簞瓢陋巷 (단표누항)

簞瓢陋巷(단표누항)

도시락 표주박과 누추한 거리라는 뜻으로 소박한 시골 살림살이를 가리킴.

多情多感 (다정다감)

多情多感(다정다감)

애틋한 정도 많고, 느낌이나 생각이 많음.

多言數窮 (다언삭궁)

多言數窮(다언삭궁)

말이 많으면 자주 곤란(困難)한 처지(處地)에 빠짐

多言數窮 不如守中 (다언삭궁 불여수중)
말이 많으면 곤궁에 처하는 경우가 많으니 가슴에 품고만 있음만 못하다
- 老子 도덕경


참고어

구화지문(口禍之門), 사마난추(駟馬難追), 언비천리(言飛千里), 화종구출(禍從口出)

남아일언 중천금(男兒一言 重千金)

내어불미 거어하미(來語不美 去語何美), 장부일언 천년불개(丈夫一言千年不改)

丹脣皓齒 (단순호치, dānchúnhàochǐ)

丹脣皓齒(단순호치)

丹唇皓齿(dānchúnhàochǐ)

丹 붉을 단,정성스러울 란(난) | 脣 입술 순,꼭 맞을 민 | 皓 흴 호 | 齒 이 치 |


붉은 입술과 하얀 이란 뜻으로, ①여자(女子)의 아름다운 얼굴을 이르는 말 ②미인(美人)의 얼굴


하나라가 쇠퇴할 무렵 두 마리의 용이 왕궁의 뜰에 나타나, "우리는 포나라의 두 왕이다."하면서 용의 정기인 타액(唾液)을 토해놓고 사라졌다. 사람들이 점을 쳐 본 결과 보관해두면 길할 것이다[藏之吉]라는 점괘가 나와 사람들은 그것을 상자에 정성스럽게 받아 밀봉하고는 소중히 보관하였다. 그 상자는 천 년 동안이나 보관되었다.

그러나 은나라 여왕(厲王) 시대에 이르러 어떤 실수에 의해 상자가 마침내 열렸다. 그러자 상자 안에 있던 용의 침은 갑자기 검은 도마뱀[玄黿]으로 변하여 궁궐 안을 마구 기어다녔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하다가 마침내 궁녀들을 모아 옷을 벗게 하고 큰 소리를 치도록 하였다. 그러자 도마뱀은 후원 쪽으로 도망쳐버렸다. 중국에서는 요사스런 동물을 쫓는 데에 벌거벗은 여인들이 동원되던 관습이 있었다.

벌거벗은 여인들의 고함 소리에 놀라 후원으로 도망치던 도마뱀은 때마침 후원을 지나가던 일곱 살 난 소녀와 마주쳤는데 그 소녀가 열 다섯이 되자 처녀의 몸인데도 자꾸만 배가 불러왔다. 이윽고 그녀가 애를 낳자 고민 끝에 아기를 강물에 띄워보냈다.

한편 당시에 거리에는 수상한 노래가 퍼지고 있었다.

뽕나무로 만든 활과
가느다란 풀줄기로 짠 화살통.
그것이 주나라를 망하게 하리라.

왕이 그 노래를 듣고는 명령을 내려 뽕나무로 만든 활과 풀줄기로 짠 화살통을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어느 시골의 활장수 부부가 뽕나무 활과 화살통을 가득 짊어진 채 서울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서울에 오자마자 포졸들에게 붙잡히게 되었는데 남편은 용케도 도망쳐서 10리 밖에까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내달으니 거기서 마누라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듣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며 강가로 가 몸을 던지려던 남편은 조그만 돗자리 위에 핏덩이 계집아이가 실려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수백 마리의 새떼가 공중을 떠돌고 있었고, 그 중 수십 마리는 돗자리를 입으로 물어 사력을 다하며 계집아이가 물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남편이 돗자리를 건져 계집아이를 품에 안고 생각해 보니 갈 곳이 도무지 없었다. 그는 궁리 끝에 포나라[褒國]에 있는 친구에게로 가서 아이를 맡겼다. 그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났으며 용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음인지 용모가 빼어났다.

그 무렵 포나라 왕이 주 왕실에게 중죄를 지어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를 바치고 죄를 용서받게 되었는데 그 미녀가 바로 포사(褒姒,襃姒)였다.

