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獻通考(문헌통고) 馬端臨(마단림)
중국(中國) 송(宋)나라 때의 법제. 경제(經濟) 등(等) 모든 제도(制度)에 관(關)한 기록(記錄). 두우(杜宇)의 『통전(通典)』을 기초(基礎)로 하여 이를 증보(增補)한 것으로 원(元)나라의 마단림(馬端臨)이 편찬(編纂)함. 중국(中國)의 제도(制度) 연구(硏究) 상(上) 필요(必要)한 책이며, 우리나라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편찬(編纂)은 이 책을 참고(參考)했음. 348권
348권. 높은 정치가의 견식과 역사가의 정신으로 전후 20년에 걸쳐 완성하여 1319년에 간행하였다. 당(唐)나라의 두우(杜佑) 저작인 《통전(通典)》, 송나라의 정초(鄭樵) 저작인 《통지(通志)》와 아울러 3통(三通)이라 불린다. 3통의 특징은, 《통전》은 예(禮)에 자세하고, 《통지》는 기전(紀傳)이 대부분이지만, 본서는 주로 경제 ·제도에 대해 기술하였다. 또, 앞의 둘이 당대까지의 기술인 데 대하여 본서는 남송의 영종(寧宗:재위 1194∼1224)대까지 기술하여 당 ·송의 변혁기를 포함하고 있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체제는 전부(田賦) ·전폐(錢幣) ·호구(戶口) ·직역(職役) ·정각(征榷) ·시적(市糴) ·토공(土貢) ·국용(國用)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 ·교사(郊社) ·종묘(宗廟) ·왕례(王禮) ·악(樂) ·병(兵) ·형(刑) ·경적(經籍) ·제계(帝系) ·봉건(封建) ·상위(象緯) ·물이(物異) ·여지(輿地) ·사예(四裔) 등 24항목으로 되어 있다.
無中生有 (무중생유)
無中生有(무중생유)
无中生有(wúzhōngshēngyǒu)
無 없을 무 | 中 가운데 중 | 生 날 생 | 有 있을 유
三十六計 敵戰計 第七計. 無에서 有를 창조하다. 본래 없던 일을 있다고 말하다. 없는 사실을 날조하다. 터무니없이 꾸며 대다.
'敵戰計(적전계)'의 敵은 '원수 적'이지만, '짝 적'으로도 해석된다. 즉 '필적하다'는 의미이며, '견줄만하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敵戰計'란 적과 병력이 비슷할 때 사용하는 계략을 뜻한다. 하지만 단순히 적과 병력이 비슷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사용하는 계략은 아니다. 적과 병력이 비슷해서 '어느 쪽도 섣불리 움직이기 힘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용되는 계략이 '敵戰計'인 것이다.
無에서 有를 창조하다. 원문의 풀이글은 다음과 같다.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속이는 것만은 아니다. 그 속이는 바를 실속있게 만드는 것이다. 無에서 有로, 虛에서 實로의 전환이 필요하다.[誑也,非誑也,實其所誑也.少陰,太陰,太陽.]"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三國志演義의 적벽대전. 그 적벽대전 직전의 吳의 대도독 주유는 후에 화근이 될 제갈량을 죽이고자 여러차례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제갈량을 죽여야한다는 주유의 결심은 확고해져 갔다. 그러다가 군사회의에서 주유가 제갈량에게 물었다.
"며칠 내에 조조와 싸우게 될 듯 싶소. 강에서 싸우자면 무슨 무기가 필요하겠소?"
"큰 강 위에서는 활과 화살이 주가 되어야겠지요."
"내 생각이 선생의 생각과 같소. 그러나 우리 군중에는 바로 그 화살이 부족하오. 수고스럽지만 선생께서 화살 10만개만 만들어 주시지 않겠소? 이것은 公的인일이니 거절하지 말아주시오."
"도독께서 부탁하시니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화살 10만개는 언제 쓰시려 하십니까?"
"열흘 안에 만들어 주실수 있겠소?"
"조조의 군사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열흘이나 허비하다가는 큰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그러면 며칠이나 걸릴 것 같소이까?"
"사흘이면 화살 10만개는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軍中(군중)에는 戱言(희언:농담)이 있을 수 없소!"
"어찌 감히 농담을 하겠습니까? 사흘 안에 화살 10만개를 조달하지 못하면 중벌을 받겠다는 軍令狀(군령장)이라도 써 드리겠소."
주유는 대단히 제갈량이 스스로 함정에 빠졌다며 대단히 기뻐했다. 제갈량이 사흘 안에 화살 10만개를 만들지 못하면 군령을 어긴 죄로 죽여버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노숙에게 일의 처리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노숙은 명령을 받고는 제갈량에게 갔다. 제갈량이 노숙에게 말했다.
"내가 자경(노숙)에게 누차 말하지 않았소? 공근(주유)에게 말하면 그가 반드시 나를 해치려 할 것이니 말하지 말라고. 그 덕에 내가 공경에 빠지게 되었으니, 자경이 나를 구해주어야겠소."
"공이 스스로 화를 불렀는데, 내가 어찌 구해드릴 수가 있겠소?"
"자경은 나에게 배 스무척만 빌려주시기 바라오. 배마다 30명의 군사가 있어야 하오. 배는 푸른 장막으로 둘러치고 그 속에 짚단 1천여단을 배 양쪽으로 나누어 쌓아 주오. 나에게 쓸 곳이 있소. 그러나 공근에게 또 알려서는 아니되오."
노숙은 그 뜻은 알 수 없었으나,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주유에게 제갈량은 대나무, 새깃, 아교(화살을 만드는 재료들)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약속한 배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주유는 의아해하며 어쨌거나 사흘 동안 기다려 보기로 했다.
노숙은 쾌속선 20척을 선발하여 제갈량이 말한대로 준비를 해두고 제갈량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첫째날, 제갈량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둘째날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 제갈량은 노숙을 찾았다.
