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必子孫能盡守 (미필자손능진수)

積金以遺子孫 未必子孫能盡守(적금이유자손 미필자손능진수)

돈을 모아 자손에게 넘겨준다 하여도 자손이 반드시 다 지킨다고 볼 수 없다.

자손을 위한다면 자손에게 돈을 물려주지 말고 덕을 쌓아야 한다는 뜻.


司馬溫公曰, 積金以遺子孫 未必子孫能盡守, 積書以遺子孫 未必子孫能盡讀, 不如 積陰德於冥冥之中 以爲子孫之計也。

사마온공은 말했다. "돈을 모아 자손에게 넘겨준다 하여도 자손이 반드시 다 지킨다고 볼 수 없으며, 책을 모아서 자손에게 남겨 준다 하여도 자손이 반드시 다 읽는다고 볼 수 없다. 남모르는 가운데 덕을 쌓아서 자손을 위한 계교를 하느니만 같지 못하다."

- 司馬溫公(사마온공), 明心寶鑑 繼善篇 (명심보감 계선편)


참조

I would as soon leave my son a curse as the almighty dollar.
아들에게 돈을 물려주는 것은 저주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Andrew Carnegie (앤드류 카네기)

앤드류 카네기는 자손이 지킨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을 넘어 유산을 남겨주는 것이 저주라고 까지 표현함.


사마온공, 명심보감, 명심보감:계선편

司馬溫公, 明心寶鑑, 明心寶鑑:繼善篇

美風良俗 (미풍양속)

美風良俗(미풍양속)

아름답고 좋은 풍속.

未知生焉知死 (미지생언지사)

未知生焉知死(미지생언지사)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느냐?

While you do not know life, how can you know about death?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未知生焉知死(미지생언지사) |


관련 문구

참조어

¶ Memento mori (Latin)
Remember your mortality.
죽음을 기억하라.

薪桂 (미주신계)

米珠薪桂(미주신계)

米珠薪桂[mǐzhūxīnguì]

米 쌀 미 | 珠 구슬 주 | 薪 섶 신, 땔나무 신 | 桂 계수나무 계 |

쌀은 구슬 보다 비싸고, 땔감은 계수나무(桂樹-)보다 비싸다는 뜻으로, 물가가 치솟아 생활(生活)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르는 말


'쌀은 주옥(珠玉)만큼 비싸고 땔나무는 계수나무 가격과 같다'라는 뜻으로, 식옥취계(食玉炊桂)라고도 한다.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실려 있는 다음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전국시대, 소진(蘇秦)은 초(楚)·한(韓)·위(魏)·조(趙)·연(燕)·제(齊)나라를 종적으로 연합하여 강대한 진(秦)나라와 대결할 공수동맹을 맺도록 하는 합종책(合從策)을 주장하였다.

그가 초나라의 회왕(懷王)에게 합종책을 실행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초나라에 갔을 때였다. 그는 사흘을 기다린 끝에 겨우 초회왕을 알현할 수 있었으나, 초회왕이 자신을 소흘하게 대접하는 것 같아 불쾌하였다. 소진은 초회왕이 나타나자 일부러 당장 떠나겠다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의아하게 생각한 초회왕이 그 까닭을 묻자, 소진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초나라의 식량은 주옥(珠玉)보다 비싸고, 땔감은 계수나무보다 비쌉니다[楚國之食貴于玉 薪貴于桂]. 제가 주옥같이 비싼 양식을 먹고, 계수나무처럼 비싼 땔감을 태우면서, 어찌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초나라의 회왕은 소진에게 귀빈 대우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米珠薪桂란 치솟아 오르는 물가를 비유한 말이며, 영어에는 Up corn, down horn(곡식 값이 오르면 쇠고기 값이 내린다) 라는 속담이 있다.


출전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食玉炊桂(식옥취계) | 薪桂米珠[xīnguìmǐzhū, 신계미주] |

반의어·상대어

价廉物美[jiàliánwùměi, 가렴물미] |

美人計 (미인계, měirénjì)

美人計(미인계)

美人计(měirénjì)

美 아름다울 미 | 人 사람 인 | 計 셀 계 |


아름다운 여성을 미끼로 하여 사람을 꾀는 계략(計略).


三十六計(삼십육계) 敗戰計(패전계) 제31계 미인으로 유혹하다.

삼십일계부터 삼십육계까지는 '敗戰計(패전계)'로 묶여있다. 이는 이미 전쟁에서 승기를 바랄 수 없는 경우,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계략들이 모여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앞선 30가지의 계략들을 모두 시도해 보고, 그러고도 승기가 보이지 않을 경우에 쓰는 것이다. 무작정 도망치면서 '36계 줄행랑이 최고다'라는 식이 아니다.

원문에는 다음과 같이 풀이되어 있다.
"병력이 강한 적이라면, 장수에게 작용한다. 장수가 지혜로운 자라면, 정서적인 약점을 공략한다. 장수가 약하고 병사들의 사기가 흩어지면, 스스로 붕괴된다. 적의 약점에 편승하여 힘쓴다면, 아군에게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다.[兵强者,攻其將;將智者,伐其情.將弱兵頹,其勢自萎.利用御寇,順相保也.]"

