巢毁卵破(소훼난파)
巢毁卵破[cháohuǐluǎnpò]
巢 새집 소 | 毁 헐 훼 | 卵 알 난(란) | 破 깨뜨릴 파, 무너질 피 |
새집이 부서지면 알도 깨진다는 뜻으로, 국가(國家)나 사회(社會) 또는 조직(組織)이나 집단(集團)이 무너지면 그 구성원들도 피해(被害)를 입게 됨을 이르는 말
후한서(後漢書) 정공순(鄭孔荀)열전의 이야기다.
동한(東漢)말기, 공자의 20세손인 공융(孔融)은 한나라 헌제(獻帝) 밑에서 벼슬을 지냈다. 공융은 일찍이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조조(曹操)의 야심을 간파하고 그를 멀리하였다. 때문에 조조는 공융에게 분노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유비와 손권을 공격하려는 조조의 계획을 반대했던 공융은, 그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던 한 대부의 모략으로 조조에게 체포되었다.
공융의 7세 된 딸과 9세 된 아들은, 아버지가 잡혀 가던 순간 묵묵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도망하라고 했지만, 공융의 딸은 매우 침착하게 '새집이 부서졌는데 알이 어찌 깨지지 않겠습니까[安有巢毁而卵不破乎]'라고 말했다. 공융의 딸은 조조에게 붙잡혀 와서도 죽은 뒤에 혼령이나마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고 형의 집행을 기다렸다.
巢毁卵破 이란 조직이나 집단이 무너지면 그 구성원들도 피해를 입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정공순(鄭孔荀)열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鸡飞蛋打[jīfēidàndǎ] 닭은 날아가고 달걀도 깨지다. 양쪽으로 다 망치다 |
반의어·상대어
完好无损[wánhǎowúsǔn] 완전하고 손상이 없다. |
蕭統 (소통, 501~531)
蕭統(소통, 501~531)
중국 남조양나라의 문학평론가. 양(梁) 무제 소연(蕭衍)의 장남으로 황태자가 되었으나, 즉위하기 전에 죽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제(齊)·양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문선(文選)》이 있는데 이는 당 이후로도 문학 학습의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자: 덕시
시호: 문청
국적: 중국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문선(30권)
소명태자(昭明太子)라고도 하며 자는 덕시(德施), 시호는 소명(昭明)이다. 양(梁) 무제 소연(蕭衍)의 장남으로 황태자가 되었으나, 즉위하기 전에 죽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진(秦)·한(漢)나라 이후 제(齊)·양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문선(文選)》(30권)이 있다. 《문선》은 수(隋)나라에 이르러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당(唐)나라에 들어와 성행하였으며, 당 이후로도 문학 학습의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문선》에 엮은 작품들의 선택 기준은 내용에 있지 않고 형식의 아름다움에 있었으나, 작품의 전아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용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문장은 화려하면서도 부박하지 말아야 하며, 전아하면서도 거칠지 않아야 하므로 문과 질이 서로 어울릴 때 군자의 극치를 지니게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문선》에 나타난 소통의 문학관은 후대 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요 작품
文選(문선)
중국 남조양나라의 문학평론가. 양(梁) 무제 소연(蕭衍)의 장남으로 황태자가 되었으나, 즉위하기 전에 죽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제(齊)·양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문선(文選)》이 있는데 이는 당 이후로도 문학 학습의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자: 덕시
시호: 문청
국적: 중국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문선(30권)
소명태자(昭明太子)라고도 하며 자는 덕시(德施), 시호는 소명(昭明)이다. 양(梁) 무제 소연(蕭衍)의 장남으로 황태자가 되었으나, 즉위하기 전에 죽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진(秦)·한(漢)나라 이후 제(齊)·양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문선(文選)》(30권)이 있다. 《문선》은 수(隋)나라에 이르러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당(唐)나라에 들어와 성행하였으며, 당 이후로도 문학 학습의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문선》에 엮은 작품들의 선택 기준은 내용에 있지 않고 형식의 아름다움에 있었으나, 작품의 전아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용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문장은 화려하면서도 부박하지 말아야 하며, 전아하면서도 거칠지 않아야 하므로 문과 질이 서로 어울릴 때 군자의 극치를 지니게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문선》에 나타난 소통의 문학관은 후대 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요 작품
文選(문선)
小貪大失 (소탐대실)
小貪大失(소탐대실)
작은 것을 탐내어 큰 것을 잃음.
to covet a little but lose a lot; to seek small gains but incur big losses
贪小失大(tānxiǎoshīdà)
작은 것을 탐내어 큰 것을 잃음.
to covet a little but lose a lot; to seek small gains but incur big losses
贪小失大(tānxiǎoshīdà)
小積大成 (소적대성)
小積大成(소적대성)
小 적을 소 | 積 쌓을 적 | 大 큰 대 | 成 이룰 성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서 큰 것으로 됨.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티끌 모아 태산.
¶ 실도랑이 모여 대동강이 된다.
小 적을 소 | 積 쌓을 적 | 大 큰 대 | 成 이룰 성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서 큰 것으로 됨.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티끌 모아 태산.
¶ 실도랑이 모여 대동강이 된다.
孫子 (손자) 孫武 (손무)
孫子(손자) 손무(孫武)
중국 고대의 병법서(兵法書).
《오자(吳子)》와 병칭(倂稱)되는 병법 칠서(七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병서로 이 둘을 합쳐 흔히 '손오병법(孫吳兵法)'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춘추시대 오나라 합려(闔閭)를 섬기던 명장 손무(孫武:BC 6세기경)이며, 손자는 그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예전에는 손무의 손자로 전국시대 진(晉)나라에서 활동한 손빈의 저서라고 추정하기도 하였으나, 1972년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 인췌산[銀雀山]에 있는 전한시대의 묘에서 《손자》와 《손빈병법》 2가지가 동시에 출토됨으로써 손빈이 지은 병법서는 별개의 책임이 확인되었다.
《사기(史記)》에는 손자 13편이라 하였으나 그 편목은 알 수 없으며,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오손자병법 82편이라 하여 <병서략(兵書略)> 첫머리에 기재하고 주(注)에는 그림 9권이 있었다고 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13편으로 이것은 당초의 것이 아니고, 삼국시대 위(魏)의 조조(曹操)가 82편 중에서 번잡한 것은 삭제하고 정수(精粹)만을 추려 13편 2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3편의 편명은 계(計)·작전(作戰)·모공(謀攻)·군형(軍形)·병세(兵勢)·허실(虛實)·군쟁(軍爭)·구변(九變)·행군(行軍)·지형(地形)·구지(九地)·화공(火攻)·용간(用間)으로 되어 있으며, “병(兵)은 국가의 대사(大事), 사생(死生)의 땅, 존망(存亡)의 길”이라는 입장에서 국책(國策)의 결정, 장군의 선임을 비롯하여 작전·전투 전반에 걸쳐 격조 높은 문장으로 간결하게 요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 뜻하는 바는 항상 주동적 위치를 점하여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을 주로 하고, 또 사상적인 뒷받침도 설하고 있어 병서로서는 모순을 느낄 만큼 비호전적(非好戰的)인 것이 특징이다.
예로부터 작전의 성전(聖典)으로서 많은 무장들에게 존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경영의 요지와 인사의 성패 등에도 비범한 견해를 보이고 있어 인생문제 전반에 적용되는 지혜의 글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예로부터 많은 무신들이 이를 지침으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역관초시(譯官初試)의 교재로 삼기도 하였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하여, “남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명구도 담고 있으며, 전쟁하여 이기는 것보다 전쟁하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손자병법》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인용 번역되고 있다.
손자 관련 한자어
九地篇(구지편)
吳越同舟(오월동주, WúYuètóngzhōu)
軍爭篇(군쟁편)
以迂爲直(이우위직) | 以患爲利(이환위리) | 軍爭
중국 고대의 병법서(兵法書).
《오자(吳子)》와 병칭(倂稱)되는 병법 칠서(七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병서로 이 둘을 합쳐 흔히 '손오병법(孫吳兵法)'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춘추시대 오나라 합려(闔閭)를 섬기던 명장 손무(孫武:BC 6세기경)이며, 손자는 그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예전에는 손무의 손자로 전국시대 진(晉)나라에서 활동한 손빈의 저서라고 추정하기도 하였으나, 1972년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 인췌산[銀雀山]에 있는 전한시대의 묘에서 《손자》와 《손빈병법》 2가지가 동시에 출토됨으로써 손빈이 지은 병법서는 별개의 책임이 확인되었다.
《사기(史記)》에는 손자 13편이라 하였으나 그 편목은 알 수 없으며,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오손자병법 82편이라 하여 <병서략(兵書略)> 첫머리에 기재하고 주(注)에는 그림 9권이 있었다고 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13편으로 이것은 당초의 것이 아니고, 삼국시대 위(魏)의 조조(曹操)가 82편 중에서 번잡한 것은 삭제하고 정수(精粹)만을 추려 13편 2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3편의 편명은 계(計)·작전(作戰)·모공(謀攻)·군형(軍形)·병세(兵勢)·허실(虛實)·군쟁(軍爭)·구변(九變)·행군(行軍)·지형(地形)·구지(九地)·화공(火攻)·용간(用間)으로 되어 있으며, “병(兵)은 국가의 대사(大事), 사생(死生)의 땅, 존망(存亡)의 길”이라는 입장에서 국책(國策)의 결정, 장군의 선임을 비롯하여 작전·전투 전반에 걸쳐 격조 높은 문장으로 간결하게 요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 뜻하는 바는 항상 주동적 위치를 점하여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을 주로 하고, 또 사상적인 뒷받침도 설하고 있어 병서로서는 모순을 느낄 만큼 비호전적(非好戰的)인 것이 특징이다.
예로부터 작전의 성전(聖典)으로서 많은 무장들에게 존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경영의 요지와 인사의 성패 등에도 비범한 견해를 보이고 있어 인생문제 전반에 적용되는 지혜의 글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예로부터 많은 무신들이 이를 지침으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역관초시(譯官初試)의 교재로 삼기도 하였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하여, “남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명구도 담고 있으며, 전쟁하여 이기는 것보다 전쟁하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손자병법》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인용 번역되고 있다.
손자 관련 한자어
九地篇(구지편)
吳越同舟(오월동주, WúYuètóngzhōu)
軍爭篇(군쟁편)
以迂爲直(이우위직) | 以患爲利(이환위리) | 軍爭
俗人昭昭 我獨昏昏 (속인소소아독혼혼)
속인소소 아독혼혼 (俗人昭昭 我獨昏昏)
세상 사람들 모두 똑똑한데 나만 홀로 어리석다. 노자의 도덕경 20장에 나오는 말.
http://nowgnoy3.blogspot.com/2011/05/blog-post_15.html
세상 사람들 모두 똑똑한데 나만 홀로 어리석다. 노자의 도덕경 20장에 나오는 말.
http://nowgnoy3.blogspot.com/2011/05/blog-post_15.html
少壯不努力老大徒傷悲 (소장불노력노대도상비)
少壯不努力 老大徒傷悲(소장불노력 노대도상비)
젊어서 노력하지 않으면 늙어 부질없이 슬퍼질 따름이다
A lazy youth, lousy age.
출전
심약(沈約) 장가행(長歌行) |
관련 한자어
참조어
少壯不努力 老大徒傷悲(소장불노력 노대도상비) 젊어서 노력하지 않으면, 늙어서는 상심과 슬픔뿐 어쩔 도리 없다네. [심약(沈約) 장가행(長歌行)] |
吏情更覺滄洲遠 老大徒悲未拂衣(이정갱각창주원 노대도비미불의) 벼슬하는 뜻이 신선이 사는 창주와 멀어짐을 새삼 깨닫나니, 늙어서 훌훌 털고 일어서지 못함을 못내 설워하노라. [두보(杜甫) 곡강대주(曲江對酒)] |
旣壯不努力 白首而無知(기장불노력 백수이무지) 젊어서 노력하지 않았더니, 백발 되어서는 아는 것이 없도다. [변계량(卞季良) 감흥(感興)]
중요도·활용도
|
젊어서 노력하지 않으면 늙어 부질없이 슬퍼질 따름이다
A lazy youth, lousy age.
출전
심약(沈約) 장가행(長歌行) |
관련 한자어
참조어
少壯不努力 老大徒傷悲(소장불노력 노대도상비) 젊어서 노력하지 않으면, 늙어서는 상심과 슬픔뿐 어쩔 도리 없다네. [심약(沈約) 장가행(長歌行)] |
吏情更覺滄洲遠 老大徒悲未拂衣(이정갱각창주원 노대도비미불의) 벼슬하는 뜻이 신선이 사는 창주와 멀어짐을 새삼 깨닫나니, 늙어서 훌훌 털고 일어서지 못함을 못내 설워하노라. [두보(杜甫) 곡강대주(曲江對酒)] |
旣壯不努力 白首而無知(기장불노력 백수이무지) 젊어서 노력하지 않았더니, 백발 되어서는 아는 것이 없도다. [변계량(卞季良) 감흥(感興)]
중요도·활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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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襄之仁 (송양지인)
宋襄之仁(송양지인)
송나라 양공(襄公)의 어짊이란 말로 쓸데없는 인정이나 필요없는 동정을 비유하여 쓴다.
춘추시대 약소국이던 송나라의 양공은 제나라의 환공이 죽자 그를 대신해서 覇者(패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의 이복형이자 재상인 목이가 만류했으나 듣지 않았다. 양공은 강국 초나라의 보살핌을 받고 있던 정나라를 공격했다.그러자 초나라는 정나라에 구원병을 보냈다.
목이는 『송나라도 이제 끝장이구나』하고 한탄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양군은 홍수에서 마주쳤다. 송나라 군대는 완벽하게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초나라 군대는 전열을 미처 정비하지 못한 채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를 본 목이가 진언했다.
『적군은 우세하고 아군은 열세이니 정면으로 충돌하면 승산이 없습니다.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공략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군자는 상대의 약점을 노리지 않소. 진용이 정비되지도 않은 적을 치다니 그 따위 비겁한 짓은 할 수 없소』
양공은 절호의 공격기회를 어이없이 놓치고 말았다.
강을 건넌 적은 그래도 아직 진용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고 있어서 또 한번의 기회는 있었다. 목이는 또 다시 강력히 간했으나 양공은 『싸움이란 똑같은 조건하에서 하는 것이오』하고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마침내 진용을 갖춘 초나라 군사는 송나라 군사를 박살내고 말았다.이쯤되면 양공의 「어짊」이 아니라 「어리석음」에 다름아니다.
송나라 양공(襄公)의 어짊이란 말로 쓸데없는 인정이나 필요없는 동정을 비유하여 쓴다.
춘추시대 약소국이던 송나라의 양공은 제나라의 환공이 죽자 그를 대신해서 覇者(패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의 이복형이자 재상인 목이가 만류했으나 듣지 않았다. 양공은 강국 초나라의 보살핌을 받고 있던 정나라를 공격했다.그러자 초나라는 정나라에 구원병을 보냈다.
목이는 『송나라도 이제 끝장이구나』하고 한탄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양군은 홍수에서 마주쳤다. 송나라 군대는 완벽하게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초나라 군대는 전열을 미처 정비하지 못한 채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를 본 목이가 진언했다.
『적군은 우세하고 아군은 열세이니 정면으로 충돌하면 승산이 없습니다.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공략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군자는 상대의 약점을 노리지 않소. 진용이 정비되지도 않은 적을 치다니 그 따위 비겁한 짓은 할 수 없소』
양공은 절호의 공격기회를 어이없이 놓치고 말았다.
강을 건넌 적은 그래도 아직 진용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고 있어서 또 한번의 기회는 있었다. 목이는 또 다시 강력히 간했으나 양공은 『싸움이란 똑같은 조건하에서 하는 것이오』하고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마침내 진용을 갖춘 초나라 군사는 송나라 군사를 박살내고 말았다.이쯤되면 양공의 「어짊」이 아니라 「어리석음」에 다름아니다.
宋史 (송사) 428
宋史(송사)
脫脫[토크토] 등
卷四百二十八 列傳第一百八十七 道學二(程氏門人)
劉絢
劉絢字質夫,常山人。以蔭為壽安主簿、長子令,督公家逋賦,不假鞭撲而集。歲大旱,府遣吏視傷所,蠲財什二,絢力爭不得,封還其楬,請易之。富弼歎曰:「真縣令也。」元祐初,韓維薦其經明行修,為京兆府教授。王巖叟、朱光庭又薦為太學博士,卒於官。絢力學不倦,最明於《春秋》。程顥每為人言:「他人之學,敏則有矣,未易保也,若絢者,吾無疑焉。」
李吁
李吁字端伯,洛陽人。登進士第。元祐中為秘書省校書郎,卒。程頤謂其才器可以大受,及亡也,祭之以文曰:「自予兄弟倡明道學,能使學者視仿而信從者,吁與劉絢有焉。」
謝良佐
謝良佐字顯道,壽春上蔡人。與游酢、呂大臨、楊時在程門,號「四先生」。登進士第。建中靖國初,官京師,召對,忤旨去。監西京竹木場,坐口語系詔獄,廢為民。良佐記問該贍,對人稱引前史,至不差一字。事有未徹,則顙有泚。與程頤別一年,復來見,問其所進,曰:「但去得一『矜』字爾。」頤喜,謂朱光庭曰:「是子力學,切問而近思者也。」所著《論語說》行於世。
游酢
游酢字定夫,建州建陽人。與兄醇以文行知名,所交皆天下士。程頤見之京師,謂其資可以進道。程顥興扶溝學,招使肄業,盡棄其學而學焉。第進士,調蕭山尉。近臣薦其賢,召為太學錄。遷博士,以奉親不便,求知河清縣。范純仁守穎昌府,辟府教授。純仁入相,復為博士。簽書齊州、泉州判官。晚得監察御史,歷知漢陽軍、和舒濠三州而卒。
張繹
張繹字思叔,河南壽安人。家甚微,年長未知學,傭力於市,出聞邑官傳呼聲,心慕之,問人曰:「何以得此?」人曰:「此讀書所致爾。」即發憤力學,遂以文名。預鄉里計偕,謂科舉之習不足為,嘗游僧捨,見僧道楷,將祝發從之。時周行己官河南,警之曰:「何為捨聖人之學而學佛?異日程先生歸,可師也。」會程頤還自涪,乃往受業,頤賞其穎悟。讀《孟子》「志士不忘在溝壑,勇士不忘喪其元」,慨然若有得。未及仕而卒。頤嘗言「吾晚得二士」,謂繹與尹焞也。
蘇昺
蘇昺字季明,武功人。始學於張載,而事二程卒業。元祐末,呂大中薦之,起布衣為太常博士。坐元符上書入邪籍,編管饒州,卒。
尹焞
尹焞字彥明,一字德充,世為洛人。曾祖仲宣七子,而二子有名:長子源字子漸,是謂河內先生;次子洙字師魯,是謂河南先生。源生林,官至虞部員外郎。林生焞。
少師事程頤,嘗應舉,發策有誅元祐諸臣議,焞曰:「噫,尚可以干祿乎哉!」不對而出,告頤曰:「焞不復應進士舉矣。」頤曰:「子有母在。」□享歸告其母陳,母曰:「吾知汝以善養,不知汝以祿養。」頤聞之曰:「賢哉母也!」於是終身不就舉。焞之從師,與河南張繹同時,繹以高識,焞以篤行。頤既沒,焞聚從洛中,非弔喪問疾不出戶,士大夫宗仰之。
靖康初,種師道薦焞德行可備勸講,召至京師,不欲留,賜號和靖處士。戶部尚書梅執禮、御史中丞呂好問、戶部侍郎邵溥、中書舍人胡安國合奏:「河南布衣尹焞學窮根本,德備中和,言動可以師法,器識可以任大,近世招延之士無出其右者。朝廷特召,而命處士以歸,使焞韜藏國器,不為時用,未副陛下側席求賢之意。望特加識擢,以慰士大夫之望。」不報。
次年,金人陷洛,焞闔門被害,焞死復甦,門人舁置山谷中而免。劉豫命偽帥趙斌以禮聘焞,不從則以兵恐之。焞自商州奔蜀,至閬,得程頤《易傳》十卦於其門人呂稽中,又得全本於其婿邢純,拜而受之。紹興四年,止於涪。涪,頤讀《易》地也,辟三畏齋以居,邦人不識其面。侍讀范沖舉焞自代,授左宣教郎,充崇政殿說書,以疾辭。范沖奏給五百金為行資,遣漕臣奉詔至涪親遣。六年,始就道,作文祭頤而後行。
先是,崇寧以來,禁錮元祐學術,高宗渡江,始召楊時置從班,召胡安國居給捨,范沖、朱震俱在講席,薦焞甚力。既召,而左司諫公輔上疏攻程氏之學,乞加屏絕。
焞至九江,上奏曰:「臣僚上言,程頤之學惑亂天下。焞實師頤垂二十年,學之既專,自信甚篤。使焞濫列經筵,其所敷繹,不過聞於師者。捨其所學,是欺君父,加以疾病衰耗,不能支持。」遂留不進。胡安國奉祠居衡陽,上書言:「欲使學者蹈中庸,師孔、孟,而禁不從程頤之學,是入室而不由戶。」
朱震引疾告去,時趙鼎去位,張浚獨相,於是召安國,俾以內祠兼侍讀,而上章薦焞,言其拒劉豫之節,且謂其所學所養有大過人者,乞令江州守臣疾速津送至國門。復以疾辭,上曰:「焞可謂恬退矣。」詔以秘書郎兼說書,趣起之,焞始入見就職。八年,除秘書少監,未幾,力辭求去。上語參知政事劉大中曰:「焞未論所學淵源,足為後進矜式,班列得老成人,亦是朝廷氣象。」乃以焞直徽猷閣,主管萬壽觀,留侍經筵。資善堂翊善朱震疾亟,薦焞自代。輔臣入奏,上慘然曰:「楊時物故,胡安國與震又亡,朕痛惜之。」趙鼎曰:「尹焞學問淵源,可以繼震。」上指奏牘曰:「震亦薦焞代資善之職,但焞微聵,恐教兒費力爾。」除太常少卿,仍兼說書。未幾,稱疾在告,除權禮部侍郎兼侍講。
時金人遣張通古、蕭哲來議和,焞上疏曰:
臣伏見本朝有遼、金之禍,亙古未聞,中國無人,致其猾亂。昨者城下之戰,詭詐百出,二帝北狩,皇族播遷,宗社之危,已絕而續。陛下即位以來十有二年,雖中原未復,仇敵未殄,然而賴祖宗德澤之厚,陛下勤撫之至,億兆之心無有離異。前年徽宗皇帝、寧德皇后崩問遽來,莫究不豫之狀,天下之人痛心疾首,而陛下方且屈意降志,以迎奉梓宮、請問諱日為事。今又為此議,則人心日去,祖宗積累之業,陛下十二年勤撫之功,當決於此矣。不識陛下亦嘗深謀而熟慮乎,抑在廷之臣不以告也?
