며, 주염계(周濂溪)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이지재(李之才)로부터 도서 ·천문(天文) ·역수(易數)를 배워 인종(仁宗)의 가우연간(嘉祐年間:1056∼1063)에는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로 추대받았으나 사양하고, 일생을 뤄양[洛陽]에 숨어 살았다.

사마 광(司馬光) 등의 구법당(舊法黨)과 친교하면서 시정(市井)의 학자로서 평생을 마쳤다. 남송(南宋)의 주자(朱子)는 주염계,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과 함께 강절을 도학(道學)의 중심인물로 간주하였으며, 강절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었다. 즉, 역(易)이 음과 양의 2원(二元)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음에 대하여, 그는 음(陰) ·양(陽) ·강(剛) ·유(柔)의 4원(四元)을 근본으로 하고, 4의 배수(倍數)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이 철학은 독일의 G.W.F.라이프니츠의 2치논리(二値論理)에 힌트를 주었다고 전한다. 그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62편을 저작하여 천지간 모든 현상의 전개를 수리로서 해석하고 그 장래를 예시하였으며, 또 《관물내외편(觀物內外編)》 2편에서 허심(虛心), 내성(內省)의 도덕수양법을 설명하였다. 또한 자유로운 시체(詩體)의 시집(詩集)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20권)의 작품이 있고, 《어초문답(漁樵問答)》(1권) 등이 있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소옹 관련 한시

清夜吟(청야음)

毛施淑姿工嚬姸笑 (모시숙자공빈연소)

毛施淑姿工嚬姸笑(모시숙자공빈연소)

毛 터럭 모 | 施 베풀 시 | 淑 맑을 숙 | 姿 맵시 자 | 工 공교할 공 | 嚬 찡그릴 빈 | 姸 고울 연 | 笑 웃을 소 |

毛薔(모장)과 西施(서시)는 자태가 아름다워 공교하게 찡그리고 곱게 웃었다.

毛薔(모장)과 西施(서시)는 찡그리는 모습도 예쁘고 웃는 모습은 말할 나위 없이 고왔다. 越王(월왕) 句踐(구천)이 사랑했던 毛薔(모장)과 또 월나라 여인 西施(서시)는 절세미인으로서 찡그리는 모습조차 아름다워 흉내 낼 수 없었거늘 하물며 그 웃는 얼굴이야 얼마나 아름다웠으랴. ≪莊子(장자)≫에 보면 서시는 찌푸린 얼굴조차 아름다웠다는 말을 못생긴 여자가 듣고, 미인은 항상 얼굴을 찌푸린다고 생각하여 얼굴을 찌푸리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다.

[출전]
千字文(천자문)

蘇軾 (소식, 1036~1101)

소식(蘇軾, 1036.12.19~1101.7.28)

異名: 호 동파거사(東坡居士), 자 자첨(子瞻), 애칭(愛稱) 파공(坡公), 파선(坡仙)
국적: 중국 북송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주요작품: 적벽부(赤壁賦)


중국 북송 때의 제1의 시인.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 고 해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켰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출생. 자 자첨(子瞻), 호 동파거사(東坡居士), 애칭(愛稱) 파공(坡公) ·파선(坡仙), 이름 식(軾). 소순(蘇洵)의 아들이며 소철(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리었다. 송나라 제1의 시인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과거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 수(歐陽修)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실시되자 ‘구법당(舊法黨)’에 속했던 그는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

천성이 자유인이었으므로 기질적으로도 신법을 싫어하였으며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재앙을 불러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서울로 호송되어 어사대(御史臺)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이 때 나이 44세였다. 심한 취조를 받은 뒤에 후베이성[湖北省]의 황주(黃州)로 유배되었으나, 50세가 되던 해 철종(哲宗)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의 대관(大官)을 역임하였다.

