苟合取容(구합취용)
苟合取容(gǒuhéqǔróng)
苟 진실로 구,구차할 구 | 合 합할 합,쪽문 합,홉 홉 | 取 가질 취 | 容 얼굴 용 |
무원칙적으로〔분별 없이〕 부화하여〔영합하여〕 남의 환심을 사다.
유래: 한서(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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報任少卿書(보임소경서) 司馬遷(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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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者無一遂(사자무일수) : 이 네 가지 중에 한 가지도 성취하지 못하고
苟合取容(구합취용) : 남의 비위나 맞추고 영합해서
無所短長之效(무소단장지효) :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한 것이
可見如此矣(가견여차의) : 이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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窮鳥入懷 (궁조입회)
窮鳥入懷(궁조입회)
窮 다할 궁, 궁할 궁 | 鳥 새 조, 땅 이름 작, 섬 도 | 入 들 입 | 懷 품을 회 |
쫓기던 새가 사람의 품안으로 날아든다는 뜻으로, 사람이 궁하면 적에게도 의지(依支)한다는 말
[출전]
안씨가훈(顔氏家訓)
窮 다할 궁, 궁할 궁 | 鳥 새 조, 땅 이름 작, 섬 도 | 入 들 입 | 懷 품을 회 |
쫓기던 새가 사람의 품안으로 날아든다는 뜻으로, 사람이 궁하면 적에게도 의지(依支)한다는 말
[출전]
안씨가훈(顔氏家訓)
君子坦蕩蕩小人長戚戚 (군자탄탕탕소인장척척)
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군자탄탕탕 소인장척척)
君 임금 군 | 子 아들 자 | 坦 평탄할 탄, 너그러울 탄 | 蕩 방탕할 탕 | 小 작을 소 | 人 사람 인 | 長 | 길 장, 어른 장 | 戚 친척 척, 근심할 척, 재촉할 촉 |
군자는 마음이 평탄하며 넓고, 소인은 항상 걱정이 많다.
[출처]
論語(논어) 述而(술이)
관련 한자어
참조어
君子與小人(군자여소인) |
君 임금 군 | 子 아들 자 | 坦 평탄할 탄, 너그러울 탄 | 蕩 방탕할 탕 | 小 작을 소 | 人 사람 인 | 長 | 길 장, 어른 장 | 戚 친척 척, 근심할 척, 재촉할 촉 |
군자는 마음이 평탄하며 넓고, 소인은 항상 걱정이 많다.
[출처]
論語(논어) 述而(술이)
관련 한자어
참조어
君子與小人(군자여소인) |
君子固窮 (군자고궁)
君子固窮(군자고궁)
君 임금 군 | 子 아들 자 | 固 굳을 고 | 窮 궁할 궁 |
군자는 어렵고 궁핍할 때 더 굳고 심지가 깊어진다는 뜻.
논어(論語)에 보면 군자(君子)는 어려울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사람이라 하고(君子固窮), 소인(小人)은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하고 넘쳐버리는 사람(小人窮濫)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와 세상을 주유(周遊)할 때 진(陳)나라에서 최악의 위기상황을 맞이하였다. 제자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여 대부분 병이 들었고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었다. 이런 궁한 상황에서 공자의 다혈질 제자 자로(子路)는 공자를 만나 이렇게 따졌다.
“선생님! 군자도 이렇게 궁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까?”
자로의 이 물음 속에는 공자를 믿고 따르는 아무 죄 없는 제자들이 왜 이런 힘든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를 공자에게 따져 묻는 것이었다. 공자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였다.
“군자는 어려울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사람이다(君子固窮). 그러나 소인은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곧 원칙을 버리고 넘치게 되지(小人窮斯濫).”
공자의 이 말 속에는 어려움 속에 대처하는 두 가지 인간의 전형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논리가 있다.
어려움(窮), 그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의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출전
논어
君 임금 군 | 子 아들 자 | 固 굳을 고 | 窮 궁할 궁 |
군자는 어렵고 궁핍할 때 더 굳고 심지가 깊어진다는 뜻.
논어(論語)에 보면 군자(君子)는 어려울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사람이라 하고(君子固窮), 소인(小人)은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하고 넘쳐버리는 사람(小人窮濫)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와 세상을 주유(周遊)할 때 진(陳)나라에서 최악의 위기상황을 맞이하였다. 제자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여 대부분 병이 들었고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었다. 이런 궁한 상황에서 공자의 다혈질 제자 자로(子路)는 공자를 만나 이렇게 따졌다.
“선생님! 군자도 이렇게 궁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까?”
자로의 이 물음 속에는 공자를 믿고 따르는 아무 죄 없는 제자들이 왜 이런 힘든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를 공자에게 따져 묻는 것이었다. 공자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였다.
“군자는 어려울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사람이다(君子固窮). 그러나 소인은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곧 원칙을 버리고 넘치게 되지(小人窮斯濫).”
공자의 이 말 속에는 어려움 속에 대처하는 두 가지 인간의 전형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논리가 있다.
어려움(窮), 그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의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출전
논어
屈原 (굴원)
굴원(屈原, BC 343?~BC 278?)
異名: 본명 굴평, 자는 원
국적: 중국
활동분야: 정치, 문학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비극시인.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 주요 작품에는 《어부사(漁父辭)》등이 있다.
초나라에서 굴(屈)과 소(昭), 경(景)이라는 성은 귀족이었다. 특히, 굴(屈)은 초(楚)의 왕족과 동성(同姓)이다. 이름 평(平), 자 원이다. 생몰연대는 기본자료인 《사기(史記)》 <굴원전>에 명기(明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설이 있다.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부여받았다. 당시 회왕은 그를 극히 중시하여 궁정 내의 법령 초안을 책임지고 항시 국가 기밀에 참여케 하고, 궁정 밖에서는 법령의 선포를 책임지고 외빈을 접대케 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출세하자 일부 대신들은 그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사기 (史記)에 의하면,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靳尙)이 굴원의 재능을 시기하여, 그가 법령 초안할 때 그의 초고를 훔쳐 자신의 공인양 내세웠다. 굴원이 양보하려 들지 않자, 그는 회왕의 면전에서 굴원을 헐뜯었다. 게다가 굴원이 항상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며 초나라에 자신이 없으면 법령을 초안할 사람이 없다고 자랑한다며 그를 모함하였다. 초나라 회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그 후로는 점차 굴원을 멀리하였다. 《이소(離騷)》는 그 분함을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 때는 바로 전국 말년으로 크고 작은 많은 제후국이 오랫동안 서로 합병하여 제(齊) 초(楚) 연(燕) 조(趙) 위(魏) 한(韓) 진(秦) 등 일곱 나라 만 남게 되었다. 그중 진나라가 가장 강했고 제·초가 그 다음이었다. 이 세 나라는 모두 세력을 확대하여 천하를 통일코자 했다. 굴원은 높은 식견을 가진 정치가로 당시 형세를 익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파(合縱派)였다. 그렇지 않으면 힘이 분산되어 진에게 각각 격파되어 망국의 위험을 불러오기 쉽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미 타인의 음모로 국사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도 없었다. 당시 진나라는 초나라 내부에 간신이 득세함을 보고 초를 침략코자 초나라와 제나라 연맹을 깨뜨릴 방법을 강구했다. 진왕은 유명한 참모 장의(張儀)를 초에 파견하여 이간책을 진행시켰다. 연횡파(連衡派)인 장의는 방법을 강구해 회왕이 총애하는 기녀 정수(鄭袖)를 매수하고 또 상관대부 근상 등과 가까이 지냈다. 그리하여 회왕이 제나라와 절교하게끔 종용하고, 제와 단교하면 상(商)의 토지 6백 리를 그 보상으로 초에게 줄 것이라 말했다. 회왕은 진의 보상을 탐내 장의의 조건에 응했다.
