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漢書(후한서) 范曄(범엽)
卷67 卷68 李杜列傳(이두열전) 卷69
1 李杜列傳: 李固字子堅,漢中南鄭人,司徒郃之子也。郃在數術傳。固貌狀有奇表,鼎角匿犀,足履龜文。少好學,常步行尋師,不遠千里。遂究覽墳籍,結交英賢。四方有志之士,多慕其風而來學。京師咸歎曰:“是復為李公矣。”司隸、益州並命郡舉孝廉,辟司空掾,皆不就。
2 李杜列傳: 陽嘉二年,有地動、山崩、火災之異,公卿舉固對策,詔又特問當世之敝,為政所宜。
3 李杜列傳: 臣聞王者父天母地,寶有山川。王道得則陰陽和穆,政化乖則崩震為災。斯皆關之天心,效於成事者也。夫化以職成,官由能理。古之進者,有德有命;今之進者,唯財與力。伏聞詔書務求寬博,疾惡嚴暴。而今長吏多殺伐致聲名者,必加遷賞;其存寬和無黨援者,輒見斥逐。是以淳厚之風不宣,彫薄之俗未革。雖繁刑重禁,何能有益?前孝安皇帝變亂舊典,封爵阿母,因造妖孽,使樊豐之徒乘權放恣,侵奪主威,改亂嫡嗣,至令聖躬狼狽,親遇其艱。既拔自困殆,龍興即位,天下喁喁,屬望風政。積敝之後,易致中興,誠當沛然思惟善道;而論者猶云,方今之事,復同於前。臣伏從山草,痛心傷臆。實以漢興以來,三百餘年,賢聖相繼,十有八主。豈無阿乳之恩?豈忘貴爵之寵?然上畏天威,俯案經典,知義不可,故不封也。今宋阿母雖有大功勤謹之德,但加賞賜,足以酬其勞苦;至於裂土開國,實乖舊典。聞阿母體性謙虛,必有遜讓,陛下宜許其辭國之高,使成萬安之福。
4 李杜列傳: 夫妃后之家所以少完全者,豈天性當然?但以爵位尊顯,專總權柄,天道惡盈,不知自損,故至顛仆。先帝寵遇閻氏,位號太疾,故其受禍,曾不旋時。老子曰:“其進銳,其退速也。”今梁氏戚為椒房,禮所不臣,尊以高爵,尚可然也。而子弟群從,榮顯兼加,永平、建初故事,殆不如此。宜令步兵校尉冀及諸侍中還居黃門之官,使權去外戚,政歸國家,豈不休乎!
5 李杜列傳: 又詔書所以禁侍中尚書中臣子弟不得為吏察
6 李杜列傳: 孝廉者,以其秉威權,容請託故也。而中常侍日月之側,聲埶振天下,子弟祿仕,曾無限極。雖外託謙默,不干州郡,而諂偽之徒,望風進舉。今可為設常禁,同之中臣。
7 李杜列傳: 昔館陶公主為子求郎,明帝不許,賜錢千萬。所以輕厚賜,重薄位者,為官人失才,害及百姓也。竊聞長水司馬武宣、開陽城門候羊迪等,無它功德,初拜便真。此雖小失,而漸壞舊章。先聖法度,所宜堅守,政教一跌,百年不復。《詩》云:“上帝板板,下民卒癉。”刺周王變祖法度,故使下民將盡病也。
8 李杜列傳: 今陛下之有尚書,猶天之有北斗也。斗為天喉舌,尚書亦為陛下喉舌。斗斟酌元氣,運平四時。尚書出納王命,賦政四海,權尊埶重,責之所歸。若不平心,災眚必至。誠宜審擇其人,以毗聖政。今與陛下共理天下者,外則公卿尚書,內則常侍黃門,譬猶一門之內,一家之事,安則共其福慶,危則通其禍敗。刺史、二千石,外統職事,內受法則。夫表曲者景必邪,源清者流必絜,猶叩樹本,百枝皆動也。周頌曰:“薄言振之,莫不震疊。”此言動之於內,而應於外者也。猶此言之,本朝號令,豈可蹉跌?閒隙一開,則邪人動心;利競暫啟,則仁義道塞。刑罰不能復禁,化導以之寑壞。此天下之紀綱,當今之急務。陛下宜開石室,陳圖書,招會群儒,引問失得,指擿變象,以求天意。其言有中理,即時施行,顯拔其人,以表能者。則聖聽日有所聞,忠臣盡其所知。又宜罷退宦官,去其權重,裁置常侍二人,方直有德者,省事左右;小黃門五人,才智閑雅者,給事殿中。如此,則論者厭塞,升平可致也。臣所以敢陳愚瞽,冒昧自聞者,儻或皇天欲令微臣覺悟陛下。陛下宜熟察臣言,憐赦臣死。
9 李杜列傳: 順帝覽其對,多所納用,即時出阿母還弟舍,諸常侍悉叩頭謝罪,朝廷肅然。以固為議郎。而阿母宦者疾固言直,因詐飛章以陷其罪,事從中下。大司農黃尚等請之於大將軍梁商,又僕射黃瓊救明固事,久乃得拜議郎。
10 李杜列傳: 出為廣漢雒令,至白水關,解印綬,還漢中,杜門不交人事。歲中,梁商請為從事中郎。商以后父輔政,而柔和自守,不能有所整裁,災異數見,下權日重。固欲令商先正風化,退辭高滿,乃奏記曰:“春秋褒儀父以開義路,貶無駭以閉利門。夫義路閉則利門開,利門開則義路閉也。前孝安皇帝內任伯榮、樊豐之屬,外委周廣、謝惲之徒,開門受賂,署用非次,天下紛然,怨聲滿道。朝廷初立,頗存清靜,未能數年,稍復墮損。左右黨進者,日有遷拜,守死善道者,滯涸窮路,而未有改敝立德之方。又即位以來,十有餘年,聖嗣未立,群下繼望。可令中宮博簡嬪媵,兼採微賤宜子之人,進御至尊,順助天意。若有皇子,母自乳養,無委保妾醫巫,以致飛燕之禍。明將軍望尊位顯,當以天下為憂,崇尚謙省,垂則萬方。而新營祠堂,費功億計,非以昭明令德,崇示清儉。自數年以來,災怪屢見,比無雨潤,而沈陰鬱泱。宮省之內,容有陰謀。孔子曰:‘智者見變思刑,愚者睹怪諱名。’天道無親,可為祗畏。加近者月食既於端門之側。月者,大臣之體也。夫窮高則危,大滿則溢,月盈則缺,日中則移。凡此四者,自然之數也。天地之心,福謙忌盛,是以賢達功遂身退,全名養壽,無有怵迫之憂。誠令王綱一整,道行忠立,明公踵伯成之高,全不朽之譽,豈與此外戚凡輩耽榮好位者同日而論哉!固狂夫下愚,不達大體,竊感古人一飯之報,況受顧遇而容不盡乎!”商不能用。