《禮》曰:「父母之仇不共戴天,兄弟之仇不反兵。」今陛下信仇敵之譎詐,而覬其肯和以紓目前之急,豈不失不共戴天、不反兵之義乎?又況使人之來,以詔諭為名,以割地為要,今以不戴天之仇與之和,臣切為陛下痛惜之。或以金國內亂,懼我襲己,故為甘言以緩王師。倘或果然,尤當鼓士卒之心,雪社稷之恥,尚何和之為務?
又移書秦檜言:
今北使在廷,天下憂憤,若和議一成,彼日益強,我日益怠,侵尋朘削,天下有被發左衽之憂。比者,竊聞主上以父兄未返,降志辱身於九重之中有年矣,然亦自是未聞金人悔過,還二帝於沙漠。繼之梓宮崩問不詳,天下之人痛恨切骨,金人狼虎貪噬之性,不言可見。天下方將以此望於相公,覬有以革其已然,豈意為之已。甚乎。
今之上策,莫如自治。自治之要,內則進君子而遠小人,外則賞當功而罰當罪,使主上孝弟通於神明,道德成於安強,勿以小智孑義而圖大功,不勝幸甚。
疏及書皆不報,於是焞固辭新命。
九年,以徽猷閣待制提舉萬壽觀兼侍講,又辭,且奏言:
臣職在勸講,蔑有發明,期月之間,病告相繼,坐竊厚祿,無補聖聰。先聖有言:「陳力就列,不能者止。」此當去者一也。臣起自草茅,誤膺召用,守道之語,形於訓詞,而臣貪戀寵榮,遂移素守,使朝廷非常不次之舉,獲懷利苟得之人。此當去者二也。比嘗不量分守,言及國事,識見迂陋,已驗於今,跡其庸愚,豈堪時用。此當去者三也。臣自擢春官,未嘗供職,以疾乞去,更獲超遷,有何功勞,得以祗受。此當去者四也。國朝典法,揆之禮經,年至七十,皆當致仕。今臣年齒已及,加以疾病,血氣既衰,戒之在得。此當去者五也。臣聞聖君有從欲之仁,匹夫有莫奪之志,今臣有五當去之義,無一可留之理,乞檢會累奏,放歸田裡。
疏上,以焞提舉江州太平觀。引年告老,轉一官致仕。
焞自入經筵,即乞休致,朝廷以禮留之;浚、鼎既去,秦檜當國,見焞議和疏及與檜書已不樂,至是,得求去之疏,遂不復留。十二年,卒。
當是時,學於程頤之門者固多君子,然求質直弘毅、實體力行若焞者蓋鮮。頤嘗以「魯」許之,且曰:「我死,而不失其正者尹氏子也。」其言行見於《涪陵記善錄》為詳,有《論語解》及《門人問答》傳於世。
楊時
楊時字中立,南劍將樂人。幼穎異,能屬文,稍長,潛心經史。熙寧九年,中進士第。時河南程顥與弟頤講孔、孟絕學於熙、豐之際,河、洛之士翕然師之。時調官不赴,以師禮見顥於穎昌,相得甚歡。其歸也,顥目送之曰:「吾道南矣。」四年而顥死,時聞之,設位哭寢門,而以書赴告同學者。至是,又見程頤於洛,時蓋年四十矣。一日見頤,頤偶瞑坐,時與游酢侍立不去,頤既覺,則門外雪深一尺矣。關西張載嘗著《西銘》,二程深推服之,時疑其近於兼愛,與其師頤辨論往復,聞理一分殊之說,始豁然無疑。
杜門不仕者十年,久之,歷知瀏陽、餘杭、蕭山三縣,皆有惠政,民思之不忘。張舜民在諫垣,薦之,得荊州教授。時安於州縣,未嘗求聞達,而德望日重,四方之士不遠千里從之遊,號曰龜山先生。
時天下多故,有言於蔡京者,以為事至此必敗,宜引舊德老成置諸左右,庶幾猶可及,時宰是之。會有使高麗者,國主問龜山安在,使回以聞。召為秘書郎,遷著作郎。及面對,奏曰:
堯、舜曰「允執厥中」,孟子曰「湯執中」,《洪範》曰「皇建其有極」,歷世聖人由斯道也。熙寧之初,大臣文六藝之言以行其私,祖宗之法紛更殆盡。元祐繼之,盡復祖宗之舊,熙寧之法一切廢革。至紹聖、崇寧抑又甚焉,凡元祐之政事著在令甲,皆焚之以滅其跡。自是分為二黨,縉紳之禍至今未殄。臣願明詔有司,條具祖宗之法,著為綱目,有宜於今者舉而行之,當損益者損益之,元祐、熙、豐姑置勿問,一趨於中而已。
朝廷方圖燕雲,虛內事外,時遂陳時政之弊,且謂:「燕雲之師宜退守內地,以省轉輸之勞,募邊民為弓弩手,以殺常勝軍之勢。」又言:「都城居四達之衢,無高山巨浸以為阻衛,士人懷異心,緩急不可倚仗。」執政不能用。登對,力陳君臣警戒,正在無虞之時,乞為《宣和會計錄》,以周知天下財物出入之數。徽宗首肯之。
除邇英殿說書。聞金人入攻,謂執政曰:「今日事勢如積薪已然,當自奮勵,以竦動觀聽。若示以怯懦之形,委靡不振,則事去矣。昔汲黯在朝,淮南寢謀。論黯之才,未必能過公孫弘輩也,特其直氣可以鎮壓奸雄之心爾。朝廷威望弗振,使奸雄一以弘輩視之,則無復可為也。要害之地,當嚴為守備,比至都城,尚何及哉?近邊州軍宜堅壁清野,勿與之戰,使之自困。若攻戰略地,當遣援兵追襲,使之腹背受敵,則可以制勝矣。」且謂:「今日之事,當以收人心為先。人心不附,雖有高城深池、堅甲利兵,不足恃也。免夫之役,毒被海內,西城聚斂,東南花石,其害尤甚。前此蓋嘗罷之,詔墨未干,而花石供奉之舟已銜尾矣。今雖復申前令,而禍根不除,人誰信之?欲致人和,去此三者,正今日之先務也。」
金人圍京城,勤王之兵四集,而莫相統一。時言:「唐九節度之師不立統帥,雖李、郭之善用兵,猶不免敗衄。今諸路烏合之眾,臣謂當立統帥,一號令,示紀律,而後士卒始用命。」又言:「童貫為三路大帥,敵人侵疆,棄軍而歸,孥戮之有餘罪,朝廷置之不問,故梁方平、何灌皆相繼而遁。當正典刑,以為臣子不忠之戒。童貫握兵二十餘年,覆軍殺將,馴至今日,比聞防城仍用閹人,覆車之轍,不可復蹈。」疏上,除右諫議大夫兼侍講。
敵兵初退,議者欲割三鎮以講和,時極言其不可,曰:「河朔為朝廷重地,而三鎮又河朔之要藩也。自周世宗迄太祖、太宗,百戰而後得之,一旦棄之北庭,使敵騎疾驅,貫吾腹心,不數日可至京城。今聞三鎮之民以死拒之,三鎮拒其前,吾以重兵躡其後,尚可為也。若種師道、劉光世皆一時名將,始至而未用,乞召問方略。」疏上,欽宗詔出師,而議者多持兩端,時抗疏曰:「聞金人駐磁、相,破大名,劫虜驅掠,無有紀極,誓墨未干,而背不旋踵,吾雖欲專守和議,不可得也。夫越數千里之遠,犯人國都,危道也。彼見勤王之師四面而集,亦懼而歸,非愛我而不攻。朝廷割三鎮二十州之地與之,是欲助寇而自攻也。聞肅王初與之約,及河而返,今挾之以往,此敗盟之大者。臣竊謂朝廷宜以肅王為問,責其敗盟,必得肅王而後已。」時太原圍閉數月,而姚古擁兵逗留不進,時上疏乞誅古以肅軍政,拔偏裨之可將者代之。不報。
李綱之罷,太學生伏闕上書,乞留綱與種師道,軍民集者數十萬,朝廷欲防禁之。吳敏乞用時以靖太學,時得召對,言:「諸生伏闕紛紛,忠於朝廷,非有他意,但擇老成有行誼者,為之長貳,則將自定。」欽宗曰:「無逾於卿。」遂以時兼國子祭酒。首言:「三省政事所出,六曹分治,各有攸司。今乃別辟官屬,新進少年,未必賢於六曹長貳。」又言:
蔡京用事二十餘年,蠹國害民,幾危宗社,人所切齒,而論其罪者,莫知其所本也。蓋京以繼述神宗為名,實挾王安石以圖身利,故推尊安石,加以王爵,配饗孔子廟庭。今日之禍,實安石有以啟之。
謹按安石挾管、商之術,飭六藝以文奸言,變亂祖宗法度。當時司馬光已言其為害當見於數十年之後,今日之事,若合符契。其著為邪說以塗學者耳目,而敗壞其心術者,不可縷數,姑即一二事明之。
昔神宗嘗稱美漢文惜百金以罷露台,安石乃言:「陛下若能以堯、舜之道治天下,雖竭天下以自奉不為過,守財之言非正理。」曾不知堯、舜茅茨土階。禹曰:「克儉於家」,則竭天下以自奉者,必非堯、舜之道。其後王黼以應奉花石之事,竭天下之力,號為享上,實安石有以倡之也。其釋《鳧鷖》守成之詩,於末章則謂:「以道守成者,役使群眾,泰而不為驕,宰制萬物,費而不為侈,孰弊弊然以愛為事。」《詩》之所言,正謂能持盈則神祇祖考安樂之,而無後艱爾。自古釋之者,未有泰而不為驕、費而不為侈之說也。安石獨倡為此說,以啟人主之侈心。後蔡京輩輕費妄用,以侈靡為事。安石邪說之害如此。
伏望追奪王爵,明詔中外,毀去配享之像,使邪說淫辭不為學者之惑。疏上,安石遂降從祀之列。士之習王氏學取科第者,已數十年,不復知其非,忽聞以為邪說,議論紛然。諫官馮澥力主王氏,上疏詆時。會學官中有紛爭者,有旨學官並罷,時亦罷祭酒。
時又言:「元祐黨籍中,惟司馬光一人獨褒顯,而未及呂公著、韓維、范純仁、呂大防、安燾輩。建中初言官陳瓘已褒贈,而未及鄒浩。」於是元祐諸臣皆次第牽復。
尋四上章乞罷諫省,除給事中,辭,乞致仕,除徽猷閣直學士、提舉嵩山崇福宮。時力辭直學士之命,改除徽猷閣待制、提舉崇福宮。陛辭,猶上書乞選將練兵,為戰守之備。
高宗即位,除工部侍郎。陛對言:「自古聖賢之君,未有不以典學為務。」除兼侍讀。乞修《建炎會計錄》,乞恤勤王之兵,乞寬假言者。連章丐外,以龍圖閣直學士提舉杭州洞霄宮。已而告老,以本官致仕,優遊林泉,以著書講學為事。卒年八十三,謚文靖。
時在東郡,所交皆天下士,先達陳瓘、鄒浩皆以師禮事時。暨渡江,東南學者推時為程氏正宗。與胡安國往來講論尤多。時浮沉州縣四十有七年,晚居諫省,僅九十日,凡所論列皆切於世道,而其大者,則辟王氏經學,排靖康和議,使邪說不作。凡紹興初崇尚元祐學術,而朱熹、張栻之學得程氏之正,其源委脈絡皆出於時。
子迪,力學通經,亦嘗師程頤雲。
羅從彥
羅從彥字仲素,南劍人。以累舉恩為惠州博羅縣主簿。聞同郡楊時得河南程氏學,慨然慕之,及時為蕭山令,遂徒步往學焉。時熟察之,乃喜曰:「惟從彥可與言道。」於是日益以親,時弟子千餘人,無及從彥者。從彥初見時三日,即驚汗浹背,曰:「不至是,幾虛過一生矣。」嘗與時講《易》,至《乾》九四爻,云:「伊川說甚善。」從彥即鬻田走洛,見頤問之,頤反覆以告,從彥謝曰:「聞之龜山具是矣。」乃歸卒業。
沙縣陳淵,楊時之婿也,嘗詣從彥,必竟日乃返,謂人曰:「自吾交仲素,日聞所不聞,奧學清節,真南州之冠冕也。既而築室山中,絕意仕進,終日端坐,間謁時將溪上,吟詠而歸,恆充然自得焉。
嘗采祖宗故事為《遵堯錄》,靖康中,擬獻闕下,會國難不果。嘗與學者論治曰:「祖宗法度不可廢,德澤不可恃。廢法度則變亂之事起,恃德澤則驕佚之心生。自古德澤最厚莫若堯、舜,向使子孫可恃,則堯、舜必傳其子。法度之明莫如周,向使子孫世守文、武、成、康之遺緒,雖至今存可也。」又曰:「君子在朝則天下必治,蓋君子進則常有亂世之言,使人主多憂而善心生,故治。小人在朝則天下亂,蓋小人進則常有治世之言,使人主多樂而怠心生,故亂。」又曰:「天下之變不起於四方,而起於朝廷。譬如人之傷氣,則寒暑易侵;木之傷心,則風雨易折。故內有林甫之奸,則外必有祿山之亂,內有盧杞之奸,則外必有朱泚之叛。」
其論士行曰:「周、孔之心使人明道,學者果能明道,則周、孔之心,深自得之。三代人才得周、孔之心,而明道者多,故視死生去就如寒暑晝夜之移,而忠義行之者易。至漢、唐以經術古文相尚,而失周、孔之心,故經術自董生、公孫弘倡之,古文自韓愈、柳宗元啟之,於是明道者寡,故視死生去就如萬鈞九鼎之重,而忠義行之者難。嗚呼,學者所見,自漢、唐喪矣。」又曰:「士之立朝,要以正直忠厚為本。正直則朝廷無過失,忠厚則天下無嗟怨。一於正直而不忠厚,則漸入於刻。一於忠厚而不正直,則流入於懦。」其議論醇正類此。
朱熹謂:「龜山倡道東南,士之遊其門者甚眾,然潛思力行、任重詣極如仲素,一人而已。」紹興中卒,學者稱之曰豫章先生,淳祐間謚文質。
李侗
李侗字願中,南劍州劍浦人。年二十四,聞郡人羅從彥得河、洛之學,遂以書謁之,其略曰:
侗聞之,天下有三本焉,父生之,師教之,君治之,闕其一則本不立。古之聖賢莫不有師,其肄業之勤惰,涉道之淺深,求益之先後,若存若亡,其詳不可得而考。惟洙、泗之間,七十二弟子之徒,議論問答,具在方冊,有足稽焉,是得夫子而益明矣。孟氏之後,道失其傳,枝分派別,自立門戶,天下真儒不復見於世。其聚徒成群,所以相傳授者,句讀文義而已爾,謂之熄焉可也。
其惟先生服膺龜山先生之講席有年矣,況嘗及伊川先生之門,得不傳之道於千五百年之後,性明而修,行完而潔,擴之以廣大,體之以仁恕,精深微妙,各極其至,漢、唐諸儒無近似者。至於不言而飲人以和,與人並立而使人化,如春風發物,蓋亦莫知其所以然也。凡讀聖賢之書,粗有識見者,孰不願得授經門下,以質所疑,至於異論之人,固當置而勿論也。
侗之愚鄙,徒以習舉子業,不得服役於門下,而今日拳拳欲求教者,以謂所求有大於利祿也。抑侗聞之,道可以治心,猶食之充飽,衣之御寒也。人有迫於饑寒之患者,皇皇焉為衣食之謀,造次顛沛,未始忘也。至於心之不治,有沒世不知慮,豈愛心不若口體哉,弗思甚矣。
侗不量資質之陋,徒以祖父以儒學起家,不忍墜箕裘之業,孜孜矻矻為利祿之學,雖知真儒有作,聞風而起,固不若先生親炙之得於動靜語默之間,目擊而意全也。今生二十有四歲,茫乎未有所止,燭理未明而是非無以辨,宅心不廣而喜怒易以搖,操履不完而悔吝多,精神不充而智巧襲,揀焉而不淨,守焉而不敷,朝夕恐懼,不啻如饑寒切身者求充飢御寒之具也。不然,安敢以不肖之身為先生之累哉。
從之累年,授《春秋》、《中庸》、《語》、《孟》之說。從彥好靜坐,侗退入室中,亦靜坐。從彥令靜中看喜怒哀樂未發前氣象,而求所謂「中」者,久之,而於天下之理該攝洞貫,以次融釋,各有條序,從彥亟稱許焉。
既而退居山田,謝絕世故余四十年,食飲或不充,而怡然自適。事親孝謹,仲兄性剛多忤,侗事之得其歡心。閨門內外,夷愉肅穆,若無人聲,而眾事自理。親戚有貧不能婚嫁者,則為經理振助之。與鄉人處,飲食言笑,終日油油如也。
其接後學,答問不倦,雖隨人淺深施教,而必自反身自得始。故其言曰:「學問之道不在多言,但默坐澄心,體認天理。若是,雖一毫私慾之發,亦退聽矣。」又曰:「學者之病,在於未有灑然冰解凍釋處。如孔門諸子,群居終日,交相切磨,又得夫子為之依歸,日用之間觀感而化者多矣。恐於融釋而不脫落處,非言說所及也。」又曰:「讀書者知其所言莫非吾事,而即吾身以求之,則凡聖賢所至而吾所未至者,皆可勉而進矣。若直求之文字,以資誦說,其不為玩物喪志者幾希。」又曰:「講學切在深潛縝密,然後氣味深長,蹊徑不差。若概以理一,而不察其分之殊,此學者所以流於疑似亂真之說而不自知也。」嘗以黃庭堅之稱濂溪周茂叔「胸中酒落,如光風霽月」,為善形容有道者氣象,嘗諷誦之,而顧謂學者存此於胸中,庶幾遇事廓然,而義理少進矣。
其語《中庸》曰:「聖門之傳是書,其所以開悟後學無遺策矣。然所謂『喜怒哀樂未發謂之中』者,又一篇之指要也。若徒記誦而已,則亦奚以為哉?必也體之於身,實見是理,若顏子之歎,卓然若有所見,而不違乎心目之間,然後擴充而往,無所不通,則庶乎其可以言《中庸》矣。」其語《春秋》曰:「《春秋》一事各是發明一例,如觀山水,徙步而形勢不同,不可拘以一法。然所以難言者,蓋以常人之心推測聖人,未到聖人灑然處,豈能無失耶?」
侗既閒居,若無意當世,而傷時憂國,論事感激動人。嘗曰:「今日三綱不振,義利不分。三綱不振,故人心邪僻,不堪任用,是致上下之氣間隔,而中國日衰。義利不分,故自王安石用事,陷溺人心,至今不自知覺。人趨利而不知義,則主勢日孤,人主當於此留意,不然,則是所謂『雖有粟,吾得而食諸』也。」
是時吏部員外郎朱松與侗為同門友,雅重侗,遣子熹從學,熹卒得其傳。沙縣鄧迪嘗謂松曰:「願中如冰壺秋月,瑩徹無瑕,非吾曹所及。」松以謂知言。而熹亦稱同:「姿稟勁特,氣節豪邁,而充養完粹,無復圭角,精純之氣達於面目,色溫言厲,神定氣和,語默動靜,端詳閒泰,自然之中若有成法。平日恂恂,於事若無甚可否,及其酬酢事變,斷以義理,則有截然不可犯者。」又謂自從侗學,辭去復來,則所聞益超絕。其上達不已如此。
侗子友直、信甫皆舉進士,試吏旁郡,更請迎養。歸道武夷,會閩帥汪應辰以書幣來迎,侗往見之,至之日疾作,遂卒,年七十有一。
信甫仕至監察御史,出知衢州,擢廣東、江東憲,以特立不容於朝雲。
脫脫[토크토] 등
卷四百二十八 列傳第一百八十七 道學二(程氏門人)
劉絢
劉絢字質夫,常山人。以蔭為壽安主簿、長子令,督公家逋賦,不假鞭撲而集。歲大旱,府遣吏視傷所,蠲財什二,絢力爭不得,封還其楬,請易之。富弼歎曰:「真縣令也。」元祐初,韓維薦其經明行修,為京兆府教授。王巖叟、朱光庭又薦為太學博士,卒於官。絢力學不倦,最明於《春秋》。程顥每為人言:「他人之學,敏則有矣,未易保也,若絢者,吾無疑焉。」
李吁
李吁字端伯,洛陽人。登進士第。元祐中為秘書省校書郎,卒。程頤謂其才器可以大受,及亡也,祭之以文曰:「自予兄弟倡明道學,能使學者視仿而信從者,吁與劉絢有焉。」
謝良佐
謝良佐字顯道,壽春上蔡人。與游酢、呂大臨、楊時在程門,號「四先生」。登進士第。建中靖國初,官京師,召對,忤旨去。監西京竹木場,坐口語系詔獄,廢為民。良佐記問該贍,對人稱引前史,至不差一字。事有未徹,則顙有泚。與程頤別一年,復來見,問其所進,曰:「但去得一『矜』字爾。」頤喜,謂朱光庭曰:「是子力學,切問而近思者也。」所著《論語說》行於世。
游酢
游酢字定夫,建州建陽人。與兄醇以文行知名,所交皆天下士。程頤見之京師,謂其資可以進道。程顥興扶溝學,招使肄業,盡棄其學而學焉。第進士,調蕭山尉。近臣薦其賢,召為太學錄。遷博士,以奉親不便,求知河清縣。范純仁守穎昌府,辟府教授。純仁入相,復為博士。簽書齊州、泉州判官。晚得監察御史,歷知漢陽軍、和舒濠三州而卒。
張繹
張繹字思叔,河南壽安人。家甚微,年長未知學,傭力於市,出聞邑官傳呼聲,心慕之,問人曰:「何以得此?」人曰:「此讀書所致爾。」即發憤力學,遂以文名。預鄉里計偕,謂科舉之習不足為,嘗游僧捨,見僧道楷,將祝發從之。時周行己官河南,警之曰:「何為捨聖人之學而學佛?異日程先生歸,可師也。」會程頤還自涪,乃往受業,頤賞其穎悟。讀《孟子》「志士不忘在溝壑,勇士不忘喪其元」,慨然若有得。未及仕而卒。頤嘗言「吾晚得二士」,謂繹與尹焞也。
蘇昺
蘇昺字季明,武功人。始學於張載,而事二程卒業。元祐末,呂大中薦之,起布衣為太常博士。坐元符上書入邪籍,編管饒州,卒。
尹焞
尹焞字彥明,一字德充,世為洛人。曾祖仲宣七子,而二子有名:長子源字子漸,是謂河內先生;次子洙字師魯,是謂河南先生。源生林,官至虞部員外郎。林生焞。
少師事程頤,嘗應舉,發策有誅元祐諸臣議,焞曰:「噫,尚可以干祿乎哉!」不對而出,告頤曰:「焞不復應進士舉矣。」頤曰:「子有母在。」□享歸告其母陳,母曰:「吾知汝以善養,不知汝以祿養。」頤聞之曰:「賢哉母也!」於是終身不就舉。焞之從師,與河南張繹同時,繹以高識,焞以篤行。頤既沒,焞聚從洛中,非弔喪問疾不出戶,士大夫宗仰之。
靖康初,種師道薦焞德行可備勸講,召至京師,不欲留,賜號和靖處士。戶部尚書梅執禮、御史中丞呂好問、戶部侍郎邵溥、中書舍人胡安國合奏:「河南布衣尹焞學窮根本,德備中和,言動可以師法,器識可以任大,近世招延之士無出其右者。朝廷特召,而命處士以歸,使焞韜藏國器,不為時用,未副陛下側席求賢之意。望特加識擢,以慰士大夫之望。」不報。
次年,金人陷洛,焞闔門被害,焞死復甦,門人舁置山谷中而免。劉豫命偽帥趙斌以禮聘焞,不從則以兵恐之。焞自商州奔蜀,至閬,得程頤《易傳》十卦於其門人呂稽中,又得全本於其婿邢純,拜而受之。紹興四年,止於涪。涪,頤讀《易》地也,辟三畏齋以居,邦人不識其面。侍讀范沖舉焞自代,授左宣教郎,充崇政殿說書,以疾辭。范沖奏給五百金為行資,遣漕臣奉詔至涪親遣。六年,始就道,作文祭頤而後行。
先是,崇寧以來,禁錮元祐學術,高宗渡江,始召楊時置從班,召胡安國居給捨,范沖、朱震俱在講席,薦焞甚力。既召,而左司諫公輔上疏攻程氏之學,乞加屏絕。
焞至九江,上奏曰:「臣僚上言,程頤之學惑亂天下。焞實師頤垂二十年,學之既專,自信甚篤。使焞濫列經筵,其所敷繹,不過聞於師者。捨其所學,是欺君父,加以疾病衰耗,不能支持。」遂留不進。胡安國奉祠居衡陽,上書言:「欲使學者蹈中庸,師孔、孟,而禁不從程頤之學,是入室而不由戶。」
朱震引疾告去,時趙鼎去位,張浚獨相,於是召安國,俾以內祠兼侍讀,而上章薦焞,言其拒劉豫之節,且謂其所學所養有大過人者,乞令江州守臣疾速津送至國門。復以疾辭,上曰:「焞可謂恬退矣。」詔以秘書郎兼說書,趣起之,焞始入見就職。八年,除秘書少監,未幾,力辭求去。上語參知政事劉大中曰:「焞未論所學淵源,足為後進矜式,班列得老成人,亦是朝廷氣象。」乃以焞直徽猷閣,主管萬壽觀,留侍經筵。資善堂翊善朱震疾亟,薦焞自代。輔臣入奏,上慘然曰:「楊時物故,胡安國與震又亡,朕痛惜之。」趙鼎曰:「尹焞學問淵源,可以繼震。」上指奏牘曰:「震亦薦焞代資善之職,但焞微聵,恐教兒費力爾。」除太常少卿,仍兼說書。未幾,稱疾在告,除權禮部侍郎兼侍講。
時金人遣張通古、蕭哲來議和,焞上疏曰:
臣伏見本朝有遼、金之禍,亙古未聞,中國無人,致其猾亂。昨者城下之戰,詭詐百出,二帝北狩,皇族播遷,宗社之危,已絕而續。陛下即位以來十有二年,雖中原未復,仇敵未殄,然而賴祖宗德澤之厚,陛下勤撫之至,億兆之心無有離異。前年徽宗皇帝、寧德皇后崩問遽來,莫究不豫之狀,天下之人痛心疾首,而陛下方且屈意降志,以迎奉梓宮、請問諱日為事。今又為此議,則人心日去,祖宗積累之業,陛下十二年勤撫之功,當決於此矣。不識陛下亦嘗深謀而熟慮乎,抑在廷之臣不以告也?
