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稀 (고희)

古稀(고희)

杜甫 詩의 人生七十古來稀에서 나온 말로 일흔 살을 가리킴.

顧況 (고황, Gù Kuàng, 727~816)

顧況(고황, 727~816)

異名: 顾况(Gù Kuàng)


당대의 또 다른 시인인 顧況(약715-814년)은 “越泥는 옥처럼 아름답다”는 말로 越窯 청자가 옥처럼 윤택한 빛깔임을 형용한 바 있다.

고황(顧況)이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무렵 15세의 백거이가 수도인 장안(長安)에 있던 고황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당시 고황은 나이 50여세였는데, 어린 소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그의 이름 '거이(居易)'를 빗대어 "장안의 쌀값이 비싸니 살아가기 어려울 것(長安米貴, 居住不易)"이라며 비꼬았다. 그러나 백거이가 시 〈부득고원초송별〉를 보여주자 "이런 재주가 있다면 살아가기가 쉬울 것(有才如此, 居亦容易)"이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언덕 위에 우거진 풀들(離離原上草),
해마다 한 번 시들었다 무성해진다네(一歲一枯榮).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野火燒不盡),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난다네(春風吹又生).
방초는 멀리 뻗어 옛길을 덮고(遠芳侵古道)
맑은 하늘 푸른 빛은 황폐한 성까지 닿네(晴翠接荒城).
또 그대를 떠나보내니(又送王孫去)
이별의 슬픔 가득하다네(萋萋滿別情).

功虧一簣 (공휴일궤)

功虧一簣 (공휴일궤)

功 공 공 | 虧 이지러질 휴 | 一 한 일 | 簣 삼태기 궤 |

쌓는 공도 한 삼태기로 이지러진다는 뜻으로, 거의 성취한 일을 중지(中止)함을 이르는 말


書經(서경) 旅獒篇(여오편)에 나오는 말이다.

周(주)나라 武王(무왕)이 殷(은)나라 紂王(주왕)을 무찌르고 새 왕조를 열었는데 旅(여)라는 오랑캐 나라에서 ‘獒(오)’라는 珍奇(진기)한 개를 선물로 보냈다. 오는 키가 넉 자나 되는 큰 개로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고 또 사람이나 짐승을 잘 덮친다 해서 무왕이 몹시 기뻐하며 소중히 여기자 동생인 召公(소공) 奭(석)은 무왕이 혹시 그런 진기한 물건에 마음이 끌려 정치를 등한히 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이를 일깨워 말하길, “슬프다, 임금 된 사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시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된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이를 조심하지 않으면 마침내 큰 덕을 해치기에 이르게 된다. 예를 들어 흙을 가져다가 산을 만드는데, 이제 조금만 일을 계속하면 아홉 길 높이에 이르게 되었을 때, 이제는 다 되었다 하고 한 삼태기의 흙을 운반하는 데 게을리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해 온 일이 모두 허사가 된다[爲山九 , 功虧一簣]”고 했다.

‘아홉 길 산을 쌓는 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공이 한꺼번에 무너진다’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조금만 더 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는데 한 삼태기가 부족해서 헛된 일이 되었다는 뜻으로 쓰인다. 九仞功虧一簣(구인공휴일궤)라는 숙어로 굳어져 있다. 주나라 소공이 정사에 힘쓴 일로 인해 甘棠之愛(감당지애)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출전

서경(書經) 旅獒篇(여오편) | 상서(尙書) 주서(周書) 여오(旅獒)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九仞功虧一簣(구인공휴일궤)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曲學阿世 (곡학아세)

曲學阿世(곡학아세)

曲学阿世(qūxué ēshì)。

曲 굽을 곡, 누룩 곡 | 學 배울 학, 가르칠 교, 고지새 할 | 阿 언덕 아, 호칭 옥 | 世 인간 세, 대 세 |

학문(學問)을 굽히어 세상(世上)에 아첨(阿諂)한다는 뜻으로, 정도(正道)를 벗어난 학문(學問)으로 세상(世上) 사람에게 아첨(阿諂)함을 이르는 말


사기 유림열전(儒林列傳)의 이야기.

중국 한나라 황제(皇帝)인 경제(景帝)가 즉위하여 천하(天下)의 선비를 찾다가 산동에 사는 원고생(轅固生)이란 90세의 노 시인을 등용(登用ㆍ登庸)하기로 했다.

중신들은 그의 등용(登用ㆍ登庸)을 반대했으나, 끝내 경제(景帝) 임금은 그를 등용(登用ㆍ登庸)한다. 그는 강직한 성품과 학문으로 왕자의 스승을 지냈으나 병 때문에 물러났다.

무제(武帝)가 즉위하자, 원고생은 9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게 되었는데, 아첨을 일삼는 관리들은 그가 너무 늙었다며 헐뜯었다. 원고생이 조정의 부름을 받았을 때, 같이 등용(登用ㆍ登庸)된 소장 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역시 산동 사람으로 공손홍(公孫弘)이라고 했다. 공손홍은 원고생을 깔보고 무시했으나, 개의치 아니하고 공손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지금은 학문(學問)의 정도(正道)가 어지러워져 속설이 유행하여 전통적 학문(學問)이 결국은 사설로 인하여 본연의 모습이 사라지고 말 것이오. 당신은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젊으니 선비로써 올바른 학문(學問)을 세상(世上)에 널리 펼쳐주기 바라오.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혀(曲學), 이 세상(世上)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되오.[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이 말을 들은 공손홍은 고매한 학식과 인격을 갖춘 원고생에게 지난 잘못을 사죄하고 제자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로 인하여 전해지는 말이 바로 곡학아세이다.


출전

사기(史記)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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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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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활용도 ★★★

恭賀新禧 (공하신희)

恭賀新禧(공하신희)

恭 공손할 공 | 賀 하례할 하 | 新 새 신 | 禧 복 희

근하신년(謹賀新年)


유의어

謹賀新年(근하신년) | 恭賀新年(공하신년)


경조사

攻彼顧我 (공피고아)

攻彼顧我(공피고아)

상대방을 공격하기에 앞서 자기의 말을 돌아보라

출전
바둑 '위기십결(圍棋十訣)'

公平無私 (공평무사)

公平無私(공평무사)

공변되고 평평하여 사사로움이 없음

孤枕短命 (고침단명)

孤枕短命 (고침단명)

베개를 높이 베면 오래 살지 못한다

苦盡甘來 (고진감래)

苦盡甘來 (고진감래)

고생 끝에 낙이 온다

空中樓閣 (공중누각)

空中樓閣 (공중누각)

공중에 뜬 집. 근거가 없는 터무니 없는 말이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일을 비유로 하는 말.

空前絶後 (공전절후)

空前絶後(공전절후)

비교할 만한 사물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을 것임.

高鼎 (고정, Gāo Dǐng)

高鼎(고정)

異名: 高鼎(Gāo Dǐng)

高適 (고적, Gāo Shì)

高適(고적)

異名: 高适(Gāo Shì), 자 달부(達夫)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허베이[河北]
주요저서: 《고상시집(高常詩集)》 《중간흥기집(中間興氣集)》등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비극시인.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 주요 작품에는 《어부사(漁父辭)》등이 있다.


자 달부(達夫). 허베이성[河北省] 출생. 젊었을 때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산둥[山東]과 허베이 지방을 방랑하며 이백(李白)·두보(杜甫) 등과 사귀었다.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에 간의태부(諫議太夫)로 발탁되었으나, 그의 직언(直言) 탓으로 환관(宦官) 이보국(李輔國)에게 미움을 사서 펑저우[彭州]·수저우[蜀州:四川]의 자사(刺史)로 좌천되었으며, 청두[成都]에 유배되어 있던 두보와 가까이 지냈다.

그 후 영전되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었고, 보하이현후[渤海縣侯]에 봉해졌다. 그의 시는 호쾌하면서도 침통한데, 특히 변경에서의 외로움과 전쟁·이별의 비참함을 읊은 변새시(邊塞詩)가 뛰어나다. 잠참(岑參)의 시와 더불어 성당시(盛唐詩)의 일면을 대표한다.

그의 시집은 《고상시집(高常詩集)》이라 하여, 그가 찬(撰)한 《중간흥기집(中間興氣集)》과 함께 지금까지 전한다.

孔子穿珠 (공자천주, Kǒngzǐchuānzhū)

孔子穿珠(공자천주)

孔子穿珠(Kǒngzǐchuānzhū)

孔 구멍 공 | 子 아들 자 | 穿 꿸 천 | 珠 구슬 주 |


공자가 구슬을 꿴다는 뜻으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


이 고사는 송(宋)나라의 목암선경(睦庵善卿)이 편찬한 《조정사원(祖庭事苑)》에 나온다. 공자(孔子)가 진(陳)나라를 지나갈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공자는 전에 어떤 사람에게 진기한 구슬을 얻었는데, 이 구슬의 구멍이 아홉구비나 되었다. 그는 이것을 실로 꿰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문득 바느질을 하는 아낙네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가까이 있던 뽕밭에서 뽕잎을 따고 있던 아낙네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공자의 이야기를 듣고난 그 아낙은 이렇게 말했다.

"찬찬히 꿀[蜜]을 두고 생각해 보세요." 공자는 그 아낙의 말대로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 "그렇지" 하고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는 나무 아래에 왔다갔다 하는 개미를 한 마리 붙잡아 그 허리에 실을 묶고는 개미를 구슬의 한쪽 구멍에 밀어넣고, 반대편 구멍에는 꿀을 발라 놓았다. 그 개미는 꿀 냄새를 맡고 이쪽 구멍에서 저쪽 구멍으로 나왔다. 이리하여 구슬에 실을 꿸 수 있게 되었다.

