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요자, 명궁과 참기름 장사

참기름 장사와 명궁

송나라에 진요자라는 명궁이 있었습니다. 그는 활을 어찌나 잘 쏘는지 나라안팎에 그와 겨룰 만한 궁사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모아 놓고 활을 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기름 파는 노인이 그 모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노인은 진요자가 화살 열 개 가운데 아홉개를 명중시키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진요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노인장, 제 궁술의 비결이 뭔지 궁금하십니까?"

그러자 노인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습니다.

"뭐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겠습니까? 활이 당신 손에 푹 익은 것 같군요."

노인의 말에 진요자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니 제 솜씨를 어찌 그렇게 가볍게 평가하십니까? 이건 하루 이틀에 배울 수 있는 궁술이 아닙니다."

노인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 화내지 마시오. 내가 참기름 장사를 오래 하다보니 조금 이치를 아는 것 뿐이라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요자가 묻자 노인은 호리박처럼 생긴 참기름 병을 꺼내 땅 위에 놓더니 엽전으로 그 주둥이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참기름을 국자로 떠서 병 속에 흘려 넣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의 키높이에서 흘려보낸 참기름이 엽전의 조그만 구멍 속으로 정확하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진요자가 살펴보니 엽전에는 침기름이 한 방울도 붇지 않았습니다. 진요자는 노인의 솜씨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아아, 놀라지 마시오. 나도 뭐 별다른 비결이 있는게 아니니까. 다만 손에 푹 익었을 뿐이라오."

그 말을 들은 진요자는 노인에게 깊이 머리 숙여 절을 했습니다. 이후 진요자는 활을 쏘는데 있어 결코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좋은글 중에서]


받은 글입니다.

Life: 실천하는 사람 : 장개석

Life: 실천하는 사람 : 장개석

말을 그럴듯하게 잘 하는 사람보다
말은 어눌해도 진실하게 말하는 사람이 善者요,
말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보다
말없이 실천하는 사람이 善之善者라.
言行이 一致하면 君子라.

실천하는 사람, 장개석을 보십시오.

아주 오래 전 일본의 어느 대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곳에서는 영국, 독일, 불란서, 한국, 일본, 미국 등 나라별로 화장실을 사용했는 데, 중국인이 사용하는 화장실이 가장 더러웠습니다. 또한 매주 실시하는 검사에서 중국인 화장실은 늘 지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1907년이 되자 반대로 중국인 화장실이 제일 깨끗한 화장실이 되었습니다.

어느 늦은 밤, 총장이 학교를 둘러보게 되었는데, 어둠 속에서 불이 켜져 있는 방이 있었습니다. 불이 켜진 방을 보면서 총장은 '늦은 밤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방문이 열리면서 한 학생이 대야에 걸레와 비누, 수건을 가져오더니 중국인 화장실을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총장은 학생을 불렀습니다.

"학생!"
"예, 총장님."
"학생이 매일 밤마다 청소하는가?"
"예."
"고맙네, 헌데 공부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학생이 어찌 청소까지 하나?"
"저는 중국인 신입생인데 우리나라 화장실이 가장 더러워서 중국의 명예을 위해 매일 청소를 합니다. 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제 이름은 장개석입니다."
"장개석이라......"
총장은 그의 이름을 수첩에 적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장개석은 특별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졸업했고, 훗날 중국의 총통이 되었습니다
내일의 모든 꽃은 오늘의 씨앗에 근거한 것이다.

- 중국 속담

Life: 평생의 계획

Life: 평생의 계획

일년의 계획은 곡식을 심는 것, 십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 평생의 계획은 사람을 심는 것만 같은 것이 없다.

- 관중의 '관자(管子)'

백성을 최고로 여겼던 제(齊)나라 명재상 관중의 저서 '관자(管子)'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람을 잘못 쓰면 평생의 업적을 망치고 더나아가 국가의 토대 자체를 뒤흔들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중국 탄소배출권거래제 도입 가시화

중국 탄소배출권거래제 도입 가시화
기후변화행동연구소
2011-08-23

최근 중국은 2015년까지 추진할 이산화탄소 감축 로드맵을 발표했다. 국가개발개혁위원회(NDRC)가 제시한 세부내용을 보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절대량(cap)’으로 제한하는 다수의 시범지역을 선정할 예정이다. 이는 추후 탄소배출권거래제의 점진적인 도입을 염두에 둔 조치로 해석되고 있다.

3000년 역사의 古都 시안(西安) ③

진시황 병마용(兵馬俑) 박물관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입구의 진시황 상


박물관 입구


병마용 갱 위치도


호갱의 군진(軍陳)은 길이 230m, 폭 62m, 총면적 14,260평방m로 3개 병마용갱 중에서 가장 크다. 갱내에 6000여점의 토용과 토마 40여승의 목조전차가 배치되었다.

병마용 갱(1호용 갱)


돔 구장 만한 병마용 갱은 1, 2, 3호 갱으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도 발굴이 진행 중이다.


1974년 초봄 섬서성 임당현 서양촌(西楊村)의 우물 파던 한 농부에 의해 금세기 최대의 발견이 이루어졌다.

지방 순시 중 49세로 사망한 진시황이 사후 자신의 능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병마용 갱은 출전명령을 기다리는 2200년 전의 고대제국의 군대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박물관 전시실에 별도로 진열된 토용(土俑)중에서 태권도 하단막기 품세가 있다.


실물의 1/2 크기의 완벽한 청동 마차(두대 중 한대)


3000년전 고대 유물속에 놀랍게도 [한국의 전 대통령 노태우 기증 품]이라는 설명이 붙은 한국 철화 백자가 전시되어 있었다.


현재는 개방되지 않아 차창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진시황 능묘


능의 기존 높이는 115m 였으나 비바람에 씻기고 무너져 현재는 76m. 기초는 동서 길이 345m, 남북 350m이다. 봉토를 둘러 싼 내.외성이 있으며 지금은 대부분 토락하였다.

조선일보 이수한 2007/07/15
http://cafe.chosun.com/club.menu.bbs.read.screen?p_club_id=orullee001&p_menu_id=13&message_id=425092


받은 글입니다.

2007년 글과 사진이니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3000년 역사의 古都 시안(西安) ②

화청지(華淸池)

당(唐)의 현종이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와 사랑에 빠졌던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화청궁(華淸宮)이라 부르기도 하며, 서안 사변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보수 중


양귀비 목욕탕


온천 수원


양귀비가 즐기던 석류나무


양귀비가 목욕 후 머리를 말리던 정자



받은 글입니다.

3000년 역사의 古都 시안(西安) ①

3000년 역사의 古都 시안(西安)

시안 역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의 西安 시내로 들어서면 어마어마한 장벽이 길손을 위압적으로 가로 막는다.


시안 성벽은 명대(明代)의 주원장에 의해 건설되었고 중국의 고성 중에서 가장 완전한 상태의 성벽이다.


성벽은 둘레 13.7km로서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넓은 성벽 위로는 승합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비림(碑林)

역대의 비석과 비문을 한 곳에 수집하여 놓은 비림(碑林)


한(漢)대 부터 청(淸)대에 이르기 까지 1000여개의 비석과 비문이 전시되어 있어, 비석들이 숲을 이룬것과 같다하여 비림(碑林)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탁본 하는 장면



받은 글과 사진입니다.

興盡悲來 (흥진비래)

興盡悲來(흥진비래)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온다는 뜻으로 흥망성쇠가 엇바뀜을 비유.

黑白顚倒 (흑백전도)

黑白顚倒(흑백전도)

黑 검을 흑 | 白 흰 백 | 顚 엎드러질 전 | 倒 넘어질 도 |

'검은 것과 흰 것이 거꾸로 되었다'라는 뜻으로, 옳고 그름이 뒤집히거나 그러한 상황을 야기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굴원(屈原)의 '회사(懷沙)'에서 유래되었다.


전도흑백(顚倒黑白) 또는 반백위흑(反白爲黑), 흑백혼효(黑白混淆) 또는 혼효흑백(混淆黑白)이라고도 한다. 전도시비(顚倒是非)나 혼효시비(混淆是非)도 같은 뜻이다.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굴원은 유배지에서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며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그가 죽기 전에 자신의 심경을 담아 지은 작품이 바로 '회사'이다.

여기서 굴원은 "흰 것이 변하여 검은 것이 되고, 위가 거꾸로 아래로 되었네(變白以爲黑兮, 倒上以爲下). 봉황은 조롱 속에 갇히고, 닭과 꿩이 하늘을 나네"라고 읊으며, 간신배들이 활개치는 세상을 한탄하였다.

또 후한 시대 안제(安帝) 때의 양진(楊震)은 번풍(樊豊)과 주광(周廣) 등 탐관오리의 행태를 고발하는 상소문에서 "흰 것과 검은 것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고, 맑음과 탁함이 그 근원을 같이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흑백전도는 문자 그대로 흑과 백이 뒤집힌 것처럼 옳음과 그름(是非)이 뒤집힌 부조리한 상황을 비유하거나,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하고 흰 것을 검다고 말하는 것처럼 고의로 옳고 그름을 흐리게 하거나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굴원(屈原)의 회사(懷沙)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전도흑백(顚倒黑白) | 반백위흑(反白爲黑) | 흑백혼효(黑白混淆) | 혼효흑백(混淆黑白) | 전도시비(顚倒是非) | 혼효시비(混淆是非) |

懸梁刺股 (현량자고)

懸梁刺股(현량자고)

懸 매달 현 | 梁 대들보 량 | 刺 찌를 자 | 股 넓적다리 고 |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른다'라는 뜻으로, 분발하여 학문에 정진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한(漢)나라 때의 대학자인 손경(孫敬)과 전국시대에 종횡가(縱橫家)로 명성을 떨친 소진(蘇秦)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현두자고(懸頭刺股) 또는 자고현량(刺股懸梁)이라고도 한다. 손경과 소진 두 사람의 일화에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합쳐진 것이다. '현량'은 손경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손경은 자가 문보(問寶)이며, 학문을 좋아하여 사람들이 찾아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근 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공부를 하다가 졸음이 오면 노끈으로 머리카락을 묶어 대들보에 매달았다. 잠이 와서 고개를 떨구면 노끈이 팽팽해지면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통증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와 같이 노력하여 손경은 나중에 대유학자가 되었다. 이 고사는 《몽구(蒙求)》와 《태평광기(太平廣記)》 등에 실려 있다.