《禮》曰:「父母之仇不共戴天,兄弟之仇不反兵。」今陛下信仇敵之譎詐,而覬其肯和以紓目前之急,豈不失不共戴天、不反兵之義乎?又況使人之來,以詔諭為名,以割地為要,今以不戴天之仇與之和,臣切為陛下痛惜之。或以金國內亂,懼我襲己,故為甘言以緩王師。倘或果然,尤當鼓士卒之心,雪社稷之恥,尚何和之為務?
又移書秦檜言:
今北使在廷,天下憂憤,若和議一成,彼日益強,我日益怠,侵尋朘削,天下有被發左衽之憂。比者,竊聞主上以父兄未返,降志辱身於九重之中有年矣,然亦自是未聞金人悔過,還二帝於沙漠。繼之梓宮崩問不詳,天下之人痛恨切骨,金人狼虎貪噬之性,不言可見。天下方將以此望於相公,覬有以革其已然,豈意為之已。甚乎。
今之上策,莫如自治。自治之要,內則進君子而遠小人,外則賞當功而罰當罪,使主上孝弟通於神明,道德成於安強,勿以小智孑義而圖大功,不勝幸甚。
疏及書皆不報,於是焞固辭新命。
九年,以徽猷閣待制提舉萬壽觀兼侍講,又辭,且奏言:
臣職在勸講,蔑有發明,期月之間,病告相繼,坐竊厚祿,無補聖聰。先聖有言:「陳力就列,不能者止。」此當去者一也。臣起自草茅,誤膺召用,守道之語,形於訓詞,而臣貪戀寵榮,遂移素守,使朝廷非常不次之舉,獲懷利苟得之人。此當去者二也。比嘗不量分守,言及國事,識見迂陋,已驗於今,跡其庸愚,豈堪時用。此當去者三也。臣自擢春官,未嘗供職,以疾乞去,更獲超遷,有何功勞,得以祗受。此當去者四也。國朝典法,揆之禮經,年至七十,皆當致仕。今臣年齒已及,加以疾病,血氣既衰,戒之在得。此當去者五也。臣聞聖君有從欲之仁,匹夫有莫奪之志,今臣有五當去之義,無一可留之理,乞檢會累奏,放歸田裡。
疏上,以焞提舉江州太平觀。引年告老,轉一官致仕。
焞自入經筵,即乞休致,朝廷以禮留之;浚、鼎既去,秦檜當國,見焞議和疏及與檜書已不樂,至是,得求去之疏,遂不復留。十二年,卒。
當是時,學於程頤之門者固多君子,然求質直弘毅、實體力行若焞者蓋鮮。頤嘗以「魯」許之,且曰:「我死,而不失其正者尹氏子也。」其言行見於《涪陵記善錄》為詳,有《論語解》及《門人問答》傳於世。
楊時
楊時字中立,南劍將樂人。幼穎異,能屬文,稍長,潛心經史。熙寧九年,中進士第。時河南程顥與弟頤講孔、孟絕學於熙、豐之際,河、洛之士翕然師之。時調官不赴,以師禮見顥於穎昌,相得甚歡。其歸也,顥目送之曰:「吾道南矣。」四年而顥死,時聞之,設位哭寢門,而以書赴告同學者。至是,又見程頤於洛,時蓋年四十矣。一日見頤,頤偶瞑坐,時與游酢侍立不去,頤既覺,則門外雪深一尺矣。關西張載嘗著《西銘》,二程深推服之,時疑其近於兼愛,與其師頤辨論往復,聞理一分殊之說,始豁然無疑。
杜門不仕者十年,久之,歷知瀏陽、餘杭、蕭山三縣,皆有惠政,民思之不忘。張舜民在諫垣,薦之,得荊州教授。時安於州縣,未嘗求聞達,而德望日重,四方之士不遠千里從之遊,號曰龜山先生。
時天下多故,有言於蔡京者,以為事至此必敗,宜引舊德老成置諸左右,庶幾猶可及,時宰是之。會有使高麗者,國主問龜山安在,使回以聞。召為秘書郎,遷著作郎。及面對,奏曰:
堯、舜曰「允執厥中」,孟子曰「湯執中」,《洪範》曰「皇建其有極」,歷世聖人由斯道也。熙寧之初,大臣文六藝之言以行其私,祖宗之法紛更殆盡。元祐繼之,盡復祖宗之舊,熙寧之法一切廢革。至紹聖、崇寧抑又甚焉,凡元祐之政事著在令甲,皆焚之以滅其跡。自是分為二黨,縉紳之禍至今未殄。臣願明詔有司,條具祖宗之法,著為綱目,有宜於今者舉而行之,當損益者損益之,元祐、熙、豐姑置勿問,一趨於中而已。
朝廷方圖燕雲,虛內事外,時遂陳時政之弊,且謂:「燕雲之師宜退守內地,以省轉輸之勞,募邊民為弓弩手,以殺常勝軍之勢。」又言:「都城居四達之衢,無高山巨浸以為阻衛,士人懷異心,緩急不可倚仗。」執政不能用。登對,力陳君臣警戒,正在無虞之時,乞為《宣和會計錄》,以周知天下財物出入之數。徽宗首肯之。
除邇英殿說書。聞金人入攻,謂執政曰:「今日事勢如積薪已然,當自奮勵,以竦動觀聽。若示以怯懦之形,委靡不振,則事去矣。昔汲黯在朝,淮南寢謀。論黯之才,未必能過公孫弘輩也,特其直氣可以鎮壓奸雄之心爾。朝廷威望弗振,使奸雄一以弘輩視之,則無復可為也。要害之地,當嚴為守備,比至都城,尚何及哉?近邊州軍宜堅壁清野,勿與之戰,使之自困。若攻戰略地,當遣援兵追襲,使之腹背受敵,則可以制勝矣。」且謂:「今日之事,當以收人心為先。人心不附,雖有高城深池、堅甲利兵,不足恃也。免夫之役,毒被海內,西城聚斂,東南花石,其害尤甚。前此蓋嘗罷之,詔墨未干,而花石供奉之舟已銜尾矣。今雖復申前令,而禍根不除,人誰信之?欲致人和,去此三者,正今日之先務也。」
金人圍京城,勤王之兵四集,而莫相統一。時言:「唐九節度之師不立統帥,雖李、郭之善用兵,猶不免敗衄。今諸路烏合之眾,臣謂當立統帥,一號令,示紀律,而後士卒始用命。」又言:「童貫為三路大帥,敵人侵疆,棄軍而歸,孥戮之有餘罪,朝廷置之不問,故梁方平、何灌皆相繼而遁。當正典刑,以為臣子不忠之戒。童貫握兵二十餘年,覆軍殺將,馴至今日,比聞防城仍用閹人,覆車之轍,不可復蹈。」疏上,除右諫議大夫兼侍講。
敵兵初退,議者欲割三鎮以講和,時極言其不可,曰:「河朔為朝廷重地,而三鎮又河朔之要藩也。自周世宗迄太祖、太宗,百戰而後得之,一旦棄之北庭,使敵騎疾驅,貫吾腹心,不數日可至京城。今聞三鎮之民以死拒之,三鎮拒其前,吾以重兵躡其後,尚可為也。若種師道、劉光世皆一時名將,始至而未用,乞召問方略。」疏上,欽宗詔出師,而議者多持兩端,時抗疏曰:「聞金人駐磁、相,破大名,劫虜驅掠,無有紀極,誓墨未干,而背不旋踵,吾雖欲專守和議,不可得也。夫越數千里之遠,犯人國都,危道也。彼見勤王之師四面而集,亦懼而歸,非愛我而不攻。朝廷割三鎮二十州之地與之,是欲助寇而自攻也。聞肅王初與之約,及河而返,今挾之以往,此敗盟之大者。臣竊謂朝廷宜以肅王為問,責其敗盟,必得肅王而後已。」時太原圍閉數月,而姚古擁兵逗留不進,時上疏乞誅古以肅軍政,拔偏裨之可將者代之。不報。
李綱之罷,太學生伏闕上書,乞留綱與種師道,軍民集者數十萬,朝廷欲防禁之。吳敏乞用時以靖太學,時得召對,言:「諸生伏闕紛紛,忠於朝廷,非有他意,但擇老成有行誼者,為之長貳,則將自定。」欽宗曰:「無逾於卿。」遂以時兼國子祭酒。首言:「三省政事所出,六曹分治,各有攸司。今乃別辟官屬,新進少年,未必賢於六曹長貳。」又言:
蔡京用事二十餘年,蠹國害民,幾危宗社,人所切齒,而論其罪者,莫知其所本也。蓋京以繼述神宗為名,實挾王安石以圖身利,故推尊安石,加以王爵,配饗孔子廟庭。今日之禍,實安石有以啟之。
謹按安石挾管、商之術,飭六藝以文奸言,變亂祖宗法度。當時司馬光已言其為害當見於數十年之後,今日之事,若合符契。其著為邪說以塗學者耳目,而敗壞其心術者,不可縷數,姑即一二事明之。
昔神宗嘗稱美漢文惜百金以罷露台,安石乃言:「陛下若能以堯、舜之道治天下,雖竭天下以自奉不為過,守財之言非正理。」曾不知堯、舜茅茨土階。禹曰:「克儉於家」,則竭天下以自奉者,必非堯、舜之道。其後王黼以應奉花石之事,竭天下之力,號為享上,實安石有以倡之也。其釋《鳧鷖》守成之詩,於末章則謂:「以道守成者,役使群眾,泰而不為驕,宰制萬物,費而不為侈,孰弊弊然以愛為事。」《詩》之所言,正謂能持盈則神祇祖考安樂之,而無後艱爾。自古釋之者,未有泰而不為驕、費而不為侈之說也。安石獨倡為此說,以啟人主之侈心。後蔡京輩輕費妄用,以侈靡為事。安石邪說之害如此。
伏望追奪王爵,明詔中外,毀去配享之像,使邪說淫辭不為學者之惑。疏上,安石遂降從祀之列。士之習王氏學取科第者,已數十年,不復知其非,忽聞以為邪說,議論紛然。諫官馮澥力主王氏,上疏詆時。會學官中有紛爭者,有旨學官並罷,時亦罷祭酒。
時又言:「元祐黨籍中,惟司馬光一人獨褒顯,而未及呂公著、韓維、范純仁、呂大防、安燾輩。建中初言官陳瓘已褒贈,而未及鄒浩。」於是元祐諸臣皆次第牽復。
尋四上章乞罷諫省,除給事中,辭,乞致仕,除徽猷閣直學士、提舉嵩山崇福宮。時力辭直學士之命,改除徽猷閣待制、提舉崇福宮。陛辭,猶上書乞選將練兵,為戰守之備。
高宗即位,除工部侍郎。陛對言:「自古聖賢之君,未有不以典學為務。」除兼侍讀。乞修《建炎會計錄》,乞恤勤王之兵,乞寬假言者。連章丐外,以龍圖閣直學士提舉杭州洞霄宮。已而告老,以本官致仕,優遊林泉,以著書講學為事。卒年八十三,謚文靖。
時在東郡,所交皆天下士,先達陳瓘、鄒浩皆以師禮事時。暨渡江,東南學者推時為程氏正宗。與胡安國往來講論尤多。時浮沉州縣四十有七年,晚居諫省,僅九十日,凡所論列皆切於世道,而其大者,則辟王氏經學,排靖康和議,使邪說不作。凡紹興初崇尚元祐學術,而朱熹、張栻之學得程氏之正,其源委脈絡皆出於時。
子迪,力學通經,亦嘗師程頤雲。
羅從彥
羅從彥字仲素,南劍人。以累舉恩為惠州博羅縣主簿。聞同郡楊時得河南程氏學,慨然慕之,及時為蕭山令,遂徒步往學焉。時熟察之,乃喜曰:「惟從彥可與言道。」於是日益以親,時弟子千餘人,無及從彥者。從彥初見時三日,即驚汗浹背,曰:「不至是,幾虛過一生矣。」嘗與時講《易》,至《乾》九四爻,云:「伊川說甚善。」從彥即鬻田走洛,見頤問之,頤反覆以告,從彥謝曰:「聞之龜山具是矣。」乃歸卒業。
沙縣陳淵,楊時之婿也,嘗詣從彥,必竟日乃返,謂人曰:「自吾交仲素,日聞所不聞,奧學清節,真南州之冠冕也。既而築室山中,絕意仕進,終日端坐,間謁時將溪上,吟詠而歸,恆充然自得焉。
嘗采祖宗故事為《遵堯錄》,靖康中,擬獻闕下,會國難不果。嘗與學者論治曰:「祖宗法度不可廢,德澤不可恃。廢法度則變亂之事起,恃德澤則驕佚之心生。自古德澤最厚莫若堯、舜,向使子孫可恃,則堯、舜必傳其子。法度之明莫如周,向使子孫世守文、武、成、康之遺緒,雖至今存可也。」又曰:「君子在朝則天下必治,蓋君子進則常有亂世之言,使人主多憂而善心生,故治。小人在朝則天下亂,蓋小人進則常有治世之言,使人主多樂而怠心生,故亂。」又曰:「天下之變不起於四方,而起於朝廷。譬如人之傷氣,則寒暑易侵;木之傷心,則風雨易折。故內有林甫之奸,則外必有祿山之亂,內有盧杞之奸,則外必有朱泚之叛。」
其論士行曰:「周、孔之心使人明道,學者果能明道,則周、孔之心,深自得之。三代人才得周、孔之心,而明道者多,故視死生去就如寒暑晝夜之移,而忠義行之者易。至漢、唐以經術古文相尚,而失周、孔之心,故經術自董生、公孫弘倡之,古文自韓愈、柳宗元啟之,於是明道者寡,故視死生去就如萬鈞九鼎之重,而忠義行之者難。嗚呼,學者所見,自漢、唐喪矣。」又曰:「士之立朝,要以正直忠厚為本。正直則朝廷無過失,忠厚則天下無嗟怨。一於正直而不忠厚,則漸入於刻。一於忠厚而不正直,則流入於懦。」其議論醇正類此。
朱熹謂:「龜山倡道東南,士之遊其門者甚眾,然潛思力行、任重詣極如仲素,一人而已。」紹興中卒,學者稱之曰豫章先生,淳祐間謚文質。
李侗
李侗字願中,南劍州劍浦人。年二十四,聞郡人羅從彥得河、洛之學,遂以書謁之,其略曰:
侗聞之,天下有三本焉,父生之,師教之,君治之,闕其一則本不立。古之聖賢莫不有師,其肄業之勤惰,涉道之淺深,求益之先後,若存若亡,其詳不可得而考。惟洙、泗之間,七十二弟子之徒,議論問答,具在方冊,有足稽焉,是得夫子而益明矣。孟氏之後,道失其傳,枝分派別,自立門戶,天下真儒不復見於世。其聚徒成群,所以相傳授者,句讀文義而已爾,謂之熄焉可也。
其惟先生服膺龜山先生之講席有年矣,況嘗及伊川先生之門,得不傳之道於千五百年之後,性明而修,行完而潔,擴之以廣大,體之以仁恕,精深微妙,各極其至,漢、唐諸儒無近似者。至於不言而飲人以和,與人並立而使人化,如春風發物,蓋亦莫知其所以然也。凡讀聖賢之書,粗有識見者,孰不願得授經門下,以質所疑,至於異論之人,固當置而勿論也。
侗之愚鄙,徒以習舉子業,不得服役於門下,而今日拳拳欲求教者,以謂所求有大於利祿也。抑侗聞之,道可以治心,猶食之充飽,衣之御寒也。人有迫於饑寒之患者,皇皇焉為衣食之謀,造次顛沛,未始忘也。至於心之不治,有沒世不知慮,豈愛心不若口體哉,弗思甚矣。
侗不量資質之陋,徒以祖父以儒學起家,不忍墜箕裘之業,孜孜矻矻為利祿之學,雖知真儒有作,聞風而起,固不若先生親炙之得於動靜語默之間,目擊而意全也。今生二十有四歲,茫乎未有所止,燭理未明而是非無以辨,宅心不廣而喜怒易以搖,操履不完而悔吝多,精神不充而智巧襲,揀焉而不淨,守焉而不敷,朝夕恐懼,不啻如饑寒切身者求充飢御寒之具也。不然,安敢以不肖之身為先生之累哉。
從之累年,授《春秋》、《中庸》、《語》、《孟》之說。從彥好靜坐,侗退入室中,亦靜坐。從彥令靜中看喜怒哀樂未發前氣象,而求所謂「中」者,久之,而於天下之理該攝洞貫,以次融釋,各有條序,從彥亟稱許焉。
既而退居山田,謝絕世故余四十年,食飲或不充,而怡然自適。事親孝謹,仲兄性剛多忤,侗事之得其歡心。閨門內外,夷愉肅穆,若無人聲,而眾事自理。親戚有貧不能婚嫁者,則為經理振助之。與鄉人處,飲食言笑,終日油油如也。
其接後學,答問不倦,雖隨人淺深施教,而必自反身自得始。故其言曰:「學問之道不在多言,但默坐澄心,體認天理。若是,雖一毫私慾之發,亦退聽矣。」又曰:「學者之病,在於未有灑然冰解凍釋處。如孔門諸子,群居終日,交相切磨,又得夫子為之依歸,日用之間觀感而化者多矣。恐於融釋而不脫落處,非言說所及也。」又曰:「讀書者知其所言莫非吾事,而即吾身以求之,則凡聖賢所至而吾所未至者,皆可勉而進矣。若直求之文字,以資誦說,其不為玩物喪志者幾希。」又曰:「講學切在深潛縝密,然後氣味深長,蹊徑不差。若概以理一,而不察其分之殊,此學者所以流於疑似亂真之說而不自知也。」嘗以黃庭堅之稱濂溪周茂叔「胸中酒落,如光風霽月」,為善形容有道者氣象,嘗諷誦之,而顧謂學者存此於胸中,庶幾遇事廓然,而義理少進矣。
其語《中庸》曰:「聖門之傳是書,其所以開悟後學無遺策矣。然所謂『喜怒哀樂未發謂之中』者,又一篇之指要也。若徒記誦而已,則亦奚以為哉?必也體之於身,實見是理,若顏子之歎,卓然若有所見,而不違乎心目之間,然後擴充而往,無所不通,則庶乎其可以言《中庸》矣。」其語《春秋》曰:「《春秋》一事各是發明一例,如觀山水,徙步而形勢不同,不可拘以一法。然所以難言者,蓋以常人之心推測聖人,未到聖人灑然處,豈能無失耶?」
侗既閒居,若無意當世,而傷時憂國,論事感激動人。嘗曰:「今日三綱不振,義利不分。三綱不振,故人心邪僻,不堪任用,是致上下之氣間隔,而中國日衰。義利不分,故自王安石用事,陷溺人心,至今不自知覺。人趨利而不知義,則主勢日孤,人主當於此留意,不然,則是所謂『雖有粟,吾得而食諸』也。」
是時吏部員外郎朱松與侗為同門友,雅重侗,遣子熹從學,熹卒得其傳。沙縣鄧迪嘗謂松曰:「願中如冰壺秋月,瑩徹無瑕,非吾曹所及。」松以謂知言。而熹亦稱同:「姿稟勁特,氣節豪邁,而充養完粹,無復圭角,精純之氣達於面目,色溫言厲,神定氣和,語默動靜,端詳閒泰,自然之中若有成法。平日恂恂,於事若無甚可否,及其酬酢事變,斷以義理,則有截然不可犯者。」又謂自從侗學,辭去復來,則所聞益超絕。其上達不已如此。
侗子友直、信甫皆舉進士,試吏旁郡,更請迎養。歸道武夷,會閩帥汪應辰以書幣來迎,侗往見之,至之日疾作,遂卒,年七十有一。
信甫仕至監察御史,出知衢州,擢廣東、江東憲,以特立不容於朝雲。
宋史 (송사) 365
宋史(송사)
脫脫[토크토] 등
卷三百六十五 列傳第一百二十四
岳飛
维基百科條目︰ 岳飛岳飛字鵬舉,相州湯陰人。世力農。父和,能節食以濟饑者。有耕侵其地,割而與之;貰其財者不責償。飛生時,有大禽若鵠,飛鳴室上,因以為名。未彌月,河決內黃,水暴至,母姚抱飛坐甕中,衝濤及岸得免,人異之。
少負氣節,沈厚寡言,家貧力學,尤好《左氏春秋》、孫吳兵法。生有神力,未冠,挽弓三百斤,弩八石。學射於周同,盡其術,能左右射。同死,朔望設祭於其冢。父義之,曰:「汝為時用,其徇國死義乎。」
宣和四年,真定宣撫劉韐募敢戰士,飛應募。相有劇賊陶俊、賈進和,飛請百騎滅之。遣卒偽為商入賊境,賊掠以充部伍。飛遣百人伏山下,自領數十騎逼賊壘。賊出戰,飛陽北,賊來追之,伏兵起,先所遣卒擒俊及進和以歸。
康王至相,飛因劉浩見,命招賊吉倩,倩以衆三百八十人降。補承信郎。以鐵騎三百往李固渡嘗敵,敗之。從浩解東京圍,與敵相持於滑南,領百騎習兵河上。敵猝至,飛麾其徒曰:「敵雖衆,未知吾虛實,當及其未定擊之。」乃獨馳迎敵。有梟將舞刀而前,飛斬之,敵大敗。遷秉義郎,隸留守宗澤。戰開德、曹州皆有功,澤大奇之,曰:「爾勇智才藝,古良將不能過,然好野戰,非萬全計。」因授以陣圖。飛曰:「陣而後戰,兵法之常,運用之妙,存乎一心。」澤是其言。
康王即位,飛上書數千言,大略謂:「陛下已登大寶,社稷有主,已足伐敵之謀,而勤王之師日集,彼方謂吾素弱,宜乘其怠擊之。黃潛善、汪伯彥輩不能承聖意恢復,奉車駕日益南,恐不足繫中原之望。臣願陛下乘敵穴未固,親率六軍北渡,則將士作氣,中原可復。」書聞,以越職奪官歸。
詣河北招討使張所,所待以國士,借補修武郎,充中軍統領。所問曰:「汝能敵幾何?」飛曰:「勇不足恃,用兵在先定謀,欒枝曳柴以敗荊,莫敖采樵以致絞,皆謀定也。」所矍然曰:「君殆非行伍中人。」飛因說之曰:「國家都汴,恃河北以為固。苟馮據要衝,峙列重鎮,一城受圍,則諸城或撓或救,金人不能窺河南,而京師根本之地固矣。招撫誠能提兵壓境,飛唯命是從。」所大喜,借補武經郎。
命從王彥渡河,至新鄉,金兵盛,彥不敢進。飛獨引所部鏖戰,奪其纛而舞,諸軍爭奮,遂拔新鄉。翌日,戰侯兆川,身被十餘創,士皆死戰,又敗之。夜屯石門山下,或傳金兵復至,一軍皆驚,飛堅臥不動,金兵卒不來。食盡,走彥壁乞糧,彥不許。飛引兵益北,戰于太行山,擒金將拓跋耶烏。居數日,復遇敵,飛單騎持丈八鐵槍,刺殺黑風大王,敵衆敗走。飛自知與彥有隙,復歸宗澤,為留守司統制。澤卒,杜充代之,飛居故職。
二年,戰胙城,又戰黑龍潭,皆大捷。從閭勍保護陵寢,大戰汜水關,射殪金將,大破其衆。駐軍竹蘆渡,與敵相持,選精銳三百伏前山下,令各以薪芻交縛兩束,夜半,爇四端而舉之。金人疑援兵至,驚潰。
三年,賊王善、曹成、孔彥舟等合衆五十萬,薄南薰門。飛所部僅八百,衆懼不敵,飛曰:「吾為諸君破之。」左挾弓,右運矛,橫衝其陣,賊亂,大敗之。又擒賊杜叔五、孫海于東明。借補英州刺史。王善圍陳州,飛戰于清河,擒其將孫勝、孫清,授真刺史。
杜充將還建康,飛曰:「中原地尺寸不可棄,今一舉足,此地非我有,他日欲復取之,非數十萬衆不可。」充不聽,遂與俱歸。師次鐵路步,遇賊張用,至六合遇李成,與戰,皆敗之。成遣輕騎劫憲臣犒軍銀帛,飛進兵掩擊之,成奔江西。時命充守建康,金人與成合寇烏江,充閉門不出。飛泣諫請視師,充竟不出。金人遂由馬家渡渡江,充遣飛等迎戰,王𤫉先遁,諸將皆潰,獨飛力戰。
會充已降金,諸將多行剽掠,惟飛軍秋毫無所犯。兀朮趨杭州,飛要擊至廣德境中,六戰皆捷,擒其將王權,俘簽軍首領四十餘。察其可用者,結以恩遣還,令夜斫營縱火,飛乘亂縱擊,大敗之。駐軍鍾村,軍無見糧,將士忍饑,不敢擾民。金所籍兵相謂曰:「此岳爺爺軍。」爭來降附。