공자는 배우는 일에 있어서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의 이와 같은 언행을 두고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도 한다. 그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라고 하여 세 사람이 어떤 일을 같이 할 때에는 선악간(善惡間)에 반드시 스승으로서 배울 만한 사람이 있는 법이라 하였다.


관련 한자어

참조어

不恥下問(불치하문) | 三人行必有我師(삼인행필유아사) |

龔自珍 (공자진, Gōng Zìzhēn)

龔自珍(공자진, 1792~1841년)

異名: 龚自珍(Gōng Zìzhēn), 자 슬인(璱人), 이옥(爾玉), 호 정암(定庵), 일명 공조(鞏祚)
국적: 중국 청


공자진(龔自珍, 1792~1841년, 저장성(浙江省) 인화현(仁和縣, 인허시엔) 출생)은 중국 청나라 후기의 학자, 사상가, 시인이다. 자는 슬인(璱人), 이옥(爾玉)이며, 호는 정암(定庵), 일명은 공조(鞏祚)이다.


생애

그는 유명한 고증학자인 단옥재(段玉裁)의 외손으로서 어렸을 때 직접 단옥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일찍부터 예민한 학문재질과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38세에 진사(進士)가 된 후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하고 예부주사(禮部主事)의 미관(微官)에서 그쳤다. 23세부터 25세에 걸쳐서 《명양론(明良論)》, 《을병지제저의(乙丙之際著議)·숙의(塾議)》, 《평균편(平均篇)》을 저술하여 전제정치의 해악을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28세 때 유봉록(劉逢祿)에게서 공양학을 연구하고, 친구 위원(魏源)과 함께 정치 개혁을 강조하였다. 글솜씨가 뛰어나고 시를 잘 썼다고 한다. 만년에는 불교, 특히 천태종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술은 앞에 서술한 것 외에도 《농종(農宗)》, 《정역(正譯)》, 《기해잡시(己亥雜詩)》 등 많이 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진 부분도 많다. 그러나 대체로 《공자진전집》에 수집되어 있다.

孔子家語:卷02

孔子家語

卷02


致思第八

孔子北遊於農山,子路子貢顏淵侍側。孔子四望,喟然而嘆曰:「於斯致思,無所不至矣。
言思無所不至

二三子各言爾誌,吾將擇焉。子路進曰:「由願得白羽若月,赤羽若日,鐘鼓之音,上震於天,旍旗繽紛,下蟠於地,蟠委由當一隊而敵之,必也攘地千裏,

攘卻

搴旗執聝,

搴取也取敵之旍旗職截耳也以效獲也

唯由能之,使二子者從我焉。」夫子曰:「勇哉。」子貢復進曰:「賜願使齊楚合戰於漭瀁之野,

漭瀁廣大之類
兩壘相望,塵埃相接,挺刃交兵,賜著縞衣白冠,

兵兇事故白冠服也

陳說其間,推論利害,釋國之患,唯賜能之,使夫二子者從我焉。」夫子曰:「辯哉。」顏回退而不對。孔子曰:「回來,汝奚獨無願乎?」顏回對曰:「文武之事,則二子者,既言之矣,回何雲焉。」孔子曰:「雖然,各言爾誌也,小子言之。」對曰:「回聞熏蕕不同器而藏,

熏香蕕臭

堯桀不共國而治,以其類異也,回願得明王聖主輔相之,敷其五教,

敷布也五教父義母慈兄友弟恭子孝也

導之以禮樂,使民城郭不修,溝池不越,

言無踰越溝池

鑄劍戟以為農器,放牛馬於原藪,

廣平曰原澤無水曰藪也

室家無離曠之思,千歲無戰鬥之患,則由無所施其勇,而賜無所用其辯矣。」夫子凜然曰:「美哉!德也。」子路抗手而對曰:「夫子何選焉?」孔子曰:「不傷財,不害民,不繁詞,則顏氏之子有矣。」

魯有儉嗇者,瓦鬲煮食,瓦釜食之,自謂其美,盛之土型之器,

瓦甂以

進孔子。
孔子受之,歡然而悅,如受大牢之饋。

牛羊豕饋饋也

子路曰:「瓦甂,陋器也,煮食,薄膳也,夫子何喜之如此乎?」子曰:「夫好諫者思其君,食美者念其親。吾非以饌具之為厚,以其食厚而我思焉。」孔子之楚,而有漁者,而獻魚焉,孔子不受。漁者曰:「天暑市遠,無所鬻也,思慮棄之糞壤,不如獻之君子,故敢以進焉。」於是夫子再拜受之,使弟子掃地將以享祭。門人曰:「彼將棄之,而夫子以祭之,何也?」孔子曰:「吾聞諸惜其腐?,而欲以務施者,仁人之偶也,惡有受仁人之饋,而無祭者乎?」

季羔為衛之士師,

獄官

刖人之足,俄而衛有蒯聵之亂,

初衛靈公太子蒯聵得罪出奔晉靈公卒立其子輒蒯聵自晉襲衛時子羔子路並位於衛也

季羔逃之,走郭門,刖者守門焉。謂季羔曰:「彼有?。」季羔曰:「君子不踰。」又曰:「彼有竇。」季羔曰:「君子不隧。」

隧從竇出
又曰:「於此有室。」季羔乃入焉。既而追者罷,季羔將去,謂刖者:「吾不能虧主之法而親刖子之足矣,今吾在難,此正子之報怨之時,而逃我者三,何故哉?」刖者曰:「斷足固我之罪,無可奈何,曩者君治臣以法令,先人後臣,欲臣之免也,臣知獄決罪定,臨當論刑,君愀然不樂,見君顏色,臣又知之,君豈私臣哉?天生君子,其道固然,此臣之所以悅君也。」孔子聞之曰:「善哉為吏,其用法一也。思仁恕則樹德,加嚴暴則樹怨,公以行之,其子羔乎。」

孔子曰:「季孫之賜我粟千鐘也,而交益親,

得季孫千鐘之粟以施與眾而交益親

自南宮敬叔之乘我車也,而道加行。

孔子欲見老聃而西觀周敬叔言於魯君給孔子車馬問禮於老子孔子歷觀郊廟自周而還弟子四方來習也

故道雖貴,必有時而後重,有勢而後行,微夫二子之貺財,則丘之道,殆將廢矣。」

孔子曰:「王者有似乎春秋,

正其本而萬物皆正

文王以王季為父,以太任為母,以太姒為妃,以武王周公為子,以太顛閎天為臣,其本美矣。武王正其身以正其國,正其國以正天下,伐無道,刑有罪,一動而天下正,其事成矣。春秋致其時而萬物皆及,王者致其道而萬民皆治,周公載己行化,

載亦行矣言行已以行化其身正不令

而行也而天下順之,其誠至矣。」

曾子曰:「入是國也,言信於群臣,而留可也;見忠於卿大夫,則仕可也;澤施於百姓,則富可也。」孔子曰:「參之言此可謂善安身矣。」子路為蒲宰,為水備,與其民修溝瀆,以民之勞煩苦也,人與之一簞食

簞笥

一壺漿。孔子聞之,使子貢止之。子路忿不悅,?見孔子,曰:「由也以暴雨將至,恐有水災,故與民修溝洫以備之,而民多匱餓者,是以簞食壺漿而與之。夫子使賜止之,是夫子止由之行仁也。夫子以仁教而禁其行,由不受也。」孔子曰:「汝以民為餓也,何不白於君,發倉廩以賑之,而私以爾食饋之,是汝明君之無惠,而見己之德美矣。汝速已則可,不則汝之見罪必矣。」

子路問於孔子曰:「管仲之為人何如?」子曰:「仁也。」

得仁道也

子路曰:「昔管仲說襄公,公不受,是不辯也;

欲立公子糾而不能,是不智也;齊襄立無常鮑叔牙曰君使民慢亂將作矣奉公子小白出奔莒公孫無知殺襄公管夷吾召忽奉公子糾奔魯齊人殺無知魯伐齊納子糾小白自莒先入是為桓公公乃殺子糾召忽死之也

家殘於齊,而無憂色,是不慈也;桎梏而居檻車,無慚心,是無醜也;

言無恥惡之心

事所射之君,是不貞也;召忽死之,管仲不死,是不忠也。仁人之道,固若是乎?」孔子曰:「管仲說襄公,襄公不受,公之闇也;欲立子糾而不能,不遇時也;家殘於齊而無憂色,是知權命也;桎梏而無慚心,自裁審也;事所射之君,通於變也;不死子糾,量輕重也。夫子糾未成君,管仲未成臣,管仲才度義,管仲不死束縛,而立功名,未可非也。召忽雖死,過與取仁,未足多也。」

孔子適齊,中路聞哭者之聲,其音甚哀。孔子謂其仆曰:「此哭哀則哀矣,然非喪者之哀矣。」驅而前,少進,見有異人焉,擁鐮帶素,哭者不哀。孔子下車,追而問曰:「子何人也?」對曰:「吾丘吾子也。」曰:「子今非喪之所,奚哭之悲也?」丘吾子曰:「吾有三失,晚而自覺,悔之何及。」曰:「三失可得聞乎?願子告吾,無隱也。」丘吾子曰:「吾少時好學,周遍天下,後還喪吾親,是一失也;長事齊君,君驕奢失士,臣節不遂,是二失也;吾平生厚交,而今皆離絕,是三失也。夫樹欲靜而風不停,子欲養而親不待,?而不來者年也,不可再見者親也,請從此辭,遂投水而死。」孔子曰:「小子識之,斯足為戒矣。自是弟子辭歸養親者十有三。」

孔子謂伯魚曰:「鯉乎,吾聞可以與人終日不倦者,其唯學焉。其容體不足觀也,其勇力不足憚也,其先祖不足稱也,其族姓不足道也。終而有大名,以顯聞四方,流聲後裔者,豈非學之效也。故君子不可以不學。其容不可以不飭,不飭無類,無類失親,

