玩火自焚 (완화자분)

玩火自焚(완화자분)

玩火自焚 [wánhuǒzìfén]

玩 희롱할 완, 가지고 놀 완 | 火 불 화 | 自 스스로 자 | 焚 불사를 분 |

불을 가지고 놀다가 자신을 태워 버린다는 뜻으로, 무모한 일로 남을 해치려다 결국 자신이 해를 입게 됨.

Somebody who plays with fire will get burnt, (fig.) One venturing to do evil is bound to suffer from his own evil.


춘추좌전 은공(隱公) 4년조에는 무력의 위험성을 경고한 기록이 있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위(衛)나라 군주인 장공(莊公)의 첩이 아들을 낳자 이름을 주우라고 하였다. 주우는 어려서부터 장공의 총애를 받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 무력으로써 해결하려 했다. 장공이 죽자 환공(桓公)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위(衛)나라의 공자(孔子) 주우는 기원전 719년 환공(桓公)을 죽이고 군주의 자리를 찬탈했다. 주우는 왕위를 찬탈한 후 송(宋)나라와 진(陳)나라, 채(蔡)나라 등과 연합하여 정(鄭)나라를 공격했다.

노(魯)나라 은공(隱公)이 이 소식을 듣고 대부(大夫) 중중(衆仲)에게 주우가 뜻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중중은 이렇게 대답(對答)했다.

"주우는 무력만을 믿고 잔인(殘忍)한 짓을 하면서도 태연합니다만, 무력에 의지했다간 국민들이 등을 돌리고 심복들마저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무력이란 불과 같은 것이어서, 단속하지 않으면 장차 자신이 그 불속에서 타게 될 것입니다. [夫兵, 猶火也. 弗 , 將自焚也]"

玩火自焚이란 무모한 일로 남을 해치려다 결국 자신이 해를 입게 됨을 비유한 말로 이러한 노(魯)나라 중중(衆仲)의 말에서 유래(由來)한다.


출전

좌씨전(左氏傳)

王昌齡 (왕창령, 698~755?)

王昌齡(왕창령, 698~755?)

異名: 王昌龄(Wáng Chānglíng), 자 소백(少伯)
국적: 중국 당나라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장신추시(長信秋詩)》,《출새(出塞)》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출새(出塞)》,《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자 소백(少伯). 강령(江寧:江蘇省 南京) 출신. 727년 진사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었고, 734년 박학굉사(博學宏詞)의 시험에 합격하여 범수(氾水:河南省 成皐縣)의 위(尉)가 되었다. 그러나 소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강령의 승(丞), 다시 용표(龍標:湖南省 黔陽)의 위(尉)로 좌천되었다. 왕강령 ·왕용표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그 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자사(刺史)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착상이 청신하며, 특히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 《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 《출새(出塞)》 《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시집 《왕창령 전집》(5권)과 그의 저술로 전하여지는 시론서 《시격(詩格)》 《시중밀지(詩中密旨)》 각 1권이 남아 있다.

王安石 (왕안석, Wáng ānshí, 1021~1086)

王安石(왕안석, 1021~1086)

異名: 王安石(Wáng ānshí), 자 개보(介甫), 호(號) 반산(半山)
국적: 중국 송(宋)
활동분야: 정치


중국 북송(北宋) 때의 문필가이자 정치인으로서 1069~1076년에 신법(新法)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중국 송(宋, 960∼1279) 때의 문필가이자 정치인으로 자(字)는 개보(介甫), 호(號)는 반산(半山)이다. 문필가이자 시인으로서 그는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북송(北宋)의 6대 황제인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에게 발탁되어 1069~1076년에 신법(新法)이라고 불리는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시역법(市易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의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개혁적 정치 사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장시성[江西省] 푸저우[撫州] 린촨현[臨川懸] 출신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다가 할아버지 때부터 관직에 진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버지 왕익(王益)은 지방관으로 중국 각지를 전전했다. 왕안석(王安石)은 열아홉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녕부(江寧府, 지금의 南京)에 정착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재(文才)를 인정받았으며, 유가 경전뿐 아니라 제자백가의 서적에서 의서(醫書), 소설까지 다양한 서적들을 읽으며 기존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하였다.