"이제 화살을 가지러 갑시다."
"어디 가서 가져온다는 것이오?"
"물어볼 것 없이 가보면 아시게 될게요."
제갈량은 즉시 배를 긴 밧줄로 연결하게 한 다음 북쪽을 향해 이동했다. 이 날의 장강은 안개가 짙게 끼어 눈 앞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새벽 오경 무렵이 되자 배들은 조조의 수상영채 가까이 접근하게 되었다. 제갈량은 뱃머리를 서쪽으로 향하게 하고 배꼬리가 동쪽으로 향하게 하여 배를 한 줄로 늘어세웠다. 그리고 배 위에서 병사들에게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라 명했다. 노숙이 깜짝 놀랐다.
"조조의 병사들이 공격해 오면 어찌합니까?"
"공은 아무 걱정 말고, 나하고 술이나 드십시다."
한편 보고를 받은 조조는 이렇게 명령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쳐들어 온 것을 보면 반드시 매복이 있을 것이다. 절대로 가벼이 나가지 말고, 수군 궁노수를 동원하여 난전을 쏘도록 하라. 그리고 장료와 서황의 육상 궁노군 3천명씩을 대동하여 강변으로 나와 화살을 쏘아 돕도록 하라."
이리하여 조조의 궁노수 대략 1만여명이 강을 향해 화살을 쏘아 댔다. 화살은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제갈량은 이번에는 뱃머리와 배꼬리의 방향을 바꾼후 한층 더 힘차게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게 했다. 화살은 더욱 빗발치듯 쏟아졌다.
해가 높아져 안개가 걷힐 즈음 제갈량은 재빨리 배를 거두어 돌아가자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배의 모든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치게 했다.
"승상! 화살 고맙게 잘 쓰겠소!"
노숙이 가져온 쾌속선은 워낙에 빨라, 조조의 수군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제갈량이 노숙에게 말했다.
"배마다 5~6천개의 화살이 꽂혀있을 것이오.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10만개의 화살을 얻었소. 내일이라도 바로 조조의 병사들에게 쏘아 돌려줘도 될 것이오."
"선생은 참으로 神人(신인)이시오. 오늘 이렇게 짙은 안개가 낄 줄 아셨소이까?"
"장수가 되어 천문을 알지 못하고, 지리를 알지 못하고, 기문을 알지 못하고, 음양을 알지 못하고, 진도를 볼 줄 모르고, 병세에 밝지 못하다면 이는 용렬한 사람이오. 나는 이미 사흘 전에 오늘 짙은 안개가 낄 줄 알고 말미를 사흘로 잡은 것이오. 공근은 화살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나를 죽이려 했겠지만, 내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어찌 공근이 나를 죽일 수 있겠소?"
노숙은 가슴 깊이 감복했다. 돌아가자 노숙은 주유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그러자 주유는 크게 놀라 개연히 탄식했다.
"공명은 지략이 귀신 같소이다. 나는 따라가지 못하겠소."
관련 한자어
유의어
捕风捉影(bǔfēngzhuōyǐng): 말이나 일이 전혀 근거가 없다.
捕 사로잡을 포 | 风 바람 풍 | 捉 잡을 착 | 影 그림자 영 |
无中生有(wúzhōngshēngyǒu)
無 없을 무 | 中 가운데 중 | 生 날 생 | 有 있을 유
三十六計 敵戰計 第七計. 無에서 有를 창조하다. 본래 없던 일을 있다고 말하다. 없는 사실을 날조하다. 터무니없이 꾸며 대다.
'敵戰計(적전계)'의 敵은 '원수 적'이지만, '짝 적'으로도 해석된다. 즉 '필적하다'는 의미이며, '견줄만하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敵戰計'란 적과 병력이 비슷할 때 사용하는 계략을 뜻한다. 하지만 단순히 적과 병력이 비슷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사용하는 계략은 아니다. 적과 병력이 비슷해서 '어느 쪽도 섣불리 움직이기 힘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용되는 계략이 '敵戰計'인 것이다.
無에서 有를 창조하다. 원문의 풀이글은 다음과 같다.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속이는 것만은 아니다. 그 속이는 바를 실속있게 만드는 것이다. 無에서 有로, 虛에서 實로의 전환이 필요하다.[誑也,非誑也,實其所誑也.少陰,太陰,太陽.]"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三國志演義의 적벽대전. 그 적벽대전 직전의 吳의 대도독 주유는 후에 화근이 될 제갈량을 죽이고자 여러차례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제갈량을 죽여야한다는 주유의 결심은 확고해져 갔다. 그러다가 군사회의에서 주유가 제갈량에게 물었다.
"며칠 내에 조조와 싸우게 될 듯 싶소. 강에서 싸우자면 무슨 무기가 필요하겠소?"
"큰 강 위에서는 활과 화살이 주가 되어야겠지요."
"내 생각이 선생의 생각과 같소. 그러나 우리 군중에는 바로 그 화살이 부족하오. 수고스럽지만 선생께서 화살 10만개만 만들어 주시지 않겠소? 이것은 公的인일이니 거절하지 말아주시오."
"도독께서 부탁하시니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화살 10만개는 언제 쓰시려 하십니까?"
"열흘 안에 만들어 주실수 있겠소?"
"조조의 군사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열흘이나 허비하다가는 큰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그러면 며칠이나 걸릴 것 같소이까?"
"사흘이면 화살 10만개는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軍中(군중)에는 戱言(희언:농담)이 있을 수 없소!"
"어찌 감히 농담을 하겠습니까? 사흘 안에 화살 10만개를 조달하지 못하면 중벌을 받겠다는 軍令狀(군령장)이라도 써 드리겠소."
주유는 대단히 제갈량이 스스로 함정에 빠졌다며 대단히 기뻐했다. 제갈량이 사흘 안에 화살 10만개를 만들지 못하면 군령을 어긴 죄로 죽여버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노숙에게 일의 처리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노숙은 명령을 받고는 제갈량에게 갔다. 제갈량이 노숙에게 말했다.