四年,兀朮攻常州,宜興令迎飛移屯焉。盜郭吉聞飛來,遁入湖,飛遣王貴、傅慶追破之,又遣辯士馬皐、林聚盡降其衆。有張威武者不從,飛單騎入其營,斬之。避地者賴以免,圖飛像祠之。
金人再攻常州,飛四戰皆捷;尾襲於鎮江東,又捷;戰于清水亭,又大捷,橫屍十五里。兀朮趨建康,飛設伏牛頭山待之。夜,令百人黑衣混金營中擾之,金兵驚,自相攻擊。兀朮次龍灣,飛以騎三百、步兵二千馳至新城,大破之。兀朮奔淮西,遂復建康。飛奏:「建康為要害之地,宜選兵固守,仍益兵守淮,拱護腹心。」帝嘉納。兀朮歸,飛邀擊于靜安,敗之。
詔討戚方,飛以三千人營于苦嶺。方遁,俄益兵來,飛自領兵千人,戰數十合,皆捷。會張俊兵至,方遂降。范宗尹言張俊自浙西來,盛稱飛可用,遷通、泰鎮撫使兼知泰州。飛辭,乞淮南東路一重難任使,收復本路州郡,乘機漸進,使山東、河北、河東、京畿等路次第而復。
會金攻楚急,詔張俊援之。俊辭,乃遣飛行,而命劉光世出兵援飛。飛屯三墪為楚援,尋抵承州,三戰三捷,殺高太保,俘酋長七十餘人。光世等皆不敢前,飛師孤力寡,楚遂陷。詔飛還守通、泰,有旨可守即守,如不可,但以沙洲保護百姓,伺便掩擊。飛以泰無險可恃,退保柴墟,戰于南霸橋,金大敗。渡百姓於沙上,飛以精騎二百殿,金兵不敢近。飛以泰州失守待罪。
紹興元年,張俊請飛同討李成。時成將馬進犯洪州,連營西山。飛曰:「賊貪而不慮後,若以騎兵自上流絕生米渡,出其不意,破之必矣。」飛請自為先鋒,俊大喜。飛重鎧躍馬,潛出賊右,突其陣,所部從之。進大敗,走筠州。飛抵城東,賊出城,布陣十五里,飛設伏,以紅羅為幟,上刺「岳」字,選騎二百隨幟而前。賊易其少,薄之,伏發,賊敗走。飛使人呼曰:「不從賊者坐,吾不汝殺。」坐而降者八萬餘人。進以餘卒奔成于南康。飛夜引兵至朱家山,又斬其將趙萬。成聞進敗,自引兵十餘萬來。飛與遇於樓子莊,大破成軍,追斬進。成走蘄州,降偽齊。
張用寇江西,用亦相人,飛以書諭之曰:「吾與汝同里,南薰門、鐵路步之戰,皆汝所悉。今吾在此,欲戰則出,不戰則降。」用得書曰:「果吾父也。」遂降。
江、淮平,俊奏飛功第一,加神武右軍副統制,留洪州,彈壓盜賊,授親衞大夫、建州觀察使。建寇范汝為陷邵武,江西安撫李回檄飛分兵保建昌軍及撫州,飛遣人以「岳」字幟植城門,賊望見,相戒勿犯。賊黨姚達、饒青逼建昌,飛遣王萬、徐慶討擒之。升神武副軍都統制。
二年,賊曹成擁衆十餘萬,由江西歷湖湘,據道、賀二州。命飛權知潭州,兼權荊湖東路安撫都總管,付金字牌、黃旗招成。成聞飛將至,驚曰:「岳家軍來矣。」即分道而遁。飛至茶陵,奉詔招之,成不從。飛奏:「比年多命招安,故盜力強則肆暴,力屈則就招,苟不略加剿除,蠭起之衆未可遽殄。」許之。
飛入賀州境,得成諜者,縛之帳下。飛出帳調兵食,吏曰:「糧盡矣,奈何?」飛陽曰:「姑反茶陵。」已而顧諜若失意狀,頓足而入,陰令逸之。諜歸告成,成大喜,期翌日來追。飛命士蓐食,潛趨繞嶺,未明,已至太平場,破其砦。成據險拒飛,飛麾兵掩擊,賊大潰。成走據北藏嶺、上梧關,遣將迎戰,飛不陣而鼓,士爭奮,奪二隘據之。成又自桂嶺置砦至北藏嶺,連控隘道,親以衆十餘萬守蓬頭嶺。飛部才八千,一鼓登嶺,破其衆,成奔連州。飛謂張憲等曰:「成黨散去,追而殺之,則脅從者可憫,縱之則復聚為盜。今遣若等誅其酋而撫其衆,慎勿妄殺,累主上保民之仁。」於是憲自賀、連,徐慶自邵、道,王貴自郴、桂,招降者二萬,與飛會連州。進兵追成,成走宣撫司降。時以盛夏行師瘴地,撫循有方,士無一人死癘者,嶺表平。授武安軍承宣使,屯江州。甫入境,安撫李回檄飛捕劇賊馬友、郝通、劉忠、李通、李宗亮、張式,皆平之。
三年春,召赴行在。江西宣諭劉大中奏:「飛兵有紀律,人恃以安,今赴行在,恐盜復起。」不果行。時虔、吉盜連兵寇掠循、梅、廣、惠、英、韶、南雄、南安、建昌、汀、邵武諸郡,帝乃專命飛平之。飛至虔州,固石洞賊彭友悉衆至雩都迎戰,躍馬馳突,飛麾兵即馬上擒之,餘酋退保固石洞。洞高峻環水,止一徑可入。飛列騎山下,令皆持滿,黎明,遣死士疾馳登山,賊衆亂,棄山而下,騎兵圍之。賊呼丐命,飛令勿殺,受其降。授徐慶等方略,捕諸郡餘賊,皆破降之。初,以隆祐震驚之故,密旨令飛屠虔城。飛請誅首惡而赦脅從,不許;請至三四,帝乃曲赦。人感其德,繪像祠之。餘寇高聚、張成犯袁州,飛遣王貴平之。
秋,入見,帝手書「精忠岳飛」字,製旗以賜之。授鎮南軍承宣使、江南西路沿江制置使,又改神武後軍都統制,仍制置使,李山、吳全、吳錫、李橫、牛皐皆隸焉。 偽齊遣李成挾金人入侵,破襄陽、唐、鄧、隨、郢諸州及信陽軍,湖寇楊么亦與偽齊通,欲順流而下,李成又欲自江西陸行,趨兩浙與么會。帝命飛為之備。
四年,除兼荊南、鄂岳州制置使。飛奏:「襄陽等六郡為恢復中原基本,今當先取六郡,以除心膂之病。李成遠遁,然後加兵湖湘,以殄羣盜。」帝以諭趙鼎,鼎曰:「知上流利害,無如飛者。」遂授黃復州、漢陽軍、德安府制置使。飛渡江中流,顧幕屬曰:「飛不擒賊,不涉此江。」抵郢州城下,偽將京超號「萬人敵」,乘城拒飛。飛鼓衆而登,超投崖死,復郢州,遣張憲、徐慶復隨州。飛趣襄陽,李成迎戰,左臨襄江,飛笑曰:「步兵利險阻,騎兵利平曠。成左列騎江岸,右列步平地,雖衆十萬何能為。」舉鞭指王貴曰:「爾以長槍步卒擊其騎兵。」指牛皐曰:「爾以騎兵擊其步卒。」合戰,馬應槍而斃,後騎皆擁入江,步卒死者無數,成夜遁,復襄陽。劉豫益成兵屯新野,飛與王萬夾擊之,連破其衆。
飛奏:「金賊所愛惟子女金帛,志已驕惰;劉豫僭偽,人心終不忘宋。如以精兵二十萬,直擣中原,恢復故疆,誠易為力。襄陽、隨、郢地皆膏腴,苟行營田,其利為厚。臣候糧足,即過江北剿戮敵兵。」時方重深入之舉,而營田之議自是興矣。
進兵鄧州,成與金將劉合孛堇列砦拒飛。飛遣王貴、張憲掩擊,賊衆大潰,劉合孛堇僅以身免。賊黨高仲退保鄧城,飛引兵一鼓拔之,擒高仲,復鄧州。帝聞之,喜曰:「朕素聞岳飛行軍有紀律,未知能破敵如此。」又復唐州、信陽軍。
襄漢平,飛辭制置使,乞委重臣經畫荊襄,不許。趙鼎奏:「湖北鄂、岳最為上流要害,乞令飛屯鄂、岳,不惟江西藉其聲勢,湖、廣、江、浙亦獲安妥。」乃以隨、郢、唐、鄧、信陽並為襄陽府路隸飛,飛移屯鄂,授清遠軍節度使、湖北路、荊、襄、潭州制置使,封武昌縣開國子。
兀朮、劉豫合兵圍廬州,帝手札命飛解圍,提兵趨廬,偽齊已驅甲騎五千逼城。飛張「岳」字旗與「精忠」旗,金兵一戰而潰,廬州平。飛奏:「襄陽等六郡人戶闕牛、糧,乞量給官錢,免官私逋負,州縣官以招集流亡為殿最。」
五年,入覲,封母國夫人;授飛鎮寧、崇信軍節度使,湖北路、荊襄潭州制置使,進封武昌郡開國侯;又除荊湖南北、襄陽路制置使,神武後軍都統制,命招捕楊么。飛所部皆西北人,不習水戰,飛曰:「兵何常,顧用之何如耳。」先遣使招諭之。賊黨黃佐曰:「岳節使號令如山,若與之敵,萬無生理,不如往降。節使誠信,必善遇我。」遂降。飛表授佐武義大夫,單騎按其部,拊佐背曰:「子知逆順者。果能立功,封侯豈足道?欲復遣子至湖中,視其可乘者擒之,可勸者招之,如何?」佐感泣,誓以死報。
時張浚以都督軍事至潭,參政席益與浚語,疑飛玩寇,欲以聞。浚曰:「岳侯,忠孝人也,兵有深機,胡可易言?」益慙而止。黃佐襲周倫砦,殺倫,擒其統制陳貴等。飛上其功,遷武功大夫。統制任士安不稟王𤫉令,軍以此無功。飛鞭士安使餌賊,曰:「三日賊不平,斬汝。」士安宣言:「岳太尉兵二十萬至矣。」賊見止士安軍,併力攻之。飛設伏,士安戰急,伏四起擊賊,賊走。
會召浚還防秋,飛袖小圖示浚,浚欲俟來年議之。飛曰:「已有定畫,都督能少留,不八日可破賊。」浚曰:「何言之易?」飛曰:「王四廂以王師攻水寇則難,飛以水寇攻水寇則易。水戰我短彼長,以所短攻所長,所以難。若因敵將用敵兵,奪其手足之助,離其腹心之託,使孤立,而後以王師乘之,八日之內,當俘諸酋。」浚許之。
飛遂如鼎州。黃佐招楊欽來降,飛喜曰:「楊欽驍悍,既降,賊腹心潰矣。」表授欽武義大夫,禮遇甚厚,乃復遣歸湖中。兩日,欽說余端、劉詵等降,飛詭罵欽曰:「賊不盡降,何來也?」杖之,復令入湖。是夜,掩賊營,降其衆數萬。么負固不服,方浮舟湖中,以輪激水,其行如飛,旁置撞竿,官舟迎之輒碎。飛伐君山木為巨筏,塞諸港?,又以腐木亂草浮上流而下,擇水淺處,遣善罵者挑之,且行且罵。賊怒來追,則草木壅積,舟輪礙不行。飛亟遣兵擊之,賊奔港中,為筏所拒。官軍乘筏,張牛革以蔽矢石,舉巨木撞其舟,盡壞。么投水,牛皐擒斬之。飛入賊壘,餘酋驚曰:「何神也!」俱降。飛親行諸砦慰撫之,縱老弱歸田,籍少壯為軍,果八日而賊平。浚嘆曰:「岳侯神算也。」初,賊恃其險曰:「欲犯我者,除是飛來。」至是,人以其言為讖。獲賊舟千餘,鄂渚水軍為沿江之冠。詔兼蘄、黃制置使,飛以目疾乞辭軍事,不許,加檢校少保,進封公。還軍鄂州,除荊湖南北、襄陽路招討使。
六年,太行山忠義社梁興等百餘人,慕飛義率衆來歸。飛入覲,面陳:「襄陽自收復後,未置監司,州縣無以按察。」帝從之,以李若虛為京西南路提舉兼轉運、提刑,又令湖北、襄陽府路自知州、通判以下賢否,許飛得自黜陟。
張浚至江上會諸大帥,獨稱飛與韓世忠可倚大事,命飛屯襄陽,以窺中原,曰:「此君素志也。」飛移軍京西,改武勝、定國軍節度使,除宣撫副使,置司襄陽。命往武昌調軍。居母憂,降制起復,飛扶櫬還廬山,連表乞終喪,不許,累詔趣起,乃就軍。又命宣撫河東,節制河北路。首遣王貴等攻虢州,下之,獲糧十五萬石,降其衆數萬。張浚曰:「飛措畫甚大,令已至伊、洛,則太行一帶山砦,必有應者。」飛遣楊再興進兵至長水縣,再戰皆捷,中原響應。又遣人焚蔡州糧。
九月,劉豫遣子麟、侄猊分道寇淮西,劉光世欲舍廬州,張俊欲棄盱眙,同奏召飛以兵東下,欲使飛當其鋒,而己得退保。張浚謂:「岳飛一動,則襄漢何所制?」力沮其議。帝慮俊、光世不足任,命飛東下。飛自破曹成、平楊么,凡六年,皆盛夏行師,致目疾,至是,甚;聞詔即日啟行,未至,麟敗。飛奏至,帝語趙鼎曰:「劉麟敗北不足喜,諸將知尊朝廷為可喜。」遂賜札,言:「敵兵已去淮,卿不須進發,其或襄、鄧、陳、蔡有機可乘,從長措置。」飛乃還軍。時偽齊屯兵窺唐州,飛遣王貴、董先等攻破之,焚其營。奏圖蔡以取中原,不許。飛召貴等還。
七年,入見,帝從容問曰:「卿得良馬否?」飛曰:「臣有二馬,日啖芻豆數斗,飲泉一斛,然非精潔則不受。介而馳,初不甚疾,比行百里始奮迅,自午至酉,猶可二百里。褫鞍甲而不息不汗,若無事然。此其受大而不苟取,力裕而不求逞,致遠之材也。不幸相繼以死。今所乘者,日不過數升,而秣不擇粟,飲不擇泉,攬轡未安,踊踴疾驅,甫百里,力竭汗喘,殆欲斃然。此其寡取易盈,好逞易窮,駑鈍之材也。」帝稱善,曰:「卿今議論極進。」拜太尉,繼除宣撫使兼營田大使。從幸建康,以王德、酈瓊兵隸飛,詔諭德等曰:「聽飛號令,如朕親行。」
飛數見帝,論恢復之略。又手疏言:「金人所以立劉豫於河南,蓋欲荼毒中原,以中國攻中國,粘罕因得休兵觀釁。臣欲陛下假臣月日,便則提兵趨京、洛,據河陽、陝府、潼關,以號召五路叛將。叛將既還,遣王師前進,彼必棄汴而走河北,京畿、陝右可以盡復。然後分兵濬、滑,經略兩河,如此則劉豫成擒,金人可滅,社稷長久之計,實在此舉。」帝答曰:「有臣如此,顧復何憂,進止之機,朕不中制。」又召至寢閣命之曰:「中興之事,一以委卿。」命節制光州。
飛方圖大舉,會秦檜主和,遂不以德、瓊兵隸飛。詔詣都督府與張浚議事,浚謂飛曰:「王德淮西軍所服,浚欲以為都統,而命呂祉以督府參謀領之,如何?」飛曰:「德與瓊素不相下,一旦揠之在上,則必爭。呂尚書不習軍旅,恐不足服衆。」浚曰:「張宣撫如何?」飛曰:「暴而寡謀,尤瓊所不服。」浚曰:「然則楊沂中爾?」飛曰:「沂中視德等爾,豈能馭此軍?」浚艴然曰:「浚固知非太尉不可。」飛曰:「都督以正問飛,不敢不盡其愚,豈以得兵為念耶?」即日上章乞解兵柄,終喪服,以張憲攝軍事,步歸,廬母墓側。浚怒,奏以張宗元為宣撫判官,監其軍。
帝累詔趣飛還職,飛力辭,詔幕屬造廬以死請,凡六日,飛趨朝待罪,帝慰遣之。宗元還言:「將和士銳,人懷忠孝,皆飛訓養所致。」帝大悅。飛奏:「比者寢閣之命,咸謂聖斷已堅,何至今尚未決?臣願提兵進討,順天道,因人心,以曲直為老壯,以逆順為強弱,萬全之効可必。」又奏:「錢塘僻在海隅,非用武地。願陛下建都上游,用漢光武故事,親率六軍,往來督戰。庶將士知聖意所向,人人用命。」未報而酈瓊叛,浚始悔。飛復奏:「願進屯淮甸,伺便擊瓊,期於破滅。」不許,詔駐師江州為淮、浙援。
飛知劉豫結粘罕,而兀朮惡劉豫,可以間而動。會軍中得兀朮諜者,飛陽責之曰:「汝非吾軍中人張斌耶?吾向遣汝至齊,約誘至四太子,汝往不復來。吾繼遣人問,齊已許我,今冬以會合寇江為名,致四太子于清河。汝所持書竟不至,何背我耶?」諜冀緩死,即詭服。乃作蠟書,言與劉豫同謀誅兀朮事,因謂諜曰:「吾今貸汝。」復遣至齊,問舉兵期,刲股納書,戒勿泄。諜歸,以書示兀朮,兀朮大驚,馳白其主,遂廢豫。飛奏:「宜乘廢豫之際,擣其不備,長驅以取中原。」不報。
八年,還軍鄂州。王庶視師江、淮,飛與庶書:「今歲若不舉兵,當納節請閑。」庶甚壯之。秋,召赴行在,命詣資善堂見皇太子。飛退而喜曰:「社稷得人矣,中興基業,其在是乎?」會金遣使將歸河南地,飛言:「金人不可信,和好不可恃,相臣謀國不臧,恐貽後世譏」檜銜之。
九年,以復河南,大赦。飛表謝,寓和議不便之意,有「唾手燕雲,復讎報國」之語。授開府儀同三司,飛力辭,謂:「今日之事,可危而不可安;可憂而不可賀;可訓兵飭士,謹備不虞,而不可論功行賞,取笑敵人。」三詔不受,帝溫言獎諭,乃受。會遣士㒟謁諸陵,飛請以輕騎從洒埽,實欲觀釁以伐謀。又奏:「金人無事請和,此必有肘腋之虞,名以地歸我,實寄之也。」檜白帝止其行。
十年,金人攻拱、亳,劉錡告急,命飛馳援,飛遣張憲、姚政赴之。帝賜札曰:「設施之方,一以委卿,朕不遙度。」飛乃遣王貴、牛皐、董先、楊再興、孟邦傑、李寶等,分布經略西京、汝、鄭、穎昌、陳、曹、光、蔡諸郡;又命梁興渡河,糾合忠義社,取河東、北州縣。又遣兵東援劉錡,西援郭浩,自以其軍長驅以闞中原。將發,密奏言:「先正國本以安人心,然後不常厥居,以示無忘復讎之意。」帝得奏,大褒其忠,授少保,河南府路、陝西、河東北路招討使,尋改河南、北諸路招討使。未幾,所遣諸將相繼奏捷。大軍在穎昌,諸將分道出戰,飛自以輕騎駐郾城,兵勢甚銳。
兀朮大懼,會龍虎大王議,以為諸帥易與,獨飛不可當,欲誘致其師,併力一戰。中外聞之,大懼,詔飛審處自固。飛曰:「金人伎窮矣。」乃日出挑戰,且罵之。兀朮怒,合龍虎大王、蓋天大王與韓常之兵逼郾城。飛遣子雲領騎兵直貫其陣,戒之曰:「不勝,先斬汝!」鏖戰數十合,賊屍布野。
初,兀朮有勁軍,皆重鎧,貫以韋索,三人為聯,號「拐子馬」,官軍不能當。是役也,以萬五千騎來,飛戒步卒以麻札刀入陣,勿仰視,第斫馬足。拐子馬相連,一馬仆,二馬不能行,官軍奮擊,遂大敗之。兀朮大慟曰:「自海上起兵,皆以此勝,今已矣!」兀朮益兵來,部將王剛以五十騎覘敵,遇之,奮斬其將。飛時出視戰地,望見黃塵蔽天,自以四十騎突戰,敗之。
方郾城再捷,飛謂雲曰:「賊屢敗,必還攻穎昌,汝宜速援王貴。」既而兀朮果至,貴將遊奕、雲將背嵬戰于城西。雲以騎兵八百挺前決戰,步軍張左右翼繼之,殺兀朮婿夏金吾、副統軍粘罕索孛堇,兀朮遁去。
梁興會太行忠義及兩河豪傑等,累戰皆捷,中原大震。飛奏:「興等過河,人心願歸朝廷。金兵累敗,兀朮等皆令老少北去,正中興之機。」飛進軍朱仙鎮,距汴京四十五里,與兀朮對壘而陣,遣驍將以背嵬騎五百奮擊,大破之,兀朮遁還汴京。飛檄陵臺令行視諸陵,葺治之。
先是,紹興五年,飛遣梁興等布德意,招結兩河豪傑,山砦韋銓、孫謀等斂兵固堡,以待王師,李通、胡清、李寶、李興、張恩、孫琪等舉衆來歸。金人動息,山川險要,一時皆得其實。盡磁、相、開德、澤、潞、晉、絳、汾、隰之境,皆期日興兵,與官軍會。其所揭旗以「岳」為號,父老百姓爭挽車牽牛,載糗糧以餽義軍,頂盆焚香迎候者,充滿道路。自燕以南,金號令不行,兀朮欲簽軍以抗飛,河北無一人從者。乃嘆曰:「自我起北方以來,未有如今日之挫衂。」金帥烏陵思謀素號桀黠,亦不能制其下,但諭之曰:「毋輕動,俟岳家軍來即降。」金統制王鎮、統領崔慶、將官李覬崔虎華旺等皆率所部降,以至禁衞龍虎大王下忔查千戶高勇之屬,皆密受飛旗牓,自北方來降。金將軍韓常欲以五萬衆內附。飛大喜,語其下曰:「直抵黃龍府,與諸君痛飲爾!」
方指日渡河,而檜欲畫淮以北棄之,風臺臣請班師。飛奏:「金人銳氣沮喪,盡棄輜重,疾走渡河,豪傑向風,士卒用命,時不再來,機難輕失。」檜知飛志銳不可回,乃先請張俊、楊沂中等歸,而後言飛孤軍不可久留,乞令班師。一日奉十二金字牌,飛憤惋泣下,東向再拜曰:「十年之力,廢於一旦。」飛班師,民遮馬慟哭,訴曰:「我等戴香盆、運糧草以迎官軍,金人悉知之。相公去,我輩無噍類矣。」飛亦悲泣,取詔示之曰:「吾不得擅留。」哭聲震野,飛留五日以待其徙,從而南者如市,亟奏以漢上六郡閒田處之。
方兀朮棄汴去,有書生叩馬曰:「太子毋走,岳少保且退矣。」兀朮曰:「岳少保以五百騎破吾十萬,京城日夜望其來,何謂可守?」生曰:「自古未有權臣在內,而大將能立功於外者,岳少保且不免,況欲成功乎?」兀朮悟,遂留。飛既歸,所得州縣,旋復失之。飛力請解兵柄,不許,自廬入觀,帝問之,飛拜謝而已。
十一年,諜報金分道渡淮,飛請合諸帥之兵破敵。兀朮、韓常與龍虎大王疾驅至廬,帝趣飛應援,凡十七札。飛策金人舉國南來,巢穴必虛,若長驅京、洛以擣之,彼必奔命,可坐而敝。時飛方苦寒嗽,力疾而行。又恐帝急於退敵,乃奏:「臣如擣虛,勢必得利,若以為敵方在近,未暇遠圖,欲乞親至蘄、黃,以議攻卻。」帝得奏大喜,賜札曰:「卿苦寒疾,乃為朕行,國爾忘身,誰如卿者?」師至廬州,金兵望風而遁。飛還兵于舒以俟命,帝又賜札,以飛小心恭謹、不專進退為得體。兀朮破濠州,張俊駐軍黃連鎮,不敢進;楊沂中遇伏而敗,帝命飛救之。金人聞飛至,又遁。
時和議既決,檜患飛異己,乃密奏召三大將論功行賞。韓世忠、張俊已至,飛獨後,檜又用參政王次翁計,俟之六七日。既至,授樞密副使,位參知政事上,飛固請還兵柄。五月,詔同俊往楚州措置邊防,總韓世忠軍還駐鎮江。
初,飛在諸將中年最少,以列校拔起,累立顯功,世忠、俊不能平,飛屈己下之,幕中輕銳教飛勿苦降意。金人攻淮西,俊分地也,俊始不敢行,師卒無功。飛聞命即行,遂解廬州圍,帝授飛兩鎮節,俊益恥。楊么平,飛獻俊、世忠樓船各一,兵械畢備,世忠大悅,俊反忌之。淮西之役,俊以前途糧乏訹飛,飛不為止,帝賜札褒諭,有曰:「轉餉艱阻,卿不復顧。」俊疑飛漏言,還朝,反倡言飛逗遛不進,以乏餉為辭。至視世忠軍,俊知世忠忤檜,欲與飛分其背嵬軍,飛議不肯,俊大不悅。及同行楚州城,俊欲修城為備,飛曰:「當戮力以圖恢復,豈可為退保計?」俊變色。
會世忠軍吏景著與總領胡紡言:「二樞密若分世忠軍,恐至生事。」紡上之朝,檜捕著下大理寺,將以扇搖誣世忠。飛馳書告以檜意,世忠見帝自明。俊於是大憾飛,遂倡言飛議棄山陽,且密以飛報世忠事告檜,檜大怒。