미인계에 관한 사례는 많다. 고대로부터 하왕조를 멸망으로 몰고 간 말희, 은왕조를 망하게 한 달기, 주왕조를 망조들게 한 포사, 오나라를 망하게 한 서시, 동탁을 죽음으로 몰고간 초선, 당현종을 죽게 만든 양귀비 등 미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지도자 들에게 주색을 경계하기 위한 이야기로 많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살펴보자. 초한쟁패에서 끈질기게 항우에게 시비를 걸어, 결국엔 항우를 물리치고 漢(한)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 한나라 내부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황제의 위에 오른 후, 흉노족 토벌에 나섰다. 항우와 유방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 흉노족은 묵특 선우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리고는 국경을 수시로 침입해 오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유방은 흉노족의 계략에 말려들어 작은 平城(평성)에서 40만 흉노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적은 병력으로 성에 틀어박혀 꼼짝없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진평이 계략을 내놓는다. 진평의 계략은 다음과 같다.

흉노의 장, 묵특은 여색을 아주 밝히는 자이다. 여자를 좋아하면서도 부인에게는 꼼짝을 못하고 잡혀 살았다. 그래서 진평은 화가에게 美人圖(미인도) 한 장을 그리게 하여, 보물과 함께 묵특의 부인에게 가지고 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묵특 선우께서 미인을 좋아한다 하시기에 미인을 바칠 생각인데, 마음에 드실지 몰라 먼저 그림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그림을 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곧 본인을 보내드릴 터이니, 대왕께 여쭈어 주십시오."

그러자 묵특의 부인은 유방이 이 그림같이 꽃같은 미인을 바친다면 묵특의 총애를 잃을까 싶어, 묵특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한 혹시 유방이 미인을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싶어 묵특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한나라를 친다고 해도 우리가 한나라에서 살수도 없는 일이니, 군사를 물리는게 좋을듯 하옵니다."
이에 묵특 선우는 그 말을 타당히 여겨, 군사를 돌렸다. 유방, 구사일생의 순간이었다.

겨우 살아 돌아온 유방이었으나, 흉노는 여전히 그의 골칫거리였다. 묵특 선우는 대군을 몰고 국경지대에 계속 침입해 왔던 것이다. 이에 유방은 군사를 일으키고자 진평과 유경에게 상의를 했다. 유경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천하를 평정하느라 너무 오랜 세월을 싸워왔습니다. 이제 다시 묵특을 무력으로 정벌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종실의 공주 한사람을 묵특에게 시집보내 화친을 맺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에 유방은 유경의 계략에 따라 공주를 시집보내고, 매년 조공을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묵특과 화친을 맺게 된다. 묵특은 잠시 침략을 멈추었으나, 국경지대에서 흉노에게로 투항하는 자들은 계속 노략질을 하곤 했다.

진평은 거짓 미인계를 써서 유방을 살렸고, 유경은 진짜 미인계를 써서 흉노와 화친을 맺은 것이다.

密雲不雨 (밀운불우)

密雲不雨(밀운불우)

密 빽빽할 밀 | 雲 구름 운 | 不 아닐 불 | 雨 비 우

짙은 구름이 가득 끼었으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

교수신문에서 선정한 2006년 올해의 사자성어


2006년 | 올해의 사자성어 | 교수신문

美人薄命 (미인박명)

美人薄命(미인박명)

여자의 얼굴이 너무 빼어나면 삶이 순탄하지 않다는 말.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佳人薄命(가인박명) | 美人薄命(미인박명) |

靡恃己長 (미시기장)

靡恃己長(미시기장)

靡 아닐 미, 쏠릴 미 | 恃 믿을 시 | 己 몸 기, 자기 기 | 長 길 장 |

자신(自身)의 특기(特技)를 믿고 자랑하지 말아야 함. 그럼으로써 더욱 발달(發達)함.

[출전]
千字文(천자문)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莫談他短 靡恃己長(막담타단미시기장) |

民以食爲天 (민이식위천)

民以食爲天(민이식위천)

民 백성 민 | 以 써 이 | 食 밥 식, 먹을 식 | 爲 삼을 위, 할 위 | 天 하늘 천 |

백성은 음식을 하늘로 여긴다는 말.


사기(史記)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에는 한(漢)나라의 역이기(酈食其)라는 모사(謀士)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진(秦)나라가 멸망한 후, 한왕(漢王) 유방(劉邦)과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는 천하를 다투고 있었다. 항우는 우세한 병력으로 유방을 공격하였다. 이에 유방은 성고의 동쪽 지역을 항우에게 내주고자 하였다. 이때 유방의 모사였던 역이기는 식량 창고인 오창(敖倉)이 있는 그 지역을 지킬 것을 주장하며 다음과 말했다.

"저는 천(天)이 천(天)이라는 것을 잘 아는 자는 왕업을 이룰 수 있으나, 천을 천으로 알지 못하는 자는 왕업을 이룰 수 없다. 왕자(王者)는 백성을 천(天)으로 알고 백성은 먹을 것을 천(天)으로 안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방은 역이기의 말에 따라, 곧 전략을 바꾸었다. 民以食爲天이라는 말은 한서(漢書) 역이기전(酈食其傳)에도 실여 있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것 임을 뜻한다.


