破天荒(파천황)
破 깨뜨릴 파, 무너질 피 | 天 하늘 천 | 荒 거칠 황, 공허할 강 |
天荒(천황)이란 天地(천지)가 아직 열리지 않은 때의 혼돈한 상태로서 천지개벽(天地開闢) 이전(以前)의 혼돈한 상태(狀態)를 깨뜨려 연다는 뜻. ①이제까지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행(行)함을 이르는 말 ②진사(進士)에 급제(及第)한 사람을 이름
科擧(과거)제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新羅(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고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高麗(고려)시대 後周(후주)에서 귀화한 雙冀(쌍기)의 건의에 따라 958년 唐(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비로소 과거의 법을 마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의 과거제도는 隋(수)나라 때 시작하여 淸(청)나라 말기까지 1천3백년 동안 이어졌다. 과거는 유교의 경전에 대한 교양과 詩文(시문)의 재능, 정치적 식견 등을 테스트하는 공개경쟁 시험제도였다. 뛰어난 암기력과 해박한 지식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지방시험인 鄕試(향시)에서 중앙정부가 시행하는 會試(회시)까지 급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나라 때는 지방시험인 향시에 합격하여 중앙시험에 추천되는 사람을 解(해)라고 불렀다. 모든 일에 통달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宋(송)나라때 나온 '북몽쇄언'에는 이런 대목이 보인다.
당나라의 荊州(형주)는 학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지만 해마다 解를 뽑아 중앙에 보내어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天荒解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곳의 劉(유세)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解로서 급제하자 천황을 깬 사람이 나왔다 해서 유세를 '파천황이라고 불렀다(號爲破天荒․호위파천황)'.
유세의 과거급제가 얼마나 대단했는가 하면 당시 荊南軍(형남군) 절도사가 破天荒錢(파천황전)이라 하여 상금으로 거금 70만전을 보냈다는 사실로도 짐작할 만하다.
[출전]
송나라의 손광헌(孫光憲)이 지은 《북몽쇄언》 권4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稀代未聞(희대미문) | 破僻(파벽) | 最初(최초) | 前人未踏(전인미답) | 前代未聞(전대미문) | 未曾有(미증유) |
破竹之勢 (파죽지세)
破竹之勢(파죽지세)
破 깨뜨릴 파, 무너질 피 | 竹 대 죽 | 之 갈 지 | 勢 형세 세 |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氣勢)라는 뜻으로, ①곧 세력(勢力)이 강대(强大)하여 대적(大敵)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어가는 기세(氣勢) ②세력(勢力)이 강(强)하여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가는 모양(模樣)
위(魏)나라의 권신 사마염은 원제를 폐한 뒤,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무제라 일컫고, 국호를 진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3국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吳)나라와 진(晋)나라로 나뉘어 對峙(대치)하게 되었다.
진나라의 장군 양호는 오나라를 칠 것을 몇차례나 상소했지만 북쪽 흉노의 南下(남하)를 우려한 重臣(중신)들의 반대로 宿願(숙원)을 이룰 수가 없었다. 뒷날 양호는 죽으면서 두예(杜預)를 武帝(무제)에게 천거했다.양호는 자기의 꿈을 두예에게 위탁했던 것이다.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이 된 두예도 오나라 정벌을 역설했고 마침내 무제는 두예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윽고 진나라의 대군이 南征(남정)을 개시했다.
출병한 이듬해 음력 2월,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한 장수가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당장 오나라의 도읍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곧 잦은 봄비로 강물은 범람할 것이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단 철군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찬성하는 장수들도 많았으나 두예가 단호히 말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되오. 지금 우리 군대의 사기는 크게 높아져 있소. 이것을 비유해서 말하면 대나무를 쪼개는 것[破竹之勢]과 같소. 대나무란 일단 쪼개지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을 대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단 말이오."
두예는 곧바로 군사를 재정비하여 오나라의 도읍인 건업(建業)으로 진격하여 그야말로 파죽지세처럼 몰아쳐 단숨에 건업을 함락시켰다. 오왕 손호(孫晧)는 손을 뒤로 묶고 수레에 관을 싣고 사죄의 뜻을 보이며 항복해왔다.
