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虛內實 (외허내실)

外虛內實(외허내실)

겉으로 보기에는 허한 것 같으면서 속은 꽉 참.

外柔內剛 (외유내강)

外柔內剛(외유내강)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러우나 속은 꿋꿋하고 강함.

an iron hand in a velvet glove


겉으로는 부드럽고 순하게 보이지만 속마음은 실제로 단단하고 강하다는 뜻으로 내강외유(內剛外柔)라고도 한다. 굳셈과 부드러움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뜻의 강유겸전(剛柔兼全)과 비슷한 말이다.

중국 '당서(唐書)'의 '노탄전(盧坦傳)'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노탄은 중국 당나라 허난성[河南省] 출신으로 관직에 올랐을 때 상관인 두황상(杜黃裳)이 노탄에게 '어느 집안의 자제가 주색(酒色)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데 왜 보살피지 않는가'하고 물었다.

노탄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는 청렴한 관리는 축재하지 않을 텐데 재물이 많은 것은 곧 다른 사람을 착취해 얻은 것이다. 방탕한 생활로 재물을 다 써 잃는다면 다른 사람을 착취해 거둔 재물을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 주는 일'이라고 하였다.

황제가 절도사(節度使) 이복(李復)의 후임으로 요남중(姚南仲)을 임명하자 군대감독관인 설영진(薛盈珍)은 요남중이 서생(書生)이었다고 하며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노탄은 '요남중은 외유중강(外柔中剛)이고, 설영진이 요남중의 인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에 따르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설영진을 비판하였다. 노탄의 말에 나오는 외유중강의 '중강'이라는 말은 '내강'과 같은 뜻이다.

玩火自焚 (완화자분)

玩火自焚(완화자분)

玩火自焚 [wánhuǒzìfén]

玩 희롱할 완, 가지고 놀 완 | 火 불 화 | 自 스스로 자 | 焚 불사를 분 |

불을 가지고 놀다가 자신을 태워 버린다는 뜻으로, 무모한 일로 남을 해치려다 결국 자신이 해를 입게 됨.

Somebody who plays with fire will get burnt, (fig.) One venturing to do evil is bound to suffer from his own evil.


춘추좌전 은공(隱公) 4년조에는 무력의 위험성을 경고한 기록이 있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위(衛)나라 군주인 장공(莊公)의 첩이 아들을 낳자 이름을 주우라고 하였다. 주우는 어려서부터 장공의 총애를 받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 무력으로써 해결하려 했다. 장공이 죽자 환공(桓公)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위(衛)나라의 공자(孔子) 주우는 기원전 719년 환공(桓公)을 죽이고 군주의 자리를 찬탈했다. 주우는 왕위를 찬탈한 후 송(宋)나라와 진(陳)나라, 채(蔡)나라 등과 연합하여 정(鄭)나라를 공격했다.

노(魯)나라 은공(隱公)이 이 소식을 듣고 대부(大夫) 중중(衆仲)에게 주우가 뜻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중중은 이렇게 대답(對答)했다.

"주우는 무력만을 믿고 잔인(殘忍)한 짓을 하면서도 태연합니다만, 무력에 의지했다간 국민들이 등을 돌리고 심복들마저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무력이란 불과 같은 것이어서, 단속하지 않으면 장차 자신이 그 불속에서 타게 될 것입니다. [夫兵, 猶火也. 弗 , 將自焚也]"

玩火自焚이란 무모한 일로 남을 해치려다 결국 자신이 해를 입게 됨을 비유한 말로 이러한 노(魯)나라 중중(衆仲)의 말에서 유래(由來)한다.


출전

좌씨전(左氏傳)

王昌齡 (왕창령, 698~755?)

王昌齡(왕창령, 698~755?)

異名: 王昌龄(Wáng Chānglíng), 자 소백(少伯)
국적: 중국 당나라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장신추시(長信秋詩)》,《출새(出塞)》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출새(出塞)》,《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자 소백(少伯). 강령(江寧:江蘇省 南京) 출신. 727년 진사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었고, 734년 박학굉사(博學宏詞)의 시험에 합격하여 범수(氾水:河南省 成皐縣)의 위(尉)가 되었다. 그러나 소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강령의 승(丞), 다시 용표(龍標:湖南省 黔陽)의 위(尉)로 좌천되었다. 왕강령 ·왕용표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그 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자사(刺史)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착상이 청신하며, 특히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 《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 《출새(出塞)》 《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시집 《왕창령 전집》(5권)과 그의 저술로 전하여지는 시론서 《시격(詩格)》 《시중밀지(詩中密旨)》 각 1권이 남아 있다.

王安石 (왕안석, Wáng ānshí, 1021~1086)

王安石(왕안석, 1021~1086)

異名: 王安石(Wáng ānshí), 자 개보(介甫), 호(號) 반산(半山)
국적: 중국 송(宋)
활동분야: 정치


중국 북송(北宋) 때의 문필가이자 정치인으로서 1069~1076년에 신법(新法)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중국 송(宋, 960∼1279) 때의 문필가이자 정치인으로 자(字)는 개보(介甫), 호(號)는 반산(半山)이다. 문필가이자 시인으로서 그는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북송(北宋)의 6대 황제인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에게 발탁되어 1069~1076년에 신법(新法)이라고 불리는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시역법(市易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의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개혁적 정치 사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장시성[江西省] 푸저우[撫州] 린촨현[臨川懸] 출신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다가 할아버지 때부터 관직에 진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버지 왕익(王益)은 지방관으로 중국 각지를 전전했다. 왕안석(王安石)은 열아홉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녕부(江寧府, 지금의 南京)에 정착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재(文才)를 인정받았으며, 유가 경전뿐 아니라 제자백가의 서적에서 의서(醫書), 소설까지 다양한 서적들을 읽으며 기존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하였다.

인종(仁宗, 재위 1022~1063) 때인 1042년 과거에 합격하여 섬서회남절도판관(陝西淮南節度判官)으로 관직을 시작한 뒤 20년 정도를 화남(華南) 지방에서 각급 지방관으로 근무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관개 사업과 재정 관리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널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학문과 행정 능력을 갖춘 유능한 인재로 명성이 높아지면서 중앙 관직으로의 진출을 추천 받기도 하였지만, 왕안석은 집안 사정의 어려움을 내세워 사양하였다.

1058년에 왕안석은 인종(仁宗)에게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서술한 <만언서(萬言書)>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정치의 폐단(弊端)을 지적하고 <주례(周禮)>를 전범(典範)으로 한 개혁의 추진을 주장하며 인재 양성과 선발, 이재(理財) 방법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만언서>는 그의 개혁 정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문장에서도 모범이 되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1067년 영종(英宗, 재위 1063~1067)의 뒤를 이어 열아홉의 나이로 황위(皇位)에 오른 신종(神宗)은 정치의 쇄신과 개혁을 추진하며 왕안석을 등용하였다. 신종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왕안석을 강녕부(江寧府) 지사(知事)로 임명하고, 곧바로 중앙으로 불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았다. 그리고 1069년에는 그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하여 신법(新法)을 입안하여 개혁 정책을 실행케 하였다. 왕안석은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를 설치하여 신법(新法)을 추진하였으며, 1070년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어 재상(宰相)으로서 국정 전반을 관장하였다.

왕안석은 1069년 균수법(均輸法)을 시작으로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 시역법(市易法), 보마법(保馬法) 등의 신법(新法)을 잇달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대지주와 대상인, 고리대업자들과 정부 안의 보수파의 반발에 부닥쳤다. 1074년 심한 기근마저 나타나 반발이 커지자 신종은 왕안석을 강령부(江寧府) 지사(知事)로 좌천하여 이를 무마하려 하였다. 왕안석은 이듬해 다시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임명되었지만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지 못했다. 그리고 아들을 잃는 일까지 일어나자 1076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강녕부(江寧府)로 은거하였다. 그는 1086년 5월 21일에 사망하였고, 죽은 뒤 형국공(荆国公)으로 봉해졌다.

왕안석은 유학의 실용적 해석과 응용을 강조하였으며,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례(周禮)> 등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유학의 도덕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나 ‘법치’를 강조했으며,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때문에 왕안석의 사상은 유교 전통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특히 성리학(性理學)에서 구법당(舊法黨)의 사상을 정론(正論)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는 배척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왕안석의 개혁 정책에 대해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의 사상이 지니는 의의도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는 정론(政論)과 여행수기, 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산문은 현실주의 풍격을 지니고 있으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만년(晩年)에는 한자(漢字)의 연원과 제자(製字) 원리 등을 연구하여 <자설(字說)>이라는 책을 남기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왕임천문집(王臨川文集)>, <임천집습유(臨川集拾遗)> 등의 문집(文集)이 전해진다.

臥薪嘗膽 (와신상담)

臥薪嘗膽(와신상담)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핥으며 보복을 다짐한다는 말로 마음 먹은 일을 이루기 위해 온갖 괴로움을 무릅쓴다는 뜻.


춘추시대, 오나라 왕 합려는 월나라를 공격했다가 월왕 구천에게 크게 패했다. 이 싸움에서 부상한 합려는 목숨까지 잃게 된다. 임종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는 유언을 했다. 부차는 복수심을 다지기 위해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고 방을 드나드는 신하들에게 『부차여, 너는 월나라 군대가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을 잊었는가』라는 말을 외치게 했다. 이렇게 하는 한편 군사를 훈련시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런 소문을 들은 구천은 참모인 범려가 말리는 것을 듣지 않고 선수를 쳐 오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大敗(대패)한 구천은 회계산으로 도망갔다. 進退(진퇴)가 궁해진 구천은 신하가 되겠다며 부차에게 항복을 받아달라고 했다. 이때 부차는 중신인 오자서의 諫言(간언)을 뿌리치고 구천을 놓아주었다.

살아난 구천은 자기 곁에 쓸개를 놓아두고 수시로 쓸개를 핥아 그 쓴 맛을 맛보며 「회계의 치욕」을 상기하면서 병력을 키웠다. 구천이 오나라를 격파하여 부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그로부터 약 20년이 흐른 뒤였다.

頑石點頭 (완석점두, wánshídiǎntóu)

頑石點頭(완석점두)

顽石点头(wánshídiǎntóu)

頑 완고할 완 | 石 돌 석 | 點 끄덕일 점 | 頭 머리 두 |

顽石(wánshí) 돌, 나쁜 사람 |


'완고한 돌도 고개를 끄덕인다'라는 뜻으로, 깊이 감화받은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동진(東晉) 시대의 도생법사(道生法師)라는 승려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도생법사는 생공(生公)이라고도 부르며, 인도불교와 선(禪)을 중국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어려서 인도에서 온 승려 축법태(竺法汰)를 따라 출가하였고, 나중에 장안(長安)에서 구마라습(鳩摩羅什)에게 불법을 배웠다. 그는 《열반경(涅槃經)》이 중국에 번역되어 전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공공연히 천제성불설(闡提成佛說:깨달음이 없는 사람도 성불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다른 승려들이 이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생은 사찰에서 축출되었다. 도생은 소주(蘇州)의 호구산(虎口山)에서 기거하면서 때로는 돌멩이들을 모아 놓고 《열반경》에 대하여 강의하였다. 도생은 한참 강의를 하다가 천제성불 대목에 이르면 돌들을 향하여 "내 설법이 불심(佛心)에 부합되지 않는가"라고 물었는데, 돌멩이들이 모두 그의 말이 맞다고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나중에 《열반경》이 중국에 번역되어 전해져 도생의 설법과 부합하는 것으로 밝혀짐으로써 도생은 예전에 있던 여산(廬山)의 사찰로 돌아갔다. 이 고사는 진나라 때 쓰여진 《연사고현전(蓮社高賢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완석점두는 완고하고 무지한 사람들도 기꺼이 순종할 만큼 깊이 감화받거나 그렇게 되도록 도리를 밝혀 상대방을 잘 설득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한편 소주의 호구산에는 도생이 돌들에게 강의하던 설법대(說法臺)와 점두석(點頭石)이 지금도 남아 있어 관광지로 이용된다.


蓮社高賢傳(연사고현전) |

完璧歸趙 (완벽귀조)

完璧歸趙(완벽귀조)

完璧归赵(wánbìguīZhào)

完 완전할 완 | 璧 구슬 벽 | 歸 돌아갈 귀 | 趙 나라 조,찌를 조 |


'구슬을 온전히 조나라로 돌려보내다'라는 뜻으로, ①흠이 없는 구슬. 결점이 없이 완전함 ②빌렸던 물건을 온전히 반환함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이 화씨지벽이라는 진귀한 벽옥(璧玉)을 얻었는데,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이를 빼앗을 속셈으로 15개의 성과 벽옥을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혜문왕은 소왕의 속셈을 짐작하였으나, 제안을 거절하였다가는 강대국인 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될까 우려하였다. 그러자 무현(繆賢)이라는 신하가 자신의 식객으로 있는 인상여(藺相如)가 지용(智勇)을 겸비하였으니 대책을 상의해보라고 건의하였다.

혜문왕을 만난 인상여는 자신이 벽옥을 가지고 진나라로 가서 소왕이 약속을 지키면 벽옥을 내주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벽옥을 온전히 하여 조나라로 돌아오겠다[完璧歸趙]'고 말하였다. 인상여가 진나라로 가서 소왕에게 벽옥을 주었으나 소왕은 약속한 15개 성을 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인상여는 소왕에게 벽옥이 둘도 없는 진귀한 보물이기는 하지만 작은 흠집이 있으니 그것을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소왕이 그 말을 믿고 벽옥을 인상여에게 도로 내주었다. 그러자 인상여는 벽옥을 가지고 기둥 옆으로 가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벽옥을 기둥에 던져 부숴뜨리고 자신도 머리를 부딪쳐 자결하겠다고 소리쳤다. 소왕은 벽옥이 손상될까 두려워하여 임시변통으로 성을 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소왕의 진의를 간파한 인상여는 5일 내로 약속을 지키면 벽옥을 돌려주겠다고 말하고는 남몰래 사람들을 시켜 벽옥을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이로써 벽옥은 온전한 상태로 조나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이 고사는 《사기(史記)》의 〈인상여열전〉 편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완벽귀조는 화씨지벽이 처음의 온전한 상태로 조나라로 돌아간 것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물건을 조금도 상하지 않게 하여 완전한 상태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완벽이라는 고사성어도 이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출전]
史記(사기):廉頗藺相如列傳(염파인상여열전) |


참조어

유의어

完璧(완벽) |


사기:염파인상여열전, 史記:廉頗藺相如列傳

王勃 (왕발, Wáng Bó)

王勃(왕발)

이름: 王勃(Wáng Bó), 자 자안(子安)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강주(絳州) 용문(龍門:山西省 河津縣)
주요저서: 《왕자안집(王子安集)》


초당(初唐) 4걸(四傑)이라 불리는 중국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 시인. 종래의 완미(婉媚)한 육조 시(六朝詩)의 껍질을 벗어나 참신하고 건전한 정감을 읊어 성당 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5언 절구(五言絶句)에 뛰어났다. 시문집 《왕자안집(王子安集)》 등을 남겼다.


자 자안(子安). 강주(絳州) 용문(龍門:山西省 河津縣) 출생. 일설에는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출생이라고 한다. 수(隋)나라 말의 유학자 왕통(王通)의 손자이다. 조숙한 천재로 6세 때 문장을 잘하였고, 17세 때인 666년 유소과(幽素科)에 급제하였다. 젊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아 664년에 이미 조산랑(朝散郞)의 벼슬을 받았다. 왕족인 패왕(沛王) 현(賢)의 부름을 받고 그를 섬겼으나, 당시 유행하였던 투계(鬪鷄)에 대하여 장난으로 쓴 글이 고종(高宗)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중앙에서 쫓겨나 쓰촨[四川] 지방을 방랑하였다. 뒤에 관노(官奴)를 죽였다는 죄로 관직을 빼앗기고 교지(交趾:베트남 북부)의 영(令)으로 좌천된 아버지 복치(福畤)를 만나러갔다가 돌아오던 중, 배에서 바다로 떨어져 익사하였다.

양형 ·노조린(盧照鄰) ·낙빈왕(駱賓王) 등과 함께 초당(初唐) 4걸(四傑)이라 불리는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 시인이다. ‘왕양노락(王楊盧駱)’이라 불렸던 그는 종래의 완미(婉媚)한 육조시(六朝詩)의 껍질을 벗어나 참신하고 건전한 정감을 읊어 성당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5언절구(五言絶句)에 뛰어났으며, 시문집 《왕자안집(王子安集)》 16권을 남겼다.


참조항목

初唐四傑(초당사걸)

중국 초당기(初唐期:7세기)의 시단(詩壇)을 대표한 네 시인. 왕발(王勃)·양형(楊炯)·노조린(盧照鄰)·낙빈왕(駱賓王) 등 네 사람이며 성(姓)만을 따서 '왕양노락(王楊盧駱)'이라고도 한다.네 사람 모두 처지가 비슷하였으며 2류사족(二流士族) 출신으로 젊어서 시단에서 이름을 떨쳤다. 양형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회적으로 불우하게 끝을 맺었다. 초당시(初唐詩)의 대세(大勢)는 남조(南朝)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교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으며 사걸의 시도 총체적으로는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날 수 없으나, 이들의 청순함과 새로운 감각과 그 표현 등은 다른 초당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서정적 시풍을 느끼게 해준다. 이들 사걸의 시는 다음 성당시(盛唐詩)의 맹아(萌芽)가 되었다.

蝸角之爭 (와각지쟁, wōjiǎozhīzhēng)

蝸角之爭(와각지쟁)

蜗角之争(wōjiǎozhīzhēng)

蝸 달팽이 와 | 角 뿔 각,사람 이름 록(녹),꿩 우는 소리 곡 | 之 갈 지 | 爭 다툴 쟁 |


달팽이의 촉각(觸角) 위에서 싸운다는 뜻으로 ①작은 나라끼리의 싸움 ②하찮은 일로 승강이하는 짓


원래 달팽이 뿔 위에서의 싸움이란 뜻으로, 와우각상쟁(蝸牛角上爭)이라고도 한다. 《장자(莊子)》 <칙양편(則陽篇)>에 나오는 말이다.

기원전 4세기 전국 시대의 이야기다. 위(魏)나라 혜왕(惠王)과 제(齊)나라 위왕(威王)이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제나라가 일방적으로 조약을 어기자, 화가 난 혜왕이 위와에 대한 보복을 대신들과 논의했으나 그 의견이 분분했다.

이에 혜왕은 재상(宰相) 혜자(惠子)가 추천한 대진인(戴晋人)에게 의견을 물었다. 대진인은 이렇게 말했다. "전하, 달팽이라는 미물을 잘 아시지요. 그 달팽이이 왼쪽 뿔에 촉씨(觸氏)의 나라가 있고, 오른쪽 뿔에 만씨(蠻氏)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두 나라는 영토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죽은 자만 해도 수만을 헤아리고 15일에 걸친 격전 후에야 겨우 군대를 철수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농담도 작작 하시오."

"아닙니다.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이것을 사실과 비교해 보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우주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끝이 있다고 생각지 않소."

"그럼 마음을 그 끝없는 세계에 두는 자의 눈으로 지상의 나라들을 보면 거의 있을까 말까 한 존재와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아무렴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오?"

"그 나라들 속에 위가 있고 그 안에 서울이 있고, 또 그 안에 전하가 살고 계십니다. 이렇듯 우주의 무궁함에 비한다면, 전하와 달팽이 촉각 위의 국왕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그래 차이가 없다는 거로군."

대진인의 말을 듣고 혜왕은 제나라와 싸울 마음이 없어져 버렸다. 대진이 물러가자 혜왕이 말했다. "그는 성인도 미치지 못할 대단한 인물이오."

출전: 장자(莊子)

또, 이 말은 백거이(白居易)의 시구 “蝸牛角上爭何事(달팽이 뿔 위에서 무슨 일을 다투리요) 石火光中寄此身(석화 빛 속으로 이 몸을 기대노라)”에도 언급되어 있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

蝸牛角上爭(와우각상쟁) | 蝸角之勢(와각지세) | 蝸角觝(와각저) | 蠻觸之爭(만촉지쟁) |


관련 한시

對酒(대주) |


莊子, 장자, 莊子:則陽篇, 장자:칙양편

曰可曰否 (왈가왈부)

曰可曰否(왈가왈부)

曰 가로 왈 | 可 옳을 가, 오랑캐 임금 이름 극 | 曰 가로 왈 | 否 아닐 부, 막힐 비 |

좋으니 나쁘니 하고 떠들어댐

an argument pro and con; to argue pro and con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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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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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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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烏合之卒 (오합지졸)

烏合之卒 (오합지졸)

아무 규율도 통일도 없이 몰려다니는 무리


三國志·吳志·陳泰傳

“艾等以爲王經精卒破衄於西,賊衆大盛,乘勝之兵既不可當,而將軍以烏合之卒,繼敗軍之後,將士失氣,隴右傾蕩”

烏合之衆 (오합지중)

烏合之衆(오합지중)

규칙도 통일성도 없이 모여든 군중.

烏鳥私情 (오조사정)

烏鳥私情(오조사정)

烏 까마귀 오 | 鳥 새 조 | 私 사사 사 | 情 뜻 정 |

까마귀가 새끼 적에 어미가 길러 준 은혜(恩惠)를 갚는 사사(私事)로운 애정(愛情)이라는 뜻으로, 자식(子息)이 부모(父母)에게 효성(孝誠)을 다하려는 마음을 이르는 말


진(晋)나라 사람 이밀(李密)이 쓴 '진정표(陳情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실려있다. 이 글은 조모 유씨의 병세가 위독하여 이밀이 부득이 관직을 사양하게 됨을 황제께 고하는 글이다.

저는 조모가 안계셨더라면 오늘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며, 조모께서는 제가 없으면 여생을 마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금년 44세이고, 조모 유씨는 96세이니, 제가 폐하게 충성을 다할 날은 길고 조모 유씨에게 은혜를 보답할 날은 짧습니다. 까마귀가 어미새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조모가 돌아가시는 날 까지만 봉양하게 해 주십시오[烏鳥私情, 願乞終養].

이밀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하씨가 개가하자,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으며, 효심이 두터워서 할머니의 병 간호를 하고자 황제가 내린 관직을 물리쳤다.

吴市吹箫 (오시취소, Wúshìchuīxiāo)

吴市吹箫(오시취소,Wúshìchuīxiāo)

吴市吹箫(Wúshìchuīxiāo)

吴 나라 이름 오 | 市 시장 시 | 吹 불 취 | 箫 퉁소 소 |


(여비가 떨어져)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다.


(춘추(春秋) 시대의 명장 오자서(伍子胥)가 부형(父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초(楚)나라에서 오(吳)나라로 도망하여) 오나라 저잣거리에서 피리를 불어 먹을 것을 구걸하다.


관련 한자어

참조어

掘墓鞭屍(굴묘편시) | 心腹之患(심복지환) | 日暮途遠(일모도원) |


史記, 사기, 史記:伍子胥列傳, 사기:오자서열전, 伍子胥, 오자서

五日京兆 (오일경조)

五日京兆(오일경조)

五日京兆[wǔrìjīngzhào]

五 다섯 오 | 日 날 일, 해 일 | 京 서울 경 | 兆 조 조, 조짐 조 |

닷새 동안의 경조윤(京兆尹)이라는 뜻으로, 오래 계속(繼續)되지 못한 관직(官職), 또는 그런 일


한서(漢書) 장창전(張敞傳)에 실린 이야기다.