인종(仁宗, 재위 1022~1063) 때인 1042년 과거에 합격하여 섬서회남절도판관(陝西淮南節度判官)으로 관직을 시작한 뒤 20년 정도를 화남(華南) 지방에서 각급 지방관으로 근무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관개 사업과 재정 관리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널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학문과 행정 능력을 갖춘 유능한 인재로 명성이 높아지면서 중앙 관직으로의 진출을 추천 받기도 하였지만, 왕안석은 집안 사정의 어려움을 내세워 사양하였다.

1058년에 왕안석은 인종(仁宗)에게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서술한 <만언서(萬言書)>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정치의 폐단(弊端)을 지적하고 <주례(周禮)>를 전범(典範)으로 한 개혁의 추진을 주장하며 인재 양성과 선발, 이재(理財) 방법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만언서>는 그의 개혁 정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문장에서도 모범이 되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1067년 영종(英宗, 재위 1063~1067)의 뒤를 이어 열아홉의 나이로 황위(皇位)에 오른 신종(神宗)은 정치의 쇄신과 개혁을 추진하며 왕안석을 등용하였다. 신종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왕안석을 강녕부(江寧府) 지사(知事)로 임명하고, 곧바로 중앙으로 불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았다. 그리고 1069년에는 그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하여 신법(新法)을 입안하여 개혁 정책을 실행케 하였다. 왕안석은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를 설치하여 신법(新法)을 추진하였으며, 1070년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어 재상(宰相)으로서 국정 전반을 관장하였다.

왕안석은 1069년 균수법(均輸法)을 시작으로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 시역법(市易法), 보마법(保馬法) 등의 신법(新法)을 잇달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대지주와 대상인, 고리대업자들과 정부 안의 보수파의 반발에 부닥쳤다. 1074년 심한 기근마저 나타나 반발이 커지자 신종은 왕안석을 강령부(江寧府) 지사(知事)로 좌천하여 이를 무마하려 하였다. 왕안석은 이듬해 다시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임명되었지만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지 못했다. 그리고 아들을 잃는 일까지 일어나자 1076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강녕부(江寧府)로 은거하였다. 그는 1086년 5월 21일에 사망하였고, 죽은 뒤 형국공(荆国公)으로 봉해졌다.

왕안석은 유학의 실용적 해석과 응용을 강조하였으며,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례(周禮)> 등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유학의 도덕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나 ‘법치’를 강조했으며,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때문에 왕안석의 사상은 유교 전통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특히 성리학(性理學)에서 구법당(舊法黨)의 사상을 정론(正論)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는 배척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왕안석의 개혁 정책에 대해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의 사상이 지니는 의의도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는 정론(政論)과 여행수기, 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산문은 현실주의 풍격을 지니고 있으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만년(晩年)에는 한자(漢字)의 연원과 제자(製字) 원리 등을 연구하여 <자설(字說)>이라는 책을 남기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왕임천문집(王臨川文集)>, <임천집습유(臨川集拾遗)> 등의 문집(文集)이 전해진다.

臥薪嘗膽 (와신상담)

臥薪嘗膽(와신상담)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핥으며 보복을 다짐한다는 말로 마음 먹은 일을 이루기 위해 온갖 괴로움을 무릅쓴다는 뜻.