"내가 자경(노숙)에게 누차 말하지 않았소? 공근(주유)에게 말하면 그가 반드시 나를 해치려 할 것이니 말하지 말라고. 그 덕에 내가 공경에 빠지게 되었으니, 자경이 나를 구해주어야겠소."
"공이 스스로 화를 불렀는데, 내가 어찌 구해드릴 수가 있겠소?"
"자경은 나에게 배 스무척만 빌려주시기 바라오. 배마다 30명의 군사가 있어야 하오. 배는 푸른 장막으로 둘러치고 그 속에 짚단 1천여단을 배 양쪽으로 나누어 쌓아 주오. 나에게 쓸 곳이 있소. 그러나 공근에게 또 알려서는 아니되오."
노숙은 그 뜻은 알 수 없었으나,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주유에게 제갈량은 대나무, 새깃, 아교(화살을 만드는 재료들)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약속한 배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주유는 의아해하며 어쨌거나 사흘 동안 기다려 보기로 했다.
노숙은 쾌속선 20척을 선발하여 제갈량이 말한대로 준비를 해두고 제갈량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첫째날, 제갈량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둘째날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 제갈량은 노숙을 찾았다.
"이제 화살을 가지러 갑시다."
"어디 가서 가져온다는 것이오?"
"물어볼 것 없이 가보면 아시게 될게요."
제갈량은 즉시 배를 긴 밧줄로 연결하게 한 다음 북쪽을 향해 이동했다. 이 날의 장강은 안개가 짙게 끼어 눈 앞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새벽 오경 무렵이 되자 배들은 조조의 수상영채 가까이 접근하게 되었다. 제갈량은 뱃머리를 서쪽으로 향하게 하고 배꼬리가 동쪽으로 향하게 하여 배를 한 줄로 늘어세웠다. 그리고 배 위에서 병사들에게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라 명했다. 노숙이 깜짝 놀랐다.
"조조의 병사들이 공격해 오면 어찌합니까?"
"공은 아무 걱정 말고, 나하고 술이나 드십시다."
한편 보고를 받은 조조는 이렇게 명령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쳐들어 온 것을 보면 반드시 매복이 있을 것이다. 절대로 가벼이 나가지 말고, 수군 궁노수를 동원하여 난전을 쏘도록 하라. 그리고 장료와 서황의 육상 궁노군 3천명씩을 대동하여 강변으로 나와 화살을 쏘아 돕도록 하라."
이리하여 조조의 궁노수 대략 1만여명이 강을 향해 화살을 쏘아 댔다. 화살은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제갈량은 이번에는 뱃머리와 배꼬리의 방향을 바꾼후 한층 더 힘차게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게 했다. 화살은 더욱 빗발치듯 쏟아졌다.
해가 높아져 안개가 걷힐 즈음 제갈량은 재빨리 배를 거두어 돌아가자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배의 모든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치게 했다.
"승상! 화살 고맙게 잘 쓰겠소!"
노숙이 가져온 쾌속선은 워낙에 빨라, 조조의 수군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제갈량이 노숙에게 말했다.
"배마다 5~6천개의 화살이 꽂혀있을 것이오.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10만개의 화살을 얻었소. 내일이라도 바로 조조의 병사들에게 쏘아 돌려줘도 될 것이오."
"선생은 참으로 神人(신인)이시오. 오늘 이렇게 짙은 안개가 낄 줄 아셨소이까?"
"장수가 되어 천문을 알지 못하고, 지리를 알지 못하고, 기문을 알지 못하고, 음양을 알지 못하고, 진도를 볼 줄 모르고, 병세에 밝지 못하다면 이는 용렬한 사람이오. 나는 이미 사흘 전에 오늘 짙은 안개가 낄 줄 알고 말미를 사흘로 잡은 것이오. 공근은 화살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나를 죽이려 했겠지만, 내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어찌 공근이 나를 죽일 수 있겠소?"
노숙은 가슴 깊이 감복했다. 돌아가자 노숙은 주유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그러자 주유는 크게 놀라 개연히 탄식했다.
"공명은 지략이 귀신 같소이다. 나는 따라가지 못하겠소."
관련 한자어
유의어
捕风捉影(bǔfēngzhuōyǐng): 말이나 일이 전혀 근거가 없다.
捕 사로잡을 포 | 风 바람 풍 | 捉 잡을 착 | 影 그림자 영 |
門前雀羅 (문전작라)
門前雀羅(문전작라)
門 문 문 | 前 앞 전, 자를 전 | 雀 참새 작 | 羅 벌일 라(나), 새그물 라(나) |
문 밖에 새 그물을 쳐놓을 만큼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짐을 뜻하는 말. 몰락한 사람 집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어져 한가한 것을 비유.
漢(한)나라 무제(武帝) 때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라는 충신이 있었다.
급암은 의협심이 강하고 성품이 대쪽 같아서 황제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다 하는 편이었다. 동료 대신들이 그 점을 나무라면, 급암은 이렇게 반박했다.
“폐하께서 이 사람이나 공들 같은 신하를 두심은 올바른 보필로 나라를 부강케 하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시고자 함인데, 누구나 듣기 좋은 말만 하여 성총(聖聰)이 흐려지기라도 한다면 그보다 더한 불충이 어디 있겠소? 그만한 지위에 있으면 설령 자기 한 몸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폐하를 욕되게 하진 말아야 할 것이오.”
그런 반면 정당시는 후덕하고 겸손하며 청렴한 인물이었다. 자기를 찾아온 손님은 문밖에서 기다리는 일이 없게 하고, 벼슬아치의 사명감으로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며, 봉록과 하사품을 받으면 손님이나 아랫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둘다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던 만큼 어질고 의협심이 강한 선비들을 좋아했다. 그들은 장관격인 九卿(구경)의 지위까지 오른 적도 있지만 너무 개성이 강한 탓에 경계의 대상이 되어 벼슬자리의 浮沈(부침)이 많았다.