類宜為貌不在飭故無貌不得言不飭無類也禮貌矜莊然後親愛可久故曰無類失親也

失親不忠,

情不相親則無忠誠

不忠失禮,

禮以忠信為本

失禮不立。

非禮則無以立

夫遠而有光者,飭也;近而愈明者,學也。譬之汙池,水潦註焉,雚葦生焉,雖或以觀之,孰知其源乎。」

源泉源也水潦註於池而生雚葦觀者誰知其非源泉乎以言學者雖從外入及其用之人誰知其非從此出也者乎

子路見於孔子曰:「負重涉遠,不擇地而休,家貧親老,不擇祿而仕。昔者由也,事二親之時,常食藜藿之實,為親負米百裏之外。親歿之後,南遊於楚,從車百乘,積粟萬鐘,累茵而坐,列鼎而食,願欲食藜藿,為親負米,不可復得也。枯魚銜索,幾何不蠹,二親之壽,忽若過隙。」孔子曰:「由也事親,可謂生事盡力,死事盡思者也。」

孔子之郯,

郯國名也少昊之後吾之本縣也郯子達禮孔子故?諮問焉

遭程子於塗,傾蓋而語,
傾蓋駐車

終日,甚相親。顧謂子路曰:「取束帛以贈先生。」

贈送

子路屑然對曰:「由聞之士不中間見,女嫁無媒,君子不以交禮也。」

中間謂始介也

有間,又顧謂子路。子路又對如初。孔子曰:「由,詩不雲乎:『有美一人,清揚宛兮,邂逅相遇,適我願兮。』

清揚眉目之間也宛然美也幽期而會令願也

今程子,天下賢士也,於斯不贈,則終身弗能見也,小子行之。」

孔子自衛反魯,息駕於河梁而觀焉。

河水無梁莊周書說孔子於閭梁言事者通渭水為河也

有懸水三十仞,

八尺曰仞懸二十四丈者也

圜流九十裏,

圜流迴流也水深急則然

魚鱉不能導,黿鼉不能居。

道行

有一丈夫方將厲之,

厲渡

孔子使人並涯止之曰:「此懸水三十仞,圜流九十裏,魚鱉黿鼉不能居也,意者難可濟也。」丈夫不以措意,遂渡而出。孔子問之,曰:「子乎有道術乎,所以能入而出者,何也?」丈夫對曰:「始吾之入也,先以忠信,及吾之出也,又從以忠信,忠信措吾軀於波流,而吾不敢以用私,所以能入而復出也。」孔子謂弟子曰:「二三子識之,水且猶可以忠信成身親之,而況於人乎!」

孔子將行,雨而無蓋。門人曰:「商也有之。」

子夏名也

孔子曰:「商之為人也,甚?於財,
?嗇甚也

吾聞與人交,推其長者,違其短者故能久也。」楚王渡江,江中有物大如鬥,圓而赤,直觸王舟,舟人取之,王大怪之,遍問群臣,莫之能識。王使使聘於魯,問於孔子。子曰:「此所謂萍實者也,

萍水草也

可剖而食也,吉祥也,唯霸者為能獲焉。」使者反,王遂食之,大美。久之使來以告魯大夫,大夫因子遊問曰:「夫子何以知其然乎?」曰:「吾昔之鄭,過乎陳之野,聞童謠曰:『楚王渡江得萍實,大如鬥,赤如日,剖而食之甜如蜜。』此是楚王之應也。吾是以知之。」

子貢問於孔子曰:「死者有知乎?將無知乎?」子曰:「吾欲言死之有知,將恐孝子順孫妨生以送死;吾欲言死之無知,將恐不孝之子棄其親而不葬。賜不欲知死者有知與無知,非今之急,後自知之。」

子貢問治民於孔子。子曰:「懍懍焉若持腐索之扞馬。」

懍懍戒懼之貌扞馬突馬

子貢曰:「何其畏也?」孔子曰:「夫通達禦皆人也,以道導之,則吾畜也;不以道導之,則吾讎也。如之何其無畏也。」

魯國之法,贖人臣妾於諸侯者,皆取金於府,子貢贖之,辭而不取金。孔子聞之曰:「賜失之矣。夫聖人之舉事也,可以移風易俗,而教導可以施之於百姓,非獨適身之行也,今魯國富者寡而貧者眾,贖人受金則為不廉,則何以相贖乎?自今以後,魯人不復贖人於諸侯。」

子路治蒲,請見於孔子曰:「由願受教於夫子。」子曰:「蒲其如何?」對曰:「邑多壯士,又難治也。」子曰:「然,吾語爾,恭而敬,可以攝勇;寬而正,可以懷強;愛而恕,可以容困;

言愛恕者能容困窮

溫而斷,可以抑奸。如此而加之,則正不難矣。」


三恕第九

孔子曰:「君子有三恕,有君不能事,有臣而求其使,非恕也;有親不能孝,有子而求其報,非恕也;有兄不能敬,有弟而求其順,非恕也。士能明於三恕之本,則可謂端身矣。」孔子曰:「君子有三思,不可不察也。少而不學,長無能也;老而不教,死莫之思也;有而不施,窮莫之救也。故君子少思其長則務學,老思其死則務教,有思其窮則務施。」

伯常騫問於孔子曰:「騫固周國之賤吏也,不自以不肖,將北面以事君子,敢問正道宜行,不容於世,

[正道宜行而出莫之能貴故行之則不容於世]

隱道宜行,然亦不忍,

[世亂則隱道為行然亦不忍為隱事]

今欲身亦不窮,道亦不隱,為之有道乎?」孔子曰:「善哉子之問也。自丘之聞,未有若吾子所問辯且說也。

[辯當其理得其說矣]

丘嘗聞君子之言道矣,聽者無察,則道不入,

[言聽者不明察道則不能入也]

奇偉不稽,則道不信。

[稽考也聽道者不能考校奇偉則道不見信此言茍非其人道不虛行]

又嘗聞君子之言事矣,制無度量,則事不成,其政曉察,則民不保。

[保安也政大曉了分察則民不安矣]

又嘗聞君子之言誌矣,?折者不終,

[?則折矣不終其性命矣]

徑易者則數傷,

[徑輕也誌輕則數傷於義矣]

浩倨者則不親,

[浩倨簡略不恭如是則不親矣]

就利者則無不弊。

[言好利者不可久也]

又嘗聞養世之君子矣,從輕勿為先,從重勿為後,

[赴憂患從勞苦輕者宜為後重者宜為先養世者也]

見像而勿強,

[像法也見法而已不以強世也]

陳道而勿怫。

[怫詭也陳道而已不與世相詭違也]

此四者,丘之所聞也。」

孔子觀於魯桓公之廟,有欹器焉。

[欹傾]

夫子問於守廟者曰:「此謂何器?」對曰:「此蓋為宥坐之器。」孔子曰:「吾聞宥坐之器,虛則欹,中則正,滿則覆,明君以為至誡,故常置之於坐側。」顧謂弟子曰:「試註水焉。」乃註之,水中則正,滿則覆。夫子喟然嘆曰:「嗚呼!夫物惡有滿而不覆哉?」子路進曰:「敢問持滿有道乎?」子曰:「聰明睿智,守之以愚;功被天下,守之以讓;勇力振世,守之以怯;富有四海,守之以謙。此所謂損之又損之之道也。」

孔子觀於東流之水。子貢問曰:「君子所見大水,必觀焉何也?」孔子對曰:「以其不息,且遍與諸生而不為也。夫水似乎德,

[遍與諸生者物得水而後生水不與生而又不德也]

其流也則卑下,倨邑必修,其理似義;浩浩乎無屈盡之期,此似道;流行赴百仞之?而不懼,此似勇;至量必平之,此似法;盛而不求概,此似正;綽約微達,此似察;發源必東,此似誌;以出以入,萬物就以化絜,此似善化也。水之德有若此,是故君子見,必觀焉。」

子貢觀於魯廟之北堂,出而問於孔子曰:「向也賜觀於太廟之堂,未既輟,還瞻北蓋,皆斷焉,

[輟止觀北面之蓋斷絕也]

彼將有說耶?匠過之也。」孔子曰:「太廟之堂宮,致良工之匠,匠致良材,盡其功巧,蓋貴久矣,尚有說也。」

[尚猶必也言必有說]

孔子曰:「吾有所齒,有所鄙,有所殆。夫幼而不能強學,老而無以教,吾恥之;去其鄉事君而達,卒遇故人,曾無舊言,吾鄙之;

[事君而達得誌於君而見故人曾無舊言是棄其平生之舊交而無進之之心者乎]

與小人處而不能親賢,吾殆之。」

[殆危也夫疏賢而近小人是危亡之道也]

子路見於孔子。孔子曰:「智者若何?仁者若何?」子路對曰:「智者使人知己,仁者使人愛己。」子曰:「可謂士矣。」子路出,子貢入,問亦如之。子貢對曰:「智者知人,仁者愛人。」子曰:「可謂士矣。」子貢出,顏回入,問亦如之。對曰:「智者自知,仁者自愛。」子曰:「可謂士君子矣。」

子貢問於孔子曰:「子從父命孝,臣從君命貞乎?奚疑焉。」孔子曰:「鄙哉賜,汝不識也。昔者明王萬乘之國,有爭臣七人,則主無過舉;

[天子有三公四輔主諫爭以救其過失也四輔前曰疑後曰丞左曰輔右曰弼也]

千乘之國,有爭臣五人,則社稷不危也;

[諸侯有三卿股肱之臣有內外者也故有五人焉]

百乘之家,有爭臣三人,

[大夫之臣有室老家相邑宰凡三人能以義諫諍]

則祿位不替;父有爭子,不陷無禮;士有爭友,不行不義。

[士雖有臣既微且陋不能以義匡其君故須朋友之諫爭於己然後不義之事不得行之者也]