한(漢)나라 선제(宣帝)때, 장창(張敞)은 수도 장안(長安)의 부윤(府尹), 즉 경조윤(京兆尹)을 지냈는데, 중랑장(中郞將) 양운과 막역한 사이였다. 양운은 청렴하고, 총명하고 재능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망과 모함을 받아 면직되었고, 나중에는 대역무도의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조정의 대신들은 양운과 막역한 사이인 장창의 벼슬도 박탈하여야 마땅하다고 상주하였으나, 장창의 재능을 아끼는 선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창의 수하에 서순(絮舜)이라는 부하가 있었다. 그는 도적 잡는 적포연이라는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부 대신들이 장창을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장창이 곧 파면되리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어떤 사건을 조사하라는 장창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귀가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면 안된다고 충고하자 서순은 "나는 경조윤을 위하여 할만큼 했소이다. 지금 경조윤은 남은 임기가 길어야 닷새일 것이니 어찌 사건을 다시 수사할 수 있겠소[吾爲是公盡力多矣, 今五日京兆耳, 安能復案事]"라고 말했다.

장창이 이 말을 듣고 부하들을 시켜 서순을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 마침 12월이 며칠 남지 않은 때였는데, 당시 한나라의 형법은 매년 12월에 사형을 집행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형리가 밤낮으로 서순의 사건을 조사하여 사형을 판결하고 즉시 집행하였다. 장창은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서순에게 "닷새 동안의 경조윤이 과연 어떠하냐? 12월도 이미 끝나려 하는데, 너는 더 살 수 있을 것 같으냐[五日京兆竟何如? 冬月已盡, 延命乎?]"라고 말하고는 처형하였다.

장창은 이 일로 서순의 가족들에게 원한을 사서 결국 경조윤에서 물러났다가 나중에 다시 등용되었다.

여기서 유래하여 오일경조는 재임 기간이 매우 짧은 관직이나 그러한 일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또 임기에 관계없이 아무 때나 관직을 떠나버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출전

한서·장창전(漢書·張敞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百日天下(백일천하) | 三日天下(삼일천하) |


吳越同舟 (오월동주, WúYuètóngzhōu)

吳越同舟(오월동주)

吴越同舟(WúYuètóngzhōu)

사이가 나쁜 吳(오)나라와 越(월)나라가 한배에 타다. 서로 敵意(적의)를 품은 사람이 한자리나 같은 처지에 있음을 가리키는 말.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같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서로 협력하게 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춘추시대 오나라의 孫武(손무)는 병법에 통달한 명장이었다. 유명한 兵法書(병법서)인 「孫子(손자)」는 바로 그가 쓴 것이다.

「손자」의 九地篇(구지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군사를 통솔하는 데에는 아홉 가지의 地(지)가 있다. 구지 가운데 마지막 地를 死地(사지)라 한다. 두려움없이 나가 싸우면 살 길이 있고 겁내어 나가지 않으면 망하는 必死(필사)의 地이다. 그러니까 사지에 있을 때에는 싸워라. 그래야 길이 열린다. 사지에서는 모든 군사가 한마음 한뜻으로 싸워야 한다.

用兵術(용병술)에 능한 장수는 군사가 率然(솔연)을 닮게 해야 한다. 솔연은 常山(상산)에 있는 큰 뱀인데 대가리를 치면 꼬리로 대들고 꼬리를 치면 대가리로 덤벼들며 몸통을 치면 대가리와 꼬리가 함께 덮친다. 이처럼 세력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서로 미워하고 있다. 하지만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吳越同舟) 강을 건넌다고 하자. 도중에 큰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히려고 한다면 두 사람은 평소의 敵愾心(적개심)을 잊고 서로 왼손과 오른손이 되어 도울 것이다. 이처럼 戰車(전차)의 말들을 붙들어매고 전차바퀴를 땅에 파묻어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도움이 되는 것은 필사적으로 뭉친 군사들의 마음이다』

吳越春秋 (오월춘추) 趙曄 (조엽)

吳越春秋(오월춘추) 趙曄(조엽)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오와 월 두 나라의 분쟁(紛爭)의 전말을 기록(記錄)한 사서(史書). 후한의 조엽(趙曄)이 엮었음. 6권본과 10권본이 있음.

吳牛喘月 (오우천월)

吳牛喘月(오우천월)

吳 나라이름 오, 성씨 오, 큰소리칠 화 | 牛 소 우 | 喘 숨찰 천 | 月 달 월 |

더운 오나라의 소는 달만 보고도 해인 줄 알고 지레 겁을 먹어 숨을 헐떡거린다는 데서 나온 말.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편(言語編)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晋)의 2대 황제인 혜제 때 사마염(司馬炎)의 상서령(尙書令)으로 만분(滿奮)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무제 때에는 전부터 발명되었던 유리를 창문에 이용하고 있었으나, 유리는 당시 보석처럼 귀중한 물건이어서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어느 날 만분이 무제와 같이 앉아 있는데 마침 북쪽 창이 훤히 비치는 유리병풍으로 둘러처져 있었다. 원래 기질이 약해 조금만 바람을 쐬도 감기에 자주 걸려 바람을 두려워했던 만분은, 틈이 없어 바람이 새지 않는데도 난색을 표했다. 왕이 이를 보고 웃자 만분은 말했다.

“남쪽 오(吳)나라의 물소들은 더위를 매우 싫어하여, 여름이 되면 물속에 들어가 놀거나 나무 그늘에서 쉬는 것을 좋아합니다.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입니다. 어쩌다 밤에 밝은 달을 보게 되면 그것이 태양인줄 알고 곧 숨을 헐떡이게 됩니다. 저는 마치 남쪽의 소가 달만 보아도 헐떡이는 것과 같습니다[臣猶吳牛 見月而喘].”

평생 유리창을 본 적이 없는 그가 휑하니 뚫린 북쪽창을 보고 겁을 먹는 것을 보고 내막을 아는 왕이 그것을 보고 웃자, 황공해진 만분이 왕에게 자신을 오나라의 소에게 비유한 것이다. 같은 의미로 쓰이는 우리 속담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보아도 놀란다’가 있다.


출전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편(言語編)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懲羹吹虀(징갱취제) | 傷弓之鳥(상궁지조) | 傷弓之鳥(상국지조) | 驚弓之鳥(경궁지조) |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보아도 놀란다 (한국속담)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虎視牛行 (호시우행)

호시우행(虎視牛行)

'호랑이(虎)처럼 보고(視) 소(牛)처럼 행동(行)한다'는 말로 신중하게 조심하며 일을 해 나간다는 뜻.

五十步百步 (오십보백보, wǔshíbùbǎibù)

五十步百步(오십보백보)

五十步百步(wǔshíbùbǎibù)

백보를 도망간 사람이나 오십보를 도망간 사람이나 도망한 사실에는 양자의 차이가 없다. 두 가지가 서로 별 차이 없다는 말.


춘추시대(春秋時代) 위(魏)나라 혜왕(惠王)은 나름대로 국민 수 증가로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했으나 별 효과가 없자 맹자(孟子)한테 자기 자랑 겸 묻게 되었다. "나는 마음을 다해 백성(百姓)을 다스려 하내(河內) 지방이 흉년이 들면 하동(河東)의 곡식을 옮겨 하내 지방 백성(百姓)을 먹이고 하동 지방이 흉년이 들면 또한 그같이 하는데, 이웃 나라의 정치(政治)를 보면 나와 같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내 백성(百姓)이 더 많아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이 말을 듣고 맹자(孟子)는 비유를 들어 말했다. "왕이 전쟁을 좋아하시니 그것으로 말을 하지요. 전쟁터에서 전쟁이 한창일 때 한 병사가 갑옷과 투구를 던져 버리고 도망을 쳐서 백보쯤 가서 멈추었습니다. 또 다른 병사도 도망치다가 오십보쯤 가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백보 도망친 사람을 겁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오십보나 백보나 도망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니요?"이 말을 듣고 맹자(孟子)는"그것을 아신다면 이웃 나라보다 백성(百姓)이 많아지지 않는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결국 혜왕이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百姓)을 도운 것은 전쟁을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혜왕 밑으로 모이는 백성(百姓)은 더 늘지는 않았던 것이다.

출전
맹자(孟子)의 양혜왕상편(梁惠王上篇)

屋上家屋 (옥상가옥)

屋上家屋(옥상가옥)

지붕위에 또 지붕을 얹는다는 말. 헛수고를 하거나 필요없는 일을 거듭함을 뜻한다.


동진의 유중초가 수도 建康(건강․지금의 남경)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 揚都賦(양도부)를 지었다. 그는 먼저 이 시를 친척이자 재상인 유양에게 보였다. 유양은 친척간의 정리 때문이었던지 턱없이 치켜세워 주었다.

『양도부는 좌태충이 지은 三都賦(삼도부)와 비교해보아도 遜色(손색)이 없군』

이렇게 되어 사람들이 너도 나도 유중초의 양도부를 베껴가는 바람에 나라안의 종이가 동이 날 지경이 되었다. 이런 한심한 作態(작태)에 太傅(태부) 사안석은 눈살을 찌푸리며 歎息(탄식)했다.

『양도부란 시는 마치 「지붕밑에 지붕을 걸쳐놓은 것(屋下架屋)」같은 시야. 삼도부를 그대로 베끼다 시피 한 건데』

그 뒤 상당한 세월이 흘러 남북조시대에 나온 顔氏家訓(안씨가훈)이란 책에도 이런 대목이 보인다.

『魏晋(위진)이래의 책들은 내용이 중복되고 남의 흉내만 내고 있어 「지붕밑에 지붕을 만들고」 평상위에 평상을 만든 것 같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지붕밑에 지붕을 걸쳐놓은 것이었는데 어느때부터인지 「지붕위에 지붕을 얹는 것(屋上家屋)」으로 바뀌어 쓰이고 있는 것이다.

烏飛一色 (오비일색)

烏飛一色(오비일색)

날고 있는 까마귀가 모두 같은 빛깔임. 모두 같은 종류 피차 똑같음을 이르는 말.

吾鼻三尺 (오비삼척)

吾鼻三尺(오비삼척)

吾鼻三尺(wúbísānchǐ)

吾 나 오, 친하지 않을 어, 땅 이름 아 | 鼻 코 비 | 三 석 삼 | 尺 자 척

①오비체수삼척(吾鼻涕垂三尺)의 준말로, 곤경(困境)에 처해 자기(自己) 일도 해결(解決)하기 어려운 판국(版局)에 어찌 남을 도울 여지가 있겠는가라는 말 ②'내 코가 석 자'라는 속담(俗談)으로, 내 일도 감당(堪當)하기 어려워 남의 사정(事情)을 돌볼 여유(餘裕)가 없다라는 말

출전
순오지(旬五志)

吾不關焉 (오불관언)

吾不關焉(오불관언)

①나는 그 일에 상관(相關)하지 아니함 ②또는 그런 태도(態度)

与己无关。事不关己。事不关己,高高挂起。

五味口爽 (오미구상)

五味口爽 (오미구상)

맛있는 음식은 입을 상하게 한다.

五色令人目盲 오색영인목맹
五音令人耳聾 오음영인이농
五味令人口爽 오미영인구상

오색(五色)의 아름다움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五音)은 아름다움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하고
오미(五味)의 감미로움은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한다.

- 도덕경

一髮千鈞 (일발천균)

一髮千鈞(일발천균)

一 한 일 | 髮 터럭 발 | 千 일천 천 | 鈞 서른 근 균 |

한 가닥의 머리털로 천균, 즉 만 근(斤)이나 되는 무거운 물건을 매어 끈다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일을 이르는 말.


한서(漢書) 매승(枚乘)전의 이야기.

서한(西漢) 시기, 매승이라는 유명한 문인이 있었는데, 그는 사부(辭賦)에 능했다. 그는 오왕(吳王) 유비(劉 )의 휘하에서 낭중(朗中)을 지내며, 오왕이 모반하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하나의 비유를 들어 오왕에게 모반을 포기하도록 권고하였다.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매달린 삼만근 무게의 물건이 위는 그 끝을 모를 높은 곳에 매달려 있고, 아랫부분은 바닥이 없는 깊은 못에 드리워져 있다고 합시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상황이 극히 위태롭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만약 윗부분이 끊긴다면 다시 이을 수 없으며, 아랫부분이 깊은 못으로 떨어진다면 다시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왕께서 모반하시려는 것은 바로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매다린 것처럼 위험한 일입니다.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자, 매승은 오나라를 떠나 양(梁)나라로 가서 양효왕의 문객이 되었다. 그후 오왕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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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一髮引千鈞(일발인천균)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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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寤寐不忘 (오매불망)

寤寐不忘(오매불망)

자나깨나 잊지 못함.

五理霧中 (오리무중)

五理霧中(오리무중)

五 다섯 오 | 理 다스릴 리(이) | 霧 안개 무 | 中 가운데 중

5리나 되는 짙은 안개 속에 있다는 뜻. 짙은 안개 속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무슨 일에 대해 갈피를 못잡고 알 길이 없음을 일컫는 말.

五燈會元 (오등회원) 慧明 (혜명)

五燈會元(오등회원) 慧明(혜명)

구분불교서적
저자혜명
시대1253년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등 송대에 발간된 다섯 가지 선종사서(禪宗史書)를 압축한 선종의 통사(通史)이다. 책명은 ‘다섯 가지의 등사(燈史)를 회통(會通)하여 하나로 엮었다’는 뜻이다. 다섯 가지 책은 ① 도원(道原)이 1004년에 지은 《경덕전등록》(전30권), ② 이준욱(李遵勖)이 1036년에 지은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전30권), ③ 불국유백(佛國惟白)이 1101년에 지은 《건중정국속등록(建重靖國續燈錄)》(전30권), ④ 오명(悟明)이 1183년에 지은 《연등회요(聯燈會要)》(전30권), ⑤ 정수(正受)가 1201∼1204년 간행한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전30권)을 말한다. 이를 모두 합하면 150권이나 되는데, 20권으로 축약하여 선의 대의를 밝힌 입문서로 평가된다.

저자는 혜명으로 되어 있으나, 보우본(寶祐本) 《오등회원》의 서문에 따르면 항저우[杭州] 영은사의 대천보제(大川普濟:1179∼1253)가 혜명 등 여러 제자에게 명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 선종의 법맥을 중심으로 다루지 않고 선종의 오가칠종(五家七宗)을 권별로 분류한 점이 특색이다. 본래는 중국 선종의 각 분파와 법계를 자세히 서술할 예정이었으나, 종문이 많이 나뉘고 또 파도 복잡해지자 오가칠종으로 나누었다. 종파별로 분류되어 있어 열람하기 쉬운 탓에 선종 관계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읽혔다.

내용은 오가칠종을 중심으로 각 종파별 선사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기연과 법어·게송을 서술한 것이 주를 이룬다. 제1권은 과거칠불에서 동토6조까지를 소개하고, 제2권은 동토 제4∼7조의 법맥을 이은 선사들과 응화성현(應化聖賢)을 소개한다. 응화성현이란 중생들에게 홀연히 나타나 선의 대의를 깨우쳐 준 이들을 말한다. 제3∼4권은 남악 문하 제5대 선사까지를 소개하고, 제5∼6권은 행사 문하 제7대 선사들과 법계가 자세하지 않은 선사들의 행적을 소개한다. 제7∼8권은 행사 문하 제2∼9대, 제9권은 위앙종의 선사들, 제10권은 법안종의 선사들, 제11∼12권은 임제종의 선사들, 제13∼14권은 조동종의 선사들, 제15∼16권은 운문종의 선사들, 제17∼18권은 임제종 황룡파의 선사들, 제19∼20권은 임제종 양기파의 선사들을 소개한다.

오가칠종 중 가장 늦게 성립한 법안종을 앞 부분에서 다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분류에 대하여 청의 영각 원현(永覺元賢)은 1651년 발간된 《계등록(繼燈錄)》에서 대천 보제가 자신의 사당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가칠종의 사상체계를 알기 쉽게 분류하고, 화제(話題)가 뛰어난 까닭에 선종 승려들뿐만 아니라 사대부와 문인들에게 선을 이해하는 데 좋은 지침서가 되었다. 이 책의 영향을 받아 명의 남석 문수(南石文璲: 1354∼1418)가 《오등회원보유(五燈會元補遺)》를 펴내고, 청의 원문정주(遠門淨柱)가 1648년에 《오등회원속략(五燈會元續略)》을 펴냈다.


관련 한자어

焦眉之急(초미지급) |

吳兢 (오긍)

吳兢(오긍)


관련 서적

貞觀政要(정관정요)

溫故知新 (온고지신)

溫故知新(온고지신)

溫 익힐 온 | 故 옛 고 | 知 알 지 | 新 새 신 |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안다. 역사와 지난 날의 학문을 충분히 익힘으로써 새로운 사실과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는 말이다. 오늘을 알기 위해 어제를 알고 내일을 내다보기 위해서는 오늘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拈華示衆 (염화시중)

拈華示衆(염화시중)

꽃을 따서 무리에게 보인다는 뜻으로, 말이나 글에 의(依)하지 않고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뜻을 전(傳)하는 일.


관련 한자어

동의어

염화미소(拈華微笑)

拈華微笑 (염화미소)

拈華微笑(염화미소)

'꽃을 집어 들고 웃음을 띠다'란 뜻으로, 문자(文字)나 말에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傳)하는 일을 이르는 말. 불교(佛敎)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뜻으로 쓰이는 말.


염화시중(拈花示衆)이라고도 한다. 선종에서 선(禪)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전하는 이야기로서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 기록되어 있다.

영산(靈山)에서 범왕(梵王)이 석가에게 설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석가가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으나, 가섭(迦葉)만은 참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고 이에 석가는 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한 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번뇌와 미망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는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생멸계를 떠난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진리를 깨닫는 마음) 등의 불교 진리를 전해 주었다.

즉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선 수행의 근거와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화두이다.

連環計 (연환계, liánhuánjì)

連環計(연환계)

连环计(liánhuánjì)

連 이을 련 | 環 고리 환 | 計 셀 계 |


'고리를 잇는 계책'이라는 뜻으로, 여러 가지 계책을 교묘하게 연결시킨다는 의미이다. 중국의 고대 병법인 36계 가운데 敗戰計(패전계) 35번째 계책이다.


연환(連環)이란 고리를 연결한다는 뜻이다. 36계 가운데 미인계(美人計)·공성계(空城計)·반간계(反間計)·고육계(苦肉計) 등과 함께 패전계(敗戰計)에 속한다. 패전계란 패세에 몰린 싸움에서 기사회생하여 승리를 이끌어내는 계책이라는 뜻이다.

이 계책에 대한 설명으로는 "적의 장수와 병사들이 많을 때는 정면으로 대적할 수 없다. 적으로 하여금 스스로 묶어 놓게 함으로써 그 기세를 죽여야 한다. 아군의 군사(軍師)가 뛰어나면 하늘의 은총을 입는다(將多兵衆, 不可以敵, 使其自累, 以殺其勢. 在師中吉, 承天寵也)"라고 하였다.

三國志演義에 보면 '連環計(연환계)'라는 말이 여러번 등장한다. 그 중 첫번째는 왕윤이 초선을 이용한 연환계, 둘째는 방통이 조조의 선단을 쇠사슬로 연결하게 한 연환계, 셋째는 여러 계책을 연결시켜 사용한 것을 뜻하는 연환계이다. 이 세가지에 쓰인 연환계의 의미가 각각 다르다.

첫번째로 쓰인 연환계는 왕윤(王允)이 '초선(貂蟬)'이라는 쇠사슬로 동탁(董卓)과 여포(呂布)의 발목을 묶어 둘 다 망하게 하고자 사용한 계략을 뜻한다. 왕윤은 '초선'을 이용해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해서 둘이 서로 발목을 붙잡게 만들어서, 둘 모두를 망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마치 죄수 둘의 발목을 쇠사슬로 연결해 두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될 것이다.

두번째로 쓰인 연환계는 방통(龐統)이 적벽대전(赤壁大戰)에 앞서 화계를 성공시키고자, 조조(曹操)에게로 가서 배멀미와 물 때문에 고생하는 조조군에게 내놓은 계략이다. 방통이 조조에게 건의한 연환계는 선단(船團)을 서로 쇠사슬로 연결하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서 배가 흔들리지 않게 하여, 육지와 같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그 진짜 의미는 유(周瑜)가 화계를 썼을때, 배들이 흩어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여 피해를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첩자를 적에게 보내 계책을 꾸미게 하고, 그 사이에 적을 공격하여 승리를 얻은 경우로서, 연환계의 대표적인 예로 언급된다.

세번째로 쓰인 연환계는 <'연환'의 계> 라기 보다는 <'계'의 연환>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여러 계책들을 빈틈없이 엮어서 몰아치는 것으로 이것도 '연환계'라는 용어로 쓰여왔다.

그 외에 송(宋)나라의 장수 필재우(畢再遇)는 금(金)나라 병사들과의 전투에서 진격과 퇴각을 거듭하여 하루종일 적군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향료를 넣어 삶은 콩을 땅에 뿌려 놓고는 적을 도발하여 싸우는 척하다가 도망쳤다. 승세를 놓칠세라 추격하던 적군이 콩을 뿌려 놓은 곳에 이르자, 하루종일 굶주린 적군의 말들은 콩을 먹느라 채찍을 휘둘러도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필재우는 이 틈을 타서 역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 전략도 연환계의 한 예로 언급된다.


36계, 삼십육계, 삼십육계:패전계, 병법

三十六計, 三十六計:敗戰計

女必從夫 (여필종부)

女必從夫(여필종부)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

與虎謀皮 (여호모피)

與虎謀皮(여호모피)

与虎谋皮[yǔhǔmóupí]

與 더불 여 | 虎 범 호 | 謀 꾀할 모 | 皮 가죽 피 |

호랑이에게 가죽을 내어 놓으라고 꾀다라는 뜻으로, 근본적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르는 말

Ask a tiger for its skin.


원래는 여호모피(與狐謀皮:여우와 여우 가죽을 구할 일을 도모하다)였으나, 나중에 여우[狐]가 호랑이[虎]로 바뀌었다. 중국 춘추시대에 노(魯)나라 정공(定公)이 공자(孔子)를 사도(司徒) 벼슬에 앉히려고 하였다. 정공은 그 전에 좌구명(左丘明)을 불러, 삼환(三桓)과 그 일에 대하여 의논하려고 하는데 어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삼환은 환공(桓公)의 손자인 계손씨(季孫氏)와 숙손씨(叔孫氏), 맹손씨(孟孫氏) 세 사람을 일컫는데, 이들은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들로서 공자와는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좌구명은 삼환은 공자와 정치적 이해가 상충하므로 반대할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우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갖옷과 맛난 음식을 좋아하는 주(周)나라 사람이 천금의 값어치가 있는 갖옷을 만들기 위하여 여우들에게 찾아가서는 그 가죽을 달라고 하고, 맛난 음식을 먹기 위하여 양들을 찾아가 그 고기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우들은 줄줄이 깊은 산 속으로 도망가버렸고, 양들은 울창한 숲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주나라 사람은 10년 동안 갖옷을 한 벌도 만들지 못하고 5년 동안 양고기를 구경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가 의논할 대상을 잘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주께서 공구(孔丘:공자)를 사도로 삼으려 하시면서 삼환을 불러 그 일에 대하여 의논하는 것은 여우와 그 가죽을 얻을 일을 의논하고 양과 그 고기를 얻을 일을 의논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정공은 좌구명의 말을 듣고는 삼환을 불러 의논하지 않고 공자를 사도로 임명하였다.

與狐謀皮라는 말은 후에 與虎謀皮로 바뀌었으며, 與虎謀皮는 호랑이에게 가죽을 요구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여호모피는 호랑이에게 제 가죽을 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구하는 일이 상대방의 이해와 상충하여 이루어질 수 없음 또는 이해가 상충하는 상대방이 도와줄 리가 없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태평어람:부자 《太平御览》卷二0八引《符子》
태평어람:직관부(職官部)·사도 하(司徒下)

欲为千金之裘而与狐谋其皮,欲具少牢之珍而与羊谋其羞,言未卒,狐相率逃于重丘之下,羊相呼藏于深林之中。 (욕위천금지구이여호모기피, 욕구소뢰지진이여양모기수, 언미졸, 호상솔도우중구지하, 양상호장우심림지중.)