급암은 한때 무제의 미움을 사 면직되기도 했고 정당시는 庶民(서민)으로 내려앉기도 했다.두 사람은 찾아오는 손님들을 극진히 맞았다. 정당시는 밑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손님이 왔을 때는 그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문전에서 기다리게 해서는 안된다. 예를 갖추어 따뜻하게 접대해야 한다.
이랬기 때문에 그들이 현직에 있을 때에는 찾아오는 손님들로 문앞이 저자를 이루었으나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있자 방문객들의 발길은 뚝 끊어졌다.
사기(史記)를 쓴 司馬遷(사마천)은 그들의 이야기를 쓴 뒤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급암과 정당시 같은 훌륭한 사람도 세력이 있으면 손님이 10배로 늘어나고 세력이 없어지면 그렇지 않았다.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翟公(적공)이란 사람도 正尉(정위)벼슬을 하자 손님이 문에 가득찼다. 그러나 면직을 당하자 문밖에 참새그물을 쳐놓을 만큼[門外可設雀羅] 사람들의 출입이 없어졌다. 적공이 다시 정위가 되자 손님이 줄을 이었다. 그래서 적공은 문앞에 이런 글을 써붙였다.
一死一生 卽知交情 (일사일생 즉지교정)
一貧一富 卽知交態 (일빈일부 즉지교태)
一貴一賤 卽見交情 (일귀일천 즉현교정)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곧 사귐의 정을 알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에 곧 사귐의 태도를 알며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곧 사귐의 정이 나타나네
門前雀羅란 문 앞의 참새 그물이라는 뜻으로 門可雀羅(문가작라)라고도 한다.
출전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門可雀羅(문가작라) | 門外可設雀羅(문외가설작라) | 門前雀羅(문전작라) |
동의어·유의어
門前成市(문전성시) | 門庭若市(문정약시) |
門 문 문 | 前 앞 전, 자를 전 | 雀 참새 작 | 羅 벌일 라(나), 새그물 라(나) |
문 밖에 새 그물을 쳐놓을 만큼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짐을 뜻하는 말. 몰락한 사람 집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어져 한가한 것을 비유.
漢(한)나라 무제(武帝) 때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라는 충신이 있었다.
급암은 의협심이 강하고 성품이 대쪽 같아서 황제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다 하는 편이었다. 동료 대신들이 그 점을 나무라면, 급암은 이렇게 반박했다.
“폐하께서 이 사람이나 공들 같은 신하를 두심은 올바른 보필로 나라를 부강케 하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시고자 함인데, 누구나 듣기 좋은 말만 하여 성총(聖聰)이 흐려지기라도 한다면 그보다 더한 불충이 어디 있겠소? 그만한 지위에 있으면 설령 자기 한 몸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폐하를 욕되게 하진 말아야 할 것이오.”
그런 반면 정당시는 후덕하고 겸손하며 청렴한 인물이었다. 자기를 찾아온 손님은 문밖에서 기다리는 일이 없게 하고, 벼슬아치의 사명감으로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며, 봉록과 하사품을 받으면 손님이나 아랫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둘다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던 만큼 어질고 의협심이 강한 선비들을 좋아했다. 그들은 장관격인 九卿(구경)의 지위까지 오른 적도 있지만 너무 개성이 강한 탓에 경계의 대상이 되어 벼슬자리의 浮沈(부침)이 많았다.
급암은 한때 무제의 미움을 사 면직되기도 했고 정당시는 庶民(서민)으로 내려앉기도 했다.두 사람은 찾아오는 손님들을 극진히 맞았다. 정당시는 밑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손님이 왔을 때는 그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문전에서 기다리게 해서는 안된다. 예를 갖추어 따뜻하게 접대해야 한다.
이랬기 때문에 그들이 현직에 있을 때에는 찾아오는 손님들로 문앞이 저자를 이루었으나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있자 방문객들의 발길은 뚝 끊어졌다.
사기(史記)를 쓴 司馬遷(사마천)은 그들의 이야기를 쓴 뒤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급암과 정당시 같은 훌륭한 사람도 세력이 있으면 손님이 10배로 늘어나고 세력이 없어지면 그렇지 않았다.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翟公(적공)이란 사람도 正尉(정위)벼슬을 하자 손님이 문에 가득찼다. 그러나 면직을 당하자 문밖에 참새그물을 쳐놓을 만큼[門外可設雀羅] 사람들의 출입이 없어졌다. 적공이 다시 정위가 되자 손님이 줄을 이었다. 그래서 적공은 문앞에 이런 글을 써붙였다.
一死一生 卽知交情 (일사일생 즉지교정)
一貧一富 卽知交態 (일빈일부 즉지교태)
一貴一賤 卽見交情 (일귀일천 즉현교정)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곧 사귐의 정을 알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에 곧 사귐의 태도를 알며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곧 사귐의 정이 나타나네
門前雀羅란 문 앞의 참새 그물이라는 뜻으로 門可雀羅(문가작라)라고도 한다.
출전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門可雀羅(문가작라) | 門外可設雀羅(문외가설작라) | 門前雀羅(문전작라) |
동의어·유의어
門前成市(문전성시) | 門庭若市(문정약시) |
問鼎之大小輕重焉 (문정지대소경중언)
問鼎之大小輕重焉(문정지대소경중언)
솥의 무게를 묻는다는 말로 어떤 직위에 있는 인물의 자격을 묻고 퇴임을 압박한다는 말. 줄여서 문정(問鼎) 또는 문정경중(問鼎輕重)이라고도 함.
솥의 무게를 묻는다는 말로 어떤 직위에 있는 인물의 자격을 묻고 퇴임을 압박한다는 말. 줄여서 문정(問鼎) 또는 문정경중(問鼎輕重)이라고도 함.