故子從父命,奚詎為孝?臣從君命,奚詎為貞?夫能審其所從,

[當詳審所宜從與不]

之謂孝,之謂貞矣。」

子路盛服見於孔子。子曰:「由是倨倨者何也?夫江始出於岷山,其源可以濫觴,

[觴可以盛酒言其微]

及其至於江津,不舫舟不避風則不可以涉,非唯下流水多耶?今爾衣服既盛,顏色充盈,天下且孰肯以非告汝乎?」子路趨而出,改服而入,蓋自若也。子曰:「由誌之,吾告汝,奮於言者華,

[自矜奮於言者華而無實]

奮於行者伐,

[自矜奮行者是自伐]

夫色智而有能者,小人也。故君子知之曰智,言之要也,不能曰不能,行之至也。言要則智,行至則仁,既仁且智,惡不足哉!」

子路問於孔子曰:「有人於此,披褐而懷玉,何如?」

[褐毛布衣]

子曰:「國無道,隱之可也;國有道,則袞冕而執玉。」

[袞冕文衣盛飭]


好生第十

魯哀公問於孔子曰:「昔者舜冠何冠乎?」孔子不對。公曰:「寡人有問於子而子無言,何也?」對曰:「以君之問不先其大者,故方思所以為對。」公曰:「其大何乎?」孔子曰:「舜之為君也,其政好生而惡殺,其任授賢而替不肖,德若天地而靜虛,化若四時而變物,是以四海承風,暢於異類,

異類四方之夷狄也

鳳翔麟至,鳥獸馴德,

馴順

無他也,好生故也。君舍此道,而冠冕是問,是以緩對。」

孔子讀史至楚復陳,

陳夏征舒殺其君楚莊王討之因陳取之而申叔時諫莊王從之還復陳

喟然嘆曰:「賢哉楚王!輕千乘之國,而重一言之信,匪申叔之信,不能達其義,匪莊王之賢,不能受其訓。」

孔子常自筮其卦,得賁焉,愀然有不平之狀。子張進曰:「師聞蔔者得賁卦,吉也,而夫子之色有不平,何也?」孔子對曰:「以其離耶!在周易,山下有火謂之賁,

離上艮下離為火艮為山

非正色之卦也。夫質也黑白宜正焉,今得賁,非吾兆也。賁飾吾聞丹漆不文,白玉不雕,何也?質有餘不受飾故也。」孔子曰:「吾於甘棠,見宗廟之敬甚矣,

邵伯聽訟於甘棠愛其樹作甘棠之詩也

思其人必愛其樹,尊其人必敬其位,道也。」

子路戎服見於孔子,拔劍而舞之,曰:「古之君子,以劍自衛乎?」孔子曰:「古之君子忠以為質,仁以為衛,不出環堵之室,而知千裏之外,有不善則以忠化之,侵暴則以仁固之,何持劍乎?」子路曰:「由乃今聞此言,請攝齊以受教。」

齊裳下緝也受教者攝齊升堂

楚王出遊,亡弓,左右請求之。王曰:「止,楚王失弓,楚人得之,又何求之!」孔子聞之,惜乎其不大也,不曰人遺弓,人得之而已,何必楚也。

王恭王弓鳥?之良弓

孔子為魯司寇,斷獄訟皆進眾議者而問之,曰:「子以為奚若?某以為何若?」皆曰雲雲如是,然後夫子曰:「當從某子幾是。」

近也重獄事故與眾議之

孔子問漆雕憑曰:「子事臧文仲武仲及孺子容,此三大夫孰賢?」對曰:「臧氏家有守龜焉,名曰蔡,文仲三年而為一兆,武仲三年而為二兆,孺子容三年而為三兆,憑從此之見,若問三人之賢與不賢,所未敢識也。」孔子曰:「君子哉漆雕氏之子,其言人之美也,隱而顯;言人之過也,微而著。智而不能及,明而不能見,孰克如此。」

克能也而宜為如也

魯公索氏,

先落反

將祭而亡其牲。孔子聞之曰:「公索氏不及二年將亡,後一年而亡。」門人問曰:「昔公索氏亡其祭牲,而夫子曰,不及二年必亡,今過期而亡,夫子何以知其然?」孔子曰:「夫祭者,孝子所以自盡於其親,將祭而亡其牲,則其餘所亡者多矣。若此而不亡者,未之有也。」

虛芮二國爭田而訟,連年不決,乃相謂曰:「西伯仁也,

西伯文王

盍?質之。」

盍何不質正也

入其境則耕者讓畔,行者讓路;入其朝士讓為大夫,大夫讓於卿。虛芮之君曰:「嘻!吾儕小人也,

儕等

不可以入君子之朝。」遠自相與而退,鹹以所爭之田為閑田也。孔子曰:「以此觀之,文王之道,其不可加焉,不令而從,不教而聽,至矣哉。」

曾子曰:「狎甚則相簡,莊甚則不親,是故君子之狎足以交歡,其莊足以成禮。」孔子聞斯言也,曰:「二三子誌之,孰謂參也不知禮乎!」

哀公問曰:「紳委章甫,

委委貌章甫冠名也

有益於仁乎?」孔子作色而對曰:「君胡然焉,衰麻苴杖者,誌不存乎樂,非耳弗聞,服使然也;黼黻袞冕者,容不襲慢,非性矜莊,服使然也;介胃執戈者,無退懦之氣,非體純猛,服使然也。且臣聞之,好肆不守折,

言市弗能為廉好肆不守折也

而長者不為市,

言長者之行則不為市買之事

竊夫其有益與無益,君子所以知。」

竊宜為察

孔子謂子路曰:「見長者而不盡其辭,雖有風雨,吾不能入其門矣。故君子以其所能敬人,小人反是。」

孔子謂子路曰:「君子以心導耳目,立義以為勇;小人以耳目導心,不愻以為勇。故曰退之而不怨,先之斯可從已。」

言人退之不怨先之則可從足以為師也

孔子曰:「君子三患,未之聞,患不得聞;既得聞之,患弗得學;既得學之,患弗能行。有其德而無其言,君子恥之;有其言而無其行,君子恥之;既得之,而又失之,君子恥之;地有餘民不足,君子恥之;眾寡均而人功倍己焉,君子恥之。」

凡興功業多少與人同而功殊倍己故恥之也

魯人有獨處室者,鄰之厘婦,

厘寡婦也

亦獨處一室。夜暴風雨至,厘婦室壞,趨而托焉,魯人閉戶而不納,厘婦自牖與之言:「何不仁而不納我乎?」魯人曰:「吾聞男女不六十不同居,今子幼吾亦幼,是以不敢納爾也。」婦人曰:「子何不如柳下惠?然嫗不建門之女,國人不稱其亂。」魯人曰:「柳下惠則可,吾固不可。吾將以吾之不可,學柳下惠之可。」孔子聞之曰:「善哉!欲學柳下惠者,未有似於此者,期於至善而不襲其為,可謂智乎!」

孔子曰:「小辯害義,小言破道,關睢興於鳥而君子美之,取其雄雌之有別;鹿鳴興於獸,而君子大之,取其得食而相呼。若以鳥獸之名嫌之,固不可行也。」

孔子謂子路曰:「君子而強氣,而不得其死;小人而強氣,則刑戮薦蓁。豳詩曰:『殆天之未陰雨,徹彼桑土,綢繆牖戶,

殆及也徹剝也桑土桑根也鴟鴞天未雨剝取桑根以纏綿其牖戶喻我國家積累之功乃難成之苦者也

今汝下民,或敢侮余。』」

今者周公時言我先王致此大功至艱而下民敢侵侮我周道謂管蔡之屬不可不遏絕之以存周室者也

孔子曰:「能治國家之如此,雖欲侮之,豈可得乎?周自後稷積行累功,以有爵土,公劉重之以仁,及至大王亶甫,敦以德讓,其樹根置本,備豫遠矣。初,大王都豳,翟人侵之,事之以皮幣,不得免焉,事之以珠玉,不得免焉,於是屬耆老而告之,所欲吾土地。吾聞之君子不以所養而害人,二三子何患乎無君?遂獨與大姜去之,踰梁山,邑於岐山之下。豳人曰:『仁人之君,不可失也,從之如歸市焉。』天之與周,民之去殷久矣,若此而不能天下,未之有也,武庚惡能侮。

武庚紂子名祿父與管叔共為亂也

鄁詩曰:『執轡如組,兩驂如。』」

驂之以服和調節中

孔子曰:「為此詩者,其知政乎!夫為組者,?紕於此,成文於彼,言其動於近,行於遠也。執此法以禦民,豈不化乎!竿旄之忠告至矣哉!」

竿旄之詩者樂乎善道告人取喻於素絲良馬如組紕之義

孤掌難鳴 (고장난명)

孤掌難鳴 (고장난명)

손바닥 하나로는 박수를 칠 수 없다. 혼자 힘으론 일을 해내기가 어렵다

孔子 (공자, Kǒngzǐ, BC 551~BC 479)

孔子(공자,Kǒngzǐ, BC 551~BC 479)

異名: 孔子(Kǒngzǐ), 孔夫子(Kǒngfūzǐ), 본명 구(丘), 자 중니(仲尼)
국적: 중국 노(魯)
활동분야: 교육, 철학
출생지: 중국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


중국 고대의 사상가, 유교의 시조.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았다. 인(仁)에 대한 공자의 가장 대표적인 정의는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仁)”이라는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孝悌)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공자는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 鄒邑:지금의 山東省 曲阜의 남동)에서 BC 551년에 출생하였다. 자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이다.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춘추 말기 사람으로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인(仁)이며,‘극기복례(克己復禮 :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仁)이다)'를 그 핵심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인(仁)을 단지 도덕규범이 아닌 사회질서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사상으로 생각했다.