11 李杜列傳: 永和中,荊州盜賊起,彌年不定,乃以固為荊州刺史。固到,遣吏勞問境內,赦寇盜前釁,與之更始。於是賊帥夏密等斂其魁黨六百餘人,自縛歸首。固皆原之,遣還,使自相招集,開示威法。半歲閒,餘類悉降,州內清平。
12 李杜列傳: 上奏南陽太守高賜等臧穢。賜等懼罪,遂共重賂大將軍梁冀,冀為千里移檄,而固持之愈急。冀遂令徙固為太山太守。時太山盜賊屯聚歷年,郡兵常千人,追討不能制。固到,悉罷遣歸農,但選留任戰者百餘人,以恩信招誘之。未滿歲,賊皆弭散。
13 李杜列傳: 遷將作大匠。上疏陳事曰:“臣聞氣之清者為神,人之清者為賢。養身者以練神為寶,安國者以積賢為道。昔秦欲謀楚,王孫圉設壇西門,陳列名臣,秦使戄然,遂為寑兵。魏文侯師卜子夏,友田子方,軾段干木,故群俊競至,名過齊桓,秦人不敢闚兵於西河,斯蓋積賢人之符也。陛下撥亂龍飛,初登大位,聘南陽樊英、江夏黃瓊、廣漢楊厚、會稽賀純,策書嗟歎,待以大夫之位。是以巖穴幽人,智術之士,彈冠振衣,樂欲為用,四海欣然,歸服聖德。厚等在職,雖無奇卓,然夕惕孳孳,志在憂國。臣前在荊州,聞厚、純等以病免歸,誠以悵然,為時惜之。一日朝會,見諸侍中並皆年少,無一宿儒大人可顧問者,誠可歎息。宜徵還厚等,以副群望。瓊久處議郎,已且十年,眾人皆怪始隆崇,今更滯也。光祿大夫周舉,才謨高正,宜在常伯,訪以言議。侍中杜喬,學深行直,當世良臣,久託疾病,可敕令起。”又薦陳留楊倫、河南尹存、東平王惲、陳國何臨、清河房植等。是日有詔徵用倫、厚等,而遷瓊、舉,以固為大司農。
14 李杜列傳: 先是周舉等八使案察天下,多所劾奏,其中並是宦者親屬,輒為請乞,詔遂令勿考。又舊任三府選令史,光祿試尚書郎,時皆特拜,不復選試。固乃與廷尉吳雄上疏,以為八使所糾,宜急誅罰,選舉署置,可歸有司。帝感其言,乃更下免八使所舉刺史、二千石,自是稀復特拜,切責三公,明加考察,朝廷稱善。乃復與光祿勳劉宣上言:“自頃選舉牧守,多非其人,至行無道,侵害百姓。又宜止槃遊,專心庶政。”帝納其言,於是下詔諸州劾奏守令以下,政有乖枉,遇人無惠者,免所居官;其姦穢重罪,收付詔獄。
15 李杜列傳: 及沖帝即位,以固為太尉,與梁冀參錄尚書事。明年帝崩,梁太后以楊、徐盜賊盛強,恐驚擾致亂,使中常侍詔固等,欲須所徵諸王侯到乃發喪。固對曰:“帝雖幼少,猶天下之父。今日崩亡,人神感動,豈有臣子反共掩匿乎?昔秦皇亡於沙丘,胡亥、趙高隱而不發,卒害扶蘇,以至亡國。近北鄉侯薨,閻后兄弟及江京等亦共掩祕,遂有孫程手刃之事。此天下大忌,不可之甚者也。”太后從之,即暮發喪。
16 李杜列傳: 固以清河王蒜年長有德,欲立之,謂梁冀曰:“今當立帝,宜擇長年高明有德,任親政事者,願將軍審詳大計,察周、霍之立文、宣,戒鄧、閻之利幼弱。”冀不從,乃立樂安王子纘,年八歲,是為質帝。時沖帝將北卜山陵,固乃議曰:“今處處寇賊,軍興用費加倍,新創憲陵,賦發非一。帝尚幼小,可起陵於憲陵塋內,依康陵制度,其於役費三分減一。”乃從固議。時太后以比遭不造,委任宰輔,固所匡正,每輒從用,其黃門宦者一皆斥遣,天下咸望遂平,而梁冀猜專,每相忌疾。
17 李杜列傳: 初,順帝時諸所除官,多不以次,及固在事,奏免百餘人。此等既怨,又希望冀旨,遂共作飛章虛誣固罪曰:“臣聞君不稽古,無以承天;臣不述舊,無以奉君。昔堯殂之後,舜仰慕三年,坐則見堯於牆,食則睹堯於羹。斯所謂聿追來孝,不失臣子之節者。太尉李固,因公假私,依正行邪,離閒近戚,自隆支黨。至於表舉薦達,例皆門徒;及所辟召,靡非先舊。或富室財賂,或子婿婚屬,其列在官牒者凡四十九人。又廣選賈豎,以補令史;募求好馬,臨吓呈試。出入踰侈,輜軿曜日。大行在殯,路人掩涕,固獨胡粉飾貌,搔頭弄姿,槃旋偃仰,從容冶步,曾無慘怛傷悴之心。山陵未成,違矯舊政,善則稱己,過則歸君,斥逐近臣,不得侍送,作威作福,莫固之甚。臣聞台輔之位,實和陰陽,琁機不平,寇賊姦軌,則責在太尉。固受任之後,東南跋扈,兩州數郡,千里蕭條,兆人傷損,大化陵遲,而詆疵先主,苟肆狂狷。存無廷爭之忠,沒有誹謗之說。夫子罪莫大於累父,臣惡莫深於毀君。固之過釁,事合誅辟。”事奏,冀以白太后,使下其事。太后不聽,得免。
18 李杜列傳: 冀忌帝聰慧,恐為後患,遂令左右進鴆。帝苦煩甚,使促召固。固入,前問:“陛下得患所由?”帝尚能言,曰:“食煮餅,今腹中悶,得水尚可活。”時冀亦在側,曰:“恐吐,不可飲水。”語未絕而崩。固伏尸號哭,推舉侍醫。冀慮其事泄,大惡之。
