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병마용(兵馬俑) 박물관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입구의 진시황 상
박물관 입구
병마용 갱 위치도
호갱의 군진(軍陳)은 길이 230m, 폭 62m, 총면적 14,260평방m로 3개 병마용갱 중에서 가장 크다. 갱내에 6000여점의 토용과 토마 40여승의 목조전차가 배치되었다.
병마용 갱(1호용 갱)
돔 구장 만한 병마용 갱은 1, 2, 3호 갱으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도 발굴이 진행 중이다.
1974년 초봄 섬서성 임당현 서양촌(西楊村)의 우물 파던 한 농부에 의해 금세기 최대의 발견이 이루어졌다.
지방 순시 중 49세로 사망한 진시황이 사후 자신의 능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병마용 갱은 출전명령을 기다리는 2200년 전의 고대제국의 군대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박물관 전시실에 별도로 진열된 토용(土俑)중에서 태권도 하단막기 품세가 있다.
실물의 1/2 크기의 완벽한 청동 마차(두대 중 한대)
3000년전 고대 유물속에 놀랍게도 [한국의 전 대통령 노태우 기증 품]이라는 설명이 붙은 한국 철화 백자가 전시되어 있었다.
현재는 개방되지 않아 차창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진시황 능묘
능의 기존 높이는 115m 였으나 비바람에 씻기고 무너져 현재는 76m. 기초는 동서 길이 345m, 남북 350m이다. 봉토를 둘러 싼 내.외성이 있으며 지금은 대부분 토락하였다.
조선일보 이수한 2007/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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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글입니다.
2007년 글과 사진이니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3000년 역사의 古都 시안(西安) ②
화청지(華淸池)
당(唐)의 현종이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와 사랑에 빠졌던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화청궁(華淸宮)이라 부르기도 하며, 서안 사변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보수 중
양귀비 목욕탕
온천 수원
양귀비가 즐기던 석류나무
양귀비가 목욕 후 머리를 말리던 정자
받은 글입니다.
당(唐)의 현종이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와 사랑에 빠졌던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화청궁(華淸宮)이라 부르기도 하며, 서안 사변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보수 중
양귀비 목욕탕
온천 수원
양귀비가 즐기던 석류나무
양귀비가 목욕 후 머리를 말리던 정자
받은 글입니다.
3000년 역사의 古都 시안(西安) ①
3000년 역사의 古都 시안(西安)
시안 역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의 西安 시내로 들어서면 어마어마한 장벽이 길손을 위압적으로 가로 막는다.
시안 성벽은 명대(明代)의 주원장에 의해 건설되었고 중국의 고성 중에서 가장 완전한 상태의 성벽이다.
성벽은 둘레 13.7km로서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넓은 성벽 위로는 승합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비림(碑林)
역대의 비석과 비문을 한 곳에 수집하여 놓은 비림(碑林)
한(漢)대 부터 청(淸)대에 이르기 까지 1000여개의 비석과 비문이 전시되어 있어, 비석들이 숲을 이룬것과 같다하여 비림(碑林)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탁본 하는 장면
받은 글과 사진입니다.
시안 역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의 西安 시내로 들어서면 어마어마한 장벽이 길손을 위압적으로 가로 막는다.
시안 성벽은 명대(明代)의 주원장에 의해 건설되었고 중국의 고성 중에서 가장 완전한 상태의 성벽이다.
성벽은 둘레 13.7km로서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넓은 성벽 위로는 승합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비림(碑林)
역대의 비석과 비문을 한 곳에 수집하여 놓은 비림(碑林)
한(漢)대 부터 청(淸)대에 이르기 까지 1000여개의 비석과 비문이 전시되어 있어, 비석들이 숲을 이룬것과 같다하여 비림(碑林)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탁본 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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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盡悲來 (흥진비래)
興盡悲來(흥진비래)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온다는 뜻으로 흥망성쇠가 엇바뀜을 비유.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온다는 뜻으로 흥망성쇠가 엇바뀜을 비유.