출전

사기(史記):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 한서(漢書):역이기전(酈食其傳)


http://ctext.org/shiji/li-sheng-lu-jia-lie-zhuan/zh

尾生之信 (미생지신)

尾生之信(미생지신)

미생의 信義(신의). 한번 약속을 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약속을 굳게 지킨다는 긍정적인 뜻과 고지식해서 융통성이 전혀 없다는 부정적인 뜻을 함께 지니고 있는 말이다.

춘추시대 魯(노)나라에 尾生이란 사람이 있었다. 남하고 약속을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키고자 하는 사나이였다.그런 미생이 어느 날 사귀는 여자와 개울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약속한 그날 그 시각에 맞춰 미생은 약속장소에 갔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는 동안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불어난 개울물에 그의 몸은 점점 물에 잠기게 되었다.

발목에서 무릎, 무릎에서 가슴으로 물이 차 올랐으나 그는 微動(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생은 여자와의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렸던 것이다.마침내 물이 머리까지 올라오자 미생은 橋脚(교각)을 부둥켜 안았지만 가엾게도 溺死(익사)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생긴 尾生之信이란 말은 두터운 신의를 비유하는 말로 사기 蘇秦列傳(소진열전)은 긍정적인 뜻으로 전하고 있다.전국시대 遊說家(유세가)로 유명한 소진은 燕(연)나라 왕에게 자기의 주장을 역설하면서 미생의 이야기를 꺼내고는 신의가 두터운 사나이의 본보기로 칭찬했다.

그러나 莊子(장자)의 평가는 영 딴판이다. 장자 도척편은 이렇게 미생을 혹평하고 있다. “이런 인간(미생)은 책형(기둥에 묶어 세우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당한 개,물에 떠내려가는 돼지, 깨진 사발을 들고 동냥하는 거지와 똑같다. 사소한 명목에 구애되어 소중한 목숨을 소홀히 하고 참다운 삶의 도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美辭麗句 (미사여구)

美辭麗句(미사여구)

아릅답게 꾸민 말과 글귀

彌縫 (미봉)

彌縫(미봉)

터진 곳을 임시로 얽어맨다는 뜻. 빈구석이나 잘못된 것을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주선하여 꾸며대는 것을 말한다.

춘추시대 때, 주나라 환왕은 쇠약해진 주나라의 세력을 복구하고 실추된 위신을 挽回(만회)하기 위해 정나라를 치기로 했다. 그무렵 정나라 莊公(장공)은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어 천자인 환왕을 우습게 여기는 등 눈에 거슬리는 처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왕의 명을 받고 괵(虢)·채(蔡)·위(衛)·진(陳) 나라가 군대를 내놓았다. 환왕은 스스로 연합군의 우두머리가 되어군사를 총지휘하게 되었다.

정나라의 장공도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應戰(응전)태세를 갖춰놓고 연합군을 맞아 공격하기로 했다.

兩軍(양군)은 정나라 땅인 수갈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이때 정나라 공자 元(원)은 장공에게 진언했다.

『진나라는 국내정세가 어수선해서 左軍(좌군)인 진군은 싸울 기력이 없습니다. 먼저 진군을 공격한다면 반드시 敗走(패주)할 것입니다. 그러면 中軍(중군)은 흩어지고 채와 위의 右軍(우군)도 버티지 못하고 퇴각할 것입니다』

이때 정나라는 魚麗(어려)의 진을 쳤는데 兵車(병거)를 앞세워 보병을 뒤따르게 하고 병거와 병거사이는 보병으로 미봉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미봉이란 말을 쓰게 되었는데 이 싸움에서 정나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民貴君輕 (민귀군경)

民貴君輕(민귀군경)

백성이 존귀하고 임금은 가볍다

‘맹자’ 진심 편에 ‘백성이 존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볍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

2011년 교수신문이 선정한 희망의 사자성어. 새 정부 들어 관권이 인권 위에, 부자가 빈자 위에 군림하고, 힘센 자가 힘없는 자들을 핍박하는 불행한 사태가 심화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2011년에는 나라의 근본인 국민을 존중하는 정치, 국민과 소통하는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가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선정

文獻通考 (문헌통고) 馬端臨 (마단림)

文獻通考(문헌통고) 馬端臨(마단림)

중국(中國) 송(宋)나라 때의 법제. 경제(經濟) 등(等) 모든 제도(制度)에 관(關)한 기록(記錄). 두우(杜宇)의 『통전(通典)』을 기초(基礎)로 하여 이를 증보(增補)한 것으로 원(元)나라의 마단림(馬端臨)이 편찬(編纂)함. 중국(中國)의 제도(制度) 연구(硏究) 상(上) 필요(必要)한 책이며, 우리나라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편찬(編纂)은 이 책을 참고(參考)했음. 348권


348권. 높은 정치가의 견식과 역사가의 정신으로 전후 20년에 걸쳐 완성하여 1319년에 간행하였다. 당(唐)나라의 두우(杜佑) 저작인 《통전(通典)》, 송나라의 정초(鄭樵) 저작인 《통지(通志)》와 아울러 3통(三通)이라 불린다. 3통의 특징은, 《통전》은 예(禮)에 자세하고, 《통지》는 기전(紀傳)이 대부분이지만, 본서는 주로 경제 ·제도에 대해 기술하였다. 또, 앞의 둘이 당대까지의 기술인 데 대하여 본서는 남송의 영종(寧宗:재위 1194∼1224)대까지 기술하여 당 ·송의 변혁기를 포함하고 있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체제는 전부(田賦) ·전폐(錢幣) ·호구(戶口) ·직역(職役) ·정각(征榷) ·시적(市糴) ·토공(土貢) ·국용(國用)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 ·교사(郊社) ·종묘(宗廟) ·왕례(王禮) ·악(樂) ·병(兵) ·형(刑) ·경적(經籍) ·제계(帝系) ·봉건(封建) ·상위(象緯) ·물이(物異) ·여지(輿地) ·사예(四裔) 등 24항목으로 되어 있다.