19 李杜列傳: 因議立嗣,固引司徒胡廣、司空趙戒,先與冀書曰:“天下不幸,仍遭大憂。皇太后聖德當朝,攝統萬機,明將軍體履忠孝,憂存社稷,而頻年之閒,國祚三絕。今當立帝,天下重器,誠知太后垂心,將軍勞慮,詳擇其人,務存聖明。然愚情眷眷,竊獨有懷。遠尋先世廢立舊儀,近見國家踐祚前事,未嘗不詢訪公卿,廣求群議,令上應天心,下合眾望。且永初以來,政事多謬,地震宮廟,彗星竟天,誠是將軍用情之日。傳曰:‘以天下與人易,為天下得人難。’昔昌邑之立,昏亂日滋,霍光憂愧發憤,悔之折骨。自非博陸忠勇,延年奮發,大漢之祀,幾將傾矣。至憂至重,可不熟慮!悠悠萬事,唯此為大。國之興衰,在此一舉。”冀得書,乃召三公、中二千石、列侯大議所立。固、廣、戒及大鴻臚杜喬皆以為清河王蒜明德著聞,又屬最尊親,宜立為嗣。先是蠡吾侯志當取冀妹,時在京師,冀欲立之。眾論既異,憤憤不得意,而未有以相奪。中常侍曹騰等聞而夜往說冀曰:“將軍累世有椒房之親,秉攝萬機,賓客縱橫,多有過差。清河王嚴明,若果立,則將軍受禍不久矣。不如立蠡吾侯,富貴可長保也。”冀然其言。明日重會公卿,冀意氣凶凶,而言辭激切。自胡廣、趙戒以下,莫不懾憚之。皆曰:“惟大將軍令。”而固獨與杜喬堅守本議。冀厲聲曰:“罷會。”固意既不從,猶望眾心可立,復以書勸冀。冀愈激怒,乃說太后先策免固,竟立蠡吾侯,是為桓帝。
20 李杜列傳: 後歲餘,甘陵劉文、魏郡劉鮪各謀立蒜為天子,梁冀因此誣固與文、鮪共為妖言,下獄。門生勃海王調貫械上書,證固之枉,河內趙承等數十人亦要鈇鑕詣闕通訴,太后明之,乃赦焉。及出獄,京師市里皆稱萬歲。冀聞之大驚,畏固名德終為己害,乃更據奏前事,遂誅之,時年五十四。
21 李杜列傳: 臨命,與胡廣、趙戒書曰:“固受國厚恩,是以竭其股肱,不顧死亡,志欲扶持王室,比隆文、宣。何圖一朝梁氏迷謬,公等曲從,以吉為凶,成事為敗乎?漢家衰微,從此始矣。公等受主厚祿,顛而不扶,傾覆大事,後之良史,豈有所私?固身已矣,於義得矣,夫復何言!”廣、戒得書悲慚,皆長歎流涕。
22 李杜列傳: 州郡收固二子基、茲於郾城,皆死獄中。小子燮得脫亡命。冀乃封廣、戒而露固尸於四衢,令有敢臨者加其罪。固弟子汝南郭亮,年始成童,遊學洛陽,乃左提章鉞,右秉鈇鑕,詣闕上書,乞收固屍。不許,因往臨哭,陳辭於前,遂守喪不去。夏門亭長呵之曰:“李、杜二公為大臣,不能安上納忠,而興造無端。卿曹何等腐生,公犯詔書,干試有司乎?”亮曰:“亮含陰陽以生,戴乾履坤。義之所動,豈知性命,何為以死相懼?”亭長歎曰:“居非命之世,天高不敢不跼,地厚不敢不蹐。耳目適宜視聽,口不可以妄言也。”太后聞而不誅。南陽人董班亦往哭固,而殉尸不肯去。太后憐之,乃聽得襚斂歸葬。二人由此顯名,三公並辟。班遂隱身,莫知所歸。
23 李杜列傳: 固所著章、表、奏、議、教令、對策、記、銘凡
24 李杜列傳: 十一篇。弟子趙承等悲歎不已,乃共論固言跡,以為德行一篇。
25 李杜列傳: 燮字德公。初,固既策罷,知不免禍,乃遣三子歸鄉里。時燮年十三,姊文姬為同郡趙伯英妻,賢而有智,見二兄歸,具知事本,默然獨悲曰:“李氏滅矣!自太公已來,積德累仁,何以遇此?”密與二兄謀豫藏匿燮,託言還京師,人咸信之。有頃難作,下郡收固三子。二兄受害,文姬乃告父門生王成曰:“君執義先公,有古人之節。今委君以六尺之孤,李氏存滅,其在君矣。”成感其義,乃將燮乘江東下,入徐州界內,令變名姓為酒家傭,而成賣卜於巿。各為異人,陰相往來。
26 李杜列傳: 燮從受學,酒家異之,意非恆人,以女妻燮。燮專精經學。十餘年閒,梁冀既誅而災眚屢見。明年,史官上言宜有赦令,又當存錄大臣冤死者子孫,於是大赦天下,并求固後嗣。燮乃以本末告酒家,酒家具車重厚遣之,皆不受,遂還鄉里,追服。姊弟相見,悲感傍人。既而戒燮曰:“先公正直,為漢忠臣,而遇朝廷傾亂,梁冀肆虐,令吾宗祀血食將絕。今弟幸而得濟,豈非天邪!宜杜絕眾人,勿妄往來,慎無一言加於梁氏。加梁氏則連主上,禍重至矣。唯引咎而已。”燮謹從其誨。後王成卒,燮以禮葬之,感傷舊恩,每四節為設上賓之位而祠焉。
27 李杜列傳: 州郡禮命,四府並辟,皆無所就,後徵拜議郎。及其在位,廉方自守,所交皆舍短取長,好成人之美。時潁川荀爽、賈彪,雖俱知名而不相能,燮並交二子,情無適莫,世稱其平正。
28 李杜列傳: 靈帝時拜安平相。先是安平王續為張角賊所略,國家贖王得還,朝廷議復其國。燮上奏曰:“續在國無政,為妖賊所虜,守藩不稱,損辱聖朝,不宜復國。”時議者不同,而續竟歸藩。燮以謗毀宗室,輸作左校。未滿歲,王果坐不道被誅,乃拜燮為議郎。京師語曰:“
29 李杜列傳: 父不肯立帝,子不肯立王。”
30 李杜列傳: 擢遷河南尹。時既以貨賂為官,詔書復橫發錢三億,以實西園。燮上書陳諫,辭義深切,帝乃止。先是潁川甄邵諂附梁冀,為鄴令。有同歲生得罪於冀,亡奔邵,邵偽納而陰以告冀,冀即捕殺之。邵當遷為郡守,會母亡,邵且埋屍於馬屋,先受封,然後發喪。邵還至洛陽,燮行塗遇之,使卒投車於溝中,笞捶亂下,大署帛於其背曰“諂貴賣友,貪官埋母”。乃具表其狀。邵遂廢錮終身。燮在職二年卒,時人感其世忠正,咸傷惜焉。