그러나 실상 제나라와 절교한 뒤 장의는 진나라로 돌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채하며 당시 주기로 했던 것은 6리이지 600리가 아니라고 잡아떼었다. 초 회왕은 속은 것을 깨닫고 화를 못 이겨 즉각 군대를 이끌고 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오히려 진나라 군사에게 대패하고 도망쳐 왔다. 게다가 한중(漢中) 일대의 땅마저 잃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초 회왕은 더욱 화가 나 다시 군대를 소집하여 진을 공격했으나, 결국 남전(藍田) 일대에서 포위되어 또 한차례 패배의 쓴 잔을 맛보게 된다. 이쯤 되자 회왕은 비로소 굴원의 재능을 아쉬워하여, 그의 힘을 빌어 열세를 모면해 보고자 했다. 굴원을 재등용하여 제나라로 파견시켜 다시 국교를 맺으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진은, 초나라와 제나라 두 대국이 다시 연합할까 두려워 한중 일대의 토지 반을 반납하는 대가로 화해를 청했다. 회왕은 장의를 미워하여 땅을 얻을 생각은 않고 장의의 사죄만을 요구했다. 장의는 초왕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스스로 진왕에게 그를 초나라로 보내 사죄케 해 달라고 요구했다. 한중 일대의 토지를 반환할 필요가 없게 되자 진왕은 크게 기뻐하여 즉시 초왕의 조건을 받아들여 장의를 초나라로 보냈다. 장의는 초나라 수도에 도착한 뒤 급히 수단을 써서 회왕의 충신 근상과 기녀 정수와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고, 이 두 사람이 그를 위해 직접 좋은 말을 하게끔 했다. 결국 초회왕은 또 다시 장의를 풀어 주었다.
굴원이 제나라에서 돌아와 어찌하여 한중 일대의 땅도 마다하고 또 영토 대신으로 초나라에 온 장의도 죽이지 않았는지를 묻자, 초왕은 그제서야 깨닫고 크게 후회하였다. 그러나 장의는 이미 저 멀리 국경을 떠나 쫓을 수 없는 상태였다.
얼마 후 진나라는 또 초나라에 유인책을 펼쳐 결연 관계를 맺자고 청하곤 대신 초나라 태자를 秦의 인질로 보내도록 했다. 이로써 초나라와 제나라의 수교는 또 다시 결렬되고 말았다. 굴원은 줄곧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자고 주장해 왔으나, 결국 완전히 실패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 실의는 굴원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풍부한 감정과 탁월한 재능으로 시가 창작에 몰두하였다.
굴원이 비분과 우울 속에 끊임없이 시를 쓰던 이 기간에, 진초 양국의 관계에는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다. 진나라 인질로 들어가라는 명을 받은 초나라 태자는 진나라에서 살인죄를 범하고 몰래 도망쳐서 귀국했다. 진나라는 이를 구실로 군대를 보내 초나라를 침공했다. 이에 회왕은 또 굴원을 불러들여 그에게 태자와 함께 제로 들어가 도움을 청하고, 다시 제와 연합해 진에 대항코자 했다. 그러자 이듬해 진은 다시 강화를 가장하여 진에서 담판을 짓자고 했다.
왕의 입진(入秦)도 반대하였으나 역시 헛일이었다. 굴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왕은 경솔히 진나라에 들어가, 결국 구금되어 진나라에서 객사(客死)하였다. 이후 제나라 인질로 들어간 초나라 태자는 즉각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했으니, 그가 바로 경양왕(頃襄王)이다.
그리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자란은 아버지를 객사하게 한 장본인이었으므로, 굴원은 그를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다. 《어부사(漁父辭)》는 그때의 작품이다. 《사기》에는 <회사부(懷沙賦)>를 싣고 있는데, 이는 절명(絶命)의 노래이다.
이때 굴원은 나라의 멸망 이미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고 상심했다. 얼마 안 있어 진은 과연 군대를 이끌고 초를 공격하여 진나라 대장 백기(白起)는 초나라 수도 영성(郢城)을 함락시켰다. 경양왕은 하는 수 없이 진성(陳城)으로 천도했지만,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굴원은 이 소식을 듣고 슬픈 마음으로 「애영」(哀郢)이라는 시 한 수를 지어, 자신의 비분과 고통을 담아 내었다. 그 뒤 나라는 날로 엉망이 되었다.
한편, 자기가 옳고 세속이 그르다고 말하고, 난사(亂辭:최종 악장의 노래)에서는, 죽어서 이 세상의 유(類:법·모범)가 되고 자살로써 간(諫)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있다. 유랑에 떠도는 백성들의 고초를 바라보며 실제로도 결국 큰 돌멩이를 껴안은 채 창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가 죽었을 때 62세였다. 후세 사람들은 나라와 세상을 걱정했던 위대한 시인을 기리기 위해, 그가 강에 투신 자살한 날(음력 5月5日) 용머리로 장식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시합을 벌이는데, 이는 굴원의 시체를 찾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 이날 주악(糉子)을 빚어 강에 던지는데, 이는 교룡(蛟龍)이 배불리 먹은 뒤 굴원의 시신을 해치지 말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이런 민간의 풍속으로 볼 때 굴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굴원의 문학적 공헌으로는 탁월한 창작을 통해 감동적인 애국 사상을 전파하고, 초사체(楚辭體)라는 새로운 시형을 창조한 것을 들 수 있다. 굴원 이전에는 4자가 한 구를 이루는 시경체(詩經體)가 유행했는데, 그는 남방 언어를 이용하여 시경 이래 유행했던 4자구를 3자구로 바꾸어 놓았다. 동시에 ‘혜’(兮)자 혹은 ‘사’(些)자로 두 개의 3자구를 연결시키어서 후세의 7언시와 유사한 7언구를 만들었다. 형식의 변화로 내용 역시 더욱 다양해지고, 생활의 필요에 부합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형의 대변혁은 전국 말엽과 양한 시대의 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굴원의 제자인 송옥(宋玉) 경차(景差) 당륵(唐勒) 등은 물론 훗날 한초(漢初)의 가의(賈誼) 동방삭(東方朔) 장기(莊忌) 유향(劉向) 왕포(王褒) 왕일(王逸) 등도 그의 문체를 모방하였다. 이 중 도서정리 전문가였던 유향은 많은 사람들의 작품과 굴원이 남긴 작품을 한 권의 책으로 편집했는데 이것을 초사 (楚辭)라 한다. 이는 중국 고대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세 권의 총집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두가지는 시경 과 소명문선 (昭明文選)임) 이 책은 분량은 많지 않지만 시경 이후 등장한 명작을 망라하여, 중국 시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
異名: 본명 굴평, 자는 원
국적: 중국
활동분야: 정치, 문학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비극시인.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 주요 작품에는 《어부사(漁父辭)》등이 있다.
초나라에서 굴(屈)과 소(昭), 경(景)이라는 성은 귀족이었다. 특히, 굴(屈)은 초(楚)의 왕족과 동성(同姓)이다. 이름 평(平), 자 원이다. 생몰연대는 기본자료인 《사기(史記)》 <굴원전>에 명기(明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설이 있다.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부여받았다. 당시 회왕은 그를 극히 중시하여 궁정 내의 법령 초안을 책임지고 항시 국가 기밀에 참여케 하고, 궁정 밖에서는 법령의 선포를 책임지고 외빈을 접대케 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출세하자 일부 대신들은 그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사기 (史記)에 의하면,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靳尙)이 굴원의 재능을 시기하여, 그가 법령 초안할 때 그의 초고를 훔쳐 자신의 공인양 내세웠다. 굴원이 양보하려 들지 않자, 그는 회왕의 면전에서 굴원을 헐뜯었다. 게다가 굴원이 항상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며 초나라에 자신이 없으면 법령을 초안할 사람이 없다고 자랑한다며 그를 모함하였다. 초나라 회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그 후로는 점차 굴원을 멀리하였다. 《이소(離騷)》는 그 분함을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 때는 바로 전국 말년으로 크고 작은 많은 제후국이 오랫동안 서로 합병하여 제(齊) 초(楚) 연(燕) 조(趙) 위(魏) 한(韓) 진(秦) 등 일곱 나라 만 남게 되었다. 그중 진나라가 가장 강했고 제·초가 그 다음이었다. 이 세 나라는 모두 세력을 확대하여 천하를 통일코자 했다. 굴원은 높은 식견을 가진 정치가로 당시 형세를 익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파(合縱派)였다. 그렇지 않으면 힘이 분산되어 진에게 각각 격파되어 망국의 위험을 불러오기 쉽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미 타인의 음모로 국사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도 없었다. 당시 진나라는 초나라 내부에 간신이 득세함을 보고 초를 침략코자 초나라와 제나라 연맹을 깨뜨릴 방법을 강구했다. 진왕은 유명한 참모 장의(張儀)를 초에 파견하여 이간책을 진행시켰다. 연횡파(連衡派)인 장의는 방법을 강구해 회왕이 총애하는 기녀 정수(鄭袖)를 매수하고 또 상관대부 근상 등과 가까이 지냈다. 그리하여 회왕이 제나라와 절교하게끔 종용하고, 제와 단교하면 상(商)의 토지 6백 리를 그 보상으로 초에게 줄 것이라 말했다. 회왕은 진의 보상을 탐내 장의의 조건에 응했다.
