會者定離 (회자정리)

會者定離(회자정리)

會 모일 회 | 者 놈 자 | 定 정할 정/이마 정 | 離 떠날 리(이) | 붙을 려(여), 교룡 치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마련이라는 말로, 인생(人生)의 무상(無常)함을 인간(人間)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이별(離別)의 아쉬움을 일컫는 말

출전: 유교경(遺敎經)


관련 한자어

유의어

生者必滅(생자필멸) | 無常轉變(무상전변)

상대어

去者必返(거자필반)


한탄 | 불교 | 유교경 | 遺敎經 |

膾炙人口 (회자인구)

膾炙人口(회자인구)

'회자'란 '고기에 회친 것과 구운 것'이란 뜻으로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말한다. 즉, 좋은 글귀가 여러 사람들에게 자주 인용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

橫說竪說 (횡설수설)

橫說竪說(횡설수설)

되는대로 조리가 없는 말을 마구 지껄이는 것

繪事後素 (회사후소)

繪事後素(회사후소)

繪 그림 회 | 事 일 사 | 後 뒤 후, 임금 후 | 素 본디 소, 흴 소 |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손질한 이후에 채색을 한다는 뜻으로, ①그림을 그릴 때 흰색을 제일 나중에 칠하여 딴 색을 한층 더 선명(鮮明)하게 함 ②사람은 좋은 바탕이 있은 뒤에 문식(文飾)을 더해야 함을 비유(比喩ㆍ譬喩)하여 이르는 말

[출전]
논어 팔일편

畵虎類狗 (화호유구)

畵虎類狗(화호유구)

畵 그릴 화 | 虎 범 호 | 類 같을 류 | 狗 개 구 |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를 그린 꼴이 됨.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시기,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은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이라는 경박한 조카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계형자엄돈서(誡兄子嚴敦書)'라는 편지를 썼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장점이나 단점을 비난한다거나, 국가의 대사(大事)를 함부로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 한다. 나는 사람됨이 후덕하고 신중하며 청렴했던 산도현(山都縣)의 현령 용백고(龍伯高)와 의협심이 강한 월기사마(越騎司馬) 두계량(杜季良)을 존경하고 있지만, 너희들이 그들을 본받기는 바라지 않는다. 용백고처럼 되는지 못한다하더라도 조정의 신임을 받는 관리는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너희들이 두계량을 본받는다면,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천하의 경박한 사람이 될까 두렵다. 이는 마치 호랑이를 그리려다 도리어 개를 그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畵虎不成反類狗者也].

畵虎類狗란 서투른 솜씨로 큰일을 하려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침을 비유한 말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각곡류목(刻鵠類鶩) | 화룡유구(畵龍類狗) | 화호불성반류구(畵虎不成反類狗) |

和風暖陽 (화풍난양)

和風暖陽(화풍난양)

화창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 곧 좋은 날씨

黃宗羲 (황종희, 1610~1695)

황종희(黃宗羲, 1610~1695)

중국 명말·청초의 사상가. 박람(博覽)과 실증(實證)을 존중하고, 청나라 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명대의 철학사(哲學史)라고 할 《명유학안(明儒學案)》, 군주 독재제도를 통렬히 비판한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은 명저(名著)로 알려졌다.


호 남뢰(南雷)·이주(梨洲). 자 태충(太沖). 저장성(浙江省) 위야오[餘姚]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황존소(黃尊素)는 동림당(東林黨)의 명사로, 동림당 탄압 때 옥사하였다. 황종희는 숭정연간(崇禎年間:1628∼1644)에 당시의 문학적 결사 '복사(復社)'에 가맹하여 환관파(宦官派)를 배척하는 정치운동에 참가한 일도 있었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고향의 젊은이 수백 명을 모아 의용군을 조직하였고, 또한 명나라 유왕(遺王)인 노왕(魯王)을 따라 만주(滿洲)에서 청군(淸軍)에 저항하였다. 그뒤 고향에 돌아가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청나라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고 평생토록 이민족의 군주를 섬기지 않았으며, 명사(明史)의 편찬시에는 아들과 제자를 명사관(明史館)에 보내어 고국의 역사를 남기려고 힘썼다.

그의 학문은 박람(博覽)과 실증(實證)을 존중하고, 청나라 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는데, 명대(明代)의 철학사(哲學史)라고 할 《명유학안(明儒學案)》, 군주 독재제도를 통렬히 비판한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은 명저(名著)로 알려졌다. 특히 《명이대방록》은 청말(淸末) 혁명사상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서

明夷待訪錄(명이대방록)

畵中之餠 (화중지병)

畵中之餠(화중지병)

그림의 떡.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畵餠(화병) | 畵餠充飢(화병충기) | 畵中之餠(화중지병) |

黃庭堅 (황정견, 1045~1105)

황정견 [黃庭堅, 1045~1105]

異名: 호 산곡, 자 노직
국적: 중국 송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홍주 분녕
주요저서: 《예장 황선생문집》


고전주의적인 작풍을 지닌 중국 송나라의 시인 겸 화가. 지방관리를 역임하다 중앙관직에 취임, 교서랑(校書郞)이 되어 국사편찬(國史編纂)에 종사했다. 학식에 의한 전고(典故)와, 수련을 거듭한 조사(措辭)를 특색으로 한다.


자 노직(魯直), 호 산곡(山谷). 홍주(洪州:江西省) 분녕(分寧:修水縣) 출생. 1066년 진사(進士)에 급제한 후 국자감 교수(國子監敎授)를 거쳐 각지의 지방관리를 역임하였다. 1086년에 비로소 중앙관직에 취임, 교서랑(校書郞)이 되어 국사편찬(國史編纂)에 종사하였다. 1095년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이 부활됨과 동시에, 구법당(舊法黨)인 그는 신법을 비난하였다는 죄목으로 검주(黔州:四川省 彭水縣)에 유배되었다. 1100년에 사면 복직되었으나, 1102년에 다시 무고를 당하고 의주(宜州:廣西省宜山縣)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시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았으며, 스승인 소식(蘇軾:東坡)과 나란히 송대(宋代)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그의 시는 고전주의적인 작풍을 지녔으며, 학식에 의한 전고(典故)와, 수련을 거듭한 조사(措辭)를 특색으로 한다. 강서파(江西派)의 시조로 꼽히며, 《예장 황선생문집(豫章黃先生文集)》(30권)이 있다. 서(書)에서는 채양(蔡襄) ·소식 ·미불(米芾)과 함께 북송(北宋)의 4대가(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는 단정하지만 일종의 억양(抑揚)을 지녔으며, 활력있는 행초서(行草書)에 뛰어났다.