初,檜逐趙鼎,飛每對客嘆息,又以恢復為己任,不肯附和議。讀檜奏,至「德無常師,主善為師」之語,惡其欺罔,恚曰:「君臣大倫,根於天性,大臣而忍面謾其主耶!」兀朮遺檜書曰:「汝朝夕以和請,而岳飛方為河北圖,必殺飛,始可和。」檜亦以飛不死,終梗和議,己必及禍,故力謀殺之。以諫議大夫万俟禼與飛有怨,風禼劾飛,又風中丞何鑄、侍御史羅汝楫交章彈論,大率謂:「今春金人攻淮西,飛略至舒、蘄而不進,比與俊按兵淮上,又欲棄山陽而不守。」飛累章請罷樞柄,尋還兩鎮節,充萬壽觀使、奉朝請。檜志未伸也,又諭張俊令劫王貴、誘王俊誣告張憲謀還飛兵。
檜遣使捕飛父子證張憲事,使者至,飛笑曰:「皇天后土,可表此心。」初命何鑄鞠之,飛裂裳以背示鑄,有「盡忠報國」四大字,深入膚理。既而閱實無左驗,鑄明其無辜。改命万俟禼。禼誣:飛與憲書,令虛申探報以動朝廷,雲與憲書,令措置使飛還軍;且言其書已焚。
飛坐繫兩月,無可證者。或教禼以臺章所指淮西事為言,禼喜白檜,簿錄飛家,取當時御札藏之以滅迹。又逼孫革等證飛受詔逗遛,命評事元龜年取行軍時日雜定之,傅會其獄。歲暮,獄不成,檜手書小紙付獄,即報飛死,時年三十九。雲棄市。籍家貲,徙家嶺南。幕屬于鵬等從坐者六人。
初,飛在獄,大理寺丞李若樸何彥猷、大理卿薛仁輔並言飛無罪,禼俱劾去。宗正卿士㒟請以百口保飛,禼亦劾之,竄死建州。布衣劉允升上書訟飛冤,下棘寺以死。凡傅成其獄者,皆遷轉有差。
獄之將上也,韓世忠不平,詣檜詰其實,檜曰:「飛子雲與張憲書雖不明,其事體莫須有。」世忠曰:「『莫須有』三字,何以服天下?」時洪皓在金國中,蠟書馳奏,以為金人所畏服者惟飛,至以父呼之,諸酋聞其死,酌酒相賀。
飛至孝,母留河北,遣人求訪,迎歸。母有痼疾,藥餌必親。母卒,水漿不入口者三日。家無姬侍。吳玠素服飛,願與交驩,飾名姝遺之。飛曰:「主上宵旰,豈大將安樂時?」卻不受,玠益敬服。少豪飲,帝戒之曰:「卿異時到河朔,乃可飲。」遂絕不飲。帝初為飛營第,飛辭曰:「敵未滅,何以家為?」或問天下何時太平,飛曰:「文臣不愛錢,武臣不惜死,天下太平矣。」
師每休捨,課將士注坡跳壕,皆重鎧習之。子雲嘗習注坡,馬躓,怒而鞭之。卒有取民麻一縷以束芻者,立斬以徇。卒夜宿,民開門願納,無敢入者。軍號「凍死不拆屋,餓死不鹵掠。」卒有疾,躬為調藥;諸將遠戍,遣妻問勞其家;死事者哭之而育其孤,或以子婚其女。凡有頒犒,均給軍吏,秋毫不私。
善以少擊衆。欲有所舉,盡召諸統制與謀,謀定而後戰,故有勝無敗。猝遇敵不動,故敵為之語曰:「撼山易,撼岳家軍難。」張俊嘗問用兵之術,曰:「仁、智、信、勇、嚴,闕一不可。」調軍食,必蹙額曰:「東南民力,耗敝極矣。」荊湖平,募民營田,又為屯田,歲省漕運之半。帝手書曹操、諸葛亮、羊祜三事賜之。飛跋其後,獨指操為姦賊而鄙之,尤檜所惡也。
張所死,飛感舊恩,鞠其子宗本,奏以官。李寶自楚來歸,韓世忠留之,寶痛哭願歸飛,世忠以書來諗,飛復曰:「均為國家,何分彼此?」世忠嘆服。襄陽之役,詔光世為援,六郡既復,光世始至,飛奏先賞光世軍。好賢禮士,覽經史,雅歌投壺,恂恂如書生。每辭官,必曰:「將士効力,飛何功之有?」然忠憤激烈,議論持正,不挫於人,卒以此得禍。
檜死,議復飛官。万俟禼謂金方願和,一旦錄故將,疑天下心,不可。及紹興末,金益猖獗,太學生程宏圖上書訟飛冤,詔飛家自便。初,檜惡岳州同飛姓,改為純州,至是仍舊。中丞汪澈宣撫荊、襄,故部曲合辭訟之,哭聲雷震。孝宗詔復飛官,以禮改葬,賜錢百萬,求其後悉官之。建廟於鄂,號忠烈。淳熙六年,謚武穆。嘉定四年,追封鄂王。
五子:雲、雷、霖、震、霆。
子雲
雲,飛養子。年十二,從張憲戰,多得其力,軍中呼曰「贏官人」。飛征伐,未嘗不與,數立奇功,飛輒隱之。每戰,以手握兩鐵椎,重八十斤,先諸軍登城。攻下隨州,又攻破鄧州,襄漢平,功在第一,飛不言。逾年,銓曹辯之,始遷武翼郎、楊么平,功亦第一,又不上。張浚廉得其實,曰:「岳侯避寵榮,廉則廉矣,未得為公也。」奏乞推異數,飛力辭不受。嘗以特旨遷三資,飛辭曰:「士卒冒矢石立奇功,始沾一級,男雲遽躐崇資,何以服衆?」累表不受。穎昌大戰,無慮十數,出入行陣,體被百餘創,甲裳為赤。以功遷忠州防禦使,飛又辭;命帶御器械,飛又力辭之。終左武大夫、提舉醴泉觀。死年二十三。孝宗初,與飛同復元官,以禮祔葬,贈安遠軍承宣使。
雷,忠訓郎、閣門祗候,贈武略郎。霖,朝散大夫、敷文閣待制,贈太中大夫。初,飛下獄,檜令親黨王會搜其家,得御札數篋,束之左藏南庫,霖請於孝宗,還之。霖子珂,以淮西十五御札辯驗彙次,凡出師應援之先後皆可考。嘉定間,為《籲天辯誣集》五卷、《天定錄》二捲上之。震,朝奉大夫、提舉江南東路茶鹽公事。霆,修武郎、閣門祗候。
論曰:西漢而下,若韓、彭、絳、灌之為將,代不乏人,求其文武全器、仁智幷施如宋岳飛者,一代豈多見哉。史稱關雲長通《春秋左氏》學,然未嘗見其文章。飛北伐,軍至汴梁之朱仙鎮,有詔班師,飛自為表答詔,忠義之言,流出肺腑,真有諸葛孔明之風,而卒死於秦檜之手。蓋飛與檜勢不兩立,使飛得志,則金讎可復,宋恥可雪;檜得志,則飛有死而已。昔劉宋殺檀道濟,道濟下獄,嗔目曰:「自壞汝萬里長城!」高宗忍自棄其中原,故忍殺飛,嗚呼寃哉!嗚呼寃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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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三百六十五 列傳第一百二十四
岳飛
维基百科條目︰ 岳飛岳飛字鵬舉,相州湯陰人。世力農。父和,能節食以濟饑者。有耕侵其地,割而與之;貰其財者不責償。飛生時,有大禽若鵠,飛鳴室上,因以為名。未彌月,河決內黃,水暴至,母姚抱飛坐甕中,衝濤及岸得免,人異之。
少負氣節,沈厚寡言,家貧力學,尤好《左氏春秋》、孫吳兵法。生有神力,未冠,挽弓三百斤,弩八石。學射於周同,盡其術,能左右射。同死,朔望設祭於其冢。父義之,曰:「汝為時用,其徇國死義乎。」
宣和四年,真定宣撫劉韐募敢戰士,飛應募。相有劇賊陶俊、賈進和,飛請百騎滅之。遣卒偽為商入賊境,賊掠以充部伍。飛遣百人伏山下,自領數十騎逼賊壘。賊出戰,飛陽北,賊來追之,伏兵起,先所遣卒擒俊及進和以歸。
康王至相,飛因劉浩見,命招賊吉倩,倩以衆三百八十人降。補承信郎。以鐵騎三百往李固渡嘗敵,敗之。從浩解東京圍,與敵相持於滑南,領百騎習兵河上。敵猝至,飛麾其徒曰:「敵雖衆,未知吾虛實,當及其未定擊之。」乃獨馳迎敵。有梟將舞刀而前,飛斬之,敵大敗。遷秉義郎,隸留守宗澤。戰開德、曹州皆有功,澤大奇之,曰:「爾勇智才藝,古良將不能過,然好野戰,非萬全計。」因授以陣圖。飛曰:「陣而後戰,兵法之常,運用之妙,存乎一心。」澤是其言。
康王即位,飛上書數千言,大略謂:「陛下已登大寶,社稷有主,已足伐敵之謀,而勤王之師日集,彼方謂吾素弱,宜乘其怠擊之。黃潛善、汪伯彥輩不能承聖意恢復,奉車駕日益南,恐不足繫中原之望。臣願陛下乘敵穴未固,親率六軍北渡,則將士作氣,中原可復。」書聞,以越職奪官歸。
詣河北招討使張所,所待以國士,借補修武郎,充中軍統領。所問曰:「汝能敵幾何?」飛曰:「勇不足恃,用兵在先定謀,欒枝曳柴以敗荊,莫敖采樵以致絞,皆謀定也。」所矍然曰:「君殆非行伍中人。」飛因說之曰:「國家都汴,恃河北以為固。苟馮據要衝,峙列重鎮,一城受圍,則諸城或撓或救,金人不能窺河南,而京師根本之地固矣。招撫誠能提兵壓境,飛唯命是從。」所大喜,借補武經郎。
命從王彥渡河,至新鄉,金兵盛,彥不敢進。飛獨引所部鏖戰,奪其纛而舞,諸軍爭奮,遂拔新鄉。翌日,戰侯兆川,身被十餘創,士皆死戰,又敗之。夜屯石門山下,或傳金兵復至,一軍皆驚,飛堅臥不動,金兵卒不來。食盡,走彥壁乞糧,彥不許。飛引兵益北,戰于太行山,擒金將拓跋耶烏。居數日,復遇敵,飛單騎持丈八鐵槍,刺殺黑風大王,敵衆敗走。飛自知與彥有隙,復歸宗澤,為留守司統制。澤卒,杜充代之,飛居故職。
二年,戰胙城,又戰黑龍潭,皆大捷。從閭勍保護陵寢,大戰汜水關,射殪金將,大破其衆。駐軍竹蘆渡,與敵相持,選精銳三百伏前山下,令各以薪芻交縛兩束,夜半,爇四端而舉之。金人疑援兵至,驚潰。
三年,賊王善、曹成、孔彥舟等合衆五十萬,薄南薰門。飛所部僅八百,衆懼不敵,飛曰:「吾為諸君破之。」左挾弓,右運矛,橫衝其陣,賊亂,大敗之。又擒賊杜叔五、孫海于東明。借補英州刺史。王善圍陳州,飛戰于清河,擒其將孫勝、孫清,授真刺史。
杜充將還建康,飛曰:「中原地尺寸不可棄,今一舉足,此地非我有,他日欲復取之,非數十萬衆不可。」充不聽,遂與俱歸。師次鐵路步,遇賊張用,至六合遇李成,與戰,皆敗之。成遣輕騎劫憲臣犒軍銀帛,飛進兵掩擊之,成奔江西。時命充守建康,金人與成合寇烏江,充閉門不出。飛泣諫請視師,充竟不出。金人遂由馬家渡渡江,充遣飛等迎戰,王𤫉先遁,諸將皆潰,獨飛力戰。
會充已降金,諸將多行剽掠,惟飛軍秋毫無所犯。兀朮趨杭州,飛要擊至廣德境中,六戰皆捷,擒其將王權,俘簽軍首領四十餘。察其可用者,結以恩遣還,令夜斫營縱火,飛乘亂縱擊,大敗之。駐軍鍾村,軍無見糧,將士忍饑,不敢擾民。金所籍兵相謂曰:「此岳爺爺軍。」爭來降附。
四年,兀朮攻常州,宜興令迎飛移屯焉。盜郭吉聞飛來,遁入湖,飛遣王貴、傅慶追破之,又遣辯士馬皐、林聚盡降其衆。有張威武者不從,飛單騎入其營,斬之。避地者賴以免,圖飛像祠之。
金人再攻常州,飛四戰皆捷;尾襲於鎮江東,又捷;戰于清水亭,又大捷,橫屍十五里。兀朮趨建康,飛設伏牛頭山待之。夜,令百人黑衣混金營中擾之,金兵驚,自相攻擊。兀朮次龍灣,飛以騎三百、步兵二千馳至新城,大破之。兀朮奔淮西,遂復建康。飛奏:「建康為要害之地,宜選兵固守,仍益兵守淮,拱護腹心。」帝嘉納。兀朮歸,飛邀擊于靜安,敗之。
詔討戚方,飛以三千人營于苦嶺。方遁,俄益兵來,飛自領兵千人,戰數十合,皆捷。會張俊兵至,方遂降。范宗尹言張俊自浙西來,盛稱飛可用,遷通、泰鎮撫使兼知泰州。飛辭,乞淮南東路一重難任使,收復本路州郡,乘機漸進,使山東、河北、河東、京畿等路次第而復。
會金攻楚急,詔張俊援之。俊辭,乃遣飛行,而命劉光世出兵援飛。飛屯三墪為楚援,尋抵承州,三戰三捷,殺高太保,俘酋長七十餘人。光世等皆不敢前,飛師孤力寡,楚遂陷。詔飛還守通、泰,有旨可守即守,如不可,但以沙洲保護百姓,伺便掩擊。飛以泰無險可恃,退保柴墟,戰于南霸橋,金大敗。渡百姓於沙上,飛以精騎二百殿,金兵不敢近。飛以泰州失守待罪。
紹興元年,張俊請飛同討李成。時成將馬進犯洪州,連營西山。飛曰:「賊貪而不慮後,若以騎兵自上流絕生米渡,出其不意,破之必矣。」飛請自為先鋒,俊大喜。飛重鎧躍馬,潛出賊右,突其陣,所部從之。進大敗,走筠州。飛抵城東,賊出城,布陣十五里,飛設伏,以紅羅為幟,上刺「岳」字,選騎二百隨幟而前。賊易其少,薄之,伏發,賊敗走。飛使人呼曰:「不從賊者坐,吾不汝殺。」坐而降者八萬餘人。進以餘卒奔成于南康。飛夜引兵至朱家山,又斬其將趙萬。成聞進敗,自引兵十餘萬來。飛與遇於樓子莊,大破成軍,追斬進。成走蘄州,降偽齊。
張用寇江西,用亦相人,飛以書諭之曰:「吾與汝同里,南薰門、鐵路步之戰,皆汝所悉。今吾在此,欲戰則出,不戰則降。」用得書曰:「果吾父也。」遂降。
江、淮平,俊奏飛功第一,加神武右軍副統制,留洪州,彈壓盜賊,授親衞大夫、建州觀察使。建寇范汝為陷邵武,江西安撫李回檄飛分兵保建昌軍及撫州,飛遣人以「岳」字幟植城門,賊望見,相戒勿犯。賊黨姚達、饒青逼建昌,飛遣王萬、徐慶討擒之。升神武副軍都統制。
二年,賊曹成擁衆十餘萬,由江西歷湖湘,據道、賀二州。命飛權知潭州,兼權荊湖東路安撫都總管,付金字牌、黃旗招成。成聞飛將至,驚曰:「岳家軍來矣。」即分道而遁。飛至茶陵,奉詔招之,成不從。飛奏:「比年多命招安,故盜力強則肆暴,力屈則就招,苟不略加剿除,蠭起之衆未可遽殄。」許之。
飛入賀州境,得成諜者,縛之帳下。飛出帳調兵食,吏曰:「糧盡矣,奈何?」飛陽曰:「姑反茶陵。」已而顧諜若失意狀,頓足而入,陰令逸之。諜歸告成,成大喜,期翌日來追。飛命士蓐食,潛趨繞嶺,未明,已至太平場,破其砦。成據險拒飛,飛麾兵掩擊,賊大潰。成走據北藏嶺、上梧關,遣將迎戰,飛不陣而鼓,士爭奮,奪二隘據之。成又自桂嶺置砦至北藏嶺,連控隘道,親以衆十餘萬守蓬頭嶺。飛部才八千,一鼓登嶺,破其衆,成奔連州。飛謂張憲等曰:「成黨散去,追而殺之,則脅從者可憫,縱之則復聚為盜。今遣若等誅其酋而撫其衆,慎勿妄殺,累主上保民之仁。」於是憲自賀、連,徐慶自邵、道,王貴自郴、桂,招降者二萬,與飛會連州。進兵追成,成走宣撫司降。時以盛夏行師瘴地,撫循有方,士無一人死癘者,嶺表平。授武安軍承宣使,屯江州。甫入境,安撫李回檄飛捕劇賊馬友、郝通、劉忠、李通、李宗亮、張式,皆平之。
三年春,召赴行在。江西宣諭劉大中奏:「飛兵有紀律,人恃以安,今赴行在,恐盜復起。」不果行。時虔、吉盜連兵寇掠循、梅、廣、惠、英、韶、南雄、南安、建昌、汀、邵武諸郡,帝乃專命飛平之。飛至虔州,固石洞賊彭友悉衆至雩都迎戰,躍馬馳突,飛麾兵即馬上擒之,餘酋退保固石洞。洞高峻環水,止一徑可入。飛列騎山下,令皆持滿,黎明,遣死士疾馳登山,賊衆亂,棄山而下,騎兵圍之。賊呼丐命,飛令勿殺,受其降。授徐慶等方略,捕諸郡餘賊,皆破降之。初,以隆祐震驚之故,密旨令飛屠虔城。飛請誅首惡而赦脅從,不許;請至三四,帝乃曲赦。人感其德,繪像祠之。餘寇高聚、張成犯袁州,飛遣王貴平之。
秋,入見,帝手書「精忠岳飛」字,製旗以賜之。授鎮南軍承宣使、江南西路沿江制置使,又改神武後軍都統制,仍制置使,李山、吳全、吳錫、李橫、牛皐皆隸焉。 偽齊遣李成挾金人入侵,破襄陽、唐、鄧、隨、郢諸州及信陽軍,湖寇楊么亦與偽齊通,欲順流而下,李成又欲自江西陸行,趨兩浙與么會。帝命飛為之備。
四年,除兼荊南、鄂岳州制置使。飛奏:「襄陽等六郡為恢復中原基本,今當先取六郡,以除心膂之病。李成遠遁,然後加兵湖湘,以殄羣盜。」帝以諭趙鼎,鼎曰:「知上流利害,無如飛者。」遂授黃復州、漢陽軍、德安府制置使。飛渡江中流,顧幕屬曰:「飛不擒賊,不涉此江。」抵郢州城下,偽將京超號「萬人敵」,乘城拒飛。飛鼓衆而登,超投崖死,復郢州,遣張憲、徐慶復隨州。飛趣襄陽,李成迎戰,左臨襄江,飛笑曰:「步兵利險阻,騎兵利平曠。成左列騎江岸,右列步平地,雖衆十萬何能為。」舉鞭指王貴曰:「爾以長槍步卒擊其騎兵。」指牛皐曰:「爾以騎兵擊其步卒。」合戰,馬應槍而斃,後騎皆擁入江,步卒死者無數,成夜遁,復襄陽。劉豫益成兵屯新野,飛與王萬夾擊之,連破其衆。
飛奏:「金賊所愛惟子女金帛,志已驕惰;劉豫僭偽,人心終不忘宋。如以精兵二十萬,直擣中原,恢復故疆,誠易為力。襄陽、隨、郢地皆膏腴,苟行營田,其利為厚。臣候糧足,即過江北剿戮敵兵。」時方重深入之舉,而營田之議自是興矣。
進兵鄧州,成與金將劉合孛堇列砦拒飛。飛遣王貴、張憲掩擊,賊衆大潰,劉合孛堇僅以身免。賊黨高仲退保鄧城,飛引兵一鼓拔之,擒高仲,復鄧州。帝聞之,喜曰:「朕素聞岳飛行軍有紀律,未知能破敵如此。」又復唐州、信陽軍。
襄漢平,飛辭制置使,乞委重臣經畫荊襄,不許。趙鼎奏:「湖北鄂、岳最為上流要害,乞令飛屯鄂、岳,不惟江西藉其聲勢,湖、廣、江、浙亦獲安妥。」乃以隨、郢、唐、鄧、信陽並為襄陽府路隸飛,飛移屯鄂,授清遠軍節度使、湖北路、荊、襄、潭州制置使,封武昌縣開國子。
兀朮、劉豫合兵圍廬州,帝手札命飛解圍,提兵趨廬,偽齊已驅甲騎五千逼城。飛張「岳」字旗與「精忠」旗,金兵一戰而潰,廬州平。飛奏:「襄陽等六郡人戶闕牛、糧,乞量給官錢,免官私逋負,州縣官以招集流亡為殿最。」
五年,入覲,封母國夫人;授飛鎮寧、崇信軍節度使,湖北路、荊襄潭州制置使,進封武昌郡開國侯;又除荊湖南北、襄陽路制置使,神武後軍都統制,命招捕楊么。飛所部皆西北人,不習水戰,飛曰:「兵何常,顧用之何如耳。」先遣使招諭之。賊黨黃佐曰:「岳節使號令如山,若與之敵,萬無生理,不如往降。節使誠信,必善遇我。」遂降。飛表授佐武義大夫,單騎按其部,拊佐背曰:「子知逆順者。果能立功,封侯豈足道?欲復遣子至湖中,視其可乘者擒之,可勸者招之,如何?」佐感泣,誓以死報。
時張浚以都督軍事至潭,參政席益與浚語,疑飛玩寇,欲以聞。浚曰:「岳侯,忠孝人也,兵有深機,胡可易言?」益慙而止。黃佐襲周倫砦,殺倫,擒其統制陳貴等。飛上其功,遷武功大夫。統制任士安不稟王𤫉令,軍以此無功。飛鞭士安使餌賊,曰:「三日賊不平,斬汝。」士安宣言:「岳太尉兵二十萬至矣。」賊見止士安軍,併力攻之。飛設伏,士安戰急,伏四起擊賊,賊走。
會召浚還防秋,飛袖小圖示浚,浚欲俟來年議之。飛曰:「已有定畫,都督能少留,不八日可破賊。」浚曰:「何言之易?」飛曰:「王四廂以王師攻水寇則難,飛以水寇攻水寇則易。水戰我短彼長,以所短攻所長,所以難。若因敵將用敵兵,奪其手足之助,離其腹心之託,使孤立,而後以王師乘之,八日之內,當俘諸酋。」浚許之。
飛遂如鼎州。黃佐招楊欽來降,飛喜曰:「楊欽驍悍,既降,賊腹心潰矣。」表授欽武義大夫,禮遇甚厚,乃復遣歸湖中。兩日,欽說余端、劉詵等降,飛詭罵欽曰:「賊不盡降,何來也?」杖之,復令入湖。是夜,掩賊營,降其衆數萬。么負固不服,方浮舟湖中,以輪激水,其行如飛,旁置撞竿,官舟迎之輒碎。飛伐君山木為巨筏,塞諸港?,又以腐木亂草浮上流而下,擇水淺處,遣善罵者挑之,且行且罵。賊怒來追,則草木壅積,舟輪礙不行。飛亟遣兵擊之,賊奔港中,為筏所拒。官軍乘筏,張牛革以蔽矢石,舉巨木撞其舟,盡壞。么投水,牛皐擒斬之。飛入賊壘,餘酋驚曰:「何神也!」俱降。飛親行諸砦慰撫之,縱老弱歸田,籍少壯為軍,果八日而賊平。浚嘆曰:「岳侯神算也。」初,賊恃其險曰:「欲犯我者,除是飛來。」至是,人以其言為讖。獲賊舟千餘,鄂渚水軍為沿江之冠。詔兼蘄、黃制置使,飛以目疾乞辭軍事,不許,加檢校少保,進封公。還軍鄂州,除荊湖南北、襄陽路招討使。
六年,太行山忠義社梁興等百餘人,慕飛義率衆來歸。飛入覲,面陳:「襄陽自收復後,未置監司,州縣無以按察。」帝從之,以李若虛為京西南路提舉兼轉運、提刑,又令湖北、襄陽府路自知州、通判以下賢否,許飛得自黜陟。
張浚至江上會諸大帥,獨稱飛與韓世忠可倚大事,命飛屯襄陽,以窺中原,曰:「此君素志也。」飛移軍京西,改武勝、定國軍節度使,除宣撫副使,置司襄陽。命往武昌調軍。居母憂,降制起復,飛扶櫬還廬山,連表乞終喪,不許,累詔趣起,乃就軍。又命宣撫河東,節制河北路。首遣王貴等攻虢州,下之,獲糧十五萬石,降其衆數萬。張浚曰:「飛措畫甚大,令已至伊、洛,則太行一帶山砦,必有應者。」飛遣楊再興進兵至長水縣,再戰皆捷,中原響應。又遣人焚蔡州糧。
九月,劉豫遣子麟、侄猊分道寇淮西,劉光世欲舍廬州,張俊欲棄盱眙,同奏召飛以兵東下,欲使飛當其鋒,而己得退保。張浚謂:「岳飛一動,則襄漢何所制?」力沮其議。帝慮俊、光世不足任,命飛東下。飛自破曹成、平楊么,凡六年,皆盛夏行師,致目疾,至是,甚;聞詔即日啟行,未至,麟敗。飛奏至,帝語趙鼎曰:「劉麟敗北不足喜,諸將知尊朝廷為可喜。」遂賜札,言:「敵兵已去淮,卿不須進發,其或襄、鄧、陳、蔡有機可乘,從長措置。」飛乃還軍。時偽齊屯兵窺唐州,飛遣王貴、董先等攻破之,焚其營。奏圖蔡以取中原,不許。飛召貴等還。