Confucius (551 BC–479 BC) http://thatgul.blogspot.com/1976/03/confucius-551-bc479-bc.html

孔子家語 (공자가어, kǒngzǐjiāyǔ)

孔子家語(공자가어)

異名: 孔子家语(kǒngzǐjiāyǔ)
구분: 유교서적


공자의 언행 및 공자와 문인(門人)과의 논의(論議)를 수록한 책.


현재 전하는 것은 총 10권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誌)>에는 〈공자가어 27권〉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이미 실전(失傳)되어 저자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현재 전하는 것은 위(魏)의 왕숙(王肅)이 공안국(孔安國)의 이름을 빌려 《좌전(左傳)》 《국어(國語)》 《맹자(孟子)》 《순자(荀子)》 《대대례(大戴禮)》 《예기(禮記)》 《사기(史記)》 《설원(說苑)》 《안자(晏子)》 《열자(列子)》 《한비자(韓非子)》 《여람(呂覽)》 등에서 공자에 관한 기록을 모아 수록한 위서(僞書)인데, 44편으로 되었다.

이 속에는 공자의 유문(遺文)과 일화가 섞여 있어 폐기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한다.


관련 고사성어(故事成語)

卷02
致思第八 三恕第九 好生第十

宥坐之器(유좌지기) |

骨肉相殘 (골육상잔)

骨肉相殘(골육상잔)

骨肉相残(gǔ ròu xiāng cán)

骨 뼈 골│肉 고기 육, 둘레 유│相 서로 상, 빌 양│殘 잔인할 잔, 남을 잔


부자(父子)나 형제(兄弟) 또는 같은 민족(民族) 간(間)에 서로 싸움


관련어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유의어)

兄弟鬩墻(형제혁장)│煮豆燃萁(자두연기, zhǔdòuránqí)│民族相殘(민족상잔)│同族相爭(동족상쟁)│同族相殘(동족상잔)│骨肉相戰(골육상전)│骨肉相爭(골육상쟁)


정치│전쟁

苦肉計 (고육계, kǔròujì)

苦肉計(고육계)

苦肉计(kǔròujì)

苦 쓸 고 | 肉 고기 육 | 計 셀 계 |


제몸을 상해가면서까지 꾸며내는 방책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어려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계책을 말하며 고육지계(苦肉知計) 또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라고도 한다.


스스로를 희생하다. 이는 의심이 많은 상대방의 신용을 사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뜻한다. 三十六計(삼십육계) 敗戰計(패전계) 제34계이다. 역사적으로 거짓투항하기 위하여 스스로 벌을 받거나 하는 식으로 많이 쓰였다. 특히 삼국지연의의 백미인 적벽대전에의 황개의 고육계가 유명하다.

원문의 풀이글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스스로를 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해를 입었다면 이는 가해를 받은 것이다. 이러하므로 거짓을 진실로, 진실을 거짓으로 보여 계략을 성공시킨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순수하여야 한다."

人不自害,受害必眞.假眞眞假,間以得行.童蒙之吉,願以巽也.

三國志演義에서 묘사된 황개의 고육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어디까지나 연의 상의 이야기일 뿐이지,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다.

조조의 군세와 손오의 군세가 적벽에서 대치하고 있을때, 서로 대군이 대치하고 있는 만큼 소규모의 국지전은 빈번했지만 대규모의 정면전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겉으로는 소강상태에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치열한 신경전 및 첩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규모의 국지전에서 번번히 패한 조조는 채모(蔡瑁)에게 수군의 훈련을 맡겼고, 오군의 적정을 탐지하고자 주유의 친구였던 장간을 첩자로 보낸다. 주유는 장간이 조조의 첩자로 온 것을 알고는 이를 이용해 채모가 자신들과 내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장간이 돌아가 채모가 내통하고 있었다고 보고해, 조조는 채모를 죽인다. 이는 채모가 수군훈련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주유가 채모를 제거하기 위해 '反間計(반간계)'를 쓴 것이었다.

조조는 채모를 죽인후 주유에게 놀아난 것을 알고는 크게 분개한다. 그리고는 채모의 아우인 채중과 채화를 거짓항복시켜 오군에 침투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채중(蔡中)·채화(蔡和)는 주유에게 거짓항복하며 아무 죄없이 죽은 형의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다.이에 주유는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주유는 이들의 항복이 거짓인 줄을 알고 있었다. 채중과 채화는 가족들을 데려오지 않은 것을 보고 이들이 첩자로 온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는 이들을 역으로 이용하고자 감녕을 불러서 은밀히 분부한다.

이후 주유의 심복인 황개(黃蓋)가 밤에 주유의 막사를 찾아온다. 그리고는 화공(火攻)을 진언한다. 사실 주유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진중에는 조조의 첩자 채씨 형제가 있어 노련한 주유가 화공 같은 중요한 작전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먼저 거짓으로 항복하는 이른바 사항계(詐降計)를 생각해냈다. 황개는 자신이 기꺼이 그 역할을 맡고자 했다. 주유가 의심많은 조조를 속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말하자, 황개는 '苦肉計(고육계)'를 진언한다.

작전회의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이때 황개가 “누가 보아도 조조를 꺾는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없소. 이럴 바에야 차라리 항복하느니만…….” 하고 말했다. 그 때 주유의 벽력(霹靂) 같은 질책(叱責)이 떨어졌다. 주유는 장수들이 보는 앞에서 황개를 크게 모욕하고 장형에 처한다. 물론 각본이었다. 즉시 황개는 끌려나와 형틀에 묶였다. 곧이어 곤장 소리와 함께 비명(悲鳴)소리가 들려왔다. 백여 대를 맞은 황개의 엉덩이는 허물어졌다. 그 동안 황개는 몇 번이나 까무러쳤다.

황개가 자기 막사에 누워있는데 감택이 찾아와 고육계가 아닌가 얘기를 한다. 이에 황개는 속내를 털어놓고 감택에게 가짜 항서를 조조에게 갖다 달라고 부탁한다.

감택이 가짜 항서를 조조에게 바치자, 조조는 의심하며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감택을 죽이려 하였다. 그때 채중과 채화가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그 편지는 황개의 수형에 관한 이야기였고, 이에 조조는 의심을 풀고 황개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감택은 황개에게 소식을 전한후, 채중과 채화의 소식을 알고자 감녕에게로 간다. 감녕과 감택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채중과 채화가 들어왔다. 이에 감녕과 감택은 짐짓 주유에게 불만이 가득차, 吳를 배반할 생각이 있는것처럼 연기했다. 그러자 채중과 채화는 이들에게 모반할 뜻이 있는 것으로 여겨, 자신들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네사람은 의기투합하였다.

채중과 채화는 이 이야기를 조조에게 편지로 보냈다. 감택은 감택대로 황개가 청아기를 꽂고 투항하러 갈 것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조조는 두 통의 밀서를 받았지만 의혹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이에 모사들과 상의하는데 장간이 지난 번의 실수를 만회하겠다며 나섰다.

장간이 찾아오자 주유는 크게 화를 내며 상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장간을 작은 암자에 감금하고 감시병을 붙혔다. 이에 장간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누군가 병서를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방통이며 주유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와 함께 조조에게로 간다.

방통을 맞은 조조는 크게 후대하며 그에게 군략에 관한 조언을 구한다. 이에 방통은 조조군이 수상전에 익숙치 않고, 물도 맞지 않아 크게 고생하고 있음을 간한다. 그러자 조조는 감탄하며 대책을 묻는다. 방통은 배를 쇠사슬로 서로 연결하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면 인마가 육지와 같이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조조는 즉시 좌우에 분부하여 배들을 모두 쇠사슬과 널빤지로 연결하였다.

이는 주유가 방통에게 미리 지시해둔 것으로, 화계를 쓸 때 배들이 연결이 되어 있으면 피해가 커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방통이 배를 연결하는 책략을 펼친 것을 '連環計(연환계)'라 한다.

이렇게 화공에 대한 준비는 모두 끝났으나 동남풍이 불지 않는 것을 알고 주유는 크게 앓게 된다. 이에 제갈량이 자신이 동남풍을 부르겠다고 말하여 주유를 일으킨다.

그리고 황개는 인화물질을 실은 배를 조조의 선단에 부딪혀 불을 일으키고, 동남풍이 불어 조조의 선단에 퍼져가는데, 조조의 선단은 연환계로 엮여 있어서 분리하지도 못하고 모두 전소되고 말았다는 것까지가 연의에서 묘사하고 있는 적벽대전의 전모이다.

딱히 고육계에 대한 설명은 더 필요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三國志演義' 상의 적벽대전의 전모를 보면 '反間計(반간계)', '苦肉計(고육계)', '連環計(연환계)' 등이 모두 등장하는 희대의 전략전이지만 나관중이 지어낸 허구이다.

진수의 三國志 正史 吳書(오서) 주유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적벽에서 손유 연합군이 조조 군을 우연히 만났을 때, 주유의 부장 황개는 '적은 큰 세력이고 아군은 힘이 없으니 견디기가 어렵다'고 말하며 화공에 의한 속공을 제안하고는 스스로 실행을 떠맡았다. 그리고 사전에 조조에게 투항하겠다는 거짓 편지를 몰래 보내두었다. 조조군은 황개의 선대가 나타나자 목을 빼고 황개의 모습을 살피며 '황개가 투항해왔다'고 떠들어댔다."

진수의 三國志에 주석을 붙인 배송지도 '강표전'을 인용해 황개가 보낸 편지를 실어두고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황개가 조조에게 투항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이유는, 첫째, 조조군이 너무 강해 오나라가 대항해 싸울 수 없고, 둘째로 이러한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는 바이며, 셋째로 오나라의 정치는 부패하여 현명하고 어리석음을 분간하기 힘든 형편이기 때문이었다."