춘추시대, 오나라 왕 합려는 월나라를 공격했다가 월왕 구천에게 크게 패했다. 이 싸움에서 부상한 합려는 목숨까지 잃게 된다. 임종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는 유언을 했다. 부차는 복수심을 다지기 위해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고 방을 드나드는 신하들에게 『부차여, 너는 월나라 군대가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는가』라는 말을 외치게 했다. 이렇게 하는 한편 군사를 훈련시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런 소문을 들은 구천은 참모인 범려가 말리는 것을 듣지 않고 선수를 쳐 오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大敗(대패)한 구천은 회계산으로 도망갔다. 進退(진퇴)가 궁해진 구천은 신하가 되겠다며 부차에게 항복을 받아달라고 했다. 이때 부차는 중신인 오자서의 諫言(간언)을 뿌리치고 구천을 놓아주었다.

살아난 구천은 자기 곁에 쓸개를 놓아두고 수시로 쓸개를 핥아 그 쓴 맛을 맛보며 「회계의 치욕」을 상기하면서 병력을 키웠다. 구천이 오나라를 격파하여 부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그로부터 약 20년이 흐른 뒤였다.

頑石點頭 (완석점두, wánshídiǎntóu)

頑石點頭(완석점두)

顽石点头(wánshídiǎntóu)

頑 완고할 완 | 石 돌 석 | 點 끄덕일 점 | 頭 머리 두 |

顽石(wánshí) 돌, 나쁜 사람 |


'완고한 돌도 고개를 끄덕인다'라는 뜻으로, 깊이 감화받은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동진(東晉) 시대의 도생법사(道生法師)라는 승려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도생법사는 생공(生公)이라고도 부르며, 인도불교와 선(禪)을 중국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어려서 인도에서 온 승려 축법태(竺法汰)를 따라 출가하였고, 나중에 장안(長安)에서 구마라습(鳩摩羅什)에게 불법을 배웠다. 그는 《열반경(涅槃經)》이 중국에 번역되어 전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공공연히 천제성불설(闡提成佛說:깨달음이 없는 사람도 성불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다른 승려들이 이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생은 사찰에서 축출되었다. 도생은 소주(蘇州)의 호구산(虎口山)에서 기거하면서 때로는 돌멩이들을 모아 놓고 《열반경》에 대하여 강의하였다. 도생은 한참 강의를 하다가 천제성불 대목에 이르면 돌들을 향하여 "내 설법이 불심(佛心)에 부합되지 않는가"라고 물었는데, 돌멩이들이 모두 그의 말이 맞다고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나중에 《열반경》이 중국에 번역되어 전해져 도생의 설법과 부합하는 것으로 밝혀짐으로써 도생은 예전에 있던 여산(廬山)의 사찰로 돌아갔다. 이 고사는 진나라 때 쓰여진 《연사고현전(蓮社高賢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완석점두는 완고하고 무지한 사람들도 기꺼이 순종할 만큼 깊이 감화받거나 그렇게 되도록 도리를 밝혀 상대방을 잘 설득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한편 소주의 호구산에는 도생이 돌들에게 강의하던 설법대(說法臺)와 점두석(點頭石)이 지금도 남아 있어 관광지로 이용된다.


蓮社高賢傳(연사고현전) |

完璧歸趙 (완벽귀조)

完璧歸趙(완벽귀조)

完璧归赵(wánbìguīZhào)

完 완전할 완 | 璧 구슬 벽 | 歸 돌아갈 귀 | 趙 나라 조,찌를 조 |


'구슬을 온전히 조나라로 돌려보내다'라는 뜻으로, ①흠이 없는 구슬. 결점이 없이 완전함 ②빌렸던 물건을 온전히 반환함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이 화씨지벽이라는 진귀한 벽옥(璧玉)을 얻었는데,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이를 빼앗을 속셈으로 15개의 성과 벽옥을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혜문왕은 소왕의 속셈을 짐작하였으나, 제안을 거절하였다가는 강대국인 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될까 우려하였다. 그러자 무현(繆賢)이라는 신하가 자신의 식객으로 있는 인상여(藺相如)가 지용(智勇)을 겸비하였으니 대책을 상의해보라고 건의하였다.