31 李杜列傳: 杜喬字叔榮,河內林慮人也。少為諸生,舉孝廉,辟司徒楊震府。稍遷為南郡太守,轉東海相,入拜侍中。
32 李杜列傳: 漢安元年,以喬守光祿大夫,使徇察兗州。表奏太山太守李固政為天下第一;陳留太守梁讓、濟陰太守汜宮、濟北相崔瑗等臧罪千萬以上。讓即大將軍梁冀季父,宮、瑗皆冀所善。還,拜太子太傅,遷大司農。
33 李杜列傳: 時梁冀子弟五人及中常侍等以無功並封,喬上書諫曰:“陛下越從藩臣,龍飛即位,天人屬心,萬邦攸賴。不急忠賢之禮,而先左右之封,傷善害德,興長佞諛。臣聞古之明君,褒罰必以功過;末世闇主,誅賞各緣其私。今梁氏一門,宦者微孽,並帶無功之紱,裂勞臣之土,其為乖濫,胡可勝言!夫有功不賞,為善失其望;姦回不詰,為惡肆其凶。故陳資斧而人靡畏,班爵位而物無勸。苟遂斯道,豈伊傷政,為亂而已,喪身亡國,可不慎哉!”書奏不省。
34 李杜列傳: 益州刺史种暠舉劾永昌太守劉君世以金蛇遺梁冀
35 李杜列傳: ,事發覺,以蛇輸司農。冀從喬借觀之,喬不肯與,冀始為恨。累遷大源臚。時冀小女死,令公卿會喪,喬獨不往,冀又銜之。
36 李杜列傳: 遷光祿勳。建和元年,代胡廣為太尉。桓帝將納梁冀妹,冀欲令以厚禮迎之,喬據執舊典,不聽。又冀屬喬舉汜宮為尚書,喬以宮臧罪明著,遂不肯用,因此日忤於冀。先是李固見廢,內外喪氣,群臣側足而立,唯喬正色無所回橈。由是海內歎息,朝野瞻望焉。在位數月,以地震免。宦者唐衡、左悺等因共譖於帝曰:“陛下前當即位,喬與李固抗議言上不堪奉漢宗祀。”帝亦怨之。及清河王蒜事起,梁冀遂諷有司劾喬及李固與劉鮪等交通,請逮案罪。而梁太后素知喬忠,但策免而已。冀愈怒,使人脅喬曰:“早從宜,妻子可得全。”喬不肯。明日冀遣騎至其門,不聞哭者,遂白執繫之,死獄中。妻子歸故郡。與李固俱暴尸於城北,家屬故人莫敢視者。
37 李杜列傳: 喬故掾陳留楊匡聞之,號泣星行到洛陽,乃著故赤幘,託為夏門亭吏,守衛尸喪,驅護蠅蟲,積十二日,都官從事執之以聞。梁太后義而不罪。匡於是帶鈇鑕詣闕上書,并乞李、杜二公骸骨。太后許之。成禮殯殮,送喬喪還家,葬送行服,隱匿不仕。匡初好學,常在外黃大澤教授門徒。補蘄長,政有異績,遷平原令。時國相徐曾,中常侍璜之兄也,匡恥與接事,託疾牧豕云。
38 李杜列傳: 論曰:夫稱仁人者,其道弘矣!立言踐行,豈徒徇名安己而已哉,將以定去就之概,正天下之風,使生以理全,死與義合也。夫專為義則傷生,專為生則騫義,專為物則害智,專為己則損仁。若義重於生,舍生可也;生重於義,全生可也。上以殘闇失君道,下以篤固盡臣節。臣節盡而死之,則為殺身以成仁,去之不為求生以害仁也。順桓之閒,國統三絕,太后稱制,賊臣虎視。李固據位持重,以爭大義,確乎而不可奪。豈不知守節之觸禍,恥夫覆折之傷任也。觀其發正辭,及所遺梁冀書,雖機失謀乖,猶戀戀而不能已。至矣哉,社稷之心乎!其顧視胡廣、趙戒,猶糞土也。
39 李杜列傳: 贊曰:李、杜司職,朋心合力。致主文、宣,抗情伊、稷。道亡時晦,終離罔極。燮同趙孤,世載弦直。
後漢書 (후한서) 范曄 (범엽)
後漢書(후한서) 范曄(범엽)
後汉书(hòuhànshū)
구분: 역사서
저자: 범엽(范曄)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송(宋)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광무제(光武帝)에서 헌제(献帝)에 이르는 후한(後漢)의 13대 196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남조(南朝) 송(宋, 420~479)의 범엽(范曄, 398~445)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되어 있다.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부터 헌제(献帝, 재위 189~220)까지 후한(後漢)의 13대(代) 196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인 ‘25사(史)’ 가운데에서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함께 ‘4사(四史)’로 꼽힌다.