천금짜리 옷이 탐나 여우에게 가죽 얘기를 하고, 제삿상에 바칠 고기로 양을 뻔뻔히 얘기하고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여우를 데리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니, 양들이 산속으로 숨어버리더라.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與虎謨皮(여호모피) | 與虎謀皮(여호모피) | 與狐謨皮(여호모피) | 與狐謀皮(여호모피) | 與羊謨肉(여양모육) |

與狐謨皮 (여호모피)

與狐謨皮(여호모피)

與 더불 여, 줄 여 | 狐 여우 호, 범 호 | 謀 꾀할 모 | 皮 가죽 피 |

여우하고 여우의 모피(毛皮)를 벗길 모의(謀議)를 한다는 뜻으로, 이해(利害)가 상충하는 사람하고 의논(議論)하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태평어람(太平御覽) 권208에는 마치 이솝 우화(寓話)와도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周)나라 때, 어떤 사나이가 천금(千金)의 가치가 있는 따뜻한 가죽 이불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여우 가죽으로 이불을 만들면 가볍고 따뜻하다는 말을 듣고, 곧장 들판으로 나가 여우들과 이 가죽 문제를 상의하였다[與狐謀其皮]. 자신들의 가죽을 빌려달라는 말을 듣자마자 여우들은 깜짝 놀라서 모두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얼마 후, 그는 맛좋은 제물(祭物)을 만들어 귀신의 보살핌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에 그는 곧 양들을 찾아가 이 문제를 상의하며, 그들에게 고기를 요구하였다.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양들은 모두 숲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출전

태평어람:부자 《太平御览》卷二0八引《符子》

欲为千金之裘而与狐谋其皮,欲具少牢之珍而与羊谋其羞,言未卒,狐相率逃于重丘之下,羊相呼藏于深林之中。 (욕위천금지구이여호모기피, 욕구소뢰지진이여양모기수, 언미졸, 호상솔도우중구지하, 양상호장우심림지중.)

천금짜리 옷이 탐나 여우에게 가죽 얘기를 하고, 제삿상에 바칠 고기로 양을 뻔뻔히 얘기하고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여우를 데리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니, 양들이 산속으로 숨어버리더라.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與虎謨皮(여호모피) | 與虎謀皮(여호모피) | 與狐謨皮(여호모피) | 與狐謀皮(여호모피) | 與羊謨肉(여양모육) |

鹽鐵論 (염철론) 桓寬 (환관)

鹽鐵論(염철론) 桓寬(환관)

중국 전한(前漢)의 선제(宣帝:재위 BC 74~BC 49) 때에 환관(桓寬)이 편찬한 책.


12권 60장(章). BC 81년 전한의 조정에서 열렸던 회의의 토론내용을 재현(再現)하는 형태로 정리한 독특한 형식으로 엮었다. 무제(武帝) 때부터 비롯된 소금 ·철 ·술 등의 전매(專賣) 및 균수(均輸) ·평준(平準) 등 일련의 재정정책을 무제가 죽은 뒤에도 존속시킬 것인가의 여부를 전국에서 추천을 받고 참석한 자들 간에 논의한 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참석자 중 오경교수(五經敎授)인 현량(賢良) ·문학(文學) 약 60명은 유가사상(儒家思想)을 근거로 이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고, 고급관리인 승상(丞相) 차천추(車千秋) 및 어사대부(御史大夫) 상홍양(桑弘羊)과 그 부하 관리들은 법가사상(法家思想)을 내세워 제도의 존속을 주장하여 이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이 책은 염철전매 등의 존속 여부에 관한 것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 ·사회 ·경제 ·사상 등에 관해서도 논급되어 있는 기본적 사료(史料)이다.


염철론(鹽鐵論) 관련 고사성어

유속불식(有粟不食) 곡식이 있어도 먹지 못한다는 뜻으로 아무리 귀중한 물건도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쓸모없음을 이르는 말.

予取先與 (여취선여)

予取先與(여취선여)

予 나 여 | 取 취할 취 | 先 먼저 선 | 與 줄 여 |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는 뜻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의 이야기.

진(晋)나라에 지백(知伯)이라는 귀족이 있었다. 그는 또 다른 귀족인 위환자(魏桓子)에게 영토를 강요하였다. 위환자는 후에 위나라의 선조(先祖)가 된 사람인데, 그도 당시에 다른 사람들의 영토를 차지하려 하였으므로, 지백의 요구를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이에 임장(任章)이라는 사람이 위환자에게 지백의 요구대로 땅을 떼어 주도록 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백에게 땅을 떼어준다면, 지백은 자신을 대단한 인물이라고 자만하여 적을 얕보게 될 것입니다. 이웃 나라들도 이러한 피해를 입게 될까봐 단결하여 공동으로 지백을 상대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백은 오래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주서(周書)에서는 상대를 물리치려면 반드시 먼저 그를 키워주고,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그에게 미리 무언가를 주어야 한다[將欲取之, 必故予之]라고 했습니다.

위환자는 임장의 말대로 하였다. 지백은 과연 교만과 횡포, 그리고 탐욕 때문에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불렀다.


출전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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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地思之 (역지사지)

易地思之(역지사지)

易 바꿀 역 | 地 땅 지 | 思 생각할 사 | 之 갈 지 |

처지를 바꿔 생각함.


상대편의 처지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보고 이해하라는 뜻이다. '맹자(孟子)' 이루(離婁)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에서 유래한 말이다. 역지즉개연은 처지나 경우를 바꾼다 해도 하는 것이 서로 같다는 말이다.

중국의 전설적인 성인인 하우(夏禹)와 후직(后稷)은 태평한 세상에 자기 집 문 앞을 세 번씩 지나가도 들어가지 않아서 공자(孔子)가 이들을 매우 훌륭하게 생각하였다.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는 어지러운 세상에 누추한 골목에서 물 한 바가지와 밥 한 그릇으로만 살았는데, 공자는 가난한 생활을 이겨내고 도(道)를 즐긴 안회를 칭찬하였다.

맹자는 "하우와 후직과 안회는 같은 뜻을 가졌는데, 하우는 물에 빠진 백성이 있으면 자신이 치수(治水)를 잘못하여 그들을 빠지게 하였다고 여겼으며, 후직은 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일을 잘못하여 백성을 굶주리게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하우와 후직과 안회는 처지를 바꾸어도 모두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禹稷顔子易地則皆然]"라고 하였다. 맹자는 하우와 후직, 안회의 생활방식을 통하여 사람이 가야 할 길을 말하였다. 입장을 바꾸어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헤아려보라는 말이다.

如松之盛 (여송지성)

如松之盛(여송지성)

如 같을 여 | 松 솔 송 | 之 갈 지 | 盛 성할 성 |

솔 나무같이 푸르러 성(盛)함은 군자(君子)의 절개(節槪ㆍ節介)를 말한 것임

[출전]
千字文(천자문)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似蘭斯馨如松之盛(사란사형여송지성) |

連戰連勝 (연전연승)

連戰連勝(연전연승)

싸우는 족족 이김.

列子 (열자) 列御寇 (열어구) 005 湯問 (탕문)

列子(열자) 列御寇(열어구)

仲尼(중니) 005 湯問(탕문) 力命(역명)


1 湯問: 殷湯問于夏革曰:“古實有物乎?”夏革曰:“古初無物,今惡得物?後之人將謂今之無物可乎?”殷湯曰:“然則物無先後乎?”夏革曰:“物之終始,初無極已。始或為終,終或為始,惡知其紀?然自物之外,自中之先,朕所不知民。”殷湯曰:“然則上下八方有極盡乎?”革曰:“不知也。”湯固問。革曰:“無則無極,有則有盡;朕何以知之?然無極之外,復無無極,無盡之中,復無無盡。無極復無無極,無盡復無無盡。朕以是知其無極無盡也,而不知其有極有盡也。”湯又問曰:“四海之外奚有?”革曰:“猶齊州也。”湯曰:“汝奚以實之?”革曰:“朕東行至營,人民猶是也。問營之東,復猶營也。西行至豳,人民猶是也。問豳之西,復猶豳也。朕以是知四海四荒四極之不異是也。故大小相含,無窮極也。含萬物者亦如含天地;含萬物也故不窮,含天地也故無極。朕亦焉知天地之表不有大天地者乎?亦吾所不知也。然則天地亦物與。物有不足,故昔者女媧氏練五色石以補其闕;斷鰲之足以立四極。其後共工氏與顓頊爭為帝,怒而觸不周之山,折天柱,絕地維,故天傾西北,日月星辰就焉;地不滿東南,故百川水潦歸焉。”

2 湯問: 湯又問:“物有巨細乎?有修短乎?有同異乎?”革曰:“渤海之東不知幾億萬里,有大壑焉,實惟無底之穀,其下無底,名曰歸墟。八紘九野之水,天漢之流,莫不注之,而無增無減焉。其中有五山焉:一曰岱輿,二曰員嶠,三曰方壺,四曰瀛洲,五曰蓬萊。其山高下周旋三萬里,其頂平處九千里。山之中間相去七萬里,以為鄰居焉。其上臺觀皆金玉,其上禽獸皆純縞。珠玕之樹皆叢生,華實皆有滋味,食之皆不老不死。所居之人皆仙聖之種;一日一夕飛相往來者,不可數焉。而五山之根,無所連著,常隨潮波上下往還,不得暫峙焉。仙聖毒之,訴之于帝。帝恐流于西極,失群聖之居,乃命禺疆使巨鰲十五舉首而戴之。迭為三番,六萬歲一交焉。五山始峙。而龍伯之國,有大人,舉足不盈數步而暨五山之所,一釣而連六鰲,合負而趣,歸其國,灼其骨以數焉。於是岱輿員嶠二山流於北極,沈於大海,仙聖之播遷者巨億計。帝憑怒,侵減龍伯之國使阨。侵小龍伯之民使短。至伏羲神農時,其國人猶數十丈。從中州以東四十萬里,得憔僥國。,人長一尺五寸。東北極有人名曰諍人,長九尺。荊之南有冥靈者,以五百歲為春,五百歲為秋。上古有大椿者,以八竿歲為春,八竿歲為秋。朽壤之上有菌芝者,生于朝,死于晦。春夏之月有蠓蚋者,因雨而生,見陽而死。終發北之北有溟海者,天池也,有魚焉。其廣數千里,其長稱焉,其名為鯤。有鳥焉。其名為鵬,翼若垂天之云,其體稱焉。世豈知有此物哉?大禹行而見之,伯益知而名之,夷堅聞而志之。江浦之間生麼蟲,其史曰焦螟,群悅而集于蚊睫,弗相觸也。棲宿去來,蚊弗覺也。離朱子羽,方晝拭眥揚眉而望之,弗見其形;��俞師曠方夜擿耳俛首而聽之,弗聞其聲。唯黃帝與容成子居空峒之上,同齋三月,心死形廢;徐以神視,塊然見之,若嵩山之阿;徐以氣聽,砰然聞之若雷霆之聲。吳、楚之國有大木焉,其名為櫾,碧樹而冬生,實丹而味酸;食其皮汁,已憤厥之疾。齊州珍之,渡淮而北,而化為枳焉。鸜鵒不逾濟,貉逾汶則死矣。地氣然也。雖然形氣異也,性鈞已,無相易已。生皆全已,分皆足已。吾何以識其巨細?何以識其修短?何以識其同異哉?”

3 湯問: 太形、王屋二山,方七百里,同萬仞。本在冀州之南,河陽之北。北山愚公者,年且九十,面山而居。懲山北之寒塞,出入之迂也。聚室而謀曰:“吾與汝畢力平險,指通豫南,達于漢陰,可乎?”雜然相許。其妻獻疑曰:“以君之力,曾不能損魁父之丘,如太形、王屋何?且焉置土石?”雜曰:“投諸渤海之尾,隱土之北。”遂率子孫荷擔者三夫,叩石墾壤,箕畚運于渤海之尾。鄰人京城氏之孀妻,有遣男,始齔,跳往助之。寒暑易節,始一反焉。河曲智叟笑山之一毛,其如土石何?“北山愚公長息曰:“汝心之固,固不可徹,曾不若孀妻弱子。雖我之死,有子存焉;子又生孫,孫又生子;子又有子,子又有孫;子子孫孫,無窮匱也,而山不加增,何苦而不平?”河曲智叟亡以應。操蛇之神聞之,懼其不已也,告之于帝。帝感其誠,命萬蛾氏二子負二山,一厝朔東,一厝雍南。自此冀之南,漢之陰,無隴斷焉。夸父不量力,欲追日影,逐之于隅穀之際。渴欲得飲,赴飲河渭。河謂不足,將走北飲大澤。未至道,渴而死。棄其杖,尸膏肉所浸,生鄧林。鄧林彌廣數千里焉。

4 湯問: 大禹曰:“六合之間,四海之內,照之以日月,經之以星辰,紀之以四時,要之以太歲。神靈所生,其物異形;或夭或壽,唯聖人能通其道。”夏革曰:“然則亦有不待神靈而生,不待陰陽而形,不待日月而明,不待殺戮而夭,不待將迎而壽,不待五穀而食,不待繒纊而衣,不待舟車而行。其道自然,非聖人之所通也。”

5 湯問: 禹之治水土也,迷而失塗,謬之一國。濱北海之北,不知距齊州幾千萬里,其國名曰終北,不知際畔之所齊限。無風雨霜露,不生鳥、獸、蟲、魚、草、木之類。四方悉平,周以喬陟。當國之中有山,山名壺領,狀若甔甀。頂有口,狀若員環,名曰滋穴。有水涌出,名曰神瀵,臭過蘭椒,味過醪醴。一源分為四埒,注于山下;經營一國,亡不悉遍。土氣和,亡札厲。人性婉而從,物不競不爭。柔心而弱骨,不驕不忌;長幼儕居,不君不臣;男女雜游,不媒不聘;緣不而居,不耕不稼;土氣溫適,不織不衣;百年而死,不夭不病。其民孳阜亡數,有喜樂,亡衰老哀苦。其俗好聲,相攜醉醉經旬乃醒。沐浴神瀵,膚色脂澤,香氣經旬乃歇。周穆王北游,過其國,三年記歸。既反周室,慕其國,��然自失。不進酒肉,不召嬪御者數月,乃復。管仲勉齊桓公,因游遼口,俱之其國。幾尅舉,隰朋諫曰:“君舍齊國之廣,人民之眾,山川之觀,殖物之阜,禮義之盛,章服之美,妖靡盈庭,忠良滿朝,肆咤則徒卒百萬,視撝則諸侯從命,亦奚羨于彼,而棄齊國之社稷,從戎夷之國乎?此仲父之耄,奈何從之?”桓公乃止,以隰朋之言告管仲,仲曰:“此固非朋之所及也。臣恐彼國之不可知之也。齊國之富奚戀?隰朋之言奚顧?”

6 湯問: 南國之人,祝發而裸;北國之人,鞨巾而裘;中國之人,冠冕而裳。九土所資,或農或商或田或漁,如冬裘夏葛,水舟陸車,默而得之,性而成之。越之東有輒木之國,其長子生,則鮮而食之,謂之宜弟。其大父死,負其大母而棄之,曰:“鬼妻不可以同居笮。”楚之南有炎人之國,其親戚死,咼其肉而棄,然後埋其具,乃成為孝子。秦之西有儀渠之國者,其親戚死。聚柴只而焚之。燻則煙上,謂之登遐,然後成為孝子。此上以為政,下以為俗。而未足為異也。

7 湯問: 孔子東游,見兩小兒辯鬭。問其故,一兒曰:“我以日始出時去人近,而日中時遠也。”一兒以日初出遠,而日中時近也。一兒曰:“日初出大如車蓋,及日中,則如盤盂,此不為遠者小而近者大乎?”一兒曰:“日初出滄滄涼涼,及其目中,如探湯,此不為近者熱而遠者涼乎?”孔子不能決也。兩小兒笑曰:“孰汝多知乎?”

8 湯問: 均,天下之至理也,連于形物亦然。均發均縣輕重而發絕,發不均也。均也,其絕也,莫絕。人以為不然,自有笑其然者也。詹何以獨繭絲為綸,芒針為鉤,荊篠為竿,剖粒為餌,引盈車之魚于百仞之淵、汨流之中,綸不絕,鉤不伸,竿不橈。楚王聞而異之,召問其故。詹何曰:“臣聞先大夫之言。蒲且子之弋也,弱弓纖繳,乘風振之,連雙鶬于青云之際。用心專,動手均也。臣因其事,放而學釣,五年始盡其道。當臣之臨河持竿,心無雜慮,唯魚之念;投綸沉鉤,手無輕重,物莫能亂。魚見臣之鉤餌,猶沉埃聚沫,吞之不疑。所以能以弱制強,以輕致重也。大王治國誠能若此,則天下可運于一握,將亦奚事哉?”楚王曰:“善!”

9 湯問: 魯公扈、趙齊嬰二人有疾,同請扁鵲求治,扁鵲治之。既同愈。謂公扈、齊嬰曰:“汝曩之所疾,自外而干府藏者,固藥石之所已。今有偕生之疾,與體偕長,今為汝攻之,何如?”二人曰:“愿先聞其驗。”扁鵲謂公扈曰:“汝志強而氣弱,故足于謀而寡于斷。齊嬰志弱而氣強,故少于慮而傷于專。若換汝之心,則均于善矣。”扁鵲遂飲二人毒酒,迷死三日,剖胸探心,易而置之;投以神藥,既悟,如祿。二人辭歸。于是公扈反齊嬰之室,而有其妻子,妻子弗識。齊嬰亦反公扈之室室,有其妻子,妻子亦弗識。二室因相與訟,求辨于扁鵲。扁鵲辨其所由,訟乃已。

10 湯問: 匏巴鼓琴,而鳥舞魚躍,鄭師文聞之,棄家從師襄游。柱指鉤弦,三年不成章。師襄曰:“子可以歸矣。”師文舍其琴嘆曰:“文非弦之不能鉤,非章之不能成。文所存者不在弦,所志者不在聲。內不得于心,外不應于器,故不敢發手而動弦。且小假之以觀其所。”無幾何,復見師襄。師襄曰:“子之琴何如?”師文曰:“得之矣。請嘗試之。”于是當春而叩商弦,以召南呂,涼風忽至,草木成實。及秋而叩角弦,以激夾鐘,溫風徐迴,草木發榮。當夏而叩羽弦,以召黃鐘,霜雪交下,川池暴沍。及冬而叩徵弦,以激蕤賓,陽光泅烈,堅冰立散。將終命宮而總四弦。則景風翔,慶云浮,甘露降,澧泉涌。師襄乃撫心高蹈曰:“微矣,子之彈也!雖師曠之清角,鄒衍之吹律,亡以加之。被將挾琴執管而從子之後耳。”

11 湯問: 薛譚學謳于秦青,未窮青之技,自謂盡之,遂辭歸。秦青弗止。餞于郊衢,撫節悲歌,聲振林木,響遏行云。薛譚乃謝求反,終身不敢言歸。秦青顧謂其友曰:“昔韓娥東之齊,匱糧,過雍門,鬻歌假食。既去,而餘音繞梁欐,三日不絕,左右以其人弗去。過逆旅,逆旅人辱之。韓娥因曼聲哀哭,一里老幼。悲悉垂涕相對,三日不食。遽百追之。娥還復為曼聲長歌,一里老幼,善躍抃舞,弗能自禁,忘向之悲也。乃厚賂發之。故雍門之人至今善歌哭,放娥之遺聲。”

12 湯問: 伯牙善鼓琴,鐘子期善聽。伯牙鼓琴,志在登高山。鐘子期曰:“善哉洋洋兮若江河!”伯牙所念,鐘子期必得之。伯牙游于泰山之陰,卒逢暴雨,止于巖下;心悲,用援琴而鼓之。初為霖雨之操,更造崩山之音,曲每奏,鐘子期輒窮其趣。伯牙乃舍琴而嘆曰:“善哉善哉!子之聽夫志,想象猶吾心也。吾于何逃聲哉?”

13 湯問: 周穆王西巡狩,越昆倉,不至弇山。反還,未及中國,道有獻工人名偃師,穆王薦之,問曰:“若有何能?”偃師曰:“臣唯命所試。然臣已有所造,愿王先觀之。”穆王曰:“日以俱來,吾與若俱觀之。”翌日,偃師謁見王。王薦之曰:“若與偕來者何人耶?”對曰:“臣之所造能倡者。”穆王驚視之,趨步俯仰,信人也。巧夫,顉其頤,則歌合律;捧其手,則舞應節。千變萬化,惟意所適。王以為實人也。與盛姬內御并觀之。技將終,倡者瞬其目而招王之左右待妾。王大怒,立欲誅偃師。偃師大懾,立剖散倡者以示王,皆傅會革、木、膠、漆、白、黑、丹、青之所為。王諦料之,內則肝、膽、心、肺、脾、腎、腸、胃,外則筋骨、支節、、皮毛、齒發,皆假也,而無不畢具者。合會復如初見。王試廢其心,則口不能言;廢其肝,則目不能視;廢其腎,則足不能步。穆王始悅而嘆曰:“人之巧乃可與造化者同功乎?”詔貳車載之以歸。夫班輸之云梯,墨翟之飛鳶,自謂能之極也。弟子東門賈、禽滑釐,聞偃師之巧,以告二子,二子終身不敢語藝,而時執規矩。

14 湯問: 甘蠅,古之善射者,彀弓而獸伏鳥下。弟子名飛衛,學射于甘蠅,而巧過其師。紀昌者,又學射于飛衛。飛衛曰:“爾先學不瞬,而後可言射矣。”紀昌歸,偃臥其妻之機下,以目承牽挺。二年之後,雖錐末倒眥而不瞬也。以告飛衛。飛衛曰:“未也,必學視而後可。視小如大,視微如著,而後告我。”昌以氂懸虱于牖。南面而望之。旬日之間,浸大也;三年之後,如車輪焉。以睹餘物,皆丘山也。乃以燕角之弧,朔蓬之簳,射之,貫虱之心,而懸不絕。以告飛衛。飛衛高蹈拊膺曰:“汝得之矣!“紀昌既盡衛之術,計天下之敵己者一人而已,乃謀殺飛衛。相遇于野,二人交射;中路端鋒相觸,而墜于地,而塵不揚。飛衛之矢先窮。紀昌遺一矢,既發,飛衛以棘刺之端扞之,而無差焉。于是二子泣而投弓,相拜于塗,請為父子。尅臂以誓,不得告術于人。

15 湯問: 造父之師曰泰豆氏。造父之始從習御也,執禮甚稗稗泰豆三年不告。造父執禮愈謹乃告之曰:“古詩言:‘良弓之子,必先為箕,良冶之子,必先為裘。’汝先觀吾趣。趣如事,然後六轡可持,六馬可御。”造父曰:“唯命所從。”泰豆乃立木為途,僅可容足;計步而置。履之而行。趣走往還,無跌失也。造父學子,三日盡其巧。泰豆嘆曰:“子何其敏也,得之捷乎?凡所御者,亦如此也。曩汝之行,得之于足,應之于心。推于御也,齊輯乎轡銜之際,而急緩乎唇吻之和;正度乎胸臆之中,而執節乎掌握之間。內得于中心,而外合于馬志,是故能進退履繩,而旋曲中規矩,取道致遠,而氣力有餘,誠得其術也。得之于銜,應之于轡;得之于轡,應之于物;得之于物,應之于心。則不以目視,不以策驅;心閑體正,六轡不亂,而二十四蹄所投無差;回旋進退,莫不中節。然後輿輪之外,可使無餘轍;馬蹄之外,可使無餘地。未嘗覺山谷之險。原隰之夷,視之一也。吾術窮矣。汝其識之!”