黑白顚倒 (흑백전도)
黑白顚倒(흑백전도)
黑 검을 흑 | 白 흰 백 | 顚 엎드러질 전 | 倒 넘어질 도 |
'검은 것과 흰 것이 거꾸로 되었다'라는 뜻으로, 옳고 그름이 뒤집히거나 그러한 상황을 야기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굴원(屈原)의 '회사(懷沙)'에서 유래되었다.
전도흑백(顚倒黑白) 또는 반백위흑(反白爲黑), 흑백혼효(黑白混淆) 또는 혼효흑백(混淆黑白)이라고도 한다. 전도시비(顚倒是非)나 혼효시비(混淆是非)도 같은 뜻이다.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굴원은 유배지에서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며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그가 죽기 전에 자신의 심경을 담아 지은 작품이 바로 '회사'이다.
여기서 굴원은 "흰 것이 변하여 검은 것이 되고, 위가 거꾸로 아래로 되었네(變白以爲黑兮, 倒上以爲下). 봉황은 조롱 속에 갇히고, 닭과 꿩이 하늘을 나네"라고 읊으며, 간신배들이 활개치는 세상을 한탄하였다.
또 후한 시대 안제(安帝) 때의 양진(楊震)은 번풍(樊豊)과 주광(周廣) 등 탐관오리의 행태를 고발하는 상소문에서 "흰 것과 검은 것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고, 맑음과 탁함이 그 근원을 같이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흑백전도는 문자 그대로 흑과 백이 뒤집힌 것처럼 옳음과 그름(是非)이 뒤집힌 부조리한 상황을 비유하거나,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하고 흰 것을 검다고 말하는 것처럼 고의로 옳고 그름을 흐리게 하거나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굴원(屈原)의 회사(懷沙)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전도흑백(顚倒黑白) | 반백위흑(反白爲黑) | 흑백혼효(黑白混淆) | 혼효흑백(混淆黑白) | 전도시비(顚倒是非) | 혼효시비(混淆是非) |
黑 검을 흑 | 白 흰 백 | 顚 엎드러질 전 | 倒 넘어질 도 |
'검은 것과 흰 것이 거꾸로 되었다'라는 뜻으로, 옳고 그름이 뒤집히거나 그러한 상황을 야기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굴원(屈原)의 '회사(懷沙)'에서 유래되었다.
전도흑백(顚倒黑白) 또는 반백위흑(反白爲黑), 흑백혼효(黑白混淆) 또는 혼효흑백(混淆黑白)이라고도 한다. 전도시비(顚倒是非)나 혼효시비(混淆是非)도 같은 뜻이다.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굴원은 유배지에서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며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그가 죽기 전에 자신의 심경을 담아 지은 작품이 바로 '회사'이다.
여기서 굴원은 "흰 것이 변하여 검은 것이 되고, 위가 거꾸로 아래로 되었네(變白以爲黑兮, 倒上以爲下). 봉황은 조롱 속에 갇히고, 닭과 꿩이 하늘을 나네"라고 읊으며, 간신배들이 활개치는 세상을 한탄하였다.