주나라 유왕(幽王)은 포사에게 처음부터 빠져버렸다. 포사는 유왕의 총희가 되었으며, 아들 백복(伯服)을 낳았다. 그런데 포사는 웃음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포사를 웃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만이 유왕의 가장 큰 바램이 아닐 수 없었다. 별의별 일을 다 꾸며봤지만 그녀는 웃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대가 웃을 수 있겠소?"

"저는 좋아하는 것이 없사옵니다. 다만 비단 찢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을 듯하옵니다."

유왕은 그날부터 매일 비단을 백 필씩 가져다가 팔 힘이 쎈 궁녀를 시켜 찢게 하였다. 그러나 포사는 웃지 않았다. 다만 뺨 부근이 희미하게 움직였을 뿐이었고 입술이 약간 벌어질 정도였다. 그래도 유왕은 뛸듯이 기뻤다. 매일 산더미같은 비단이 찢겨졌다. 궁중의 비단이 모두 없어지니 이제 제후들과 백성들에게서 징발해 계속 찢었다. 궁중에서는 매일 비단찢는 소리가 가득찼다.

그러던 어느날, 실수로 봉화대에 봉화가 올랐다. 봉화는 외적이나 반란군의 침입 등 위급할 때 올려 모든 군사를 왕궁으로 모이도록 하라는 신호이다.

"큰일났다. 빨리 왕궁으로 가자!"

나라의 모든 군사며 마차가 왕궁으로 모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면서 사람과 말이 뒤엉키고, 수레는 서로 부딪히고 앞서온 군사들이 뒤에 온 군사들에게 고함을 치며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제후들은 맥이 빠져 자기들끼리 모여 수근거렸고 군사들은 투구를 땅바닥에 집어 던지면서 흥분하기도 하였다. 어떤 자들은 아예 길에서 주저앉아 잠을 자기도 하였다. 이러한 웃지 못할 광경이 한나절이나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결코 웃지 않았던 포사도 이 광경에 단순호치(丹脣皓齒)를 드러내며 웃었다. 꿈에 그리던 포사의 웃음이었다. 웃는 포사의 얼굴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유왕은 하늘도 땅도 그녀가 웃는 이 순간을 위해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다음날부터 유왕은 매일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려산(驪山) 앞에 소집하였다. 처음에는 군사들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달려와 보면 왕궁의 높은 다락 위에서는 유왕과 포사가 내려보며 웃고 있었고 그런 일이 계속되자 그후에는 봉화가 올라도 움직이는 군사들이 없게 되었다.

뒤에 유왕은 왕비 신후(申后)와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포사를 왕비로,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쫓겨난 왕비신후(申后)의 아버지 신후(申侯)는 격분하여 BC 771년 려(呂) 등의 나라와 연합하여 견융족(犬戎)과 함께 호경(鎬京)으로 대거 진공해왔다.

"봉화를 올려라!"

유왕은 다급하여 명령했다. 그러나 봉화가 올라도 단 한 명의 군사도 모이지 않았다. 유왕과 포사는 궁정을 빠져나가 도망쳤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견융족에게 잡혀 유왕은 단칼에 베어졌다.

왕과 백복은 견융의 칼에 살해되어 서주는 멸망하였으며, 포사는 포로로 잡혀갔으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납치되어 견융의 여자가 되었다가 얼마 후 밤중에 도망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한다.


黿(원) ㉠ 자라 ㉡ 큰 자라 ㉢영원(蠑螈: 도룡뇽과에 속하는 양서류) ㉣별 이름

蠑螈(영원) ① 도롱뇽과에 딸린 동물(動物). 도롱뇽. 사사(蛇師). 사의(蛇醫). 수석척(水蜥蜴) ②도마뱀을 잘못 이르는 말


관련 한자어

유의어

花容月態(화용월태) | 皓齒丹脣 호치단순 | 沈魚落雁 침어낙안 | 朱脣皓齒 주순호치 | 絶世美人 절세미인 | 絶世代美 절세대미 | 絶世佳人 절세가인 | 絶代佳人 절대가인 | 一顧傾城 일고경성 | 萬古絶色 만고절색 | 國香 국향 | 國色 국색 | 傾城之色 경성지색 | 傾城之美 경성지미 | 傾城 경성 | 傾國之色(경국지색) | 傾國(경국) |


史記(사기) : 周本紀(주본기) |

唐書 (당서)

唐書(당서)

중국 당나라의 정사(正史)로서 이십오사(二十五史)의 하나.