그러나 실상 제나라와 절교한 뒤 장의는 진나라로 돌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채하며 당시 주기로 했던 것은 6리이지 600리가 아니라고 잡아떼었다. 초 회왕은 속은 것을 깨닫고 화를 못 이겨 즉각 군대를 이끌고 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오히려 진나라 군사에게 대패하고 도망쳐 왔다. 게다가 한중(漢中) 일대의 땅마저 잃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초 회왕은 더욱 화가 나 다시 군대를 소집하여 진을 공격했으나, 결국 남전(藍田) 일대에서 포위되어 또 한차례 패배의 쓴 잔을 맛보게 된다. 이쯤 되자 회왕은 비로소 굴원의 재능을 아쉬워하여, 그의 힘을 빌어 열세를 모면해 보고자 했다. 굴원을 재등용하여 제나라로 파견시켜 다시 국교를 맺으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진은, 초나라와 제나라 두 대국이 다시 연합할까 두려워 한중 일대의 토지 반을 반납하는 대가로 화해를 청했다. 회왕은 장의를 미워하여 땅을 얻을 생각은 않고 장의의 사죄만을 요구했다. 장의는 초왕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스스로 진왕에게 그를 초나라로 보내 사죄케 해 달라고 요구했다. 한중 일대의 토지를 반환할 필요가 없게 되자 진왕은 크게 기뻐하여 즉시 초왕의 조건을 받아들여 장의를 초나라로 보냈다. 장의는 초나라 수도에 도착한 뒤 급히 수단을 써서 회왕의 충신 근상과 기녀 정수와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고, 이 두 사람이 그를 위해 직접 좋은 말을 하게끔 했다. 결국 초회왕은 또 다시 장의를 풀어 주었다.
굴원이 제나라에서 돌아와 어찌하여 한중 일대의 땅도 마다하고 또 영토 대신으로 초나라에 온 장의도 죽이지 않았는지를 묻자, 초왕은 그제서야 깨닫고 크게 후회하였다. 그러나 장의는 이미 저 멀리 국경을 떠나 쫓을 수 없는 상태였다.
얼마 후 진나라는 또 초나라에 유인책을 펼쳐 결연 관계를 맺자고 청하곤 대신 초나라 태자를 秦의 인질로 보내도록 했다. 이로써 초나라와 제나라의 수교는 또 다시 결렬되고 말았다. 굴원은 줄곧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자고 주장해 왔으나, 결국 완전히 실패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 실의는 굴원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풍부한 감정과 탁월한 재능으로 시가 창작에 몰두하였다.
굴원이 비분과 우울 속에 끊임없이 시를 쓰던 이 기간에, 진초 양국의 관계에는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다. 진나라 인질로 들어가라는 명을 받은 초나라 태자는 진나라에서 살인죄를 범하고 몰래 도망쳐서 귀국했다. 진나라는 이를 구실로 군대를 보내 초나라를 침공했다. 이에 회왕은 또 굴원을 불러들여 그에게 태자와 함께 제로 들어가 도움을 청하고, 다시 제와 연합해 진에 대항코자 했다. 그러자 이듬해 진은 다시 강화를 가장하여 진에서 담판을 짓자고 했다.
왕의 입진(入秦)도 반대하였으나 역시 헛일이었다. 굴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왕은 경솔히 진나라에 들어가, 결국 구금되어 진나라에서 객사(客死)하였다. 이후 제나라 인질로 들어간 초나라 태자는 즉각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했으니, 그가 바로 경양왕(頃襄王)이다.
그리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자란은 아버지를 객사하게 한 장본인이었으므로, 굴원은 그를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다. 《어부사(漁父辭)》는 그때의 작품이다. 《사기》에는 <회사부(懷沙賦)>를 싣고 있는데, 이는 절명(絶命)의 노래이다.
이때 굴원은 나라의 멸망 이미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고 상심했다. 얼마 안 있어 진은 과연 군대를 이끌고 초를 공격하여 진나라 대장 백기(白起)는 초나라 수도 영성(郢城)을 함락시켰다. 경양왕은 하는 수 없이 진성(陳城)으로 천도했지만,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굴원은 이 소식을 듣고 슬픈 마음으로 「애영」(哀郢)이라는 시 한 수를 지어, 자신의 비분과 고통을 담아 내었다. 그 뒤 나라는 날로 엉망이 되었다.
한편, 자기가 옳고 세속이 그르다고 말하고, 난사(亂辭:최종 악장의 노래)에서는, 죽어서 이 세상의 유(類:법·모범)가 되고 자살로써 간(諫)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있다. 유랑에 떠도는 백성들의 고초를 바라보며 실제로도 결국 큰 돌멩이를 껴안은 채 창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가 죽었을 때 62세였다. 후세 사람들은 나라와 세상을 걱정했던 위대한 시인을 기리기 위해, 그가 강에 투신 자살한 날(음력 5月5日) 용머리로 장식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시합을 벌이는데, 이는 굴원의 시체를 찾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 이날 주악(糉子)을 빚어 강에 던지는데, 이는 교룡(蛟龍)이 배불리 먹은 뒤 굴원의 시신을 해치지 말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이런 민간의 풍속으로 볼 때 굴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굴원의 문학적 공헌으로는 탁월한 창작을 통해 감동적인 애국 사상을 전파하고, 초사체(楚辭體)라는 새로운 시형을 창조한 것을 들 수 있다. 굴원 이전에는 4자가 한 구를 이루는 시경체(詩經體)가 유행했는데, 그는 남방 언어를 이용하여 시경 이래 유행했던 4자구를 3자구로 바꾸어 놓았다. 동시에 ‘혜’(兮)자 혹은 ‘사’(些)자로 두 개의 3자구를 연결시키어서 후세의 7언시와 유사한 7언구를 만들었다. 형식의 변화로 내용 역시 더욱 다양해지고, 생활의 필요에 부합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형의 대변혁은 전국 말엽과 양한 시대의 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굴원의 제자인 송옥(宋玉) 경차(景差) 당륵(唐勒) 등은 물론 훗날 한초(漢初)의 가의(賈誼) 동방삭(東方朔) 장기(莊忌) 유향(劉向) 왕포(王褒) 왕일(王逸) 등도 그의 문체를 모방하였다. 이 중 도서정리 전문가였던 유향은 많은 사람들의 작품과 굴원이 남긴 작품을 한 권의 책으로 편집했는데 이것을 초사 (楚辭)라 한다. 이는 중국 고대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세 권의 총집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두가지는 시경 과 소명문선 (昭明文選)임) 이 책은 분량은 많지 않지만 시경 이후 등장한 명작을 망라하여, 중국 시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
群雄割據 (군웅할거)
群雄割據 (군웅할거)
여러 영웅이 세력을 얻기 위해 겨루고 있는 상태를 두고 하는 말.
여러 영웅이 세력을 얻기 위해 겨루고 있는 상태를 두고 하는 말.
九牛一毛 (구우일모)
九牛一毛(구우일모)
九 아홉 구 | 牛 소 우 | 一 한 일 | 毛 털 모 |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서 뽑은 털 하나. 수에도 들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을 형용하는 데 쓰는 말이다.