七年,入見,帝從容問曰:「卿得良馬否?」飛曰:「臣有二馬,日啖芻豆數斗,飲泉一斛,然非精潔則不受。介而馳,初不甚疾,比行百里始奮迅,自午至酉,猶可二百里。褫鞍甲而不息不汗,若無事然。此其受大而不苟取,力裕而不求逞,致遠之材也。不幸相繼以死。今所乘者,日不過數升,而秣不擇粟,飲不擇泉,攬轡未安,踊踴疾驅,甫百里,力竭汗喘,殆欲斃然。此其寡取易盈,好逞易窮,駑鈍之材也。」帝稱善,曰:「卿今議論極進。」拜太尉,繼除宣撫使兼營田大使。從幸建康,以王德、酈瓊兵隸飛,詔諭德等曰:「聽飛號令,如朕親行。」
飛數見帝,論恢復之略。又手疏言:「金人所以立劉豫於河南,蓋欲荼毒中原,以中國攻中國,粘罕因得休兵觀釁。臣欲陛下假臣月日,便則提兵趨京、洛,據河陽、陝府、潼關,以號召五路叛將。叛將既還,遣王師前進,彼必棄汴而走河北,京畿、陝右可以盡復。然後分兵濬、滑,經略兩河,如此則劉豫成擒,金人可滅,社稷長久之計,實在此舉。」帝答曰:「有臣如此,顧復何憂,進止之機,朕不中制。」又召至寢閣命之曰:「中興之事,一以委卿。」命節制光州。
飛方圖大舉,會秦檜主和,遂不以德、瓊兵隸飛。詔詣都督府與張浚議事,浚謂飛曰:「王德淮西軍所服,浚欲以為都統,而命呂祉以督府參謀領之,如何?」飛曰:「德與瓊素不相下,一旦揠之在上,則必爭。呂尚書不習軍旅,恐不足服衆。」浚曰:「張宣撫如何?」飛曰:「暴而寡謀,尤瓊所不服。」浚曰:「然則楊沂中爾?」飛曰:「沂中視德等爾,豈能馭此軍?」浚艴然曰:「浚固知非太尉不可。」飛曰:「都督以正問飛,不敢不盡其愚,豈以得兵為念耶?」即日上章乞解兵柄,終喪服,以張憲攝軍事,步歸,廬母墓側。浚怒,奏以張宗元為宣撫判官,監其軍。
帝累詔趣飛還職,飛力辭,詔幕屬造廬以死請,凡六日,飛趨朝待罪,帝慰遣之。宗元還言:「將和士銳,人懷忠孝,皆飛訓養所致。」帝大悅。飛奏:「比者寢閣之命,咸謂聖斷已堅,何至今尚未決?臣願提兵進討,順天道,因人心,以曲直為老壯,以逆順為強弱,萬全之効可必。」又奏:「錢塘僻在海隅,非用武地。願陛下建都上游,用漢光武故事,親率六軍,往來督戰。庶將士知聖意所向,人人用命。」未報而酈瓊叛,浚始悔。飛復奏:「願進屯淮甸,伺便擊瓊,期於破滅。」不許,詔駐師江州為淮、浙援。
飛知劉豫結粘罕,而兀朮惡劉豫,可以間而動。會軍中得兀朮諜者,飛陽責之曰:「汝非吾軍中人張斌耶?吾向遣汝至齊,約誘至四太子,汝往不復來。吾繼遣人問,齊已許我,今冬以會合寇江為名,致四太子于清河。汝所持書竟不至,何背我耶?」諜冀緩死,即詭服。乃作蠟書,言與劉豫同謀誅兀朮事,因謂諜曰:「吾今貸汝。」復遣至齊,問舉兵期,刲股納書,戒勿泄。諜歸,以書示兀朮,兀朮大驚,馳白其主,遂廢豫。飛奏:「宜乘廢豫之際,擣其不備,長驅以取中原。」不報。
八年,還軍鄂州。王庶視師江、淮,飛與庶書:「今歲若不舉兵,當納節請閑。」庶甚壯之。秋,召赴行在,命詣資善堂見皇太子。飛退而喜曰:「社稷得人矣,中興基業,其在是乎?」會金遣使將歸河南地,飛言:「金人不可信,和好不可恃,相臣謀國不臧,恐貽後世譏」檜銜之。
九年,以復河南,大赦。飛表謝,寓和議不便之意,有「唾手燕雲,復讎報國」之語。授開府儀同三司,飛力辭,謂:「今日之事,可危而不可安;可憂而不可賀;可訓兵飭士,謹備不虞,而不可論功行賞,取笑敵人。」三詔不受,帝溫言獎諭,乃受。會遣士㒟謁諸陵,飛請以輕騎從洒埽,實欲觀釁以伐謀。又奏:「金人無事請和,此必有肘腋之虞,名以地歸我,實寄之也。」檜白帝止其行。
十年,金人攻拱、亳,劉錡告急,命飛馳援,飛遣張憲、姚政赴之。帝賜札曰:「設施之方,一以委卿,朕不遙度。」飛乃遣王貴、牛皐、董先、楊再興、孟邦傑、李寶等,分布經略西京、汝、鄭、穎昌、陳、曹、光、蔡諸郡;又命梁興渡河,糾合忠義社,取河東、北州縣。又遣兵東援劉錡,西援郭浩,自以其軍長驅以闞中原。將發,密奏言:「先正國本以安人心,然後不常厥居,以示無忘復讎之意。」帝得奏,大褒其忠,授少保,河南府路、陝西、河東北路招討使,尋改河南、北諸路招討使。未幾,所遣諸將相繼奏捷。大軍在穎昌,諸將分道出戰,飛自以輕騎駐郾城,兵勢甚銳。
兀朮大懼,會龍虎大王議,以為諸帥易與,獨飛不可當,欲誘致其師,併力一戰。中外聞之,大懼,詔飛審處自固。飛曰:「金人伎窮矣。」乃日出挑戰,且罵之。兀朮怒,合龍虎大王、蓋天大王與韓常之兵逼郾城。飛遣子雲領騎兵直貫其陣,戒之曰:「不勝,先斬汝!」鏖戰數十合,賊屍布野。
初,兀朮有勁軍,皆重鎧,貫以韋索,三人為聯,號「拐子馬」,官軍不能當。是役也,以萬五千騎來,飛戒步卒以麻札刀入陣,勿仰視,第斫馬足。拐子馬相連,一馬仆,二馬不能行,官軍奮擊,遂大敗之。兀朮大慟曰:「自海上起兵,皆以此勝,今已矣!」兀朮益兵來,部將王剛以五十騎覘敵,遇之,奮斬其將。飛時出視戰地,望見黃塵蔽天,自以四十騎突戰,敗之。
方郾城再捷,飛謂雲曰:「賊屢敗,必還攻穎昌,汝宜速援王貴。」既而兀朮果至,貴將遊奕、雲將背嵬戰于城西。雲以騎兵八百挺前決戰,步軍張左右翼繼之,殺兀朮婿夏金吾、副統軍粘罕索孛堇,兀朮遁去。
梁興會太行忠義及兩河豪傑等,累戰皆捷,中原大震。飛奏:「興等過河,人心願歸朝廷。金兵累敗,兀朮等皆令老少北去,正中興之機。」飛進軍朱仙鎮,距汴京四十五里,與兀朮對壘而陣,遣驍將以背嵬騎五百奮擊,大破之,兀朮遁還汴京。飛檄陵臺令行視諸陵,葺治之。
先是,紹興五年,飛遣梁興等布德意,招結兩河豪傑,山砦韋銓、孫謀等斂兵固堡,以待王師,李通、胡清、李寶、李興、張恩、孫琪等舉衆來歸。金人動息,山川險要,一時皆得其實。盡磁、相、開德、澤、潞、晉、絳、汾、隰之境,皆期日興兵,與官軍會。其所揭旗以「岳」為號,父老百姓爭挽車牽牛,載糗糧以餽義軍,頂盆焚香迎候者,充滿道路。自燕以南,金號令不行,兀朮欲簽軍以抗飛,河北無一人從者。乃嘆曰:「自我起北方以來,未有如今日之挫衂。」金帥烏陵思謀素號桀黠,亦不能制其下,但諭之曰:「毋輕動,俟岳家軍來即降。」金統制王鎮、統領崔慶、將官李覬崔虎華旺等皆率所部降,以至禁衞龍虎大王下忔查千戶高勇之屬,皆密受飛旗牓,自北方來降。金將軍韓常欲以五萬衆內附。飛大喜,語其下曰:「直抵黃龍府,與諸君痛飲爾!」
方指日渡河,而檜欲畫淮以北棄之,風臺臣請班師。飛奏:「金人銳氣沮喪,盡棄輜重,疾走渡河,豪傑向風,士卒用命,時不再來,機難輕失。」檜知飛志銳不可回,乃先請張俊、楊沂中等歸,而後言飛孤軍不可久留,乞令班師。一日奉十二金字牌,飛憤惋泣下,東向再拜曰:「十年之力,廢於一旦。」飛班師,民遮馬慟哭,訴曰:「我等戴香盆、運糧草以迎官軍,金人悉知之。相公去,我輩無噍類矣。」飛亦悲泣,取詔示之曰:「吾不得擅留。」哭聲震野,飛留五日以待其徙,從而南者如市,亟奏以漢上六郡閒田處之。
方兀朮棄汴去,有書生叩馬曰:「太子毋走,岳少保且退矣。」兀朮曰:「岳少保以五百騎破吾十萬,京城日夜望其來,何謂可守?」生曰:「自古未有權臣在內,而大將能立功於外者,岳少保且不免,況欲成功乎?」兀朮悟,遂留。飛既歸,所得州縣,旋復失之。飛力請解兵柄,不許,自廬入觀,帝問之,飛拜謝而已。
十一年,諜報金分道渡淮,飛請合諸帥之兵破敵。兀朮、韓常與龍虎大王疾驅至廬,帝趣飛應援,凡十七札。飛策金人舉國南來,巢穴必虛,若長驅京、洛以擣之,彼必奔命,可坐而敝。時飛方苦寒嗽,力疾而行。又恐帝急於退敵,乃奏:「臣如擣虛,勢必得利,若以為敵方在近,未暇遠圖,欲乞親至蘄、黃,以議攻卻。」帝得奏大喜,賜札曰:「卿苦寒疾,乃為朕行,國爾忘身,誰如卿者?」師至廬州,金兵望風而遁。飛還兵于舒以俟命,帝又賜札,以飛小心恭謹、不專進退為得體。兀朮破濠州,張俊駐軍黃連鎮,不敢進;楊沂中遇伏而敗,帝命飛救之。金人聞飛至,又遁。
時和議既決,檜患飛異己,乃密奏召三大將論功行賞。韓世忠、張俊已至,飛獨後,檜又用參政王次翁計,俟之六七日。既至,授樞密副使,位參知政事上,飛固請還兵柄。五月,詔同俊往楚州措置邊防,總韓世忠軍還駐鎮江。
初,飛在諸將中年最少,以列校拔起,累立顯功,世忠、俊不能平,飛屈己下之,幕中輕銳教飛勿苦降意。金人攻淮西,俊分地也,俊始不敢行,師卒無功。飛聞命即行,遂解廬州圍,帝授飛兩鎮節,俊益恥。楊么平,飛獻俊、世忠樓船各一,兵械畢備,世忠大悅,俊反忌之。淮西之役,俊以前途糧乏訹飛,飛不為止,帝賜札褒諭,有曰:「轉餉艱阻,卿不復顧。」俊疑飛漏言,還朝,反倡言飛逗遛不進,以乏餉為辭。至視世忠軍,俊知世忠忤檜,欲與飛分其背嵬軍,飛議不肯,俊大不悅。及同行楚州城,俊欲修城為備,飛曰:「當戮力以圖恢復,豈可為退保計?」俊變色。
會世忠軍吏景著與總領胡紡言:「二樞密若分世忠軍,恐至生事。」紡上之朝,檜捕著下大理寺,將以扇搖誣世忠。飛馳書告以檜意,世忠見帝自明。俊於是大憾飛,遂倡言飛議棄山陽,且密以飛報世忠事告檜,檜大怒。
初,檜逐趙鼎,飛每對客嘆息,又以恢復為己任,不肯附和議。讀檜奏,至「德無常師,主善為師」之語,惡其欺罔,恚曰:「君臣大倫,根於天性,大臣而忍面謾其主耶!」兀朮遺檜書曰:「汝朝夕以和請,而岳飛方為河北圖,必殺飛,始可和。」檜亦以飛不死,終梗和議,己必及禍,故力謀殺之。以諫議大夫万俟禼與飛有怨,風禼劾飛,又風中丞何鑄、侍御史羅汝楫交章彈論,大率謂:「今春金人攻淮西,飛略至舒、蘄而不進,比與俊按兵淮上,又欲棄山陽而不守。」飛累章請罷樞柄,尋還兩鎮節,充萬壽觀使、奉朝請。檜志未伸也,又諭張俊令劫王貴、誘王俊誣告張憲謀還飛兵。
檜遣使捕飛父子證張憲事,使者至,飛笑曰:「皇天后土,可表此心。」初命何鑄鞠之,飛裂裳以背示鑄,有「盡忠報國」四大字,深入膚理。既而閱實無左驗,鑄明其無辜。改命万俟禼。禼誣:飛與憲書,令虛申探報以動朝廷,雲與憲書,令措置使飛還軍;且言其書已焚。
飛坐繫兩月,無可證者。或教禼以臺章所指淮西事為言,禼喜白檜,簿錄飛家,取當時御札藏之以滅迹。又逼孫革等證飛受詔逗遛,命評事元龜年取行軍時日雜定之,傅會其獄。歲暮,獄不成,檜手書小紙付獄,即報飛死,時年三十九。雲棄市。籍家貲,徙家嶺南。幕屬于鵬等從坐者六人。
初,飛在獄,大理寺丞李若樸何彥猷、大理卿薛仁輔並言飛無罪,禼俱劾去。宗正卿士㒟請以百口保飛,禼亦劾之,竄死建州。布衣劉允升上書訟飛冤,下棘寺以死。凡傅成其獄者,皆遷轉有差。
獄之將上也,韓世忠不平,詣檜詰其實,檜曰:「飛子雲與張憲書雖不明,其事體莫須有。」世忠曰:「『莫須有』三字,何以服天下?」時洪皓在金國中,蠟書馳奏,以為金人所畏服者惟飛,至以父呼之,諸酋聞其死,酌酒相賀。
飛至孝,母留河北,遣人求訪,迎歸。母有痼疾,藥餌必親。母卒,水漿不入口者三日。家無姬侍。吳玠素服飛,願與交驩,飾名姝遺之。飛曰:「主上宵旰,豈大將安樂時?」卻不受,玠益敬服。少豪飲,帝戒之曰:「卿異時到河朔,乃可飲。」遂絕不飲。帝初為飛營第,飛辭曰:「敵未滅,何以家為?」或問天下何時太平,飛曰:「文臣不愛錢,武臣不惜死,天下太平矣。」
師每休捨,課將士注坡跳壕,皆重鎧習之。子雲嘗習注坡,馬躓,怒而鞭之。卒有取民麻一縷以束芻者,立斬以徇。卒夜宿,民開門願納,無敢入者。軍號「凍死不拆屋,餓死不鹵掠。」卒有疾,躬為調藥;諸將遠戍,遣妻問勞其家;死事者哭之而育其孤,或以子婚其女。凡有頒犒,均給軍吏,秋毫不私。
善以少擊衆。欲有所舉,盡召諸統制與謀,謀定而後戰,故有勝無敗。猝遇敵不動,故敵為之語曰:「撼山易,撼岳家軍難。」張俊嘗問用兵之術,曰:「仁、智、信、勇、嚴,闕一不可。」調軍食,必蹙額曰:「東南民力,耗敝極矣。」荊湖平,募民營田,又為屯田,歲省漕運之半。帝手書曹操、諸葛亮、羊祜三事賜之。飛跋其後,獨指操為姦賊而鄙之,尤檜所惡也。
張所死,飛感舊恩,鞠其子宗本,奏以官。李寶自楚來歸,韓世忠留之,寶痛哭願歸飛,世忠以書來諗,飛復曰:「均為國家,何分彼此?」世忠嘆服。襄陽之役,詔光世為援,六郡既復,光世始至,飛奏先賞光世軍。好賢禮士,覽經史,雅歌投壺,恂恂如書生。每辭官,必曰:「將士効力,飛何功之有?」然忠憤激烈,議論持正,不挫於人,卒以此得禍。
檜死,議復飛官。万俟禼謂金方願和,一旦錄故將,疑天下心,不可。及紹興末,金益猖獗,太學生程宏圖上書訟飛冤,詔飛家自便。初,檜惡岳州同飛姓,改為純州,至是仍舊。中丞汪澈宣撫荊、襄,故部曲合辭訟之,哭聲雷震。孝宗詔復飛官,以禮改葬,賜錢百萬,求其後悉官之。建廟於鄂,號忠烈。淳熙六年,謚武穆。嘉定四年,追封鄂王。
五子:雲、雷、霖、震、霆。
子雲
雲,飛養子。年十二,從張憲戰,多得其力,軍中呼曰「贏官人」。飛征伐,未嘗不與,數立奇功,飛輒隱之。每戰,以手握兩鐵椎,重八十斤,先諸軍登城。攻下隨州,又攻破鄧州,襄漢平,功在第一,飛不言。逾年,銓曹辯之,始遷武翼郎、楊么平,功亦第一,又不上。張浚廉得其實,曰:「岳侯避寵榮,廉則廉矣,未得為公也。」奏乞推異數,飛力辭不受。嘗以特旨遷三資,飛辭曰:「士卒冒矢石立奇功,始沾一級,男雲遽躐崇資,何以服衆?」累表不受。穎昌大戰,無慮十數,出入行陣,體被百餘創,甲裳為赤。以功遷忠州防禦使,飛又辭;命帶御器械,飛又力辭之。終左武大夫、提舉醴泉觀。死年二十三。孝宗初,與飛同復元官,以禮祔葬,贈安遠軍承宣使。
雷,忠訓郎、閣門祗候,贈武略郎。霖,朝散大夫、敷文閣待制,贈太中大夫。初,飛下獄,檜令親黨王會搜其家,得御札數篋,束之左藏南庫,霖請於孝宗,還之。霖子珂,以淮西十五御札辯驗彙次,凡出師應援之先後皆可考。嘉定間,為《籲天辯誣集》五卷、《天定錄》二捲上之。震,朝奉大夫、提舉江南東路茶鹽公事。霆,修武郎、閣門祗候。
論曰:西漢而下,若韓、彭、絳、灌之為將,代不乏人,求其文武全器、仁智幷施如宋岳飛者,一代豈多見哉。史稱關雲長通《春秋左氏》學,然未嘗見其文章。飛北伐,軍至汴梁之朱仙鎮,有詔班師,飛自為表答詔,忠義之言,流出肺腑,真有諸葛孔明之風,而卒死於秦檜之手。蓋飛與檜勢不兩立,使飛得志,則金讎可復,宋恥可雪;檜得志,則飛有死而已。昔劉宋殺檀道濟,道濟下獄,嗔目曰:「自壞汝萬里長城!」高宗忍自棄其中原,故忍殺飛,嗚呼寃哉!嗚呼寃哉!
束手無策 (속수무책, shùshǒuwúcè)
束手無策(속수무책)
束手无策(shùshǒuwúcè)
어찌할 방도가 없음.
be at one’s wits end
유의어
一筹莫展(yìchóumòzhǎn, 일주막전) 써 볼 만한 계책이 하나도 없다.
반의어
大刀阔斧(dàdāokuòfǔ, 대도활부) 과감하고 패기가 있다.
束手无策(shùshǒuwúcè)
어찌할 방도가 없음.
be at one’s wits end
유의어
一筹莫展(yìchóumòzhǎn, 일주막전) 써 볼 만한 계책이 하나도 없다.
반의어
大刀阔斧(dàdāokuòfǔ, 대도활부) 과감하고 패기가 있다.
宋書 (송서) 沈約 (심약)
宋書(송서) 沈約(심약)
異名: 宋书(sòngshū)
구분: 역사서
저자: 심약(沈約)
시대: 중국 남북조시대(487년)
중국 남조(南朝) 송(宋,420∼479)의 정사(正史).
《제기(帝紀)》 10권, 《지(志)》나라 30권, 《열전(列傳)》 60권, 도합 100권. 487년 남제(南齊) 무제(武帝)의 칙명(勅命)에 따라 심약(沈約)이 488년에 편찬을 완성한 것으로 송나라 60년(420∼479)의 역사를 기록하였으며, 중국의 사서(史書) 중 가장 권위 있는 25정사에 들어간다. 이 사서는 이미 462년 송나라 효무제(孝武帝)의 칙명에 따라 서원(徐爰) 등이 편찬한 것에, 그 뒤의 역사 등을 보충하여 완성한 것이다.
고사성어
乘风破浪(승풍파랑,chéngfēngpòlàng) 바람을 타고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다. 《송서·종각전(宋書·宗慤傳)》에서 유래함 |
참조항목
二十四史(24사,èrshísìshǐ) |
異名: 宋书(sòngshū)
구분: 역사서
저자: 심약(沈約)
시대: 중국 남북조시대(487년)
중국 남조(南朝) 송(宋,420∼479)의 정사(正史).
《제기(帝紀)》 10권, 《지(志)》나라 30권, 《열전(列傳)》 60권, 도합 100권. 487년 남제(南齊) 무제(武帝)의 칙명(勅命)에 따라 심약(沈約)이 488년에 편찬을 완성한 것으로 송나라 60년(420∼479)의 역사를 기록하였으며, 중국의 사서(史書) 중 가장 권위 있는 25정사에 들어간다. 이 사서는 이미 462년 송나라 효무제(孝武帝)의 칙명에 따라 서원(徐爰) 등이 편찬한 것에, 그 뒤의 역사 등을 보충하여 완성한 것이다.
고사성어
乘风破浪(승풍파랑,chéngfēngpòlàng) 바람을 타고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다. 《송서·종각전(宋書·宗慤傳)》에서 유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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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四史(24사,èrshísìshǐ) |
宋史 (송사) 脫脫 (토크토) 등
宋史(송사)
脫脫[토크토] 등
宋史(Sòngshǐ)
구분: 역사서
저자: 토크토[脫脫] 등
시대: 중국 원(元)
중국 원(元)나라 때의 사서(史書).
중국(中國) 이십사사(二十四史)의 하나. 송(宋)나라의 사서(史書)로 본기(本紀) 47권, 지(志) 162권, 표(表) 32권, 열전(列傳) 255권 등 전 496권이다.
1343년 원(元)나라의 토크토[탈탈(脫脫), 탁극탁(托克托)]이 칙명(勅命)으로 『요사(遼史)』『금사(金史)』와 함께 착수(着手)하여 1345년에 완성(完成)하였다. 북송(北宋) 이래 각 황제마다 편찬한 국사나 실록(實錄) ·일력(日曆) 등을 기초로 하였다. 3년간에 속성했기 때문에 교열이 철저(徹底)하지 않아 내용(內容)에 빠진 것이 많다. 편집 때에 삭제된 부분도 많고 원사료(原史料)는 거의 없어졌거나 분실되었다. 특히 남송(南宋) 말의 부분은 다른 기본적 사료가 적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판본으로서는 지정간본(至正刊本)에 의한 백납본(百衲本)이 가장 오래 되고 우수하다. 고려전(高麗傳)이 수록(收錄)되어 있다.