和而不同 (화이부동)

和而不同(화이부동)

남과 화목하게 지내지만 스스로 원칙을 굽히지 말자

교수신문에서 선정한 2009년 희망의 사자성어


2009년 | 희망의 사자성어 | 교수신문

花容月態 (화용월태, huāróngyuèmào)

花容月態(화용월태)

花容月貌(huāróngyuèmào)

花 꽃 화 | 容 얼굴 용 | 月 달 월 | 態 모습 태 |


'꽃다운 얼굴과 달 같은 자태(姿態)'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여자(女子)의 고운 자태(姿態)를 이르는 말

a lovely face and graceful carriage


관련 한자어

유의어

花顔月貌(화안월모) | 朱脣皓齒(주순호치) | 絶世美人(절세미인) | 絶世代美(절세대미) | 絶世佳人(절세가인) | 絶代佳人(절대가인) | 一顧傾城(일고경성) | 月態花容(월태화용) | 萬古絶色(만고절색) | 丹脣皓齒(단순호치) | 國香(국향) | 國色(국색) | 傾城之色(경성지색) | 傾城之美(경성지미) | 傾城(경성) | 傾國之色(경국지색) | 傾國(경국) |


미인

華而不實 (화이부실)

華而不實(화이부실)

華 꽃 화, 빛날 화 | 而 말이을 이, 능히 능 | 不 아닐 부, 아닐 불 | 實 열매 실, 이를 지 |

꽃만 피고, 열매가 없다는 뜻으로, 언행(言行)이 일치(一致)하지 않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Flowery but bears no fruit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5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大夫) 양처보(陽處父)가 위(衛)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魯)나라의 영읍(寗邑)을 지나가게 되었다. 양처보는 그 곳의 한 객점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객점의 주인 영은 양처보의 인물됨에 반하여 그와 함께 갈 것을 결심하였다. 양처보의 동의를 얻은 후, 영은 아내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와 함께 떠났다. 그런데 영은 온(溫) 땅에 이르자 생각을 바꾸어 집으로 돌아왔다.

영의 아내는 매우 이상하게 여겨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다. 이에 영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양처보는 성격이 지나치게 강경하고 편집적인 인물이오. 게다가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은 없으며, 쉽게 남을 불쾌하게 만들어 원망을 많이 사고 있소.[且華而不實,怨之所聚也]. 그를 따라갔다가는 이익을 얻기도 전에 재앙을 당할 것이 두려워 그냥 돌아온 것이오."

양처보는 이로부터 1년 뒤에 조성자(趙成子)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 고사는 《좌씨전》의 '문공(文公) 5년'조에 실려 있다.

또 한(漢)나라의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論衡)》에는 "무릇 사람은 문(文:형식)과 질(質:실질)로 이루어지는데, 사물은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실질적이지 못한 것이 있고, 실질적이지만 화려하지는 못한 것이 있다(夫人有文質乃成, 物有華而不實, 有實而不華者)"라는 구절이 있다. 역시 내실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화이부실은 화려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식물처럼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이 없는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우리나라 속담 가운데 '빛 좋은 개살구'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이다.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畵蛇添足 (화사첨족)

畵蛇添足(화사첨족)

뱀의 발. 뱀을 그리고 발을 그려 넣다. 있어도 쓸모없는 것 또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공연스레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蛇足(사족)이라고도 한다.


楚(초)나라의 令尹(영윤․재상) 昭陽(소양)은 魏(위)나라를 치고 나서 다시 齊(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겁이 난 제나라 왕이 때마침 秦(진)나라의 사신으로 와있던 陳軫(진진)에게 소양의 야심을 꺾어 달라고 부탁했다.

진진은 곧 소양을 찾아가 말했다. “초나라에서는 적군을 격파하고 敵將(적장)을 죽인 자에게 어떤 恩賞(은상)을 내립니까?”

“上柱國(상주국)이란 벼슬을 주고 작위는 上執珪(상집규)에 해당하지요.”

“상주국보다 더 높은 벼슬은 뭡니까.” “오직 영윤이 있을 뿐이오.” “그렇지요. 영윤은 둘일 수가 없지요. 영윤인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겠소. 어떤 사람이 하인들에게 큰 잔에 따른 술을 내렸답니다. 그것은 여럿이 마시기에는 모자라고 혼자서 마시기에는 넉넉했습니다. 하인들은 의논끝에 땅바닥에 뱀을 그려서 가장 먼저 그린 사람이 그 술을 다 마시기로 했지요. 그래서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윽고 한 사람이 ‘내가 뱀을 가장 먼저 그렸다’ 고 외치고는 술잔을 집어들더니 ‘나는 발도 그릴 수 있지’ 하면서 그린 뱀에 발을 덧붙여 그렸답니다.

그러자 그제사 뱀을 다 그린 자가 술잔을 뺏어 마시면서 ‘뱀에 무슨 발이 있어. 자네가 그린 발 달린 뱀은 뱀이 아니야’ 했다는 군요. 당신은 위나라를 치고 제나라를 두려워하게 만들어 이미 충분히 공을 세웠소. 영윤인 당신이 더이상 받을 官爵(관작)은 없소. 더 욕심을 내다가 목숨이라도 잃는다면 뱀의 발을 그렸다가 술잔을 빼앗긴 자와 무엇이 다르겠소.” 진진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던 소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군사를 거두었다.

花無十日紅 (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

花 꽃 화 | 無 없을 무 | 十 열 십 | 日 날 일 | 紅 붉을 홍, 상복 공 |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①'한 번 성한 것이 얼마 못 가서 반드시 쇠하여짐'을 이르는 말 ②권세(權勢)나 세력(勢力)의 성(盛)함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말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權不十年(권불십년) | 物極必反(물극필반) | 물장즉노(物壯則老) 만물은 장성했다가는 쇠퇴하기 마련이다 |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달도 차면 기운다.

畵龍點睛 (화룡점정, huàlóngdiǎnjīng)

畵龍點睛(화룡점정)

畵龙点睛(huà lóng diǎn jīng)

그림 화 | 용 룡 | 점찍을 점 | 눈동자 정


그림을 그린 뒤 눈동자에 점을 찍다. 사물의 가장 요긴한 곳 또는 무슨 일을 함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끝내어 완성시킴을 이르는 말.


南北朝(남북조)시대 梁(양)나라의 張僧繇(장승요)는 東晋(동진)의 顧愷之(고개지), 吳(오)의 陸探微(육탐미)와 더불어 남북조 3대가의 한사람으로 꼽힐 만큼 유명한 화가다.

장승요는 모든 사물을 살아있는 것처럼 그려냈는데 특히 그의 걸작중에는 佛畵(불화)가 많다.어느날 그는 安樂寺(안락사)란 절의 주지로부터 용그림을 벽화로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주지의 끈덕진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장승요는 마침내 절간의 벽에 네마리의 용을 그렸다. 용들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치솟아 오를 듯 생동감이 넘쳐흘러 그림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사람들이 용의 눈에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다가 깜빡했는지, 아니면 무슨 깊은 뜻이라도 있는지 사람들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승요는 그 이유를 따지는 물음에 시달리다가 겨우 입을 뗐다.