또 후한 시대 안제(安帝) 때의 양진(楊震)은 번풍(樊豊)과 주광(周廣) 등 탐관오리의 행태를 고발하는 상소문에서 "흰 것과 검은 것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고, 맑음과 탁함이 그 근원을 같이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흑백전도는 문자 그대로 흑과 백이 뒤집힌 것처럼 옳음과 그름(是非)이 뒤집힌 부조리한 상황을 비유하거나,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하고 흰 것을 검다고 말하는 것처럼 고의로 옳고 그름을 흐리게 하거나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굴원(屈原)의 회사(懷沙)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전도흑백(顚倒黑白) | 반백위흑(反白爲黑) | 흑백혼효(黑白混淆) | 혼효흑백(混淆黑白) | 전도시비(顚倒是非) | 혼효시비(混淆是非) |
懸梁刺股 (현량자고)
懸梁刺股(현량자고)
懸 매달 현 | 梁 대들보 량 | 刺 찌를 자 | 股 넓적다리 고 |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른다'라는 뜻으로, 분발하여 학문에 정진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한(漢)나라 때의 대학자인 손경(孫敬)과 전국시대에 종횡가(縱橫家)로 명성을 떨친 소진(蘇秦)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현두자고(懸頭刺股) 또는 자고현량(刺股懸梁)이라고도 한다. 손경과 소진 두 사람의 일화에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합쳐진 것이다. '현량'은 손경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손경은 자가 문보(問寶)이며, 학문을 좋아하여 사람들이 찾아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근 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공부를 하다가 졸음이 오면 노끈으로 머리카락을 묶어 대들보에 매달았다. 잠이 와서 고개를 떨구면 노끈이 팽팽해지면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통증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와 같이 노력하여 손경은 나중에 대유학자가 되었다. 이 고사는 《몽구(蒙求)》와 《태평광기(太平廣記)》 등에 실려 있다.
'자고'는 소진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소진은 처음에 진(秦)나라 혜왕(惠王)에게 연횡책(連橫策)을 유세하다가 좌절하여 집으로 돌아왔는데, 가족들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그를 박대하였다. 그는 자신을 한탄하며 궤짝에 들어 있는 책들을 꺼내 살펴보다가 태공(太公)이 지은 《음부(陰符)》를 발견하였다.
소진은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러 잠을 쫓아가며 그 책을 공부하는 데 몰두하였다. 1년이 지나 소진은 마침내 그 책의 이치를 터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종횡가로 명성을 떨치며 전국시대 6국의 재상이 되었다. 이 고사는 《전국책(戰國策)》의 〈진책(秦策)〉편에 실려 있다. 이 두 가지 고사에서 유래하여 현량자고는 고통을 감수하고 분발하여 학문에 정진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刺股懸梁(자고현량) | 懸頭刺股(현두자고) | 懸梁刺股(현량자고) |
懸 매달 현 | 梁 대들보 량 | 刺 찌를 자 | 股 넓적다리 고 |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른다'라는 뜻으로, 분발하여 학문에 정진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한(漢)나라 때의 대학자인 손경(孫敬)과 전국시대에 종횡가(縱橫家)로 명성을 떨친 소진(蘇秦)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현두자고(懸頭刺股) 또는 자고현량(刺股懸梁)이라고도 한다. 손경과 소진 두 사람의 일화에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합쳐진 것이다. '현량'은 손경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손경은 자가 문보(問寶)이며, 학문을 좋아하여 사람들이 찾아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근 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공부를 하다가 졸음이 오면 노끈으로 머리카락을 묶어 대들보에 매달았다. 잠이 와서 고개를 떨구면 노끈이 팽팽해지면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통증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와 같이 노력하여 손경은 나중에 대유학자가 되었다. 이 고사는 《몽구(蒙求)》와 《태평광기(太平廣記)》 등에 실려 있다.
'자고'는 소진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소진은 처음에 진(秦)나라 혜왕(惠王)에게 연횡책(連橫策)을 유세하다가 좌절하여 집으로 돌아왔는데, 가족들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그를 박대하였다. 그는 자신을 한탄하며 궤짝에 들어 있는 책들을 꺼내 살펴보다가 태공(太公)이 지은 《음부(陰符)》를 발견하였다.
소진은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러 잠을 쫓아가며 그 책을 공부하는 데 몰두하였다. 1년이 지나 소진은 마침내 그 책의 이치를 터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종횡가로 명성을 떨치며 전국시대 6국의 재상이 되었다. 이 고사는 《전국책(戰國策)》의 〈진책(秦策)〉편에 실려 있다. 이 두 가지 고사에서 유래하여 현량자고는 고통을 감수하고 분발하여 학문에 정진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刺股懸梁(자고현량) | 懸頭刺股(현두자고) | 懸梁刺股(현량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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