門前成市 (문전성시)
門前成市(문전성시)
권세 있는 집 문 앞에 찾아오는 손이 많아 마치 시장을 이룬 것 같음
권세 있는 집 문 앞에 찾아오는 손이 많아 마치 시장을 이룬 것 같음
物以類聚 (물이유취, wùyǐlèijù)
物以類聚(물이유취)
物以类聚(wùyǐlèijù)
物 만물 물 | 以 써 이 | 類 같을 류 | 聚 모일 취 |
'물건은 종류대로 모인다'라는 뜻의 고사성어로, 《주역》과 《전국책》 등에서 유래하였다. 끼리끼리 어울리다, 유유상종하다, 나쁜 사람들이 의기투합하여 한데 어울리다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유유상종과 같은 뜻으로, 우리말의 '끼리끼리 모인다'와 같은 표현이다. 인이군분(人以群分:사람은 같은 무리끼리 모인다)과 연결하여 '물이유취 인이군분'이라고 쓰이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주로 좋지 않은 사람들이 한 부류로 모인 것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주역》〈계사(繫辭)〉편의 "삼라만상은 같은 종류끼리 모이고, 만물은 무리를 지어 나누어지니, 이로부터 길함과 흉함이 생긴다(方以類聚, 物以群分, 吉凶生矣)"라는 구절에서 유래되었다.
《전국책》의 〈제책(齊策)〉편에 따르면, 전국시대 제나라의 순우곤(淳于髡)은 왕이 인재를 구한다는 말을 듣고는 하루에 7명이나 천거하였다. 왕이 순우곤에게 인재는 구하기 어려운 법인데 하루에 7명이나 천거한 것은 너무 많지 않냐고 말했다. 이에 순우곤은 물건은 각기 비슷한 부류가 있으며(物各有疇), 자신도 인재의 부류에 속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인재를 추천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또 《주역》〈문언(文言)〉편에는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은 위와 친하고, 땅에 근본을 둔 것은 아래와 친하니, 이는 각자가 그 비슷한 것을 좇기 때문이다(本乎天者親上, 本乎地者親下, 則各從其類也)"라는 구절이 있다. 물각유주(物各有疇)나 물각유류(物各有類), 방이유취(方以類聚), 물이군분(物以群分), 각종기류(各從其類)는 모두 같은 의미이며, 물이유취로 많이 쓰인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類類相從(유유상종) | 物各有疇(물각유주) | 物各有類(물각유류) | 方以類聚(방이유취) | 物以群分(물이군분) | 各從其類(각종기류) | 草綠同色(초록동색) |
周易(주역) | 전국책 | 끼리끼리 |
物以类聚(wùyǐlèijù)
物 만물 물 | 以 써 이 | 類 같을 류 | 聚 모일 취 |
'물건은 종류대로 모인다'라는 뜻의 고사성어로, 《주역》과 《전국책》 등에서 유래하였다. 끼리끼리 어울리다, 유유상종하다, 나쁜 사람들이 의기투합하여 한데 어울리다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유유상종과 같은 뜻으로, 우리말의 '끼리끼리 모인다'와 같은 표현이다. 인이군분(人以群分:사람은 같은 무리끼리 모인다)과 연결하여 '물이유취 인이군분'이라고 쓰이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주로 좋지 않은 사람들이 한 부류로 모인 것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주역》〈계사(繫辭)〉편의 "삼라만상은 같은 종류끼리 모이고, 만물은 무리를 지어 나누어지니, 이로부터 길함과 흉함이 생긴다(方以類聚, 物以群分, 吉凶生矣)"라는 구절에서 유래되었다.
《전국책》의 〈제책(齊策)〉편에 따르면, 전국시대 제나라의 순우곤(淳于髡)은 왕이 인재를 구한다는 말을 듣고는 하루에 7명이나 천거하였다. 왕이 순우곤에게 인재는 구하기 어려운 법인데 하루에 7명이나 천거한 것은 너무 많지 않냐고 말했다. 이에 순우곤은 물건은 각기 비슷한 부류가 있으며(物各有疇), 자신도 인재의 부류에 속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인재를 추천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또 《주역》〈문언(文言)〉편에는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은 위와 친하고, 땅에 근본을 둔 것은 아래와 친하니, 이는 각자가 그 비슷한 것을 좇기 때문이다(本乎天者親上, 本乎地者親下, 則各從其類也)"라는 구절이 있다. 물각유주(物各有疇)나 물각유류(物各有類), 방이유취(方以類聚), 물이군분(物以群分), 각종기류(各從其類)는 모두 같은 의미이며, 물이유취로 많이 쓰인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類類相從(유유상종) | 物各有疇(물각유주) | 物各有類(물각유류) | 方以類聚(방이유취) | 物以群分(물이군분) | 各從其類(각종기류) | 草綠同色(초록동색) |
周易(주역) | 전국책 | 끼리끼리 |
無忍不達 (무인부달)
無忍不達(무인부달)
無 없을 무 | 忍 참을 인 | 不 아닐 불, 아닐 부 | 達 통달할 달 |
참을성이 없으면 무엇이든지 달성 할 수 없다
無 없을 무 | 忍 참을 인 | 不 아닐 불, 아닐 부 | 達 통달할 달 |
참을성이 없으면 무엇이든지 달성 할 수 없다
無爲而治 (무위이치)
無爲而治(무위이치)
無 없을 무 | 爲 하 위/할 위 | 而 말 이을 이, 능히 능 | 治 다스릴 치, 강 이름 이 |
성인(聖人)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얻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을 이르는 말
출전
논어(論語)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無爲之治(무위지치) |
無 없을 무 | 爲 하 위/할 위 | 而 말 이을 이, 능히 능 | 治 다스릴 치, 강 이름 이 |
성인(聖人)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얻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을 이르는 말
출전
논어(論語)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無爲之治(무위지치) |
門前薄待 (문전박대)
門前薄待(문전박대)
門 문 문 | 前 앞 전, 자를 전 | 薄 엷을 박, 동자기둥 벽, 풀 이름 보 | 待 기다릴 대 |
인정(人情) 없이 몹시 모질게 대(待)함
refusal of admittance
출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門 문 문 | 前 앞 전, 자를 전 | 薄 엷을 박, 동자기둥 벽, 풀 이름 보 | 待 기다릴 대 |
인정(人情) 없이 몹시 모질게 대(待)함
refusal of admittance
출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門外漢 (문외한)
門外漢(문외한)
어떤 일에 직접 관계가 없는 테 밖의 사람. 그 일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
어떤 일에 직접 관계가 없는 테 밖의 사람. 그 일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