16 湯問: 魏黑卵以暱嫌殺丘邴章。丘邴章之子來丹謀報父子仇。丹氣甚猛,形甚露,計料而食,順風而趨。雖怒,不能稱兵以報之。恥假力于人,誓手劍以屠黑卵。黑卵悍志絕眾,九抗百夫,筋骨皮肉,非人類也。延頸承刀,披胸受矢,鋩鍔摧屈,而體無痕撻。負其材力,視來丹猶雛鷇也。來丹之友申他曰:“子怨黑卵至矣,黑卵之易子過矣,將奚謀焉?”來丹垂涕曰:“愿子為我謀。”申他曰:‘吾聞衛孔周其祖得殷帝之寶劍,一童子服之,卻三軍之眾,奚不請焉?“丹遂適衛,見孔周,執仆御之禮請先納妻子,後言所欲。孔周曰:“吾有三劍,唯子所譯;皆不能父人,且先言其狀。一曰含光,視之不可見,運之不知有。其所觸也,泯然無際,經物而物不覺。二曰承影,將旦昧爽之交,日夕昏明之際,北面而察之,淡淡焉若有物存,莫識其狀。其所觸也,竊竊然有聲,經物而物不疾也。三曰宵練,方晝則見影而不見光,方夜見光而不見形。其觸物也,騞然而過,隨過隨合,覺疾而不血刃焉。此三寶者,傳之十三世矣,而無施于事。匣而藏之,未嘗啟封,”來丹曰:“雖然,吾心請其下者。”孔周乃歸其妻子,與齋七日。晏陰之間,跪而授其下劍,來丹再拜受之以歸。來丹遂執劍從黑卵。時黑卵之醉,偃于牖下,自頸至腰三斬之。黑卵不覺。來丹以黑卵之死,趣而退。遇黑卵之子于門,擊之三下,如投虛。黑卵之子方笑曰:“汝何蚩而三招子?”來丹知劍之不能殺人也,嘆而歸。黑卵既醒,怒其妻曰:“醉而露我,使人嗌疾而腰急。”其子曰:“疇昔來丹之來。遇我于門,三招我,亦使我體疾而支強,彼其厭我哉!”

17 湯問: 周穆王大征西戎,西戎獻錕鋙之劍,火浣之布。其劍長尺有咫,練鋼赤刃,用之切玉如切泥焉。火浣之布,浣之必投于火;布則火色,垢則布色;出火而振之,皓然疑乎雪。皇子以為無此物,傳之者妄。蕭叔曰:“皇子果于自信,果于誣理哉!”

列子 (열자) 列御寇 (열어구) 002 黃帝 (황제)

列子(열자) 列御寇(열어구)

天瑞(천서) 黃帝(황제) 周穆王(주목왕)


1 黃帝: 黃帝即位十有五年,喜天五戴己,養正命,娛耳目,供鼻口,焦然肌色皯黴,昏然五情爽惑。又十有五年,憂天下之不治,竭聰明,進智力,營百姓,焦然肌色皯黴,昏然五情爽惑。黃帝乃喟然贊曰:“朕之過淫矣。養一己其患如此,治萬物其患如此。”于是放萬機,舍宮寢,去直待,徹鐘縣。減廚膳,退而間居大庭之館,齋心服形,三月不親政事。晝寢而夢,游于華胥氏之國。華胥氏之國在弇州之西,臺州之北,不知斯齊國幾千萬里;蓋非舟四足力之所及,神游而已。其國無帥長,自然而已。其民無嗜欲,自然而已。不知樂生,不知惡死,故無夭殤;不知親己,不知疏物,故無愛憎;不知背逆,不知向順,故無利害;都無所愛惜,都無所畏忌。入水不溺,入火不熱。斫撻無傷痛,指擿無痟癢。乘空如履實,寢虛若處床。云霧不硋其視,雷霆不亂其聽,美惡不滑其心,山谷不躓其步,神行而已。黃帝既悟,怡然自得,召天老、力牧、太山稽,告之曰:“朕閑居三月,齋心服形,思有以養身治物之道,弗獲其術。疲而睡,所夢若此。今知至道不可以情求矣。朕知之矣!朕得之矣!而不能以告若矣。”又二十有八年,天下大治,幾若華胥氏之國,而帝登假,百姓號之,二百餘年不輟。

2 黃帝: 列姑射山在海河洲中,山上有神人焉,吸風飲露,不食五穀;心如淵泉,形如處女,不偎不愛,仙聖為之臣;不畏不怒,愿愨為之使;不施不惠,而物自足;不聚不斂,而已無愆。陰陽常調,日月常明,四時常若,風雨常均,字育常時,年穀常豐;而土無札傷,人無夭惡,物無疵癘,鬼無靈響焉。

3 黃帝: 列子師老商氏,友伯高子;進二子之道,乘風而歸。尹生聞之,從列子居,數月不省舍。因間請蘄其術者,十反而十不告。尹生懟而請辭,列子又不命。尹生退。數月,意不已,又往從之。列子曰:“汝何去來之頻?”尹生曰:“曩章戴有請于子,子不我告,固有憾于子。今復脫然,是以又來。”列子曰:“曩吾以汝為達,今汝之鄙至此乎。姬!將告汝所學于夫子者矣。自吾之事夫子友若人也,三年之後,心不敢念是非,口不敢言利害,始得夫子一眄而已。五年之後,心庚念是非,口庚言利害,夫子始一解顏而笑。七年之後,從心之所念,庚無是非;從口之所言,庚無利害,夫子始一引吾并席而坐。九年之後,橫心之所念,橫口之所言,亦不知我之是非利害歟,亦不知彼之是非利害歟;亦不知夫子之為我師,若人之為我友:內外進矣。而後眼如耳,耳如鼻,鼻如口,無不同也。心凝形釋,骨肉都融;不覺形之所倚,足之所履,隨風東西,猶木葉干殼。竟不知風乘我邪?我乘風乎?今女居先生之門,曾未浹時,而懟憾者再三。女之片體將氣所不受,汝之一節將地所不載。履虛乘風,其可幾乎?”尹生甚怍,屏息良久,不敢復言。

4 黃帝: 列子問關尹曰:“至人潛行不空,蹈火不熱,行乎萬物之上而不慄。請問何以至于此?”關尹曰:“是純氣之守也,非智巧果敢之列。姬!魚語女。凡有貌像聲色者,皆物也。物與物何以相遠也?夫奚足以至乎先?是色而已。則物之造乎不形,而止乎無所化。夫得是而窮之者,焉得為正焉?彼將處乎不深之度,而藏乎無端之紀,游乎萬物之所終始。壹其性,養其氣,含其德,以通乎物之所造。夫若是者,其天守全,其神無郤,物奚自入焉?夫醉者之墜于車也,雖疾不死。骨節與人同,而犯害與人異,其神全也。乘亦弗知也,墜亦弗知也。死生驚懼,不入乎其胸,是故遌物而不慴。彼得全于酒,而猶若是,而況得全于天乎?聖人藏于天,故物莫之能傷也。”

5 黃帝: 列御寇為伯昏瞀人射,引之盈貫,措杯水其肘上,發之,鏑矢復沓,方矢復寓。當是時也,猶象人也。伯昏瞀人曰:“是射之射,非不射之射也。當與汝登高山,履危石,臨百仞之淵,若能射乎?”于是瞀人遂登高山,履危石,臨百仞之淵,背逡巡,足二分垂在外,揖御寇而進之。御寇伏地,汗流至踵。伯昏瞀人曰:“夫至人者,上窺青天,下潛黃泉,揮斥八極。神氣不變。今汝怵然有恂目之志,爾于中也殆矣夫!”

6 黃帝: 范氏有子曰子華,善養私名,舉國服之;有寵于晉君,不仕而居三卿之右。目所偏視,晉國爵之;口所偏肥,晉國黜之。游其庭者侔于朝。子華使其俠客,以智鄙相攻,彊弱相凌。雖傷破于前,不用介意。終日夜以此為戲樂,國殆成俗。禾生、子伯、范氏之上客。出行經坰外,宿于田更商丘開之舍。中夜,禾生、子伯二人相與言子華之名勢,能使存者亡,亡者存;富者貧,貧者富。商丘開先窘于饑寒,潛于牖北聽之。因假糧荷畚之子華之門。子華之門徒皆世族也,縞衣乘軒,緩步闊視。顧見商丘開年老力弱,面目黎黑,衣冠不檢,莫不眲之。既而狎侮欺詒,攩㧙挨抌,亡所不為。商丘開常無慍容,而諸客之技單,憊于戲笑。遂與商丘開俱乘高臺,于眾中漫言曰:“有能自投下者賞百金。”眾皆競應。商丘開以為信然,遂先投下,形若飛鳥,揚于地,肌骨無毀。范氏之黨以為偶然,未詎怪也。因復指河曲之淫隈曰:“彼中有寶珠,泳可得也。”商丘開復從而泳之,既出,果得珠焉。眾昉同疑。子華昉令豫肉食衣帛之次。俄而范氏之藏大火。子華曰:“若能入火取綿者,從所得多少賞若。”商丘開往,無難色,入火往還,埃不漫,身不焦。范氏之黨以為有道,乃共謝之曰:“吾不知子之有道而誕子,吾不知子之神人而辱子。子其愚我也,子其聾我也,子其盲我也,敢問其道。”商丘開曰:‘吾亡道。雖吾之心,亦不知所以。雖然,有一于此,試與子言之。曩子二客之宿吾舍也,聞譽范氏之勢,能使存者亡,亡者存;富者貧,貧者富。吾誠之無二心,故不遠而來。及來,以子黨之言皆實也,唯恐誠之之不至,行之之不及,不知形體之所措,利害之所存也。心一而已。物亡迕者,如斯而已。今昉知子黨之誕我,我內藏猜慮,外矜觀聽,追幸昔日之不焦溺也,怛然內熱,惕然震悸矣。水火豈復可近哉?”自此之後,范氏門徒路遇乞兒馬醫,弗敢辱也,必下車而揖之。宰我聞之,以告仲尼。仲尼曰:“汝弗知乎?夫至信之人,可以感物也。動天地,感鬼神,橫六合而無逆者,豈但履危險,入水火而已哉?商丘開信偽物猶不逆,況彼我皆誠哉?小子識之!”

7 黃帝: 周宣王方牧正,有役人梁鴦者,能養野禽獸,委食于園庭之內,雖虎狼雕鶚之類,無不柔馴者。雄雌在前,孳尾成群,異類雜居,不相搏噬也。王慮其術終于其身,令毛丘園傳之。梁鴦曰:“鴦,賤役也,何術以告爾?懼王之謂隱于爾也,且一言我養虎之法。凡順之則喜,逆之則怒,此有血氣者之性也。然喜怒豈妄發哉?皆逆之所犯也。夫食虎者,不敢以生物與之,為其殺之之怒也;不敢以全物與之,為其碎之之怒也。時其饑飽,達其怒心。虎之與人異類,而媚養己者,順也;故其殺之,逆也。然則吾豈敢逆之使怒哉?亦不順之使喜也。夫喜之復也必怒,怒之復也常喜,皆不中也。今吾心無逆順者也,則鳥獸之視吾,猶其儕也。故游吾園者,不思高林曠澤;寢吾庭者,不愿深山幽穀,理使然也。”

8 黃帝: 顏回問乎仲尼曰:“吾嘗濟乎觴深之淵矣,津人操舟若神。吾問焉,曰:‘操舟可學邪?’曰:‘可。能游者可教也,善游者數能。乃若夫沒人,則未嘗見舟而謖操之者也。’吾問焉而不告。敢問何謂也?”仲尼曰:‘譩!吾與若玩其文也久矣,而未達其實,而固且道與。能游者可教也,輕水也;善游者之數能也,忘水也。乃若夫沒人之未嘗見舟也而謖操之也,彼視淵若陵,視舟之覆猶其車郤也。覆郤萬物方陳乎前,而不得入其舍,惡往而不暇?以瓦摳者巧,以鉤摳者憚,以黃金摳者惛。巧一也,而有所矜,則重外也。凡重外者拙內。“

9 黃帝: 孔子觀于呂梁,懸水三十仞,流沫三十里,黿鼉魚鱉之所不能游也。見一丈夫游之,以為有苦而欲死者也,使弟子并流而承之。數百步而出,被髪行歌,而游于棠行。孔子從而問之曰:“呂梁懸水三十仞,流沫三十里,黿鼉魚鱉所不能游,向吾見子道之,以為有苦而欲死者,使弟子并流將承子。子出而被髪行歌,吾以子為鬼也。察子則人也。請問蹈水有道乎?”曰:“亡,吾無道。吾始乎故,長乎性,成乎命,與齊俱入,與汨偕出,從水之道而不為私焉。此吾所以道之也。”孔子曰:“何謂始乎故,長乎性,成乎命也?”曰:“吾生于陵安于陵,故也;長于水而安于水,性也;不知吾所以然而然,命也。”

10 黃帝: 仲尼適楚,出于林中,見痀僂者承蜩,猶掇之也。仲尼曰:“子巧乎!有道邪?”曰:“我有道也。五六月累垸二而不墜,則失者錙銖;累三而不墜,則失者十一;累五而不墜,猶掇之也。吾處也,若厥株駒,吾執臂若槁木之枝。雖天地之大、萬物之多,而唯蜩翼之知。吾不反不側,不以萬物易蜩之翼,何為而不得?”孔子顧謂弟子曰:“用志不分,乃凝于神。其痀僂丈人之謂乎!”丈人曰:“汝逢衣徒也,亦何知問是乎?修汝所以,而後載言其上。”

11 黃帝: 海上之人有好漚鳥者,每旦之海上,從漚鳥游,漚鳥之至者百數而不止。其父曰:“吾聞漚鳥皆從汝游,汝取來,吾玩之。”明日之海上,漚鳥舞而不下也。故曰:至言去言,至為無為;齊智之所知,則淺矣。

12 黃帝: 趙襄子率徒十萬,狩于中山,藉芿燔林,扇赫百里,有一人從石壁中出,隨煙燼上下,眾謂鬼物。火過,徐行而出,若無所經涉者。襄子怪而留之,徐而察之:形色七竅,人也;氣息音聲,人也。問奚道而處石?奚道而入火?其人曰:“奚物而謂石?奚物而謂火?”襄子曰:“而向之所出者,石也;而向之所涉者,火也。”其人曰:“不知也。”魏文侯聞之,問子夏曰:“彼何人哉?” 子夏曰:“以商所聞夫子之言,和者大同于物,物無得傷閡者,游金石,蹈水火,皆可也。”文侯曰:“吾子奚不為之?”子夏曰:“刳心去智,商未之能。雖然,試語之有暇矣。”文侯曰:“夫子奚不為之?”子夏曰:“夫子能之而能不為者也。”文侯大說。

13 黃帝: 有神巫自齊來處于鄭,命曰季咸,知人死生、存亡、禍福、壽夭,期以歲、月、旬、日,如神。鄭人見之,皆避而走。列子見之而心醉,而歸以告壺丘子,曰:“始吾以夫子之道為至矣,則又有至焉者矣。”壺子曰:“吾與汝無其文,未既其實,而固得道與?眾雌而無雄,而又奚卵焉?而以道與世抗,必信矣。夫故使人得而相汝。嘗試與來,以予示之。”明日,列子與之見壺子。出而謂列子曰:“嘻!子之先生死矣,弗活矣,不可以旬數矣。吾見怪焉,見濕灰焉。”列子入,涕泣沾襟,以告壺子。壺子曰:“向吾示之以地文,罪乎不誫不止,是殆見吾杜德幾也。嘗又與來!”明日,又與之見壺子。出而謂列子曰:“幸矣,子之先生遇我也,有瘳矣。灰然有生矣,吾見杜權矣。”列子入告壺子。壺子曰:“向吾示之以天壤,名實不入,而機發于踵,此為杜權。是殆見吾善者幾也。嘗又與來!”明日,又與之見壺子。出而謂列子曰:“子之先生,坐不齋,吾無得而相焉。試齋,將且復相之。”列子入告壺子。壺子曰:“向吾示之以太沖莫眹,是殆見吾衡氣幾也。鯢旋之潘為淵,止水之潘為淵,流水之潘為淵,濫水之潘為淵,沃水之潘為淵,氿水之潘為淵,雍水之潘為淵,汧水之潘為淵,肥水之潘為淵,是為九淵焉,嘗又與來!”明日,又與之見壺子。立未定,自失而走。壺子曰:“追之!”列子追之而不及,反以報壺子,曰:“已滅矣,已失矣,吾不及也。“壺子曰:”向吾示之以未始出吾宗。吾與之虛而猗移,不知其誰何,因以為茅靡,因以為波流,故逃也。”然後列子自以為未始學而歸,三年不出,為其妻爨,食狶如食人,于事無親,雕瑑復樸,塊然獨以其形立,紛然而封戎,壹以是終。

14 黃帝: 子列子之齊,中道而反,遇伯昏瞀人。伯昏瞀人曰:“奚方而反?”曰:“吾驚焉。”“惡乎驚?”“吾食于十漿,而五漿先饋。”伯昏瞀人曰:“若是則汝何為驚已?”曰:“夫內誠不解,形諜成光,以外鎮人心,使人輕乎貴老,而韲其所患。夫漿人特為食羹之貨,多餘之贏;其為利也薄,其為權也輕,而猶若是。而況萬乘之主,身勞于國,而智盡于事;彼將任我以事,而效我以功,吾是以驚。”伯昏瞀人曰:“善哉觀乎!汝處己,人將保汝矣。”無幾何而往,則戶外之屨滿矣。伯昏瞀人北面而立,敦杖蹙之乎頤。立有間,不言而出。賓者以告列子。列子提履徒跣而走,暨乎門,問曰:“先生既來,曾不廢藥乎?”曰:“已矣。吾固告汝曰,人將保汝,果保汝矣。非汝能使人保汝,而汝不能使人無汝保也,而焉用之感也?感豫出異。且必有感也,搖而本身,又無謂也。與汝游者,莫汝告也。彼所小言,盡人毒也。莫覺莫悟,何相孰也。”

15 黃帝: 楊朱南之沛,老聃西游于秦。邀于郊。至梁而遇老子。老子中道仰天而嘆曰:“始以汝為可教,今不可教也。”楊朱不答。至舍,進涫漱巾櫛,脫履戶外,膝行而前曰:“向者夫子仰天而嘆曰:‘始以汝為可教,今不可教。’弟子欲請夫子辭,行不閑,是以不敢。今夫子閑矣,請問其過。”老子曰:“而睢睢,而盱盱,而誰與居?大白若辱,盛德若不足。”楊朱蹴然變容曰:“敬聞命矣!”其往也,舍者迎將家,公執席,妻執巾櫛,舍者避席,煬者避灶。其反也,舍者也之爭席矣。

16 黃帝: 楊朱過宋東之于逆旅。逆旅人有妾二人,其一人美,其一人惡;惡者貴而美者賤。楊子問其故。逆旅小子對曰:“其美者自美,吾不知其美也;其惡者自惡,吾不知其惡也。”楊子曰:“弟子記之!行賢而去自賢之行,安往而不愛哉!”

17 黃帝: 天下有常勝之道,有不常勝之道。常勝之道曰柔,常不勝之道曰強。二者亦知,而人未之知。故上古之言:強,先不己若者;柔先出于己者。先不己若者,至于若己,則殆矣。先出于己者,亡所殆矣。以此勝一身若徒,以此任天下若徒,謂不勝而自勝,不任而自任也。粥子曰:“欲剛,必以柔守之;欲強,必以弱保之。積于柔必剛,積于弱必強。觀其所積,以知禍福之鄉。強勝不若己,至于若己者剛;柔勝出于己者,其力不可量。”老聃曰:“兵強則滅。木強則折。柔弱者生之徒,堅強者死之徒。”

18 黃帝: 狀不必童,而智童;智不必童,而狀童。聖人取童智而遺童狀,眾人近童狀而疏童智。狀與我童者,近而愛之;狀與我異者,疏而畏之。有七尺之骸,手足之異,戴發含齒,倚而趣者,謂之人。而人未必無獸心;雖有獸心,以狀而見親矣。傅翼戴角,分牙布爪,仰飛伏走,謂之禽獸。而禽獸未必無人心;雖有人心,以狀而見疏矣。庖犧氏、女媧氏、神農氏、夏後氏,蛇身人面,牛首虎鼻;此有非人之狀,而有大聖之德。夏桀、殷紂、魯桓、楚穆,狀貌七竅,皆同于人,而有禽獸之心。而眾人守一狀以求至智,未可幾也。黃帝與炎帝戰于阪泉之野,帥熊、羆、狼、豹、貙、虎為前驅,雕、鹖、鷹、鳶為旗幟,此以力使禽獸者也。堯使夔典樂,擊石拊石,百獸率舞;簫韶九成,鳳皇來儀:此以聲致禽獸者也。然則禽獸之心,奚為異人?形音與人異,而不知接之之道焉。聖人無所不知,無所不通,故得引而使之焉。禽獸之智有自然與人童者,其齊欲攝生,亦不假智于人也。牝牡相偶,母子相親,避平依險,違寒就溫;居則有群,行則有列;小者居內,壯者居外;飲則相攜,食則鳴群。太古之時,則與人同處,與人并行。帝王之時,始驚駭散亂矣。逮于末世,隱伏逃竄,以避患害。今東方介氏之國,其國人數數解六畜之語者,蓋偏知之所得。太古神聖之人,備知萬物情態,悉解異類音聲。會而聚之,訓而受之,同于人民。故先會鬼神魑魅,次達八方人民,末聚禽獸蟲蛾。言血氣之類,心智不殊遠也。神聖知其如此,故其所教訓者無所遺逸焉。

19 黃帝: 宋有狙公者,愛狙,養之成群,能解狙之意;狙亦得公之心。損其家口,充狙之欲。俄而匱焉,將限其食。恐眾狙之不馴于己也,先誑之曰:“與若芧,朝三而暮四,足乎?”眾狙皆起而怒。俄而曰:“與若芧,朝四而暮三,足乎?”眾狙皆伏而喜。物之以能鄙相籠,皆猶此也。聖人以智籠群愚,亦猶狙公之以智籠眾狙也。名實不虧,使其喜怒哉!

20 黃帝: 紀渻子為周宣王養鬭雞,十日而問:“雞可鬭已乎?“曰:“未也,方虛驕而恃氣。”十日又問。曰:“未也,猶應影響。”十日又問。曰:“未也,猶疾視而盛氣。十日又問。曰:“幾矣。雞雖有鳴者,已無變矣。望之似木雞矣,其德全矣。異雞無敢應者,反走耳。”

21 黃帝: 惠盎見宋康王。康王蹀足謦欬,疾言曰:“寡人之所說者,勇有力也,不說為仁義者也。客將何以教寡人?”惠盎對曰:“臣有道于此,使人雖勇,刺之不入;雖有力,擊之弗中。大王獨無意邪?”宋王曰:“善,此寡人之所欲聞也。”惠盎曰:“夫刺之不入,擊之不中,此猶辱也。臣有道于此,使人雖有勇弗敢刺;雖有力弗敢擊。夫弗敢,非無其志也。臣有道于此,使人本無其志也。夫無其志也,未有愛利之心也。臣有道于此,使天下丈夫女子,莫不驩然皆欲愛利之。此其賢于勇有力也,四累之上也。大王獨無意邪?”宋王曰:“此寡人之所欲得也。”惠盎對曰:“孔、墨是已。孔丘、墨翟,無地而為君,無官而為長;天下丈夫女子,莫不延頸舉踵而愿安利之。今大王,萬乘之主也,誠有其志,則四竟之內,皆得其利矣。其賢于孔、墨也遠矣。”宋王無以應。惠盎趨而出。宋王謂左右曰:“辯矣,客之以說服寡人也!”

列子 (열자) 列御寇 (열어구)

列子(열자) 列御寇(열어구)

列子(Lièzǐ)

구분: 철학

저자: 열어구

시대: 춘추전국시대


열어구(列御寇)가 지은 책 이름. 도가(道家) 경전의 하나


8권 8편. 열어구(列禦寇:列子)가 서술한 것을 문인 ·후생들이 보완하여 천서(天瑞) ·황제(黃帝) ·주목왕(周穆王) ·중니(仲尼) ·탕문(湯問) ·역명(力命) ·양주(楊朱) ·설부(說符)의 8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전한(前漢) 말기에 유향(劉向)이 교정하여 8권으로 만들고, 동진(東晉)의 장담(張湛)이 주(注)를 달았다. 당대(唐代)에는 충허진경(沖虛眞經), 송대에는 충허지덕진경(沖虛至德眞經)이라는 존칭을 받았으나 그 소론(所論)은 노자(老子)의 청허무위(淸虛無爲)의 사상을 따른 것으로 독창성이 적다. 우공이산(愚公移山) ·조삼모사(朝三暮四) ·기우(杞憂) 등의 기사로 유명하다.