"눈동자는 그려 넣을 수가 없소. 그것을 그려 넣으면 용은 당장 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만단 말이오."

이 말을 사람들이 믿을 턱이 있는가.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는 독촉을 견디다 못한 장승요는 마침내 먹물을 푹 찍은 붓을 두마리 용의 눈에 갖다 대고 점을 찍었다.

이윽고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번쩍하더니 벽이 무너지고 눈동자를 그려 넣은 두마리의 용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 버렸다.

荒唐無稽 (황당무계)

荒唐無稽(황당무계)

말이나 행동이 너무나 허황되어 믿을 수가 없음.

桓寬 (환관)

桓寬(환관)


桓寬(환관) 관련 작품

鹽鐵論(염철론)

換骨奪胎 (환골탈태)

換骨奪胎(환골탈태)

뼈대를 바꿔 끼고 태를 달리 쓰다.

원래는 古人(고인)이 지은 詩文(시문)의 뜻을 취해 어구나 結構(결구)만을 바꾸어 자기 작품인 것처럼 꾸미는 것을 가리켰다. 요즘은 용모나 차림새가 몰라보게 좋아졌을 때 많이 쓰는 표현이 되었다.

중국 書藝史(서예사)에서 蘇軾(소식) 米(미불) 蔡襄(채양)과 더불어 宋代四大家(송대사대가)를 이룬 黃庭堅(황정견)은 소식(蘇東坡․소동파)과 함께 北宋(북송)을 대표하는 시인이기도 했다. 황정견은 杜甫(두보)의 詩(시)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두보의 붓에 걸리면 흔해빠진 경치도 금세 아름다운 풍광으로 변하는데 이것은 마치 연금술사가 한 알의 靈丹(영단)을 넣어서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

그가 말한 영단이란 시인의 詩想(시상)을 가리키지만 道家(도가)에서는 이 영단을 먹여서 보통사람의 뼈를 仙骨(선골)로 바꾸는 것을 「換骨(환골)」이라고 한다. 「奪胎(탈태)」란 시인의 시상이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胎內(태내)에 있는 것과 같으므로 그 태를 나의 것으로 삼아 자기의 詩境(시경)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황정견은 이렇게 말한다.

『시의 뜻은 무궁하지만 사람에게 주어진 재능에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는 재주로 무궁한 뜻을 좇는다는 것은 陶淵明(도연명)이나 두보라 할지라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先人(선인)의 작품에서 뜻을 바꾸지 않고 말만 바꾸어 만드는 것을 「환골법」이라 하고 그 뜻을 본받아 그것을 조금 바꾸어 표현하는 것을 「탈태법」이라고 한다』

忽顯忽沒 (홀현홀몰)

忽顯忽沒(홀현홀몰)

忽 갑자기 홀 | 顯 나타날 현 | 忽 갑자기 홀 | 沒 빠질 몰 |

문득 나타났다가 문득 사라짐.

皓齒丹脣 (호치단순)

皓齒丹脣(호치단순)

皓 흴 호 | 齒 이 치 | 丹 붉을 단, 정성스러울 란(난) | 脣 입술 순, 꼭 맞을 민 |

붉은 입술과 흰 이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여자(女子)를 이르는 말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丹脣皓齒(단순호치) | 傾國之色(경국지색) |

護疾忌醫 (호질기의, hùjíjìyī)

護疾忌醫(호질기의)

护疾忌医(hù jí jì yī)

護 보호할 호 | 疾 병 질 | 忌 꺼릴 기 | 醫 의원 의 |


'병을 숨겨 의원에게 보이기를 꺼린다'라는 뜻으로, 잘못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


휘질기의(諱疾忌醫)와 같은 뜻이다. 이 말은 중국 전국시대의 명의로 잘 알려진 편작(扁鵲)과 채(蔡)나라 환공(桓公)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편작이 환공을 보고 피부에 병이 들었으니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심해질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환공은 자신은 병이 없어 치료할 필요가 없다며 듣지 않았다.

열흘 뒤 편작은 다시 환공을 배알하여 이번에는 병이 살 속까지 퍼져서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더 심해질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환공은 역시 이를 무시하였다. 다시 열흘 뒤 편작은 환공에게 병이 내장까지 미쳤으므로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경고하였으나 환공은 그 충고를 귀 기울여 듣기는 커녕 화를 내며 무시하였다.

다시 열흘 뒤 환공을 찾아온 편작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돌아가버렸다. 환공이 사람을 보내 이유를 묻자 편작은 병이 이미 골수까지 스며들어 고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돌아온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로부터 닷새 후 환공은 온몸에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그때서야 서둘러 편작을 데려오라고 사람을 보냈으나 편작은 이미 떠난 뒤였다.

이 고사는 《한비자(韓非子)》의 〈유로(喩老)〉편과 《사기(史記)》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 실려 있다. 또 북송(北宋)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는 《통서(通書)》에서 "요즘 사람들은 잘못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바로잡아 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병을 숨기면서 의원에게 보이지 않아 몸을 망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今人有過, 不喜人規, 如護疾而忌醫, 寧滅其身而無悟也)"라고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휘질기의' 또는 '호질기의'는 병을 숨기고 고치려고 하지 않아 결국 자신의 몸을 망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이 있는데도 남의 충고를 듣지 않으려 하는 그릇된 태도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병을 숨기고 의사를 속이듯 잘못이 있음에도 남의 충고를 멀리한다는 평가로 교수신문에서 선정한 2008년 올해의 사자성어에 오름


동의어

諱疾忌醫(휘질기의) 諱 숨길 휘, 꺼릴 휘


2008년 | 올해의 사자성어 | 교수신문

胡蝶之夢 (호접지몽, húdiézhīmèng)

胡蝶之夢(호접지몽)

胡蝶之梦(húdiézhīmèng)

胡 되 호,오랑캐 이름 호,수염 호 | 蝶 나비 접 | 之 갈 지 | 夢 꿈 몽 |


장자(莊子)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닌 꿈으로, ①현실(現實)과 꿈의 구별(區別)이 안 되는 것 ②인생(人生)의 덧없음의 비유(比喩)


‘호접지몽(胡蝶之夢)’은 ‘물아(物我)의 구별을 잊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기는데, 나비가 장자인지 장자가 나비인지 분간하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약해서 ‘호접몽(胡蝶夢)’이라고도 한다.

장자는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이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불안한 시대를 살았던 그는 인간의 참 자유가 무엇인지를 사유하게 되었고, 그 자유를 추구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그 결과 물(物)의 시비(是非)·선악(善惡)·미추(美醜)·빈부(貧富)·화복(禍福) 등을 구분짓는 일이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고, 만물은 결국 하나의 세계로 귀결된다[物我一體]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하였다. 호접지몽이라는 고사에 이러한 생각이 비유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장자》의 〈제물론편(齊物論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자(莊子)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그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떠 보니, 자신은 틀림없이 인간 장주(莊周)가 아닌가. 이는 대체 장주인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장자가 말했다. "현실의 모습으로 얘기하자면 나와 나비 사이에는 확실히 구별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물(物)의 변화, 현상계(現象界)에 있어서의 한 때의 모습일 뿐이다." 또 장자는, "천지는 나와 나란히 생기고, 만물은 나와 하나다." 라고 말한다.

