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를 알고 소신대로 말한다.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모택동) 치하에서는 어느 누구도 권력 암투와 숙청의 공포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었다. 오늘의 2인자의 의자가 하루아침에 빠지거나 ‘하방’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권력의 중심 베이징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변방으로 귀향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무자비한 권력 투쟁에서 빗겨난 유일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저우언라이(주은래)이다. 그렇다고 그가 권력 중심부에서 벗어난 하급관리이거나 변방의 인물은 결코 아니다.
소신대로 말하라. 단, 상대를 알고 있다면
마오쩌둥보다 다섯 살 연하의 저우언라이는 무려 27년 간 총리로 재임하며 권력의 중심에서 부침 없이 마오쩌둥을 보좌했던 인물이다. 수많은 인물들이 2인자로 오르내리며 권력의 쓴맛, 단맛을 겪는 동안 저우언라이는 단 한 번의 자리 변동도 없었다. 한때 마오쩌둥을 능가하는 권세를 누린 린뱌오(임표)의 쿠데타 실패로 인한 비행기 사고사, 특히 1100만 홍위병의 광풍이 중국 대륙을 휘감던 1966년 이후의 문화대혁명 당시 국가주석 류샤오치(유소기), 덩샤오핑(등소평) 등은 죽거나 온갖 박해를 받았지만 저우언라이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저우언라이가 ‘무색무취의 공무원 신조’로 무조건 마오쩌둥에게 아부하며, 조직의 그늘에 숨어 생존했을 것이라 상상하지만 실제 저우언라이는 현재의 중국을 기초한 명재상이다. 그런 그가 최고 권력자의 귀를 간질이는 달콤한 언행으로만 그 자리를 보존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도 아니다. 그렇다면 저우언라이의 처세의 기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가 상사의 의도와 지시의 방향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탁월한 실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일화가 있다.
당시 마오쩌둥의 부인은 장칭(강청). 그녀는 마오쩌둥과는 고난의 연안대장정 시절부터 함께 했던 부인이자 정치적 동지. 그래서인지 장칭은 국가 현안부터 사적인 문제까지도 마오쩌둥에게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피력했다. 목소리 큰 부인은 동서고금을 통해 남편에게는 불편한 존재. 중국의 1인자로 군림하던 마오쩌둥도 장칭에게만은 한 수 접는 일이 가끔은 벌어졌다고 한다. 또한 여느 부부처럼 부부싸움도 잦았는데 부부싸움 후 언짢은 기분으로 당 정치국 회의를 주도했던 마오쩌둥은 회의 말미에 이런 이야기를 슬쩍 했다고 한다.
“동지들, 내가 장칭과 이혼을 생각 중인데 동지들 생각은 어떻소?”
그러면 누구나 예외 없이 마오쩌둥의 의견에 동조하는 발언들을 했다.
“그렇게 하시지요. 주석.”
그 순간 고개를 끄떡이는 마오쩌둥에게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피력하는 이가 바로 저우언라이였다.
“주석,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장칭 동지는 주석의 정치적 동반자입니다.”
회의가 끝나고 무리지어 나오면서 사람들은 저우언라이를 눈치 없는 사람 취급하며 ‘큰일이군. 저우언라이의 앞날도 이젠 끝이야’라며 혀를 찼지만 결과는 항상 저우언라이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그렇다면 모두가 ‘예스’라 할 때 절대 권력자 면전에서 저우언라이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저우언라이가 이미 마오쩌둥의 발언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는 부부싸움은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 되고 마는 만고의 진리를 바탕으로 마오쩌둥이 이혼을 얘기하는 자체가 그 자리에서 ‘노’ 소리를 듣고 싶은 속마음을 읽은 것이다. 오랜 시간 마오쩌둥을 보좌하며 마오쩌둥의 의견 개진 방식과 업무 지시 형태를 파악한 것이다.
“아니, 말려야지, 이혼하라고 오히려 부추겨. 이 사람들이 참.”
마오쩌둥은 오히려 이혼에 찬성한 간부들을 언짢게 생각하고 저우언라이에 대한 신임은 더욱 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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