《당서》는 당고조(唐高祖)의 건국(618)에서부터 애제(哀帝)의 망국(907)까지 21제(帝) 290년 동안의 당나라 역사의 기록이다. 처음에는 단지 《당서》로 이룩하였지만, 송나라 때 내용을 고쳐 《신당서》로 편찬하였다. 그래서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로 나누어졌다.

《구당서》는 200권으로 되어 있는데, 당나라 멸망 직후의 사료가 부족하여 후반부가 부실하다. 전반부도 여러 사료에서 대강 발췌한 것이라 체제에 일관성은 없다. 그러나 당나라 때의 원사료의 문장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신당서》는 225권으로 되어 있는데, 송나라 때 《구당서》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한 것도 많다. 표(表)가 많은 것도 특징이고, 처음으로 병지(兵志) ·선거지(選擧志)를 갖추었다. 문장은 당시 중시되던 고문으로 간결하게 기술하여, 정사 편찬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원사료의 문체까지 고치고, 간략이 지나쳐 사료적 가치는 구당서에 비해 떨어진다.

簞食瓢飮 (단사표음)

簞食瓢飮(단사표음)

도시락의 밥과 표주박의 물이라는 뜻으로 간소한 생활의 비유.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는 일생 동안 무려 3천 명의 제자를 두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자공(子貢)처럼 이재(理財)에 밝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자로(子路)처럼 벼슬길에 나아가 성공한 사람도 있고, 안회(顔回)처럼 가난하지만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공자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제자는 안회였다. 공자는 제자들을 그 역량에 따라 평하고 그에 맞는 충고를 하곤 했지만, 안회에게만은 늘 칭찬을 잊지 않았다.

공자의 기대에 맞추어, 안회도 워낙 학문을 좋아하여 나이 29세에 벌써 백발이 되었다 한다. 자공이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聞一知十)'며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도 바로 안회이다. 그러나 안회는 찢어지게 가난하여 끼니 거르기를 밥 먹 듯했으며 평생 찌게미조차 배불리 먹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가난은 그의 수행과 학문 연구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다. 이런 안회를 보고 공자가 칭찬하였다. “어질도다, 안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거처하며 산다면, 다른 사람은 그 근심을 견디어내지 못하거늘 안회는 즐거움을 잃지 않는구나.어질도다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사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으므로 공자는 두 번이나 ‘어질도다 안회여.’라고 찬미한 것이다.

출전: 논어(論語)


관련 한자어

유의어(동의어)

一簞食一瓢飮(일단사일표음) |

多聞博識 (다문박식)

多聞博識(다문박식)

견문이 넓고 학식이 풍부한 것.

斷末魔 (단말마)

斷末魔(단말마)

말마는 인도말에서 온 것으로 숨이 끊어질 때의 고통 또는 임종을 가리킴.

螳螂捕蟬 (당랑포선, tánglángbǔchán)

螳螂捕蟬(당랑포선)

螳螂捕蟬(táng láng bǔ chán)

螳 사마귀 당 | 螂 사마귀 랑 | 捕 잡을 포 | 蟬 매미 선 |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덤비면 결국 큰 해를 입게 된다는 뜻.


전국시대 오나라 왕이 싸움을 무척 좋아하여 그의 강대한 병력을 믿고 이웃 나라를 침략했다. 그리하여 오나라는 끊일 사이 없는 전화 속에서 민생은 도탄에 빠질 지경이었다.

한번은 오왕이 또 초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자 오나라 문무대신들은 당시의 정세로 보아 다시 출병을 하게 되면 오나라에 대단히 불리해질 것을 우려하여 오왕에게 계획을 취소하도록 극구 권하였다.

그러나 오왕은 본디 성격이 강직하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은 꼭 하고 마는 고집불통인지라 이러한 권유를 듣고 침략 계획을 스스로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내렸다.

"무릇 누구도 초나라 침공을 저지하는 자는 용서없이 모두 처단할 것이다."

대신들이 비록 오왕의 힘에 겨운 침략행위를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목숨이 두려워 감히 진언하질 못했다. 이때 소유자라고 하는 대신이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고 여하간 오왕의 출병을 막고자 곰곰히 방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매일 아침 일찍 활과 화살을 들고 왕궁 후원에 나아가 배회하면서 아침 이슬로 그의 옷을 흠뻑 적시곤 하였다. 이렇게 사흘이 되던 날 과연 오왕의 주의를 끌게 되어 이상히 여긴 오왕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이 하여 아침 일찍부터 옷을 적셔 놓으오?"