황개가 적벽에서의 대치 상태 중에 조조에게 거짓투항한 것은 사실이나, 고육계를 쓰지는 않았다. 모든 사료를 뒤져봐도 주유와 황개가 고육계를 꾸민 흔적도 없으며, 황개가 매를 맞은 이야기도 없고, 황개의 편지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단지 나관중이 적벽대전을 좀 더 극적으로 보이고자 그려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참조 한자어

동의어

苦肉之策(고육지책) | 苦肉知計(고육지계) | 반간고육계(反間苦肉計) |

骨肉之親 (골육지친)

骨肉之親(골육지친)

骨 뼈 골 | 肉 고기 육, 둘레 유 | 之 갈 지, -의 지 | 親 친할 친 |

뼈와 살을 같이 나눈 사이로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친족(親族)이란 뜻으로, 부자(父子)와 형제(兄弟) 또는 그와 가까운 혈족(血族)을 지칭하는 말


여씨춘추(呂氏春秋) 정통(精通)편에는 혈연에 관한 글이 실여 있다.

주(周)나라에 신희(申喜)라는 사람은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였다. 어느 날, 걸식(乞食)하는 사람이 문밖에 서서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너무 슬퍼서 그것이 얼굴에까지 나타났다. 그래서 문지기에게 그 걸인을 집으로 불러오도록 하여, 그에게 어찌 걸인이 되었는지를 물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보니, 그 걸인은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는 본디 한 몸뚱이에서 갈라지고, 동기(同氣)였다가 분리된 것이다. 풀의 꽃과 열매, 나무의 뿌리와 심(芯)처럼, 이 둘은 비록 있는 곳이 다르더라도 서로 통하고, 고통이 있으면 서로 도우고, 근심이 있으면 서로 느끼며, 살아 있을 때는 기뻐하고, 죽으면 서로 슬퍼하는 것이다. 이것이 골육간의 사랑이라는 것이다[此之謂骨肉之親]라고 하였다.


출전

여씨춘추(呂氏春秋)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骨肉(골육) | 血肉(혈육) | 血肉之親(혈육지친) |

公羊傳 (공양전) 公羊高 (공양고) 등

公羊傳(공양전) 公羊高(공양고)

중국 고대의 경서(經書)로 이른바 유가(儒家)의 13경(十三經) 가운데 하나이다. 공자(孔子)의 '춘추(春秋)'를 해석한 책으로 '곡량전(穀梁傳)', '좌전(左傳)' 등과 함께 ‘춘추 3전(春秋三傳)’이라고 불린다.


<춘추(春秋)>를 해석한 책으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라고도 불리며 모두 11권으로 되어 있다. 공자(孔子)가 저술한 것으로 전해지는 <춘추(春秋)>는 매우 간결한 서술을 특징으로 하며, 명분(名分)에 따라 용어들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이 그 의미를 해석하고 풀이하는 주석서(註釋書)인 ‘전(傳)’을 지으면서 이른바 ‘춘추학(春秋學)’이 나타났는데, 반고(班固, 32~92)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춘추>에 대한 전(傳)이 모두 23가(家) 948편(篇)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공양전(公羊傳)>은 곡량숙(穀梁俶, 穀梁赤이라고도 함)의 <곡량전(穀梁傳)>, 좌구명(左丘明)의 <좌씨전(左氏傳)>과 함께 ‘춘추삼전(春秋三傳)’으로 꼽히며 중시된다. ‘춘추삼전(春秋三傳)’은 모두 유가(儒家)의 핵심 경서(經書)인 ‘13경(十三經)’에 포함된다. ‘춘추삼전(春秋三傳)’에서 <좌씨전(左氏傳)>은 <춘추>에 기록된 사실(史實)에 대한 역사적 실증적 해석을 중심으로 하지만, <공양전(公羊傳)>과 <곡량전(穀梁傳)>은 경문(經文) 해석을 중심으로 한다. 특히 <공양전>은 문답(問答) 형식으로 경문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어 예로부터 <춘추>의 경문(經文)에 숨겨져 있는 공자의 뜻, 곧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밝히는 중요한 서적으로 여겨졌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제(齊) 나라 사람인 ‘공양자(公羊子)’가 저술하였으며, ‘공양외전(公羊外傳)’ 50편이 별도로 있었지만 외전은 모두 없어졌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당(唐)의 서언(徐彦)은 후한(後漢) 시대 대굉(戴宏)의 글을 인용하여 공양자(公羊子)의 이름이 고(高)이며,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공양고(公羊高) 한 개인이 아니라, 공양평(公羊平), 공양지(公羊地), 공양감(公羊敢) 등을 거치며 대를 이어 가학(家學)으로 연구되다가 전한(前漢) 경제(景帝) 때에 공양수(公羊壽)가 호모자도(胡母子都, 胡毋生이라고도 한다)와 함께 책으로 편찬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漢) 시대에는 동중서(董仲舒)가 <공양전>을 근거로 유교적인 사상 통일을 꾀하면서 ‘공양학(公羊學)’이 성행하기도 하였는데, ‘공양학’은 청(淸) 말기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쑨원[孫文] 등에게도 영향을 주어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姑息之計 (고식지계)

姑息之計(고식지계)

일시적으로 변통하는 꾀를 말함. 아랫돌 빼서 웃돌 괴기.


관련 한자어

유의어

因循姑息(인순고식)

孤臣寃淚 (고신원루)

孤臣寃淚(고신원루)

임금의 사랑을 잃은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

谷神不死 (곡신불사)

谷神不死(곡신불사)

계곡은 가뭄에 마르지 않는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곡신불사 시위현빈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면면약존 용지불근)

계곡의 정신은 마르지 않는다. 이를 여성스러움의 힘이라 한다. 여성스러움의 포용력. 이것을 하늘과 땅의 뿌리라고 한다. 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왕성한 모양으로 존재하며 아무리 쓰더라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 도덕경 제6장

高陽酒徒 (고양주도)

高陽酒徒(고양주도)

高 높을 고 | 陽 볕 양 | 酒 술 주 | 徒 무리 도 |

술을 좋아하여 제멋대로 행동(行動)하는 사람을 비유(比喩ㆍ譬喩)


사기(史記) 역생육가(酈生陸賈)열전의 이야기.

진(秦)나라 말기, 유방(劉邦)은 패현(沛縣)에서 군대를 일으켜 진류(陳留)현의 교외에 주둔하였다. 당시 진류현의 고양이라는 시골에는 역이기(酈食其)라는 한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책 읽기를 좋아하였으나, 일정한 생업을 갖지는 못했다.

역이기는 유방의 휘하로 들어가고자 했는데, 유방이 유생(儒生)들을 싫어하여 그들이 찾아오면 관(冠)을 벗겨서 거기에 오줌을 누고 욕을 퍼붓는다는 말을 듣었다. 역이기는 심사숙고한 후 대책을 마련하여 유방을 만나러 갔다. 유방은 유생이 찾아왔다는 말에 크게 노하여 유생 따위는 만날 시간이 없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역이기는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고양땅의 술꾼이지 유생이 아니오[吾高陽酒徒. 非儒人也]

시위의 보고를 받은 유방은 발을 씻다말고, 맨발로 나가 역이기를 맞았다. 그후 역이기는 유방을 도와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高陽酒徒란 술을 좋아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사기(史記)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高聲放歌 (고성방가)

高聲放歌(고성방가)

高 높을 고 | 聲 소리 성 | 放 놓을 방 | 歌 노래 가 |

큰소리로 떠들고 마구 노래 부름

① sing loudly ② sing boisterously

孔席墨突 (공석묵돌)

孔席墨突(공석묵돌)

孔 구멍 공 | 席 자리 석 | 墨 먹 묵 | 突 갑자기 돌 |

한(漢)나라 반고(班固)의 답빈희(答賓戱)에 나오는 이야기다. 춘추전국시대는 격렬한 전쟁으로 사회가 몹시 불안하였다. 이에따라 각종 사상이 발생하고 자신의 이상과 견해를 전파하고자 각국으로 유세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공자(孔子)와 묵자(墨子) 역시 이러한 사람들에 속한다.

공자는 자신의 학문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제자들을 데리고 많은 제후국들에서 유세하였다. 그리고 노(魯)나라 사람인 묵자는 본시 수공업자 출신으로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겸애(兼愛) 를 주장하며, 힘만 믿고 약자(弱者)에게 고통을 주는 전쟁을 반대하였다. 그는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며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는 묵자(墨子) 이외에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귀중한 연구 결과를 정리하였다.

반고는 공자와 묵자의 이러한 유세 활동을 공자의 자리는 따뜻해 질 틈이 없고, 묵자 집의 굴뚝에는 그을음이 낄 새가 없다[孔席不暖, 墨突不黔]라고 표현하였다. 孔席墨突은 여기저기 몹시 바쁘게 돌아 다님을 비유한 말이다.

孤城落日 (고성낙일)

孤城落日(고성낙일)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는 성에 해마저 서산에 기울어 가는 쓸쓸한 심정과 삭막한 풍경을 비유해서 쓰이는 말.


외로움

空城計 (공성계, kōngchéngjì)

空城計(공성계)

空城计(kōngchéngjì)

空 빌 공 | 城 성 성 | 計 꾀 계 |


아군이 열세일 때 방어하지 않는 것처럼 꾸며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전략.


36계(計) 가운데 敗戰計(패전계) 제32계이다. 빈 성으로 적을 유인해 혼란에 빠뜨리는 계책을 말한다. 아군측에 승산이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공허한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뭔가 계략을 숨겨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흔히 '없으면서도 있는척' 하여 적의 오판을 유도하는 반면, '없으면서 더욱 없는척' 하여 적으로 하여금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실력이 없으면서도 허세를 부리는 허장성세(虛張聲勢)와 통한다.

36계 원문의 풀이글은 다음과 같다.