無中生有 (무중생유)

無中生有(무중생유)

无中生有(wúzhōngshēngyǒu)

無 없을 무 | 中 가운데 중 | 生 날 생 | 有 있을 유


三十六計 敵戰計 第七計. 無에서 有를 창조하다. 본래 없던 일을 있다고 말하다. 없는 사실을 날조하다. 터무니없이 꾸며 대다.


'敵戰計(적전계)'의 敵은 '원수 적'이지만, '짝 적'으로도 해석된다. 즉 '필적하다'는 의미이며, '견줄만하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敵戰計'란 적과 병력이 비슷할 때 사용하는 계략을 뜻한다. 하지만 단순히 적과 병력이 비슷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사용하는 계략은 아니다. 적과 병력이 비슷해서 '어느 쪽도 섣불리 움직이기 힘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용되는 계략이 '敵戰計'인 것이다.

無에서 有를 창조하다. 원문의 풀이글은 다음과 같다.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속이는 것만은 아니다. 그 속이는 바를 실속있게 만드는 것이다. 無에서 有로, 虛에서 實로의 전환이 필요하다.[誑也,非誑也,實其所誑也.少陰,太陰,太陽.]"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三國志演義의 적벽대전. 그 적벽대전 직전의 吳의 대도독 주유는 후에 화근이 될 제갈량을 죽이고자 여러차례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제갈량을 죽여야한다는 주유의 결심은 확고해져 갔다. 그러다가 군사회의에서 주유가 제갈량에게 물었다.

"며칠 내에 조조와 싸우게 될 듯 싶소. 강에서 싸우자면 무슨 무기가 필요하겠소?"
"큰 강 위에서는 활과 화살이 주가 되어야겠지요."
"내 생각이 선생의 생각과 같소. 그러나 우리 군중에는 바로 그 화살이 부족하오. 수고스럽지만 선생께서 화살 10만개만 만들어 주시지 않겠소? 이것은 公的인일이니 거절하지 말아주시오."
"도독께서 부탁하시니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화살 10만개는 언제 쓰시려 하십니까?"
"열흘 안에 만들어 주실수 있겠소?"
"조조의 군사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열흘이나 허비하다가는 큰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그러면 며칠이나 걸릴 것 같소이까?"
"사흘이면 화살 10만개는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軍中(군중)에는 戱言(희언:농담)이 있을 수 없소!"
"어찌 감히 농담을 하겠습니까? 사흘 안에 화살 10만개를 조달하지 못하면 중벌을 받겠다는 軍令狀(군령장)이라도 써 드리겠소."

주유는 대단히 제갈량이 스스로 함정에 빠졌다며 대단히 기뻐했다. 제갈량이 사흘 안에 화살 10만개를 만들지 못하면 군령을 어긴 죄로 죽여버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노숙에게 일의 처리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노숙은 명령을 받고는 제갈량에게 갔다. 제갈량이 노숙에게 말했다.

"내가 자경(노숙)에게 누차 말하지 않았소? 공근(주유)에게 말하면 그가 반드시 나를 해치려 할 것이니 말하지 말라고. 그 덕에 내가 공경에 빠지게 되었으니, 자경이 나를 구해주어야겠소."
"공이 스스로 화를 불렀는데, 내가 어찌 구해드릴 수가 있겠소?"
"자경은 나에게 배 스무척만 빌려주시기 바라오. 배마다 30명의 군사가 있어야 하오. 배는 푸른 장막으로 둘러치고 그 속에 짚단 1천여단을 배 양쪽으로 나누어 쌓아 주오. 나에게 쓸 곳이 있소. 그러나 공근에게 또 알려서는 아니되오."

노숙은 그 뜻은 알 수 없었으나,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주유에게 제갈량은 대나무, 새깃, 아교(화살을 만드는 재료들)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약속한 배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주유는 의아해하며 어쨌거나 사흘 동안 기다려 보기로 했다.

노숙은 쾌속선 20척을 선발하여 제갈량이 말한대로 준비를 해두고 제갈량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첫째날, 제갈량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둘째날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 제갈량은 노숙을 찾았다.

"이제 화살을 가지러 갑시다."
"어디 가서 가져온다는 것이오?"
"물어볼 것 없이 가보면 아시게 될게요."

제갈량은 즉시 배를 긴 밧줄로 연결하게 한 다음 북쪽을 향해 이동했다. 이 날의 장강은 안개가 짙게 끼어 눈 앞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새벽 오경 무렵이 되자 배들은 조조의 수상영채 가까이 접근하게 되었다. 제갈량은 뱃머리를 서쪽으로 향하게 하고 배꼬리가 동쪽으로 향하게 하여 배를 한 줄로 늘어세웠다. 그리고 배 위에서 병사들에게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라 명했다. 노숙이 깜짝 놀랐다.