황태후(皇太后)의 죽음을 계기로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자 그는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휘종(徽宗)의 즉위와 함께 귀양살이가 풀렸으나 돌아오던 도중 장쑤성[江蘇省]의 상주(常州)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畵)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좌담(座談)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소식(蘇軾) 관련 한시

驪山(여산)
題西林壁(제서림벽)
彭城夜宿燕子樓夢盼盼因作此詞(팽성야숙연자루몽반반인작차사)

毛遂自薦 (모수자천, Máosuìzìjiàn)

毛遂自薦(毛遂自荐,모수자천,MáoSuìzìjiàn)

毛遂自荐(MáoSuìzìjiàn)

毛 털 모 | 遂 드디어 수,따를 수 | 自 스스로 자 | 薦 천거할 천,꽂을 진


모수(毛邃)가 스스로 천거(薦擧)했다는 뜻으로, 자기(自己)가 자기(自己)를 추천(推薦)하는 것을 이르는 말. 오늘날에는 의미가 변질되어 일의 앞뒤도 모르고 나서는 사람을 비유(比喩)함.

Volunteer one’s services


《사기(史記)》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에 나오는 말로, 본래는 어려운 일을 당하여 스스로 그 일을 맡고 나선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차츰 의미가 변질되어 일의 전후도 모르고 나서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전국시대에 진(秦)이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조왕은 평원군(平原君)을 초(楚)나라에 보내 합종(合從)을 맺음으로써 이를 격퇴하려 하였다. 평원군은 출발에 앞서 문하에 출입하는 식객 중 20명을 뽑아 같이 가려 했는데, 19명을 선발하고 적당한 사람이 없어 1명을 채우지 못했다. 이때 식객 중에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가 끼기를 청하였다[毛遂自薦]. 그것을 보고 평원군이 말하였다.

"당신은 내게로 와 몇 년이나 되었소?" 모수가 3년 되었다고 대답하자, 평원군은 다시 물었다. "뛰어난 인물이 세상에 있는 것은 송곳이 부대자루에 있는 것과 같아서 송곳의 끝이 밖으로 삐져 나오듯이 그 뛰어남이 저절로 드러난 법이오[囊中之錐]. 그런데 그대는 내 문하에 있은 지 3년에 당신의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소." 그러자 모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래서 이제 주머니에 넣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나를 부대 속에 넣어 주기만 하면 끝만이 아니라 그 자루까지도 보여줄 것입니다." 결국 평원군은 모수를 데리고 초나라로 갔다. 초왕과의 회담에서 식객 19명이 모두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평원군은 마침내 모수에게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모수는 칼을 빼어든 채 초왕의 면전으로 나아가 "당신은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지만 지금 당신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은(殷)의 탕왕(湯王)이나 주(周)의 문왕(文王)이 패업을 이룬 것은 군사가 많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초나라는 땅도 비옥하고 군사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진나라 군사에게 종묘를 위협받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합종은 초나라도 위한 것이지 조나라만 위한 것은 아닙니다" 하고 설득하여 마침내 합종을 성공시켰다. 일을 마무리하고 조나라로 돌아온 평원군은 이후 모수를 상객(上客)으로 모시고 후하게 대접했다 한다.

[출전]
史記(사기) : 平原君虞卿列傳(평원군우경열전) |


관련 한자어

유의어

自畵自讚(자화자찬) | 自告奋勇(자고분용) |

참조어

囊中之錐(낭중지추) | 三寸之舌(삼촌지설) |


史記(사기) : 平原君虞卿列傳(평원군우경열전) |

矛盾 (모순, máodùn)

矛盾(모순)

矛盾(máodùn)

矛 창 모 | 盾 방패 순,사람 이름 돈,벼슬 이름 윤 |


'창과 방패(防牌)'라는 뜻으로, 말이나 행동(行動)의 앞뒤가 서로 일치(一致)되지 아니함

1. [相抵之处]conflict 2. [哲学]contradiction 3. uncertain


논리학에서는, 두 개의 개념이나 명제(命題) 사이에 의미 내용이 서로 상반되는 관계를 말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에 무기 상인이 있었다. 그는 시장으로 창과 방패를 팔러 나갔다. 상인은 가지고 온 방패를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 방패를 보십시오. 아주 견고하여 어떤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창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여기 이 창을 보십시오. 이것의 예리함은 천하 일품, 어떤 방패라도 단번에 뚫어 버립니다." 그러자 구경꾼 중에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 예리하기 짝이 없는 창으로 그 견고하기 짝이 없는 방패를 찌르면 도대체 어찌 되는 거요?" 상인은 말문이 막혀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다가 서둘러 달아나고 말았다.