관련 고사성어
卷365 列傳第124
岳飛
莫须有(막수유,mòxūyǒu) |
卷428 列傳第187 道學二
程氏門人 劉絢 李籲 謝良佐 游酢 張繹 蘇昞 尹焞 楊時 羅從彥 李侗
程门立雪(정문입설,Chéngménlìxuě) |
참조항목
二十四史(24사,èrshísìshǐ) |
脫脫[토크토] 등
宋史(Sòngshǐ)
구분: 역사서
저자: 토크토[脫脫] 등
시대: 중국 원(元)
중국 원(元)나라 때의 사서(史書).
중국(中國) 이십사사(二十四史)의 하나. 송(宋)나라의 사서(史書)로 본기(本紀) 47권, 지(志) 162권, 표(表) 32권, 열전(列傳) 255권 등 전 496권이다.
1343년 원(元)나라의 토크토[탈탈(脫脫), 탁극탁(托克托)]이 칙명(勅命)으로 『요사(遼史)』『금사(金史)』와 함께 착수(着手)하여 1345년에 완성(完成)하였다. 북송(北宋) 이래 각 황제마다 편찬한 국사나 실록(實錄) ·일력(日曆) 등을 기초로 하였다. 3년간에 속성했기 때문에 교열이 철저(徹底)하지 않아 내용(內容)에 빠진 것이 많다. 편집 때에 삭제된 부분도 많고 원사료(原史料)는 거의 없어졌거나 분실되었다. 특히 남송(南宋) 말의 부분은 다른 기본적 사료가 적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판본으로서는 지정간본(至正刊本)에 의한 백납본(百衲本)이 가장 오래 되고 우수하다. 고려전(高麗傳)이 수록(收錄)되어 있다.
관련 고사성어
卷365 列傳第124
岳飛
莫须有(막수유,mòxūyǒu) |
卷428 列傳第187 道學二
程氏門人 劉絢 李籲 謝良佐 游酢 張繹 蘇昞 尹焞 楊時 羅從彥 李侗
程门立雪(정문입설,Chéngménlìxu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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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四史(24사,èrshísìshǐ) |
率獸食人 (솔수식인)
率獸食人(솔수식인)
率 거느릴 솔 | 獸 짐승 수 | 食 먹을 식 | 人 사람 인 |
率獸食人이란 폭정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맹자(孟子) 양혜왕상(梁惠王上)편의 이야기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맹자는 그에게 물었다.
사람을 몽둥이로 죽이는 것이 칼로 죽이는 것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양혜왕은 다름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다른 점이 없다고 하자, 맹자는 말을 계속하였다.
주방에는 살찐 고기가 있고, 마굿간에는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들은 굶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다면 이것은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이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조차도 사람들은 미워하는데, 백성의 부모가 되어 가지고 정치를 해나가는데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면[不免於率獸而食人] 백성의 부모노릇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率 거느릴 솔 | 獸 짐승 수 | 食 먹을 식 | 人 사람 인 |
率獸食人이란 폭정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맹자(孟子) 양혜왕상(梁惠王上)편의 이야기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맹자는 그에게 물었다.
사람을 몽둥이로 죽이는 것이 칼로 죽이는 것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양혜왕은 다름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다른 점이 없다고 하자, 맹자는 말을 계속하였다.
주방에는 살찐 고기가 있고, 마굿간에는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들은 굶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다면 이것은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이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조차도 사람들은 미워하는데, 백성의 부모가 되어 가지고 정치를 해나가는데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면[不免於率獸而食人] 백성의 부모노릇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孫龐鬪智 (손방투지, sūnpángdòuzhì)
孫龐鬪智(손방투지)
孙庞斗智(sūn páng dòu zhì)
孫 손자 손 | 龐 어지러울 방 | 鬪 싸울 투 | 智 지혜 지 |
'손빈(孫矉)과 방연(龐涓)이 지혜를 다투다'라는 뜻으로, 대등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지모를 다하여 경쟁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전국시대의 손빈과 방연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손빈과 방연은 귀곡자(鬼谷子)의 문하에서 함께 병법을 배웠다. 방연은 위(魏)나라 혜왕(慧王)에게 기용되어 부근의 약소 국가들을 정벌하는 공을 세웠다. 제나라 사람인 손빈은 그 재능이 방연보다 한 수 위였다. 혜왕도 손빈의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동문수학한 방연에게 그를 초빙하도록 하였다.
방연은 손빈의 재능을 시기하여, 혜왕에게 손빈이 제나라와 밀통한다고 모함하였다. 손빈은 슬개골을 잘리는 형벌을 당하고, 얼굴에는 죄수임을 나타내는 문자가 새겨졌다. 얼마 뒤 손빈은 위나라를 방문한 제나라 사신들에게 구출되어 제나라로 돌아왔다. 제나라의 대장 전기(田忌)는 위왕(威王)에게 손빈을 천거하였다.
354년에 위나라가 조(趙)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위왕은 전기와 손빈을 각각 대장과 군사(軍師)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였다. 손빈은 조나라를 공격하는 데 병력을 투입하여 방비가 허술해진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을 공격하였다. 그리고는 방연이 조나라 공격을 중단하고 철수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위위구조(圍魏救趙: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하다)'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341년에 위나라는 한(韓)나라를 침공하였다. 제나라 선왕(宣王)은 한나라의 구원 요청을 받고 전기와 손빈을 파견하였다. 손빈은 이번에도 한나라를 구하러 가지 않고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위나라가 대군을 보냈을 때 제나라 군대는 이미 물러간 뒤였다. 방연이 제나라 군대가 머물렀던 곳을 살펴보니 병사들이 솥에 밥을 지어 먹은 흔적이 족히 10만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튿날에는 솥의 숫자가 5만 명으로 줄어 있었고, 그 다음 날에는 2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
방연은 제나라 병사들이 탈영하여 줄어든 것이라 믿고, 이 틈에 제나라를 섬멸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였다. 마릉(馬陵)에 이르러 방연이 병사들을 독려하여 진군하는데, 앞에 나무가 쓰러져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방연이 살펴보니 거기에는 "방연이 이 나무 아래서 죽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방연은 즉시 후퇴하려 하였으나 사방에서 제나라 군대가 공격해 왔다. 제나라 군대의 솥 숫자가 줄어든 것은 방연이 경계심을 풀고 공격해 오도록 유도한 손빈의 책략이었던 것이다. 방연은 퇴로가 끊기자 자결하였다.
이 고사는 《사기》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손방투지는 재능이 비슷한 사람이 계책을 써서 기량을 겨루거나,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원수가 되어 생사를 다투는 일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史記(사기):孫子吳起列傳(손자오기열전)
관련 한자
참조어
圍魏救趙(위위구조) |
손빈, 방연, 사기, 사기:손자오기열전
孫矉, 龐涓, 史記, 史記:孫子吳起列傳
孙庞斗智(sūn páng dòu zhì)
孫 손자 손 | 龐 어지러울 방 | 鬪 싸울 투 | 智 지혜 지 |
'손빈(孫矉)과 방연(龐涓)이 지혜를 다투다'라는 뜻으로, 대등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지모를 다하여 경쟁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전국시대의 손빈과 방연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손빈과 방연은 귀곡자(鬼谷子)의 문하에서 함께 병법을 배웠다. 방연은 위(魏)나라 혜왕(慧王)에게 기용되어 부근의 약소 국가들을 정벌하는 공을 세웠다. 제나라 사람인 손빈은 그 재능이 방연보다 한 수 위였다. 혜왕도 손빈의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동문수학한 방연에게 그를 초빙하도록 하였다.
방연은 손빈의 재능을 시기하여, 혜왕에게 손빈이 제나라와 밀통한다고 모함하였다. 손빈은 슬개골을 잘리는 형벌을 당하고, 얼굴에는 죄수임을 나타내는 문자가 새겨졌다. 얼마 뒤 손빈은 위나라를 방문한 제나라 사신들에게 구출되어 제나라로 돌아왔다. 제나라의 대장 전기(田忌)는 위왕(威王)에게 손빈을 천거하였다.
354년에 위나라가 조(趙)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위왕은 전기와 손빈을 각각 대장과 군사(軍師)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였다. 손빈은 조나라를 공격하는 데 병력을 투입하여 방비가 허술해진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을 공격하였다. 그리고는 방연이 조나라 공격을 중단하고 철수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위위구조(圍魏救趙: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하다)'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341년에 위나라는 한(韓)나라를 침공하였다. 제나라 선왕(宣王)은 한나라의 구원 요청을 받고 전기와 손빈을 파견하였다. 손빈은 이번에도 한나라를 구하러 가지 않고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위나라가 대군을 보냈을 때 제나라 군대는 이미 물러간 뒤였다. 방연이 제나라 군대가 머물렀던 곳을 살펴보니 병사들이 솥에 밥을 지어 먹은 흔적이 족히 10만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튿날에는 솥의 숫자가 5만 명으로 줄어 있었고, 그 다음 날에는 2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
방연은 제나라 병사들이 탈영하여 줄어든 것이라 믿고, 이 틈에 제나라를 섬멸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였다. 마릉(馬陵)에 이르러 방연이 병사들을 독려하여 진군하는데, 앞에 나무가 쓰러져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방연이 살펴보니 거기에는 "방연이 이 나무 아래서 죽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방연은 즉시 후퇴하려 하였으나 사방에서 제나라 군대가 공격해 왔다. 제나라 군대의 솥 숫자가 줄어든 것은 방연이 경계심을 풀고 공격해 오도록 유도한 손빈의 책략이었던 것이다. 방연은 퇴로가 끊기자 자결하였다.
이 고사는 《사기》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손방투지는 재능이 비슷한 사람이 계책을 써서 기량을 겨루거나,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원수가 되어 생사를 다투는 일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史記(사기):孫子吳起列傳(손자오기열전)
관련 한자
참조어
圍魏救趙(위위구조) |
손빈, 방연, 사기, 사기:손자오기열전
孫矉, 龐涓, 史記, 史記:孫子吳起列傳
宋名臣言行錄 (송명신언행록) 朱熹 (주희)
宋名臣言行錄(송명신언행록) 朱熹(주희)
名臣言行錄(명신언행록). 송(宋)나라 때의 명신의 문집(文集). 전기(傳記)를 뽑아 엮은 책(冊). 주희(朱熹)가 엮었음. 전집(前集) 10권, 후집(後集) 14권, 후(後)에 이유무(李幼武)가 엮은 별집(別集). 외집(外執). 속집(續集) 등(等)이 나왔음.
名臣言行錄(명신언행록). 송(宋)나라 때의 명신의 문집(文集). 전기(傳記)를 뽑아 엮은 책(冊). 주희(朱熹)가 엮었음. 전집(前集) 10권, 후집(後集) 14권, 후(後)에 이유무(李幼武)가 엮은 별집(別集). 외집(外執). 속집(續集) 등(等)이 나왔음.
笑裏藏刀 (소리장도, xiàolǐcángdāo)
笑裏藏刀(소리장도)
笑里藏刀(xiàolǐcángdāo)
笑 웃을 소 | 裏 속 리 | 藏 감출 장 | 刀 칼 도 |
三十六計 敵戰計 第十計. 웃음 속에 칼을 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가지다. '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있다'라는 뜻으로, 겉으로는 웃는 낯으로 상냥하게 대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상대방을 해칠 뜻을 품고 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웃음 속에 칼날을 숨기다. 우리 옛말에 '솜으로 칼을 싼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부드러운 말씨와 미소짓는 표정으로 상대방의 경계심을 풀고 방심하게 하라는 말이다. 병법에서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을 믿게 하여 안심시킨 뒤에 허를 찔러 공격하는 계책이다.
