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安石(왕안석, 1021~1086)
異名: 王安石(Wáng ānshí), 자 개보(介甫), 호(號) 반산(半山)
국적: 중국 송(宋)
활동분야: 정치
중국 북송(北宋) 때의 문필가이자 정치인으로서 1069~1076년에 신법(新法)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중국 송(宋, 960∼1279) 때의 문필가이자 정치인으로 자(字)는 개보(介甫), 호(號)는 반산(半山)이다. 문필가이자 시인으로서 그는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북송(北宋)의 6대 황제인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에게 발탁되어 1069~1076년에 신법(新法)이라고 불리는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시역법(市易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의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개혁적 정치 사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장시성[江西省] 푸저우[撫州] 린촨현[臨川懸] 출신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다가 할아버지 때부터 관직에 진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버지 왕익(王益)은 지방관으로 중국 각지를 전전했다. 왕안석(王安石)은 열아홉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녕부(江寧府, 지금의 南京)에 정착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재(文才)를 인정받았으며, 유가 경전뿐 아니라 제자백가의 서적에서 의서(醫書), 소설까지 다양한 서적들을 읽으며 기존의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하였다.
인종(仁宗, 재위 1022~1063) 때인 1042년 과거에 합격하여 섬서회남절도판관(陝西淮南節度判官)으로 관직을 시작한 뒤 20년 정도를 화남(華南) 지방에서 각급 지방관으로 근무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관개 사업과 재정 관리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널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학문과 행정 능력을 갖춘 유능한 인재로 명성이 높아지면서 중앙 관직으로의 진출을 추천 받기도 하였지만, 왕안석은 집안 사정의 어려움을 내세워 사양하였다.
1058년에 왕안석은 인종(仁宗)에게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서술한 <만언서(萬言書)>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정치의 폐단(弊端)을 지적하고 <주례(周禮)>를 전범(典範)으로 한 개혁의 추진을 주장하며 인재 양성과 선발, 이재(理財) 방법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만언서>는 그의 개혁 정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문장에서도 모범이 되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1067년 영종(英宗, 재위 1063~1067)의 뒤를 이어 열아홉의 나이로 황위(皇位)에 오른 신종(神宗)은 정치의 쇄신과 개혁을 추진하며 왕안석을 등용하였다. 신종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왕안석을 강녕부(江寧府) 지사(知事)로 임명하고, 곧바로 중앙으로 불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았다. 그리고 1069년에는 그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하여 신법(新法)을 입안하여 개혁 정책을 실행케 하였다. 왕안석은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를 설치하여 신법(新法)을 추진하였으며, 1070년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어 재상(宰相)으로서 국정 전반을 관장하였다.
왕안석은 1069년 균수법(均輸法)을 시작으로 청묘법(靑苗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 시역법(市易法), 보마법(保馬法) 등의 신법(新法)을 잇달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대지주와 대상인, 고리대업자들과 정부 안의 보수파의 반발에 부닥쳤다. 1074년 심한 기근마저 나타나 반발이 커지자 신종은 왕안석을 강령부(江寧府) 지사(知事)로 좌천하여 이를 무마하려 하였다. 왕안석은 이듬해 다시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임명되었지만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지 못했다. 그리고 아들을 잃는 일까지 일어나자 1076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강녕부(江寧府)로 은거하였다. 그는 1086년 5월 21일에 사망하였고, 죽은 뒤 형국공(荆国公)으로 봉해졌다.
왕안석은 유학의 실용적 해석과 응용을 강조하였으며,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례(周禮)> 등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유학의 도덕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나 ‘법치’를 강조했으며,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때문에 왕안석의 사상은 유교 전통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특히 성리학(性理學)에서 구법당(舊法黨)의 사상을 정론(正論)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는 배척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왕안석의 개혁 정책에 대해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의 사상이 지니는 의의도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는 정론(政論)과 여행수기, 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산문은 현실주의 풍격을 지니고 있으며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만년(晩年)에는 한자(漢字)의 연원과 제자(製字) 원리 등을 연구하여 <자설(字說)>이라는 책을 남기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왕임천문집(王臨川文集)>, <임천집습유(臨川集拾遗)> 등의 문집(文集)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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