楚人(초인)에 有(유) 盾與(순여) 矛者(모자)하여 譽之曰(예지왈)"吾盾之堅(오순지견)은 莫能陷也(막능함야)라"하고, 又譽其矛曰(우예기모왈)"吾矛之利(오모지리)는 於物(어물) 에 無不陷也(무불함야)니라"或曰(혹왈)"以子之矛(이자지모)로 陷子之盾(함자지순)이면 如何(여하)오."其人(기인)이 不能應也(불능응야)러라.

《한비자(韓非子)》 난일(難一) 난세편(難世篇)에 있는 고사(故事)로, 법지상주의자(法至上主義者)인 한비(韓非)가 유가(儒家)의 덕치주의를 비판한 우화이다.

유가에서 말하기를, ‘역산(歷山)의 농장에서 농지의 경계 때문에 분쟁이 있어 성인(聖人)인 순(舜)임금이 가서 몸소 일을 하였더니 1년에 분쟁이 사라지고, 황하지역에서 어장 문제로 분쟁이 있어 순임금이 가서 낚시질을 하였더니 이도 1년 만에 해결되었고, 동방의 이민족이 만드는 도기(陶器)가 조악(粗惡)하여 순임금이 가서 그릇을 만들었더니 이도 1년 만에 품질이 향상되었다. 이 모두가 순임금의 덕(德)에 의한 감화(感化)이다.’라고 하였다.

한비는 순임금이 유덕(有德)한 성인이라면 농부나 어부가 다투지 않을 것이요, 도기도 우량품으로 만들었다면 순임금이 덕을 베풀 여지가 있었겠는가. 순임금이 덕을 베풀어 분쟁이 해결되고 도기의 품질이 향상되었다는 것은 요(堯)임금에게 실정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순임금을 성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요임금의 치세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고, 요임금을 성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순임금의 덕화(德化)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마치 '창과 방패의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순임금의 치세를 칭송하고 있는 유가의 설을 논란한 것이다.

전통적 논리학에서는 같은 주어에 대하여 서로 부정하는 판단을 내린 것을 연립시킨 명제의 성질이다. 현대 논리학에서는 하나의 명제와 이의 부정이 동시에 성립됨을 주장하는 명제이다.

[유래]
韓非子(한비자) : 難一(난일) |


관련 한자어

유의어

自己矛盾(자기모순) | 自家撞着(자가당착) | 二律背反(이율배반) |




矛(모,máo) 세모진 창. 끝이 꼬부라진 긴 창(槍). 2장(丈) 정도(程度)의 나무 자루 끝에 갈고리처럼 옆으로 굽어진 칼날이 달림. 옛날, 주(主)로 병거(兵車)에 세우고 다녔음. 구리. 쇠 따위로 만들었음. 추모(酋矛) ∥ 矛戈(모과) | 矛戟(모극) ∥ 矛盾(모순) | 矛盾撞着(모순당착) |

戈(과,gē) 창. ①중국(中國) 고대(古代)에서 쓰인, 갈고리 모양으로 된 무기(武器)의 하나. 자루 끝에 쌍날이 달렸음. 거의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쇠로 만든 것은 적음. 은(殷)나라 때부터 쓰기 시작(始作)하였음 ②우리나라에서 쓰인 끝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 긴 창(槍). 6자 정도(程度)의 나무 자루 끝에 두 개의 칼날, 즉 곧게 뻗은 7치 반(半)의 원(援)과 옆으로 뻗은 6치의 호(胡)가 달림. ∥ 戈殳(과수) | 戈矛(과모) |

槍(창,qiāng) ①옛날 무기(武器)의 한 가지. 긴 나무 자루 끝의 양쪽에 칼날이 있는 뾰족한 쇠가 달렸음. 직창(直槍)ㆍ구창(鉤滄)ㆍ관창(管槍)ㆍ십문자창(十支字滄) 등(等)이 있음 ②투창(投滄)에 쓰는 기구(器具). 남자용(男子用)은 길이 2.5m, 무게 800g이며 여자용(女子用)은 길이 2.2m, 무게 는 600g 이상(以上)임. 과모(戈矛)ㆍ과수(戈受) ∥ 槍刃(창인) |

