芒刺在背(망자재배)
芒刺在背[mángcìzàibèi]
芒 까끄라기 망, 황홀할 황 | 刺 찌를 자, 찌를 척, 수라 라(나), 비방할 체 | 在 있을 재 | 背 등 배, 배반할 배 |
가시를 등에 지고 있다는 뜻으로,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편하지 않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다. 안절부절못하다. 좌불안석(坐不安席).
한서(漢書) 곽광(藿光)전의 이야기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 곽광(藿光)이란 인물이 있었다. 무제는 사리가 분명하고 과단성이 있는 그를 대단히 신임하여 자기 사후의 조정 일을 미리 위임했다.
기원전 87년, 한무제가 세상을 떠나자, 여덟살 된 아들이 소제(昭帝)로서 제위를 계승하였다. 각광은 대사마 대장군이란 막강한 직위를 차지하고는 어린 나이로 등극한 소제(昭帝)의 후견인이 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황제의 폐립 문제까지 독단할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한소제가 21세로 죽자, 곽광은 한무제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제위에 앉혔다. 그런데 그는 음란하고 놀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국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일생일대의 실수로다!’
곽광은 후회막급하여 즉시 폐위 절차에 들어갔다. 우선 대사농(大司農) 전연년(田延年)을 은밀히 불러 의논했다.
“생각건대 아무래도 옥좌의 주인을 갈아야 할 것 같소.”
“이 사람 역시 같은 생각이지만, 황실의 어른이신 태후마마께서 과연 허락하실지 모르겠구려.”
“나라의 장래를 위하는 일인데 설마 마다하시겠소? 무황제께서 이 사람한테 내리신 유조(遺詔)도 있고 하니 설득해 봅시다.”
태후 앞에 나아간 곽광은 유하의 잘못을 역설하여 태후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런 다음 즉각 퇴위 절차를 밟아 유하를 내쫓고 무제의 증손자 유순(劉詢)을 데려다 보위에 앉히기로 했다. 유순은 무제의 태자 유거(劉據)의 손자인데, 냉혹하기로 이름난 무제는 말년에 무고 사건에 걸린 유거를 친아들인데도 용서하지 않고 일가족까지 다 죽여 버렸다. 다만, 이때 유순은 갓난아이였기 때문에 요행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유순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는 방침은 섰으나, 그의 현재 신분이 걸림돌이 되어 일단 양무후(陽武侯)로 봉했다가 나중에야 황제로 옹립했다. 그가 곧 선제(宣帝)다. 보위에 오른 선제는 고조의 묘에 참배하기 위해 대궐을 나섰는데, 이때 곽광이 대장군으로서 호위역을 맡았다.
한선제는 기골이 장대하고 날카로운 눈에 엄한 표정을 한 곽광을 보며, 수레 안에서 마치 등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若有芒刺在背] 참기 어려운 모습으로 떨고 있었다. 기원전 68년, 곽광이 병들어 죽자, 비로소 한선제는 친정(親政)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느낌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芒刺在背(A thorn in the flesh) 란 몹시 불안한 상태를 비유한 말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坐不安席(좌불안석) | 如坐针毡[rúzuòzhēnzhā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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