이리하여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두예는 오나라를 평정한 공으로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해졌으나, 만년에는 학자로서 학문과 저술에 힘을 기울여 《춘추석례(春秋釋例)》《좌전집해(左傳集解)》 등의 저서를 남겼다. 오늘날 이 말은 거침없이 일이 잘 풀리거나 처리됨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세여파죽(勢如破竹)', '영도이해(迎刀而解)'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출전]
진서(晉書) 두예전(杜預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爎原之火(요원지화) | 勢如破竹(세여파죽) | 迎刀而解(영도이해) |
破 깨뜨릴 파, 무너질 피 | 竹 대 죽 | 之 갈 지 | 勢 형세 세 |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氣勢)라는 뜻으로, ①곧 세력(勢力)이 강대(强大)하여 대적(大敵)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어가는 기세(氣勢) ②세력(勢力)이 강(强)하여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가는 모양(模樣)
위(魏)나라의 권신 사마염은 원제를 폐한 뒤,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무제라 일컫고, 국호를 진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3국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吳)나라와 진(晋)나라로 나뉘어 對峙(대치)하게 되었다.
진나라의 장군 양호는 오나라를 칠 것을 몇차례나 상소했지만 북쪽 흉노의 南下(남하)를 우려한 重臣(중신)들의 반대로 宿願(숙원)을 이룰 수가 없었다. 뒷날 양호는 죽으면서 두예(杜預)를 武帝(무제)에게 천거했다.양호는 자기의 꿈을 두예에게 위탁했던 것이다.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이 된 두예도 오나라 정벌을 역설했고 마침내 무제는 두예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윽고 진나라의 대군이 南征(남정)을 개시했다.
출병한 이듬해 음력 2월,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한 장수가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당장 오나라의 도읍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곧 잦은 봄비로 강물은 범람할 것이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단 철군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찬성하는 장수들도 많았으나 두예가 단호히 말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되오. 지금 우리 군대의 사기는 크게 높아져 있소. 이것을 비유해서 말하면 대나무를 쪼개는 것[破竹之勢]과 같소. 대나무란 일단 쪼개지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을 대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단 말이오."
두예는 곧바로 군사를 재정비하여 오나라의 도읍인 건업(建業)으로 진격하여 그야말로 파죽지세처럼 몰아쳐 단숨에 건업을 함락시켰다. 오왕 손호(孫晧)는 손을 뒤로 묶고 수레에 관을 싣고 사죄의 뜻을 보이며 항복해왔다.
이리하여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두예는 오나라를 평정한 공으로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해졌으나, 만년에는 학자로서 학문과 저술에 힘을 기울여 《춘추석례(春秋釋例)》《좌전집해(左傳集解)》 등의 저서를 남겼다. 오늘날 이 말은 거침없이 일이 잘 풀리거나 처리됨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세여파죽(勢如破竹)', '영도이해(迎刀而解)'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출전]
진서(晉書) 두예전(杜預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爎原之火(요원지화) | 勢如破竹(세여파죽) | 迎刀而解(영도이해) |
破邪顯正 (파사현정)
破邪顯正(파사현정)
破 깨뜨릴 파, 무너질 피 | 邪 간사할 사, 그런가 야, 나머지 여, 느릿할 서 | 顯 나타날 현 | 正 바를 정, 정월 정 |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냄.
불교에서,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악(邪惡)한 도리(道理)를 깨뜨리고 바른 도리(道理)를 드러낸다는 뜻으로, 사악한 것을 깨닫는 것은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므로 얽매이는 마음을 타파하면 바르게 될 수 있다는 말. 이 용어는 특히 삼론종(三論宗)의 중요한 근본 교리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출전
삼론현의(三論玄義)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破顯(파현) | 衛正斥邪(위정척아) | 衛正斥邪(위정척사) | 破邪顯正(파사현정) |
破 깨뜨릴 파, 무너질 피 | 邪 간사할 사, 그런가 야, 나머지 여, 느릿할 서 | 顯 나타날 현 | 正 바를 정, 정월 정 |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냄.