戟(극,jǐ) ①중국(中國) 고대(古代)에 쓰인, 독특(獨特)한 갈고리 무기(武器)의 하나. 과(戈)와 비슷하나, 자루 끝에 날카로운 날이 선 창끝을 겸(兼)한 병기(兵器)임. 청동으로 만든 것보다 쇠로 만든 것이 많음 ②(옛날 우리나라에서 무기(武器)로 쓰인)끝이 세 갈래로 나누어진 긴 창(槍). 6자 정도(程度)의 나무 자루 끝에 3개의 칼날, 곧 7치 반의 원(援)ㆍ6치의 호(胡)ㆍ6치의 자(刺)가 달림 |

戣(규,kuǐ) 양지창(兩枝槍). 끝이 둘로 갈라진 창. |

矟(삭,shuò) 삼지창. |

杸(수,shū) 팔모진 창. |


韓非子(한비자) : 難一(난일) |

蘇小小 (소소소, Su Xiaoxiao)

蘇小小(소소소)

異名: 쑤샤오샤오, Sū Xiǎoxiǎo, Su Xiǎojun


중국의 역대 미인 중에 최고로 꼽는 4대 미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 4명을 4대 미인으로 꼽는다. 이런 4명의 미인가운데 중국인들은 역시 나라를 보다 확실하게 망하게 한 서시를 최고의 미인으로 꼽는다고 한다. 그 서시가 항주 출신이라는 데서, 중국의 항주는 미녀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서시만큼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오늘날까지 항주를 비롯한 중국 남부에서 사랑을 받는 항주미인이 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소소소(蘇小小)이다. 아마도 몸집이 크지 않고 아담해서 소소(小小)라는 이름을 얻었을 이 아가씨가 살던 시기는 남제(南齊 479-502)시대로서. 당나라가 망한 뒤에 양자강 남쪽에서 수많은 왕국들이 교대하던 그런 시기였다.

그녀는 어려서 부모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서령교(西泠橋) 부근의 이모집에서 자랐는데, 궁핍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기생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지방에서 가장 아름답고 총명한 데다, 시와 노래를 잘 불렀던 재기가 넘치는 여자였기에 곧 수많은 남성들의 연모의 대상이 된다. 하루는 소소가 수레를 타고 서호 부근을 구경하다가 호방한 풍모를 갖춘 청년을 만났다. 그는 한 필의 푸른 준마(청총마:靑驄馬)에 올라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소소는 그의 빼어난 모습에 한 눈에 마음을 빼앗겼다. 청년도 수레(油壁香車)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소소를 보자마자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 청총마를 타고 수레를 쫓아왔다. 소소는 蘇小小歌 또는 同心歌라고 하는 다음 노래를 불렀다.

첩승유벽거(妾乘油壁車)
랑과청총마(郞跨靑驄馬)
하처결동심(何處結同心)
서릉송백하(西陵松栢下)

첩은 유벽거를 타고 있고,
낭군은 청총마에 올라 계시니
어느 곳에서 마음을 함께 나눌까요?
서릉의 송백 아래에서나.

-남제南齊 고악부古樂府 '蘇小小歌'

자기 집이 서릉 숲에 있으니 알아서 찾아오라는 유혹의 노래였다. 소소는 노래를 부른 후 수레를 타고 가버렸다. 그 청년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 예물을 준비하고 서령교 입구로 소소를 찾아왔다. 청년은 재상이었던 완도(阮道)의 아들 완욱(阮郁)으로, 두 사람은 깊은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여자의 신분이 기생임을 안 완욱의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하며 그를 서울로 불러들이자, 소소는 그 이후부터 온종일 외출을 삼간 채 집안에서 슬퍼하기만 한다.

시를 잘 짓고 노래를 잘하는 소소의 명성은 계속 솟아올랐지만 그녀는 아무나 부른다고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래 몸이 허약한데다 완욱이 떠난 후 상심이 커지면서 결국 병이 깊어져 겨우 열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그는 유언을 통해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서호 변 서령교(西泠橋) 옆에 묻어달라고 한다. 그런데 소소가 죽고 나서 3일 후 갑자기 심부름꾼이 말을 타고 나타나 소소를 찾는데, 활주자사(滑州刺史) 포상공(鮑相公)이 그녀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포상공, 즉 포인(鮑仁)은 그녀가 비범함을 알아보고 은자 100냥을 주고 뒷바라지하여 서울로 보낸 선비였다.

소소가 사흘 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포인(鮑仁)은 소복을 입고 황급히 달려와 그녀의 관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소소소여! 당신은 진정으로 혜안을 지닌 여자였습니다. 나 포인이 세상에 나올 수가 있었던 것은 당신과 같은 지기가 아니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나의 지기가 없으니 누구에게 공명을 이룬 것을 자랑하겠습니까?"