범엽(范曄)이 <후한서(後漢書)>를 편찬하기 전에 오(呉, 222~280)의 사승(謝承), 설형(薛瑩), 화교(華嶠), 동진(東晋, 316~420)의 사마표(司馬彪, ?~306), 사침(謝沈), 원산송(袁山松), 장번(張璠) 등이 쓴 7종의 <후한서(後漢書)>가 전해지고 있었다. 범엽(范曄)은 432년(宋 文帝 元嘉 9년) 선성(宣城) 태수(太守)로 좌천되면서 7종의 <후한서>와 유진(劉珍) 등이 편찬한 <동관한기(東觀漢記)>, 원굉(袁宏, 328~376)이 쓴 <후한기(後漢紀)>,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등을 참고하여 <후한서(後漢書)>를 새로 편찬하였다. 범엽은 사료(史料)들을 새로 폭넓게 수집하고 비교, 정리하여 기존의 사서(史書)들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범엽(范曄)의 <후한서>가 편찬되면서 기존의 <후한서>들은 점차 읽히지 않게 되어 망실(亡失)되었고, 범엽(范曄)의 <후한서>가 후한(後漢)의 정사(正史)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범엽은 445년(元嘉 22년)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 409~451)의 모반(謀叛)에 참여했다가 처형되면서 <후한서>의 지(志) 부분을 완성하지 못했다. 양(梁, 502~557)의 유소(劉昭)는 동진(東晋)의 사마표(司馬彪)가 편찬한 <속한서(續漢書)>에서 율력(律曆), 예의(禮儀), 제사(祭祀), 천문(天文), 오행(五行), 군국(郡國), 백관(百官), 여복(輿服) 등의 ‘팔지(八志)’ 부분에 주석(註釋)을 붙여 30권의 <보주후한지(補注後漢志)>를 편찬하였다. 이로써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이루어진 <후한서(後漢書)>의 체재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북송(北宋, 960∼1126) 초기까지 <후한서(後漢書)>는 90권의 본기(本紀), 열전(列傳)과 30권의 <보주후한지(補注後漢志)>가 따로 간행되었는데, 본기(本紀), 열전(列傳)에는 당(唐, 618~907) 시대에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의 둘째아들인 장회태자(章懐太子) 이현(李賢, 654~684)이 붙인 주석(註釋)이 덧붙여 있었다. 북송(北宋) 진종(眞宗, 재위 997~1022) 때인 1022년(宋 眞宗 乾興 원년), 손석(孫奭)은 이현(李賢)이 주석(註釋)을 붙인 90권의 본기(本紀), 열전(列傳)에 유소(劉昭)가 주석(註釋)을 붙인 30권의 지(志)를 합하여 간행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후한서(後漢書)>의 판본(板本)이다.
<후한서(後漢書)>는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의 체례(體例)를 따르고 있으나, 표(表)가 없으며, 본기(本紀)에 황후기(皇后紀)를 따로 수록하였다. 열전(列傳)에 당고(黨錮), 환자(宦者), 문원(文苑), 독행(獨行), 방술(方術), 일민(逸民), 열녀(列女)의 7개 항목을 새로 둔 것도 특징이다. 청(淸, 1636~1912) 시대에는 <후한서(後漢書)>의 표(表), 지(志), 주(注)에 대한 보완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혜동(惠棟, 1697~1758)의 <후한서보지(後漢書補志)>, 왕선겸(王先謙, 1842~1917)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이자명(李慈銘, 1830~1895)의 <후한서집주(後漢書集注)>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후한서(後漢書)> 85권의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부여(夫余), 읍루(挹婁), 고구려(高句驪), 동옥저(東沃沮), 예 (濊), 삼한(三韓), 왜(倭)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많은 부분이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차이가 있거나 새로운 사실들도 많아 한반도의 고대사(古代史) 연구에 중요한 사료(史料)로 쓰이고 있다.