관련 고사성어

01 天瑞(천서)

02 黃帝(황제)

海翁好鷗(해옹호구) |
朝三暮四(조삼모사) |

03 周穆王(주목왕)

04 仲尼(중니)

05 湯問(탕문)

愚公移山(우공이산) |

06 力命(역명)

07 楊朱

08 說符

寧靜致遠 (영정치원)

寧靜致遠(영정치원)

寧 편안할 녕, 편안할 영, 편안할 령, 편안할 영 | 靜 고요할 정 | 致 이를 치, 빽빽할 치 | 遠 멀 원 |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야 원대한 포부를 이룰 수 있다.

拈一放一 (염일방일)

염일방일(拈一放一)

하나를 잡으면 다른 하나를 놓아야 한다.



선불교

呂氏春秋 (여씨춘추) 呂不韋 (여불위)

呂氏春秋(여씨춘추) 呂不韋(여불위)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제자백가 중 잡가(雜家)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여람(呂覽)》이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의 거상이자 진(秦: 기원전 900?~기원전 221/206)의 재상인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92~235)가 전국의 논객들과 식객들을 모아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사상을 절충·통합시키고 세밀하게 분석하여 정치와 율령의 참고로 삼기 위해 저술하게 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총 26권 160편으로, 연감에 해당하는 기(紀) 12권, 보고서에 해당하는 람(覽) 8권, 논문에 해당하는 론(論)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기(禮記)》의 '월령편(月令篇)'은 이들 중 12기(十二紀), 즉 기(紀) 12권의 요약이라고 한다.

다루고 있는 학설 중에는 도가(道家)의 것이 가장 많고 유가(儒家)·병가(兵家)·농가(農家)·법가(法家)의 주장과 이론도 섞여 있다.

여불위는 이 책을 진의 수도 함양 저잣거리에 전시해 놓고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고칠 수 있다면 천금을 주겠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이 때문에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관련 한자어

掩耳盜鐘(엄이도종)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 |

一字千金(일자천금)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깎는다면 천금을 주겠다 |


http://ko.wikipedia.org/wiki/여씨춘추
(중국어) 여씨춘추 원문

如魚得水 (여어득수)

如魚得水(여어득수)

如 같을 여, 말 이을 이 | 魚 고기 어 | 得 얻을 득 | 水 물 수 |

물고기가 물을 얻음과 같다는 뜻으로, 빈궁(貧窮)한 사람이 활로를 찾게 됨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Like fish getting water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諸葛亮)전에는 유비(劉備)가 제갈량을 얻었을 때의 심정을 기록한 대목이 있다. 동한(東漢) 말기, 천하가 대란(大亂)에 휩싸이자, 각 세력들과 다투던 유비는 인재(人才)를 찾고 있었다. 그는 제갈량이라는 인재가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터라, 직접 세 차례나 그를 찾아가 자신을 도와 천하를 도모하기를 청하였다.

제갈량의 도움으로 유비는 촉한(蜀漢)을 건국하고, 조조, 손권과 삼국정립(三國鼎立)의 국면을 형성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매우 존경하였으며, 제갈량 또한 유비의 대우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유비는 중대한 일들에 대하여 제갈량에게 자문을 구하였는데,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제갈량에 대한 태도에 불만이었다.

이에 유비는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제갈량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으니[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자네들은 다시 이런 말을 하지 않도록 하게."

如魚得水(Like fish getting water)란 수어지교(水魚之交), 수어지친(水魚之親)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마음에 맞는 사람을 얻거나 자신에게 매우 적합한 환경을 얻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三國志(삼국지)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水魚之交(수어지교) | 水魚之親(수어지친) |

與世推移 (여세추이, yǔshìtuīyí)

與世推移(여세추이)

与世推移(yǔshìtuīyí)

與 더불 여 | 世 인간 세 | 推 옮길 추 | 移 옮길 이 |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함께 변화해간다는 뜻으로 중국 전국시대 초(楚)의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에서 비롯된 말이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굴원(屈原, BC 343 ?~BC 278 ?)의 ‘어부사(漁父辭)’에서 비롯된 말로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함께 변화해간다’는 뜻이다. 초(楚)에서 한때 삼려대부(三閭大夫)의 지위까지 올랐던 굴원은 제(齊)와 동맹해 강국인 진(秦)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적들의 모함을 받아 좌천되었다. 그러나 굴원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제(齊)와 단교(斷交)를 하며 친진(親秦) 정책을 펼치던 초(楚) 회왕(懐王)은 장의(張儀)의 모략에 빠져 진(秦)에 사로잡혀 객사하였다.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한 뒤 굴원은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회왕을 객사하게 한 자란(子蘭)이 영윤(令尹, 재상)이 되자 그를 비판하다가 다시 유배되었다. 굴원은 ‘어부사(漁父辭)’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나타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굴원이 이미 쫓겨나 강과 못 사이를 거닐면서 詩(시)를 읊조릴 적에 안색이 초췌하고 몸이 수척해 있었다. 어부(漁父)가 그를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니시오? 무슨 까닭으로 여기까지 이르렀소?” 굴원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 홀로 깨끗하고, 뭇 사람이 모두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어 추방을 당했소이다.” 어부(漁父)가 이에 말했다. “성인(聖人)은 사물에 얽매이거나 막히지 않고 능히 세상과 추이를 같이 한다오(聖人不凝滯於物而能與世推移).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혼탁하면 어찌 그 진흙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고, 뭇 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으면 왜 그 술지게미 배불리 먹고 박주(薄酒)나마 마시지 않고 어찌하여 깊은 생각과 고상한 행동으로 스스로 추방을 당하셨소?” 굴원이 답하였다. “내 일찍이 듣기로, 새로 머리를 감은 자는 반드시 관(冠)의 먼지를 털어 쓰고, 새로 목욕을 한 자는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 하였소. 어찌 이 깨끗한 몸에 외물(外物)의 더러움을 받을 수 있겠소? 차라리 상강(湘江)에 뛰어들어 물고기의 뱃속에 장사(葬事)를 지낼지언정 어찌 이 희고 깨끗한 몸에 세속(世俗)의 티끌을 뒤집어쓸 수 있겠소.” 어부(漁父)는 듣고서 빙그레 웃고는 배의 노를 두드려 떠나가며 노래하였다.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滄浪)의 물이 흐리면 발이나 씻으리라.” 마침내 가 버려 다시 그와 더불어 말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서는 ‘여세추이(與世推移)’가 문맥상 혼탁한 세상의 흐름에 따라간다는 의미로 쓰였지만, 일반적으로 한 가지 일에만 얽매여 발전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일컫는 ‘수주대토(守株待兎)’와는 반대로, 시대나 세상의 변화에 융통성 있게 적응해가는 성인(聖人)의 법도를 나타내는 의미로 쓰인다.

<후한서(後漢書)>의 ‘최식열전(崔寔列傳)’에는 환제(桓帝) 때 최식(崔寔)이 ‘어부사(漁父辭)’의 표현을 빌어 “성인은 어떤 일에도 구애받음이 없이 세상의 변천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은 융통성이 없어 마음으로만 괴로워하며 시대의 변천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벗어난 말과 글로 나라를 그르치기도 한다.”는 정론(政論)을 남겼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한비자> ‘오두(五蠹)’ 편에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고사와 함께 “성인은 굳이 옛 도를 닦아 지키려고 하지 않으며, 항상 옳은 것을 법으로 삼지 않고, 세상의 일을 논하여 그것에 대한 적절한 대비책을 세운다(聖人不期修古 不法常可 論世之事 因爲之備)”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세추이(與世推移)’는 이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관련 한자어

반의어

守株待兎(수주대토) |



어부사, 屈原, 굴원 |

與時俱進 (여시구진)

與時俱進(여시구진)

1910년대 쓴 '중국이론학사'에 등장한 말로 '시대 조류에 맞춰 나가자'는 뜻

廬山眞面目 (여산진면목, Lúshānzhēnmiànmù)

廬山眞面目(여산진면목)

庐山真面目(Lúshānzhēnmiànmù)

廬 오두막집 려 | 山 메 산 | 眞 참 진 | 面 얼굴 면 | 目 눈 목 |


'여산의 참모습'이라는 뜻으로, 너무도 깊고 유원하여 그 참모습을 파악하기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중국 송(宋)나라 때 소식(蘇軾)이 지은 《제서림벽(題西林壁)》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소식은 호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 하여, 소동파(蘇東坡)라고도 부른다. 여산(루산)을 유람하면서 모두 7수의 시를 지었는데, 《제서림벽》도 그 가운데 한 수이다. 《제서림벽》이라는 제목은 '서림사(西林寺) 담장에 쓴 제시(題詩)'라는 뜻이다. 동진(東晉) 시대에 세워진 서림사는 여산의 북서쪽 기슭에 있는 유명한 고찰이다. 《제서림벽》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橫看成嶺側成峰(횡간성령측성봉)
遠近高低各不同(원근고저각부동)
不識廬山眞面目(불식여산진면목)
只綠身在此山中(지연신재차산중)

가로로 보면 고개, 세로로 보면 봉우리
원근고저에 따라 모습이 제각각일세.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단지 이 몸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지.

간결한 7언절구로 쓰여진 이 시는 송나라 때 유행한 설리시(說理詩)에 속한다. 곧, 삼면이 물로 싸여 있고 만학천암(萬壑千巖)이 안개에 휩싸여 그 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여산의 모습을 통하여 도(道)나 진리의 전모(全貌)를 체득하기 어려움을 말하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여기서 유래하여 여산진면목은 깊고 유원하여 그 참모습을 파악하기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출전: 題西林壁(제서림벽)


관련 한자어

동의어

庐山真面(Lúshānzhēnmiàn) |

참조어

不识庐山真面目(bùshíLúshānzhēnmiànmù) 숲 속에 있는 사람은 숲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다. |

有眼不识泰山(yǒuyǎnbùshíTàishān) 눈이 있어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다. 견식이 부족해 신분·지위·능력 등이 대단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다. 어른을 몰라보다. |


관련 한시

題西林壁(제서림벽) |


제서림벽, 소식

題西林壁, 蘇軾

鳶飛魚躍 (연비어약)

鳶飛魚躍(연비어약)

鳶 솔개 연 | 飛 날 비 | 魚 물고기 어 | 躍 뛸 약 |

솔개가 하늘을 나는 것이나 물고기가 못에서 뛰는 것이나 다 자연 법칙의 작용으로, 새나 물고기가 스스로 터득한다라는 뜻으로, 만물(萬物)이 저마다의 법칙(法則)에 따라 자연(自然)스럽게 살아가면, 전체적(全體的)으로 천지(天地)의 조화(調和)를 이루게 되는 것이 자연(自然)의 오묘(奧妙)한 도(道)임을 말함.

① 道理(도리)는 천지간 어디에나 있다는 말. ② 君子(군자)의 德化(덕화)가 널리 미친 상태.

[출전]
詩經(시경) 大雅(대아).


관련 한자어

참조어

鳶飛戾天 魚躍于淵(연비려천 어약우연)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고기는 뛰어 연못에 놀도다. [시경(詩經) 대아 한록(大雅旱麓)] |

惟魚躍之斷章 迺中庸之大旨 庶沉潛以終身 幸摳衣於子思子(유어약지단장 내중용지대지 서침잠이종신 행구의어자사자) 더구나 어약의 구절은 중용의 대지이니, 종신토록 그 뜻에 잠겨서 자사님을 스승으로 받들리라. [이색(李穡) 관어대부(觀魚臺賦)] |

異端驅虎豹 道學達魚鳶(이단구호표 도학달어연) 이단이 범과 표범같이 날뛸 때, 그의 도학은 연비어약이었네. [서거정(徐居正) 송남원양군성지시100운(送南原梁君誠之詩百韻)] |

如反掌 (여반장)

如反掌(여반장)

이여반장(易如反掌)의 준말. 손바닥을 뒤치는 것처럼 아주 쉽다는 말. 맹자(孟子)에서 유래.


관련 한자어

유의어

타수가득(唾手可得) 쉽게 얻을 수 있는 일 또는 힘들이지 않고 쉽게 성사시킬 수 있는 일 등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다는 뜻의 여반장(如反掌) 또는 이여반장(易如反掌)과 같은 의미이다.

與民同樂 (여민동락)

與民同樂(여민동락)

與 더불 여 | 民 백성 민 | 同 같을 동 | 樂 즐거울 락 |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다'라는 뜻으로,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통치자의 자세를 비유하는 말이다. 《맹자(孟子)》에서 유래되었다.

맹자는 인의(人義)와 덕(德)으로써 다스리는 왕도(王道)정치를 주창하였는데, 그 바탕에는 백성을 정치적 행위의 주체로 보는 민본(民本) 사상이 깔려 있다. 맹자는 양(梁)나라 혜왕(惠王)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왕께서 음악을 연주하시는데 백성들이 종과 북, 피리 소리를 듣고는 골머리를 앓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우리 왕은 음악을 즐기면서 어찌하여 우리를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여 부자(父子)가 만나지 못하고, 형제와 처자가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가"라고 불평하며, 또 왕께서 사냥을 하시는데 백성들이 그 행차하는 거마(車馬) 소리와 화려한 깃발을 보고는 골머리를 앓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우리 왕은 사냥을 즐기면서 어찌하여 우리를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여 부자(父子)가 만나지 못하고, 형제와 처자가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가"라고 원망한다면,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此無他, 不與民同樂也].

지금 왕께서 음악을 연주하시는데 백성들이 종과 북, 피리 소리를 듣고는 모두들 기뻐하는 빛을 띠며 "우리 왕께서 질병 없이 건강하신가 보다, 어찌 저리 북을 잘 치실까"라고 하며, 왕께서 사냥을 하시는데 백성들이 거마 소리와 화려한 깃발을 보고 모두들 기뻐하는 빛을 띠며 "왕께서 질병 없이 건강하신가 보다, 어찌 저리 사냥을 잘 하실까"라고 한다면,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하기 때문입니다[此無他, 與民同樂也]."

곧, 왕이 백성들에게는 고통을 주면서 자기만 즐긴다면 백성들이 반발하겠지만,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한다면 왕이 즐기는 것을 함께 기뻐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 고사(故事)는 《맹자》의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하편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여민동락은 항상 백성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자의 이상적인 자세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여민해락(與民偕樂)도 같은 뜻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與民同樂(여민동락) | 與民偕樂(여민해락) |

鳶飛戾天魚躍于淵 (연비여천어약우연)

鳶飛戾天魚躍于淵(연비여천어약우연)

鳶 솔개 연 | 飛 날 비 | 戾 이를 려 | 天 하늘 천 | 魚 고기 어 | 躍 뛸 약 | 于 어조사 우 | 淵 못 연 |
풀이

솔개는 날아 하늘에 닿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출전]
시경(詩經) 대아한록편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鳶飛魚躍(연비어약) |

緣木求魚 (연목구어, yuánmùqiúyú)

緣木求魚(연목구어)

缘木求鱼(yuánmùqiúyú)

緣 인연 연 | 木 나무 목 | 求 구할 구 | 魚 물고기 어 |


나무에 올라 고기를 얻으려고 한다는 뜻으로, 목적과 수단이 맞지 않아 불가능한 일을 굳이 하려 함을 비유하는 말.


주(周)의 신정왕 3년(BC 318), 맹자는 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갔다. 이미 50을 넘은 나이였다. 동쪽에 있는 제는 서쪽의 진(秦), 남쪽의 초(楚)와 더불어 전국 제후 가운데에서도 대국이었다.

선왕(宣王)도 재주있는 사람이어서, 맹자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가 아닌 부국강병이며, 외교상의 책모, 원교근공책, 합종책, 연횡책이었다. 선왕은 중국의 통일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맹자와 선왕은 이런 문답을 하였다.

"임금께서는 전쟁을 일으켜 신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이웃 나라 제후들과 원수를 맺는 것을 좋아하시나요?" "내게 대망(大望)이 있기 때문이오." "임금님의 대망이란 것에 대해서 말씀해 보십시오." 인의(仁義)의 왕도정치를 논하는 맹자에게 선왕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다. 맹자는 낚시를 던지기 시작하였다. "전쟁의 목적은 의식(衣食)이오니까, 인생의 오락이오니까?" "아니오, 나의 욕망은 그런 것이 아니오." 선왕은 맹자의 교묘한 변술에 걸려들고 말았다. 맹자는 힘차게 논하였다.

"그러시다면 이미 다 알 수 있습니다. 영토를 확장하여 진과 초와 같은 대국으로 하여금 허리를 굽히게 하고, 중국 전토를 지배하여 사방의 오랑캐를 따르게 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방법 즉 일방적인 무력으로 그것을 얻으려 하는 것은 연목구어 같은 것으로 목적과 수단이 맞지 않아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어렵습니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심신을 다해도 결국은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망치는 큰 재난까지 입는 결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옵니다." "재난을 당하는 까닭을 가르쳐 주시오." 선왕은 귀가 솔깃하여 다가앉았다. 이렇게 맹자는 교묘하게 대화의 주도권을 얻어, 인의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론을 당당히 설명해 갔다.


관련 한자어

참조어

刻舟求劍(각주구검) |


맹자, 불가능, 나무, 물고기 |

逆鱗 (역린)

逆鱗(역린)

逆 거스를 역 | 鱗 비늘 린 |

용의 가슴에 거꾸로 난 비늘이라는 뜻으로, ①건드리면 반드시 살해됨 ②임금님의 노여움을 비유(比喩ㆍ譬喩)함


중국에는 용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가 많다. 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봉(鳳), 인(麟), 귀(龜)와 더불어 사령(四靈)이라 하여 영물로 실재화하여 생각했다. 용은 특히 비늘[鱗] 달린 짐승 중 으뜸가는 것으로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몰고 온다고 여겼다.

그리고 군주를 용에 비겨서 용상(龍床)이니 용안(龍顔)이니 하여 그 권위와 존엄성을 높이기도 했다. 용상(龍床)이나 용안(龍顔) 외에도, 황제의 후대를 뜻하는 용자(龍子), 황제의 수레인 용여(龍輿) 등은 그 권위와 존엄성을 나타낸 말들이다.

역린은 '한비자(韓非子) 세난편(說難篇)'에 나오는 말이다.

용(龍)이라는 짐승은 잘 길들이면 올라탈 수도 있지만 그의 목 아래에 있는 직경 한 자쯤 되는 역린, 즉 다른 비늘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 있는 비늘을 건드리면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임금도 역린이 있어 말하는 사람이 이 역린만 건드리지 않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하였다.[人主亦有逆鱗]

임금을 용에 비유한 말이다.

如狼牧羊 (여랑목양)

如狼牧羊(여랑목양)

如 같을 여 | 狼 이리 랑,낭 | 牧 칠 목 | 羊 양 양 |

이리에게 양을 기르게 한다는 뜻으로,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백성을 착취(搾取)함을 비유한 말.

Like a wolf shepherding sheep. To rule the people oppressively. Oppression of the people by bad officials.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지방의 할거 세력들과 대상인들은 대대적으로 토지를 점령하여,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큰 힘을 가진 세력집단이 되었다. 한무제는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지방호족과 대상인들의 세력을 억제하는 정책을 채용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지방 할거세력과 호족, 대상인들의 저항을 야기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정양(定襄) 태수를 지내는 의종(義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본시 도적출신이었으나, 왕태후의 총애를 받은 누님의 덕택으로 현령이 되었다. 그는 법을 올바르게 적용하여 다스릴 뿐, 신분의 귀천(貴賤)은 따지지 않았다. 한번은 태후(太后)의 외손(外孫)인 수성군(修成君)의 아들을 체포하여 심문한 적이 있었는데, 천자는 이를 알고 의종을 유능하다고 여겨, 하내(河內)의 도위로 자리를 옮기게 하였다. 의종은 부임하자 곧 그 곳의 호족(豪族)인 양씨(穰氏) 일가를 멸망시켰는데,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이곳 사람들은 두려워서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게 되었다[河內道不拾遺].

한편, 제남(濟南)의 도위(都尉)를 지내며 종실(宗室)과 호족(豪族)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영성(寧成)은 중형을 받고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그 즈음 천자가 그를 태수로 임명하려고 하자, 어사대부 공손홍이 진언하였다.

˝신이 산동의 말단 관리로 있을 때, 영성은 제남의 도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이리가 양을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其治如狼牧羊]. 영성에게 백성을 다스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천자는 영성을 함곡관의 도위로 임명하였다. 영성이 도위로 근무한지 1년쯤 지나자, 관(關)을 출입하는 관리들에게서 이런 말이 나돌았다.

˝어린 호랑이에게 젖을 먹이는 호랑이를 건드릴지언정 영성의 노여움을 사면 안 된다.˝

의종은 하내에서 남양의 태수를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의종은 영성(寧成)이 은퇴하여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종이 남양에 부임하기 위해 관(關)에 도착하자, 영성은 그곳에 나와 겸손하게 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의종은 거만하게 굴며 그에게 답례조차 하지 않았다. 의종은 남양의 태수로 부임하자, 제일 먼저 영성의 무고한 일가를 심문하고 그 일족을 모두 죽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관리들과 사람들은 모두 집안에 틀어박혀 함부로 나돌아다니지 않았다.

얼마 후, 흉노 원정으로 정양군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천자는 의종을 정양의 태수로 임명하고 혼란을 막도록 하였다. 의종은 정양군에 부임하자마자, 정양군내의 호족이나 할거세력들의 반항을 평정한 후, 2백여 명의 범죄자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아울러, 사적(私的)으로 감옥에 드나들며 죄인들을 면회한 사람들에게 죄수 탈옥을 도왔다는 죄를 적용하여 전원 체포하여, ´이 자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자를 탈옥시키려고 꾀하였다´라고 논고하여 그 날 중으로 4백여 명을 모조리 죽였다. 그 후 군내의 백성들은 춥지 않아도 벌벌 떨었으며, 교활한 자들은 관리에게 협력하여 이 일을 도왔다[其後郡中不寒而慄, 猾民佐吏爲治]. 후에, 의종은 나랏일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기시(棄市)의 형에 처하여졌다.

出典
史記(사기) 권122 혹리열전(酷吏列傳).

連絡不絶 (연락부절)

連絡不絶(연락부절)

련락부절

오고 감이 끊이지 않음

永樂大典 (영락대전) 解縉 (해진)

永樂大典(영락대전) 解縉(해진)

永乐大典(Yǒnglè dàdiǎn)

구분: 유서
저자: 해진
시대: 중국 명(1407)


(明)나라의 영락제(永樂帝:成祖)에 의해 칙찬(勅撰)된 최대의 유서(類書).


본문 2만 2877권, 목록 60권. 1403년 영락제는 해진(解縉) 등에 유서의 편찬을 명하여 다음해 완성되자 이를 《문헌대성(文獻大成)》이라 하였으나, 다시 이보다 대규모의 것을 편찬시켜 1407년에 완성되자 《영락대전》으로 고쳤다. 이 사업에 종사한 인원은 2,000명 이상에 이른다. 이 유서는 오늘날의 ABC, 가나다순과 같이 운(韻)에 따라 항목을 배열한 일종의 대백과사전으로, 경서(經書) ·사서(史書) ·시문집(詩文集) ·불교 ·도교(道敎) ·의학 ·천문 ·복서(卜筮) 등 모든 사항에 관련된 도서들을 총망라해서 여기에서 관련사항을 발췌하여 이를 내용별로 분류하여 《홍무정운(洪武正韻)》의 문자순에 따라 배열하였다.