'자고'는 소진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소진은 처음에 진(秦)나라 혜왕(惠王)에게 연횡책(連橫策)을 유세하다가 좌절하여 집으로 돌아왔는데, 가족들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그를 박대하였다. 그는 자신을 한탄하며 궤짝에 들어 있는 책들을 꺼내 살펴보다가 태공(太公)이 지은 《음부(陰符)》를 발견하였다.

소진은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러 잠을 쫓아가며 그 책을 공부하는 데 몰두하였다. 1년이 지나 소진은 마침내 그 책의 이치를 터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종횡가로 명성을 떨치며 전국시대 6국의 재상이 되었다. 이 고사는 《전국책(戰國策)》의 〈진책(秦策)〉편에 실려 있다. 이 두 가지 고사에서 유래하여 현량자고는 고통을 감수하고 분발하여 학문에 정진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刺股懸梁(자고현량) | 懸頭刺股(현두자고) | 懸梁刺股(현량자고) |

훌륭한 리더 뒤에 참다운 스승이 있다

훌륭한 리더 뒤에 참다운 스승이 있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있을 때 누구나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저 멀리 등불이 보이기 시작하면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길을 바로 찾아가게 된다. 그 등불이 바로 인생의 스승이다. 참다운 스승을 만나면 바른 길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스승의 말을 잘 따르면 성공의 길이 열린다.

중국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태자 시절 이름은 발(發)이었다. 그의 아버지 서백(西伯)은 문왕(文王)인데 덕으로 다스려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무왕은 군사를 길러 제후들을 그 아래 굴복시키고 천하를 통치하였다.

이처럼 주나라는 문왕과 무왕 시절에 가장 부흥한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이 두 왕으로 하여금 덕치주의 정치를 하도록 한 사람은 바로 태공망(太公望)이었다.

태공망의 성은 강씨(姜氏)였고, 이름은 여상(呂商)이었다. 동해 바닷가 태생인 그는, 당시 은나라 주왕의 포악한 정치를 혐오하며 아예 관직에 나가지 않은 채 초야에 묻혀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주나라 문왕이 사냥을 나가기 위해 점을 쳤다는데, 그 점괘가 이렇게 나왔다.

‘획득하는 것이 용(龍)도 아니고 이(彲-뿔 없는 용)도 아니며, 호랑이도 아니고 비(羆-큰 곰)도 아니며, 패왕의 보좌가 될 사람이다.’

그날 문왕이 사냥을 나갔을 때 여상은 위수(渭水)의 강가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어 보던 문왕은 강태공의 비범함을 보고 점괘에 나온 바로 그 인물이라 생각하였다.

“나의 선군인 태공(太公)께서 ‘마땅히 성인이 있어 주나라로 오게 될 것이며, 주나라는 이미 인물을 얻어 훌륭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신이 바로 그분이오. 나의 태공이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문왕은 여상을 극진히 우대하였으며, 벼슬을 주어 주나라로 데려가려 하였다.

“제가 듣기로 서백은 현명하며, 또한 노인을 공경한다고 하던데 어찌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서백, 즉 문왕은 여상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여상은 하릴없이 낚시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줄 군주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여상이 그저 빈둥대며 낚시질만 하는 영감으로 알았던 그의 부인이 같이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여상은 늘 돈벌이 안 한다고 바가지만 긁어대던 부인과 함께 갈 마음이 없었다. 부인이 울면서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리자 여상은 바가지로 물을 떠서 땅에 버리고 말하였다.

“이것을 다시 주워 담으면 주나라도 당신을 데리고 가겠소!”

부인은 여상의 말에 따라 땅바닥에 쏟아진 물을 바가지에 주워 담으려 하였으나, 이미 땅으로 스며든 물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아내는 뒤늦게 출세한 남편 여상을 따라 주나라로 갈 수 없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아무튼 주나라로 간 여상은, 이때부터 문왕이 말한 ‘태공(太公)’이 기다렸다’는 데서 기다릴 ‘망(望)’자를 보태어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리게 되었다. 흔히 그의 성을 따서 ‘강태공’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태공망은 병법과 지략이 뛰어났다. 그래서 문왕은 그를 스승을 삼았고, 태자인 발의 교육도 맡겼다. 문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였을 때, 그의 곁에는 태공망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즉위 9년이 되었을 때 무왕은 아버지 문왕의 묘소에 참배를 하고, 그 유업을 받들어 군사를 동방으로 진군시켰다.

이때 무왕은 문왕의 위패를 만들어 수레에 싣고 떠났고, 그 자신은 스스로 ‘태자 발(發)’이라 칭하였다. 이것은 곧 문왕의 명을 받아 정벌에 나선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태공망도 무왕을 보좌하여 출정하였다. 당시 무왕은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며 부친으로 우러러 본다’는 뜻에서 ‘사상보(師尙父)’라고 별도의 호칭을 정하여 불렀다.

무왕이 황하를 건널 때였다. 강 한가운데를 지나는데 백어(白魚)가 펄쩍 뛰어 왕의 배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사상보께선 이 흰 물고기를 어떻게 보십니까?”

“흰색은 은나라의 색깔이니, 흰 물고기가 대왕의 배로 뛰어든 것은 은나라가 주나라에 복속될 징조입니다.”

황하를 다 건너가자 불덩어리가 상류에서 다시 하류로 돌아 무왕의 진영에 이르러서는 까마귀로 변하였다. 그 까마귀의 색깔은 붉었으며, 그 우는 소리는 매우 안정되어 느릿느릿하였다. 무왕은 다시 태공망에게 물었다.

“붉은색은 주나라를 뜻하며, 붉은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안정되어 있다는 것은 대왕이 패업을 완수하여 주나라가 번영할 것이라는 전조입니다.”

드디어 무왕의 군사는 동방을 정벌하여 맹진(盟津)에 이르렀다. 이때 뜻을 같이하기 위해 은나라를 배반하고 몰려든 제후가 무려 800명이나 되었다.

“이 기회에 은나라의 주왕을 쳐야합니다.”

제후들은 한결같이 주장하였다.

그러나 무왕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우선 사상보 태공망에게 은나라 주왕을 칠 것인가 물어보았다. 태공망은 제후 800명을 얻은 것만으로 족하니, 일단 돌아가 군대를 정비하자고 말하였다.

“그대들은 아직도 천명이라는 것이 은나라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아직 때가 이르다.”

무왕은 태공망의 말대로 군사를 거두어 주나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은나라 주왕이 왕자 비간을 살해하고 기자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소식을 접한 무왕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무왕은 점술가를 불러 점괘를 뽑아보았다. 불길하게 나왔다. 그리고 곧 폭풍우가 세차게 몰아졌다.

무왕은 망설였고, 제후들은 모두 떨었다.

그런데 이때 태공망이 나섰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때가 왔습니다. 아무리 점괘가 나쁘게 나와도 무르익은 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대왕의 운은 천하를 얻고도 남을 만큼 좋습니다. 은나라 주왕은 아무 죄도 없는 왕자 비간를 무참하게 살해하여 백성의 원성이 드높습니다. 어서 군사를 일으켜 주왕의 죄를 물으십시오. 그래야 천하가 대왕의 손에 들어옵니다.”

무왕은 태공망의 말에 용기를 얻어 드디어 은나라 주왕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은나라를 정벌한 무왕은 궁궐 안의 녹대에 저장했던 금은보화를 꺼내고, 곡식창고에 저장했던 양식들을 풀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그리고 무왕은 천하의 패자(覇者)로 군림하였다.

역사학자들은 태공망이 없었다면 주나라는 천하의 패자가 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문왕이 태공망을 알아주지 않고, 무왕이 태공망을 참된 스승으로 모시지 않았다면 주나라는 은나라를 감히 넘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태공망은 주나라가 천하의 패자로 군림하는 데 등불 같은 역할을 한 인물이다. 태공망이 큰 인물임을 간파하고 벼슬을 내린 문왕이나, 그를 아버지 버금가는 스승으로 모신 무왕이나 훌륭한 리더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훌륭한 리더 뒤에는 반드시 참다운 스승이 있음도 알아두어야 한다.


받은 글입니다.

胸有成竹 (흉유성죽)

胸有成竹(흉유성죽)

胸有成竹[xiōngyǒuchéngzhú]

胸 가슴 흉 | 有 있을 유 | 成 이룰 성 | 竹 대 죽 |

대나무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마음속에 이미 완성된 대나무 그림이 있다는 뜻으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이미 계산(計算)이 모두 서 있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이 말은 중국 북송(北宋) 때의 시인인 소동파(蘇東坡)와 조보지(晁補之)의 시(詩)에 나오는 말로, 득성죽우흉중(得成竹于胸中)·흉중유성죽(胸中有成竹)·유성죽흉(有成竹胸)이라고도 한다.