"병력이 적을때는 일부러 더욱 적은 것으로 보여, 의심많은 적을 한층 더 의심케 할 수 있다. 병력이 적을 때의 기책으로 효과를 얻는다.[虛者虛之,疑中生疑,剛柔之際,奇而復奇.]"

列國志에도 공성계가 등장한다.

때는 齊(제)에서는 제환공이 치세를 이루고, 晉(진)에서는 진헌공이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남방의 楚(초)에서는 초문왕이 식나라를 쳐서 식후의 부인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 그 사이에서 웅간과 웅운, 두 아들이 있던 때였다. 초문왕은 죽고 큰아들 웅간이 왕위에 올랐으나 웅간은 자신보다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동생 웅운을 경계하여 틈을 보아 죽이려 하고 있었다. 또한 웅운은 웅운대로 자신보다 재주가 뒤처지는 형이 왕위에 있는 것이 불만이어서,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터였다.

그렇게 기회를 노리던 웅운은 사냥터에 나가는 웅간을 습격하여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楚成王(초성왕)이다. 초성왕의 숙부인 자원은 맹랑한 사람이었다. 형인 초문왕이 죽은 후부터 초나라 왕위를 노리고 있었으며, 또한 초문왕이 데려온 형수 문부인(식부인)을 사모하고 있었다. 이에 자원은 문부인의 환심을 사고자 초성왕의 윤허를 받아 鄭(정)나라로 쳐들어갔다.

정나라는 당시 鄭文公(정문공)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즉시 백관을 소집하여 상의했다. 의견은 분분하여 화평론, 주전론, 농성론 등이 계속 오갔다. 이에 숙첨이 말한다.

"세분 말씀이 다 일리가 있으나,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보건데 초군은 머지않아 물러갈 것입니다."

한참 의논하고 있는데 초군이 이미 코앞까지 당도했다는 파발이 들어왔다.

이에 숙첨은 대담무쌍하게 성문을 활짝 열었다. 백성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거리를 왕래하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에 초군의 선봉인 투어강은 깜짝 놀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자원을 기다렸다. 보고를 받은 자원이 나아가 살펴보자, 투어강의 보고와는 달리, 성위에는 정기가 정숙하고 무장한 군사들이 숲처럼 늘어서 있었다. 자원이 이를 보고 찬탄한다.

"정나라엔 훌륭한 신하가 세사람 있다더니 그들의 계책은 참으로 측량할 수 없구나. 우선 정나라의 허실부터 탐지한 후에 공격해야겠다."

그러나 다음날, 정나라와 동맹한 제나라에서 구원군이 온다는 첩보가 왔다. 이에 자원은 감히 정성을 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제후가 우리의 돌아갈 길을 끊으면 우리는 앞뒤로 적군 속에 들고 만다. 내 이번에 정나라를 쳐서 정성 대로까지 이르렀은 즉,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는 군사들에게 함매를 물리고 말의 방울들을 모두 떼어버리게 한 후, 조용히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그날 밤, 초군은 소리없이 정성을 떠났다. 그들은 정군의 추격을 당할까 두려워 군막도 걷지 않고 많은 기를 꽂아둔 채로 달아났다.

이렇게 정나라의 숙첨의 공성계에 의해 초군은 계략이 있을까 두려워 공격을 유보하고 있었고, 그 동안 원군이 도착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제갈량전(諸葛亮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제갈량이 촉나라 군대를 양평관에 주둔시키고, 대장군 위연(魏延)과 왕평(王平) 등으로 하여금 위(魏)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할 때의 일이다. 군대를 모두 다른 곳으로 보냈기 때문에 제갈량이 주둔하고 있는 성에는 병들고 약한 일부의 병사들만 남아 있었다.

이때 위의 대도독 사마의(司馬懿)가 1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성으로 쳐들어 왔다. 이 소식을 들은 제갈량은 군사들로 하여금 성 안의 길목을 지키게 하고, 성문을 활짝 열어둔 채 20여 명의 군사를 백성들로 꾸며 청소를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성 밖에서 눈에 잘 띄는 적루(敵樓)의 난간에 기대앉아 웃음 띤 얼굴로 한가롭게 거문고를 뜯었다.

대군이 몰려와도 아무 일 없는 듯 청소를 하고 있는 백성들과 거문고를 뜯고 있는 제갈량을 본 사마의는 제갈량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몰라 군사를 거두고 물러가 버렸다.

《삼국지연의》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제갈량이 거문고를 뜯어 사마의를 물리쳤다는 탄금주적(彈琴走敵)과 뜻이 같다. 거문고를 울려 적을 쫓아냈다는 뜻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空城計(공성계) | 空城之計(공성지계) |

高山流水 (고산유수)

高山流水(고산유수)

높은 산과 흐르는 물


자연, 산[mountain], 물[water]

山, 水

鼓盆之痛 (고분지통)

鼓盆之痛(고분지통)

분을 두들긴 쓰라림이란 뜻으로 아내가 죽은 슬픔을 말함


관련 한자어

참조어

鼓盆之歎(고분지탄) | 鼓盆之嘆(고분지탄) | 天崩之痛(천붕지통) |

鼓腹擊壤 (고복격양)

鼓腹擊壤(고복격양)

鼓 두드릴 고 | 腹 배 복 | 擊 부딪칠 격 | 壤 흙 양 |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면서 박자를 맞춰 흥겹게 노래 부른다는 말로 太平聖代(태평성대)라는 뜻.


鼓腹은 부른 배를 두드리다 라는 뜻이다. 壤은 본시 나무로 만든 신발모양의 놀이 도구이며, 30-40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것을 서로 맞치는 놀이를 격양(擊壤)이라 했다. 따라서 鼓腹擊壤은 부른 두드리며 양치기 놀이를 하는 것 인데, 이는 곧 太平聖代(태평성대)를 상징한다.

聖天子(성천자)로까지 불리는 堯(요)임금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지 50년이 지난 어느 날 微服(미복)을 걸치고 거리에 나섰다. 세상이 정말로 잘 다스려지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요임금이 큰 거리에 이르렀을 때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놀면서 요임금의 덕을 찬양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그대의 덕택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임금님의 정하심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요임금은 흐뭇해진 기분에 미소를 짓다가 불현듯 누가 시킨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게다가 노인들의 생활이 궁금하여 마을 끝까지 걸어가 보았다. 그러자 저쪽에 한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노인은 입에 든 음식을 우물거리면서 배를 두드리고(鼓腹) 땅을 쳐(擊壤) 박자를 맞추면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요임금이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노라
우물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노라
임금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 있단 말인가.

요임금의 눈은 비로소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백성들이 아무런 불안도 없이 정치의 힘따위는 잊어버리고 사는 것, 이야말로 요임금이 목표로 삼은 정치였던 것이다.

[출전]
십팔사략(十八史略)

高餠 (고병)

高餠(고병)

異名: 高饼(Gāo Bǐng)


한시

步虛詞(보허사)

高棅 (고병, 1350~1413)

高棅(고병, 1350~1413)

異名: 高棅(Gāo Bǐng), 호 만사, 자 언회, 일명 정례
국적: 중국 명
활동분야: 시, 미술
출생지: 중국 푸젠성 창러
주요저서: 《소대집(嘯臺集)》(20권), 《수천청기집(水天淸氣集)》(14권)


중국 명나라 초기의 시인. 시(詩)는 물론 서화(書畵)에도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고, 민중 십재자(閩中十才子:福建省의 十才士)의 한 사람이다. 당시(唐詩)를 초(初)·성(盛)·중(中)·만(晩)의 4기로 분류한 것으로 유명하며, 저서로 《소대집(嘯臺集)》,《수천청기집(水天淸氣集)》등이 있다.

자(字) 언회(彦恢), 호(號) 만사(漫士). 일명 정례(廷禮). 푸젠성[福建省] 창러[長樂] 출신. 벼슬은 한림원(翰林院) 대조(待詔)·전적(典籍)을 지냈다. 시(詩)는 물론 서화(書畵)에도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고, 민중십재자(閩中十才子:福建省의 十才士)의 한 사람이다.

당시(唐詩)를 초(初)·성(盛)·중(中)·만(晩)의 4기로 분류한 것으로 유명하며, 저서로 《소대집(嘯臺集)》(20권), 《수천청기집(水天淸氣集)》(14권)이 전하고, 《당시품휘(唐詩品彙)》 《당시정성(唐詩正聲)》을 편찬하였다.

枯木生花 (고목생화)

枯木生花(고목생화)

마른 아무에 꽃이 핀다는 뜻. 곤궁한 사람이 크게 행운을 얻는다는 말


꽃[flower] | 식물 | 花 | 나무 | 木 | 곤궁 | 행운

公明正大 (공명정대)

公明正大(공명정대)

공변되고, 밝고, 바르고, 큼. 곧, 하는 일이나 태도가 떳떳하고 정당함.

藁網捉虎 (고망착호)

藁網捉虎(고망착호)

새끼를 가지고 호랑이를 잡는다는 말. 어리석은 계책과 보잘 것없는 것으로 뜻밖에 큰 일을 이룸을 뜻함.

孤立無依 (고립무의)

孤立無依(고립무의)

孤立无依(gū lì wú yī)

孤 외로울 고│立 설 립(입)│無 없을 무│依 의지할 의


외롭고 의지(依支)할 데 없음


관련어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유의어)

進退維谷(진퇴유곡)│進退兩難(진퇴양난)│四顧無親(사고무친)│四顧無人(사고무인)│無援孤立(무원고립)│孤城落日(고성낙일)│孤立無援(고립무원)


Tag

마음│외로움

高麗公事三日 (고려공사삼일)

高麗公事三日 (고려공사삼일)

고려의 정령(精靈)이 사흘 만에 바뀐다는 뜻으로 착수한 일이 자주 바뀜을 비유한 말

孤立無援 (고립무원)

孤立無援(고립무원)

孤 외로울 고 | 立 설 립(입), 자리 위 | 無 없을 무 | 援 도울 원 |

고립(孤立)되어 도움을 받을 데가 없음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四顧無親(사고무친) | 四顧無人(사고무인) | 無援孤立(무원고립) | 孤城落日(고성낙일) | 孤立無依(고립무의) |

膏粱珍味 (고량진미)

膏粱珍味(고량진미)

살찐 고기와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

穀梁俶 (곡량숙)

穀梁俶(곡량숙)


春秋穀梁傳(춘추곡량전)

高臺廣室 (고대광실)

高臺廣室(고대광실)

높은 대에 있는 넓은 집. 매우 큰 집.