관련 고사성어
紀
列傳
013 卷11 劉玄劉盆子列傳第一(유현유분자열전)
鐵中錚錚(철중쟁쟁) 쇠 중(中)에서 소리가 가장 맑다는 뜻으로, 동류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 |
庸中佼佼(용중교교) ①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라는 뜻으로 ‘철중쟁쟁’과 함께 그만그만한 자 중에서 조금 나은 자를 두고 이르는 말. ②아름다운 여인. |
015 卷13 隗囂公孫述列傳第三(외효공손술열전)
置之度外(치지도외) |
026 卷24 馬援列傳第十四(마원열전)
老益壯(노익장) | 老當益壯(노당익장, 老当益壮,lǎodāngyìzhuàng)) 늙을수록 더욱 강인한 마음과 뜻을 지녀야 한다. 《후한서·마원전(後漢書·馬援傳)》에 나오는 “大丈夫爲者 窮當益堅 老當益壯 (丈夫为志,穷当益坚,老当益壮; 사나이의 마음가짐은 어려울수록 더욱 굳세어져야 하고, 늙을수록 더욱 강인해져야 한다.)”란 말에서 유래함 |
050 卷58 虞傅蓋臧列傳第四十八(우전개장열전) 虞詡・傳燮・蓋勳・臧洪
盤根錯節(반근착절) | 兵不厭詐(병불염사)
068 卷63 李杜列傳(이두열전)第五十三 李固・杜喬
狼狽(낭패) |
志
참조항목
二十四史(이십사사) | 十八史略(십팔사략) |
http://zh.wikipedia.org/wiki/後漢書
http://ko.wikipedia.org/wiki/후한서
後汉书(hòuhànshū)
구분: 역사서
저자: 범엽(范曄)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송(宋)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광무제(光武帝)에서 헌제(献帝)에 이르는 후한(後漢)의 13대 196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남조(南朝) 송(宋, 420~479)의 범엽(范曄, 398~445)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되어 있다.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부터 헌제(献帝, 재위 189~220)까지 후한(後漢)의 13대(代) 196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인 ‘25사(史)’ 가운데에서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함께 ‘4사(四史)’로 꼽힌다.
범엽(范曄)이 <후한서(後漢書)>를 편찬하기 전에 오(呉, 222~280)의 사승(謝承), 설형(薛瑩), 화교(華嶠), 동진(東晋, 316~420)의 사마표(司馬彪, ?~306), 사침(謝沈), 원산송(袁山松), 장번(張璠) 등이 쓴 7종의 <후한서(後漢書)>가 전해지고 있었다. 범엽(范曄)은 432년(宋 文帝 元嘉 9년) 선성(宣城) 태수(太守)로 좌천되면서 7종의 <후한서>와 유진(劉珍) 등이 편찬한 <동관한기(東觀漢記)>, 원굉(袁宏, 328~376)이 쓴 <후한기(後漢紀)>,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등을 참고하여 <후한서(後漢書)>를 새로 편찬하였다. 범엽은 사료(史料)들을 새로 폭넓게 수집하고 비교, 정리하여 기존의 사서(史書)들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범엽(范曄)의 <후한서>가 편찬되면서 기존의 <후한서>들은 점차 읽히지 않게 되어 망실(亡失)되었고, 범엽(范曄)의 <후한서>가 후한(後漢)의 정사(正史)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범엽은 445년(元嘉 22년)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 409~451)의 모반(謀叛)에 참여했다가 처형되면서 <후한서>의 지(志) 부분을 완성하지 못했다. 양(梁, 502~557)의 유소(劉昭)는 동진(東晋)의 사마표(司馬彪)가 편찬한 <속한서(續漢書)>에서 율력(律曆), 예의(禮儀), 제사(祭祀), 천문(天文), 오행(五行), 군국(郡國), 백관(百官), 여복(輿服) 등의 ‘팔지(八志)’ 부분에 주석(註釋)을 붙여 30권의 <보주후한지(補注後漢志)>를 편찬하였다. 이로써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이루어진 <후한서(後漢書)>의 체재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북송(北宋, 960∼1126) 초기까지 <후한서(後漢書)>는 90권의 본기(本紀), 열전(列傳)과 30권의 <보주후한지(補注後漢志)>가 따로 간행되었는데, 본기(本紀), 열전(列傳)에는 당(唐, 618~907) 시대에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의 둘째아들인 장회태자(章懐太子) 이현(李賢, 654~684)이 붙인 주석(註釋)이 덧붙여 있었다. 북송(北宋) 진종(眞宗, 재위 997~1022) 때인 1022년(宋 眞宗 乾興 원년), 손석(孫奭)은 이현(李賢)이 주석(註釋)을 붙인 90권의 본기(本紀), 열전(列傳)에 유소(劉昭)가 주석(註釋)을 붙인 30권의 지(志)를 합하여 간행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후한서(後漢書)>의 판본(板本)이다.
<후한서(後漢書)>는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의 체례(體例)를 따르고 있으나, 표(表)가 없으며, 본기(本紀)에 황후기(皇后紀)를 따로 수록하였다. 열전(列傳)에 당고(黨錮), 환자(宦者), 문원(文苑), 독행(獨行), 방술(方術), 일민(逸民), 열녀(列女)의 7개 항목을 새로 둔 것도 특징이다. 청(淸, 1636~1912) 시대에는 <후한서(後漢書)>의 표(表), 지(志), 주(注)에 대한 보완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혜동(惠棟, 1697~1758)의 <후한서보지(後漢書補志)>, 왕선겸(王先謙, 1842~1917)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이자명(李慈銘, 1830~1895)의 <후한서집주(後漢書集注)>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후한서(後漢書)> 85권의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부여(夫余), 읍루(挹婁), 고구려(高句驪), 동옥저(東沃沮), 예 (濊), 삼한(三韓), 왜(倭)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많은 부분이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차이가 있거나 새로운 사실들도 많아 한반도의 고대사(古代史) 연구에 중요한 사료(史料)로 쓰이고 있다.
