畵虎類狗 (화호유구)

畵虎類狗(화호유구)

畵 그릴 화 | 虎 범 호 | 類 같을 류 | 狗 개 구 |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를 그린 꼴이 됨.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시기,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은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이라는 경박한 조카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계형자엄돈서(誡兄子嚴敦書)'라는 편지를 썼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장점이나 단점을 비난한다거나, 국가의 대사(大事)를 함부로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 한다. 나는 사람됨이 후덕하고 신중하며 청렴했던 산도현(山都縣)의 현령 용백고(龍伯高)와 의협심이 강한 월기사마(越騎司馬) 두계량(杜季良)을 존경하고 있지만, 너희들이 그들을 본받기는 바라지 않는다. 용백고처럼 되는지 못한다하더라도 조정의 신임을 받는 관리는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너희들이 두계량을 본받는다면,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천하의 경박한 사람이 될까 두렵다. 이는 마치 호랑이를 그리려다 도리어 개를 그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畵虎不成反類狗者也].

畵虎類狗란 서투른 솜씨로 큰일을 하려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침을 비유한 말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각곡류목(刻鵠類鶩) | 화룡유구(畵龍類狗) | 화호불성반류구(畵虎不成反類狗) |

和風暖陽 (화풍난양)

和風暖陽(화풍난양)

화창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 곧 좋은 날씨

黃宗羲 (황종희, 1610~1695)

황종희(黃宗羲, 1610~1695)

중국 명말·청초의 사상가. 박람(博覽)과 실증(實證)을 존중하고, 청나라 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명대의 철학사(哲學史)라고 할 《명유학안(明儒學案)》, 군주 독재제도를 통렬히 비판한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은 명저(名著)로 알려졌다.


호 남뢰(南雷)·이주(梨洲). 자 태충(太沖). 저장성(浙江省) 위야오[餘姚]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황존소(黃尊素)는 동림당(東林黨)의 명사로, 동림당 탄압 때 옥사하였다. 황종희는 숭정연간(崇禎年間:1628∼1644)에 당시의 문학적 결사 '복사(復社)'에 가맹하여 환관파(宦官派)를 배척하는 정치운동에 참가한 일도 있었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고향의 젊은이 수백 명을 모아 의용군을 조직하였고, 또한 명나라 유왕(遺王)인 노왕(魯王)을 따라 만주(滿洲)에서 청군(淸軍)에 저항하였다. 그뒤 고향에 돌아가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청나라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고 평생토록 이민족의 군주를 섬기지 않았으며, 명사(明史)의 편찬시에는 아들과 제자를 명사관(明史館)에 보내어 고국의 역사를 남기려고 힘썼다.

그의 학문은 박람(博覽)과 실증(實證)을 존중하고, 청나라 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는데, 명대(明代)의 철학사(哲學史)라고 할 《명유학안(明儒學案)》, 군주 독재제도를 통렬히 비판한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은 명저(名著)로 알려졌다. 특히 《명이대방록》은 청말(淸末) 혁명사상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서

明夷待訪錄(명이대방록)

畵中之餠 (화중지병)

畵中之餠(화중지병)

그림의 떡.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畵餠(화병) | 畵餠充飢(화병충기) | 畵中之餠(화중지병) |

黃庭堅 (황정견, 1045~1105)

황정견 [黃庭堅, 1045~1105]

異名: 호 산곡, 자 노직
국적: 중국 송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홍주 분녕
주요저서: 《예장 황선생문집》


고전주의적인 작풍을 지닌 중국 송나라의 시인 겸 화가. 지방관리를 역임하다 중앙관직에 취임, 교서랑(校書郞)이 되어 국사편찬(國史編纂)에 종사했다. 학식에 의한 전고(典故)와, 수련을 거듭한 조사(措辭)를 특색으로 한다.


자 노직(魯直), 호 산곡(山谷). 홍주(洪州:江西省) 분녕(分寧:修水縣) 출생. 1066년 진사(進士)에 급제한 후 국자감 교수(國子監敎授)를 거쳐 각지의 지방관리를 역임하였다. 1086년에 비로소 중앙관직에 취임, 교서랑(校書郞)이 되어 국사편찬(國史編纂)에 종사하였다. 1095년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이 부활됨과 동시에, 구법당(舊法黨)인 그는 신법을 비난하였다는 죄목으로 검주(黔州:四川省 彭水縣)에 유배되었다. 1100년에 사면 복직되었으나, 1102년에 다시 무고를 당하고 의주(宜州:廣西省宜山縣)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시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았으며, 스승인 소식(蘇軾:東坡)과 나란히 송대(宋代)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그의 시는 고전주의적인 작풍을 지녔으며, 학식에 의한 전고(典故)와, 수련을 거듭한 조사(措辭)를 특색으로 한다. 강서파(江西派)의 시조로 꼽히며, 《예장 황선생문집(豫章黃先生文集)》(30권)이 있다. 서(書)에서는 채양(蔡襄) ·소식 ·미불(米芾)과 함께 북송(北宋)의 4대가(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는 단정하지만 일종의 억양(抑揚)을 지녔으며, 활력있는 행초서(行草書)에 뛰어났다.