"신은 아침 일찍 뒤 화원에 와서 꾀꼬리를 잡으려다 그만 연못에 빠졌습니다. 비록 옷은 젖었지만 오히려 귀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라고 소유자가 대답했다.

오왕이 이 말을 듣자 놀람과 기쁨이 엇갈렸다. 놀라운 것은 꾀꼬리를 잡는데 무엇 때문에 귀중한 교훈을 받았으며 기쁜 것은 이 귀중한 교훈이 자신의 입신처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서였다.

그리하여 오왕이 재촉하여 물었다.

"꾀꼬리를 잡는데 무슨 교훈을 얻었는지 그 사실을 상세히 아뢰렷다."

소유자는,

"조금전에 신이 이후원에 와서 새를 찾아 활솜씨를 시험해 보려 했는데, 갑자기 나무 위에서 매미 한 마리가 소리 높여 울더군요. 그래 머리를 들어 보니까 매미가 붙어 있는 바로 뒤에 사마귀 한 마리가 두 팔을 내어 밀고 막 매미에게 덮치려고 하고 잇지 않겠어요. 매미는 이를 모르고 있으니 틀림없이 아침 식사로 잡았다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그 사마귀 뒤에는 꾀꼬리 한 마리가 묵묵히 앉아 있는데 그도 사마귀를 잡아먹으려고 온 정신을 기울여 주시하고 있더군요. 신은 그 때 활을 잡아당기고는 바로 쏘질 않았습니다. 사마귀가 팔을 뻗어 매미를 잡자 꾀꼬리가 확 덮쳐가 사마귀를 잡아 한 입에 넣어 막 삼키려는 찰라에 신이 꾀꼬리를 조준하여 활을 쏘니까 꾀꼬리가 맞고 땅으로 떨어지더군요.

사마귀와 꾀꼬리가 다같이 눈앞의 이익만을 탐내고 뒤의 화환은 꿈에도 생각지 않다가 그러한 결과가 생겼다고 신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막 달려가서 그 꾀꼬리를 주우려다 옆에 못이 있는 것을 모르고 발을 헛디디어 물에 빠지는 바람에 이렇게 온 몸이 물에 젖었습니다. 그때 제자신도 똑 같은 과오를 저질렀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얼마나 귀중한 교훈입니까?"

오왕이 듣고는 한참 무언가 깊이 생각하더니 소유자의 언중의 말뜻을 깨달아 초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포기하였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螳螂窺蟬(당랑규선)│螳螂搏蟬(당랑박선, táng láng bó chán)│ 螳螂捕蟬(당랑포선, táng láng bǔ chán)│당랑재후(螳螂在後)

螳螂在後 (당랑재후, tánglángzàihòu)

螳螂在後(당랑재후)

螳螂在後(táng láng zài hòu)

螳 사마귀 당│螂 사마귀 랑│在 존재 재│後 뒤 후


사마귀가 뒤에 있다는 말로, 이익을 탐하여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 고사는 <한시외전(韓時外傳)>에서 나온다.

초장왕이 병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면서 사대부들에게 이렇게 포고했다.

"감히 간언하는 자는 죽음이 있을 뿐 사면은 없다."

그러나 손숙오가 말했다.

"신은 채찍의 엄함을 두려워하여 아버지에게 감히 간언하지 못하는 자는 효자가 아니며, 부월의 형벌을 두려워하여 감히 군주에게 간언하지 못하는 자는 충신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신의 정원 안에 느티나무가 있는데, 그 위에 매미가 있습니다. 매미는 막 날개를 펴고 슬피 울며 맑은 이슬을 마시려고 하면서 사마귀가 뒤에서 목을 굽혀 먹으려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사마귀는 매미를 먹으려고 하면서 참새가 뒤에서 목을 들고 쪼아 먹으려고 하는 것을 모릅니다.

참새는 사마귀를 먹으려고 하면서 어린아이가 아래에서 탄환을 장전하여 쏘려고 하는 것을 모릅니다. 어린아이는 참새에게 탄환을 쏘려고 하면서 앞에는 깊은 웅덩이가 있고 뒤에는 굴이 있는 것을 모릅니다.

이것은 모두 앞의 이익 때문에 뒤의 해로움을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유독 곤충의 무리만이 이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 역시 그러합니다. 지금 당신은 저쪽의 땅을 탐하는 것이 병사들을 즐겁게 하는 일인 줄 알고 있지만, 나라가 게으르지 않고 진나라가 안정된 것은 저의 힘인 것입니다."