그와 같은 만물 일체의 절대 경지에서 말한다면, 장주도 나비도, 꿈도 현실도, 생(生)도 사(死)도 구별이 없다. 보이는 것은 만물의 변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피아(彼我)의 구별을 잊어버리는 것, 혹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비유해 호접지몽이라 한다.

오늘날에는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해서 쓰이기도 한다.

[유래]
莊子(장자):齊物論(제물론) |


胡蝶(호접,húdié) 나비. 현대 한어 규범 자형은 "蝴蝶"임.

蝴蝶(호접,húdié) 나비


참조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胡蝶夢(호접몽) | 主客一體(주객일체) | 蝶夢(접몽) | 莊周之夢(장주지몽) | 物心一如(물심일여) |


莊子, 장자, 莊子:齊物論, 장자:제물론 |

昏定晨省 (혼정신성)

昏定晨省(혼정신성)

昏定晨省(hūndìngchénxǐng)

昏 어두울 혼, 힘쓸 민 | 定 정할 정, 이마 정 | 晨 새벽 신 | 省 살필 성, 덜 생 |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問安)을 드린다는 뜻으로, 자식(子息)이 아침저녁으로 부모(父母)의 안부(安否)를 물어서 살핌을 이르는 말


《예기(禮記)》의 '곡례편(曲禮篇)'에 나오는 말로 ‘밤에 잘 때 부모의 침소에 가서 밤새 안녕하시기를 여쭙는다.’는 뜻의 ‘혼정(昏定)’과 ‘아침 일찍 일어나 부모의 침소에 가서 밤새의 안후(安候)를 살핀다.’는 뜻의 ‘신성(晨省)’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부모에 대한 공경을 바탕으로 한 행위가 곧 효, 또는 효행이다. 이 효사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륜의 가장 으뜸되는 덕목으로 중시되었다. 즉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라 하여 부모를 봉양하고, 공경하며, 복종하고, 조상에게 봉제사(奉祭祀)하는 일이 의무화되면서 효사상이 사회규범으로 굳어졌다.

공자는 이러한 효에 대해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하여 확고히 정착시켰다. 이 유교적인 효사상은 맹자에 와서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의무가 더욱 강조되었고, 한대(漢代)에 이르러 《효경(孝經)》에서 도덕의 근원, 우주의 원리로서 명문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효사상이 가장 중요한 도덕규범으로 정착되자 자연히 효에 대한 행동상의 규범도 많아지게 되었다. 일종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 먼저 부모를 대하는 얼굴가짐을 중시했다. 늘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부모를 섬겨 편안하게 해드려야 한다는 것으로,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 하여 ‘색난(色難)’이라 하였다. 또 부모의 잘못을 보면 간언은 하되 뜻은 거역하지 않으며, 살아 계실 때에는 정성으로 모시고 돌아가시면 3년간 부모의 평소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고 지켜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평소 일상생활 중에서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를테면 저녁에는 잠자리가 어떤지 직접 손을 넣어 확인해보고 아침에는 간밤에 잘 주무셨는지 여쭌 다음 부모의 안색을 주의깊게 살폈으니, 이것이 바로 ‘혼정신성’으로 부모를 모시는 기본 도리였던 것이다.

이 말은 겨울에는 따뜻하게[溫] 여름에는시원하게[淸] 해드리고, 밤에는 이부자리를 펴고[定] 아침에는 문안을 드린다[省]는 뜻의 '온청정성(溫淸定省)'이란 말과 뜻이 통한다. 또 부모를 섬기기는 데,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서늘하게 한다는 뜻의 '동온하청(冬溫夏凊)'이라는 말도 모두 《예기》에 나오는 말로서 그 뜻이 서로 통하는 말이다.

[출전]
예기(禮記)

그 외에 出必告 反必面(출필곡 반필면)이란 말도 있다. 밖으로 나갈 때에는 반드시 부모에게 가는 곳을 아뢰고 밖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반드시 부모를 뵙고 歸家(귀가)했음을 알린다는 뜻이다.

이런 행위는 孝(효)이전에 부모에 대한 예의의 기본이었다. 이것이 지금은 뒤집어져 있다. 밤늦게 혹은 새벽까지 이제나 저제나 하고 자식을 기다리느라 잠을 설치는 부모가 많다. 늦은 사유를 전화로라도 전해왔다면 그렇게 애타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변하고 價値觀(가치관)도 바뀐다. 어제의 正(정)이 오늘은 反(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孝만큼은 절대로 뒤집을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孝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며 仁(인)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先賢(선현)들은 입을 모아 가르쳐 왔다. 退溪 李滉(퇴계 이황)도 孝는 모든 善(선)의 으뜸이라고 했다.

人口(인구)에 膾炙(회자)되어온 효심을 담은 시 하나를 읊어보자.

父兮生我 母兮鞠我 (부혜생아 모혜국아)
哀哀父母 生我구勞 (애애부모 생아구로)
欲報之德 昊天罔極 (욕보지덕 호천망극)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도다
어버이여 나를 낳고 기르느라 애쓰셨도다
그 은덕 갚고자 하건만 하늘 같아 다함이 없도다.

이 시는 明心寶鑑(명심보감) 孝行篇(효행편)에 나오지만 일찍이 공자가 엮은 詩經(시경)에 실려 있는 6개 시구를 재구성해 만든것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冬溫夏凊昏定晨省(동온하정혼정신성) | 出必告反必面(출필고반필면) | 朝夕定省(조석정성) | 定省(정성) | 反哺之孝(반포지효) | 反哺報恩(반포보은) |

紅一點 (홍일점)

紅一點(홍일점)

紅 붉을 홍, 상복 공 | 一 한 일 | 點 점 점, 시들 다 |

푸른 잎 가운데 한 송이의 꽃이 피어 있다는 뜻으로, ①여럿 속에서 오직 하나 이채를 띠는 것 ②또는 많은 남자(男子)들 사이에 끼어 있는 오직 하나 뿐인 여자(女子)

the only woman in the company


송(宋)나라 신종을 섬기면서, 이른 바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만들어 일거에 부국강병의 나라를 이룩해보고자 했다가, 사마광, 구양수, 정이천, 소식 등 유명한 학자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마침내 중도에서 좌절한 사람이 있다. 왕안석(王安石)이라는 이 사람은 그만 번민 끝에 68세를 일기로 하여 세상을 떠났는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드는 문장가(文章家)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 왕안석이 지은 석류시(石榴詩) 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만록총중(萬綠叢中)에 홍일점(紅一點) 있도다.
사람을 움직이게하는 춘색(春色)은 많은들 무엇하리.