동파라는 호로 유명한 소식은 문장뿐만 아니라 서화(書畵)에도 능하였다. 소식은 정치적으로는 불우하였으나, 그가 그린 대나무와 그 기법은 옥국법(玉局法)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일찍이 화죽기(花竹記)라는 책에서 대나무를 그리려면, 먼저 마음 속에 대나무을 완성해야 한다[故畵竹, 必先成竹于胸中]라고 하였다.

그에게는 문동(文同)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문동(文同)은 중국 북송의 문인이자 화가로, 자는 여가(與可)이다. 시문과 글씨·죽화(竹畵)에 특히 뛰어났으며, 인품이 고결하고 박학다식하여 사마 광(司馬光)·소식 등은 문동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문동은 후세에 묵죽(墨竹)의 개조(開祖)로 추앙받았다.

문동의 집은 앞뒤로 대가 우거져 있어 제법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대를 몹시 사랑하여 직접 심어서 돌보기도 하였다. 시간만 나면 죽림에 들어가서 대가 자라는 모습, 가지 치는 상태, 잎이 우거지는 모습, 그리고 죽순이 나오는 모양과 자라는 모습 등을 정성들여 꼼꼼히 관찰하여 대에 대한 모든 것을 터득하였다. 그후로, 그는 대를 완상(玩賞)하다가 흥에 겨우면 집으로 들어가 종이를 펼치고 먹을 갈아 그림을 그렸다. 대에 대해 충분히 연구 관찰하였으므로, 그가 그리는 묵죽화는 박진감이 있다고 평판이 높았다. 그 자신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로 대를 그릴 뿐이었으나, 세간에서는 높이 평가하여 귀하게 취급하게 되었다. 그의 묵죽화가 천하일품이라고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그림을 그려받으려는 사람들이 몰려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조보지(晁補之)는 학자이자 시인이었는데 문동과는 절친한 친구였다. 문동은 그가 찾아오면 반가이 맞아 죽림으로 가서 차를 마시며 즐겨 한담을 나누었는데, 조보지는 문동이 즉석에서 대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문동에게 그림을 배우고 싶어하는 청년이 조보지를 찾아와 문동의 그림에 대해 물었다. 조보지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여가가 대를 그리고자 할 때, 흉중에는 이미 성죽이 있다[與可畵竹時 胸中有成竹].” 여기서 ‘여가’는 문동의 자(字)이다. 조보지는 문동의 그림이 어느 만큼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인가를 이 말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비롯하여 ‘흉유성죽’이란 말이 나왔으며, 어떤 일에 착수하기 전에 이미 충분한 복안이 서 있음의 비유로 사용되고 있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得成竹于胸中(득성죽우흉중) | 成竹在胸(chéngzhúzàixiōng) 일을 하기 전에 이미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 有成竹胸(유성죽흉) | 胸中有成竹(흉중유성죽) |

리더를 움직이는 부하

리더를 움직이는 부하

진실한 감동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리더는 덕을 베풀어 부하를 움직이게 하고, 충정어린 부하는 감동으로 리더를 움직이게 만든다. 리더와 부하는 상하관계 이전에 감동의 교류로 만나는 진실한 인간관계여야 한다.

중국 한(漢)나라 때의 장수 번쾌(樊噲)는 원래 패현(沛縣) 출신으로 개를 도살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진승(陳勝)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군사를 일으켰을 때 패현의 현령은 번쾌를 시켜 산속에 숨어 있는 유방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유방을 따르는 세력들이 범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현령은 성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번쾌는 현령의 배반에 분노를 느꼈다. 그는 유방을 따르던 무리들과 함께 패성을 공략하였다.

패현을 공략하고 나서 유방이 패공(沛公)의 지위에 오르자, 번쾌는 그때부터 그의 가신이 되어 수족처럼 따라다녔다.

유방이 복양(濮陽)에서 진나라 장한의 군사를 공격할 때, 번쾌는 가장 먼저 성 위로 올라가 적의 수급 23개를 베었다. 그는 계속 유방을 따라 성양(城陽)․호유(戶牖)․성무(成武)․하간(河間)․개봉(開封)․곡우(曲遇)․완릉(宛陵)․장사(長社)․환원(轘轅)․양성(陽城)․무관(武關) 등의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가장 먼저 성루로 올라가 적을 베어 넘겼으며, 그가 단독으로 적의 수급을 베거나 사로잡은 포로들만 해도 그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번쾌는 유방의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따라서 그 용맹은 유방의 휘하 장수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였다.

항우가 홍문(鴻門)의 연회석상에서 범증(范增)과 함께 유방을 죽이려는 계략을 꾸며 휘하 장수로 하여금 칼춤을 추게 하였을 때, 번쾌는 철퇴를 든 채 불같이 연회석상으로 들어가 항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때 번쾌는 항우가 주는 술을 단숨에 비운 뒤 돼지 어깻죽지 한 짝이 안주로 나오자, 그 날고기를 칼로 썩썩 썰어 삽시간에 말끔히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항우를 향해 다음과 같이 큰소리로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미리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패공께서는 먼저 관중에 들어가 함양을 평정하고 패상으로 군대를 물려 노숙시키면서 대왕의 군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소인배의 말만 듣고 패공을 의심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런 일로 인하여 천하가 분열되고, 사람들이 대왕을 믿지 못할 분으로 생각할까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그때 항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유방은 그 틈을 타서 변소에 가는 척 연회석을 빠져 나왔다. 번쾌는 곧 그 뒤를 따라 유방을 호위하며 패상에 있는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만약 그때 번쾌의 용맹스런 배짱이 아니었다면 유방은 칼춤을 추던 항우의 휘하 장수에게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항우가 유방을 한(漢)나라 왕으로 삼았을 때, 유방은 번쾌에게 열후(列侯)의 작위를 주었다.

그 이후 번쾌는 유방이 항우와 싸울 때에도 여전히 선봉장으로 성루에 가장 먼저 올라갔으며, 양하(陽夏) 전투에서는 초나라 주장군(周將軍)의 병사 4천여 명을 생포하기도 하였다.

항우가 죽고 나서 유방은 황제가 되었다. 한신이 모반을 꾀하려 했을 때, 번쾌는 한신을 체포하고 초나라 땅을 평정하였다. 한고조는 공을 세운 번쾌에게 식읍으로 무양(舞陽) 땅을 주었는데, 이때부터 그를 무양후(舞陽侯)라 불렀다.

한고조는 번쾌에게 자신의 처제인 여수(呂須)를 시집보냈다. 따라서 두 사람은 동서지간이 된 것이었다. 번쾌는 드디어 좌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경포(黥布)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고조는 심한 우울병에 시달렸다. 그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누워 지냈다. 경비병들에게 명령을 내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감히 황제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갔을 때 참다못한 번쾌가 경비병들을 밀치고 황제의 처소로 들이닥쳤다. 그때서야 다른 대신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때 한고조는 환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번쾌는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폐하께서 저희들과 함께 패현에서 일어나 천하를 평정할 때에는 그 얼마나 혈기가 왕성하였습니까? 지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는데 어찌하여 그토록 누워만 계십니까? 폐하께서 병으로 누워계시니 대신들이 몹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저희들과 일을 논의하지 않으시고 어찌하여 홀로 일개 환관만 상대하시다가 운명하려고 하십니까? 아니, 폐하께서는 저 진나라를 파멸시킨 환관 조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그러자 한고조가 웃으며 일어났다.

“그대 같은 천하대장부가 울 때도 다 있구려.”

한고조는 번쾌의 눈물어린 충정에 감동하여 병상을 털고 일어난 것이었다.

한고조 유방과 번쾌는 서로 동서지간이기는 하지만, 혈연보다 더 뜨거운 정으로 결합된 관계였다. 무엇이 그들을 그처럼 단단한 고리로 묶어주었을까. 그것은 리더의 덕과 부하의 충정이 ‘감동’이라는 인간적 믿음으로 맺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하의 충정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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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주자의 10가지 후회

Life: 주자의 10가지 후회

1.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후에 후회 한다.
(不孝父母, 死後悔 불효부모 사후회)

2.
가족에게 친절히 하지 않으면, 멀어진 뒤에 후회 한다.
(不親家族, 疎後悔 불친가족 소후회)

3.
젊을 때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 한다.
(少不勤學, 老後悔 소불근학 노후회)

4.
편안할 때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실패한 뒤에 후회한다.
(安不思難, 敗後悔 안불사난 패후회)

5.
부유할 때 아껴쓰지 않으면, 가난하게 된 후 후회 한다.
(富不儉用, 貧後悔 부불검용 빈후회)

6.
봄에 밭갈고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후회 한다.
(春不耕種, 秋後悔 춘불경종 추후회)

7.
담장을 미리 고치지 않으면, 도둑 맞은 후에 후회 한다.
(不治垣墻, 盜後悔 불치원장 도후회)

8.
이성을 삼가지 않으면, 병든 후에 후회한다.
(色不謹愼, 病後悔 색불근신 병후회)

9.
술 취해서 망언한 것은, 술 깨고 난 후에 후회한다.
(醉中妄言, 醒後悔 취중망언 성후회)

10.
손님을 잘 대접하지 않으면, 손님이 떠난 후에 후회한다.
(不接賓客, 去後悔 부접빈객 거후회)


주자 : 주자학을 집대성시킨 중국 송대의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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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ries: 13억 중국인 회 맛 알았다… 국내 수산물가격 들썩인다

Sundries: 13억 중국인 회 맛 알았다… 국내 수산물가격 들썩인다

13억 중국인 회 맛 알았다… 국내 수산물가격 들썩인다

中 소득 늘자 식료품 '블랙홀'돼… 육류 이어 수산물까지 수요 급증
국내 공급량 줄면서 물가 자극
수출만 하던 오징어 中, 30% 내수로 전환



"여자 친구와 데이트할 때는 일식당 가서 참치회나 연어초밥 정도는 먹어야 체면이 섭니다. 베이징에서 이런 생선들은 부(富)의 상징이거든요."