和而不同 (화이부동)

和而不同(화이부동)

남과 화목하게 지내지만 스스로 원칙을 굽히지 말자

교수신문에서 선정한 2009년 희망의 사자성어


2009년 | 희망의 사자성어 | 교수신문

花容月態 (화용월태, huāróngyuèmào)

花容月態(화용월태)

花容月貌(huāróngyuèmào)

花 꽃 화 | 容 얼굴 용 | 月 달 월 | 態 모습 태 |


'꽃다운 얼굴과 달 같은 자태(姿態)'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여자(女子)의 고운 자태(姿態)를 이르는 말

a lovely face and graceful carriage


관련 한자어

유의어

花顔月貌(화안월모) | 朱脣皓齒(주순호치) | 絶世美人(절세미인) | 絶世代美(절세대미) | 絶世佳人(절세가인) | 絶代佳人(절대가인) | 一顧傾城(일고경성) | 月態花容(월태화용) | 萬古絶色(만고절색) | 丹脣皓齒(단순호치) | 國香(국향) | 國色(국색) | 傾城之色(경성지색) | 傾城之美(경성지미) | 傾城(경성) | 傾國之色(경국지색) | 傾國(경국) |


미인

華而不實 (화이부실)

華而不實(화이부실)

華 꽃 화, 빛날 화 | 而 말이을 이, 능히 능 | 不 아닐 부, 아닐 불 | 實 열매 실, 이를 지 |

꽃만 피고, 열매가 없다는 뜻으로, 언행(言行)이 일치(一致)하지 않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Flowery but bears no fruit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5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大夫) 양처보(陽處父)가 위(衛)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魯)나라의 영읍(寗邑)을 지나가게 되었다. 양처보는 그 곳의 한 객점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객점의 주인 영은 양처보의 인물됨에 반하여 그와 함께 갈 것을 결심하였다. 양처보의 동의를 얻은 후, 영은 아내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와 함께 떠났다. 그런데 영은 온(溫) 땅에 이르자 생각을 바꾸어 집으로 돌아왔다.

영의 아내는 매우 이상하게 여겨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다. 이에 영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양처보는 성격이 지나치게 강경하고 편집적인 인물이오. 게다가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은 없으며, 쉽게 남을 불쾌하게 만들어 원망을 많이 사고 있소.[且華而不實,怨之所聚也]. 그를 따라갔다가는 이익을 얻기도 전에 재앙을 당할 것이 두려워 그냥 돌아온 것이오."

양처보는 이로부터 1년 뒤에 조성자(趙成子)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 고사는 《좌씨전》의 '문공(文公) 5년'조에 실려 있다.

또 한(漢)나라의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論衡)》에는 "무릇 사람은 문(文:형식)과 질(質:실질)로 이루어지는데, 사물은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실질적이지 못한 것이 있고, 실질적이지만 화려하지는 못한 것이 있다(夫人有文質乃成, 物有華而不實, 有實而不華者)"라는 구절이 있다. 역시 내실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화이부실은 화려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식물처럼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이 없는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우리나라 속담 가운데 '빛 좋은 개살구'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이다.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畵蛇添足 (화사첨족)

畵蛇添足(화사첨족)

뱀의 발. 뱀을 그리고 발을 그려 넣다. 있어도 쓸모없는 것 또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공연스레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蛇足(사족)이라고도 한다.


楚(초)나라의 令尹(영윤․재상) 昭陽(소양)은 魏(위)나라를 치고 나서 다시 齊(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겁이 난 제나라 왕이 때마침 秦(진)나라의 사신으로 와있던 陳軫(진진)에게 소양의 야심을 꺾어 달라고 부탁했다.

진진은 곧 소양을 찾아가 말했다. “초나라에서는 적군을 격파하고 敵將(적장)을 죽인 자에게 어떤 恩賞(은상)을 내립니까?”

“上柱國(상주국)이란 벼슬을 주고 작위는 上執珪(상집규)에 해당하지요.”

“상주국보다 더 높은 벼슬은 뭡니까.” “오직 영윤이 있을 뿐이오.” “그렇지요. 영윤은 둘일 수가 없지요. 영윤인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겠소. 어떤 사람이 하인들에게 큰 잔에 따른 술을 내렸답니다. 그것은 여럿이 마시기에는 모자라고 혼자서 마시기에는 넉넉했습니다. 하인들은 의논끝에 땅바닥에 뱀을 그려서 가장 먼저 그린 사람이 그 술을 다 마시기로 했지요. 그래서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윽고 한 사람이 ‘내가 뱀을 가장 먼저 그렸다’ 고 외치고는 술잔을 집어들더니 ‘나는 발도 그릴 수 있지’ 하면서 그린 뱀에 발을 덧붙여 그렸답니다.