그 규모가 너무나 방대하여 완성 당시 사본(寫本)으로 정본(正本)을 1부 만들고, 1562년 부본(副本)을 1부 만들었는데, 정본은 명조(明朝)가 멸망할 때 소실(燒失)되었다. 부본 1부는 청나라에 전해져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할 때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1860년 영국 ·프랑스군의 베이징[北京] 침공 이후 많이 산실(散失)되었고, 특히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 때 연합군의 약탈로 거의 소실되거나 산실되어 지금은 중국 외에 당시 유출된 것이 영국 ·프랑스 등에 산재되어 있으나 모두 합쳐도 겨우 797권에 불과하다. 《영락대전》 중에는 이미 없어진 일서(佚書:책이름만 남아 있고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 책)가 전하여져 청나라 학자에 의해 이것들이 집록(集錄)되어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어 있는 것도 적지 않다.

餘桃之罪 (여도지죄)

餘桃之罪(여도지죄)

餘 남을 여 | 桃 복숭아 도 | 之 어조사 지 | 罪 죄 죄 |


'먹다 남은 복숭아를 먹인 죄' 란 뜻으로, 애정과 증오의 변화가 심함의 비유.


《한비자(韓非子)》의 세난편(說難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위(衛)나라에 미자하(彌子瑕)라는 미소년이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모친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에 몰래 임금의 수레를 훔쳐 타고 나갔다. 그 나라에는 왕의 허가 없이 왕의 수레를 타면 월형이라고 두 다리가 잘리는 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위왕은 오히려 효성이 지극하다며 상을 내려 칭찬했다.

"실로 효자로다. 어미를 위해 월형도 두려워하지 않다니..."

또 하루는 미자하가 복숭아를 먹다가 맛이 너무 좋다며 반쯤 먹다 남은 복숭아를 왕에게 바쳤다. 왕은 기뻐하며 “그 맛있는 것을 다 먹지도 않고 과인에게 주다니, 진정 너의 사랑을 알겠도다.”라고 말했다.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미자하의 자태는 점점 빛을 잃었고 왕의 총애도 엷어졌다. 어느 날 사소한 일로 미자하를 꾸짖으며 지난 일을 상기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놈은 본래 성품이 좋지 못한 놈이다. 예전에 나를 속이고 수레를 탔으며, 나에게 먹다 남은 복숭아를 주었도다."

이처럼 과거에는 총애를 받던 일이 나중에는 죄의 근원이 된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로 애정과 증오의 변화가 심함을 가리킨다.

餘桃啗君 (여도담군)

餘桃啗君(여도담군)

餘 남을 여 | 桃 복숭아 도 | 啗 먹일 담 | 君 임금 군 |

먹다 남은 복숭아를 임금에게 먹인다는 뜻으로, 처음에는 좋게 보여 사랑 받던 것이 나중에는 도리어 화근(禍根)이 됨을 이르는 말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편의 이야기.

춘추시기, 위(衛)나라에 미자하(彌子瑕)라는 미소년이 있어 영공(靈公)의 총애를 받았다.

미자하(彌子瑕)는 어느 날 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허락도 없이 왕 전용 수레를 타고 황궁을 빠져 나왔다. 당시 위나라의 법에는 함부로 왕의 수레를 탄 사람은 발목을 자르는 월형에 처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국왕은 용서하였다.

"그는 효자여서 어머니를 위하여 발을 잘리는 형벌도 잊어버렸구나."

그 후, 어느 날 미자하는 국왕과 함께 과수원을 거닐다가, 그 맛이 너무 좋아서 먹다만 복숭아 반쪽을 왕에게 줬다. 이에 왕은 칭찬하였다.

"반쪽 복숭아를 먹으면서도 나를 끔찍하게 생각하는구나. 자신이 먹을 단맛을 잊고서 나를 주다니."

하지만 세월이 흘러 미자하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왕은 미자하의 모든 행동이 눈에 거슬리기만 하였다. 결국 왕은 그를 꾸짖으며, 처벌했다.

"이놈은 언젠가 몰래 내 수레를 탔고, 또 먹다가 남은 복숭아를 나에게 먹였다."

餘桃啖君이란 사랑과 미움, 기쁨과 분노가 늘 변함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여도지죄(餘桃之罪) | 餘桃啗君(여도담군) | 이여도담군(以餘桃啗君)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念念不忘 (염념불망)

念念不忘(염념불망)

念念不忘(niànniànbúwàng)

항상 생각하여 잊지 않음.

to bear something (or somebody) in mind constantly; to keep in mind obsessively

易窮則變 (역궁즉변)

易窮則變(역궁즉변)

易 바꿀 역, 쉬울 이 | 窮 다할 궁, 궁할 궁 | 則 법칙 칙, 곧 즉 | 變 변할 변 |

역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는 길이 생기고, 통하면 오래 지속 한다

易窮則變 變則通 通則久(역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출전
周易(주역) 계사(繫辭) 하전(下傳)

永久不變 (영구불변)

永久不變(영구불변)

영원히 변하지 아니함.

榮枯盛衰 (영고성쇠)

榮枯盛衰(영고성쇠)

개인이나 사회의 성함과 쇠함이 뒤바뀌는 현상.

transmutations of fortune, fortune's wheel

易經 (역경)

易經(역경)

《역경(易經)》은 유학(儒學)의 삼경 중 하나로, 세계의 변화에 관한 원리를 기술한 책이라 일컬어 지고 있다. 쓴 연대는 대략 동주 시대로 추정된다.

주역(周易)』을 유교(儒敎)의 경전(經典)인 삼경(三經)의 하나로서 일컫는 말이다.


개요

고대의 귀갑(龜甲)이나 수골(獸骨)에 의한 점(占)은 그것들을 불에 구웠을 때 생긴 금(線)을 판단의 재료로 하여 길흉을 점쳤다. 한편 서죽을 써서 길흉을 점치는 방법이 주대에는 행해졌다. 이러한 점(占)의 말이나 점법의 정신을 해설한 것이 《역경(易經)》이다. 주대의 점서(占書)라고 하는 데서 《주역(周易)》이라고도 호칭한다.

서죽(筮竹)을 조작하여 남은 수가 기수(奇數)일 때는 양(陽) 즉(-), 우수(偶數)일 때는 음(陰) 즉 (--)이라 하여 그것을 세 번 반복하여 괘(卦)의 상(象)을 얻는다. - 이냐 -- 이냐를 결정하기 위해 3회 반복하여 얻어지는 조합(組合)은 여덟 가지가 있다. 이것을 8괘라고 한다. 건(乾, 곤(坤), 진(震), 손(巽) 등이 그것이다. 8괘를 알맞게 둘씩 조합하여 조합의 가능 한계인 64괘를 얻는다. 이 64괘 각자의 설명을 괘사(卦辭)라 하고, - 이나 --을 각각 효(爻)라고 하거니와 이 효에 대하여 설명한 것을 효사(爻辭))라고 한다. 이 괘사와 효사를 《역경(易經)》의 경(經)이라고 한다. 경의 해석이나 역(易)의 정신을 표기한 것을 10익(十翼)이라고 한다.

그러한 말들을 신비화시키고 권위를 부여하려고 괘사(卦辭)는 주나라의 문왕(文王)이 지었고, 효사(爻辭)는 주공단(周公旦)이 지었고 10익(十翼)은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지만, 괘사나 효사는 점(占)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생겨 고정된 것으로, 특정한 작자를 생각할 수는 없으므로, 그다지 신빙성 있는 얘기는 아니라고 지적된다. 오늘날은 이들이 동주(東周)의 후기에서 전국시대(기원전 403년 이후) 사이에 체제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관련 한자어

開物成務(개물성무) | 自强不息(자강불식)

계사(繫辭) 하전(下傳)

安不忘危(안불망위) | 易窮則變(역궁즉변) |

劉禹錫 (유우석, 772~842)

劉禹錫(유우석, 772~842)

이름: 刘禹锡(Liú Yǔxī), 자 몽득(夢得)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주요저서: 《유몽득문집(劉夢得文集)》,《외집(外集)》


중국 중당(中唐)의 시인.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두우(杜佑)의 막료가 되었으나 정치 개혁 실패로 낭주사마(朗州司馬), 연주자사(連州刺使)등으로 전직되고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에는 《유몽득문집(劉夢得文集)》,《외집(外集)》등이 있다.


자 몽득(夢得). 허베이성[河北省]출신. 일설에는 장쑤성[江蘇省] 출신이라고도 한다. 795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두우(杜佑)의 막료가 되었다. 얼마 후 중앙의 감찰어사로 영전되어 왕숙문(王叔文)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정치 개혁을 기도하였으나 805년 왕숙문은 실각되고, 우석은 낭주사마(朗州司馬)로 좌천되었다. 10년 후 다시 중앙으로 소환되었으나 그 때 지은 시가 비판의 대상이 되어 다시 연주자사(連州刺使)로 전직되고 그 후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최후로 생애를 마쳤다.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농민의 생활 감정을 노래한 《죽지사(竹枝詞)》를 펴냈으며, 만년에는 백낙천(白樂天)과 교유하면서 시문(詩文)의 도에 정진하였다. 시문집으로 《유몽득문집(劉夢得文集)》(30권) 《외집(外集)》(10권)이 있다.


유우석 관련 한시

飮酒看牡丹(음주간모란)

言直論正 (언직논정)

言直論正(언직논정)

말이 곧고 의론이 바름.

言中有骨 (언중유골)

言中有骨(언중유골)

예사스런 말 속에 단단한 속뜻이 들어 있음.

掩耳盜鐘 (엄이도종)

掩耳盜鐘(엄이도종)

掩 가릴 엄 | 耳 귀 이, 팔대째 손자 잉 | 盜 도둑 도 | 鐘 쇠북 종 |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라는 뜻으로, ①자기(自己)만 듣지 않으면 남도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행동(行動), ②자기 잘못은 생각 않고 남의 비판을 듣기 싫어 함 ③결코 넘어가지 않을 얕은 수로 남을 속이려 한다는 말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승상 여불위가 문객들을 동원해 만든 우화집 ‘여씨춘추’에서 나오는 말이다.

진(晉)나라 육경(六經)중의 한 사람인 범씨(范氏)는 중행씨(中行氏)와 함께 다른 네 사람에 의해 망하게 되었다. 범씨가 망하자 혼란(混亂)을 틈타 범씨의 종을 훔치러 들어온 자가 있었다. 하지만 종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망치로 깨서 가져가려고 종을 쳤더니 소리가 크게 울려 퍼져 다른 사람이 올까 두려워 자신의 귀를 막았다는 일화다.

중국 송나라 유학자 주희는 이 일화를 인용해 “종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귀를 막는 짓은 지도자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출전
呂氏春秋(여씨춘추) 呂不韋(여불위)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掩耳偸鈴(엄이투령) | 掩耳盜鈴(엄이도령) | 掩耳盜鐘(엄이도종) | 掩目捕雀(엄목포작) |

掩耳盜鈴 (엄이도령)

掩耳盜鈴(엄이도령)

掩 가릴 엄 | 耳 귀 이, 팔대째 손자 잉 | 盜 훔칠 도, 도둑 도 | 鈴 방울 령(영) |

제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친다는 뜻으로, ①얕은 꾀로 남을 속이려 하나 아무 소용(所用)이 없음을 이르는 말 ②방울 소리가 제 귀에 들리지 않으면 남의 귀에도 들리지 않으리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이름


《여씨춘추(呂氏春秋)》의 不苟論(불구론)의 自知篇(자지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원래는 귀를 가리고 종을 훔친다는 ‘엄이도종(掩耳盜鐘)’이었는데 후에 종 대신 방울이란 글자를 쓰게 되었다.

진(晉)나라 六卿(육경)의 한 사람인 范氏(범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큰 종이 있었다. 대표적인 신흥 세력이었던 조간자(趙簡子) 등은 구세력의 핵심인 범길사(范吉射)의 가족을 멸하였는데, 그의 가족 중 살아 남은 자들은 모두 진나라를 탈출하였다.

어느 날, 한 사나이가 이미 몰락해 버린 범길사의 집에 들어와서는 대문에 걸려있는 큰 종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 종을 훔치려고 했으나 종이 너무 무거워 옮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조각을 내어 가져가려고 망치로 종을 내리쳤다. 그러자 ‘꽝’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도둑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겁이 나서 얼른 자기 귀를 막았다고 한다.

이는 자신이 듣지 않는다고 남도 모르는 줄 안다는 것은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독선적이고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씨춘추》에서는 임금이 바른 말하는 신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비유로 위나라의 문왕 이야기를 들고 있다. 위나라 문왕이 신하들과 술을 마시며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 신하들은 한결같이 왕의 칭찬만 늘어 놓았다. 그러나 임좌(任座)의 차례가 되자 그는 임금의 숨은 약점을 말했다. “전하께서 중산을 멸한 뒤에 아우를 그곳에 봉하지 않으시려고 태자를 봉하신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문왕이 불쾌한 표정을 짓자 임좌는 그곳을 뛰쳐나갔다. 그러자 적황이 이렇게 말했다. “옛말에 임금이 어질어야 신하가 바른 말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방금 임좌가 바른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전하께서 밝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왕은 곧 다시 임좌를 부른 후 몸소 뜰 아래까지 나가 그를 맞아 올리고 상좌에 앉게 했다고 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掩目捕雀(엄목포작) | 掩耳盜鈴(엄이도령) | 掩耳盜鐘 (엄이도종) | 掩耳偸鈴(엄이투령) |

言語道斷 (언어도단)

言語道斷(언어도단)

말문이 막혔다는 뜻으로, 너무 어이없어서 말하려야 말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

於思無思 (어사무사)

於思無思(어사무사)

於 어조사 어, 탄식할 오, 어조사 우 | 思 생각 사, 수염이 많을 새 | 無 없을 무 | 思 생각 사, 수염이 많을 새 |

생각이 날 듯 말 듯하다

漁父之利 (어부지리)

漁父之利(어부지리)

어부의 이득. 도요새와 민물조개의 일종인 방합이 싸우는 틈을 타서 어부가 둘 다 잡았다는 故事(고사)에서 나온 말. 곧 쌍방이 다투는 틈을 이용해 제삼자가 애쓰지 않고 가로챈 이득을 말한다.


전국시대의 어느 해 趙(조)나라는 이웃 燕(연)나라에 흉년이 들자 이 틈을 노려 쳐들어가기로 했다. 연나라 왕은 많은 군사를 제나라에 출정시키고 있는 참이어서 조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蘇代(소대)에게 조나라 왕을 설득하도록 부탁했다.

소대는 합종책으로 유명한 蘇秦(소진)의 아우인데 그 역시 說客(세객)으로 연나라를 위해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가 조나라 혜문왕을 찾아가 말했다.

『제가 오늘 귀국으로 오면서 易水(역수)를 건너다가 민물조개인 방합이 강변에서 입을 벌리고 햇볕을 쬐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때 마침 도요새 한 마리가 날아와 방합의 속살을 쪼았습니다. 질겁을 한 방합이 황급히 입을 다물어 도요새의 부리를 물고 놓지 않았습니다. 도요새가 말했습니다. 「오늘도 비가 오지 않고 내일도 비가 오지 않고 이대로 있으면 넌 말라 죽는다」. 조개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늘도 놓아주지 않고 내일도 놓아주지 않으면 네놈은 굶어 죽을 걸」. 둘은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어부가 힘 안들이고 둘 다 잡아 버렸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연나라를 공격하려 하십니다. 그래선 안됩니다. 조나라와 연나라가 아웅다웅하는 동안 강대한 秦(진)나라가 어부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조나라의 혜문왕은 그럴싸하게 여겨 침공계획을 중지하고 말았다.

語不成說 (어불성설)

語不成說(어불성설)

말이 조금도 이치에 맞지 않음을 뜻함.

魚目混珠 (어목혼주)

魚目混珠(어목혼주)

魚 물고기 어 | 目 눈 목 | 混 섞일 혼 | 珠 구슬 주 |

'물고기 눈이 진주와 섞이다'라는 뜻으로, 가짜와 진짜가 마구 뒤섞인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서 유래되었다.


어목혼진(魚目混珍) 또는 어목사주(魚目似珠)라고도 한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임방(任昉)은 송(宋)·제(齊)·양(梁)나라의 3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으며, 중국문학사에서 경릉팔우(竟陵八友)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임방은 박학다식한 인물로, 읽지 않은 책이 없다고 일컬어질 정도였으며, 모은 책이 1만여 권에 달하여 당시에 장서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임방은 궁중에 소장된 방대한 서적을 분류하고 교감(校勘)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는데, 표(表)·주(奏)·서(書)·계(啓) 등의 상주문 계통의 글도 잘 지어 당시의 왕공대인들이 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릴 때 그에게 대필을 부탁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임방의 글은 《문선(文選)》에 여러 편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도대사마기실전(到大司馬記室箋)'이 있다. 임방은 이 글에서 자신을 발탁한 조정에 감사하며, 자신은 물고기 눈알처럼 쓸모없는 사람인데도 조정에서 값진 보옥처럼 사용하였노라고 스스로를 겸손하게 표현하였다.

당(唐)나라의 이선(李善)은 《문선주(文選注)》에서 이 구절의 주석으로 《한시외전(韓詩外傳)》의 "흰 뼈는 상아와 비슷하며, 물고기 눈알은 진주와 흡사하다(白骨類象, 魚目似珠)"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어목혼주는 여기서 유래하여 가짜가 진짜가 마구 뒤섞여 있는 상태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또 천한 것과 귀한 것 또는 열등한 것과 우수한 것이 뒤섞여 있는 상태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魚魯不辨 (어로불변)

魚魯不辨(어로불변)

魚'자와 '魯'자를 분별하지 못함. 곧, 매우 무식함.

魚頭肉尾 (어두육미)

魚頭肉尾(어두육미)

물고기는 대가리, 짐승 고기는 꼬리가 맛이 있음.

魚頭鬼面 (어두귀면)

魚頭鬼面(어두귀면)

물고기 머리에 귀신 낯짝이라는 뜻으로, 몹시 흉한 얼굴을 이르는 말.

嚴冬雪寒 (엄동설한)

嚴冬雪寒(엄동설한)

눈 내리는 깊은 겨울의 심한 추위.

言過其實 (언과기실, yánguòqíshí)

言過其實(언과기실)

言过其实(yánguòqíshí)

言 말씀 언, 화기애애할 은 | 過 지날 과, 재앙 화 | 其 그 기 | 實 열매 실, 이를 지 |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다'라는 뜻으로, 말만 과장되게 부풀려서 해 놓고는 실행이 부족함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마속(馬謖)과 관련된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마속은 자가 유상(幼常)으로, 그를 포함한 5형제가 모두 재능이 뛰어났다. 그의 형 마량(馬良)은 백미(白眉)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이다. 마속도 재주가 남달랐고, 특히 군사 계략을 세우는 데 뛰어나 제갈량(諸葛亮)이 총애하였다.

그러나 유비(劉備)는 마속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유비는 관우(關羽)의 원수를 갚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화병이 도져 쓰러졌다. 죽음을 앞둔 유비는 제갈량에게 뒷일을 부탁하면서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니 크게 쓰지 말도록 하고, 그대가 잘 살피시오(馬謖言過其實, 不可大用, 君其察之)"라고 특별히 당부하였다.

유비가 죽은 뒤, 위(魏)나라의 사마의(司馬懿)가 촉나라의 가정(街亭)을 공격하였다. 마속이 가서 가정을 방어하겠다고 자청하자, 제갈량은 그를 보내면서 수비만 하고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군령을 내렸다. 그러나 마속은 적의 꼬임에 넘어가 공격에 나섰다가 역습을 당하여 패주하였다.

제갈량은 마속을 총애하였지만, 군령을 어긴 죄를 물어 참형에 처하였다. '울며 마속을 베다'라는 뜻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고사성어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 고사는 《삼국지(三國誌)》의 〈촉지(蜀志)·마량전(馬良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언과기실은 말만 부풀려서 번드르르하게 하고는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夸大其词(과대기사,kuādàqící) 과장하여 말하다 |

반의어

恰如其分(흡여기분,qiàrúqífèn) 매우 적절하다 |

过犹不及(과유불급,guòyóubùjí)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과 같다 |

참조어

白眉(백미) | 泣斬馬謖(읍참마속) |


三國誌,三國誌:蜀志,三國誌:蜀志:馬良傳,諸葛亮,馬謖, 삼국지,삼국지:촉지.삼국지:촉지:마량전,제갈량,마속

抑强扶弱 (억강부약, yìqiángfúruò)

抑强扶弱(억강부약)

抑强扶弱(yìqiángfúruò)

강자(强者)를 누르고 약자(弱者)를 돕는 것.

to curb the strong and help the weak

陽火出於氷水 (양화출어빙수)

양화출어빙수(陽火出於氷水)

양기를 지닌 불이 얼음에서 나오다. 얼음을 볼록렌즈처럼 깎아서 불을 일으키는 것.


장화, 張華, 박물지, 博物志

若烹小鮮 (약팽소선)

若烹小鮮(약팽소선)

치대국약팽소선(治大國若烹小鮮)의 준말.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무엇이든 가만히 두면서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란 뜻

楊州鶴 (양주학, yángzhōuhè)

楊州鶴(양주학)

杨州鹤(yángzhōuhè)

楊 버들 양 | 州 고을 주 | 鶴 학 학,흴 학 |


이룰 수 없는 욕심.


양주학(楊州鶴)은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의 <학조(鶴條)>편에 실린 이야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이다. 옛날에 여러 사람이 모여 서로의 소망을 이야기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양주의 자사(刺史)가 되고 싶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재물을 많이 얻기를 바랐으며, 어떤 사람은 학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신선이 되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마지막 사람은 자신은 양주의 자사가 되어 십만 관(貫)의 돈을 허리에 차고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싶다고 하였다. 부귀공명을 모두 누리고 신선까지 되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낸 것인데, 이는 인간세상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헛된 욕망이다. 양주학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하였는데, 이룰 수 없는 욕심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이 시에서는 선비의 절개를 지키면서 부귀영화까지 함께 누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여 세속적 욕망을 해학적으로 경계한 것이다.


관련 한시

於潛僧綠筠軒(어잠승녹균헌) |


古今事文類聚,고금사문유취, 鶴條, 학조, 욕심, 鶴, 학(鶴)

量體裁衣 (양체재의)

量體裁衣(양체재의)

量 헤아릴 양(량) | 體 몸 체 | 裁 마를 재 | 衣 옷 의 |

몸에 맞게 옷을 고친다는 뜻으로, 일의 처한 형편(形便)에 따라 적합(適合)하게 일을 처리하여야 함을 이르는 말


남제서(南齊書) 장융전(張融傳)의 이야기.

남북조 시대, 남제(南齊)에 글재주가 좋은 장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가 사광(思光)으로, 소도성(蕭道成:훗날 남제의 태조)의 막하로 들어가 벼슬이 사도우장사(司徒右長史)에 이르렀다. 그는 비록 요직에 있었지만 평소 생활은 검소하였으며, 항상 오래되고 낡은 의복을 입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나라 태조는 사람을 시켜 자신이 입던 옷을 장융에게 보냈다. 당시 황제가 자신이 입던 옷을 하사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상이었다. 제나라 태조는 옷을 보내면서 친서(親書)도 함께 보냈는데, 태조는 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이 입고 다니는 옷이 낡은 것을 보니 참으로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을 알 수 있소. 그러나 경과 같은 고위 관리가 남루한 옷을 입고 다니니 조정의 명망이 훼손될까 염려스럽고, 백성들로부터 과인이 경을 천하게 대우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소. 지금 오래된 옷을 한 벌 보내니, 오래되었다고는 하지만 새옷보다 나을 것이오. 짐이 입던 옷인데, 경의 몸에 맞게 줄여서 고쳐 놓도록 하였소[是吾所著, 已令裁減稱卿之體]."