최근 중국 출장을 다녀온 마창모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박사는 베이징에서 만난 20대 증권맨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중국 사람들은 날것을 먹지 않는 줄 알았는데, 값비싼 회를 찾는 중국인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이 회 맛을 알게 되면서 각국의 수산물 가격이 들썩이고 있다.

諱疾忌醫 (휘질기의)

諱疾忌醫(휘질기의)

諱 숨길 휘/꺼릴 휘 | 疾 병 질 | 忌 꺼릴 기 | 醫 의원 의 |

병을 숨기고 의원에게 보이기를 꺼린다는 뜻으로, 자신의 결점을 감추고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한비자(韓非子)》의 유로(喩老)편과 《사기(史記)》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 실려 있다.

춘추시대, 채(蔡)나라에 편작(扁鵲)이라는 유명한 의원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채나라 환공(桓公)에게 말했다.

"대왕께서는 병이 나셨는데, 그 병은 피부에 있습니다. 지금 치료하시지 않으면 심해질 것입니다."

이에 채환공은 병이 없다면서 치료를 거절했다. 열흘 후, 편작은 채환공을 알현하고 그에게 병이 살 속까지 퍼져서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심각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환공이 이를 무시하며 몹시 불쾌해했다.

다시 열흘이 지나자, 편작은 채환공을 찾아가 병이 이미 내장에 이르렀으니,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하게 됩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환공은 여전히 이를 무시하며 화를 냈다.

열흘 후, 편작은 환공을 찾아가 병이 이미 골수에 이르러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닷새 후, 채환공은 온몸에 고통을 느끼며 결국 죽고 말았다.

북송(北宋)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는 《통서(通書)》에서 "요즘 사람들은 잘못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바로잡아 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병을 숨기면서 의원에게 보이지 않아 몸을 망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今人有過, 不喜人規, 如護疾而忌醫, 寧滅其身而無悟也]"라고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였다.


출전

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 | 사기(史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 주자통서(周子通書)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護疾忌醫(호질기의)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Vehicle: Shanghai 2011: new Volkswagen Beetle

Vehicle: Shanghai 2011: new Volkswagen Beetle

Third generation of VW’s long-running bug makes world debut. Now ‘sportier’…
Posted by: Vijay Pattni, 18 April 2011


This is the new Volkswagen Beetle, unveiled today at the Shanghai motor show. Yes, new.

아이를 잘 키우는 법

두부를 팔며 다리 밑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부부가 있었다. 성실한 이 부부에게는 어린 아들이 한명 있었다. 아들을 자신들과 달리 뛰어난 인물로 키우고 싶었던 부부는 제나라의 현인 안자(공자의 제자)를 찾아가 물었다.

"저희 부부는 아이를 위해서 서로 도와가며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운것이 없어서 잘 가르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릅니다. 그 방법을 저희 부부에게 가르쳐 주십시요."

안자가 대답했다.

"지금 사는 대로만 하게,지금처럼 이른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아버지는 앞에서 수레를 끌고 어머니는 뒤에서 수레를 밀며 두부파는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말게, 여름에는 땀에 흥건히 젖고 겨울에는 수염에 고드름이 열리며 살아가는 그 모습을그대로 자식에게 보이게, 그보다 잘 가르치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을걸세,..."

-오늘의 참한글-


옮긴 글입니다.

차이나 파워와 함께 사는 법

[김영욱의 경제세상] 차이나 파워와 함께 사는 법
김영욱

중국이 ‘또 하나의 귀찮은 상전’으로 등장했다. 며칠 전 중국 유력신문 환구시보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중국이 우리의 비윗장을 뒤집어 놓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천안함, 연평도, 어선 충돌 등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랬다. 하지만 이번 환구시보 건은 달랐다. 전에는 비윗장은 뒤집어 놓았을 망정 “손보겠다”는 위협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놓고 강압했다.

“한국이 멋대로 행동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한다면 중국은 상응하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중국은 한국을 손봐줄 지렛대가 많다”며 “그중 하나만 사용해도 한국 사회를 뒤흔들 수 있다”고도 했다. 물론 일개 신문의 논조에 과민 반응할 필요는 없다. 설령 중국의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의 자매지라고 할지라도. 문제는 어쩌면 공연한 엄포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만한 힘을 중국은 분명히 갖고 있어서다. 역사적으로도 강대국은 늘 말발 뒤에 주먹을 숨기고 다녔다.

1990년대까지는 미국이 귀찮은 상전이었다. 시장 개방 요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쌀 시장을 열고, 담배 시장을 개방하고, 종국에는 자본시장을 자유화하라고 강요했다. 어차피 열 시장이었지만, 압력에 못 이겨 서둘러 개방한 게 탈이었다. 97년 외환위기를 맞았다. 미국이 주도한, 다자간 협정을 통한 개방이야 그나마 감내할 만했다. 그러나 수퍼301조라는 보복성 무역법안을 끼고서 휘두르는 양자 협상에선 도무지 피할 재간이 없었다. 미국이 우리의 최대 교역상대국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수출해서 번 돈으로 먹고살았기에 그들의 무례와 만용을 인내할 수밖에.

지금은 중국이 미국을 대신하는 양상이다. 2004년 미국을 제치고 최대 교역상대국이 됐다. 지난해 대(對)중국 무역의존도는 사상 처음으로 20%를 넘었다. 반면 미국은 그 절반도 안 된다. 무역흑자 의존도는 더 심하다. 올 들어 지난 11월까지 우리가 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은 380억 달러다. 하지만 대중 무역흑자는 407억 달러로 전체 흑자보다도 30억 달러나 더 많다. 중국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다른 나라와의 무역 적자도 메우고 경제성장도 한다는 얘기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중 52%가 중국과의 교역효과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 미국처럼 행동하는 건 시간문제다. 예전의 미국처럼 무역보복을 하거나 무역흑자를 줄이라고 요구할 수 있다. 무례와 만용은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다. 환구시보의 막말은 맛보기에 불과할 게다. 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둘러싼 미•중 각축전이 치열해질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누구 편이냐”며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날도 올 게다. 전에는 미국으로부터 살아남는 게 우리의 생존전략이었지만, 앞으론 중국의 거대한 자기장 속에서 어떻게 독자생존할지가 관건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필요한 건 현실을 인정하는 거다. 중국이 재채기하면 우리는 감기에 걸릴 수밖에 없으며, 중국의 압력은 더 거세질 것이라는 현실을. 싫지만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야 해결책이 나온다. 순간적인 분노와 증오에 매여 반중(反中)과 혐중(嫌中)으로 달려가선 안 된다. 이 칼럼에서 여러 차례 썼듯이, 중요한 건 용중(用中)의 지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정말 잘해야 한다.

중국 의존형 경제구조에서 벗어나는 차이나 아웃(China out) 전략도 필요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서둘러 체결하고, 한• EU FTA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인도나 브라질 등과의 협력과 제휴 강화는 물론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건 국력을 키우는 일이다. 독일처럼 세계 4위권의 경제대국이 되면 중국이 무례와 만용을 부릴 수 없다. 힘이 세면 아무도 집적대지 못한다는 건 나라도 마찬가지다. 1인당 소득 2만 달러에 안주하거나 그런 시스템으론 안 된다는 얘기다. 5만 달러, 6만 달러 전략을 세우고 그에 걸맞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중국으로부터 살아남을 지혜는 우리에게 분명 있다. 문제는 어떻게 실천하느냐다. 그런 리더가 정녕 우리에게 있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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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 (후한서) 范曄 (범엽) 068 李杜列傳 (이두열전)

後漢書(후한서) 范曄(범엽)

卷67 卷68 李杜列傳(이두열전) 卷69


1 李杜列傳: 李固字子堅,漢中南鄭人,司徒郃之子也。郃在數術傳。固貌狀有奇表,鼎角匿犀,足履龜文。少好學,常步行尋師,不遠千里。遂究覽墳籍,結交英賢。四方有志之士,多慕其風而來學。京師咸歎曰:“是復為李公矣。”司隸、益州並命郡舉孝廉,辟司空掾,皆不就。

2 李杜列傳: 陽嘉二年,有地動、山崩、火災之異,公卿舉固對策,詔又特問當世之敝,為政所宜。

3 李杜列傳: 臣聞王者父天母地,寶有山川。王道得則陰陽和穆,政化乖則崩震為災。斯皆關之天心,效於成事者也。夫化以職成,官由能理。古之進者,有德有命;今之進者,唯財與力。伏聞詔書務求寬博,疾惡嚴暴。而今長吏多殺伐致聲名者,必加遷賞;其存寬和無黨援者,輒見斥逐。是以淳厚之風不宣,彫薄之俗未革。雖繁刑重禁,何能有益?前孝安皇帝變亂舊典,封爵阿母,因造妖孽,使樊豐之徒乘權放恣,侵奪主威,改亂嫡嗣,至令聖躬狼狽,親遇其艱。既拔自困殆,龍興即位,天下喁喁,屬望風政。積敝之後,易致中興,誠當沛然思惟善道;而論者猶云,方今之事,復同於前。臣伏從山草,痛心傷臆。實以漢興以來,三百餘年,賢聖相繼,十有八主。豈無阿乳之恩?豈忘貴爵之寵?然上畏天威,俯案經典,知義不可,故不封也。今宋阿母雖有大功勤謹之德,但加賞賜,足以酬其勞苦;至於裂土開國,實乖舊典。聞阿母體性謙虛,必有遜讓,陛下宜許其辭國之高,使成萬安之福。

4 李杜列傳: 夫妃后之家所以少完全者,豈天性當然?但以爵位尊顯,專總權柄,天道惡盈,不知自損,故至顛仆。先帝寵遇閻氏,位號太疾,故其受禍,曾不旋時。老子曰:“其進銳,其退速也。”今梁氏戚為椒房,禮所不臣,尊以高爵,尚可然也。而子弟群從,榮顯兼加,永平、建初故事,殆不如此。宜令步兵校尉冀及諸侍中還居黃門之官,使權去外戚,政歸國家,豈不休乎!