포인은 비통한 마음을 안고 그녀의 유언에 따라 서령교 옆에 좋은 땅을 골라 그녀를 묻고 묘비명을 써주었다.

鮑仁이 떠나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녀는 자살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情感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으로 더 큰 걸음을 내디뎠다. 자신의 미색을 길거리에 드러내어 정갈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높은 담장을 비웃었다. 그녀는 정절보다 아름다움을 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남성의 세계가 그녀를 에워싸고 무상한 기쁨과 노여움으로 선회토록 했다. 끝내 중병에 걸려 생명의 불꽃이 다할 때가 되었으나 그녀는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젊은 나이이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고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죽음의 신이 19세의 나이에 다가온 것은 하늘이 자신에게 완벽함을 선사하기 위함이라고 여겼다.


관련한시

蘇小小墓(소소소묘) 李賀(이하)

幽蘭露 如啼眼 (유란로 여제안)
無物結同心 (무물결동심)
煙花不堪剪 (연화불감전)
草如茵 松如蓋 (초여인 송여개)
風爲裳 水為佩 (풍위상 수위패)
油壁車 夕相待 (유벽거 석상대)
冷翠燭 勞光彩 (냉취촉 로광채)
西陵下 風吹雨 (서릉하 풍취우)

난초에 맺힌 이슬 그윽하니, 눈물 머금은 눈망울 같구나.
무엇으로 마음을 맺으랴,
아련한 꽃을 꺾을 수도 없으니.
풀이 자리요, 솔 그늘이 덮개일세.
바람을 치마 삼고 물소리로 패옥 삼네.
유벽거를 타고서 저녁까지 기다려봐도
차가운 도깨비불만 헛되이 빛을 발하고
서릉 다리 아래엔 바람이 비를 몰아오누나.

蘇小小歌1(소소소가1)
張祜(장호)

車輪不可遮 (차륜불가차) 수레바퀴는 막을 수 없고
馬足不可絆 (마족불가반) 말 발굽은 동여맬 수 없도다
長怨十字街 (장원십자가) 십자로 길이 원망스러우니
使郎心四散 (사낭심사산) 낭군으로 하여금 마음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는구나

蘇小小歌2(소소소가2)
張祜(장호)

新人千里去 (신인천리거) 새 사람은 천리로 가버리고
故人千里來 (고인천리래) 옛 사람은 천리에서 오는구나.
剪刀橫眼底 (전도횡안저) 가위는 눈 밑에 빗겨 있으니
方覺淚難裁 (방각루난재) 방금 깨닫건대 눈물은 자르기 힘들구나.

蘇小小歌3(소소소가3)
張祜(장호)

登山不愁峻 (등산불수준) 산을 오름에 높음을 근심하지 않고
涉海不愁深 (섭해불수심) 바다를 밟음에 깊음을 근심하지 않는다네.
中擘庭前棗 (중벽정전조) 뜰 앞의 잣나무 속 쪼개어서
敎郎見赤心 (교낭견적심) 낭군에게 붉은 마음 보여서 가르치겠네.


中國美人

서시(西施) | 왕소군(王昭君) | 초선(貂蟬) | 양귀비(楊貴妃) | 趙飛燕(조비연) | 蘇小小(소소소) | 향비(香妃) |

目不忍見 (목불인견)

目不忍見(목불인견)

딱한 모양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음.

目不識丁 (목불식정)

目不識丁(목불식정)

目 눈 목 | 不 아닐 불, 아닐 부 | 識 알 식, 적을 지, 깃발 치 | 丁 고무래 정, 장정 정 |

고무래를 보고도 정자를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아주 무식(無識)하다는 뜻. 또는 그러한 사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Not to know A from a windmill


신당서(新唐書) 張弘靖傳(장홍정전)에 실린 이야기다.

당(唐)나라 목종(穆宗) 시기, 정치는 부패하고 관리들의 생활은 방탕하기 짝이 없었다. 장홍정(張弘靖)이란 사람은 못나고 무식하며 행동(行動) 또한 오만불손(傲慢不遜)했다. 그러나 부친인 장연상(張延賞)이 조정에 끼친 공적이 많아 그 덕분으로 그의 벼슬길은 매우 순탄했다. 그가 노룡(盧龍)의 절도사(節度使)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부하들과 어려운 병영생활을 하려 않고 가마를 타고 즐기며 군사들을 괴롭히고 교만했다.