관련 고사성어
紀
列傳
013 卷11 劉玄劉盆子列傳第一(유현유분자열전)
鐵中錚錚(철중쟁쟁) 쇠 중(中)에서 소리가 가장 맑다는 뜻으로, 동류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 |
庸中佼佼(용중교교) ①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라는 뜻으로 ‘철중쟁쟁’과 함께 그만그만한 자 중에서 조금 나은 자를 두고 이르는 말. ②아름다운 여인. |
015 卷13 隗囂公孫述列傳第三(외효공손술열전)
置之度外(치지도외) |
026 卷24 馬援列傳第十四(마원열전)
老益壯(노익장) | 老當益壯(노당익장, 老当益壮,lǎodāngyìzhuàng)) 늙을수록 더욱 강인한 마음과 뜻을 지녀야 한다. 《후한서·마원전(後漢書·馬援傳)》에 나오는 “大丈夫爲者 窮當益堅 老當益壯 (丈夫为志,穷当益坚,老当益壮; 사나이의 마음가짐은 어려울수록 더욱 굳세어져야 하고, 늙을수록 더욱 강인해져야 한다.)”란 말에서 유래함 |
050 卷58 虞傅蓋臧列傳第四十八(우전개장열전) 虞詡・傳燮・蓋勳・臧洪
盤根錯節(반근착절) | 兵不厭詐(병불염사)
068 卷63 李杜列傳(이두열전)第五十三 李固・杜喬
狼狽(낭패) |
志
참조항목
二十四史(이십사사) | 十八史略(십팔사략) |
http://zh.wikipedia.org/wiki/後漢書
http://ko.wikipedia.org/wiki/후한서
後起之秀 (후기지수)
後起之秀(후기지수)
後 뒤 후, 임금 후 | 起 일어날 기 | 之 -의 지, 갈 지 | 秀 빼어날 수 |
후배(後輩) 중(中)의 뛰어난 인물(人物)을 이르는 말
세설신어 상예(賞譽)편의 이야기.
동진(東晋) 때, 왕침(王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미치광이 같은 행동은 어려서부터 소문이 나 있었다.
어느 날, 왕침이 삼촌인 범영(范寧)의 집에 갔는데, 마침 장현(張玄)이라는 사람이 와 있었다. 범영은 장현과 왕침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다. 그러나 장현은 자리에 앉은채 왕침과는 인사도 하지 않았고, 왕침도 말을 하지 않고 나와버렸다. 범영은 왕침이 장현과 대화를 나누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저 사람은 학식이 높고 인품이 아주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데 너는 왜 인사를 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왕침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진정으로 저를 알고 싶어한다면, 스스로 저를 찾아올 것입니다."
범영은 왕침의 성격을 칭찬하며 말했다.
"너는 매우 희망이 있으니, 참으로 후배 중에서 뛰어난 인물이로다."
왕침은 말했다.
"삼촌 같으신 분이 안계셨다면, 이런 조카가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전해 들은 장현은 왕침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찾아왔다. 왕침도 그를 맞아들여 그들은 곧 좋은 친구가 되었다. 훗날 왕침은 형주자사(荊州刺史)를 맡아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後起之秀란 후배들 중의 우수한 인물 을 가리키는 말이다.
출전
세설신어 상예(賞譽)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後 뒤 후, 임금 후 | 起 일어날 기 | 之 -의 지, 갈 지 | 秀 빼어날 수 |
후배(後輩) 중(中)의 뛰어난 인물(人物)을 이르는 말
세설신어 상예(賞譽)편의 이야기.
동진(東晋) 때, 왕침(王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미치광이 같은 행동은 어려서부터 소문이 나 있었다.
어느 날, 왕침이 삼촌인 범영(范寧)의 집에 갔는데, 마침 장현(張玄)이라는 사람이 와 있었다. 범영은 장현과 왕침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다. 그러나 장현은 자리에 앉은채 왕침과는 인사도 하지 않았고, 왕침도 말을 하지 않고 나와버렸다. 범영은 왕침이 장현과 대화를 나누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저 사람은 학식이 높고 인품이 아주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데 너는 왜 인사를 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왕침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가 진정으로 저를 알고 싶어한다면, 스스로 저를 찾아올 것입니다."
범영은 왕침의 성격을 칭찬하며 말했다.
"너는 매우 희망이 있으니, 참으로 후배 중에서 뛰어난 인물이로다."
왕침은 말했다.
"삼촌 같으신 분이 안계셨다면, 이런 조카가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전해 들은 장현은 왕침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찾아왔다. 왕침도 그를 맞아들여 그들은 곧 좋은 친구가 되었다. 훗날 왕침은 형주자사(荊州刺史)를 맡아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後起之秀란 후배들 중의 우수한 인물 을 가리키는 말이다.
출전
세설신어 상예(賞譽)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後人發先人至 (후인발선인지)
後人發先人至(후인발선인지)
後 뒤 후, 임금 후 | 人 사람 인 | 發 필 발 | 先 먼저 선 | 人 사람 인 | 至 이를 지, 덜렁대는 모양 질 |
상대방보다 늦게 떠나 먼저 도착한다는 뜻.
손자(孫子) 군쟁편(軍爭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군쟁 중에서 어려운 점은 먼 길을 곧은 길로 삼고, 근심거리를 오히려 이로움으로 만드는데 있다. 따라서 그 길을 구불구불 가는 것처럼 하여 적을 이익으로 유인하면 나중에 출발한 군대가 먼저 도착하는 것이니 이는 우직지계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軍爭之難者, 以迂爲直, 以患爲利. 故迂其途, 而誘之以利, 後人發, 先人至, 此知迂直之計者也]”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迂直之計(우직지계) | 以迂爲直(이우위직) | 後人發先人至(후인발선인지) |
後 뒤 후, 임금 후 | 人 사람 인 | 發 필 발 | 先 먼저 선 | 人 사람 인 | 至 이를 지, 덜렁대는 모양 질 |
상대방보다 늦게 떠나 먼저 도착한다는 뜻.