"조조의 병사들이 공격해 오면 어찌합니까?"
"공은 아무 걱정 말고, 나하고 술이나 드십시다."

한편 보고를 받은 조조는 이렇게 명령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쳐들어 온 것을 보면 반드시 매복이 있을 것이다. 절대로 가벼이 나가지 말고, 수군 궁노수를 동원하여 난전을 쏘도록 하라. 그리고 장료와 서황의 육상 궁노군 3천명씩을 대동하여 강변으로 나와 화살을 쏘아 돕도록 하라."

이리하여 조조의 궁노수 대략 1만여명이 강을 향해 화살을 쏘아 댔다. 화살은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제갈량은 이번에는 뱃머리와 배꼬리의 방향을 바꾼후 한층 더 힘차게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게 했다. 화살은 더욱 빗발치듯 쏟아졌다.

해가 높아져 안개가 걷힐 즈음 제갈량은 재빨리 배를 거두어 돌아가자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배의 모든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치게 했다.

"승상! 화살 고맙게 잘 쓰겠소!"

노숙이 가져온 쾌속선은 워낙에 빨라, 조조의 수군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제갈량이 노숙에게 말했다.

"배마다 5~6천개의 화살이 꽂혀있을 것이오.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10만개의 화살을 얻었소. 내일이라도 바로 조조의 병사들에게 쏘아 돌려줘도 될 것이오."
"선생은 참으로 神人(신인)이시오. 오늘 이렇게 짙은 안개가 낄 줄 아셨소이까?"
"장수가 되어 천문을 알지 못하고, 지리를 알지 못하고, 기문을 알지 못하고, 음양을 알지 못하고, 진도를 볼 줄 모르고, 병세에 밝지 못하다면 이는 용렬한 사람이오. 나는 이미 사흘 전에 오늘 짙은 안개가 낄 줄 알고 말미를 사흘로 잡은 것이오. 공근은 화살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나를 죽이려 했겠지만, 내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어찌 공근이 나를 죽일 수 있겠소?"

노숙은 가슴 깊이 감복했다. 돌아가자 노숙은 주유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그러자 주유는 크게 놀라 개연히 탄식했다.

"공명은 지략이 귀신 같소이다. 나는 따라가지 못하겠소."


관련 한자어

유의어

捕风捉影(bǔfēngzhuōyǐng): 말이나 일이 전혀 근거가 없다.

捕 사로잡을 포 | 风 바람 풍 | 捉 잡을 착 | 影 그림자 영 |

門前雀羅 (문전작라)

門前雀羅(문전작라)

門 문 문 | 前 앞 전, 자를 전 | 雀 참새 작 | 羅 벌일 라(나), 새그물 라(나) |

문 밖에 새 그물을 쳐놓을 만큼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짐을 뜻하는 말. 몰락한 사람 집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어져 한가한 것을 비유.


漢(한)나라 무제(武帝) 때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라는 충신이 있었다.

급암은 의협심이 강하고 성품이 대쪽 같아서 황제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다 하는 편이었다. 동료 대신들이 그 점을 나무라면, 급암은 이렇게 반박했다.

“폐하께서 이 사람이나 공들 같은 신하를 두심은 올바른 보필로 나라를 부강케 하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시고자 함인데, 누구나 듣기 좋은 말만 하여 성총(聖聰)이 흐려지기라도 한다면 그보다 더한 불충이 어디 있겠소? 그만한 지위에 있으면 설령 자기 한 몸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폐하를 욕되게 하진 말아야 할 것이오.”

그런 반면 정당시는 후덕하고 겸손하며 청렴한 인물이었다. 자기를 찾아온 손님은 문밖에서 기다리는 일이 없게 하고, 벼슬아치의 사명감으로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며, 봉록과 하사품을 받으면 손님이나 아랫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둘다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던 만큼 어질고 의협심이 강한 선비들을 좋아했다. 그들은 장관격인 九卿(구경)의 지위까지 오른 적도 있지만 너무 개성이 강한 탓에 경계의 대상이 되어 벼슬자리의 浮沈(부침)이 많았다.

급암은 한때 무제의 미움을 사 면직되기도 했고 정당시는 庶民(서민)으로 내려앉기도 했다.두 사람은 찾아오는 손님들을 극진히 맞았다. 정당시는 밑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손님이 왔을 때는 그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문전에서 기다리게 해서는 안된다. 예를 갖추어 따뜻하게 접대해야 한다.

이랬기 때문에 그들이 현직에 있을 때에는 찾아오는 손님들로 문앞이 저자를 이루었으나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있자 방문객들의 발길은 뚝 끊어졌다.

사기(史記)를 쓴 司馬遷(사마천)은 그들의 이야기를 쓴 뒤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급암과 정당시 같은 훌륭한 사람도 세력이 있으면 손님이 10배로 늘어나고 세력이 없어지면 그렇지 않았다.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翟公(적공)이란 사람도 正尉(정위)벼슬을 하자 손님이 문에 가득찼다. 그러나 면직을 당하자 문밖에 참새그물을 쳐놓을 만큼[門外可設雀羅] 사람들의 출입이 없어졌다. 적공이 다시 정위가 되자 손님이 줄을 이었다. 그래서 적공은 문앞에 이런 글을 써붙였다.