前漢(전한) 武帝(무제) 때 5천의 군사를 이끌고 흉노 토벌에 나섰던 李陵(이릉)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을 맞아 10여 일을 싸웠으나 끝내 패하고 말았다. 이듬해 무제는 전사한 줄만 알고 있던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해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노한 그는 이릉 일족을 참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신하 중 누구 하나 이릉을 변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만 司馬遷(사마천)만이 대담 솔직하게 이릉의 무고함을 直言(직언)했다.
『이릉은 적은 수의 군사로 적의 수만 병력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지만 援軍(원군)은 오지 않고 내부에서 적과 내통한 자가 있어 패한 겁니다. 이릉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을 노린 苦肉策(고육책)일 것입니다』
사마천의 말에 더욱 격노한 무제는 그를 옥에 가두고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인 宮刑(궁형)에 처했다.
사마천은 친구 任安(임안)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에 당시의 참담했던 심경을 이렇게 썼다.
『내가 사형을 당했다해도 그것은 「아홉 마리 소 가운데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九牛亡一毛)」이니 땅강아지나 개미 따위와 내가 뭣이 다를까』
사마천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참으며 목숨을 부지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史記(사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기」를 끝내지 않고 두 눈을 감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滄海一滴(창해일적) | 大海一滴(대해일적) | 大海一粟(대해일속) | 九牛一毛(구우일모) | 滄海一粟(창해일속) |
九 아홉 구 | 牛 소 우 | 一 한 일 | 毛 털 모 |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서 뽑은 털 하나. 수에도 들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을 형용하는 데 쓰는 말이다.
前漢(전한) 武帝(무제) 때 5천의 군사를 이끌고 흉노 토벌에 나섰던 李陵(이릉)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을 맞아 10여 일을 싸웠으나 끝내 패하고 말았다. 이듬해 무제는 전사한 줄만 알고 있던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해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노한 그는 이릉 일족을 참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신하 중 누구 하나 이릉을 변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만 司馬遷(사마천)만이 대담 솔직하게 이릉의 무고함을 直言(직언)했다.
『이릉은 적은 수의 군사로 적의 수만 병력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지만 援軍(원군)은 오지 않고 내부에서 적과 내통한 자가 있어 패한 겁니다. 이릉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을 노린 苦肉策(고육책)일 것입니다』
사마천의 말에 더욱 격노한 무제는 그를 옥에 가두고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인 宮刑(궁형)에 처했다.
사마천은 친구 任安(임안)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에 당시의 참담했던 심경을 이렇게 썼다.
『내가 사형을 당했다해도 그것은 「아홉 마리 소 가운데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九牛亡一毛)」이니 땅강아지나 개미 따위와 내가 뭣이 다를까』
사마천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참으며 목숨을 부지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史記(사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기」를 끝내지 않고 두 눈을 감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滄海一滴(창해일적) | 大海一滴(대해일적) | 大海一粟(대해일속) | 九牛一毛(구우일모) | 滄海一粟(창해일속) |
寇準 (구준, Kòu Zhǔn, 961~1023)
구준 [寇準, 961~1023]
異名: 寇准, Kòu Zhǔn, 자 평중, 시호 충민
국적: 중국 북송
활동분야: 정치·문학
출생지: 화저우 샤구이(현재 산시성)
주요저서: 구충민공시집(寇忠愍公詩集)
북송 초의 정치가 겸 시인. 거란의 침입 때 많은 공을 세워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져 구래공(寇萊公)이라고도 하였다. 시인으로서는 당시의 고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서곤체(西崑體)와 약간 다른 시풍(詩風)을 가졌으며, 자연의 애수(哀愁)를 읊은 시가 많았다. 시집으로 《구충민공시집(寇忠愍公詩集)》이 있다.
자 평중(平仲). 시호 충민(忠愍). 지금의 산시성[陝西省]인 화저우[華州] 샤구이[下邽] 출생. 979년(태평흥국 4) 진사에 급제, 대리평사(大理評事)·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염철판관(鹽鐵判官) 등을 역임하고, 태종(太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지나치게 강직하였기 때문에 지방으로 좌천(左遷)되었다.
진종(眞宗) 즉위 후 중앙에 복귀하였으며, 1004년(경덕 1) 재상이 되어 거란(契丹)의 침입 때 많은 공을 세웠다. 그후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져 구래공(寇萊公)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좌천되어 후난성[湖南省]인 헝저우[衡州]의 사마(司馬)로 있다가 죽었다. 시인으로서는 당시의 고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서곤체(西崑體)와 약간 다른 시풍(詩風)을 가졌으며, 자연의 애수(哀愁)를 읊은 시가 많았다.
시집으로 《구충민공시집(寇忠愍公詩集)》이 있다.
구준 관련 한시
화산(華山)
異名: 寇准, Kòu Zhǔn, 자 평중, 시호 충민
국적: 중국 북송
활동분야: 정치·문학
출생지: 화저우 샤구이(현재 산시성)
주요저서: 구충민공시집(寇忠愍公詩集)
북송 초의 정치가 겸 시인. 거란의 침입 때 많은 공을 세워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져 구래공(寇萊公)이라고도 하였다. 시인으로서는 당시의 고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서곤체(西崑體)와 약간 다른 시풍(詩風)을 가졌으며, 자연의 애수(哀愁)를 읊은 시가 많았다. 시집으로 《구충민공시집(寇忠愍公詩集)》이 있다.
자 평중(平仲). 시호 충민(忠愍). 지금의 산시성[陝西省]인 화저우[華州] 샤구이[下邽] 출생. 979년(태평흥국 4) 진사에 급제, 대리평사(大理評事)·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염철판관(鹽鐵判官) 등을 역임하고, 태종(太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지나치게 강직하였기 때문에 지방으로 좌천(左遷)되었다.
진종(眞宗) 즉위 후 중앙에 복귀하였으며, 1004년(경덕 1) 재상이 되어 거란(契丹)의 침입 때 많은 공을 세웠다. 그후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져 구래공(寇萊公)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좌천되어 후난성[湖南省]인 헝저우[衡州]의 사마(司馬)로 있다가 죽었다. 시인으로서는 당시의 고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서곤체(西崑體)와 약간 다른 시풍(詩風)을 가졌으며, 자연의 애수(哀愁)를 읊은 시가 많았다.
시집으로 《구충민공시집(寇忠愍公詩集)》이 있다.
구준 관련 한시
화산(華山)
求之於勢 (구지어세)
求之於勢(구지어세)
기세에서 구하다. 개개인이 아닌 전체적인 기세가 중요함을 이르는 말
故善戰者 求之於勢 不責之於人 故能擇人而任勢(고선전자 구지어세 불책지어인 고능택인이임세)
고로 전쟁을 잘하는 자는 전쟁의 승패를 기세에서 구하지 병사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따라서 능력있는 자를 택하여 기세를 돋운다.
[출전] 손자병법
기세에서 구하다. 개개인이 아닌 전체적인 기세가 중요함을 이르는 말
故善戰者 求之於勢 不責之於人 故能擇人而任勢(고선전자 구지어세 불책지어인 고능택인이임세)
고로 전쟁을 잘하는 자는 전쟁의 승패를 기세에서 구하지 병사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따라서 능력있는 자를 택하여 기세를 돋운다.
[출전] 손자병법
歐陽修 (구양수, ōuyáng Xiū, 1007~1072)
歐陽修(구양수, 1007~1072)
이름: 欧阳修(ōuyáng Xiū), 호 취옹(醉翁), 육일거사(六一居士)
국적: 중국
활동분야: 정치, 학문, 예술
출생지: 장시성(江西省) 지안시(吉安市)인 길주(吉州) 여릉현(廬陵縣)
주요저서: 전집으로 《구양문충공집》 153권, 《신당서(新唐書)》 《오대사기(五代史記)》의 편자
중국 송나라의 정치가 겸 문인.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등의 관직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다. 송나라 초기의 미문조(美文調) 시문인 서곤체(西崑體)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서에는 《구양문충공집》등이 있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문구(文具)를 살 돈이 없어서 어머니가 모래 위에 갈대로 글씨를 써서 가르쳤다고 한다. 10세 때 당나라 한유(韓愈)의 전집을 읽은 것이 문학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되었다. 1030년 진사가 되었으며,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관직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다. 인종(仁宗)과 영종(英宗) 때 범중엄(范仲淹)을 중심으로 한 새 관료파에 속하여 활약하였으나, 신종(神宗) 때 동향후배인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송나라 초기의 미문조(美文調) 시문인 서곤체(西崑體)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시로는 매요신(梅堯臣)과 겨루었고, 문(文)으로는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송대의 고문(古文)의 위치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전집으로 《구양문충공집》 153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오대사기(五代史記)》의 편자이기도 하며, 《오대사령관전지서(五代史伶官傳之序)》를 비롯하여 많은 명문을 남겼다.