그의 막료인 위옹과 장종후 등은 매일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즐겼다. 관아(官衙)를 나서고 돌아올 때에는 앞뒤에 호위를 세우고, 등불을 환하게 밝히며 추태를 부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믿고, 하급 군관들이나 사병들은 아예 안중에 두지도 않았으며, 항상 그들은 때리고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 까닭으로 부하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자 오히려 그들은 꾸짖으며 '지금은 태평성대이므로 천하에는 전쟁이 없다. 너희들이 아무리 두 석 무게의 석궁을 끌어 당길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丁자 하나 아는 것만도 못하다[汝輩挽得兩石力弓, 不如識一丁字]'라고 하였다.

참다 못한 부하 관리들이 반란을 일으켜 장홍정을 잡아 가두자,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장홍정의 직책을 박탈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그놈이야말로 목불식정이로고.”

目不識丁(Not to know A from a windmill) 이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新唐書(신당서) 張弘靖傳(장홍정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불학무식(不學無識) | 菽麥不辨(숙맥불변) | 魚魯不辨(어로불변) | 一文不知(일문부지) | 一文不通(일문불통) | 一字無識(일자무식) | 一字不識(일자불식) | 全無識(전무식) | 判無識(판무식) |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
¶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다.

반의어·상대어

¶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

謀事在人 (모사재인)

謀事在人(모사재인)

謀 꾀 모 | 事 일 사 | 在 있을 재 | 人 사람 인 |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에게 달렸다는 말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謀事在人成事在天(모사재인성사재천) | 謀事在人(모사재인) | 成事在天(성사재천) |

謀事在人成事在天 (모사재인성사재천)

謀事在人成事在天(모사재인성사재천)

謀 꾀할 모 | 事 일 사 | 在 있을 재 | 人 사람 인 | 成 이룰 성 | 事 일 사 | 在 있을 재 | 天 하늘 천 |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인데,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말.

Man proposes, God disposes.


일을 해결하려고 꾀를 내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운수에 달렸다는 뜻이다. 인간이 노력하여 일을 이루어내는데 도움을 얻지 못하여 이루지 못하는 일도 있다는 말이다.

중국 원(元)나라 때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삼국시대 촉한(蜀漢:220∼263)의 정치가이자 전략가인 제갈 량(諸葛亮:181∼234)의 말에서 유래한다.

제갈 량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182∼252)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위(魏)나라 조조(曹操:155∼220)의 대군을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대파하였다. 촉한의 제1대 황제 유비(劉備:161∼223)는 제갈 량을 재상에 등용하였다. 유비가 죽은 뒤 제갈 량은 다시 오나라와 손잡고 위나라와 항쟁하였는데, 위나라 사마 의(司馬懿:179∼251)의 군대를 호로곡이라는 계곡으로 유인하여 불을 질러 공격하는 화공(火攻)으로써 몰살할 수 있었으나 그순간 하늘에서 소나기가 내려 계획을 이룰 수 없었다. 제갈 량은 몹시 탄식하면서 "계략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어서 강제로 할 수 없다[謀事在人 成事在天 不可强也]"라고 하였다.

사람이 힘써서 일을 꾀하는데, 그 일의 성사여부는 오로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謀事在人成事在天(모사재인성사재천) | 謀事在人(모사재인) | 成事在天(성사재천) |

未能免俗 (미능면속)

未能免俗(미능면속)

未能免俗[wèinéngmiǎnsú]

未 아닐 미 | 能 능할 능, 견딜 내 | 免 면할 면, 해산할 문 | 俗 풍속 속 |

아직도 속(俗)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뜻으로, 한번 물든 속물근성(俗物根性)은 버리기 어렵다는 말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편의 이야기.

위진남북조시대의 진(晉)나라 사람 완함(阮咸)은 숙부인 완적(阮籍)과 더불어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다. 완함과 완적은 남쪽에 이웃하여 살았고, 다른 완씨 일가는 북쪽에 이웃하여 살았다. 사람들은 완함과 완적이 남쪽에 산다 하여 남완(南阮)이라 부르고, 북쪽의 완씨 일가는 북완(北阮)이라 불렀다. 권력과 부를 비웃으며 전원에 묻혀 살던 완함과 완적은 가난하였고, 북완은 부유하였다.