一死一生 卽知交情 (일사일생 즉지교정)
一貧一富 卽知交態 (일빈일부 즉지교태)
一貴一賤 卽見交情 (일귀일천 즉현교정)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곧 사귐의 정을 알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에 곧 사귐의 태도를 알며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곧 사귐의 정이 나타나네

門前雀羅란 문 앞의 참새 그물이라는 뜻으로 門可雀羅(문가작라)라고도 한다.


출전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門可雀羅(문가작라) | 門外可設雀羅(문외가설작라) | 門前雀羅(문전작라) |

동의어·유의어

門前成市(문전성시) | 門庭若市(문정약시) |

問鼎之大小輕重焉 (문정지대소경중언)

問鼎之大小輕重焉(문정지대소경중언)

솥의 무게를 묻는다는 말로 어떤 직위에 있는 인물의 자격을 묻고 퇴임을 압박한다는 말. 줄여서 문정(問鼎) 또는 문정경중(問鼎輕重)이라고도 함.

門前成市 (문전성시)

門前成市(문전성시)

권세 있는 집 문 앞에 찾아오는 손이 많아 마치 시장을 이룬 것 같음

無腸公子 (무장공자)

無腸公子(무장공자)

기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킴. 창자가 없다는 게를 가리킴.

聞一知十 (문일지십)

聞一知十(문일지십)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앎

物以類聚 (물이유취, wùyǐlèijù)

物以類聚(물이유취)

物以类聚(wùyǐlèijù)

物 만물 물 | 以 써 이 | 類 같을 류 | 聚 모일 취 |


'물건은 종류대로 모인다'라는 뜻의 고사성어로, 《주역》과 《전국책》 등에서 유래하였다. 끼리끼리 어울리다, 유유상종하다, 나쁜 사람들이 의기투합하여 한데 어울리다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유유상종과 같은 뜻으로, 우리말의 '끼리끼리 모인다'와 같은 표현이다. 인이군분(人以群分:사람은 같은 무리끼리 모인다)과 연결하여 '물이유취 인이군분'이라고 쓰이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주로 좋지 않은 사람들이 한 부류로 모인 것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주역》〈계사(繫辭)〉편의 "삼라만상은 같은 종류끼리 모이고, 만물은 무리를 지어 나누어지니, 이로부터 길함과 흉함이 생긴다(方以類聚, 物以群分, 吉凶生矣)"라는 구절에서 유래되었다.

《전국책》의 〈제책(齊策)〉편에 따르면, 전국시대 제나라의 순우곤(淳于髡)은 왕이 인재를 구한다는 말을 듣고는 하루에 7명이나 천거하였다. 왕이 순우곤에게 인재는 구하기 어려운 법인데 하루에 7명이나 천거한 것은 너무 많지 않냐고 말했다. 이에 순우곤은 물건은 각기 비슷한 부류가 있으며(物各有疇), 자신도 인재의 부류에 속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인재를 추천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또 《주역》〈문언(文言)〉편에는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은 위와 친하고, 땅에 근본을 둔 것은 아래와 친하니, 이는 각자가 그 비슷한 것을 좇기 때문이다(本乎天者親上, 本乎地者親下, 則各從其類也)"라는 구절이 있다. 물각유주(物各有疇)나 물각유류(物各有類), 방이유취(方以類聚), 물이군분(物以群分), 각종기류(各從其類)는 모두 같은 의미이며, 물이유취로 많이 쓰인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類類相從(유유상종) | 物各有疇(물각유주) | 物各有類(물각유류) | 方以類聚(방이유취) | 物以群分(물이군분) | 各從其類(각종기류) | 草綠同色(초록동색) |


周易(주역) | 전국책 | 끼리끼리 |

無忍不達 (무인부달)

無忍不達(무인부달)

無 없을 무 | 忍 참을 인 | 不 아닐 불, 아닐 부 | 達 통달할 달 |

참을성이 없으면 무엇이든지 달성 할 수 없다

無爲而治 (무위이치)

無爲而治(무위이치)

無 없을 무 | 爲 하 위/할 위 | 而 말 이을 이, 능히 능 | 治 다스릴 치, 강 이름 이 |

성인(聖人)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얻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을 이르는 말

출전
논어(論語)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無爲之治(무위지치) |

無爲徒食 (무위도식)

無爲徒食(무위도식)

아무런 하는 일없이 한갓 먹기만 함.

無用之物 (무용지물)

無用之物(무용지물)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물건.

門前薄待 (문전박대)

門前薄待(문전박대)

門 문 문 | 前 앞 전, 자를 전 | 薄 엷을 박, 동자기둥 벽, 풀 이름 보 | 待 기다릴 대 |

인정(人情) 없이 몹시 모질게 대(待)함

refusal of admittance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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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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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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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門外漢 (문외한)

門外漢(문외한)

어떤 일에 직접 관계가 없는 테 밖의 사람. 그 일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

勿失好機 (물실호기)

勿失好機(물실호기)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음

無所不爲 (무소불위)

無所不爲(무소불위)

못할 일이 없이 다함.