여기서 유래하여 양체재의는 몸에 잘 맞도록 옷을 지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상황이나 처한 형편에 따라 적합하게 일을 처리하여야 함을 의미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남제서(南齊書) 장융전(張融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稱體裁衣(칭체재의)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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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劉長卿 (유장경, Liú Chángqīng)

유장경 [劉長卿, 725?~791?]

異名: 刘长卿, Liú Cháng Qīng, 자 문방(文房), 유수주(劉隨州), 오언장성(五言長城)
국적: 중국
활동분야: 정치, 시
출생지: 안후이성[安徽省] 선성(宣城) 또는 후베이성[河北省] 하간(河間)
주요작품: 《유수주시집(劉隨州詩集)》《외집(外集)》


오언시(五言詩)에 능하여 ‘오언장성(五言長城)’이라는 칭호를 듣던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시의 동일표현이 돋보이며 관리로서도 강직한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 자주 권력자의 뜻을 거스르는 언동을 했다. 주요 작품에는 《유수주시집(劉隨州詩集)》,《외집(外集)》등이 있다.


자는 문방(文房)이다. 안후이성[安徽省] 선성(宣城) 출신이라는 설과 후베이성[河北省] 동남쪽에 위치했던 하간(河間)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젊었을 때는 뤄양[洛陽] 남쪽의 숭양(嵩陽)에서 살면서 청경우독(晴耕雨讀)하는 생활을 하였다.

733년(개원 21)에 진사가 되었다. 회서(淮西) 지방에 있는 악악(鄂岳)의 전운사유후(轉運使留後)의 직에 있을 때 악악관찰사(鄂岳觀察使) 오중유(吳仲儒)의 모함을 받아 육주사마(陸州司馬)로 좌천당하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수주자사(隨州剌史)를 지내 유수주(劉隨州)라고 불렸다. 강직한 성격에 오만한 면이 있어 시에 서명할 때는, 자기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는 자부심에서 성을 빼고 ‘장경(長卿)’이라고만 표기하였다.

오언시(五言詩)에 능하여 ‘오언장성(五言長城)’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시의 동일표현이 돋보이며, 전원과 산수묘사는 도연명(陶淵明)과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과 통하는 바가 있다. 관리로서도 강직한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 자주 권력자의 뜻을 거슬리는 언동을 하였다. 그래서 2차례나 유배를 당하여 실의의 세월을 보냈다. 그의 시에 유배당하여 실의 속에 보내는 생활과 깊은 산골에 숨어 살려고 하는 정서를 그린 것이 많은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또, 일부의 작품에는 동란의 시대의 사회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작품에 《유수주시집(劉隨州詩集)》(10권)과 《외집(外集)》(1권)이 있다.


劉 죽일 유(류) [부수]刂 (선칼도방, 2획) [사성음] liú
㉠죽이다, 살해하다 ㉡베풀다 ㉢이겨내다, 승리하다 ㉣돌아다니다 ㉤예쁘다 ㉥도끼


유장경 관련 한시

彈琴(탄금)

弱肉强食 (약육강식, ruòròuqiángshí)

弱肉强食(약육강식)

弱肉强食(ruòròuqiángshí)

弱 약할 약 | 肉 고기 육, 둘레 유 | 强 굳셀 강 | 食 밥 식, 먹을 식, 먹이 사, 사람 이름 이 |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다는 뜻으로, 생존(生存) 경쟁(競爭)의 살벌함을 말함

the weak are usually the prey of the strong — the law of the jungle


한유(韓愈)의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는 한유가 문창이라는 승려에게 써 보낸 글로서, 한유의 불교에 대한 관점이 잘 나타나 있다.

한유는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도(道)에 있어서 인(仁)과 의(義)보다 더 큰 것이 없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예약과 형정(刑政)보다 더 바른 것이 없습니다. 그것들을 천하에 시행하면 만물이 모두 합당함을 얻게 되고, 그것들을 그 자신에게 적용하면 몸은 편안하고 기운은 평온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불교라는 것은 누가 만들고 누가 전한 것입니까? 새들이 몸을 숙여 모이를 쪼다가 몸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고, 짐승들이 깊은 곳에 있으면서 드물게 나타나는 것은 다른 것들이 자신을 해할까 두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도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약한 자의 고기를 강한 자가 먹고 있는 것입니다[猶且不脫焉, 弱之肉, 强之食].

弱肉强食(The weak become the victim of the strong)이란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잡아 먹힌다는 뜻이다.


출전

한유(韓愈)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弱肉强食(약육강식) | 優勝劣敗(우승열패) | 適者生存(적자생존) |

有耶無耶 (유야무야)

有耶無耶(유야무야)

있는지 없는지 흐리멍덩한 모양, 흐지부지한 모양.

良藥苦口 (양약고구)

良藥苦口(양약고구)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忠言(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자신에게 이롭다는 말이다.


천하를 통일했던 秦(진)나라도 始皇帝(시황제)가 죽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漢(한)나라 劉邦(유방:뒤에 고조가 됨)과 楚(초)나라의 項羽(항우)는 진나라의 수도였던 咸陽(함양)에 먼저 입성하고자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 이긴 유방은 성안에 들어서자마자 진나라 왕궁(아방궁)으로 향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방마다에 둘러쳐진 비단휘장, 산처럼 쌓여있는 금은보화, 게다가 수많은 후궁의 미녀들을 보는 순간 유방의 눈은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황홀경에 넋을 잃은 유방은 이 아방궁에서 시황제의 호사를 누려보고 싶은 강렬한 유혹에 스스로 빠져들었다. 이런 유방의 욕망을 눈치챈 勇將(용장) 번쾌가 간곡히 간해보았지만 유방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한걸음 물러선 번쾌를 대신해서 軍師(군사)인 張良(장량)이 나섰다.

『相公(상공)께서는 무도한 진나라를 무찌르고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몸에는 유익한 것이며 양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을 고칩니다(忠言逆耳利於行 良藥苦口利於病). 제발 번쾌의 말에 따라 주십시오』

유방은 이 충언을 받아들여 지체없이 왕궁을 나서서 陣地(진지)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若要人不知除非己莫爲 (약요인부지제비기막위)

若要人不知,除非己莫爲(약요인부지 제비기막위)

若要人不知,除非己莫为 [ruòyàorénbùzhī, chúfēijǐmòwéi]

若 같을 약 | 要 바랄 요 | 人 사람 인 | 不 아닐 불, 아닐 부 | 知 알 지 | 除 제거할 제 | 非 아닐 비 | 己 자기 기 | 莫 없을 막 | 爲 할 위 |

남이 모르게 하려면 스스로 일을 저지르지 마라. 무슨 일이든 사람을 속일 수는 없다.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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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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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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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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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上君子 (양상군자)

梁上君子 (양상군자)

① 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으로, 도둑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 ② 천장의 쥐


後漢(후한) 말엽, 陳寔(진식)이란 사람이 태구현의 현감으로 있을때의 일이다. 진식은 학문을 좋아할 뿐 아니라 매사를 공정하고 관대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현민들한테서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흉년이 들어 현민들이 몹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어느 날 밤 진식이 책을 읽고 있는데 도둑이 살며시 들어와 대들보 위에 숨었다. 그는 짐짓 모르는 척하고 책읽기를 끝내고는 아들과 손자들을 불러들여 訓戒(훈계)를 했다.

『사람들은 모름지기 스스로 힘써야만 한다. 악을 행하는 사람도 본래는 악한 사람이 아니다. 나쁜 습관이 성품이 되어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도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니라』

도둑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대들보에서 뛰어내려와 이마를 방바닥에 조아리며 사죄했다. 진식은 도둑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렇게 깨우쳐 주었다.

『너의 얼굴 모습을 보아하니 악한 사람 같지는 않구나. 깊이 반성하여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죽 살기에 힘겨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나』

진식은 도둑에게 비단 두 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 일이 알려지자 태구현에는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한다.


후한서 진식전(陳寔傳)

藥房甘草 (약방감초)

藥房甘草(약방감초)

무슨 일이나 빠짐없이 끼임. 무슨 일에나 반드시 끼어야 할 필요한 물건.

陽奉陰違 (양봉음위)

陽奉陰違(양봉음위)

보는 앞에서는 순종(順從)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딴마음을 먹음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表裏不同(표리부동) | 羊質虎皮(양질호피) | 笑中有劍(소중유검) | 笑面虎(소면호) | 笑裏藏刀(소리장도) | 似而非者(사이비자) | 似而非(사이비) | 似是而非(사시이비) | 面從腹背(면종복배) | 同床異夢(동상이몽) | 同床各夢(동상각몽) | 口有蜜腹有劒(구유밀복유검) | 口蜜腹劍(구밀복검) |

羊頭狗肉 (양두구육)

羊頭狗肉(양두구육)

羊頭狗肉[yángtóugǒuròu]

羊 양 양 | 頭 머리 두 | 狗 개 구 | 肉 고기 육, 둘레 유 |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으로 “懸羊頭賣狗肉(현양두매구육)”의 줄임말. ①겉은 훌륭해 보이나 속은 그렇지 못한 것②겉과 속이 서로 다름③말과 행동(行動)이 일치(一致)하지 않음

crying out wine and selling vinegar, using a better name to sell inferior goods, all outside show, making an extravagant advertisement


안자춘추(晏子春秋) 내편(內篇)의 이야기.

춘추(春秋)시대 제(齊)나라 靈公(영공)은 좀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다름아니라 예쁜 여자에게 남자 옷을 입혀놓고 觀賞(관상)하는 일인데 궁중에 있는 미인들을 붙잡아 男裝(남장)을 시키곤 좋아했다. 이같은 작태는 궁중에만 머물지 않고 민간에까지 퍼져 제나라 거리 거리에는 남장한 미녀들로 넘쳐났다. 이에 놀란 영공이 궁중밖에서는 여자가 남장을 못하도록 엄한 禁令(금령)을 내렸다. 그러나 자신은 여전히 남장여인을 보며 즐겼으니 금령은 있으나 마나였다. 그런데도 영공은 금령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답답해진 영공은 그 이유를 재상인 晏子(안자)에게 물어보았다. 안자의 대답은 이러했다.

"전하께서는 궁중에서만 여자에게 남장을 하게 허락하시면서 백성들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양의 머리를 문에다 내걸고 안에서는 개고기를 파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猶懸牛首于門而賣馬肉于內也] 전하께서는 어째서 궁중에서만 남장하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까. 궁중에서도 금한다면 밖에서 남장하는 여자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영공은 안자의 말을 듣고 궁중에서도 남장을 못하도록 했다.그러자 한 달이 못되어 제나라 전국에서 남장하는 여자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본시 소머리와 말고기였던 것이 후에는 양머리(羊頭)와 개고기(狗肉)로 바뀌었다.


출전

안자춘추(晏子春秋) 내편(內篇) | 항언록(恒言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羊頭狗肉(양두구육) | 懸羊頭賣狗肉(현양두매구육) | 懸羊頭賣馬脯(현양두매마포) | 현우수매마육(懸牛首賣馬肉) |

表裏不同(표리부동) | 羊質虎皮(양질호피) | 笑中有劍(소중유검) | 笑面虎(소면호) | 笑裏藏刀(소리장도) | 似而非者(사이비자) | 似而非(사이비) | 似是而非(사시이비) | 面從腹背(면종복배) | 同床異夢(동상이몽) | 同床各夢(동상각몽) | 口有蜜腹有劒(구유밀복유검) | 口蜜腹劍(구밀복검) |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Cry up wine and sell vinegar
포도주 대신 식초 팔기


중요도 ★

夜郞自大 (야랑자대)

夜郞自大(야랑자대)

夜 밤 야, 고을 이름 액 | 郞 사내 랑(낭) | 自 스스로 자 | 大 클 대, 큰 대, 클 태, 클 다 |

야랑이 스스로 크다한다는 뜻으로, 중국(中國) 한(漢)나라 때의 오랑캐 중(中)에서 야랑국이 가장 세력(勢力)이 강(强)하여 오만(傲慢)하였으므로, 용렬(庸劣)하거나 우매(愚昧)한 무리 중(中)에서 세력(勢力)이 있어 잘난 체하고 뽐냄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사기(史記)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의 이야기.

전국 시대가 종언을 고한 뒤 진(秦)나라가 통일 시대가 되고 다시 그 진나라가 망하여 한(漢)나라가 서고 나서도 중국 서남 지방은 뚜렷한 주인도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나라가 북방의 강력한 오랑캐 흉노(匈奴)에 대처하느라 그쪽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지역의 부족들은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10여 개의 집단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것이 귀주(貴州)의 야랑국(夜郞國)으로서 그 임금 다동(多同)은 야랑후(夜郞侯)를 자처하고 있었다. 아량국의 크기는 한나라의 현(縣)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동은 자기 세력권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야랑국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인 줄 알았다. 그래서 어느 날 부하들을 이끌고 영지를 순시하다가 짐짓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가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다동의 심중을 꿰뚫어보고 있는 부하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야 전하께서 다스리고 계신 이 야랑국이지 어디겠습니까.”

흐뭇해진 다동은 눈 앞의 높은 산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세상에 저 산보다 더 높은 산이 있을까?”

“저렇게 높은 산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윽고 흐르는 물가에 다다랐다. 강이라 하기에는 뭣하고 큰 시내라고 함이 적당한 물이었다. 다동이 다시 물었다.

“이 물보다 더 넓고 긴 물이 있을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아첨의 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은 다동은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의 임금이라 생각하고는 기고만장했다.

한나라 무제(武帝) 때인 기원전 122년, 인도(印度)로 가던 사신 일행이 야랑국에 들렀다. 오랫동안 중국과 사실상 교류가 끊어진 상태였으므로, 다동은 중국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기회다 싶어 반겨 맞아 환대했다.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다동이 사신을 보고 물었다.

“공께서 보시기에 이 나라가 어떤 것 같소? 중국과 견주어 어느 쪽이 크다고 생각하오?”

사신은 기가 막혀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 한나라에는 군(郡)이 수십 개나 되고, 그 군 하나만 해도 이곳 야랑국보다 몇 배는 큽니다.”

그 말을 들은 다동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지금까지 자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는가를 깨달았다. 그는 나중에 남월(南粤)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무제로부터 왕의 작호를 하사받고 완전한 한나라 신하가 되었다.



출전

사기(史記)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坐井觀天(좌정관천) | 井中之蛙(정중지와) | 井中蛙(정중와) | 井中視星(정중시성) | 井中觀天(정중관천) | 井底之蛙(정저지와) | 井底蛙(정저와) | 坎中之蛙(감중지와)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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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藥籠中物 (약농중물)

藥籠中物(약농중물)

藥 약 약| 籠 농 롱| 中 가운데 중| 物 만물 물

약농속의 약품이란 뜻으로, 항상 곁에 없어서는 안 될 긴요한 인물(심복)을 이르는 말.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고종:628-683)의 황후였던 측천무후때의 이야기이다. 14세 때 2대 황제인 태종의 후궁이 된 그녀는 26세 때 태종이 죽자 여승이 되었으나 재색을 탐낸 고종의 명에 따라 환속(還俗), 그를 후궁으로 있다가 고종 6년에 황후가 되었다.

그 후 고종이 중풍에 걸리자 무후는 스스로 천후(天后)라 일컫고 수많은 명신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고 전 황후의 소생인 태자를 폐하는 등 포악한 정치를 했다. 고종이 죽은 뒤 무후의 친아들인 중종(中宗:4대), 예종(睿宗:5대)을 세웠으나 곧 폐하고 67세 때(690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周, 690-705)로 고쳤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제(女帝)가 출현한 이 정변을 무주혁명이라고 한다.

그 무렵, 적인걸이라는 청렴 강직하고 식견이 높은 명재상이 있었다. 그는 더 없이 잔인하나 명석한 무후를 직간(直諫), 보필하여 어지러웠던 정치를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유능한 선비를 추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했다. 그래서 그는 조야(朝野)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적인걸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는데 그중에는 원행충과 같은 박학다재한 인물도 있었다. 그 원행충이 어느날, 적인걸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공댁에는 '맛있는 것(훌륭한 인재)'이 많습니다. 혹 과식하시어 배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저 같은 쓴 약도 곁에 놔 두십시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 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자 적인걸은 웃으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바로 내 약농중물일세[君正吾藥籠中物]. 암, 하루라도 곁에 없어서는 안 되고 말고[不可一日無也]."

良禽擇木 (양금택목)

良禽擇木

어질 량 | 새 금 | 가릴 택 | 나무 목 |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는 뜻으로, 현명한 사람은 자기 재능을 키워 줄 훌륭한 사람을 가려서 섬김의 비유.

춘추시대, 유가의 비조인 공자가 치국의 도를 유세하기 위해 위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공문자(孔文子)가 대숙질(大叔疾)을 공격하기 위해 공자에게 상의하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사 지내는 일에 대해선 배운 일이 있습니다만, 전쟁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물러나온 공자는 제자에게 서둘러 수레에 말을 매라고 일렀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한시라도 빨리 위나라를 떠나야겠다' 며 이렇게 대답했다.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良禽擇木]고 했다. 마찬가지로 신하가 되려면 마땅히 훌륭한 군주를 가려서 섬겨야 하느니라."

이말을 전해 들은 공문자는 황급히 객사로 달려와 공자의 귀국을 만류했다.

"나는 결코 딴 뜻이 있어서 물었던 것이 아니오. 다만 위나라의 대사에 대해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니 언짢게 생각말고 좀 더 머물도록 하시오."

공자는 기분이 풀리어 위나라에 머룰려고 했으니 때마침 노나라에서 사람이 찾아와서 귀국을 간청했다. 그래서 고국을 떠난 지 오래인 공자는 노구(老軀)에 스미는 고향 생각에 사로잡혀 서둘러 노나라로 돌아갔다.

楊貴妃 (양귀비, 719~756)

楊貴妃(양귀비)

양귀비(楊貴妃, 719년 6월 1일 ~ 756년 7월 15일)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다. 성은 양(楊), 이름은 옥환(玉環)이며, 귀비는 황비로 순위를 나타내는 칭호이다. 현종 황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정도가 지나쳐 안사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경국의 미인이라고도 부른다.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http://ko.wikipedia.org/wiki/양귀비_(사람)

睚眦必報 (애자필보, yázìbìbào)

睚眦必報(애자필보)

睚眦必报(yázìbìbào)

睚 눈초리 애 | 眦 흘길 자 | 必 반드시 필 | 報 갚을 보 |


'눈흘김도 반드시 갚는다'라는 뜻으로, 도량이 극히 좁은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사기(史記)》에 실린 범저(范雎:범수라고도 함)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범저가 수가(須賈)를 수행하여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제나라 왕은 수가를 젖혀두고 범저를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앙심을 품은 수가는 귀국하여 범저가 제나라와 밀통한다고 모해하였고, 재상인 위제(魏齊)는 범저를 체포하게 하여 혹독하게 고문하였다.

초주검이 되어 겨우 목숨을 건진 범저는 정안평(鄭安平)의 도움으로 진(秦)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왕계(王稽)를 만나 진나라로 갔다. 범저는 진나라에서 장록(張祿)이라는 이름으로 소왕(昭王)을 도와 왕권을 공고히 하고 국위를 떨치도록 보좌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진나라가 한(韓)나라와 위나라를 치려고 하자, 위나라에서는 수가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때 범저는 초라한 행색으로 변장하여 수가를 만났는데, 수가는 범저를 동정하여 솜옷을 내주고 음식도 배불리 먹여 보냈다. 나중에 수가는 진나라 재상 장록이 곧 범저임을 알고 지난날의 죄를 빌었다.

범저는 수가가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초라한 행색을 한 자신에게 옛정을 잊지 않고 솜옷을 준 점을 가상히 여겨 용서하였다. 그러나 위제만은 용서할 수 없다며, 그의 목을 베어 가져오지 않으면 진나라의 공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일렀다. 위제는 조(趙)나라를 거쳐 초(楚)나라로 도망쳤다가 결국 자결하였다.

한편, 왕계와 정안평은 범저의 천거로 각각 하동(河東) 태수와 장군이 되었다. 범저는 또 곤경에 처하였을 때 도움을 준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보답하였으니, 밥 한 술을 얻어먹은 작은 은혜에도 반드시 보답하고, 눈을 한 번 흘겨본 작은 원한도 반드시 보복하였다(一飯之德必償, 睚眦之怨必報).

이 고사는 《사기》의 〈범저채택열전(范雎蔡澤列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애자필보는 눈을 한 번 흘겨본 것을 원한으로 새겨두고 반드시 보복하는 것처럼 도량이 극히 좁은 사람 또는 그러한 행위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참조 한자어

유의어

斤斤计较(jīnjīnjìjiào) 중요하지 않은 일을 시시콜콜히 따지다. |

锱铢必较(zīzhūbìjiào) 돈 몇 푼까지도 꼼꼼하게 따지다. |

一毛不拔(yìmáobùbá) 남을 위해 털 한가닥도 안 뽑는다. 지나치게 인색하다. |

반의어

宽宏大量(kuānhóngdàliàng) 도량이 넓다. |

慷慨解囊(kāngkǎijiěnáng) 아낌없이 주머니를 열다. 주머니를 털어 남을 돕다. |

仗义疏财(zhàngyìshūcái) 의를 중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보다. |


사기, 史記, 사기:범저채택열전, 史記:范雎蔡澤列傳, 범저, 范雎

哀而不悲 (애이불비)

哀而不悲(애이불비)

속으로는 슬프지만 겉으로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다

낙이불류 애이불비 가위정야(樂而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

삼국사기 '잡지(雜誌) 악(樂)'에 인용되어 있는 가야 출신 음악인 우륵의 말.


출전

삼국사기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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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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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眼下無人 (안하무인)

眼下無人(안하무인)

눈 아래 사람이 없음. 곧 교만하여 사람들을 업신여김.


유의어

目中无人(目中無人, mùzhōngwúrén) to put on airs and look down on other people; be supercilious; be overweening

仰天而唾 (앙천이타)

仰天而唾(앙천이타)

하늘을 쳐다보고 침을 뱉으면 도로 자기에게로 떨어진다.' 즉, 남을 해치려다가 자기가 해를 입는다는 말.