5 李杜列傳: 又詔書所以禁侍中尚書中臣子弟不得為吏察

6 李杜列傳: 孝廉者,以其秉威權,容請託故也。而中常侍日月之側,聲埶振天下,子弟祿仕,曾無限極。雖外託謙默,不干州郡,而諂偽之徒,望風進舉。今可為設常禁,同之中臣。

7 李杜列傳: 昔館陶公主為子求郎,明帝不許,賜錢千萬。所以輕厚賜,重薄位者,為官人失才,害及百姓也。竊聞長水司馬武宣、開陽城門候羊迪等,無它功德,初拜便真。此雖小失,而漸壞舊章。先聖法度,所宜堅守,政教一跌,百年不復。《詩》云:“上帝板板,下民卒癉。”刺周王變祖法度,故使下民將盡病也。

8 李杜列傳: 今陛下之有尚書,猶天之有北斗也。斗為天喉舌,尚書亦為陛下喉舌。斗斟酌元氣,運平四時。尚書出納王命,賦政四海,權尊埶重,責之所歸。若不平心,災眚必至。誠宜審擇其人,以毗聖政。今與陛下共理天下者,外則公卿尚書,內則常侍黃門,譬猶一門之內,一家之事,安則共其福慶,危則通其禍敗。刺史、二千石,外統職事,內受法則。夫表曲者景必邪,源清者流必絜,猶叩樹本,百枝皆動也。周頌曰:“薄言振之,莫不震疊。”此言動之於內,而應於外者也。猶此言之,本朝號令,豈可蹉跌?閒隙一開,則邪人動心;利競暫啟,則仁義道塞。刑罰不能復禁,化導以之寑壞。此天下之紀綱,當今之急務。陛下宜開石室,陳圖書,招會群儒,引問失得,指擿變象,以求天意。其言有中理,即時施行,顯拔其人,以表能者。則聖聽日有所聞,忠臣盡其所知。又宜罷退宦官,去其權重,裁置常侍二人,方直有德者,省事左右;小黃門五人,才智閑雅者,給事殿中。如此,則論者厭塞,升平可致也。臣所以敢陳愚瞽,冒昧自聞者,儻或皇天欲令微臣覺悟陛下。陛下宜熟察臣言,憐赦臣死。

9 李杜列傳: 順帝覽其對,多所納用,即時出阿母還弟舍,諸常侍悉叩頭謝罪,朝廷肅然。以固為議郎。而阿母宦者疾固言直,因詐飛章以陷其罪,事從中下。大司農黃尚等請之於大將軍梁商,又僕射黃瓊救明固事,久乃得拜議郎。

10 李杜列傳: 出為廣漢雒令,至白水關,解印綬,還漢中,杜門不交人事。歲中,梁商請為從事中郎。商以后父輔政,而柔和自守,不能有所整裁,災異數見,下權日重。固欲令商先正風化,退辭高滿,乃奏記曰:“春秋褒儀父以開義路,貶無駭以閉利門。夫義路閉則利門開,利門開則義路閉也。前孝安皇帝內任伯榮、樊豐之屬,外委周廣、謝惲之徒,開門受賂,署用非次,天下紛然,怨聲滿道。朝廷初立,頗存清靜,未能數年,稍復墮損。左右黨進者,日有遷拜,守死善道者,滯涸窮路,而未有改敝立德之方。又即位以來,十有餘年,聖嗣未立,群下繼望。可令中宮博簡嬪媵,兼採微賤宜子之人,進御至尊,順助天意。若有皇子,母自乳養,無委保妾醫巫,以致飛燕之禍。明將軍望尊位顯,當以天下為憂,崇尚謙省,垂則萬方。而新營祠堂,費功億計,非以昭明令德,崇示清儉。自數年以來,災怪屢見,比無雨潤,而沈陰鬱泱。宮省之內,容有陰謀。孔子曰:‘智者見變思刑,愚者睹怪諱名。’天道無親,可為祗畏。加近者月食既於端門之側。月者,大臣之體也。夫窮高則危,大滿則溢,月盈則缺,日中則移。凡此四者,自然之數也。天地之心,福謙忌盛,是以賢達功遂身退,全名養壽,無有怵迫之憂。誠令王綱一整,道行忠立,明公踵伯成之高,全不朽之譽,豈與此外戚凡輩耽榮好位者同日而論哉!固狂夫下愚,不達大體,竊感古人一飯之報,況受顧遇而容不盡乎!”商不能用。

11 李杜列傳: 永和中,荊州盜賊起,彌年不定,乃以固為荊州刺史。固到,遣吏勞問境內,赦寇盜前釁,與之更始。於是賊帥夏密等斂其魁黨六百餘人,自縛歸首。固皆原之,遣還,使自相招集,開示威法。半歲閒,餘類悉降,州內清平。

12 李杜列傳: 上奏南陽太守高賜等臧穢。賜等懼罪,遂共重賂大將軍梁冀,冀為千里移檄,而固持之愈急。冀遂令徙固為太山太守。時太山盜賊屯聚歷年,郡兵常千人,追討不能制。固到,悉罷遣歸農,但選留任戰者百餘人,以恩信招誘之。未滿歲,賊皆弭散。

13 李杜列傳: 遷將作大匠。上疏陳事曰:“臣聞氣之清者為神,人之清者為賢。養身者以練神為寶,安國者以積賢為道。昔秦欲謀楚,王孫圉設壇西門,陳列名臣,秦使戄然,遂為寑兵。魏文侯師卜子夏,友田子方,軾段干木,故群俊競至,名過齊桓,秦人不敢闚兵於西河,斯蓋積賢人之符也。陛下撥亂龍飛,初登大位,聘南陽樊英、江夏黃瓊、廣漢楊厚、會稽賀純,策書嗟歎,待以大夫之位。是以巖穴幽人,智術之士,彈冠振衣,樂欲為用,四海欣然,歸服聖德。厚等在職,雖無奇卓,然夕惕孳孳,志在憂國。臣前在荊州,聞厚、純等以病免歸,誠以悵然,為時惜之。一日朝會,見諸侍中並皆年少,無一宿儒大人可顧問者,誠可歎息。宜徵還厚等,以副群望。瓊久處議郎,已且十年,眾人皆怪始隆崇,今更滯也。光祿大夫周舉,才謨高正,宜在常伯,訪以言議。侍中杜喬,學深行直,當世良臣,久託疾病,可敕令起。”又薦陳留楊倫、河南尹存、東平王惲、陳國何臨、清河房植等。是日有詔徵用倫、厚等,而遷瓊、舉,以固為大司農。

14 李杜列傳: 先是周舉等八使案察天下,多所劾奏,其中並是宦者親屬,輒為請乞,詔遂令勿考。又舊任三府選令史,光祿試尚書郎,時皆特拜,不復選試。固乃與廷尉吳雄上疏,以為八使所糾,宜急誅罰,選舉署置,可歸有司。帝感其言,乃更下免八使所舉刺史、二千石,自是稀復特拜,切責三公,明加考察,朝廷稱善。乃復與光祿勳劉宣上言:“自頃選舉牧守,多非其人,至行無道,侵害百姓。又宜止槃遊,專心庶政。”帝納其言,於是下詔諸州劾奏守令以下,政有乖枉,遇人無惠者,免所居官;其姦穢重罪,收付詔獄。

15 李杜列傳: 及沖帝即位,以固為太尉,與梁冀參錄尚書事。明年帝崩,梁太后以楊、徐盜賊盛強,恐驚擾致亂,使中常侍詔固等,欲須所徵諸王侯到乃發喪。固對曰:“帝雖幼少,猶天下之父。今日崩亡,人神感動,豈有臣子反共掩匿乎?昔秦皇亡於沙丘,胡亥、趙高隱而不發,卒害扶蘇,以至亡國。近北鄉侯薨,閻后兄弟及江京等亦共掩祕,遂有孫程手刃之事。此天下大忌,不可之甚者也。”太后從之,即暮發喪。

16 李杜列傳: 固以清河王蒜年長有德,欲立之,謂梁冀曰:“今當立帝,宜擇長年高明有德,任親政事者,願將軍審詳大計,察周、霍之立文、宣,戒鄧、閻之利幼弱。”冀不從,乃立樂安王子纘,年八歲,是為質帝。時沖帝將北卜山陵,固乃議曰:“今處處寇賊,軍興用費加倍,新創憲陵,賦發非一。帝尚幼小,可起陵於憲陵塋內,依康陵制度,其於役費三分減一。”乃從固議。時太后以比遭不造,委任宰輔,固所匡正,每輒從用,其黃門宦者一皆斥遣,天下咸望遂平,而梁冀猜專,每相忌疾。