無信不立 (무신불립)

無信不立(무신불립)

無 없을 무 | 信 믿을 신 | 不 아닐 불 | 立 설 립 |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뜻으로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믿음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라는 뜻으로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자공(子貢)이 정치(政治)에 관해 묻자, 공자는 말했다.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그러자 공자는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나머지 두 가지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묻자 공자는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로부터 사람은 다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여기에서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삼국지(三國志)》에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로 북해(北海) 태수를 지낸 공융(孔融:153∼208)은 조조(曹操:155∼220)의 공격을 받은 서주(徐州) 자사 도겸(陶謙)을 구하기 위해 유비(劉備:161∼223)에게 공손찬(公孫瓚:?∼199)의 군사를 빌려서 도겸을 도와주게 하였다. 공융은 군사를 가지면 유비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비에게 신의를 잃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BC 552∼BC 479)의 말에 따라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성인은 '예부터 내려오면서 누구든지 죽지만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하였습니다. 저는 군대를 빌릴지라도 이곳으로 꼭 돌아올 것입니다"

이처럼 ‘무신불립(無信不立)’은 믿음과 의리가 없으면 개인이나 국가가 존립하기 어려우므로 신의를 지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文選 (문선) 蕭統 (소통)

文選(문선) 蕭統(소통, 501~531)

중국 양(梁)나라의 소통(蕭統:昭明太子)이 진(秦) ·한(漢)나라 이후 제(齊) ·양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책.

구분: 시문선집
저자: 소통(蕭統:昭明太子)
시대: 중국 양(梁)


30권. 여기에 실린 문장가는 130여 명으로, 이 중에는 무명작가의 고시(古詩)와 고악부(古樂府)도 포함되어 있다. 편차(編次)는 문체별로 부(賦) ·시(詩) ·소(騷) ·조(詔) ·책(策) ·표(表) ·서(序) ·논(論) ·제문(祭文) 등 39종으로 나누었다. 시는 443수이고, 부(賦) ·소(騷)에서 제문까지의 작품 317편을 수록하였는데, 그 중 부가 가장 많다. 소통은 자신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주로 침사(沈思) ·한조(翰藻)의 내용과 형식의 글을 취하였는데, 이는 그 자신의 문학관인 동시에 6조(六朝)시대 일반 학자들의 신조이기도 하였다.

《문선》은 수(隋)나라에 이르러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당(唐)나라에 들어와 성행하였다. 그 중에서 이선(李善)이 주(註)한 문선이 가장 유명하며, 그는 매권을 둘로 나누어 60권으로 하였다. 그 후 현종(玄宗) 개원(開元) 6년(718), 당시의 공부시랑(工部侍郞) 여연조(呂延祚)가 여연제(呂延濟) ·유량(劉良) ·장선(張銑) ·여향(呂向) ·이주한(李周翰) 등 5명을 모아 주를 달게 한 것이 이른바 《5신주(五臣註)》이고, 거기에 이선의 주를 합하여 《6신주문선(六臣註文選)》이라고 한다.

송(宋)나라의 대중상부(大中祥府) 9년(1016), 처음으로 문선이 교각(校刻)되면서부터 이를 전문으로 배우는 이른바 선학(選學)이 생기게 되었는데, 한유(韓愈) ·두보(杜甫) 등도 문선을 존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당나라 때에는 사부(詞賦)로써 선비를 등용하였으므로, 문선학이 아주 성행하여, 마침내 6경(六經)에 견주게까지 되었다.


관련 한자어

三國名臣序(삼국명신서찬) 袁宏(원굉, 328~376) 千載一遇(천재일우) |

無不通知 (무불통지)

無不通知(무불통지)

무엇이든지 환히 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음

無不干涉 (무불간섭)

無不干涉(무불간섭)

남의 일에 함부로 간섭함.

文房四友 (문방사우)

文房四友(문방사우)

종이, 붓, 벼루, 먹.

物腐蟲生 (물부충생)

物腐蟲生(물부충생)

物 물건 물 | 腐 썩을 부 | 蟲 벌레 충, 벌레 훼, 찔 동 | 生 날 생 |

생물이 썩은 뒤에야 벌레가 생긴다는 뜻으로, ①남을 의심한 뒤에 그를 두고 하는 비방(誹謗)이나 소문을 듣고 믿게 됨 ②내부에 약점이 생기면 곧 외부의 침입이 있게 됨을 이르는 말

Worms breed in decaying matter


중국 북송(北宋)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범증론(范增論)》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유래한 성어(成語)이다.

소동파는 "생물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 벌레가 생기고[物必先腐也而後 蟲生之], 사람도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 남의 모함을 듣는다[人必先疑也而後 讒入之]"라고 함으로써 항우(項羽)에게 버림받은 범증(范增)을 묘사하였다.

진(秦)나라 말년, 범증(范增)은 항우의 숙부 항량(項梁)에게 투항하여 그의 모사(謀士)가 되었다. 진나라의 포악한 정치에 항거한 항량이 죽은 후, 그의 조카 항우가 그를 계승하였다.