불교에서,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악(邪惡)한 도리(道理)를 깨뜨리고 바른 도리(道理)를 드러낸다는 뜻으로, 사악한 것을 깨닫는 것은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므로 얽매이는 마음을 타파하면 바르게 될 수 있다는 말. 이 용어는 특히 삼론종(三論宗)의 중요한 근본 교리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출전
삼론현의(三論玄義)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破顯(파현) | 衛正斥邪(위정척아) | 衛正斥邪(위정척사) | 破邪顯正(파사현정) |
破釜沈船 (파부침선, pòfǔchénzhōu)
破釜沈船(파부침선)
破釜沉舟(pòfǔchénzhōu)
破 깨트릴 파 | 釜 솥뚜경 부 | 沈 잠길 침 | 船 배 선 |
밥 짓는 가마솥을 때려 부수고 돌아갈 배도 가라앉히다. 決死(결사)의 각오로 싸움터에 나서거나 최후의 결단을 내림을 비유하는 말.
秦(진)나라가 말기 증세를 보이자 각지에서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가 하면 제후들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초나라 때부터 장군의 전통을 이어온 項羽(항우)와 그의 삼촌 項梁(항량)도 반기를 들었다. 호응하는 사람들로 세력을 크게 불린 항량과 항우는 곳곳에서 진나라 군대를 무찔렀다. 그러나 봉기군은 定陶(정도·지금의 산둥성 서쪽)에서 진나라 장군 章邯(장한)에게 크게 패해 봉기군 총수 항량도 목숨을 잃었다.
장한은 승세를 몰아 조나라의 수도였던 한단을 격파하고 조왕이 있는 鉅鹿(거록·허베이성 남쪽)을 포위했다. 조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초왕은 宋義(송의)를 상장, 항우를 차장으로 앉혀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송의는 군대를 安陽(안양·허베이성과 허난성의 경계지점)까지 진격시키고는 40여일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작전상 그렇게 했지만 몇번이나 진군을 재촉해도 송의가 듣지 않자 항우는 송의의 목을 베었다. 상장이 된 항우는 전군을 이끌고 黃河(황하)를 건넜다. 전군이 강을 건너자 항우는 ‘타고 온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가마솥과 시루를 부수고[皆沈船 破釜甑·개침선 파부증]’ 진영을 불태운 뒤 사흘분 군량만을 지급함으로써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지시했다.
과연 전장병은 결사의 각오로 싸웠다. 이 싸움에서 항우군은 一當百(일당백)의 용맹을 떨쳐 조왕을 구원하러 온 다른 제후들의 군사들은 그저 입을 딱 벌리고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이 끝나자 제후의 장군들이 항우의 진영에 모였는데 모두 머리를 숙이고 무릎걸음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 싸움으로 反秦(반진) 연합군 가운데서 항우는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출전] 史記(사기):項羽本紀(항우본기)
史記, 사기, 史記:項羽本紀, 사기:항우본기 |
破釜沉舟(pòfǔchénzhōu)
破 깨트릴 파 | 釜 솥뚜경 부 | 沈 잠길 침 | 船 배 선 |
밥 짓는 가마솥을 때려 부수고 돌아갈 배도 가라앉히다. 決死(결사)의 각오로 싸움터에 나서거나 최후의 결단을 내림을 비유하는 말.
秦(진)나라가 말기 증세를 보이자 각지에서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가 하면 제후들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초나라 때부터 장군의 전통을 이어온 項羽(항우)와 그의 삼촌 項梁(항량)도 반기를 들었다. 호응하는 사람들로 세력을 크게 불린 항량과 항우는 곳곳에서 진나라 군대를 무찔렀다. 그러나 봉기군은 定陶(정도·지금의 산둥성 서쪽)에서 진나라 장군 章邯(장한)에게 크게 패해 봉기군 총수 항량도 목숨을 잃었다.