손자(孫子) 군쟁편(軍爭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군쟁 중에서 어려운 점은 먼 길을 곧은 길로 삼고, 근심거리를 오히려 이로움으로 만드는데 있다. 따라서 그 길을 구불구불 가는 것처럼 하여 적을 이익으로 유인하면 나중에 출발한 군대가 먼저 도착하는 것이니 이는 우직지계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軍爭之難者, 以迂爲直, 以患爲利. 故迂其途, 而誘之以利, 後人發, 先人至, 此知迂直之計者也]”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迂直之計(우직지계) | 以迂爲直(이우위직) | 後人發先人至(후인발선인지) |
厚顔無恥 (후안무치)
厚顔無恥(후안무치)
厚 투터울 후 | 顔 얼굴 안 | 無 없을 무 | 恥 부끄러워할 치 |
옛날 중국의 하나라 계(啓) 임금의 아들인 태강은 정치를 돌보지 않고 사냥만 하다가 끝내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난다. 이에 그의 다섯 형제들은 나라를 망친 형을 원망하며 번갈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의 노래는 모두 書經의 '五子之歌'편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막내가 불렀다고 하는 노래에는 이러한 대목이 보인다.
만백성들은 우리를 원수라 하니, 우린 장차 누굴 의지할꼬. 답답하고 섧도다, 이 마음, 낯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워지누나.
萬姓仇予, 予將疇依. 鬱陶乎予心, 顔厚有.
厚顔이란 두꺼운 낯가죽을 뜻하는데, 여기에 무치(無恥)를 더하여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로 자주 쓰인다. 이는 낯가죽이 두꺼워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厚 투터울 후 | 顔 얼굴 안 | 無 없을 무 | 恥 부끄러워할 치 |
옛날 중국의 하나라 계(啓) 임금의 아들인 태강은 정치를 돌보지 않고 사냥만 하다가 끝내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난다. 이에 그의 다섯 형제들은 나라를 망친 형을 원망하며 번갈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의 노래는 모두 書經의 '五子之歌'편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막내가 불렀다고 하는 노래에는 이러한 대목이 보인다.
만백성들은 우리를 원수라 하니, 우린 장차 누굴 의지할꼬. 답답하고 섧도다, 이 마음, 낯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워지누나.
萬姓仇予, 予將疇依. 鬱陶乎予心, 顔厚有.
厚顔이란 두꺼운 낯가죽을 뜻하는데, 여기에 무치(無恥)를 더하여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로 자주 쓰인다. 이는 낯가죽이 두꺼워서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後生可畏 (후생가외)
後生可畏(후생가외)
뒤에 태어난 사람들, 다시 말하면 젊은 후배들을 두려워 할 만하다는 뜻. 젊은 후배들은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선배들보다 뛰어난 인물이 될 수도 있기에 가히 두렵다는 말이다.
논어 子罕篇(자한편)에 이런 말이 실려 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 후배들을 두려워 해야 하느니. 그들의 장래 학문이 오늘의 우리보다 낫거나 못할줄 어찌 알리오. 그러나 그들의 나이 사오십이 되어도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두려워 할 것도 아무것도 없느니(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자왈 후생가외 언지래자지불여금야 사십오십이무문언 사역부족외야이).
공자의 가르침이 대개 상식적이고 현실적이며 실리주의에 입각하고 있듯이 이 대목도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인간은 진보의 과정에 있다. 미래가 있다는 것은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고 노력이 따르면 얼마든지 발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50세가 되도록 이름을 낼 수 없는 사람이라면 두려워 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大器晩成(대기만성). 늘그막에 뭔가 이루어내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50세까지로 끊어 그 가능성을 한정시킨 것도 공자다워 보인다.
공자가 後生可畏라고 한 것은 제자 가운데서도 재주와 德行(덕행)이 가장 뛰어났던 顔回(안회)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자한편'의 後生可畏…바로 앞대목에 '꽃피지 못하는 싹이 있고 열매맺지 못하는 꽃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안회가 아깝게도 夭折(요절)한 것을 한탄한 것이라고 전한다.
뒤에 태어난 사람들, 다시 말하면 젊은 후배들을 두려워 할 만하다는 뜻. 젊은 후배들은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선배들보다 뛰어난 인물이 될 수도 있기에 가히 두렵다는 말이다.
논어 子罕篇(자한편)에 이런 말이 실려 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 후배들을 두려워 해야 하느니. 그들의 장래 학문이 오늘의 우리보다 낫거나 못할줄 어찌 알리오. 그러나 그들의 나이 사오십이 되어도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두려워 할 것도 아무것도 없느니(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자왈 후생가외 언지래자지불여금야 사십오십이무문언 사역부족외야이).
공자의 가르침이 대개 상식적이고 현실적이며 실리주의에 입각하고 있듯이 이 대목도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인간은 진보의 과정에 있다. 미래가 있다는 것은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고 노력이 따르면 얼마든지 발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50세가 되도록 이름을 낼 수 없는 사람이라면 두려워 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大器晩成(대기만성). 늘그막에 뭔가 이루어내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50세까지로 끊어 그 가능성을 한정시킨 것도 공자다워 보인다.
공자가 後生可畏라고 한 것은 제자 가운데서도 재주와 德行(덕행)이 가장 뛰어났던 顔回(안회)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자한편'의 後生可畏…바로 앞대목에 '꽃피지 못하는 싹이 있고 열매맺지 못하는 꽃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안회가 아깝게도 夭折(요절)한 것을 한탄한 것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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