항우는 용맹하였지만 지모(智謀)가 없었으므로 주로 범증의 계획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였다. 범증은 유방(劉邦)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보고 경계하여 항우에게 유방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범증은 홍문(鴻門)에서 열린 연회에 유방(劉邦)을 초대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유방은 범증이 항우를 도와주는 동안은 항우와 마주 겨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범증과 항우를 이간시키는 공작을 꾸몄다. 항우는 이 계략에 휘말려 범증을 의심하여 그를 멀리 하였다. 범증도 몹시 분개하여 항우를 떠나고 말았다. 얼마후 범증은 병사하였고, 항우는 유방에게 망하였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은 범증론(范增論)이라는 글에서 범증이 항우의 곁을 떠난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물건이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야 벌레가 거기에 생기게 되는 것이고[物必先腐也, 而後蟲生之], 사람이란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야 모함이 먹혀들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物腐蟲生(Worms breed in decaying matter) 이란 내부에 약점이 생기면 곧 외부의 침입이 있게 된다는 뜻이다.


출전

소동파(蘇東坡) 범증론(范增論)

文武崇尙 (문무숭상)

文武崇尙(문무숭상)

학문과 무예를 다같이 높이어 숭상함.

武陵桃源 (무릉도원)

武陵桃源(무릉도원)

이 세상과 따로 떨어진 별천지. 理想鄕(이상향) 즉 유토피아를 말한다.


晋(진)나라 때 무릉이란 마을에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부는 배를 저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여태까지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에 이르렀다.

계곡 양쪽엔 온통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배를 저어가던 어부는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쯤이나 되는 곳인가. 그리고 이 복숭아밭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단 말인가. 호기심에 좀 더 거슬러 올라가니까 내(川)가 그치는 곳에 높다란 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산에는 작은 굴이 뚫려있어 어부가 배를 버리고 굴에 들어가 얼마를 걷자니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부시는 눈을 겨우 뜨고 보니 바로 앞에 널따란 땅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연하게 들어선 집들과 잘 가꾸어진 밭.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표정으로 밭일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마을 주민들은 옛날 秦(진)나라의 虐政(학정)을 피해 이 絶景(절경)을 찾아 온 사람들의 후손이었다. 그 이후 바깥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살아왔다고 했다.

어부는 환대를 받으며 그곳에서 며칠 묵은 다음 귀로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이곳 이야기를 하지 말고 다시는 찾지말아달라는 당부를 받았으나 어부는 오는 도중 곳곳에 標識(표지)를 해두었다.

어부는 돌아와서 그가 겪은 일을 그 지방 태수에게 보고했다. 태수도 크게 관심을 가지며 사람들을 시켜 그 마을을 찾게 했으나 표지조차 없어져버려 수색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晋나라의 대시인 陶淵明(도연명)의 「도화원기」에 실려있는데 그 신비의 마을 무릉도원은 많은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는 이상향이 되었다.


도연명, 도화원기, 陶淵明

無念無想 (무념무상)

無念無想(무념무상)

무아의 경지에 이름.

刎頸之交 (문경지교)

刎頸之交(문경지교)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마음을 변치 않는 우정. 중국 전국 시대 인상여와 염파의 친교에서 생긴 말.

文君司馬 (문군사마)

文君司馬(문군사마)

文 무늬 문 | 君 임금 군 | 司 맡을 사 | 馬 말 마 |

文君司馬란 사랑하는 부부나 연인(戀人)을 비유한 말이다.


사기(史記) 사마상여(司馬相如)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서한(西漢) 시기, 임공(臨 )이라는 곳에 탁왕손(卓王孫)이라는 부유한 상인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일찍 남편과 사별(死別)하고 혼자 지내는 탁문군(卓文君)이라는 딸이 있었다. 평소 이러한 탁문군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젊고 유능한 사마상여는 연회에 참석한 기회를 이용하여 탁문군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

그 날 밤, 탁문군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몰래 집을 빠져 나와 사마상여의 집으로 달려가서 그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탁왕손은 딸의 이러한 행동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어려운 생활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고 많은 재물을 주었다.

이렇듯 사마상여와 탁문군은 자신들의 진실한 마음과 행동으로 행복한 애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출전

사기(史記) 사마상여(司馬相如) 열전

描虎類犬 (묘호류견)

描虎類犬(묘호류견)

描 그릴 묘 | 虎 범 호 | 類 무리 류(유), 치우칠 뢰(뇌) | 犬 개 견 |

호랑이를 그리려다 실패(失敗)하여 개와 비슷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큰 뜻을 품고 시작했으나 중도에 그쳐 오히려 훨씬 못한 결과로 끝났다는 뜻

猫頭縣鈴 (묘두현령)

猫頭懸鈴(묘두현령)

猫 고양이 묘 | 頭 머리 두 | 懸 매달 현 | 鈴 방울 령(영) |

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다는 뜻으로, 실행할 수 없는 헛된 논의를 이르는 말.


쥐들이 늘 고양이 때문에 위험을 느끼자, 쥐 한 마리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매달아 두면 그 방울소리를 듣고 고양이가 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어서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을 하였다. 쥐들은 모두 좋은 의견이라고 기뻐하였으나, 큰 쥐가 "누가 고양이의 목에다 방울을 달아 놓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물었더니 아무도 없었다. 쥐들이 고양이가 오는 것을 미리 알려고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매다는 일을 의논하였지만 아무도 방울을 달 수 없었다는 우화에서 나온 말이다.

[출전]
순오지(旬五志)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猫項懸鈴(묘항현령) |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 마른 나무에 꽃이 피랴.

妙技續出 (묘기속출)

妙技續出(묘기속출)

교묘한 기술과 재주가 잇달아 나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