초장왕은 이 말을 듣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이익만을 탐하여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지 않고 돌진하면 그 이익보다 수백 배 큰 재앙이 닥칠 수 있다.

[출전] 한시외전(韓時外傳)


관련 한자어

유의어

螳螂窺蟬(당랑규선)│螳螂搏蟬(당랑박선, táng láng bó chán)│螳螂捕蟬(당랑포선, táng láng bǔ chán)│螳螂在後(당랑재후)

螳螂蟬蟬 (당랑박선, tánglángbóchán)

螳螂蟬蟬(당랑박선)

螳螂搏蝉(táng láng bó chán)

螳 사마귀 당│螂 사마귀 랑│蟬 잡을 박│蟬 매미 선


눈 앞의 이익에 어두워 뒤에 따를 걱정거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장주(莊周)가 조릉(雕陵)이라는 밤나무밭 울타리 안을 거닐다가 문득 남쪽에서 이상하게 생긴 까치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 까치의 날개 넓이는 일곱 자였고, 눈의 직경이 한 치나 되었다. 까치는 장주의 이마에 닿았다가 밤나무 숲에 가서 멎었다. 장주는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저건 대체 무슨 새일까? 날개는 큰데 높이 날지 못하고 눈은 크나 보지 못하다니!"

그리고 아랫도리를 걷어올리고 재빨리 다가가 활을 쥐고 그 새를 쏘려 했다. 그러다 문득 보니, 매미 한 마리가 시원한 나무 그늘에 멎어 제 몸을 잊은 듯 울고 있었고, 바로 곁에는 정신이 팔려 스스로의 몸을 잊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긴 까치는 이 기회에 사마귀를 노리면서 정신이 팔려 제 몸을 잊고 있었다. 장주는 이 꼴을 보고 깜짝 놀라서 이렇게 외쳤다.

"아, 모든 사람이란 본래 서로 해를 끼치고, 이(利 )와 해(害 )는 서로를 불러들이고 있구나!"

그리고는 활을 내버리고 도망쳐 나왔다. 그때 밤나무 밭지기가 쫓아와 장주가 밤을 훔친 줄로 알고 꾸짖었다.

장주는 집에 돌아온 뒤 석 달 동안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제자 인저(藺咀)가 와서 물었다.

"선생님께선 요즘 무슨 일로 언짢으십니까?" 장주는 대답했다.

"나는 외물(外物)에 사로잡혀 내 몸을 잊고 있었다. 흙탕물을 보느라고 맑은 못을 잊듯이, 외물에 사로잡혀 자연의 대도(大道)를 놓치고 있었다. 나는 또 선생님으로부터 '속세에 들어가면 그 속세를 따르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이번에 조릉을 거닐며 내 몸을 잊었고 이상한 까치는 내 이마에 닿았다가 밤나무 숲에서 노닐며 그 몸을 잊었으며, 나는 밤나무 밭지기로 부터 꾸지람을 듣고 모욕을 당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언짢은 것이다."

[출전] 장자(莊子) 산목(山木)


관련 한자어

유의어

螳螂窺蟬(당랑규선)│螳螂搏蟬(당랑박선, táng láng bó chán)│ 螳螂捕蟬(당랑포선, táng láng bǔ chán)│ 螳螂在後(당랑재후)

螳螂窺蟬 (당랑규선, tánglángkuīchán)

螳螂窺蟬(당랑규선)

螳螂窥蝉(táng láng kuī chán)

螳 사마귀 당 | 螂 사마귀 랑 | 窺 엿볼 규 | 蟬 매미 선 |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엿본다는 말로, 눈 앞의 이익에 어두워 뒤에 따를 걱정거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전한(前漢)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정간(正諫)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랑포선(螳螂捕蟬)이라고도 한다. 《장자(莊子)》 산목편(山木篇)에 나오는 당랑박선(螳螂搏蟬)이나,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당랑재후(螳螂在後)라는 말이 모두 같은 뜻이다.

춘추시대 말기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월나라 공략에 성공한 후 자만에 빠져 간신 백비의 중상을 믿고 상국(相國:재상) 오자서(伍子胥)를 죽였으며, 월(越)나라에서 보내 온 미인 서시(西施)와 유락 생활에 탐닉하였다. 월의 구천이 와신상담 재기를 노린다는 것을 아는 중신들이 간하여도 막무가내였다.