온통 녹색이 우거진 속에 피어있는 빨간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과 예쁨은 춘색의 으뜸이라고 추켜세운 내용의 시이다. 여기에 나온말이 '홍일점'이다. 당초에는 식물에 비유했던 것인데 요즈음에는 '많은 남성들 속에 섞인 한 명의 여성' 이란 뜻으로 흔히 쓰이고 있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萬綠叢中紅一點(만록총중홍일점) | 一點紅(일점홍) |

반의어·상대어

靑一點(청일점) |

縞衣玄裳 (호의현상)

縞衣玄裳(호의현상)

縞 명주 호 | 衣 옷 의 | 玄 검을 현 | 裳 치마 상 |

① 흰 옷과 검은 치마. ②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오는 말로 학과 같은 깨끗함.

浩然之氣 (호연지기)

浩然之氣(호연지기)

浩 넓을 호, 술 거를 고 | 然 그럴 연, 불탈 연 | 之 갈 지 | 氣 기운 기, 보낼 희 |

①하늘과 땅 사이에 넘치게 가득찬 넓고도 큰 원기 ②도의(道義)에 근거(根據)를 두고 굽히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바르고 큰 마음 ③공명정대(公明正大)하여 조금도 부끄럼 없는 용기(勇氣) ④사물이나 잡다(雜多)한 일에서 벗어난 자유(自由)로운 마음


孟子(맹자)의 제자 公孫丑(공손추)는 齊(제)나라 사람이었다. 어느날 스승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제나라의 재상이 되시어 도를 행하신다면 제나라를 천하의 覇者(패자)로 만드실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마음을 한번 움직여 보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40이 넘어서부터는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없네."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不動心․(부동심)]은 진정한 용기[勇]가 필요하네. 용기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요체가 되지."

맹자(孟子)는 심중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어떠한 것이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대용(大勇)이라 했다.

"선생님의 부동심과 고자(告子)의 부동심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고자는 제나라의 사상가로 맹자가 性善說(성선설)을 주창한데 반해 성악설을 내세운 사람이다.

"고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했어. 그러니까 신경을 쓰지 않음으로써 부동심을 얻으려고 했다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소극적이지. 그런데 나는 남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네[知言]. 그러니까 고자와 나의 부동심은 다르지. 게다가 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고 있다네."

"그럼 호연지기란 무엇입니까?"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네.지언(知言)이란 편협한 말[詖辭(피사)], 음탕한 말[淫辭(음사)], 간사한 말[邪辭(사사)], 피하는 말[遁辭(둔사)]를 가려낼 수 있는 명(明)을 갖는 것이다. 또 호연지기는 평온하고 너그러운 화기(和氣)를 말하며, 기(氣)는 매우 광대하고 강건하며 올바르고 솔직한 것으로서 이것을 해치지 않도록 기르면, 천지간에 넘치는 우주 자연과 합일하는 경지다. 기는 의(義)와 도(道)를 따라 길러지며 이것을 잃으면 시들고 만다. 이것은 자신 속에 올바른 것을 쌓아 올림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출전]
맹자(孟子)의 공손추편(公孫丑篇)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浩氣(호기) | 正氣(정기) |

胡令能 (호영능)

胡令能(호영능, ?~?)


호영능은 생몰연대가 분명하지 않으며, 당나라 시인의 작품을 망라한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시도 4수뿐이다.


호영능(胡令能) 관련 한시

小兒垂釣(소아수조)

狐疑不決 (호의불결)

狐疑不決(호의불결)

狐 여우 호 | 疑 의심할 의, 안정할 응 | 不 아닐 불, 아닐 부 | 決 결단할 결, 빠를 혈 |

여우가 의심이 많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대하여 의심이 많아 결행(決行)하지 못함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진(晉)나라 때 곽연생(郭緣生)이 지은 술정기(述征記)의 이야기.

맹진(盟津)과 하진(河津)은 모두 황하(黃河)에 있는 나루터이다. 맹진은 지금의 중국 하남성 맹현(孟縣)에 있었으며, 하양도(河陽渡)라고도 하였다. 하진은 중국의 산서성 하진현(河津縣)에 있었다. 이 두 곳은 양자강보다는 좁고, 회하(淮河)나 제수(濟水)보다는 넓었다. 겨울이 되어 얼음이 얼면 두꺼운 곳은 몇 장(丈)에 달했으므로, 거마(車馬)들도 얼음 위로 통과할 수 있어 나룻배보다 편리하였다.

하지만 얼음이 막 얼기 시작할 때에, 사람들은 섣불리 건너지 못하고 먼저 여우들을 건너가게 하였다. 여우는 본시 영리한 동물로서 청각이 매우 뛰어났다. 여우는 얼음 위를 걸으면서도 이상한 소리가 나면 곧 얼음이 갈라지는 것을 예감하고 재빨리 강가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이렇게 여우가 강을 다 건너간 것을 확인하고나서야 안심하고 수레를 출발시켰던 것이다.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은 '이소(離騷)'에서 "머뭇거리고 여우처럼 의심하는 내 마음이여, 스스로 가고파도 갈 수가 없네[心猶豫而狐疑兮, 欲自適而不可]"라고 읊었다.

또 《후한서(後漢書)》의 '유표전(劉表傳)'에 따르면, 원소(袁紹)가 조조(曺操)와 대치하고 있을 때 유표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때, 유표는 여우처럼 의심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한숭(韓嵩)을 조조에게 보내어 허와 실을 살피도록 하였다[表狐疑不斷, 乃遣嵩詣操, 觀望虛實]. 여기서 유래하여 호의불결은 의심이 많아서 어떤 일을 결행하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술정기(述征記) | 이소(離騷) | 후한서(後漢書)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狐疑未決(호의미결)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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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虎視耽耽 (호시탐탐)

虎視耽耽(호시탐탐)

虎视眈眈(hǔshìdāndān)

虎 범 호 | 視 볼 시 | 眈 노려볼 탐, 머리를 내밀고 볼 침 | 眈 노려볼 탐, 머리를 내밀고 볼 침 |

범이 먹이를 노린다는 뜻으로, ①'기회(機會)를 노리며 형세(形勢)를 살핌'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②날카로운 눈으로 가만히 기회(機會)를 노려보고 있는 모양(模樣)

to glare like a tiger ready to pounce on its prey—to eye with hostility; eye covetously

[출전]
역경(易經)

混水摸魚 (혼수모어, húnshuǐmōyú)

混水摸魚(혼수모어)

混水摸鱼(húnshuǐmōyú)

混 혼탁할 혼 | 水 물 수 | 摸 찾을 모 | 魚 물고기 어 |


물을 휘저어 물고기를 잡다. 혼란한 틈을 타서 한몫 보다. 혼란한 틈을 타서 정당하지 못한 이익을 챙기다.