17 李杜列傳: 初,順帝時諸所除官,多不以次,及固在事,奏免百餘人。此等既怨,又希望冀旨,遂共作飛章虛誣固罪曰:“臣聞君不稽古,無以承天;臣不述舊,無以奉君。昔堯殂之後,舜仰慕三年,坐則見堯於牆,食則睹堯於羹。斯所謂聿追來孝,不失臣子之節者。太尉李固,因公假私,依正行邪,離閒近戚,自隆支黨。至於表舉薦達,例皆門徒;及所辟召,靡非先舊。或富室財賂,或子婿婚屬,其列在官牒者凡四十九人。又廣選賈豎,以補令史;募求好馬,臨吓呈試。出入踰侈,輜軿曜日。大行在殯,路人掩涕,固獨胡粉飾貌,搔頭弄姿,槃旋偃仰,從容冶步,曾無慘怛傷悴之心。山陵未成,違矯舊政,善則稱己,過則歸君,斥逐近臣,不得侍送,作威作福,莫固之甚。臣聞台輔之位,實和陰陽,琁機不平,寇賊姦軌,則責在太尉。固受任之後,東南跋扈,兩州數郡,千里蕭條,兆人傷損,大化陵遲,而詆疵先主,苟肆狂狷。存無廷爭之忠,沒有誹謗之說。夫子罪莫大於累父,臣惡莫深於毀君。固之過釁,事合誅辟。”事奏,冀以白太后,使下其事。太后不聽,得免。

18 李杜列傳: 冀忌帝聰慧,恐為後患,遂令左右進鴆。帝苦煩甚,使促召固。固入,前問:“陛下得患所由?”帝尚能言,曰:“食煮餅,今腹中悶,得水尚可活。”時冀亦在側,曰:“恐吐,不可飲水。”語未絕而崩。固伏尸號哭,推舉侍醫。冀慮其事泄,大惡之。

19 李杜列傳: 因議立嗣,固引司徒胡廣、司空趙戒,先與冀書曰:“天下不幸,仍遭大憂。皇太后聖德當朝,攝統萬機,明將軍體履忠孝,憂存社稷,而頻年之閒,國祚三絕。今當立帝,天下重器,誠知太后垂心,將軍勞慮,詳擇其人,務存聖明。然愚情眷眷,竊獨有懷。遠尋先世廢立舊儀,近見國家踐祚前事,未嘗不詢訪公卿,廣求群議,令上應天心,下合眾望。且永初以來,政事多謬,地震宮廟,彗星竟天,誠是將軍用情之日。傳曰:‘以天下與人易,為天下得人難。’昔昌邑之立,昏亂日滋,霍光憂愧發憤,悔之折骨。自非博陸忠勇,延年奮發,大漢之祀,幾將傾矣。至憂至重,可不熟慮!悠悠萬事,唯此為大。國之興衰,在此一舉。”冀得書,乃召三公、中二千石、列侯大議所立。固、廣、戒及大鴻臚杜喬皆以為清河王蒜明德著聞,又屬最尊親,宜立為嗣。先是蠡吾侯志當取冀妹,時在京師,冀欲立之。眾論既異,憤憤不得意,而未有以相奪。中常侍曹騰等聞而夜往說冀曰:“將軍累世有椒房之親,秉攝萬機,賓客縱橫,多有過差。清河王嚴明,若果立,則將軍受禍不久矣。不如立蠡吾侯,富貴可長保也。”冀然其言。明日重會公卿,冀意氣凶凶,而言辭激切。自胡廣、趙戒以下,莫不懾憚之。皆曰:“惟大將軍令。”而固獨與杜喬堅守本議。冀厲聲曰:“罷會。”固意既不從,猶望眾心可立,復以書勸冀。冀愈激怒,乃說太后先策免固,竟立蠡吾侯,是為桓帝。

20 李杜列傳: 後歲餘,甘陵劉文、魏郡劉鮪各謀立蒜為天子,梁冀因此誣固與文、鮪共為妖言,下獄。門生勃海王調貫械上書,證固之枉,河內趙承等數十人亦要鈇鑕詣闕通訴,太后明之,乃赦焉。及出獄,京師市里皆稱萬歲。冀聞之大驚,畏固名德終為己害,乃更據奏前事,遂誅之,時年五十四。

21 李杜列傳: 臨命,與胡廣、趙戒書曰:“固受國厚恩,是以竭其股肱,不顧死亡,志欲扶持王室,比隆文、宣。何圖一朝梁氏迷謬,公等曲從,以吉為凶,成事為敗乎?漢家衰微,從此始矣。公等受主厚祿,顛而不扶,傾覆大事,後之良史,豈有所私?固身已矣,於義得矣,夫復何言!”廣、戒得書悲慚,皆長歎流涕。

22 李杜列傳: 州郡收固二子基、茲於郾城,皆死獄中。小子燮得脫亡命。冀乃封廣、戒而露固尸於四衢,令有敢臨者加其罪。固弟子汝南郭亮,年始成童,遊學洛陽,乃左提章鉞,右秉鈇鑕,詣闕上書,乞收固屍。不許,因往臨哭,陳辭於前,遂守喪不去。夏門亭長呵之曰:“李、杜二公為大臣,不能安上納忠,而興造無端。卿曹何等腐生,公犯詔書,干試有司乎?”亮曰:“亮含陰陽以生,戴乾履坤。義之所動,豈知性命,何為以死相懼?”亭長歎曰:“居非命之世,天高不敢不跼,地厚不敢不蹐。耳目適宜視聽,口不可以妄言也。”太后聞而不誅。南陽人董班亦往哭固,而殉尸不肯去。太后憐之,乃聽得襚斂歸葬。二人由此顯名,三公並辟。班遂隱身,莫知所歸。

23 李杜列傳: 固所著章、表、奏、議、教令、對策、記、銘凡

24 李杜列傳: 十一篇。弟子趙承等悲歎不已,乃共論固言跡,以為德行一篇。

25 李杜列傳: 燮字德公。初,固既策罷,知不免禍,乃遣三子歸鄉里。時燮年十三,姊文姬為同郡趙伯英妻,賢而有智,見二兄歸,具知事本,默然獨悲曰:“李氏滅矣!自太公已來,積德累仁,何以遇此?”密與二兄謀豫藏匿燮,託言還京師,人咸信之。有頃難作,下郡收固三子。二兄受害,文姬乃告父門生王成曰:“君執義先公,有古人之節。今委君以六尺之孤,李氏存滅,其在君矣。”成感其義,乃將燮乘江東下,入徐州界內,令變名姓為酒家傭,而成賣卜於巿。各為異人,陰相往來。

26 李杜列傳: 燮從受學,酒家異之,意非恆人,以女妻燮。燮專精經學。十餘年閒,梁冀既誅而災眚屢見。明年,史官上言宜有赦令,又當存錄大臣冤死者子孫,於是大赦天下,并求固後嗣。燮乃以本末告酒家,酒家具車重厚遣之,皆不受,遂還鄉里,追服。姊弟相見,悲感傍人。既而戒燮曰:“先公正直,為漢忠臣,而遇朝廷傾亂,梁冀肆虐,令吾宗祀血食將絕。今弟幸而得濟,豈非天邪!宜杜絕眾人,勿妄往來,慎無一言加於梁氏。加梁氏則連主上,禍重至矣。唯引咎而已。”燮謹從其誨。後王成卒,燮以禮葬之,感傷舊恩,每四節為設上賓之位而祠焉。

27 李杜列傳: 州郡禮命,四府並辟,皆無所就,後徵拜議郎。及其在位,廉方自守,所交皆舍短取長,好成人之美。時潁川荀爽、賈彪,雖俱知名而不相能,燮並交二子,情無適莫,世稱其平正。

28 李杜列傳: 靈帝時拜安平相。先是安平王續為張角賊所略,國家贖王得還,朝廷議復其國。燮上奏曰:“續在國無政,為妖賊所虜,守藩不稱,損辱聖朝,不宜復國。”時議者不同,而續竟歸藩。燮以謗毀宗室,輸作左校。未滿歲,王果坐不道被誅,乃拜燮為議郎。京師語曰:“

29 李杜列傳: 父不肯立帝,子不肯立王。”

30 李杜列傳: 擢遷河南尹。時既以貨賂為官,詔書復橫發錢三億,以實西園。燮上書陳諫,辭義深切,帝乃止。先是潁川甄邵諂附梁冀,為鄴令。有同歲生得罪於冀,亡奔邵,邵偽納而陰以告冀,冀即捕殺之。邵當遷為郡守,會母亡,邵且埋屍於馬屋,先受封,然後發喪。邵還至洛陽,燮行塗遇之,使卒投車於溝中,笞捶亂下,大署帛於其背曰“諂貴賣友,貪官埋母”。乃具表其狀。邵遂廢錮終身。燮在職二年卒,時人感其世忠正,咸傷惜焉。

31 李杜列傳: 杜喬字叔榮,河內林慮人也。少為諸生,舉孝廉,辟司徒楊震府。稍遷為南郡太守,轉東海相,入拜侍中。

32 李杜列傳: 漢安元年,以喬守光祿大夫,使徇察兗州。表奏太山太守李固政為天下第一;陳留太守梁讓、濟陰太守汜宮、濟北相崔瑗等臧罪千萬以上。讓即大將軍梁冀季父,宮、瑗皆冀所善。還,拜太子太傅,遷大司農。