어느 날 아침 태자 우(友)는 젖은 옷을 입고 활을 든 채 부차를 만났다. “너는 아침부터 무엇을 그리 허둥대느냐?” 부차가 묻자, 우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침에 정원에 갔더니 높은 나뭇가지에 매미가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보니 사마귀 한 마리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홀연 참새[黃雀] 한 마리가 날아와서 그 사마귀를 먹으려고 노리는데, 사마귀는 통 기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참새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그런데 그만 활 쏘는 데 정신이 팔려 웅덩이 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옷을 이렇게 적신 것입니다. 천하에는 이런 예가 부지기수입니다. 이를테면 제나라는 까닭없이 노나라를 쳐서 그 땅을 손에 넣고 기뻐했지만, 우리 오나라에게 그 배후를 공격받고 대패했듯이 말입니다.”

부차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너는 오자서가 못다한 충고를 할 셈이냐? 이제 그런 소리는 신물이 난다.”

충심에서 우러난 간언을 듣지 않은 부차는 결국 월나라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고, 그 자신은 자결하였다.

장자는 이 일화를 ‘모든 사물은 본래 서로 해를 끼치는 것이며, 이(利)와 해(害)는 서로가 서로를 불러들이는 것’이라는 비유로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소탐대실(小貪大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출전]
說苑(설원) : 正諫 |


黃雀 ①꾀꼬리. 黃鶯兒(황앵아). ②참새. 依人雀(의인작). 賓雀(빈작).


관련 한자어

유의어

螳螂窺蟬(당랑규선) | 螳螂搏蟬(당랑박선, táng láng bó chán) | 螳螂捕蟬(당랑포선, táng láng bǔ chán) | 螳螂在後(당랑재후) |


說苑(설원) : 正諫 |

螳螂拒轍 (당랑거철)

螳螂拒轍(당랑거철)

사마귀가 앞다리를 벌리고 수레바퀴를 막는다는 말로, 제 분수도 모르고 강정에게 덤벼든다는 뜻.


앞다리를 치켜들고 상대방에게 달려드는 품이 마치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과 비슷해서 螳螂之斧(당랑지부)라고도 한다.

齊(제)나라의 莊公(장공)이 사냥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벌레 한마리가 앞다리를 휘두르며 장공이 탄 수레에 덤벼 들었다.

『그놈 기세 한 번 대단하군. 도대체 저것이 무슨 벌레냐』

마부가 대답했다.

『사마귀라는 벌레입니다. 저놈은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은 모르는 놈입니다. 자기 힘은 생각지도 않고 오직 적에게 덤벼들기만 한답니다』

장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벌레가 만약 인간이었다면 분명 천하에 비할 바 없는 용사가 되었을 것이다』

장공은 사마귀가 다치지 않게 수레를 돌려 피하여 가게 했다.

당랑거철이란 말은 「莊子(장자)」에도 나온다.

『사마귀는 앞다리를 벌리고 수레바퀴에 대들면서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자기 능력을 과신하기 때문이다.이런 것은 경계하고 삼가야 할 일이다』

單刀直入 (단도직입)

單刀直入(단도직입)

한 자루의 칼만 들고 들어간다. 긴 말을 늘어놓지 않고 바로 본론에 들어간다

當同伐異 (당동벌이)

當同伐異(당동벌이)

當 마땅 당 | 同 한가지 동 | 伐 칠 벌 | 異 다를 이

옳고 그름의 여하간에 한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무리의 사람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을 이르는 말.

《후한서(後漢書)》 당동전(黨同傳)에서 비롯된 말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룩한 이래 중국의 권력은 오직 황제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자연히 황제를 둘러싼 친위 집단이 권력을 농단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을 이룬 것이 환관과 외척 세력이었다. 또 한(漢)나라 때에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유학을 공부한 선비 집단이 성장하였다. 그런데 왕망(王莽)이 제위를 찬탈하자 선비들은 초야로 피해 청의(淸議)를 일삼고, 자연스럽게 명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하는 무리들이 모였다. 이를 당인(黨人)이라 한다.

후한 때에는 화제(和帝) 이후 역대 황제가 모두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래서 황태후가 섭정이 되고, 이 과정에서 황태후의 친인척인 외척들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후일 장성한 황제는 이들의 전횡을 탐탁치 않게 여겨 자신의 친위 세력을 키우고 이들을 제거해 나가는데, 그 중심이 된 세력이 바로 환관이었다.

환관들은 신분 상승의 욕구 때문에 스스로 거세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집단의 결속력이 유달리 강하고, 사회적 책임이나 정치적 경륜보다는 자신들의 이해에 민감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권력을 쥐면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게 마련이었다. 유교적 교양을 쌓은 예비 관료 집단인 선비들이 환관의 농단으로 국정이 문란하고 풍속이 타락해 가는 것을 방관만 하고 있을 리 없었다.