三十六計(삼십육계) 混戰計(혼전계) 제20계. 원문의 풀이글을 보면, "상대방의 내부 혼란에 편승하여 전력이 약화되고, 지휘가 흩어진 것을 이용한다. 이는 저녁이 되면 누구나 집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심정을 조작하는 것이다.[乘其陰亂,利其弱而無主,隨,以向晦入宴息.]"라고 되어있다.

상대방의 내부 갈등을 격화시키거나 약점을 부채질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그 지도자로 하여금 오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 오판을 기화로 승리를 쟁취하는 전략이다.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 三國志演義의 이야기이다. 제갈량은 그 유명한 '출사표'를 던지고 북벌에 나선다. 노장 조운과 장포, 관흥 등의 활약으로 북을 향하여 진격하던 중, 天水에서 姜維(강유)를 만나 고전하게 된다. 제갈량은 강유가 천하의 기재임을 알아보고는 그를 얻기 위해 계략을 꾸민다.

먼저 강유의 어머니가 기현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 제갈량은 위연을 시켜 기현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는 '강유가 오면 그냥 들여보내주라'는 명을 내린다. 한편, 촉군이 기현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강유는 어머니가 걱정되어 한 무리의 군사를 이끌고 기현으로 향한다. 강유와 마주친 위연은 몇 합 싸우다가 패한 체하며 물러났다. 강유는 곧바로 기성(기현)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제갈량은 다시 사로잡은 하후무를 불러다가 말했다.
"지금 강유가 기성을 지키고 있는데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왔다. 부마(하후무)만 보내주면 항복하겠다는 내용이다. 내가 너의 목숨을 살려줄 터이니, 너는 강유를 귀순시킬 수 있겠느냐?"
그러자 하후무는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제갈량이 내어준 말을 타고 영채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길을 몰라 달아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많은 사람들이 도망쳐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하후무가 묻자, 그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기현 백성들이옵니다. 지금 강유는 제갈량에게 성을 바치며 항복했고, 촉장 위연은 불을 지르며 약탈을 하고 있사옵니다. 우리는 그 때문에 집을 버리고 상규로 도망쳐 가는 길이오."
"천수군은 누가 지키고 있느냐?"
"천수성 안에 있는 마태수(마준)이옵니다."
이 말을 듣고 하후무는 천수로 향했다. 또다시 많은 백성들이 도망쳐 오고 있었다. 그들의 말 역시 한결같았다.

천수에 도착한 하후무는 마준에게 강유의 일을 자세히 설명하고, 백성들이 하던 말도 자세히 전했다. 마준이 한탄하며 말했다.
"강유가 배반하고 촉에 귀순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사옵니다."
그러자 좌우에서 말했다.
"그는 도독을 구하려고 그런 말을 하고 거짓 항복했을 것이옵니다."
하후무가 말했다.
"지금 강유가 이미 항복했는데 어찌 거짓이라 하는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촉군이 몰려와 성을 공격했다.

어른거리는 불빛 속에서 강유가 창을 든채 성 밑에서 외쳤다.
"하후도독은 대답하시오!"
하후무와 마준 등은 모두 성위로 나와보았다.
"나는 도독을 위해 항복했는데, 도독은 어째서 앞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소?"
"너는 魏의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 무엇 때문에 촉에 항복했느냐? 무슨 약속을 했다는 것이냐?"
"너는 나에게 촉에 항복하라고 편지를 보내놓고 무슨 소리를 하느냐? 네가 빠져나가려고 나를 끌어들였구나! 나는 촉에 항복하여 上將이 되었다. 어찌 다시 위로 돌아가겠느냐!"
말을 마치자 강유는 촉군을 이끌고 성을 공격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이 강유는 제갈량이 보낸 가짜였다. 밤이 어두워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한편, 제갈량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기성을 공격했다. 기성에서는 식량이 부족해 군사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이에 강유가 성 위에서 바라보니, 위연의 부대가 군량을 수송하고 있었다. 강유는 군사를 이끌고 곧장 군량수레를 기습했다. 군량을 빼앗은 강유가 성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갑자기 장익의 군사가 길을 막아섰다. 두 장수가 싸우고 있는데, 왕평의 군사가 몰려나와 강유를 협공했다. 이에 강유는 기성으로 도망쳐 왔다. 그러나 이미 성 위에는 촉군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이미 위연이 성을 점거해 버린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강유는 천수성으로 도망쳤다.

필마단기로 천수성 앞에 이른 강유는 성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이에 마준은 "강유가 온 것은 우리를 속여 성을 빼앗으려는 것이다"라며 강유에게 화살을 퍼붓게 했다. 촉군은 이미 저만치까지 강유를 쫓아와 있었다. 할 수 없이 강유는 상규성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상규성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말을 돌려 다시 달아나는데, 갑자기 수천의 군사들이 나와 길을 막았다. 제갈량이 나타났다.
"백약! 이렇게 되었는데 왜 아직 항복하지 않는가?"
이에 강유는 말에서 내려 항복했다. 제갈량이 강유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는 초려에서 나온 이후 평생 배운 것을 전수하고자 두루 훌륭한 인재를 찾았으나 한스럽게도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는데, 이제 백약을 만났으니 나의 원이 이루어졌네."

이렇게 제갈량은 가짜 강유와 백성들을 이용해서 마준, 하후무 등을 '휘저어 놓아' 강유를 귀순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경우를 '혼수모어'의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유는 이렇게 귀순하여 제갈량의 충직한 후계자가 된다. 제갈량이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뜬 이후에도 제갈량의 유지를 이어받아 끊임없이 북벌을 감행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

浑水摸鱼(húnshuǐmōyú) 현대 한어 규범 자형. 浑 혼탁할 혼.
fish in troubled waters; take advantage of unclear circumstances; profit by disturbances

或躍在淵 (혹약재연)

或躍在淵(혹약재연)

或 장차 혹 | 躍 뛸 약 | 在 있을 재 | 淵 못 연 |

장차 크게 뛰려 하나 아직은 깊은 못 속에 있음. 이전보다 발전했지만 아직 안정되지 못한 상태

[출전]
주역

惑世誣民 (혹세무민)

惑世誣民(혹세무민)

惑 미혹할 혹 | 世 인간 세, 대 세 | 誣 속일 무 | 民 백성 민 |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일.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欺世盗名(qīshìdàomíng) |

虎死留皮 (호사유피)

虎死留皮(호사유피)

虎死留皮(hǔsǐliúpí)

虎 범 호 | 死 죽을 사 | 留 머무를 유(류) | 皮 가죽 피 |

범이 죽으면 가죽을 남김.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五代)가 교체하던 시기에 양(梁)나라에 왕언장(王彦章)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성품이 우직하고 곧이곧대로인 그는 싸움에 나갈때면 항상 쇠창을 들고 용감(勇敢)히 덤벼들어서 별명이 왕철창(王鐵槍)이었다.그런데 산서(山西)에 있던 진(秦)나라가 국호를 후당(後唐)으로 바꾸고 양나라로 쳐들어왔다. 이때 왕언장도 출전했으나 크게 패해 파면까지 당했다. 그 후 후당이 다시 침입했을 때 재기용되었으나 이번에는 그만 포로가 되고 말았다. 후당의 임금이 왕언장의 용맹무쌍함을 높이 사 귀순할 것을 종용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는 양나라를 섬기고 저녁에는 진(秦)나라를 섬기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오."진노한 임금은 그에게 사형을 내렸고, 그는 마치 자신이 살아 생전 늘 입버릇처럼 한 말에 따르기라도 하듯이 의연한 자세로 죽음의 길을 갔다. 그는 평소 속담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즐겼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한 나라의 장수로서 명예를 소중히 여긴 왕언장이 행동(行動)은 의롭다 할 만하다.