혜문왕을 만난 인상여는 자신이 벽옥을 가지고 진나라로 가서 소왕이 약속을 지키면 벽옥을 내주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벽옥을 온전히 하여 조나라로 돌아오겠다[完璧歸趙]'고 말하였다. 인상여가 진나라로 가서 소왕에게 벽옥을 주었으나 소왕은 약속한 15개 성을 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인상여는 소왕에게 벽옥이 둘도 없는 진귀한 보물이기는 하지만 작은 흠집이 있으니 그것을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소왕이 그 말을 믿고 벽옥을 인상여에게 도로 내주었다. 그러자 인상여는 벽옥을 가지고 기둥 옆으로 가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벽옥을 기둥에 던져 부숴뜨리고 자신도 머리를 부딪쳐 자결하겠다고 소리쳤다. 소왕은 벽옥이 손상될까 두려워하여 임시변통으로 성을 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소왕의 진의를 간파한 인상여는 5일 내로 약속을 지키면 벽옥을 돌려주겠다고 말하고는 남몰래 사람들을 시켜 벽옥을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이로써 벽옥은 온전한 상태로 조나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이 고사는 《사기(史記)》의 〈인상여열전〉 편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완벽귀조는 화씨지벽이 처음의 온전한 상태로 조나라로 돌아간 것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물건을 조금도 상하지 않게 하여 완전한 상태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완벽이라는 고사성어도 이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출전]
史記(사기):廉頗藺相如列傳(염파인상여열전) |


참조어

유의어

完璧(완벽) |


사기:염파인상여열전, 史記:廉頗藺相如列傳

王勃 (왕발, Wáng Bó)

王勃(왕발)

이름: 王勃(Wáng Bó), 자 자안(子安)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강주(絳州) 용문(龍門:山西省 河津縣)
주요저서: 《왕자안집(王子安集)》


초당(初唐) 4걸(四傑)이라 불리는 중국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 시인. 종래의 완미(婉媚)한 육조 시(六朝詩)의 껍질을 벗어나 참신하고 건전한 정감을 읊어 성당 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5언 절구(五言絶句)에 뛰어났다. 시문집 《왕자안집(王子安集)》 등을 남겼다.


자 자안(子安). 강주(絳州) 용문(龍門:山西省 河津縣) 출생. 일설에는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출생이라고 한다. 수(隋)나라 말의 유학자 왕통(王通)의 손자이다. 조숙한 천재로 6세 때 문장을 잘하였고, 17세 때인 666년 유소과(幽素科)에 급제하였다. 젊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아 664년에 이미 조산랑(朝散郞)의 벼슬을 받았다. 왕족인 패왕(沛王) 현(賢)의 부름을 받고 그를 섬겼으나, 당시 유행하였던 투계(鬪鷄)에 대하여 장난으로 쓴 글이 고종(高宗)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중앙에서 쫓겨나 쓰촨[四川] 지방을 방랑하였다. 뒤에 관노(官奴)를 죽였다는 죄로 관직을 빼앗기고 교지(交趾:베트남 북부)의 영(令)으로 좌천된 아버지 복치(福畤)를 만나러갔다가 돌아오던 중, 배에서 바다로 떨어져 익사하였다.

양형 ·노조린(盧照鄰) ·낙빈왕(駱賓王) 등과 함께 초당(初唐) 4걸(四傑)이라 불리는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 시인이다. ‘왕양노락(王楊盧駱)’이라 불렸던 그는 종래의 완미(婉媚)한 육조시(六朝詩)의 껍질을 벗어나 참신하고 건전한 정감을 읊어 성당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5언절구(五言絶句)에 뛰어났으며, 시문집 《왕자안집(王子安集)》 16권을 남겼다.