33 李杜列傳: 時梁冀子弟五人及中常侍等以無功並封,喬上書諫曰:“陛下越從藩臣,龍飛即位,天人屬心,萬邦攸賴。不急忠賢之禮,而先左右之封,傷善害德,興長佞諛。臣聞古之明君,褒罰必以功過;末世闇主,誅賞各緣其私。今梁氏一門,宦者微孽,並帶無功之紱,裂勞臣之土,其為乖濫,胡可勝言!夫有功不賞,為善失其望;姦回不詰,為惡肆其凶。故陳資斧而人靡畏,班爵位而物無勸。苟遂斯道,豈伊傷政,為亂而已,喪身亡國,可不慎哉!”書奏不省。

34 李杜列傳: 益州刺史种暠舉劾永昌太守劉君世以金蛇遺梁冀

35 李杜列傳: ,事發覺,以蛇輸司農。冀從喬借觀之,喬不肯與,冀始為恨。累遷大源臚。時冀小女死,令公卿會喪,喬獨不往,冀又銜之。

36 李杜列傳: 遷光祿勳。建和元年,代胡廣為太尉。桓帝將納梁冀妹,冀欲令以厚禮迎之,喬據執舊典,不聽。又冀屬喬舉汜宮為尚書,喬以宮臧罪明著,遂不肯用,因此日忤於冀。先是李固見廢,內外喪氣,群臣側足而立,唯喬正色無所回橈。由是海內歎息,朝野瞻望焉。在位數月,以地震免。宦者唐衡、左悺等因共譖於帝曰:“陛下前當即位,喬與李固抗議言上不堪奉漢宗祀。”帝亦怨之。及清河王蒜事起,梁冀遂諷有司劾喬及李固與劉鮪等交通,請逮案罪。而梁太后素知喬忠,但策免而已。冀愈怒,使人脅喬曰:“早從宜,妻子可得全。”喬不肯。明日冀遣騎至其門,不聞哭者,遂白執繫之,死獄中。妻子歸故郡。與李固俱暴尸於城北,家屬故人莫敢視者。

37 李杜列傳: 喬故掾陳留楊匡聞之,號泣星行到洛陽,乃著故赤幘,託為夏門亭吏,守衛尸喪,驅護蠅蟲,積十二日,都官從事執之以聞。梁太后義而不罪。匡於是帶鈇鑕詣闕上書,并乞李、杜二公骸骨。太后許之。成禮殯殮,送喬喪還家,葬送行服,隱匿不仕。匡初好學,常在外黃大澤教授門徒。補蘄長,政有異績,遷平原令。時國相徐曾,中常侍璜之兄也,匡恥與接事,託疾牧豕云。

38 李杜列傳: 論曰:夫稱仁人者,其道弘矣!立言踐行,豈徒徇名安己而已哉,將以定去就之概,正天下之風,使生以理全,死與義合也。夫專為義則傷生,專為生則騫義,專為物則害智,專為己則損仁。若義重於生,舍生可也;生重於義,全生可也。上以殘闇失君道,下以篤固盡臣節。臣節盡而死之,則為殺身以成仁,去之不為求生以害仁也。順桓之閒,國統三絕,太后稱制,賊臣虎視。李固據位持重,以爭大義,確乎而不可奪。豈不知守節之觸禍,恥夫覆折之傷任也。觀其發正辭,及所遺梁冀書,雖機失謀乖,猶戀戀而不能已。至矣哉,社稷之心乎!其顧視胡廣、趙戒,猶糞土也。

39 李杜列傳: 贊曰:李、杜司職,朋心合力。致主文、宣,抗情伊、稷。道亡時晦,終離罔極。燮同趙孤,世載弦直。

後漢書 (후한서) 范曄 (범엽)

後漢書(후한서) 范曄(범엽)

後汉书(hòuhànshū)

구분: 역사서
저자: 범엽(范曄)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송(宋)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광무제(光武帝)에서 헌제(献帝)에 이르는 후한(後漢)의 13대 196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남조(南朝) 송(宋, 420~479)의 범엽(范曄, 398~445)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되어 있다.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부터 헌제(献帝, 재위 189~220)까지 후한(後漢)의 13대(代) 196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인 ‘25사(史)’ 가운데에서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함께 ‘4사(四史)’로 꼽힌다.

범엽(范曄)이 <후한서(後漢書)>를 편찬하기 전에 오(呉, 222~280)의 사승(謝承), 설형(薛瑩), 화교(華嶠), 동진(東晋, 316~420)의 사마표(司馬彪, ?~306), 사침(謝沈), 원산송(袁山松), 장번(張璠) 등이 쓴 7종의 <후한서(後漢書)>가 전해지고 있었다. 범엽(范曄)은 432년(宋 文帝 元嘉 9년) 선성(宣城) 태수(太守)로 좌천되면서 7종의 <후한서>와 유진(劉珍) 등이 편찬한 <동관한기(東觀漢記)>, 원굉(袁宏, 328~376)이 쓴 <후한기(後漢紀)>,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등을 참고하여 <후한서(後漢書)>를 새로 편찬하였다. 범엽은 사료(史料)들을 새로 폭넓게 수집하고 비교, 정리하여 기존의 사서(史書)들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범엽(范曄)의 <후한서>가 편찬되면서 기존의 <후한서>들은 점차 읽히지 않게 되어 망실(亡失)되었고, 범엽(范曄)의 <후한서>가 후한(後漢)의 정사(正史)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범엽은 445년(元嘉 22년)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 409~451)의 모반(謀叛)에 참여했다가 처형되면서 <후한서>의 지(志) 부분을 완성하지 못했다. 양(梁, 502~557)의 유소(劉昭)는 동진(東晋)의 사마표(司馬彪)가 편찬한 <속한서(續漢書)>에서 율력(律曆), 예의(禮儀), 제사(祭祀), 천문(天文), 오행(五行), 군국(郡國), 백관(百官), 여복(輿服) 등의 ‘팔지(八志)’ 부분에 주석(註釋)을 붙여 30권의 <보주후한지(補注後漢志)>를 편찬하였다. 이로써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이루어진 <후한서(後漢書)>의 체재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북송(北宋, 960∼1126) 초기까지 <후한서(後漢書)>는 90권의 본기(本紀), 열전(列傳)과 30권의 <보주후한지(補注後漢志)>가 따로 간행되었는데, 본기(本紀), 열전(列傳)에는 당(唐, 618~907) 시대에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의 둘째아들인 장회태자(章懐太子) 이현(李賢, 654~684)이 붙인 주석(註釋)이 덧붙여 있었다. 북송(北宋) 진종(眞宗, 재위 997~1022) 때인 1022년(宋 眞宗 乾興 원년), 손석(孫奭)은 이현(李賢)이 주석(註釋)을 붙인 90권의 본기(本紀), 열전(列傳)에 유소(劉昭)가 주석(註釋)을 붙인 30권의 지(志)를 합하여 간행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후한서(後漢書)>의 판본(板本)이다.

<후한서(後漢書)>는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의 체례(體例)를 따르고 있으나, 표(表)가 없으며, 본기(本紀)에 황후기(皇后紀)를 따로 수록하였다. 열전(列傳)에 당고(黨錮), 환자(宦者), 문원(文苑), 독행(獨行), 방술(方術), 일민(逸民), 열녀(列女)의 7개 항목을 새로 둔 것도 특징이다. 청(淸, 1636~1912) 시대에는 <후한서(後漢書)>의 표(表), 지(志), 주(注)에 대한 보완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혜동(惠棟, 1697~1758)의 <후한서보지(後漢書補志)>, 왕선겸(王先謙, 1842~1917)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이자명(李慈銘, 1830~1895)의 <후한서집주(後漢書集注)>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후한서(後漢書)> 85권의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부여(夫余), 읍루(挹婁), 고구려(高句驪), 동옥저(東沃沮), 예 (濊), 삼한(三韓), 왜(倭)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많은 부분이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차이가 있거나 새로운 사실들도 많아 한반도의 고대사(古代史) 연구에 중요한 사료(史料)로 쓰이고 있다.


관련 고사성어



列傳

013 卷11 劉玄劉盆子列傳第一(유현유분자열전)

鐵中錚錚(철중쟁쟁) 쇠 중(中)에서 소리가 가장 맑다는 뜻으로, 동류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 |

庸中佼佼(용중교교) ①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라는 뜻으로 ‘철중쟁쟁’과 함께 그만그만한 자 중에서 조금 나은 자를 두고 이르는 말. ②아름다운 여인. |

015 卷13 隗囂公孫述列傳第三(외효공손술열전)

置之度外(치지도외) |

026 卷24 馬援列傳第十四(마원열전)

老益壯(노익장) | 老當益壯(노당익장, 老当益壮,lǎodāngyìzhuàng)) 늙을수록 더욱 강인한 마음과 뜻을 지녀야 한다. 《후한서·마원전(後漢書·馬援傳)》에 나오는 “大丈夫爲者 窮當益堅 老當益壯 (丈夫为志,穷当益坚,老当益壮; 사나이의 마음가짐은 어려울수록 더욱 굳세어져야 하고, 늙을수록 더욱 강인해져야 한다.)”란 말에서 유래함 |

050 卷58 虞傅蓋臧列傳第四十八(우전개장열전) 虞詡・傳燮・蓋勳・臧洪

盤根錯節(반근착절) | 兵不厭詐(병불염사)

068 卷63 李杜列傳(이두열전)第五十三 李固・杜喬

狼狽(낭패) |




참조항목

二十四史(이십사사) | 十八史略(십팔사략) |


http://zh.wikipedia.org/wiki/後漢書
http://ko.wikipedia.org/wiki/후한서

後起之秀 (후기지수)

後起之秀(후기지수)

後 뒤 후, 임금 후 | 起 일어날 기 | 之 -의 지, 갈 지 | 秀 빼어날 수 |

후배(後輩) 중(中)의 뛰어난 인물(人物)을 이르는 말


세설신어 상예(賞譽)편의 이야기.