장한은 승세를 몰아 조나라의 수도였던 한단을 격파하고 조왕이 있는 鉅鹿(거록·허베이성 남쪽)을 포위했다. 조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초왕은 宋義(송의)를 상장, 항우를 차장으로 앉혀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송의는 군대를 安陽(안양·허베이성과 허난성의 경계지점)까지 진격시키고는 40여일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작전상 그렇게 했지만 몇번이나 진군을 재촉해도 송의가 듣지 않자 항우는 송의의 목을 베었다. 상장이 된 항우는 전군을 이끌고 黃河(황하)를 건넜다. 전군이 강을 건너자 항우는 ‘타고 온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가마솥과 시루를 부수고[皆沈船 破釜甑·개침선 파부증]’ 진영을 불태운 뒤 사흘분 군량만을 지급함으로써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지시했다.
과연 전장병은 결사의 각오로 싸웠다. 이 싸움에서 항우군은 一當百(일당백)의 용맹을 떨쳐 조왕을 구원하러 온 다른 제후들의 군사들은 그저 입을 딱 벌리고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이 끝나자 제후의 장군들이 항우의 진영에 모였는데 모두 머리를 숙이고 무릎걸음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 싸움으로 反秦(반진) 연합군 가운데서 항우는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출전] 史記(사기):項羽本紀(항우본기)
史記, 사기, 史記:項羽本紀, 사기:항우본기 |
破瓜之年 (파과지년)
파과지년 破瓜之年
破 깨질 파 | 瓜 오이 과 | 之 어조사 지 | 年 나이 년.
여자의 나이 열 여섯 살, 남자의 나이 예순 네 살을 이르는 말이다. 약칭으로 파과 또는 과년(瓜年)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과년이라고 하면, 요즘에는 혼기(婚期)에 이른 여자의 나이를 말한다.
진(晋)나라 孫綽(손작)의 시 '情人碧玉歌(정인벽옥가)'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과(破瓜)는 외를 깨트린다는 뜻으로 오이를 여성에 비유하고 있다. 여자가 처녀를 깨친다 하여 '처녀성을 잃는다'는 의미와 '초경이 시작되는 나이'를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과(瓜)자를 쪼개면 팔(八)자가 둘이 된다고 해서 여자의 나이 16세를 가리키며 또 팔(八)을 곱하면 64가 되므로 남자의 나이 64세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자가 월경(月經)을 처음 시작하게 되는 열대여섯 살의 나이를 한자로 파과기(破瓜期)라고 하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따라서 과년을 여자의 결혼 적령기인 16세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과는 달리 옛날에는 16세 정도 되면 여자는 혼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碧玉破瓜時(벽옥파과시) 푸른 구슬이 외를 깰 때
郎爲情顚倒(낭위정전도) 님은 사랑을 못 이겨 넘어졌네.
感君不羞난(감군불수난) 님에게 감격하여 부끄러움도 모르고
廻身就郞抱(회신취랑포) 몸 돌려 님의 품에 안긴다.
이 시는 연애시로서, 여기서 '과(瓜)를 깰 때'란 말은 여자가 처녀를 깨친다는 뜻이며, 초경이 시작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사랑을 알게 되는 16세를 가리키기도 한다. 청(淸)나라의 문인인 원매(袁枚)의 시론(詩論) 《수원시화(隨園詩話)》에는 '외를 깨치니, 즉 풀어서 말하여 첫 월경이 시작되었을 때, 외를 깨침과 같이 , 곧 홍조를 보게 된다, 안 그런가[破瓜 或解以爲月事初來 如破瓜則見紅潮者 非也]?'라는 말이 있다. 또 청나라의 적호(翟灝)의 《통속편(通俗編)》에는 '살피건대, 풍속에 여자가 몸을 깨침으로써 외를 깨친다 하거니와, 안 그런가[按俗以女子破身爲破瓜 非也]'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파과'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초경의 시작과 처녀성을 잃는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밖에도 '파과'는 남자의 나이 64세를 비유하여 쓰이기도 하는데, 남자로서 이 나이가 되면 혼자서 잠자리에 드는 나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송(宋)나라의 축목(祝穆)이 쓴 《사문유취(事文類聚)》에는, 당나라의 여동빈(呂洞賓)이 장기에게 보낸 시에 '공성당재파과년(功成當在破瓜年)'이란 것을 들어, '파과'는 남자의 나이 64세의 뜻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예전에는 '벼슬의 임기가 다한 해'를 과년이라 하였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관직에 오르는 사람은 당연히 남자였고, 관직에 있던 사람이 임기가 다해 물러나야 할 때가 되면 나이도 그만큼 먹게 마련이다. 따라서 위의 '八八'을 곱하면 64가 되므로, 남자의 경우 과년을 64세로 보는 것 역시 타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오늘날 과년이라고 할 때에는 남자의 나이 64세라는 의미는 거의 없어지고, 혼기에 접어든 여자의 나이를 뜻하는 말로 일반화되었다.