이름: 欧阳修(ōuyáng Xiū), 호 취옹(醉翁), 육일거사(六一居士)
국적: 중국
활동분야: 정치, 학문, 예술
출생지: 장시성(江西省) 지안시(吉安市)인 길주(吉州) 여릉현(廬陵縣)
주요저서: 전집으로 《구양문충공집》 153권, 《신당서(新唐書)》 《오대사기(五代史記)》의 편자
중국 송나라의 정치가 겸 문인.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등의 관직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다. 송나라 초기의 미문조(美文調) 시문인 서곤체(西崑體)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서에는 《구양문충공집》등이 있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문구(文具)를 살 돈이 없어서 어머니가 모래 위에 갈대로 글씨를 써서 가르쳤다고 한다. 10세 때 당나라 한유(韓愈)의 전집을 읽은 것이 문학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되었다. 1030년 진사가 되었으며,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관직을 거쳐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다. 인종(仁宗)과 영종(英宗) 때 범중엄(范仲淹)을 중심으로 한 새 관료파에 속하여 활약하였으나, 신종(神宗) 때 동향후배인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송나라 초기의 미문조(美文調) 시문인 서곤체(西崑體)를 개혁하고, 당나라의 한유를 모범으로 하는 시문을 지었다. 시로는 매요신(梅堯臣)과 겨루었고, 문(文)으로는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송대의 고문(古文)의 위치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전집으로 《구양문충공집》 153권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오대사기(五代史記)》의 편자이기도 하며, 《오대사령관전지서(五代史伶官傳之序)》를 비롯하여 많은 명문을 남겼다.
口尙乳臭 (구상유취)
口尙乳臭 (구상유취)
입에서 젖내가 날 만큼 말이나 하는 짓이 유치하다는 말.
어느 여름날 김삿갓이 한 마을을 지나는데 시골 선비들이 개를 잡아놓고 詩會(시회)를 열고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 앉아 술 한잔을 얻어마시던 김삿갓에게는 시랍시고 지어놓은 시가 같잖게 여겨졌다.
그냥 보고 지나친다면 김삿갓이 아니다. "구상유취로군"하고 내뱉었것다.
구상유취라면 口尙乳臭,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난다는 뜻. 유치함을 얕잡아 이르는 말 아닌가. 좌중의 視線(시선)이 소리를 낸 꾀죄죄한 행색의 김삿갓에게 꽂혔다.
"방금 뭐라고 했소?"
험악한 표정을 한 한 참석자가 금방 쥐어박을 듯이 말했다. 김삿갓이 능청스럽게 받았다.
"개초상에 선비들이 모여있다(狗喪儒聚, 구상유취)고 한 내 말이 뭐가 잘못됐단 말이오?"
재치있게 받아넘긴 김삿갓에게 돌아온 건 몽둥이가 아니고 새로 잘 차린 술상이었다던가.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뜻글자인 漢字(한자)가 동원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우스갯소리다.
한자를 모르고서는 이같은 말장난에 아예 웃을 수도 없다.
입에서 젖내가 날 만큼 말이나 하는 짓이 유치하다는 말.
어느 여름날 김삿갓이 한 마을을 지나는데 시골 선비들이 개를 잡아놓고 詩會(시회)를 열고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 앉아 술 한잔을 얻어마시던 김삿갓에게는 시랍시고 지어놓은 시가 같잖게 여겨졌다.
그냥 보고 지나친다면 김삿갓이 아니다. "구상유취로군"하고 내뱉었것다.
구상유취라면 口尙乳臭,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난다는 뜻. 유치함을 얕잡아 이르는 말 아닌가. 좌중의 視線(시선)이 소리를 낸 꾀죄죄한 행색의 김삿갓에게 꽂혔다.
"방금 뭐라고 했소?"
험악한 표정을 한 한 참석자가 금방 쥐어박을 듯이 말했다. 김삿갓이 능청스럽게 받았다.
"개초상에 선비들이 모여있다(狗喪儒聚, 구상유취)고 한 내 말이 뭐가 잘못됐단 말이오?"
재치있게 받아넘긴 김삿갓에게 돌아온 건 몽둥이가 아니고 새로 잘 차린 술상이었다던가.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뜻글자인 漢字(한자)가 동원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우스갯소리다.
한자를 모르고서는 이같은 말장난에 아예 웃을 수도 없다.
九死一生 (구사일생)
九死一生(구사일생)
아홉 번 죽을 고비에서 한 목숨 살다. 곧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겪고 겨우 살아난다는 뜻.
전국시대 楚(초)나라에 시인이자 정치가로 유명한 屈原(굴원)이 있었다. 박학다식하고 변론에 뛰어나 많은 활약을 했으나 말년에는 失意(실의)의 나날을 보내다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굴원은 왕의 듣고 보는 것이 총명하지 못하고 참소와 아첨이 왕의 밝음을 가로막는 것을 근심하고 비통해 하면서 장편의 시를 지어 울분을 토로했는데 이 시가 유명한 「離騷(이소)」다. 이 「이소」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길게 한숨 쉬고 눈물을 닦으며 인생에 어려움 많음을 슬퍼하노라.… 「비록 아홉 번 죽을지라도 오히려 후회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雖九死 猶未其悔․수구사 유미기회)」
여기에 나오는 「九死」에 대해 劉良注(유양주)는 더 명확한 풀이를 했다.
최악의 처지에 서게 되고 어떠한 재난을 만나 「십중팔구 살아날 길이 없다고 하더라도 회한은 없다(雖九死無一生 未足悔恨․수구사무일생 미족회한)」
여기서 九死一生이란 말이 나왔다.
이와 비슷한 말에 「起死回生(기사회생)」이 있다. 다 죽어가던 목숨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다.
「呂氏春秋(여씨춘추)」에 이런 대목이 보인다.
『노나라에 공손작이란 자가 있었는데 「나는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가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반신불수를 고칠 수가 있다. 반신불수를 고치는 약을 두 배로 늘리면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도 있다(起死回生)」』
아홉 번 죽을 고비에서 한 목숨 살다. 곧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겪고 겨우 살아난다는 뜻.
전국시대 楚(초)나라에 시인이자 정치가로 유명한 屈原(굴원)이 있었다. 박학다식하고 변론에 뛰어나 많은 활약을 했으나 말년에는 失意(실의)의 나날을 보내다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굴원은 왕의 듣고 보는 것이 총명하지 못하고 참소와 아첨이 왕의 밝음을 가로막는 것을 근심하고 비통해 하면서 장편의 시를 지어 울분을 토로했는데 이 시가 유명한 「離騷(이소)」다. 이 「이소」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길게 한숨 쉬고 눈물을 닦으며 인생에 어려움 많음을 슬퍼하노라.… 「비록 아홉 번 죽을지라도 오히려 후회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雖九死 猶未其悔․수구사 유미기회)」
여기에 나오는 「九死」에 대해 劉良注(유양주)는 더 명확한 풀이를 했다.
최악의 처지에 서게 되고 어떠한 재난을 만나 「십중팔구 살아날 길이 없다고 하더라도 회한은 없다(雖九死無一生 未足悔恨․수구사무일생 미족회한)」
여기서 九死一生이란 말이 나왔다.
이와 비슷한 말에 「起死回生(기사회생)」이 있다. 다 죽어가던 목숨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다.