동진(東晋) 때, 왕침(王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미치광이 같은 행동은 어려서부터 소문이 나 있었다.

어느 날, 왕침이 삼촌인 범영(范寧)의 집에 갔는데, 마침 장현(張玄)이라는 사람이 와 있었다. 범영은 장현과 왕침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다. 그러나 장현은 자리에 앉은채 왕침과는 인사도 하지 않았고, 왕침도 말을 하지 않고 나와버렸다. 범영은 왕침이 장현과 대화를 나누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저 사람은 학식이 높고 인품이 아주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데 너는 왜 인사를 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왕침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진정으로 저를 알고 싶어한다면, 스스로 저를 찾아올 것입니다."

범영은 왕침의 성격을 칭찬하며 말했다.

"너는 매우 희망이 있으니, 참으로 후배 중에서 뛰어난 인물이로다."

왕침은 말했다.

"삼촌 같으신 분이 안계셨다면, 이런 조카가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전해 들은 장현은 왕침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찾아왔다. 왕침도 그를 맞아들여 그들은 곧 좋은 친구가 되었다. 훗날 왕침은 형주자사(荊州刺史)를 맡아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後起之秀란 후배들 중의 우수한 인물 을 가리키는 말이다.


출전

세설신어 상예(賞譽)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後人發先人至 (후인발선인지)

後人發先人至(후인발선인지)

後 뒤 후, 임금 후 | 人 사람 인 | 發 필 발 | 先 먼저 선 | 人 사람 인 | 至 이를 지, 덜렁대는 모양 질 |

상대방보다 늦게 떠나 먼저 도착한다는 뜻.

손자(孫子) 군쟁편(軍爭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군쟁 중에서 어려운 점은 먼 길을 곧은 길로 삼고, 근심거리를 오히려 이로움으로 만드는데 있다. 따라서 그 길을 구불구불 가는 것처럼 하여 적을 이익으로 유인하면 나중에 출발한 군대가 먼저 도착하는 것이니 이는 우직지계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軍爭之難者, 以迂爲直, 以患爲利. 故迂其途, 而誘之以利, 後人發, 先人至, 此知迂直之計者也]”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迂直之計(우직지계) | 以迂爲直(이우위직) | 後人發先人至(후인발선인지) |

厚顔無恥 (후안무치)

厚顔無恥(후안무치)

厚 투터울 후 | 顔 얼굴 안 | 無 없을 무 | 恥 부끄러워할 치 |

옛날 중국의 하나라 계(啓) 임금의 아들인 태강은 정치를 돌보지 않고 사냥만 하다가 끝내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난다. 이에 그의 다섯 형제들은 나라를 망친 형을 원망하며 번갈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의 노래는 모두 書經의 '五子之歌'편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막내가 불렀다고 하는 노래에는 이러한 대목이 보인다.

만백성들은 우리를 원수라 하니, 우린 장차 누굴 의지할꼬. 답답하고 섧도다, 이 마음, 낯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워지누나.

萬姓仇予, 予將疇依. 鬱陶乎予心, 顔厚有.

厚顔이란 두꺼운 낯가죽을 뜻하는데, 여기에 무치(無恥)를 더하여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로 자주 쓰인다. 이는 낯가죽이 두꺼워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後生可畏 (후생가외)

後生可畏(후생가외)

뒤에 태어난 사람들, 다시 말하면 젊은 후배들을 두려워 할 만하다는 뜻. 젊은 후배들은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선배들보다 뛰어난 인물이 될 수도 있기에 가히 두렵다는 말이다.

논어 子罕篇(자한편)에 이런 말이 실려 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 후배들을 두려워 해야 하느니. 그들의 장래 학문이 오늘의 우리보다 낫거나 못할줄 어찌 알리오. 그러나 그들의 나이 사오십이 되어도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두려워 할 것도 아무것도 없느니(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자왈 후생가외 언지래자지불여금야 사십오십이무문언 사역부족외야이).

공자의 가르침이 대개 상식적이고 현실적이며 실리주의에 입각하고 있듯이 이 대목도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인간은 진보의 과정에 있다. 미래가 있다는 것은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고 노력이 따르면 얼마든지 발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50세가 되도록 이름을 낼 수 없는 사람이라면 두려워 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大器晩成(대기만성). 늘그막에 뭔가 이루어내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50세까지로 끊어 그 가능성을 한정시킨 것도 공자다워 보인다.

공자가 後生可畏라고 한 것은 제자 가운데서도 재주와 德行(덕행)이 가장 뛰어났던 顔回(안회)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자한편'의 後生可畏…바로 앞대목에 '꽃피지 못하는 싹이 있고 열매맺지 못하는 꽃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안회가 아깝게도 夭折(요절)한 것을 한탄한 것이라고 전한다.

중국의 77학번을 아시나요

중국의 77학번을 아시나요

[중앙일보, 2011년 01월]

필자는 아이 둘의 학부모다. 요즘 진보 교육감들의 숨가쁜 교육개혁에 현기증이 난다. 공짜로 먹이고, 교복은 벗기고, 머리는 기르고, 중간•기말고사는 없애고…. 일단 바꾸고 보자는 식이다. 아찔한 속도감이다. 교육개혁 속도전이라면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을 따라올 자가 없다. 1977년 여름 최고지도자로 복권된 그는 “중국에 가장 절박한 것은 교육”이라며 40명의 교육전문가와 5일간 합숙토론을 벌였다. 그가 직접 주재한 이 회의에서 12년 만에 우리의 대입수능인 가오카오(高考)의 부활이 결정됐다. 그해 입학한 대학 새내기가 중국의 77학번이다.

문화혁명 10년간 중국 대학에는 입시가 없었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학교는 혁명가를 양성해야 한다”는 교시를 내렸다. 출신성분을 따지는 추천제를 통해 노동자•농민•군인들이 무더기로 들어왔다. 대부분 배울 자세도 아니고, 공부를 외면했다. 돌아다니며 정치 투쟁에만 골몰했다. 여기에 덩이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는 마오쩌둥 선집을 찍던 종이와 윤전기로 가오카오 시험지를 인쇄했다. 불과 6개월 뒤 전국 각지에 하방(下放)됐던 570만 명의 인재들이 이 시험을 보았다. 당시 경쟁률은 무려 24:1을 기록했다.

중국의 77학번은 제대로 교육받은 첫 세대다. 해박한 지식과 전문성을 갖춘 집단으로 성장했다. 이제 이들이 중국을 이끌고 세계를 뒤흔드는 세상이 됐다. 차세대 지도자인 리커창(李克强•이극강) 부총리, 세계적 영화감독인 장이머우(張藝謀•장예모), 노벨 평화상을 받은 류 샤오보(劉曉波•류효파) 등이 대표주자다. 리 부총리는 집단농장에서 3년간 농사짓다 베이징대에 합격했고, 국민당 장교 출신의 아버지를 둔 장 감독은 온갖 박해를 받다 27살 늦깎이로 베이징영화학교에 들어갔다.

지금 중국의 교육 현장은 어떨까. 한마디로 경쟁 그 자체다. 중•고부터 입시가 있다. 명문학교인 중점학교의 입시 경쟁은 살인적이다. 우월반 편성은 기본이다. 올림피아드준비반에, 수시대비반까지 있다. 거의 의무적으로 밤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한다. 머리와 교복은 따로 규정이 없다. 스스로 알아서 공부에 지장이 없도록 남학생은 빡빡머리, 여학생은 단발머리를 한다. 교복? 안 입는 게 아니라 아예 없다. 대신 우리의 체육복이 교복이다.

중국 교사들은 우리의 ‘교총 대(對) 전교조’와 달리 일반교사-고급교사-특급교사로 나누어진다. 매 학기 교장•학생•학부모에게 칼 같이 종합평가를 받고, 잘못하면 학기 중간에 담임에서 쫓겨난다. 자신이 맡은 반의 대학 진학률, 가오카오 성적에 따라 연봉도 천차만별이다. 이들은 승진을 위해 자기계발에 목을 맨다. 특급교사로 승진하면 정년이 5년 연장되고 대학교수 이상의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대신 매년 일류 학술지에 3편 이상의 논문을 실어야 한다.

이런 중국 교육이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상하이가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읽기•수학•과학에서 골고루 압도적 점수차를 보였다. 왜 우리 진보 교육감들은 입만 열면 “핀란드를 보라”고 하는지 궁금하다. 핀란드는 PISA에서 우리보다 한참 밑이다. 오히려 진정한 경쟁 상대는 중국•홍콩•대만이다. 진보 교육감들은 자신의 이념에 따라 핀란드의 좋은 면만 부각시키고 무섭게 부상한 중국은 애써 외면하는 것은 아닌가.

교육은 한 세대 뒤의 국력을 가늠하는 지표다. 우리 아이들의 경쟁 상대는 ‘여기’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있다. 같은 학교 짝꿍이 아니라, 전 세계 또래 아이들과 어깨를 겨뤄야 한다. 한국은 사람 하나로 경제기적을 이뤘고, 앞으로도 믿을 건 사람밖에 없는 나라다. 머리를 길러 머리가 좋아진다면 조선시대로 돌아가고, 교복을 없애야 성적이 오른다면 알몸의 구석기시대로 달려갈 수 있는 게 한국의 학부모들이다. 중국 77학번의 화려한 비상을 보면서 덩의 혜안(慧眼)에 다시 한번 무릎을 친다. 우리 진보 교육감들의 어설픈 실험이 나중에 우리의 가슴을 치지는 말아야 할 텐데…. 왠지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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