[출전] 손작(孫綽) 정인벽옥가(情人碧玉歌)
破 깨질 파 | 瓜 오이 과 | 之 어조사 지 | 年 나이 년.
여자의 나이 열 여섯 살, 남자의 나이 예순 네 살을 이르는 말이다. 약칭으로 파과 또는 과년(瓜年)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과년이라고 하면, 요즘에는 혼기(婚期)에 이른 여자의 나이를 말한다.
진(晋)나라 孫綽(손작)의 시 '情人碧玉歌(정인벽옥가)'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과(破瓜)는 외를 깨트린다는 뜻으로 오이를 여성에 비유하고 있다. 여자가 처녀를 깨친다 하여 '처녀성을 잃는다'는 의미와 '초경이 시작되는 나이'를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과(瓜)자를 쪼개면 팔(八)자가 둘이 된다고 해서 여자의 나이 16세를 가리키며 또 팔(八)을 곱하면 64가 되므로 남자의 나이 64세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자가 월경(月經)을 처음 시작하게 되는 열대여섯 살의 나이를 한자로 파과기(破瓜期)라고 하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따라서 과년을 여자의 결혼 적령기인 16세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과는 달리 옛날에는 16세 정도 되면 여자는 혼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碧玉破瓜時(벽옥파과시) 푸른 구슬이 외를 깰 때
郎爲情顚倒(낭위정전도) 님은 사랑을 못 이겨 넘어졌네.
感君不羞난(감군불수난) 님에게 감격하여 부끄러움도 모르고
廻身就郞抱(회신취랑포) 몸 돌려 님의 품에 안긴다.
이 시는 연애시로서, 여기서 '과(瓜)를 깰 때'란 말은 여자가 처녀를 깨친다는 뜻이며, 초경이 시작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사랑을 알게 되는 16세를 가리키기도 한다. 청(淸)나라의 문인인 원매(袁枚)의 시론(詩論) 《수원시화(隨園詩話)》에는 '외를 깨치니, 즉 풀어서 말하여 첫 월경이 시작되었을 때, 외를 깨침과 같이 , 곧 홍조를 보게 된다, 안 그런가[破瓜 或解以爲月事初來 如破瓜則見紅潮者 非也]?'라는 말이 있다. 또 청나라의 적호(翟灝)의 《통속편(通俗編)》에는 '살피건대, 풍속에 여자가 몸을 깨침으로써 외를 깨친다 하거니와, 안 그런가[按俗以女子破身爲破瓜 非也]'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파과'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초경의 시작과 처녀성을 잃는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밖에도 '파과'는 남자의 나이 64세를 비유하여 쓰이기도 하는데, 남자로서 이 나이가 되면 혼자서 잠자리에 드는 나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송(宋)나라의 축목(祝穆)이 쓴 《사문유취(事文類聚)》에는, 당나라의 여동빈(呂洞賓)이 장기에게 보낸 시에 '공성당재파과년(功成當在破瓜年)'이란 것을 들어, '파과'는 남자의 나이 64세의 뜻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예전에는 '벼슬의 임기가 다한 해'를 과년이라 하였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관직에 오르는 사람은 당연히 남자였고, 관직에 있던 사람이 임기가 다해 물러나야 할 때가 되면 나이도 그만큼 먹게 마련이다. 따라서 위의 '八八'을 곱하면 64가 되므로, 남자의 경우 과년을 64세로 보는 것 역시 타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오늘날 과년이라고 할 때에는 남자의 나이 64세라는 의미는 거의 없어지고, 혼기에 접어든 여자의 나이를 뜻하는 말로 일반화되었다.
[출전] 손작(孫綽) 정인벽옥가(情人碧玉歌)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