「呂氏春秋(여씨춘추)」에 이런 대목이 보인다.
『노나라에 공손작이란 자가 있었는데 「나는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가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반신불수를 고칠 수가 있다. 반신불수를 고치는 약을 두 배로 늘리면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도 있다(起死回生)」』
毆槃捫燭 (구반문촉, ōupánménzhú)
毆槃捫燭(구반문촉)
殴盘扪烛(ōupánménzhú)
毆 때릴 구 | 槃 쟁반 반 | 捫 어루만질 문 | 燭 촛불 촉 |
장님이 쟁반을 두드리고 초를 어루만져 본 것만 가지고 태양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논하거나 말하지 말라는 것을 빗댄 한자성어이다. 군맹무상(群盲撫象)과 뜻이 통한다.
북송(北宋)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쓴〈일유(日喩)〉에서 유래하였다. 태어나면서 장님인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태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어떤 사람에게 물으니, 구리 쟁반처럼 생겼다고 대답하였다. 소경은 집으로 돌아와 쟁반을 두드려 보고 그 소리를 기억해 두었다. 다른 날 길을 가다가 종소리를 듣고는 쟁반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하자, 종을 태양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다시 태양은 촛불처럼 빛을 낸다고 하자, 손으로 초를 어루만져 보고는 그 생김새를 기억해 두었다. 뒷날 우연히 피리를 만져보고는 초와 생김새가 비슷했으므로 이번에는 피리를 태양이라고 하였다.
구반문촉이란 말은 이 우화에서 생겼다. 장님은 태양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의 말만 듣고 지레짐작으로 쟁반·종·초를 태양으로 단정하였다. 하지만 이 셋은 태양의 실체와는 전혀 다르다. 사람들이 들으면 배꼽 잡고 웃을 일인데도, 장님은 이를 태연하게 진리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남의 말만 곧이 듣고서 그것이 마치 사실이나 진리인 듯 여겨 어리석음을 자초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한자성어가 바로 구반문촉이다. 섣부른 판단, 불확실한 일, 맹목적인 믿음 등이 모두 경계 대상에 포함된다. 군맹모상(群盲摸象)·군맹무상(群盲撫象)·군맹평상(群盲評象)·맹인모상(盲人摸象)과도 뜻이 통한다.
[유래]
日喩(일유) |
관련 한자어
유의어
群盲評象(군맹평상) | 群盲撫象(군맹무상) |
Tag
日喩(일유) | 蘇東坡(소동파) |
殴盘扪烛(ōupánménzhú)
毆 때릴 구 | 槃 쟁반 반 | 捫 어루만질 문 | 燭 촛불 촉 |
장님이 쟁반을 두드리고 초를 어루만져 본 것만 가지고 태양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논하거나 말하지 말라는 것을 빗댄 한자성어이다. 군맹무상(群盲撫象)과 뜻이 통한다.
북송(北宋)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쓴〈일유(日喩)〉에서 유래하였다. 태어나면서 장님인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태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어떤 사람에게 물으니, 구리 쟁반처럼 생겼다고 대답하였다. 소경은 집으로 돌아와 쟁반을 두드려 보고 그 소리를 기억해 두었다. 다른 날 길을 가다가 종소리를 듣고는 쟁반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하자, 종을 태양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다시 태양은 촛불처럼 빛을 낸다고 하자, 손으로 초를 어루만져 보고는 그 생김새를 기억해 두었다. 뒷날 우연히 피리를 만져보고는 초와 생김새가 비슷했으므로 이번에는 피리를 태양이라고 하였다.
구반문촉이란 말은 이 우화에서 생겼다. 장님은 태양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의 말만 듣고 지레짐작으로 쟁반·종·초를 태양으로 단정하였다. 하지만 이 셋은 태양의 실체와는 전혀 다르다. 사람들이 들으면 배꼽 잡고 웃을 일인데도, 장님은 이를 태연하게 진리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남의 말만 곧이 듣고서 그것이 마치 사실이나 진리인 듯 여겨 어리석음을 자초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한자성어가 바로 구반문촉이다. 섣부른 판단, 불확실한 일, 맹목적인 믿음 등이 모두 경계 대상에 포함된다. 군맹모상(群盲摸象)·군맹무상(群盲撫象)·군맹평상(群盲評象)·맹인모상(盲人摸象)과도 뜻이 통한다.
[유래]
日喩(일유) |
관련 한자어
유의어
群盲評象(군맹평상) | 群盲撫象(군맹무상) |
Tag
日喩(일유) | 蘇東坡(소동파) |
口蜜腹劍 (구밀복검)
口蜜腹劍(구밀복검)
口蜜腹剑 [kǒumìfùjiàn]
口 입 구 | 蜜 꿀 밀 | 腹 배 복 | 劍 칼 검 |
입에는 꿀을 바르고 있지만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 곧 겉으로는 꿀같이 달콤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하고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honey-mouthed and dagger-hearted—a cruel heart under the cover of sugar-coated words; hypocritical and malignant
楊貴妃(양귀비)를 寵愛(총애)한 황제로 이름난 唐(당)나라 玄宗(현종)때 李林甫(이임보)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황제의 일가 친척인데다 宦官(환관)에게 뇌물을 바쳐 출세한 인물로 궁정을 활보하는 權臣(권신)이었다.
그는 또 아첨하는 재주가 있어서, 권세 있는 인물들과 자주 접촉하고, 황제의 주변 인물들에게도 많은 뇌물을 주어 황제의 언행을 항상 파악하여, 황제의 기분에 맞게 처세할 수 있었다.
언제나 현종의 측근에 있으면서 인사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의 누구도 이임보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그는 19년 동안이나 안전하게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위세를 떨쳤다. 그가 죽은 뒤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를 한때 亡國(망국)의 벼랑까지 몰고갔던 安祿山(안록산)도 두려워 할 정도였다.
그는 현종에게 盲從(맹종)하며 아첨하는 한편 올바른 말을 하는 충신들을 陰害(음해)하여 멀리 내쫓거나 죽음에 이르도록 했다.
어느날 현종이 이임보에게 물었다.
“嚴挺之(엄정지)는 지금 어디에 있지.그에게 중책을 맡기고 싶은데.”
엄정지는 강직한 신하로 중앙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가 이임보에게 밉보여 지방으로 쫓겨나 태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날 저녁 엄정지의 아우를 불러들인 이임보는 이렇게 말했다.
“황제께서 자네 형님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칭찬하시네.틀림없이 금명간 높은 벼슬을 주실거니까 일단 병치료차 장안에 돌아왔다고 상소문을 쓰도록 연락하게.”
긴급연락을 받은 엄정지는 현종에게 상소문을 올리자 이임보는 그걸 들고 현종에게 가서 말했다.
“전에 말씀하신 엄정지의 상소문이 올라왔습니다만 나이도 많은데다 중병에 걸린 모양이니 중임은 맡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황제는 이임보의 말에 따랐고 술수에 말려든 걸 알게 된 엄정지는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임보는 입에 꿀을 바르고 말하지만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李林甫口有蜜, 腹有劍].”
출전
당서(唐書)
관련 한자
참조어
口有蜜腹有劒(구유밀복유검) | 面從腹背(면종복배) | 笑裏藏刀(소리장도) | 笑中刀(소중도) | 笑中有劍(소중유검) | 笑中有刀(소중유도) | 羊頭狗肉(양두구육) | 陽奉陰違(양봉음위) | 羊質虎皮(양질호피) | 表裏不同(표리부동) | 包藏禍心(포장화심) |
口蜜腹剑 [kǒumìfùjiàn]
口 입 구 | 蜜 꿀 밀 | 腹 배 복 | 劍 칼 검 |
입에는 꿀을 바르고 있지만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 곧 겉으로는 꿀같이 달콤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하고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honey-mouthed and dagger-hearted—a cruel heart under the cover of sugar-coated words; hypocritical and malignant
楊貴妃(양귀비)를 寵愛(총애)한 황제로 이름난 唐(당)나라 玄宗(현종)때 李林甫(이임보)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황제의 일가 친척인데다 宦官(환관)에게 뇌물을 바쳐 출세한 인물로 궁정을 활보하는 權臣(권신)이었다.