無信不立 (무신불립)
無信不立(무신불립)
無 없을 무 | 信 믿을 신 | 不 아닐 불 | 立 설 립 |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뜻으로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믿음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라는 뜻으로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자공(子貢)이 정치(政治)에 관해 묻자, 공자는 말했다.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그러자 공자는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나머지 두 가지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묻자 공자는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로부터 사람은 다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여기에서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삼국지(三國志)》에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로 북해(北海) 태수를 지낸 공융(孔融:153∼208)은 조조(曹操:155∼220)의 공격을 받은 서주(徐州) 자사 도겸(陶謙)을 구하기 위해 유비(劉備:161∼223)에게 공손찬(公孫瓚:?∼199)의 군사를 빌려서 도겸을 도와주게 하였다. 공융은 군사를 가지면 유비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비에게 신의를 잃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BC 552∼BC 479)의 말에 따라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성인은 '예부터 내려오면서 누구든지 죽지만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하였습니다. 저는 군대를 빌릴지라도 이곳으로 꼭 돌아올 것입니다"
이처럼 ‘무신불립(無信不立)’은 믿음과 의리가 없으면 개인이나 국가가 존립하기 어려우므로 신의를 지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無 없을 무 | 信 믿을 신 | 不 아닐 불 | 立 설 립 |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뜻으로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믿음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라는 뜻으로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자공(子貢)이 정치(政治)에 관해 묻자, 공자는 말했다.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그러자 공자는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나머지 두 가지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묻자 공자는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로부터 사람은 다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여기에서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삼국지(三國志)》에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로 북해(北海) 태수를 지낸 공융(孔融:153∼208)은 조조(曹操:155∼220)의 공격을 받은 서주(徐州) 자사 도겸(陶謙)을 구하기 위해 유비(劉備:161∼223)에게 공손찬(公孫瓚:?∼199)의 군사를 빌려서 도겸을 도와주게 하였다. 공융은 군사를 가지면 유비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비에게 신의를 잃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BC 552∼BC 479)의 말에 따라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성인은 '예부터 내려오면서 누구든지 죽지만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하였습니다. 저는 군대를 빌릴지라도 이곳으로 꼭 돌아올 것입니다"
이처럼 ‘무신불립(無信不立)’은 믿음과 의리가 없으면 개인이나 국가가 존립하기 어려우므로 신의를 지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文選 (문선) 蕭統 (소통)
文選(문선) 蕭統(소통, 501~531)
중국 양(梁)나라의 소통(蕭統:昭明太子)이 진(秦) ·한(漢)나라 이후 제(齊) ·양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책.
구분: 시문선집
저자: 소통(蕭統:昭明太子)
시대: 중국 양(梁)
30권. 여기에 실린 문장가는 130여 명으로, 이 중에는 무명작가의 고시(古詩)와 고악부(古樂府)도 포함되어 있다. 편차(編次)는 문체별로 부(賦) ·시(詩) ·소(騷) ·조(詔) ·책(策) ·표(表) ·서(序) ·논(論) ·제문(祭文) 등 39종으로 나누었다. 시는 443수이고, 부(賦) ·소(騷)에서 제문까지의 작품 317편을 수록하였는데, 그 중 부가 가장 많다. 소통은 자신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주로 침사(沈思) ·한조(翰藻)의 내용과 형식의 글을 취하였는데, 이는 그 자신의 문학관인 동시에 6조(六朝)시대 일반 학자들의 신조이기도 하였다.
《문선》은 수(隋)나라에 이르러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당(唐)나라에 들어와 성행하였다. 그 중에서 이선(李善)이 주(註)한 문선이 가장 유명하며, 그는 매권을 둘로 나누어 60권으로 하였다. 그 후 현종(玄宗) 개원(開元) 6년(718), 당시의 공부시랑(工部侍郞) 여연조(呂延祚)가 여연제(呂延濟) ·유량(劉良) ·장선(張銑) ·여향(呂向) ·이주한(李周翰) 등 5명을 모아 주를 달게 한 것이 이른바 《5신주(五臣註)》이고, 거기에 이선의 주를 합하여 《6신주문선(六臣註文選)》이라고 한다.
송(宋)나라의 대중상부(大中祥府) 9년(1016), 처음으로 문선이 교각(校刻)되면서부터 이를 전문으로 배우는 이른바 선학(選學)이 생기게 되었는데, 한유(韓愈) ·두보(杜甫) 등도 문선을 존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당나라 때에는 사부(詞賦)로써 선비를 등용하였으므로, 문선학이 아주 성행하여, 마침내 6경(六經)에 견주게까지 되었다.
관련 한자어
三國名臣序(삼국명신서찬) 袁宏(원굉, 328~376) 千載一遇(천재일우) |
중국 양(梁)나라의 소통(蕭統:昭明太子)이 진(秦) ·한(漢)나라 이후 제(齊) ·양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책.