그러자 그제사 뱀을 다 그린 자가 술잔을 뺏어 마시면서 ‘뱀에 무슨 발이 있어. 자네가 그린 발 달린 뱀은 뱀이 아니야’ 했다는 군요. 당신은 위나라를 치고 제나라를 두려워하게 만들어 이미 충분히 공을 세웠소. 영윤인 당신이 더이상 받을 官爵(관작)은 없소. 더 욕심을 내다가 목숨이라도 잃는다면 뱀의 발을 그렸다가 술잔을 빼앗긴 자와 무엇이 다르겠소.” 진진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던 소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군사를 거두었다.

花無十日紅 (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

花 꽃 화 | 無 없을 무 | 十 열 십 | 日 날 일 | 紅 붉을 홍, 상복 공 |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①'한 번 성한 것이 얼마 못 가서 반드시 쇠하여짐'을 이르는 말 ②권세(權勢)나 세력(勢力)의 성(盛)함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말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權不十年(권불십년) | 物極必反(물극필반) | 물장즉노(物壯則老) 만물은 장성했다가는 쇠퇴하기 마련이다 |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달도 차면 기운다.

畵龍點睛 (화룡점정, huàlóngdiǎnjīng)

畵龍點睛(화룡점정)

畵龙点睛(huà lóng diǎn jīng)

그림 화 | 용 룡 | 점찍을 점 | 눈동자 정


그림을 그린 뒤 눈동자에 점을 찍다. 사물의 가장 요긴한 곳 또는 무슨 일을 함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끝내어 완성시킴을 이르는 말.


南北朝(남북조)시대 梁(양)나라의 張僧繇(장승요)는 東晋(동진)의 顧愷之(고개지), 吳(오)의 陸探微(육탐미)와 더불어 남북조 3대가의 한사람으로 꼽힐 만큼 유명한 화가다.

장승요는 모든 사물을 살아있는 것처럼 그려냈는데 특히 그의 걸작중에는 佛畵(불화)가 많다.어느날 그는 安樂寺(안락사)란 절의 주지로부터 용그림을 벽화로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주지의 끈덕진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장승요는 마침내 절간의 벽에 네마리의 용을 그렸다. 용들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치솟아 오를 듯 생동감이 넘쳐흘러 그림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사람들이 용의 눈에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다가 깜빡했는지, 아니면 무슨 깊은 뜻이라도 있는지 사람들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승요는 그 이유를 따지는 물음에 시달리다가 겨우 입을 뗐다.

"눈동자는 그려 넣을 수가 없소. 그것을 그려 넣으면 용은 당장 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만단 말이오."

이 말을 사람들이 믿을 턱이 있는가.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는 독촉을 견디다 못한 장승요는 마침내 먹물을 푹 찍은 붓을 두마리 용의 눈에 갖다 대고 점을 찍었다.

이윽고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번쩍하더니 벽이 무너지고 눈동자를 그려 넣은 두마리의 용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 버렸다.

荒唐無稽 (황당무계)

荒唐無稽(황당무계)

말이나 행동이 너무나 허황되어 믿을 수가 없음.

桓寬 (환관)

桓寬(환관)


桓寬(환관) 관련 작품

鹽鐵論(염철론)

換骨奪胎 (환골탈태)

換骨奪胎(환골탈태)

뼈대를 바꿔 끼고 태를 달리 쓰다.

원래는 古人(고인)이 지은 詩文(시문)의 뜻을 취해 어구나 結構(결구)만을 바꾸어 자기 작품인 것처럼 꾸미는 것을 가리켰다. 요즘은 용모나 차림새가 몰라보게 좋아졌을 때 많이 쓰는 표현이 되었다.

중국 書藝史(서예사)에서 蘇軾(소식) 米(미불) 蔡襄(채양)과 더불어 宋代四大家(송대사대가)를 이룬 黃庭堅(황정견)은 소식(蘇東坡․소동파)과 함께 北宋(북송)을 대표하는 시인이기도 했다. 황정견은 杜甫(두보)의 詩(시)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두보의 붓에 걸리면 흔해빠진 경치도 금세 아름다운 풍광으로 변하는데 이것은 마치 연금술사가 한 알의 靈丹(영단)을 넣어서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

그가 말한 영단이란 시인의 詩想(시상)을 가리키지만 道家(도가)에서는 이 영단을 먹여서 보통사람의 뼈를 仙骨(선골)로 바꾸는 것을 「換骨(환골)」이라고 한다. 「奪胎(탈태)」란 시인의 시상이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胎內(태내)에 있는 것과 같으므로 그 태를 나의 것으로 삼아 자기의 詩境(시경)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황정견은 이렇게 말한다.

『시의 뜻은 무궁하지만 사람에게 주어진 재능에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는 재주로 무궁한 뜻을 좇는다는 것은 陶淵明(도연명)이나 두보라 할지라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先人(선인)의 작품에서 뜻을 바꾸지 않고 말만 바꾸어 만드는 것을 「환골법」이라 하고 그 뜻을 본받아 그것을 조금 바꾸어 표현하는 것을 「탈태법」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