그는 또 아첨하는 재주가 있어서, 권세 있는 인물들과 자주 접촉하고, 황제의 주변 인물들에게도 많은 뇌물을 주어 황제의 언행을 항상 파악하여, 황제의 기분에 맞게 처세할 수 있었다.
언제나 현종의 측근에 있으면서 인사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의 누구도 이임보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그는 19년 동안이나 안전하게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위세를 떨쳤다. 그가 죽은 뒤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를 한때 亡國(망국)의 벼랑까지 몰고갔던 安祿山(안록산)도 두려워 할 정도였다.
그는 현종에게 盲從(맹종)하며 아첨하는 한편 올바른 말을 하는 충신들을 陰害(음해)하여 멀리 내쫓거나 죽음에 이르도록 했다.
어느날 현종이 이임보에게 물었다.
“嚴挺之(엄정지)는 지금 어디에 있지.그에게 중책을 맡기고 싶은데.”
엄정지는 강직한 신하로 중앙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가 이임보에게 밉보여 지방으로 쫓겨나 태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날 저녁 엄정지의 아우를 불러들인 이임보는 이렇게 말했다.
“황제께서 자네 형님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칭찬하시네.틀림없이 금명간 높은 벼슬을 주실거니까 일단 병치료차 장안에 돌아왔다고 상소문을 쓰도록 연락하게.”
긴급연락을 받은 엄정지는 현종에게 상소문을 올리자 이임보는 그걸 들고 현종에게 가서 말했다.
“전에 말씀하신 엄정지의 상소문이 올라왔습니다만 나이도 많은데다 중병에 걸린 모양이니 중임은 맡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황제는 이임보의 말에 따랐고 술수에 말려든 걸 알게 된 엄정지는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임보는 입에 꿀을 바르고 말하지만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李林甫口有蜜, 腹有劍].”
출전
당서(唐書)
관련 한자
참조어
口有蜜腹有劒(구유밀복유검) | 面從腹背(면종복배) | 笑裏藏刀(소리장도) | 笑中刀(소중도) | 笑中有劍(소중유검) | 笑中有刀(소중유도) | 羊頭狗肉(양두구육) | 陽奉陰違(양봉음위) | 羊質虎皮(양질호피) | 表裏不同(표리부동) | 包藏禍心(포장화심) |
掘墓鞭屍 (굴묘편시, juémùbiānshī)
掘墓鞭屍(굴묘편시)
掘墓鞭尸(juémùbiānshī)
堀 굴 굴 | 墓 무덤 묘 | 鞭 채찍 편 | 屍 주검 시 |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자서(伍子胥)의 고사에서 나왔는데, 그는 초(禁)나라 평왕(平王)의 태자 건(建)의 태부(太傅)요 충신이었던 오사(伍奢)의 아들이었다. 평왕이 건의 소부(少傅)였던 비무기(費無忌)의 참언으로 태자를 죽이려 하고 오사를 감옥에 가두었다. 비무기는 평왕을 부추겨 오사를 인질로 삼아 그의 큰아들 오상(伍尙)과 오자서를 불러들여 죽임으로써 후환을 없애고자 하였다. 오상은 이것이 함정인 줄 알면서도 부름에 따라 아버지와 함께 살해되었으나 오자서는 복수를 기약하며 오나라로 망명하였다.
송(宋)나라와 정(鄭)나라를 거쳐 오(吳)나라로 간 오자서는 합려(闔閭)를 보좌하여 오나라를 강국으로 키웠다. BC 506년 오나라가 초나라를 함락시킨 뒤, 오자서는 평왕의 아들 소왕(昭王)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미 도망친 뒤였다. 평왕은 생전에 이미 그의 보복을 예견하고 자신의 무덤을 깊은 연못 속에 만들고 묘의 조성작업에 종사한 일꾼 500명을 모두 죽여 버린 까닭에 무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작업에 종사했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노인이 알려주어, 자서는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에 채찍질을 300번 함으로써 복수하였는데, 굴묘편시(掘墓鞭屍)는 여기서 유래된 고사성어이다.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申包胥)가 이 소문을 듣고, "그대의 그러한 복수방법은 지나친 게 아닌가…"라고 책하였다. 그러자 오자서는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하였는데, 여기서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관련 한자어
참조어
日暮途遠(일모도원) | 心腹之患(심복지환) | 吴市吹箫(오시취소,Wúshìchuīxiāo) |
史記(사기) : 伍子胥列傳(오자서열전) | 伍子胥(오자서) |
掘墓鞭尸(juémùbiānshī)
堀 굴 굴 | 墓 무덤 묘 | 鞭 채찍 편 | 屍 주검 시 |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자서(伍子胥)의 고사에서 나왔는데, 그는 초(禁)나라 평왕(平王)의 태자 건(建)의 태부(太傅)요 충신이었던 오사(伍奢)의 아들이었다. 평왕이 건의 소부(少傅)였던 비무기(費無忌)의 참언으로 태자를 죽이려 하고 오사를 감옥에 가두었다. 비무기는 평왕을 부추겨 오사를 인질로 삼아 그의 큰아들 오상(伍尙)과 오자서를 불러들여 죽임으로써 후환을 없애고자 하였다. 오상은 이것이 함정인 줄 알면서도 부름에 따라 아버지와 함께 살해되었으나 오자서는 복수를 기약하며 오나라로 망명하였다.
송(宋)나라와 정(鄭)나라를 거쳐 오(吳)나라로 간 오자서는 합려(闔閭)를 보좌하여 오나라를 강국으로 키웠다. BC 506년 오나라가 초나라를 함락시킨 뒤, 오자서는 평왕의 아들 소왕(昭王)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미 도망친 뒤였다. 평왕은 생전에 이미 그의 보복을 예견하고 자신의 무덤을 깊은 연못 속에 만들고 묘의 조성작업에 종사한 일꾼 500명을 모두 죽여 버린 까닭에 무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작업에 종사했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노인이 알려주어, 자서는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에 채찍질을 300번 함으로써 복수하였는데, 굴묘편시(掘墓鞭屍)는 여기서 유래된 고사성어이다.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申包胥)가 이 소문을 듣고, "그대의 그러한 복수방법은 지나친 게 아닌가…"라고 책하였다. 그러자 오자서는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하였는데, 여기서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관련 한자어
참조어
日暮途遠(일모도원) | 心腹之患(심복지환) | 吴市吹箫(오시취소,Wúshìchuīxiāo) |
史記(사기) : 伍子胥列傳(오자서열전) | 伍子胥(오자서) |
舊唐書 (구당서)
舊唐書(구당서)
구당서(舊唐書)는 당(唐)의 정사(正史)로 이십사사(二十四史)의 하나이다. 940년에 편찬을 시작해 945년에 완성되었다.
당 고조의 건국부터 망국까지 21제(帝) 290년 동안의 당 역사의 기록으로 5대 후진(後晉)의 유구가 일을 총괄하고 장소원·가위·조희 등이 편찬하고 조영이 감수하였다. 당 멸망 직후의 사료부족으로 후반부는 부실하고 전반부도 선행의 여러 사료에서 발췌한 것이기 때문에 일관성이 부족하나 당대 원사료의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사료적 가치가 있다. 처음에는 '唐書(당서)'라 했으나, 송대(宋代)에 『당서』를 다시 편찬하였기 때문에 『구당서』라 부르게 되었다.
唐書(당서)
구당서(舊唐書)는 당(唐)의 정사(正史)로 이십사사(二十四史)의 하나이다. 940년에 편찬을 시작해 945년에 완성되었다.
당 고조의 건국부터 망국까지 21제(帝) 290년 동안의 당 역사의 기록으로 5대 후진(後晉)의 유구가 일을 총괄하고 장소원·가위·조희 등이 편찬하고 조영이 감수하였다. 당 멸망 직후의 사료부족으로 후반부는 부실하고 전반부도 선행의 여러 사료에서 발췌한 것이기 때문에 일관성이 부족하나 당대 원사료의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사료적 가치가 있다. 처음에는 '唐書(당서)'라 했으나, 송대(宋代)에 『당서』를 다시 편찬하였기 때문에 『구당서』라 부르게 되었다.