구분: 시문선집
저자: 소통(蕭統:昭明太子)
시대: 중국 양(梁)
30권. 여기에 실린 문장가는 130여 명으로, 이 중에는 무명작가의 고시(古詩)와 고악부(古樂府)도 포함되어 있다. 편차(編次)는 문체별로 부(賦) ·시(詩) ·소(騷) ·조(詔) ·책(策) ·표(表) ·서(序) ·논(論) ·제문(祭文) 등 39종으로 나누었다. 시는 443수이고, 부(賦) ·소(騷)에서 제문까지의 작품 317편을 수록하였는데, 그 중 부가 가장 많다. 소통은 자신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주로 침사(沈思) ·한조(翰藻)의 내용과 형식의 글을 취하였는데, 이는 그 자신의 문학관인 동시에 6조(六朝)시대 일반 학자들의 신조이기도 하였다.
《문선》은 수(隋)나라에 이르러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당(唐)나라에 들어와 성행하였다. 그 중에서 이선(李善)이 주(註)한 문선이 가장 유명하며, 그는 매권을 둘로 나누어 60권으로 하였다. 그 후 현종(玄宗) 개원(開元) 6년(718), 당시의 공부시랑(工部侍郞) 여연조(呂延祚)가 여연제(呂延濟) ·유량(劉良) ·장선(張銑) ·여향(呂向) ·이주한(李周翰) 등 5명을 모아 주를 달게 한 것이 이른바 《5신주(五臣註)》이고, 거기에 이선의 주를 합하여 《6신주문선(六臣註文選)》이라고 한다.
송(宋)나라의 대중상부(大中祥府) 9년(1016), 처음으로 문선이 교각(校刻)되면서부터 이를 전문으로 배우는 이른바 선학(選學)이 생기게 되었는데, 한유(韓愈) ·두보(杜甫) 등도 문선을 존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당나라 때에는 사부(詞賦)로써 선비를 등용하였으므로, 문선학이 아주 성행하여, 마침내 6경(六經)에 견주게까지 되었다.
관련 한자어
三國名臣序(삼국명신서찬) 袁宏(원굉, 328~376) 千載一遇(천재일우) |
物腐蟲生 (물부충생)
物腐蟲生(물부충생)
物 물건 물 | 腐 썩을 부 | 蟲 벌레 충, 벌레 훼, 찔 동 | 生 날 생 |
생물이 썩은 뒤에야 벌레가 생긴다는 뜻으로, ①남을 의심한 뒤에 그를 두고 하는 비방(誹謗)이나 소문을 듣고 믿게 됨 ②내부에 약점이 생기면 곧 외부의 침입이 있게 됨을 이르는 말
Worms breed in decaying matter
중국 북송(北宋)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범증론(范增論)》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유래한 성어(成語)이다.
소동파는 "생물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 벌레가 생기고[物必先腐也而後 蟲生之], 사람도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 남의 모함을 듣는다[人必先疑也而後 讒入之]"라고 함으로써 항우(項羽)에게 버림받은 범증(范增)을 묘사하였다.
진(秦)나라 말년, 범증(范增)은 항우의 숙부 항량(項梁)에게 투항하여 그의 모사(謀士)가 되었다. 진나라의 포악한 정치에 항거한 항량이 죽은 후, 그의 조카 항우가 그를 계승하였다.
항우는 용맹하였지만 지모(智謀)가 없었으므로 주로 범증의 계획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였다. 범증은 유방(劉邦)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보고 경계하여 항우에게 유방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범증은 홍문(鴻門)에서 열린 연회에 유방(劉邦)을 초대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유방은 범증이 항우를 도와주는 동안은 항우와 마주 겨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범증과 항우를 이간시키는 공작을 꾸몄다. 항우는 이 계략에 휘말려 범증을 의심하여 그를 멀리 하였다. 범증도 몹시 분개하여 항우를 떠나고 말았다. 얼마후 범증은 병사하였고, 항우는 유방에게 망하였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은 범증론(范增論)이라는 글에서 범증이 항우의 곁을 떠난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물건이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야 벌레가 거기에 생기게 되는 것이고[物必先腐也, 而後蟲生之], 사람이란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야 모함이 먹혀들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物腐蟲生(Worms breed in decaying matter) 이란 내부에 약점이 생기면 곧 외부의 침입이 있게 된다는 뜻이다.
출전
소동파(蘇東坡) 범증론(范增論)
物 물건 물 | 腐 썩을 부 | 蟲 벌레 충, 벌레 훼, 찔 동 | 生 날 생 |
생물이 썩은 뒤에야 벌레가 생긴다는 뜻으로, ①남을 의심한 뒤에 그를 두고 하는 비방(誹謗)이나 소문을 듣고 믿게 됨 ②내부에 약점이 생기면 곧 외부의 침입이 있게 됨을 이르는 말
Worms breed in decaying matter
중국 북송(北宋)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범증론(范增論)》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유래한 성어(成語)이다.
소동파는 "생물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 벌레가 생기고[物必先腐也而後 蟲生之], 사람도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 남의 모함을 듣는다[人必先疑也而後 讒入之]"라고 함으로써 항우(項羽)에게 버림받은 범증(范增)을 묘사하였다.
진(秦)나라 말년, 범증(范增)은 항우의 숙부 항량(項梁)에게 투항하여 그의 모사(謀士)가 되었다. 진나라의 포악한 정치에 항거한 항량이 죽은 후, 그의 조카 항우가 그를 계승하였다.
항우는 용맹하였지만 지모(智謀)가 없었으므로 주로 범증의 계획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였다. 범증은 유방(劉邦)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보고 경계하여 항우에게 유방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범증은 홍문(鴻門)에서 열린 연회에 유방(劉邦)을 초대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유방은 범증이 항우를 도와주는 동안은 항우와 마주 겨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범증과 항우를 이간시키는 공작을 꾸몄다. 항우는 이 계략에 휘말려 범증을 의심하여 그를 멀리 하였다. 범증도 몹시 분개하여 항우를 떠나고 말았다. 얼마후 범증은 병사하였고, 항우는 유방에게 망하였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은 범증론(范增論)이라는 글에서 범증이 항우의 곁을 떠난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물건이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야 벌레가 거기에 생기게 되는 것이고[物必先腐也, 而後蟲生之], 사람이란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야 모함이 먹혀들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物腐蟲生(Worms breed in decaying matter) 이란 내부에 약점이 생기면 곧 외부의 침입이 있게 된다는 뜻이다.