이들도 명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모여 전국적으로 방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비 집단과 외척, 환관 세력이 서로 물고 물리는 정권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옳고 그름을 떠나 다른 집단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은 예상되는 일이었다. 이를 가리키는 말이 당동벌이이다.

좁게는 당고(黨錮)의 옥(獄) 이후 이응(李膺)을 중심으로 한 당인들이 유교적 지식 계급 이외의 세력을 적대시하던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전한은 외척이 망쳤고, 후한은 환관이 망쳤다고 한다. 후한 말에 이르러 환관들은 외척과 선비 집단을 철저히 탄압하고, 그 결과로 지식인 관료 집단인 선비 집단이 황실을 버림으로써 후한이 자멸하게 되었다.

多讀多作多商量 (다독다작다상량, duōdúduōzuòduōshāngliang)

多讀多作多商量(다독다작다상량)

多读多作多商量(duōdú duōzuò duōshāngliang)

多 많을 다 | 讀 읽을 독,구절 두 | 多 많을 다 | 作 지을 작 | 多 많을 다 | 商 상의할 상 | 量 헤아릴 량 |


三多(sānduō). 많이 보고[看], 많이 지으며[做], 많이 생각한다[商量]는 뜻으로, 중국(中國)의 구양수(歐陽脩)가 글을 잘 짓는 비결(秘訣)로서 이른 말.

永叔謂為文有三多:看多、做多、商量多也。(後山詩話, 宋 陳師道著)

「三多」與「三上」:歐陽脩說:「為文有三多:看多、做多、商量多也。」意思是:多看書,學習別人的寫作經驗;多練習寫作,在寫作中提升能力;多與別人商量、研究,虛心求教,努力把文章寫得完美。又說:「余平生所作文章,多在『三上』:乃馬上、枕上、廁上也。」意思是:他常常利用外出的路程上、就寢前以及上廁所的時候,把握時間構思文章。

후대에 오며, 많이 읽고[讀], 많이 지으며[作], 많이 생각한다는 말로 바뀌었다. 또한, 혹자는 多聞多讀多想量(다문다독다상량) 또는 多聞多讀多商量(다문다독다상량)이라고도 한다.


참조 한자어

多聞多讀多想量(다문다독다상량) | 多聞多讀多商量(다문다독다상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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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山詩話 | 歐陽修(구양수) | 歐陽永叔(구양영숙) |

膽大心小 (담대심소)

膽大心小(담대심소)

담력은 크게 가지되 마음은 작게 한다

多多益善 (다다익선)

多多益善(다다익선)

多多益善[duōduōyìshàn]

多 많을 다 | 多 많을 다 | 益 더할 익, 넘칠 일 | 善 착할 선 |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The more, the better.


사기(史記) 회음후(淮陰侯)열전에는 한신(韓信)에 관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진(秦)나라 말기, 전국 각지에서 진나라에 반항하는 세력들이 봉기하였다. 한신은 먼저 항우(項羽)의 휘하로 들어갔으나 중용(重用)되지 못하자, 다시 유방(劉邦)의 휘하로 옮겼다.

한고조 유방은 宿敵(숙적)인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를 통일하자 지금까지 자기를 위해 몸바쳐 일해 온 사람들이 모두 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韓信(한신)을 누구보다도 강력한 라이벌로 여겼고 자기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방은 論功行賞(논공행상)에서 楚王(초왕)으로 봉했던 한신을 전에 항우의 부하였던 종리매를 숨겨주었다는 구실로 왕위를 박탈하고 淮陰侯(회음후)로 좌천시켜 도읍에 있게 했다.

어느 날 고조는 한신과 여러 장군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고조가 말했다.

『그런데 짐은 대체 어느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감으로 보이나』
『글쎄요, 폐하께서는 한 십만명쯤은 거느리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 그럼 그대는 얼마나 거느릴 수 있겠는가』
『저는 다다익선으로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臣多多而益善耳]』

한신의 대답에 고조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그대가 어찌하여 짐의 밑에 있단 말인가』

한신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폐하께서는 군사의 장수는 되실 수 없어도 장수의 장수는 되실 수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신이 폐하를 받들게 된 것입니다』


출전

사기(史記)의 회음후전(淮陰侯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多多益辦(다다익판) |

斷機之戒 (단기지계)

斷機之戒(단기지계)

면학에의 훈계.