원문의 풀이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성의를 보여 적을 안심시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뜻하는 바를 도모하라. 충분히 준비한 후에 행동하라. 마음 속에 剛(강)을 품고 겉으로는 柔(유)를 보여라.[信而安之,陰以圖之,備而後動,勿使有變.剛中柔外也.]"
外柔內剛(외유내강)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전통적으로 '笑裏藏刀'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은 '呂蒙(여몽)' 이다.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에서 관우를 함정에 빠뜨려 사로잡고, 관우가 죽은 후 그의 혼령에 사로잡혀 죽게된 인물, 그가 바로 여몽이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삼국지연의》에서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형주를 차지해 버리고, 파촉을 차지하고, 한중까지 나아가 급기야는 스스로 '漢中王(한중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자, 위나라의 조조는 오나라의 손권과 손을 잡고 형주를 치려고 하였다. 유비는 관우를 보내 형주를 지키게 하면서 위나라의 번성을 치도록 하였다. 吳의 손권은 형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관우는 吳에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노숙의 뒤를 이어 대도독의 자리에 오른 여몽은 관우가 번성을 치러 간 사이에 형주를 공략하고자 하나, 관우가 남겨놓은 봉화대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에 여몽은 자리에 드러눕고 만다. 손권이 크게 걱정하나 '陸遜(육손)'은 그 속을 꿰뚫어 보고 여몽을 문병간다. 여몽은 형주를 탈환하고 싶지만 관우의 봉화대가 걸림돌이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꾀병을 앓은 것이었다. 이에 육손이 조언을 한다.
"관우는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믿고 자기를 당해낼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소. 염려하는 사람은 오직 장군이 있을 뿐이오. 장군은 이러한 기회에 병을 칭탁하고 사직한 다음, 육구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그 사람에게 관우를 비굴한 말로 찬미케 하면 관우는 마음 가득 교만해져서 형주의 군사를 철수시켜 모두 번성으로 향하게 할 것이오. 만일 형주에 방비가 없다면 어찌 함락시키지 못하겠소?"
육구에 주둔한 오나라의 여몽(呂蒙)은 관우가 마음을 놓도록 하기 위하여 병이 든 것처럼 속여 물러갔고, 육손을 추천하며 사직을 청했다.
"만일 인망이 두터운 사람을 쓴다면 관우는 반드시 대비를 할 것이옵니다. 육손은 사려가 깊으나 아직 이름이 덜 알려졌으니 관우가 경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 대신 임용하시면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이옵니다."
이리하여 무명의 육손(陸遜)이 여몽 대신 육구를 지키게 되었다. 육손은 육구에 부임하여 관우의 무용을 칭송하는 겸손한 내용의 편지 한 통을 써서 명마와 이금, 주례 등을 준비해 번성에 있는 관우에게 보냈다. 편지는 말놀림이 극히 겸손하고 조신했다. 관우는 읽고 나서 크게 웃으며 사자를 돌려보냈다. 관우는 노련한 여몽은 경계하였지만 젊고 무명인 육손에 대해서는 애송이라 여기고, 형주 병력의 태반을 거두어 번성을 공격하는 데 투입하였다. 여몽은 형주의 병력이 취약한 틈을 타서 공격하여 봉화대를 침묵시키고 형주를 함락시켰다. 관우는 여몽과 육손의 소리장도 계책에 넘어간 것이다.
연의에서는 여몽을 깎아내리기 위해 위의 계책도 여몽이 아닌 육손이 낸 것으로 되어있고, 또한 관우가 죽은 후 여몽은 관우의 혼령에 씌어 비참하게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正史에 의하면, 위의 계략은 여몽에 의한 것이었고, 여몽은 단지 병 때문에 죽은 것 뿐이었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겉으로는 상냥하게 남을 위하는 척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당나라 고종 때 중서시랑을 지낸 이의부(李義府)이다. 그는 겉으로는 온화하고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미소를 지으며 선량한 얼굴을 하였다.
그러나 마음 속은 각박하고 간사하여 음험한 계책으로 다른 사람들을 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의부의 웃음 속에는 칼이 숨겨져 있다고 말하였다(故時人言義府笑中有刀). 이 고사는 《구당서(舊唐書)》의 〈이의부전〉에 실려 있다. 당나라 현종 때의 간신 이임보(李林甫)의 고사에서 유래된 구밀복검(口蜜腹劍)과 같은 의미이다.
소리장도의 또 다른 예는 바로 '臥薪嘗膽(와신상담)'이라는 고사의 주인공인 越王(월왕) '구천'이다.
춘추시대 말기, 위대한 전략가 손무와 명장 오자서의 힘으로 강국 초나라를 무찌르고 주변나라를 떨게 했던 吳나라의 왕 합려는 초를 치고 난 후, 越나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이 때 손무는 은퇴한 이후이다). 이에 합려의 뒤를 이어 吳王이 된 합려의 손자인 '부차'는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합려의 상이 끝나자 곧 越을 치기 위해 군사를 움직인다. 손무는 없었지만 명장 오자서의 힘으로 월나라는 궤멸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에 월나라는 오왕의 측근인 백비를 매수하여 '월왕 부부가 신하가 되어 오나라에서 생활하는 것'을 조건으로 멸망은 면하게 된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에 와서 오왕 부차의 신하로 생활하게 된다. 이때 '섶에 누워 쓸개를 빨며' 생활한 것이 '臥薪嘗膽(와신상담)'의 고사가 되었다. 오왕 부차의 경계를 풀기 위해 그의 배설물까지 먹어가며 고생을 하여 결국엔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물론 오자서가 반대했지만, 이미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오왕에겐 충신의 강직한 충언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월왕 구천은 고국으로 돌아가 즉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복수를 계획한다. 그리고 오왕에게 많은 보물과 미인 '서시'를 바친다. '찡그린 얼굴도 그렇게 아름다웠다'는 '西施嚬目(서시빈목)'의 주인공인 서시를 선물로 받은 오왕 부차는 점점 더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커다란 궁궐의 공사까지도 실행하는데 월왕은 커다란 목재를 보내 토목공사의 규모를 더 크게 부추켜 吳의 재정을 파탄나게 한다.
또한 한 해는 越나라에 흉년이 들었는데 吳나라에서 곡식을 꾸기로 했다. 과연 곡식을 빌려줄까 싶었으나 '복수를 꾀하고 있다면 곡식을 빌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에 따라 吳에서는 곡식을 꾸어준다. 다음해에는 越에는 풍년이 들었으나 吳에 흉년이 들었다. 월왕 구천은 이 때를 틈타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이 만류한다. 越은 吳에 빚을 갚는다며 곡식을 보냈는데, 이 때 낱알이 좋은 것만을 골라 살짝 쪄서 보냈다. 이에 吳에서는 곡식의 품종이 좋은 것을 보고 다음해에 종자로 쓰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찐 씨앗이 자랄리가 없는 법. 吳에는 그 해에 유래없는 대흉을 맞게 되고, 이를 기회로 越은 吳를 크게 쳐 무너뜨린다. 吳王 부차는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받아주길 청하지만, 越王은 자신이 이미 그렇게 해서 살아남아 복수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인간의 복수심'을 쉽게 보지 않았다. 그러게 吳는 越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월왕 구천은 한 나라의 王으로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하가 되고, 온갖 허드렛일을 다하고, 다른 사람의 대변까지 먹으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리고는 그 힘든 날들을 지나며 복수심이 무뎌지게 하지 않기 위해 고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섶에 누워 쓸개를 빠는' 생활을 계속했다. 또한 吳王의 경계심이 느슨해지게 하기 위해 많은 뇌물을 보내 그 눈을 흐리게 만들었고, 미인 서시를 보내 정사로부터 관심이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급기야 吳를 무너뜨리기에 이른다. 이야말로 여몽의 예보다 훨씬 처절한 '笑裏藏刀'의 예라 할 것이다. 물론 이 예는 '臥薪嘗膽'으로 더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관련 한자
유사어
口蜜腹劍(구밀복검) | 包藏禍心(포장화심) |
참조어
臥薪嘗膽(와신상담) | 西施嚬目(서시빈목) |
36계, 삼십육계, 삼십육계:적전계, 병법
三十六計, 三十六計:敵戰計
笑里藏刀(xiàolǐcángdāo)
笑 웃을 소 | 裏 속 리 | 藏 감출 장 | 刀 칼 도 |
三十六計 敵戰計 第十計. 웃음 속에 칼을 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가지다. '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있다'라는 뜻으로, 겉으로는 웃는 낯으로 상냥하게 대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상대방을 해칠 뜻을 품고 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웃음 속에 칼날을 숨기다. 우리 옛말에 '솜으로 칼을 싼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부드러운 말씨와 미소짓는 표정으로 상대방의 경계심을 풀고 방심하게 하라는 말이다. 병법에서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을 믿게 하여 안심시킨 뒤에 허를 찔러 공격하는 계책이다.
원문의 풀이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성의를 보여 적을 안심시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뜻하는 바를 도모하라. 충분히 준비한 후에 행동하라. 마음 속에 剛(강)을 품고 겉으로는 柔(유)를 보여라.[信而安之,陰以圖之,備而後動,勿使有變.剛中柔外也.]"
外柔內剛(외유내강)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전통적으로 '笑裏藏刀'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은 '呂蒙(여몽)' 이다.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에서 관우를 함정에 빠뜨려 사로잡고, 관우가 죽은 후 그의 혼령에 사로잡혀 죽게된 인물, 그가 바로 여몽이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삼국지연의》에서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형주를 차지해 버리고, 파촉을 차지하고, 한중까지 나아가 급기야는 스스로 '漢中王(한중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자, 위나라의 조조는 오나라의 손권과 손을 잡고 형주를 치려고 하였다. 유비는 관우를 보내 형주를 지키게 하면서 위나라의 번성을 치도록 하였다. 吳의 손권은 형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관우는 吳에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노숙의 뒤를 이어 대도독의 자리에 오른 여몽은 관우가 번성을 치러 간 사이에 형주를 공략하고자 하나, 관우가 남겨놓은 봉화대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에 여몽은 자리에 드러눕고 만다. 손권이 크게 걱정하나 '陸遜(육손)'은 그 속을 꿰뚫어 보고 여몽을 문병간다. 여몽은 형주를 탈환하고 싶지만 관우의 봉화대가 걸림돌이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꾀병을 앓은 것이었다. 이에 육손이 조언을 한다.
"관우는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믿고 자기를 당해낼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소. 염려하는 사람은 오직 장군이 있을 뿐이오. 장군은 이러한 기회에 병을 칭탁하고 사직한 다음, 육구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그 사람에게 관우를 비굴한 말로 찬미케 하면 관우는 마음 가득 교만해져서 형주의 군사를 철수시켜 모두 번성으로 향하게 할 것이오. 만일 형주에 방비가 없다면 어찌 함락시키지 못하겠소?"
육구에 주둔한 오나라의 여몽(呂蒙)은 관우가 마음을 놓도록 하기 위하여 병이 든 것처럼 속여 물러갔고, 육손을 추천하며 사직을 청했다.
"만일 인망이 두터운 사람을 쓴다면 관우는 반드시 대비를 할 것이옵니다. 육손은 사려가 깊으나 아직 이름이 덜 알려졌으니 관우가 경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 대신 임용하시면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이옵니다."
이리하여 무명의 육손(陸遜)이 여몽 대신 육구를 지키게 되었다. 육손은 육구에 부임하여 관우의 무용을 칭송하는 겸손한 내용의 편지 한 통을 써서 명마와 이금, 주례 등을 준비해 번성에 있는 관우에게 보냈다. 편지는 말놀림이 극히 겸손하고 조신했다. 관우는 읽고 나서 크게 웃으며 사자를 돌려보냈다. 관우는 노련한 여몽은 경계하였지만 젊고 무명인 육손에 대해서는 애송이라 여기고, 형주 병력의 태반을 거두어 번성을 공격하는 데 투입하였다. 여몽은 형주의 병력이 취약한 틈을 타서 공격하여 봉화대를 침묵시키고 형주를 함락시켰다. 관우는 여몽과 육손의 소리장도 계책에 넘어간 것이다.
연의에서는 여몽을 깎아내리기 위해 위의 계책도 여몽이 아닌 육손이 낸 것으로 되어있고, 또한 관우가 죽은 후 여몽은 관우의 혼령에 씌어 비참하게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正史에 의하면, 위의 계략은 여몽에 의한 것이었고, 여몽은 단지 병 때문에 죽은 것 뿐이었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겉으로는 상냥하게 남을 위하는 척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당나라 고종 때 중서시랑을 지낸 이의부(李義府)이다. 그는 겉으로는 온화하고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미소를 지으며 선량한 얼굴을 하였다.
그러나 마음 속은 각박하고 간사하여 음험한 계책으로 다른 사람들을 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의부의 웃음 속에는 칼이 숨겨져 있다고 말하였다(故時人言義府笑中有刀). 이 고사는 《구당서(舊唐書)》의 〈이의부전〉에 실려 있다. 당나라 현종 때의 간신 이임보(李林甫)의 고사에서 유래된 구밀복검(口蜜腹劍)과 같은 의미이다.
소리장도의 또 다른 예는 바로 '臥薪嘗膽(와신상담)'이라는 고사의 주인공인 越王(월왕) '구천'이다.
춘추시대 말기, 위대한 전략가 손무와 명장 오자서의 힘으로 강국 초나라를 무찌르고 주변나라를 떨게 했던 吳나라의 왕 합려는 초를 치고 난 후, 越나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이 때 손무는 은퇴한 이후이다). 이에 합려의 뒤를 이어 吳王이 된 합려의 손자인 '부차'는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합려의 상이 끝나자 곧 越을 치기 위해 군사를 움직인다. 손무는 없었지만 명장 오자서의 힘으로 월나라는 궤멸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에 월나라는 오왕의 측근인 백비를 매수하여 '월왕 부부가 신하가 되어 오나라에서 생활하는 것'을 조건으로 멸망은 면하게 된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에 와서 오왕 부차의 신하로 생활하게 된다. 이때 '섶에 누워 쓸개를 빨며' 생활한 것이 '臥薪嘗膽(와신상담)'의 고사가 되었다. 오왕 부차의 경계를 풀기 위해 그의 배설물까지 먹어가며 고생을 하여 결국엔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물론 오자서가 반대했지만, 이미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오왕에겐 충신의 강직한 충언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월왕 구천은 고국으로 돌아가 즉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복수를 계획한다. 그리고 오왕에게 많은 보물과 미인 '서시'를 바친다. '찡그린 얼굴도 그렇게 아름다웠다'는 '西施嚬目(서시빈목)'의 주인공인 서시를 선물로 받은 오왕 부차는 점점 더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커다란 궁궐의 공사까지도 실행하는데 월왕은 커다란 목재를 보내 토목공사의 규모를 더 크게 부추켜 吳의 재정을 파탄나게 한다.
또한 한 해는 越나라에 흉년이 들었는데 吳나라에서 곡식을 꾸기로 했다. 과연 곡식을 빌려줄까 싶었으나 '복수를 꾀하고 있다면 곡식을 빌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에 따라 吳에서는 곡식을 꾸어준다. 다음해에는 越에는 풍년이 들었으나 吳에 흉년이 들었다. 월왕 구천은 이 때를 틈타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이 만류한다. 越은 吳에 빚을 갚는다며 곡식을 보냈는데, 이 때 낱알이 좋은 것만을 골라 살짝 쪄서 보냈다. 이에 吳에서는 곡식의 품종이 좋은 것을 보고 다음해에 종자로 쓰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찐 씨앗이 자랄리가 없는 법. 吳에는 그 해에 유래없는 대흉을 맞게 되고, 이를 기회로 越은 吳를 크게 쳐 무너뜨린다. 吳王 부차는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받아주길 청하지만, 越王은 자신이 이미 그렇게 해서 살아남아 복수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인간의 복수심'을 쉽게 보지 않았다. 그러게 吳는 越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월왕 구천은 한 나라의 王으로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하가 되고, 온갖 허드렛일을 다하고, 다른 사람의 대변까지 먹으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리고는 그 힘든 날들을 지나며 복수심이 무뎌지게 하지 않기 위해 고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섶에 누워 쓸개를 빠는' 생활을 계속했다. 또한 吳王의 경계심이 느슨해지게 하기 위해 많은 뇌물을 보내 그 눈을 흐리게 만들었고, 미인 서시를 보내 정사로부터 관심이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급기야 吳를 무너뜨리기에 이른다. 이야말로 여몽의 예보다 훨씬 처절한 '笑裏藏刀'의 예라 할 것이다. 물론 이 예는 '臥薪嘗膽'으로 더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관련 한자
유사어
口蜜腹劍(구밀복검) | 包藏禍心(포장화심) |
참조어
臥薪嘗膽(와신상담) | 西施嚬目(서시빈목) |
36계, 삼십육계, 삼십육계:적전계, 병법
三十六計, 三十六計:敵戰計
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이로학난성)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학난성)
少 적을 소, 젊을 소 | 年 해 년(연), 아첨할 녕(영) | 易 쉬울 이, 바꿀 역 | 老 늙을 로(노) | 學 배울 학, 가르칠 교, 고지새 할 | 難 어려울 난, 우거질 나 | 成 이룰 성 |
소년(少年)은 늙기 쉬우나 학문(學問)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말
송(宋)나라 대유학자 주자(朱子)의 《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시의 첫 구절이다.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學問)을 이루기는 어렵다[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 학난성)] 순간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 불가경)]
출전
주자(朱子)의 주문공전집(朱文公文集)
少 적을 소, 젊을 소 | 年 해 년(연), 아첨할 녕(영) | 易 쉬울 이, 바꿀 역 | 老 늙을 로(노) | 學 배울 학, 가르칠 교, 고지새 할 | 難 어려울 난, 우거질 나 | 成 이룰 성 |
소년(少年)은 늙기 쉬우나 학문(學問)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말
송(宋)나라 대유학자 주자(朱子)의 《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시의 첫 구절이다.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學問)을 이루기는 어렵다[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 학난성)] 순간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 불가경)]
출전
주자(朱子)의 주문공전집(朱文公文集)
送舊迎新 (송구영신, sòngjiùyíngxīn)
送舊迎新 (송구영신)
送 보낼 송 | 舊 예 구, 옛 구 | 迎 맞을 영 | 新 새 신
送旧迎新 (sòngjiùyíngxīn)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뜻으로, ①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함 ②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함
송고영신(送故迎新)에서 나온 말로 관가에서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 했던 데서 유래(由來)
유의어
送迎(송영) |
절기
送 보낼 송 | 舊 예 구, 옛 구 | 迎 맞을 영 | 新 새 신
送旧迎新 (sòngjiùyíngxīn)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뜻으로, ①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함 ②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함
송고영신(送故迎新)에서 나온 말로 관가에서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 했던 데서 유래(由來)
유의어
送迎(송영) |
절기
蕭規曹隨 (소규조수)
蕭規曹隨(소규조수)
蕭 쓸쓸할 소, 맑은대쑥 소 | 規 법 규 | 曹 무리 조, 성씨 조 | 隨 따를 수, 게으를 타 |
'소하(蕭何:?∼BC 193)가 제정한 법규를 조참(曹參:?∼BC 190)이 따른다'라는 뜻으로, 예전부터 사람들이 쓰던 제도(制度)를 그대로 따르거나 이어 나가는 것을 이르는 말
진(秦)나라 말, 소하(蕭何)는 한(漢)나라의 고조(高祖) 유방(劉邦:재위 BC 202∼BC 195)을 도와 반진(反秦)의 의거를 일으켰다. 그는 한신(韓信:?∼BC 196), 장량(張良:?∼BC 168), 조참과 함께 한나라의 개국공신으로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고 한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웠으며, 흔히들 한신(韓信), 장량(張良) 등과 더불어 한흥삼걸(漢興三杰) 이라 부른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진(秦)나라의 수도 셴양(咸陽)을 공격할 때, 병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납치하는데 정신이 없었지만, 소하는 상부(相府)로 달려가서 지도와 법령 등 중요한 문건들을 수습했다.
훗날, 소하는 재상(宰相)이 되자, 이미 확보한 진나라의 문헌과 자료들을 토대로 전국의 지리나 풍토, 민심 등을 파악하여, 한나라의 법령과 제도를 제정하였다.
당시 유방의 수하에는 조참(曹參)이라는 모사(謀士)가 있었다. 그는 유방의 동향 사람으로서 소하와도 관계가 매우 좋았으므로, 사람들은 두 사람을 소조(蕭曹)라고 불렀다. 소하의 추천으로 승상된 조참은 모든 정책과 법령을 고치지 않고, 소하가 결정해 놓은 것을 따라[蕭規曹隨] 계속 집행하였다.
전한(前漢) 말기의 학자 양웅(楊雄:BC 53∼AD 18)이 지은 《법언(法言)》 연건편(淵騫篇)에는 "소하가 만들어 정한 법규를 조참이 그대로 따랐다[蕭也規 曹也隨]"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전
법언(法言)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蕭 쓸쓸할 소, 맑은대쑥 소 | 規 법 규 | 曹 무리 조, 성씨 조 | 隨 따를 수, 게으를 타 |
'소하(蕭何:?∼BC 193)가 제정한 법규를 조참(曹參:?∼BC 190)이 따른다'라는 뜻으로, 예전부터 사람들이 쓰던 제도(制度)를 그대로 따르거나 이어 나가는 것을 이르는 말
진(秦)나라 말, 소하(蕭何)는 한(漢)나라의 고조(高祖) 유방(劉邦:재위 BC 202∼BC 195)을 도와 반진(反秦)의 의거를 일으켰다. 그는 한신(韓信:?∼BC 196), 장량(張良:?∼BC 168), 조참과 함께 한나라의 개국공신으로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고 한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웠으며, 흔히들 한신(韓信), 장량(張良) 등과 더불어 한흥삼걸(漢興三杰) 이라 부른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진(秦)나라의 수도 셴양(咸陽)을 공격할 때, 병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납치하는데 정신이 없었지만, 소하는 상부(相府)로 달려가서 지도와 법령 등 중요한 문건들을 수습했다.
훗날, 소하는 재상(宰相)이 되자, 이미 확보한 진나라의 문헌과 자료들을 토대로 전국의 지리나 풍토, 민심 등을 파악하여, 한나라의 법령과 제도를 제정하였다.
당시 유방의 수하에는 조참(曹參)이라는 모사(謀士)가 있었다. 그는 유방의 동향 사람으로서 소하와도 관계가 매우 좋았으므로, 사람들은 두 사람을 소조(蕭曹)라고 불렀다. 소하의 추천으로 승상된 조참은 모든 정책과 법령을 고치지 않고, 소하가 결정해 놓은 것을 따라[蕭規曹隨] 계속 집행하였다.
전한(前漢) 말기의 학자 양웅(楊雄:BC 53∼AD 18)이 지은 《법언(法言)》 연건편(淵騫篇)에는 "소하가 만들어 정한 법규를 조참이 그대로 따랐다[蕭也規 曹也隨]"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전
법언(法言)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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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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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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