그 무렵에는 7월 7일이 되면 겨울옷을 꺼내 햇볕에 말리는 풍습이 있었다. 북완은 당연히 화려한 옷을 내다 말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서로 잘 사는 티를 내려고 경쟁하는 것 같아 보였다. 가난한 남완은 내다 말릴 만한 변변한 옷이 없었다. 어느 해 7월 7일이 되자 북완은 경쟁하듯 화려한 옷을 내다 말렸다. 항상 북완을 경멸해 오던 완함은 장대 위에 굵은 베로 짠 초라한 짧은 바지를 걸어 놓고 햇볕에 말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사람이 묻자, 완함은 웃으며 "속된 습속을 버리지 못하여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라오[未能免俗, 聊復爾耳]"라고 대답하였다.

이로부터 미능면속은 속물 근성을 버리지 못함을 비웃는 뜻의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이 고사는 《세설신어》 가운데 세속에 구애되지 않고 제뜻대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임탄(任誕)'편에 실려 있다.


출전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 晉書(진서) 阮咸傳(완함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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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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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木鷄 (목계)

목계 (木鷄)

이것은 장자의 달생편에 나오는 우화로서 옛날 중국의 주나라 선왕이 닭싸움을 좋아하여 닭을 잘 훈련시키는 [기성자]라는 사람을 불러 닭 한 마리를 주면서 싸움을 잘하는 닭으로 훈련시키기를 명하였는데, 열흘이 지난 후에 왕이 [기성자]를 불러 "훈련 상황이 어떠한가?" 물으매, 답하기를 ”아직은 멀었습니다. 닭이 허장성세가 심한 것이 싸움할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래서 또 열흘이 지난 후 다시 닭의 훈련상태를 물으니 답하기를 "상대 닭을 보기만 하면 싸우려 하는 것이 훈련이 덜 되었습니다." 고 하여 다시 또 열흘이 지나 다시 물으니, 답하기를 ”아직도 상대 닭을 보면 살기를 번득이는 것이 훈련이 덜 되었습니다".고 하여 다시 열흘 후 닭의 훈련 상태가 어떠한지 물으매, 답하기를 "이제는 훈련이 거이 되었습니다.”고 하며, 말하기를 "닭이 목계(木鷄)와 같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상대 닭이 살기를 번득이며 싸움을 하려 달려들다가도 마치 목계(木鷄)와 같으므로, 덕이 충만하여 그 모습만 보아도 상대방은 등을 돌리고 도망을 칩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毛骨悚然 (모골송연)

毛骨悚然(모골송연)

毛骨悚然[máogǔsǒngrán]

毛 터럭 모 | 骨 뼈 골 | 悚 두려울 송 | 然 그럴 연, 불탈 연 |

주 끔직한 일을 당(當)하거나 볼 때, 두려워 몸이나 털이 곤두선다는 말

make sb’s flesh creep; with one's hair standing on end—absolutely terrified


화감(畵鑒) 당화(唐畵)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중기, 소를 잘 그리기로 유명한 대숭(戴嵩)이라는 화가가 있었다. 그는 소를 그리기 위해 소의 무리속으로 들어가 소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소의 생활 습성을 깊게 연구하였다. 그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릴 때면, 그림 속의 소는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쳤으므로, 사람들은 크게 감동하였다. 특히 그의 투우도(鬪牛圖)는 소들이 들에서 활동하고, 장난하며 싸우는 모습 등을 그린 그림으로서, 전체 그림에 야성(野性)의 아름다움이 충만해 있다.

원(元)나라의 대화가(大畵家)들은 그가 그린 싸우는 소들의 모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마리의 소들이 날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온몸에 소름이 끼치게 하고 머리 끝이 솟게 한다[二牛相鬪, 毛骨悚然]. 그들의 공격하려는 자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차가운 기운이 뼈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게 한다.

毛骨悚然(Hair rising and bones feeling) 이란 끔찍스러워서 몸이 으쓱하며 털끝이 쭈삣하여짐을 뜻한다.


출전

화감(畵鑒) 당화(唐畵)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胆战心惊[dǎnzhànxīnjīng] [성어] 담이 떨리고 심장이 놀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