[출전]
오대사(五代史)의 왕언장전(王彦章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豹死留皮(표사유피) | 人死留名(인사유명) |

虎死留皮人死留名 (호사유피인사유명)

虎死留皮人死留名(호사유피인사유명)

虎 범 호 | 死 죽을 사 | 留 머무를 유(류) | 皮 가죽 피 | 人 사람 인 | 死 죽을 사 | 留 머무를 유(류) | 名 이름 명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은 죽어서 명예를 남겨야 함을 이르는 말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人在名虎在皮(인재명호재피) | 豹死留皮(표사유피) | 豹死留皮人死留名(표사유피인사유명) | 虎死留皮(호사유피) |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인생은 다만 백 년이다.

好事多魔 (호사다마)

好事多魔(호사다마)

好 좋을 호 | 事 일 사 | 多 많을 다 | 魔 마귀 마 |

좋은 일에는 방해되는 일이 많다.

The good comes with the bad.


호사다방(好事多妨:좋은 일에는 방해가 많이 따른다)이라고도 한다. 魔는 磨라고도 쓴다. 이 말이 사용된 예로는 중국 청(淸)나라 때 조설근(曹雪芹)이 지은 《홍루몽(紅樓夢)》에 "그런 홍진 세상에 즐거운 일들이 있지만 영원히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물며 또 '미중부족 호사다마(美中不足 好事多魔:옥에도 티가 있고, 좋은 일에는 탈도 많다)'라는 여덟 글자는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순식간에 또 즐거움이 다하고 슬픈 일이 생기며, 사람은 물정에 따라 바뀌지 않는 법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 금(金)나라 때 동해원(董解元)이 지은 《서상(西廂)》에 "참으로 이른바 좋은 시기는 얻기 어렵고, 좋은 일을 이루려면 많은 풍파를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眞所謂佳期難得, 好事多磨)"라는 구절이 있다. 좋은 일이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호몽부장(好夢不長:좋은 꿈은 오래 가지 않는다)과 같은 의미이다.

[출전]
조설근(曹雪芹, Cao Xueqin), 홍루몽(紅樓夢, Dream of the Red Chamber)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鰣魚多骨(시어다골) | 好事多魔(호사다마) | 好事多妨(호사다방) |

鴻門宴 (홍문연, Hóngményàn)

鸿门宴(홍문연,Hóngményàn)

鸿门宴(Hóngményàn)

鴻 기러기 홍 | 門 문 문 | 宴 잔치 연 |


초청객을 모해할 목적으로 차린 주연(酒宴).


《사기(史記)》에서, 기원전 206년 유방(劉邦)이 함양(咸陽)을 선점한 후 병력을 보내 함곡관(函谷關)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곧바로 항우가 대군을 이끌고 들이닥쳐 홍문(鴻門)에서 주연을 베풀고 유방을 초대하였는데, 주연에서 항우의 모사인 범증(范增)이 항장(項莊)에게 검무를 추는 체하다 유방을 죽이도록 명하였으나, 유방은 위험을 알아차린 부하 장수인 번쾌(樊噲) 등의 호위로 무사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고사에서 유래함.

[출전]史記(사기):項羽本紀(항우본기)


참조 한자어

참조어

赴鸿门宴(fùHóngményàn) 홍문연으로 향하다. 일을 하기 위해서 위험하거나 혹은 매우 힘든 지역으로 가다.

鴻門宴歌(홍문연가) 중국(中國) 초(楚)나라 항 우와 한(漢)나라 패공 이 홍구의 군문에서 가진 잔치를 줄거리로 한 단가의 하나


史記, 사기, 史記:項羽本紀, 사기:항우본기 |

毫毛斧柯 (호모부가)

毫毛斧柯(호모부가)

毫毛斧柯(háomáofǔkē)

毫 터럭 호 | 毛 터럭 모 | 斧 도끼 부 | 柯 가지 가 |

수목(樹木)을 어릴 때 베지 않으면 마침내 도끼를 사용(使用)하는 노력(努力)이 필요(必要)하게 된다는 뜻으로, 화(禍)는 미세(微細)할 때에 예방(豫防)해야 함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로 쓰임

[출전]
전국책(戰國策)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 개가 겨를 먹다가 말경에는 쌀을 먹는다.

紅爐點雪 (홍로점설)

紅爐點雪(홍로점설)

紅 붉을 홍, 상복 공 | 爐 화로 로(노) | 點 점 점, 시들 다 | 雪 눈 설 |

①뜨거운 불길 위에 한 점 눈을 뿌리면 순식간에 녹듯이 사욕(邪慾)이나 의혹(疑惑)이 일시에 꺼져 없어지고 마음이 탁 트여 맑음을 일컫는 말 ②크나큰 일에 작은 힘이 조금도 보람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紅爐上一點雪(홍로상일점설) | 漢江投石(한강투석) | 以卵投石(이란투석) | 以卵擊石(이란격석) | 杯水輿薪(배수여신) | 杯水救車(배수구거) | 杯水車薪(배수거신) |

囫圇呑棗 (홀륜탄조)

囫圇呑棗(홀륜탄조)

囫 온전할 홀 | 圇 완전할 륜 | 呑 삼킬 탄 | 棗 대추 조 |

대추를 통째로 삼킨다는 뜻으로, 자세히 분석하지도 않고 뜻도 모른 채 받아들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주자어류(朱子語類) 논어(論語) 16편에는 도리란 조리가 분명한 일이지 뭉뚱그린 것이 아니다(不是 一物) 라는 말이 있다.

옛날에 과거시험에 번번이 낙방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연회를 베풀어 손님을 초대하여 자신이 계속 과거시험에 낙방하는 원인에 대한 조언을 구하였다. 그는 술과 밥을 배불리 먹고 나서 손님들에게 과일을 대접하고는, 자신도 대추를 여러 개 먹었다. 손님 중에 의술에 정통한 사람이 있어 말했다.