嶽宗恒岱 (악종항대)

嶽宗恒岱(악종항대)

嶽 큰 산 악 | 宗 마루 종 | 恒 항상 항, 반달 긍 | 岱 대산 대 |

오악(五嶽)은 동(東) 태산(泰山), 서(西) 화산(華山), 남(南) 형산(衡山), 북(北) 항산(恒山), 중(中) 숭산(嵩山)이니, 항산(恒山)과 태산(泰山)이 조종(祖宗)임

[출전]
千字文(천자문)


http://idiomnstory.blogspot.com/1992/01/blog-post_8638.html

我田引水 (아전인수)

我田引水(아전인수)

我 나 아 | 田 밭 전 | 引 끌 인 | 水 물 수 |

자기(自己) 논에만 물을 끌어넣는다는 뜻으로, ①자기(自己)의 이익(利益)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行動)함 ②또는 억지로 자기(自己)에게 이롭도록 꾀함을 이르는 말

Draw water to one's mill.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我田引水(아전인수) |

반의어·상대어

易地思之(역지사지) |

晏子春秋 (안자춘추) 卷06 內篇雜下第六

晏子春秋(안자춘추)

卷05 卷06 內篇雜下第六 卷07


靈公禁婦人為丈夫飾不止晏於請先內勿服第一

靈公好婦人而丈夫飾者,國人盡服之。公使吏禁之,曰:「女子而男子飾者,裂其衣,斷其帶。」裂衣斷帶,相望而不止。晏子見,公問曰:「寡人使吏禁女子而男子飾者,裂斷其衣帶,相望而不止者,何也?」晏子對曰:「君使服之於內,而禁之於外,猶懸牛首於門,而賣馬肉於內也。公何以不使內勿服,則外莫敢為也。」公曰:「善。」使內勿服,不逾月,而國人莫之服。


齊人好轂擊晏子紿以不祥而禁之第二

齊人甚好轂擊,相犯以為樂,禁之不止。晏子患之,乃為新車良馬,出與人相犯也,曰:「轂擊者不祥,臣其祭祀不順,居處不敬乎!」下車棄而去之。然後國人乃不為。故曰禁之以制,而身不先行,民不能止。故化其心,莫若教也。


景公瞢五丈夫稱無辜晏子知其冤第三

景公敗於梧丘。夜猶早,公姑坐睡,而夢有五丈夫,北面韋廬稱無罪焉。公覺,召晏子而告其所瞢。公曰:「我其嘗殺無罪邪?」晏子對曰:「昔者先君靈公畋,有五丈夫來駭獸,故並斷其頭而葬之,命曰五丈夫之丘,此其地邪?」公令人掘而求之,則五頭同穴而存焉。公曰:「嘻!」令吏厚葬之。國人不知其瞢也,曰:「君憫白骨,而況於生者乎,不遺餘力矣,不釋餘知矣。」故曰人君之為善易矣。


柏常騫禳梟死將為景公請壽晏子識其妄第四

景公為路寢之台,成,而不踴焉。柏常騫曰:「君為台甚急,台成,君何為而不踴焉?」公曰:「然。有梟,昔者鳴,其聲無不為也,吾惡之甚,是以不踴焉。」柏常騫曰:「臣請禳而去之。」公曰:「何具?」對曰:「築新室,為置白茅焉。」公使為室,成、置白茅焉。柏常騫夜用事,明日,問公曰:「今昔聞梟聲乎?」公曰,「一鳴而不復聞。」使人往視之,梟當陛,布翼伏地而死。公曰:「子之道若此其明也,亦能益寡人之壽乎?」對曰:「能。」公曰:「能益幾何?」對曰:「天子九,諸侯七,大夫五。」公曰:「子亦有徵兆之見乎?」對曰:「得壽,地且動。」公喜,令百官趣具騫之所求。柏常騫出,遭晏子於塗,拜馬前。騫辭曰:「為君禳梟而殺之,君謂騫曰:『子之道若此其明也,亦能益寡人之壽乎?』騫曰能,今且大祭,為君請壽,故將往,以聞。」晏子曰:「嘻!亦善矣,能為君請壽也。雖然,吾聞之,維以政與德而順乎神,為可以益壽。今徒祭,可以益壽乎?然則福兆有見乎?」對曰:「得壽地將動。」晏子曰:「騫,昔吾見維星絕,樞星散,地其動,汝以是乎?」柏常騫俯,有間,仰而對曰,「然。」晏子曰:「為之無益,不為無損也。汝薄斂,毋費民,且無令君知之。」


景公成柏寢而師開言室夕晏子辨其所以然第五

景公新成柏寢之室,使師開鼓琴。師開左撫宮,右彈商,曰:「室夕。」公曰:「何以知之?」師開對曰:「東方之聲薄,西方之聲揚。」公召大匠曰:「立室何為夕?」大匠曰:「立室以宮矩為之。」於是召司空曰:「立宮何為夕?」司空曰:「立宮以城矩為之。」明日,曼子朝,公曰:「先君太公以營丘之封立城,曷為夕?」晏子對曰:「古之立國者,南望南斗,北戴樞星,彼安有朝夕哉?然而以今之夕者,周之建國,國之西方,以尊周也。」公蹴然曰:「古之臣乎!」


景公病水瞢與日鬥晏子教占瞢者以對第六

景公病水,臥十數日,夜瞢與二日鬥,不勝。晏子朝,公曰:「夕者,吾瞢與二日鬥,而寡人不勝,我其死乎?」晏子對曰:「請召占瞢者。」立於閨,使人以車迎占瞢者。至曰:「曷為見召?」晏子曰:「夜者,公瞢與二日鬥,不勝,恐必死也,故請君占瞢。是所為也」占瞢者曰:「請反具書。」晏子曰:「毋反書,公所病者,陰也;日者,陽也。一陰不勝二陽,公病將已。以是對。」占瞢者入,公曰:「寡人瞢與二日鬥而不勝、寡人死乎?」占瞢者對曰:「公之所病,陰也。日者,陽也。一陰不勝二陽,公病將已。」居三日,公病大愈,公且賜占瞢者。占瞢者曰:「此非臣之力,晏子教臣也。」公召晏子,且賜之。晏子曰:「占瞢者以臣之言對,故有益也,使臣言之,則不信矣,此占瞢者之力也,臣無功焉。」公兩賜之曰:「以晏子不奪人之功,以占瞢者不蔽人之能。」


景公病瘍晏子撫而對之乃知群臣之野第七

景公病疽,在背。高子國子請公曰:「職當撫瘍。」高子進而撫瘍。公曰:「熱乎?」曰:「熱。」「熱何如?」曰;「如火。」「其色何如?」曰:「如未熟李。」「大小何如?」曰:「如豆。」「墮者何如?」曰:「如屨辨。」二子者出,晏子請見,公曰:「寡人有病,不能勝衣冠,以出見夫子,夫子其辱視寡人乎。」晏子入,呼宰人具盥,禦者具巾,刷手溫之,發席傅薦,跪請撫瘍。公曰:「其熱何如?」曰:「如日。」「其色何如?」曰:「如蒼玉。」「大小何如?」曰:「如璧。」「其墮何如?」曰:「如珪。」晏子出,公曰:「吾不見君子,不知野人之拙也。」


晏子使吳吳王命儐者稱天子晏子詳惑第八

晏子使吳,吳王謂行人曰:「吾聞晏嬰,蓋北方辯於辭,習於禮者也。命儐者曰:『客見則稱天子請見。』」明日,晏子有事。行人曰:「天子請見。」晏子蹴然。行人又曰:「天子請見。」晏子蹴然。又曰:「天子請見。」晏子蹴然者三,曰:「臣受命弊邑之君,將使於吳王之所,以不敏而迷惑,入於天子之朝,敢問吳王惡乎存?」然後吳王曰:「夫差請見。」見之以諸侯之禮。


晏子使楚楚為小門晏子稱使狗國者入狗門第九

晏子使楚,楚人以晏子短,為小門於大門之側而延晏子。晏子不入,曰:「使狗國者,從狗門入,今臣使楚,不當從此門入。」儐者更道,從大門入。見楚王,王曰:「齊無人耶?使子為使?」晏子對曰:「齊之臨淄三百閭,張袂成陰,揮汗成雨,比肩繼踵而在,何為無人?」王曰:「然則何為使子?」晏子對曰:「齊命使,各有所主。其賢者使使賢主;不肖者使使不肖主,嬰最不肖,故宜使楚矣。」


楚王欲辱晏子指盜者為齊人晏子對以橘第十

晏子將使楚,楚王聞之,謂左右曰:「晏嬰,齊之習辭者也。今方來,吾欲辱之,何以也?」左右對曰:「為其來也,臣請縛一人,過王而行,王曰:『何為者也?』對曰:『齊人也。』王曰:『何坐?』曰:『坐盜。』」晏子至,楚王賜晏子酒,酒酣,吏二縛一人詣王。王曰:「縛者何為者也?」對曰:「齊人也,坐盜。」王視晏子曰:「齊人固善盜乎?」晏子避席對曰:「嬰聞之,橘生淮南,則為橘;生於淮北,則為枳,葉徒相似,其實味不同,所以然者何?水土異也。今民生長於齊不盜,入楚則盜,得無楚之水土,使民善盜耶?」王笑曰:「聖人非所與熙也,寡人反取病焉。」


楚王饗晏子進橘置削晏子不剖而食第十一

景公使晏子於楚,楚王進橘,置削,晏子不剖而並食之。楚王曰:「橘當去剖。」晏子對曰:「臣聞之,賜人主前者,瓜桃不削、橘柚不剖。今者萬乘之主無教令,臣故不敢剖。不然,臣非不知也。」


晏子布衣棧車而朝田桓子侍景公飲酒請浮之第十二

景公飲酒,田桓子侍,望見晏子而複於公曰:「請浮晏子。」公曰:「何故也?」無宇對曰:「晏子衣緇布之衣,麋鹿之裘,棧軫之車,而駕駑馬以朝,是隱君之賜也。」公曰:「諾。」晏子坐,酌者奉觴進之曰:「君命浮子。」晏子曰:「何故也?」田桓子曰:「君賜之卿位以顯其身,寵之百萬以富其家,群臣之爵,莫尊於子,祿莫重於子。今子衣緇布之衣,麋鹿之裘,棧軫之車,而駕駑馬以朝,則是隱君之賜也,故浮子。」晏子避席曰:「請飲而後辭乎?其辭而後飲乎?」公曰:「辭然後飲。」晏子曰:「君賜之卿位以顯其身,嬰非敢為顯受也,為行君令也;寵之百萬以富其家,嬰非敢為富受也,為通君賜也。臣聞古之賢君,臣有受厚賜,而不顧其困族,則過之。臨事守職,不勝其任,則過之。君之內隸,臣之父兄,若有離散,在於野鄙,此臣之罪也。君之外隸,臣之所職,若有播亡,在於四方,此臣之罪也。兵革之不完,戰車之不修:此臣之罪也。若夫弊車駑馬以朝,意者非臣之罪乎。且以君之賜,父之黨,無不乘車者;母之黨,無不足於衣食者;妻之黨,無凍餒者;國之簡士,待臣而後舉火者數百家。如此者,為彰君賜乎?為隱君賜乎?」公曰,「善。為我浮無宇也。」


田無宇請求四方之學士晏子謂君子難得第十三

田桓子見晏子獨立於牆陰,曰:「子何為獨立而不憂?何不求四方之學士可者而與坐?」晏子曰:「共立似君子,出言而非也。嬰惡得學士之可者,而與之坐。且君子之難得也,若華山然,名山既多矣,松柏既茂矣,望之<女黽><女黽>然,盡目力不知厭。而世有所美焉,固欲登彼<女黽><女黽>之上,仡仡然不知厭。小人者與此異,若部婁之未登,善。登之無蹊,維有楚棘而已,遠望無見也,俛就則傷要,嬰惡能無獨立焉?且人何憂,靜處遠慮,見歲若月,學問不厭,不知老之將至,安用從酒?」田桓子曰:「何謂從酒?」晏子曰:「無客而飲,謂之從酒。今若子者,晝夜守尊,謂之從酒也。」


田無宇勝奕氏高氏欲分其家晏子使致之公第十四

欒氏高氏欲逐田氏鮑氏,田氏鮑氏先知而遂攻之。高強曰:「先得君,田鮑安往?」遂攻虎門。二家召晏子,晏子無所從也。從者曰:「何為不助田鮑?」晏子曰:「何善焉其助之也?」「何為不助欒高?」曰:「庸愈於彼乎?」門開,公召而入。欒高不勝而出,田桓子欲分其家,以告晏子。晏子曰:「不可。君不能飭法,而群臣專制,亂之本也。今又欲分其家,利其貨,是非制也,子必致之公。且嬰聞之,廉者,政之本也;讓者,德之主也。欒高不讓,以至此禍,可毋慎乎!廉之謂公正,讓之謂保德。凡有血氣者,皆有爭心,怨利生孽,維義為可以長存。且分爭者不勝其禍,辭讓者不失其福,子必勿取。」桓子曰:「善。」盡致之公,而請老於劇。


子尾疑晏子不受慶氏之邑晏子謂足欲則亡第十五

慶氏亡,分其邑,與晏子邶殿,其鄙六十,晏子勿受。子尾曰:「富者人之所欲也,何獨弗欲?」晏子對曰:「慶氏之邑足欲,故亡。吾邑不足欲也,益之以邶殿,乃足欲,足欲,亡無日矣,在外不得宰吾一邑。不要邶殿,非惡富也,恐失富也。且夫富,猶布帛之有幅焉、為之制度使無遷也。夫民生厚而用利,於是乎正德以幅之,使無黜慢,謂之幅利。利過則為敗,吾不敢貪多,所謂幅也。」


景公祿晏子平陰與槁邑晏子願行三言以辭第十六

景公祿晏子以平陰與槁邑,反市者十一社。晏子辭曰:「吾君好治宮室,民之力弊矣;又好盤遊玩好以飭女子,民之財竭矣;又好興師,民之死近矣。弊其力,竭其財,近其死,下之疾其上甚矣,此嬰之所為不敢受也。」公曰:「是則可矣。雖然,君子獨不欲富與貴乎?」晏子曰:「嬰聞為人臣者,先君後身,安國而度家,宗君而處身,曷為獨不欲富與貴也!」公曰:「然則曷以祿夫子?」晏子對曰:「君商漁鹽,關市譏而不征,耕者十取一焉,弛刑罰,若死者刑,若刑者罰,若罰者免。若此三言者,嬰之祿,君之利也。」公曰:「此三言者,寡人無事焉,請以從夫子。」公既行若三言,使人問大國,大國之君曰:「齊安矣。」使人問小國,小國之君曰:「齊不我加矣。」


梁丘據言晏子食肉不足景公割地將封晏子辭第十七

晏子相齊三年,政平民說。梁丘據見晏子中食而肉不足,以告景公。旦日,封晏子以都昌,晏子辭而不受,曰:「富而不驕者,未嘗聞之。貧而不恨者,嬰是也。所以貧而不恨者,以若為師也。今封,易嬰之師。師已輕,封已重矣,請辭。」


景公以晏子食不足致千金而晏子固不受第十八

晏子方食,景公使使者至,分食食之,使者不飽,晏子亦不飽。使者反,言之公,公曰:「嘻,晏子之家,若是其貧也。寡人不知,是寡人之過也。」使吏致千金與市租,請以奉賓客。晏子辭,三致之,終再拜而辭曰:「嬰之家不貧。以君之賜,澤覆三族,延及交遊,以振百姓,君之賜也厚矣,嬰之家不貧也。嬰聞之,夫厚取之君而施之民,是臣代君君民也,忠臣不為也。厚取之君而不施於民,是為筐篋之藏也,仁人不為也。進取於君,退得罪於士,身死而財遷於它人,是為宰藏也,智者不為也。夫十總之布,一豆之食,足於中免矣。」景公謂晏子曰:「昔吾先君桓公,以書社五百封管仲,不辭而受,子辭之何也?」晏子曰:「嬰聞之,聖人千慮,必有一失;愚人千慮,必有一得。意者管仲之失,而嬰之得者耶?故再拜不敢受命。」


景公以晏子衣食弊薄使田無宇致封邑晏子辭第十九

晏子相齊,衣十升之布,食脫粟之食,五卵、苔菜而已,左右以告公,公為之封邑,使田無宇致台與無鹽。晏子對曰:「昔吾先君太公受之營丘,為地五百里,為世國長。自太公至於公之身,有數十公矣,苟能說其君以取邑,不至公之身,趣齊搏以求升土,不得容足而寓焉。嬰聞之,臣有德益祿,無德退祿,惡有不肖父為不肖子,為封邑以敗其君之政者乎!」遂不受。


田桓子疑晏子何以辭邑晏子答以君子之事也第二十

景公賜晏子邑,晏子辭。田桓子謂晏子曰:「君歡然與子邑,必不受以恨君何也?」晏子對曰:「嬰聞之,節受於上者,寵長於君;儉居於處者,名廣於外。夫長寵廣名,君子之事也,嬰獨庸能已乎?」


景公欲更晏子宅晏子辭以近市得所求諷公省刑第二十一

景公欲更晏子之宅,曰:「於之宅近市,湫隘囂塵,不可以居,請更諸爽塏者。」晏子辭曰:「君之先臣容焉,臣不足以嗣之,於臣侈矣。且小人近市,朝夕得所求,小人之利也,敢煩裡旅?」公笑曰:「子近市,識貴賤乎?」對曰:「既竊利之,敢不識乎?」公曰:「何貴何賤?」是時也,公繁於刑,有鬻踴者,敵對曰:「踴貴而屨賤。」公愀然改容,公為是省於刑。君子曰:「仁人之言,其利博哉!晏子一言,而齊侯省刑。詩曰:『君子如祉,亂庶遄已。』其是之謂乎!」


景公毀晏子鄰以益其宅晏子因陳桓子以辭第二十二

晏子使魯,景公為毀其鄰,以益其宅。晏子反,聞之,待於郊,使人複於公曰:「臣之貪頑而好大室也,乃通於君,故君大其居,臣之罪大矣。」公曰:「夫子之鄉惡而居小,故為夫子為之,欲夫子居之,以慊寡人也。」晏子對曰:「先人有言曰:『毋卜其居,而蔔其鄰舍。』今得意於君者,慊其居則毋蔔。已沒氏之先人蔔與臣鄰,吉,臣可以廢沒氏之蔔乎?夫大居而逆鄰歸之心,臣不願也,請辭。」卒複其舊宅。公弗許,因陳桓子以請,乃許之。


景公欲為晏子築室於宮內晏子稱是以遠之而辭第二十三

景公謂晏子曰:「寡人慾朝昔相見,為夫子築室子閨內,可乎?」晏子對曰:「臣聞之,隱而顯,近而結,維至賢耳。如臣者,飾其容止以待命,猶恐罪戾也。今君近之,是遠之也,請辭。」


景公以晏子妻老且惡欲納愛女晏子再拜以辭第二十四

景公有愛女,請嫁於晏子。公乃往燕晏子之家,飲酒,酣,公見其妻曰:「此子之內子邪?」晏子對曰:「然,是也。」公曰:「嘻!亦老且惡矣。寡人有女,少且姣,請以滿夫子之宮。」晏子違席而對曰:「乃此則老且惡,嬰與之居故矣,故及其少而姣也。且人固以壯托乎老,姣托乎惡,彼嘗托而嬰受之矣。君雖有賜,可以使嬰倍其托乎?」再拜而辭。


景公以晏子乘弊車駑馬使梁丘據遺之三返不受第二十五

晏子朝,乘弊車,駕駑馬,景公見之曰:「嘻!夫子之祿寡邪?何乘不佼之甚也?」晏子對曰:「賴君之賜,得以壽三族,及國遊士,皆得生焉。臣得暖衣飽食弊車駑馬以奉其身,於臣足矣。」晏子出,公使梁丘據遺之輅車乘馬,三返不受。公不說,趣召晏子。晏於至,公曰:「夫子不受,寡人亦不乘。」晏子對曰:「君使臣臨百官之吏,臣節其衣服,飲食之養,以先齊國之民,然猶恐其侈靡而不顧其行也。今輅車乘馬,君乘之上,而臣亦乘之下,民之無義,侈其衣服飲食,而不顧其行者,臣無以禁之。」遂讓不受。


景公睹晏子之食菲薄而嗟其貧晏子稱其參士之食第二十六

晏子相景公,食脫粟之食,炙三弋、五卵、苔菜耳矣。公聞之,往燕焉,睹晏子之食也。公曰:「嘻!夫子之家,如此其貧乎!而寡人不知,寡人之罪也。」晏子對曰:「以世之不足也,免粟之食飽,士之一乞也;炙三弋,士之二乞也;苔菜、五卵,士之三乞也。嬰無倍人之行,而有參士之食,君之賜厚矣。嬰之家不貧。」再拜而謝。


梁丘據自患不及晏子晏子勉據以常為常行第二十七

梁丘據謂晏子曰:「吾至死不及夫子矣!」晏子曰:「嬰聞之,為者常成、行者常至。嬰非有異於人也,常為而不置,常行而不休者,故難及也?」


晏子老辭邑景公不許致車一乘而後止第二十八

晏子相景公,老辭邑。公曰:「自吾先君定公至今用世多矣,齊大夫未有老辭邑者。今夫子獨辭之,是毀國之故,棄寡人也,不可。」晏子對曰:「嬰聞古之事君者,稱身而食,德厚而受祿,德薄則辭祿。德厚受祿,所以明上也;德薄辭祿,可以潔下也。嬰老,德薄無能而厚受祿,是掩上之明,汙下之行,不可。」公不許曰:「昔吾先君桓公,有管仲恤勞齊國,身老,賞之以三歸,澤及子孫。今夫子亦相寡人,欲為夫子三歸,澤至子孫,豈不可哉?」對曰:「昔者管子事桓公,桓公義高諸侯,德備百姓。今嬰事君也,國僅齊於諸侯,怨積乎百姓,嬰之罪多矣,而君欲賞之,豈以其不肖父為不肖子厚受賞,以傷國民義哉!且夫德薄而祿厚,智惛而家富,是彰汙而逆教也,不可。」公不許。晏子出,異日朝,得間而入邑,致車一乘而後止。


晏子病將死妻問所欲言雲毋變爾俗第二十九

晏子病,將死,其妻曰:「夫子無欲言乎?」晏子曰:「吾恐死而俗變。謹視爾家,毋變爾俗也。」


晏子病將死鑿楹納書命子壯而示之第三十

晏子病,將死,鑿楹納書焉,謂其妻曰:「楹語也,子壯而示之。」及壯,發書,書之言曰:「布帛不可窮,窮不可飾;牛馬不可窮,窮不可服;士不可窮,窮不可任;國不可窮,窮不可竊也。」

晏子春秋 (안자춘추, yànzǐchūnqiū)

晏子春秋(안자춘추)

晏子春秋(yànzǐchūnqiū)

구분: 책
시대: 중국 춘추시대 말기


중국 춘추시대 말기 제(齊)나라의 명재상 안영(?∼BC 500)의 언행을 후대인(後代人)이 기록했다는 책.


한지(漢志) 등에서는 유가류(儒家類)에 넣었으나 사고제요(四庫提要)는 전기류(傳記類)에 넣고 또한 한지 이하 편수를 달리하였다. 현행 4부 총간본(叢刊本) 등에서는 내편(內編)은 간(諫) 상하, 문(問) 상하, 잡(雜) 상하의 6편, 외편은 2편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묵자(墨子)》 등에도 언급하고 있으므로 제나라의 경공(景公) 기타를 도(道)와 예(禮)로써 이끌고 또 정(鄭)나라의 자산(子産), 진(晉)나라의 숙향(叔向) 등과 더불어 공자(孔子)에게 영향을 준 안영의 언행만을 수록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관련 고사성어

卷六 內篇雜下第六

橘化爲枳(귤화위지) |

기타
二桃殺三士(이도살삼사) | 臨渴掘井(임갈굴정) | 中流砥柱(중류지주) |

阿諛苟容 (아유구용)

阿諛苟容(아유구용)

남에게 아첨하고 억지로 좋은 얼굴을 꾸며 보이는 것.

眼中釘 (안중정)

眼中釘(안중정)

眼 눈 안, 눈 불거질 은 | 中 가운데 중 | 釘 못 정 |

눈에 박힌 못이라는 뜻으로, 눈엣가시 또는 남에게 심한 해독(害毒)을 끼치는 사람

a thorn in the eye


신오대사(新五代史) 조재례전(趙在禮傳)에 실린 이야기다.

오대(五代) 후당(後唐)시대 당(唐)나라의 명종(明宗)이 재위할 때, 송주(宋州)의 절도사로 조재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하북절도사 유인공(劉仁恭)의 수하였으나 고관들에게 뇌물을 상납하여 출세길에 오른 뒤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晉)의 세 왕조에 걸쳐 절도사를 역임했다.

그의 포악한 정치때문에 많은 백성들은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반발하거나 불평하지 못했다.

조재례가 송주를 떠나 영흥(永興)으로 옮긴다는 소식에 송주 백성들은 모두 '조재례가 떠난다니, 마치 눈에 박힌 못이 빠진 것 같은데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나[眼中拔釘, 豈不樂哉]'라며 기뻐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조재례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곧 황제에게 송주의 절도사로 유임(留任)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황제는 조재례의 뜻이 백성들의 희망때문인 것으로 알고, 그로 하여금 유임하도록 했다. 다음 날, 조재례는 즉각 명령을 내려,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못을 뽑아내는 비용으로 일인당 1천문의 돈을 내도록 하고, 정해진 기간 안에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이런 식으로 착취한 돈이 1년 동안 100만 꿰미나 되었다고 한다.

眼中釘(a thorn in the eye) 이란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신오대사(新五代史) 조재례전(趙在禮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眼中之釘(안중지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