출전
소동파(蘇東坡) 범증론(范增論)
武陵桃源 (무릉도원)
武陵桃源(무릉도원)
이 세상과 따로 떨어진 별천지. 理想鄕(이상향) 즉 유토피아를 말한다.
晋(진)나라 때 무릉이란 마을에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부는 배를 저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여태까지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에 이르렀다.
계곡 양쪽엔 온통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배를 저어가던 어부는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쯤이나 되는 곳인가. 그리고 이 복숭아밭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단 말인가. 호기심에 좀 더 거슬러 올라가니까 내(川)가 그치는 곳에 높다란 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산에는 작은 굴이 뚫려있어 어부가 배를 버리고 굴에 들어가 얼마를 걷자니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부시는 눈을 겨우 뜨고 보니 바로 앞에 널따란 땅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연하게 들어선 집들과 잘 가꾸어진 밭.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표정으로 밭일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마을 주민들은 옛날 秦(진)나라의 虐政(학정)을 피해 이 絶景(절경)을 찾아 온 사람들의 후손이었다. 그 이후 바깥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살아왔다고 했다.
어부는 환대를 받으며 그곳에서 며칠 묵은 다음 귀로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이곳 이야기를 하지 말고 다시는 찾지말아달라는 당부를 받았으나 어부는 오는 도중 곳곳에 標識(표지)를 해두었다.
어부는 돌아와서 그가 겪은 일을 그 지방 태수에게 보고했다. 태수도 크게 관심을 가지며 사람들을 시켜 그 마을을 찾게 했으나 표지조차 없어져버려 수색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晋나라의 대시인 陶淵明(도연명)의 「도화원기」에 실려있는데 그 신비의 마을 무릉도원은 많은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는 이상향이 되었다.
도연명, 도화원기, 陶淵明
이 세상과 따로 떨어진 별천지. 理想鄕(이상향) 즉 유토피아를 말한다.
晋(진)나라 때 무릉이란 마을에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부는 배를 저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여태까지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에 이르렀다.
계곡 양쪽엔 온통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배를 저어가던 어부는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쯤이나 되는 곳인가. 그리고 이 복숭아밭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단 말인가. 호기심에 좀 더 거슬러 올라가니까 내(川)가 그치는 곳에 높다란 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산에는 작은 굴이 뚫려있어 어부가 배를 버리고 굴에 들어가 얼마를 걷자니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부시는 눈을 겨우 뜨고 보니 바로 앞에 널따란 땅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연하게 들어선 집들과 잘 가꾸어진 밭.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표정으로 밭일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마을 주민들은 옛날 秦(진)나라의 虐政(학정)을 피해 이 絶景(절경)을 찾아 온 사람들의 후손이었다. 그 이후 바깥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살아왔다고 했다.
어부는 환대를 받으며 그곳에서 며칠 묵은 다음 귀로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이곳 이야기를 하지 말고 다시는 찾지말아달라는 당부를 받았으나 어부는 오는 도중 곳곳에 標識(표지)를 해두었다.
어부는 돌아와서 그가 겪은 일을 그 지방 태수에게 보고했다. 태수도 크게 관심을 가지며 사람들을 시켜 그 마을을 찾게 했으나 표지조차 없어져버려 수색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晋나라의 대시인 陶淵明(도연명)의 「도화원기」에 실려있는데 그 신비의 마을 무릉도원은 많은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는 이상향이 되었다.
도연명, 도화원기, 陶淵明
刎頸之交 (문경지교)
刎頸之交(문경지교)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마음을 변치 않는 우정. 중국 전국 시대 인상여와 염파의 친교에서 생긴 말.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마음을 변치 않는 우정. 중국 전국 시대 인상여와 염파의 친교에서 생긴 말.
文君司馬 (문군사마)
文君司馬(문군사마)
文 무늬 문 | 君 임금 군 | 司 맡을 사 | 馬 말 마 |
文君司馬란 사랑하는 부부나 연인(戀人)을 비유한 말이다.
사기(史記) 사마상여(司馬相如)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서한(西漢) 시기, 임공(臨 )이라는 곳에 탁왕손(卓王孫)이라는 부유한 상인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일찍 남편과 사별(死別)하고 혼자 지내는 탁문군(卓文君)이라는 딸이 있었다. 평소 이러한 탁문군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젊고 유능한 사마상여는 연회에 참석한 기회를 이용하여 탁문군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
그 날 밤, 탁문군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몰래 집을 빠져 나와 사마상여의 집으로 달려가서 그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탁왕손은 딸의 이러한 행동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어려운 생활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고 많은 재물을 주었다.
이렇듯 사마상여와 탁문군은 자신들의 진실한 마음과 행동으로 행복한 애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출전
사기(史記) 사마상여(司馬相如) 열전
文 무늬 문 | 君 임금 군 | 司 맡을 사 | 馬 말 마 |
文君司馬란 사랑하는 부부나 연인(戀人)을 비유한 말이다.
사기(史記) 사마상여(司馬相如)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서한(西漢) 시기, 임공(臨 )이라는 곳에 탁왕손(卓王孫)이라는 부유한 상인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일찍 남편과 사별(死別)하고 혼자 지내는 탁문군(卓文君)이라는 딸이 있었다. 평소 이러한 탁문군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젊고 유능한 사마상여는 연회에 참석한 기회를 이용하여 탁문군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
그 날 밤, 탁문군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몰래 집을 빠져 나와 사마상여의 집으로 달려가서 그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탁왕손은 딸의 이러한 행동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어려운 생활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고 많은 재물을 주었다.
이렇듯 사마상여와 탁문군은 자신들의 진실한 마음과 행동으로 행복한 애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출전
사기(史記) 사마상여(司馬相如)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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