唐書(당서)
群鷄一鶴 (군계일학)
鷄群一鶴(계군일학) | 群鷄一鶴(군계일학) |
群鸡一鹤(qúnjīyíhè)
群 무리 군 | 鷄 닭 계 | 一 한 일 | 鶴 학 학,흴 학 |
무리 지어 있는 닭 가운데 있는 한 마리의 학이라는 뜻으로, 여러 평범(平凡)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뛰어난 한 사람을 이르는 말
위진시대(魏晉時代)에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 문학과 노장(老莊)의 사상, 음악 등 청담(淸談)을 담론하며 세월을 보내던 선비가 적지 않았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 완적(阮籍)·완함(阮咸)·혜강(嵆康)·산도(山濤)·왕융(王戎)·유령(劉伶)·상수(尙秀) 등이다.
이들 가운데 혜강은 특히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는데,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을 당하였다. 당시 그에게 열살박이 아들 혜소(嵆紹)가 있었다. 혜소는 장성하자 혜강의 친구 중 한 사람인 산도가 혜소를 무제(武帝:265~290)에게 천거하며 이렇게 말했다.
"《서경(書經)》 〈강고편(康誥篇)〉에 보면, 아버지와 자식간의 죄는 서로 연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혜소는 비록 혜강의 아들이지만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극결(郤缺)에 뒤지지 않을 만큼 총명합니다. 그를 비서랑(秘書郞)으로 임명하십시오." 무제는 "경(卿)이 천거(薦擧)하는 사람이라면 승(丞)이라도 능히 감당할 것이오"라고 흔쾌히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혜소는 비서랑보다 한 계급 위인 비서승에 임명되었다.
《진서(晉書)》 〈혜소전(嵆紹傳)〉에, 혜소가 낙양(洛陽)으로 가던 날,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가 다음 날 왕융에게 "어제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궁궐로 들어가는 혜소를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의젓하고 늠름하여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 같았습니다[昂昂然如野鶴之在雞群]"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융은 말했다. "혜소의 아버지는 그보다 더 뛰어났었다네. 자네는 그의 부친을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일세." 왕융의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혜소는 부친만은 못하지만,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여기서 '계군일학'이란 말이 나왔으며 이 뜻은 학립계군(鶴立鷄群)·군계일학(群鷄一鶴)·계군고학(鷄群孤鶴) 등과 같이 통용된다. 혜소는 나중에 시중(侍中)으로 승진하여 혜제(惠帝) 곁에서 직언(直言)을 올리는 몸이 되어 올바르고 곧게 처신하였다고 한다.
팔왕의 난이 한창일 때 혜제는 이를 진압하려고 군병을 일으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피란을 가게 되었다. 혜소가 부름을 받아 당도하였을 때는 혜제의 군이 이미 패하였을 때였다. 해소는 백관 시위가 모두 도망해 버린 곳에서 홀로 의관을 바로하고, 창과 칼이 불꽃을 일으키는 어차 앞에서 몸으로 혜제를 감싸며 지키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혜제의 어의(御依)를 선혈로 물들였다. 난이 끝난 뒤, 근시(近侍)들이 의복을 빨려 하자 혜제는 “이것은 혜소가 흘린 충의의 피이다. 씻어 없애지 마라" 하였다 한다.
[유래] 晉書(진서) : 忠義 |
관련 한자어
유의어
鶴立鷄群(학립계군) | 出衆(출중) | 錐處囊中(추처낭중) | 錐囊(추낭) | 絶倫(절윤) | 穎脫而出(영탈이출) | 穎脫(영탈) | 白眉(백미) | 拔群(발군) | 囊中之錐(낭중지추) | 鷄群鶴(계군학) | 鷄群一鶴(계군일학) | 鷄群孤鶴(계군고학) |
出類拔萃(출류발췌) 무리 가운데 특출나게 뛰어난 사람을 이르는 한자성어 |
庸中佼佼(용중교교,yōngzhōngjiǎojiǎo) 평범한 사람 중의 비범한 사람. 군계일학(群鷄一鶴) |
Tag
晉書(진서) : 忠義 | 出衆(출중) | 혜소(嵆紹) |
群鸡一鹤(qúnjīyíhè)
群 무리 군 | 鷄 닭 계 | 一 한 일 | 鶴 학 학,흴 학 |
무리 지어 있는 닭 가운데 있는 한 마리의 학이라는 뜻으로, 여러 평범(平凡)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뛰어난 한 사람을 이르는 말
위진시대(魏晉時代)에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 문학과 노장(老莊)의 사상, 음악 등 청담(淸談)을 담론하며 세월을 보내던 선비가 적지 않았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 완적(阮籍)·완함(阮咸)·혜강(嵆康)·산도(山濤)·왕융(王戎)·유령(劉伶)·상수(尙秀) 등이다.
이들 가운데 혜강은 특히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는데,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을 당하였다. 당시 그에게 열살박이 아들 혜소(嵆紹)가 있었다. 혜소는 장성하자 혜강의 친구 중 한 사람인 산도가 혜소를 무제(武帝:265~290)에게 천거하며 이렇게 말했다.
"《서경(書經)》 〈강고편(康誥篇)〉에 보면, 아버지와 자식간의 죄는 서로 연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혜소는 비록 혜강의 아들이지만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극결(郤缺)에 뒤지지 않을 만큼 총명합니다. 그를 비서랑(秘書郞)으로 임명하십시오." 무제는 "경(卿)이 천거(薦擧)하는 사람이라면 승(丞)이라도 능히 감당할 것이오"라고 흔쾌히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혜소는 비서랑보다 한 계급 위인 비서승에 임명되었다.
《진서(晉書)》 〈혜소전(嵆紹傳)〉에, 혜소가 낙양(洛陽)으로 가던 날,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가 다음 날 왕융에게 "어제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궁궐로 들어가는 혜소를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의젓하고 늠름하여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 같았습니다[昂昂然如野鶴之在雞群]"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융은 말했다. "혜소의 아버지는 그보다 더 뛰어났었다네. 자네는 그의 부친을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일세." 왕융의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혜소는 부친만은 못하지만,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여기서 '계군일학'이란 말이 나왔으며 이 뜻은 학립계군(鶴立鷄群)·군계일학(群鷄一鶴)·계군고학(鷄群孤鶴) 등과 같이 통용된다. 혜소는 나중에 시중(侍中)으로 승진하여 혜제(惠帝) 곁에서 직언(直言)을 올리는 몸이 되어 올바르고 곧게 처신하였다고 한다.
팔왕의 난이 한창일 때 혜제는 이를 진압하려고 군병을 일으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피란을 가게 되었다. 혜소가 부름을 받아 당도하였을 때는 혜제의 군이 이미 패하였을 때였다. 해소는 백관 시위가 모두 도망해 버린 곳에서 홀로 의관을 바로하고, 창과 칼이 불꽃을 일으키는 어차 앞에서 몸으로 혜제를 감싸며 지키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혜제의 어의(御依)를 선혈로 물들였다. 난이 끝난 뒤, 근시(近侍)들이 의복을 빨려 하자 혜제는 “이것은 혜소가 흘린 충의의 피이다. 씻어 없애지 마라" 하였다 한다.
[유래] 晉書(진서) : 忠義 |
관련 한자어
유의어
鶴立鷄群(학립계군) | 出衆(출중) | 錐處囊中(추처낭중) | 錐囊(추낭) | 絶倫(절윤) | 穎脫而出(영탈이출) | 穎脫(영탈) | 白眉(백미) | 拔群(발군) | 囊中之錐(낭중지추) | 鷄群鶴(계군학) | 鷄群一鶴(계군일학) | 鷄群孤鶴(계군고학) |
出類拔萃(출류발췌) 무리 가운데 특출나게 뛰어난 사람을 이르는 한자성어 |
庸中佼佼(용중교교,yōngzhōngjiǎojiǎo) 평범한 사람 중의 비범한 사람. 군계일학(群鷄一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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