曲突徙薪 (곡돌사신)

曲突徙薪(곡돌사신)

曲 굽을 곡 | 突 굴뚝 돌 | 徙 옮길 사 | 薪 땔나무 신 |

준비를 철저히 하여 화근을 미연에 방지함.

한서(漢書) 곽광(藿光)전의 이야기. 한나라 선제(宣帝) 때, 황후의 부친인 곽씨 일가가 모반을 꾀하였다. 선제는 곽씨 일가를 멸하고, 그들을 진압한 사람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을 미리 제거하라고 간언하였던 서복(徐福)이라는 사람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한 신하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선제에게 불공평함을 간언하였다.

옛날, 한 나그네가 어느 집을 찾아 왔다가, 그 집의 굴뚝이 똑바로 서있어서 불꽃이 위로 곧장 치솟는 것과 아궁이 옆에는 땔감이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그네는 주인에게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땔감은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이 집에 정말 불이 났습니다만, 이웃 사람들의 도움으로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주인은 술자리를 마련하여 이웃 사람들을 초대하였는데, 주인에게 충고했던 그 나그네는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누군가가 집주인에게 '그 나그네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술자리도 필요없을 것이며, 불도 나지 않았을 것이요. 그 나그네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였답니다.

古今獨步 (고금독보)

古今獨步(고금독보)

예나 현재를 통하여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음

孤軍奮鬪 (고군분투)

孤軍奮鬪(고군분투)

수가 적고 도움이 없는 약한 군대가 강한 적과 용감하게 싸움. 적은 인원과 약한 힘으로, 남의 도움도 없이 힘에 겨운 일을 악착스럽게 함

股肱之臣 (고굉지신)

股肱之臣(고굉지신)

팔다리와 같이 믿는 보필의 신하. 임금이 가장 믿고 중히 여기는 신하

曲高和寡 (곡고화과, qǔgāohèguǎ)

曲高和寡(곡고화과)

曲高和寡(qǔgāohèguǎ)

曲 굽을 곡 | 高 높을 고 | 和 화할 화 | 寡 적을 과 |


곡이 높으면 화답하는 사람이 적다는 뜻으로, 사람의 재능이 너무 높으면 따르는 무리들이 적어진다는 말


춘추전국시대 말엽 초(楚)나라의 정치가 굴원(屈原)과 더불어 대표적인 문인으로 손꼽히던 송옥(宋玉:굴원의 제자)은 문장가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의 문장은 난해하여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그의 글을 칭찬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때문에 초왕(楚王)은 송옥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대체 어찌하여 경(卿)의 문장을 따르는 사람이 없는 것이오?” 송옥은 초왕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가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길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아주 쉬운 통속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위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여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조금 수준이 있는 노래를 부르자 그를 따라 노래 부르는 사람이 훨씬 적어졌습니다.

다시 더 어려운 노래를 부르자, 불과 10여 명만이 따라 불렀습니다. 나중에 아주 어려운 노래를 부르자 두세 명만이 따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봉황(鳳凰)은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구름 위를 나는데, 동네 울타리를 날아다니는 참새가 어찌 하늘의 높음을 알겠으며, 곤(鯤)이라는 큰 물고기를 어항 속에 사는 작은 물고기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는 새 가운데만 봉황이 있고, 물고기 중에만 곤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선비 중에도 이런 경우가 있지 않겠습니까?”

곤은 《장자(莊子)》 〈소요유편(逍遙遊篇)〉에 나오는 상상의 큰 물고기로, '북양에 물고기가 사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몇천 리가 되는 지 알 수가 없다[北溟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之幾千里]'라 했다.


관련 한자어

鳳凰 관련 고사성어

朝陽鳳凰(조양봉황) 화제(畵題)로서 아침 해에 봉황(鳳凰)을 그린 것

鷄棲鳳凰食(계서봉황식) 닭집에서 봉황(鳳凰)이 함께 살면서 모이를 먹는다는 뜻으로, 충신(忠臣)이 천(賤)한 죄인(罪人)들과 함께 하는 삶을 비유(比喩)해 이르는 말

蝶粉蜂黃(접분봉황) 나비 날개의 흰 가루와 벌이 누른 빛이란 뜻으로, ①나비가 교미(交尾)하면 그 가루를 잃고, 벌이 교미하면 그 누른빛이 스러진다는 말 ②당(唐)나라 궁인(宮人)이 하던 단장(丹粧)의 이름

鳳鳴朝陽(봉명조양) '봉황(鳳凰)이 산의 동쪽에서 운다'는 뜻으로, 천하(天下)가 태평(太平)할 조짐(兆朕), 뛰어난 행위(行爲)를 칭찬(稱讚)하는 말

兩鳳齊飛(양봉제비) 두 마리의 봉황(鳳凰)이 나란히 날아간다는 뜻으로, 형제(兄弟)가 함께 영달함의 비유(比喩)

臥龍鳳雛(와룡봉추) 누운 용과 봉황(鳳凰)의 새끼라는 뜻으로, 누운 용은 풍운을 만나 하늘로 올라 가는 힘을 가지고 있고, 봉황(鳳凰)의 새끼는 장차 자라서 반드시 봉황(鳳凰)이 되므로, 때를 기다리는 호걸(豪傑)을 비유

騰蛟起鳳(등교기봉) 뛰어오르는 도롱뇽과 날아오르는 봉황(鳳凰)이라는 뜻으로, 재능(才能)이 많은 사람의 비유(比喩)

伏龍鳳雛(복룡봉추) 엎드린 용과 봉황(鳳凰)의 새끼라는 뜻으로, 엎드려 있는 용이란 제갈공명(諸葛孔明)을 가리키고, 봉왕의 새끼란 방사원(龐士元)을 이름인 데, 아직 세상(世上)에 알려지지 않은 특출(特出)한 인물(人物)을 비유

鳳麟芝蘭(봉린지란) 봉황(鳳凰), 기린(麒麟)과 같이 잘난 남자(男子)와 지초(芝草), 난초(蘭草)와 같이 예쁜 여자(女子)라는 뜻으로, 젊은 남녀(男女)의 아름다움을 형용(形容)하는 말

鳳鳥不至(봉조부지) 봉황(鳳凰)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뜻으로, 세상(世上)에 聖君(성군)이 나타나지 않음을 한탄(恨歎)하는 말

龍瞳鳳頸(용동봉경) 용의 눈동자와 봉황(鳳凰)의 목이라는 뜻으로, 매우 잘 생긴 귀인(貴人)의 얼굴을 형용(形容)해 이르는 말

呱呱之聲 (고고지성)

呱呱之聲(고고지성)

아이가 처음 나면서 우는 소리

高啓 (고계)

高啓(고계)

異名: 高启(Gāo Qǐ), 호 청구자, 자 계적
국적: 중국
활동분야: 시
출생지: 중국 쑤저우
주요저서: 《고청구시집》(19권)
주요작품: 《청구자가》 《심호은군》


중국의 원말(元末)·명초(明初)의 시인. 근체시(近體詩)에서는 주로 강남의 수향(水鄕:강·호수 등 물이 많은 지방)의 풍물을 담백하게 노래했고, 고체(古體)에서는 역사나 전설에서 취재한 낭만을 노래하였다. 대표작인《청구자가(靑邱子歌)》는 분방한 환상을 엮어 나가면서 시인의 사명을 노래한, 중국문학사상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자 계적(季迪), 호 청구자(靑邱子). 쑤저우[蘇州] 출생. 생애의 대부분을 원나라 말기의 내란시대에 보냈으며, 명나라의 통일 후 잠시 난징[南京]에서 취직한 외에는 쑤저우에서 소지주(小地主)로서 생활하였다. 명태조(明太祖)의 공신배제정책(功臣排除政策)의 여파로 39세에 살해되었다. 전원생활을 사랑하는 자유인이었으며, 원송(元宋) 이후의 중국에 대두한 시민층의 한 전형이었다.

그의 시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싱싱하고 경쾌하며 또 평이하다. 근체시(近體詩)에서는 주로 강남의 수향(水鄕:강·호수 등 물이 많은 지방)의 풍물을 담백하게 노래했고, 고체(古體)에서는 역사나 전설에서 취재한 낭만을 노래하였다.

대표작인 《청구자가(靑邱子歌)》는 분방한 환상을 엮어 나가면서 시인의 사명을 노래한, 중국문학사상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고소잡영(姑蘇雜詠)》(132수)은 유서 깊은 고도(古都) 쑤저우의 명승고적에 붙여서 쓴 시를 모은 것으로, 사실(史實)과 전설과 자연미와 환상을 섞어 짠 작품이다.

이 밖에 《고청구시집(高靑邱詩集)》(19권)과 사집(詞集)인 《구현집(扣舷集)》(1권)이 전한다. 《고청구시집》에 실려 있는 대표작의 하나인 《심호은군(尋胡隱君)》에 그의 시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渡水復渡水 도수부도수
看花還看花 간화환간화
春風江上路 춘풍강상로
不覺到君家 불각도군가

물을 건너고 또 물을 건너
꽃을 보며 다시 또 바라보면서
봄바람 부는 강가 길을 걸어가노라니
어느새 그대 집에 다다랐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