多岐亡羊 (다기망양)

多岐亡羊(다기망양)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뜻으로, ①학문(學問)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 진리(眞理)를 찾기 어려움 ②방침(方針)이 많아 할 바를 모르게 됨. 곧 본 뜻이나 목적을 망각하고 지엽적이고 단편적인 것에 집착하게 되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思想家)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했던 양자(楊子)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어느날, 양자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도망쳤다. 이웃집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양자의 집 하인들까지 총동원되어 양을 찾으러 나섰다. 이런 소동을 보고 양자가 물었다.

"양 한 마리를 찾는데 쫓아가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가?"
"워낙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모두들 기진맥진해 돌아와서 말했다.

"갈림길을 지나면 또 갈림길이어서 양이 어느 길로 도망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양은 찾았느냐?" "갈림길이 하도 많아서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양을 못 찾았단 말이냐?"

"예, 갈림길에 또 갈림길이 있는지라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양자는 우울한 얼굴로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제자인 맹손양(孟孫陽)은 스승의 고민을 알지 못하고 선배 제자인 심도자(心都子)에게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었다.

심도자의 대답은 이랬다.

"큰 길은 갈림길이 많아서 양을 놓쳐 버리고(多岐亡羊) 학문하는 사람은 방법이 많기 때문에 본성을 잃고 마네. 학문이란 원래 근본은 하나였는데 그 끝은 이같이 달라지게 되네. 그러므로 하나인 근본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는 게 선생님의 생각이시네. 그런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라네."

근본을 도외시(度外視)하고 지엽적인 것에 몰두하게 되면 아무런 소득이 없거나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유래: 列子(열자)


관련 한자어

유의어

望洋之歎(망양지탄) |


列子(열자) |

斷金之契 (단금지계)

斷金之契(단금지계)

극히 친밀한 우정(友情)

斷金之交 (단금지교)

斷金之交(단금지교)

친구 사이의 사귀는 정이 두텁고 깊은 것.

堂狗三年吠風月 (당구삼년폐풍월)

堂狗三年吠風月(당구삼년폐풍월)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

☞ 堂狗風月(당구풍월)

堂狗風月 (당구풍월)

堂狗風月(당구풍월)

서당 개 삼년에 풍월한다.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그 부문에 함께 끼여 오래 있으면 어느덧 영향을 입어 다소나마 알게 된다는 뜻

☞ 堂狗三年吠風月(당구삼년폐풍월)

多難興邦 (다난흥방)

多難興邦(다난흥방)

多 많을 다 | 難 어려울 난 | 興 일어날 흥 | 邦 나라 방 |

어려운 일을 많이 겪고나서 나라를 부흥하게 한다는 뜻.


많은 어려운 일을 겪고서야 나라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러모로 노력해야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 진(晉)나라 무제(武帝:재위 265∼290)의 아들인 혜제(惠帝:재위 290∼306) 때 진나라는 '팔왕(八王)의 난' 등으로 혼란하였다. 이 시기를 틈타 진나라의 지배를 받은 북방 민족들이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고 쳐들어와 회제(懷帝)와 민제(愍帝)가 살해되고, 진나라는 중원에서 양쯔강[揚子江] 이남으로 나라를 옮겨 동진(東晉)이라고 불렀다.

조적(祖逖)과 유곤(劉琨)을 비롯한 장군들은 군사를 이끌고 북방지역 정벌을 하였으며, 좌승상 사마 예(司馬睿)에게 《권진표(勸進表)》를 올리고 제위를 계승하여 나라 일을 맡도록 청하였다. 다음의 《권진표》 가운데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한 성어(成語)이다.

"많은 재난이나 어려움은 우리에게 나라를 부흥시키고 공고히하도록 격려해주며, 깊은 근심은 황제로 하여금 정세를 정확하게 보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해준다[或多難以固邦國 或殷憂以啓聖明]."

그뒤 사마 예는 동진의 제1대 황제인 원제(元帝:재위 317∼322)로 즉위하였으며 북벌을 결정하지 못하고 조적과 유곤을 의심하여 유곤을 살해하자, 조적은 그 울분으로 죽었다. 동진은 317년 건업(建業:南京)을 국도로 진왕조를 재건한 뒤 공제(恭帝) 때인 419년에 유유(劉裕)에게 멸망하였다.

이와 같이 수많은 고난이 사람들에게 나라를 부흥시킬 수 있도록 격려한다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