참조항목

初唐四傑(초당사걸)

중국 초당기(初唐期:7세기)의 시단(詩壇)을 대표한 네 시인. 왕발(王勃)·양형(楊炯)·노조린(盧照鄰)·낙빈왕(駱賓王) 등 네 사람이며 성(姓)만을 따서 '왕양노락(王楊盧駱)'이라고도 한다.네 사람 모두 처지가 비슷하였으며 2류사족(二流士族) 출신으로 젊어서 시단에서 이름을 떨쳤다. 양형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회적으로 불우하게 끝을 맺었다. 초당시(初唐詩)의 대세(大勢)는 남조(南朝)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교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으며 사걸의 시도 총체적으로는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날 수 없으나, 이들의 청순함과 새로운 감각과 그 표현 등은 다른 초당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서정적 시풍을 느끼게 해준다. 이들 사걸의 시는 다음 성당시(盛唐詩)의 맹아(萌芽)가 되었다.

蝸角之爭 (와각지쟁, wōjiǎozhīzhēng)

蝸角之爭(와각지쟁)

蜗角之争(wōjiǎozhīzhēng)

蝸 달팽이 와 | 角 뿔 각,사람 이름 록(녹),꿩 우는 소리 곡 | 之 갈 지 | 爭 다툴 쟁 |


달팽이의 촉각(觸角) 위에서 싸운다는 뜻으로 ①작은 나라끼리의 싸움 ②하찮은 일로 승강이하는 짓


원래 달팽이 뿔 위에서의 싸움이란 뜻으로, 와우각상쟁(蝸牛角上爭)이라고도 한다. 《장자(莊子)》 <칙양편(則陽篇)>에 나오는 말이다.

기원전 4세기 전국 시대의 이야기다. 위(魏)나라 혜왕(惠王)과 제(齊)나라 위왕(威王)이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제나라가 일방적으로 조약을 어기자, 화가 난 혜왕이 위와에 대한 보복을 대신들과 논의했으나 그 의견이 분분했다.

이에 혜왕은 재상(宰相) 혜자(惠子)가 추천한 대진인(戴晋人)에게 의견을 물었다. 대진인은 이렇게 말했다. "전하, 달팽이라는 미물을 잘 아시지요. 그 달팽이이 왼쪽 뿔에 촉씨(觸氏)의 나라가 있고, 오른쪽 뿔에 만씨(蠻氏)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두 나라는 영토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죽은 자만 해도 수만을 헤아리고 15일에 걸친 격전 후에야 겨우 군대를 철수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농담도 작작 하시오."

"아닙니다.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이것을 사실과 비교해 보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우주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끝이 있다고 생각지 않소."

"그럼 마음을 그 끝없는 세계에 두는 자의 눈으로 지상의 나라들을 보면 거의 있을까 말까 한 존재와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아무렴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오?"

"그 나라들 속에 위가 있고 그 안에 서울이 있고, 또 그 안에 전하가 살고 계십니다. 이렇듯 우주의 무궁함에 비한다면, 전하와 달팽이 촉각 위의 국왕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그래 차이가 없다는 거로군."

대진인의 말을 듣고 혜왕은 제나라와 싸울 마음이 없어져 버렸다. 대진이 물러가자 혜왕이 말했다. "그는 성인도 미치지 못할 대단한 인물이오."

출전: 장자(莊子)

또, 이 말은 백거이(白居易)의 시구 “蝸牛角上爭何事(달팽이 뿔 위에서 무슨 일을 다투리요) 石火光中寄此身(석화 빛 속으로 이 몸을 기대노라)”에도 언급되어 있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

蝸牛角上爭(와우각상쟁) | 蝸角之勢(와각지세) | 蝸角觝(와각저) | 蠻觸之爭(만촉지쟁) |


관련 한시

對酒(대주) |


莊子, 장자, 莊子:則陽篇, 장자:칙양편

曰可曰否 (왈가왈부)

曰可曰否(왈가왈부)

曰 가로 왈 | 可 옳을 가, 오랑캐 임금 이름 극 | 曰 가로 왈 | 否 아닐 부, 막힐 비 |

좋으니 나쁘니 하고 떠들어댐

an argument pro and con; to argue pro and con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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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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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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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