"배를 생으로 먹으면 치아에는 좋지만 비장(脾臟)에는 좋지 않고, 반대로 대추는 비장에는 좋지만 치아에 해를 줄 수 있습니다."

번번이 낙방하던 사람은 이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러면 대추를 씹지 않고 통째로 삼켜 버리면 치아를 보호할 수 있을 뿐더러 비장에도 유익할 것이다."

그리고는 대추를 집어 통째로 삼켰다.

그러자 의술에 정통한 사람은 그에게 평소 연습한 문장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가져온 몇 편의 글을 읽어 보고 나서 말했다.

"시는 운률이 맞지 않고 문장도 조리에 맞지 않으며, 전고(典故)를 잘못 사용한 곳도 있고 원래의 뜻을 잘못 이해한 것도 있다. 대추를 통째로 삼키 듯 공부를 하였으니 번번이 낙방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또 《벽암록(碧巖錄)》에는 조주화상(趙州和尙)의 선문답에 대하여 "지혜로운 자는 자세하게 곱씹어 삼킬 것이요, 지혜롭지 못한 자는 대추를 통째로 삼키 듯이 할 것이다[若是知有底人, 細嚼來嚥, 若是不知有底人, 一似渾崙呑個棗]"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홀륜탄조는 사물을 흐리멍텅하게 이해하거나, 학문을 하면서 깊이 이해하지 않고 넘어가거나, 분석과 검토를 거치지 않고 남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주자어류(朱子語類)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鶻圇呑棗(골륜탄조) 새가 대추씨를 맛도 모르고 통째로 삼킨다 | 囫圇呑棗(홀륜탄조)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虎狼之國 (호랑지국)

虎狼之國(호랑지국)

虎 범 호 | 狼 이리 랑(낭) | 之 갈 지, -의 지 | 國 나라 국 |

호랑이와 이리의 나라라는 뜻으로, 포악(暴惡)하고 신의(信義)가 없는 강대국(强大國)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사기(史記) 굴원(屈原)열전의 이야기다.

전국시대에 진나라를 비롯하여 제(齊)·초(楚)·연(燕)·위(魏)·한(韓)·조(趙)의 7개국이 패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진나라는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나라로서 나머지 6개국을 위협하였다. 남쪽 초(楚)나라도 그 위협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당시 초나라 회왕(懷王)의 대신(大臣)으로 있던 유명한 시인(詩人) 굴원은 제(齊)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간언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왕은 진나라 장의(張儀)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이에 초 회왕은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장의는 다시 초나라를 방문하여 초왕의 신하와 총비(寵妃)를 매수하고, 초왕을 설득하여 진나라와 형제지국의 관계를 맺었다.

얼마 후, 진나라 소왕(昭王)은 거짓으로 초나라와 통혼(通婚)을 청하며 회왕에게 만나자고 제의하였다. 회왕이 이를 곧이 듣고 진나라로 가려 하자, 굴원은 이것이 함정임을 주장하며 진나라는 호랑이와 같은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으니, 가시지 않는게 좋습니다[秦, 虎狼之國, 不可信, 不如無行]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에 갔던 초왕은 결국 그곳에서 붙잡혀 죽고 말았다.

또 같은 전국시대에 소진(蘇秦)은 6개국을 돌아다니며 힘을 합쳐 진나라에 대적하여야 한다는 합종책(合從策)을 유세하였다. 그는 초나라에 가서 "무릇 진나라는 호랑이나 이리와 같은 사나운 나라로서 천하를 삼키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천하의 원수입니다[夫秦虎狼之國也, 有呑天下之心, 秦天下之仇讐也]"라고 하면서 위왕(威王)을 설득하였다. 이 고사는 《사기》의 〈소진열전〉과 《전국책(戰國策)》의 〈초책(楚策)〉편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호랑지국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괴롭히는 포학한 강대국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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狐假虎威 (호가호위)

狐假虎威(호가호위)

狐假虎威(hújiǎhǔwēi)

狐 여우 호 | 假 거짓 가, 멀 하, 이를 격 | 虎 범 호 | 威 위엄 위 |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으스댄다는 뜻으로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리는 것을 말한다.

the fox borrowing the awe of the tiger—to bully people by flaunting one's powerful connections; to browbeat others by virtue of one's powerful connections


전국 시대 중국의 남쪽 초나라에 소해휼(昭奚恤)이라는 재상(宰相)이 있었다. 북방의 나라들은 이 소해휼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초나라의 실권을 그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나라 선왕(宣王)은 북방의 나라들이 왜 소해휼을 두려워 하는지 이상하게 여겨 魏(위)나라 출신인 江乙(강을)이란 신하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위나라를 비롯한 북방의 여러나라가 우리 초나라 재상 昭奚恤(소해휼)을 두려워하고 있다는데 그게 정말이오?』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그들이 일개 재상에 지나지 않는 소해휼을 두려워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막강한 초나라의 힘때문이죠』

이렇게 말을 받은 강을은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겨온 소해휼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호가호위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생긴 연유는 이렇습니다. 호랑이가 여우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잡아 먹히게 된 여우가 말했습니다. '잠깐 기다리게나. 이번에 나는 천제로부터 백수의 왕에 임명되었네. 만일 나를 잡아먹으면 천제의 명령(命令)을 어긴 것이 되어 천벌을 받을 것이야. 내 말이 거짓말이라 생각하거든 나를 따라와 봐. 나를 보면 어떤 놈이라도 두려워서 달아날 테니.'여우의 말을 듣고 호랑이는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과연 만나는 짐승마다 모두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짐승들은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를 보고 달아난 것이지만, 호랑이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북방의 제국이 소해휼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실은 소해휼의 배후에 있는 초나라의 군세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소해휼은 왕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는 여우가 되고, 선왕은 소해휼이 훌륭해서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는 줄로 알고 있는 어리석은 호랑이가 되고 만 셈이었다.

[출전]
전국책(戰國策)의 초책(楚策)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借虎威狐(차호위호) | 假虎威狐(가호위호) |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an ass in a lion's skin
사자의 탈을 쓴 나귀

虎口餘生 (호구여생)

虎口餘生(호구여생)

虎 범 호 | 口 입 구 | 餘 남을 여 | 生 날 생 |

큰 위험에서 목숨을 구함을 비유한 말.

life spared from the mouth of a tiger

송(宋)나라 때, 호주(湖州)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주태(朱泰)라는 사람이 있었다. 집안이 가난한 탓에 산에서 나무를 해다 백리 밖에 있는 저자에 내다 팔아 겨우 몇 푼의 돈을 마련하여 생활하였다. 어느 날, 주태가 산에 올라 나무를 하고 있었는데, 큰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물고 갔다. 주태는 호랑이게 물려 가면서도 죽을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내가 죽는 것은 상관없지만, 늙으신 어머니는 어찌 할꼬.

그는 계속 소리치면서 호랑이의 이빨에서 벗어 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를 물고 달리던 호랑이도 이제껏 이런 상황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깜짝 놀라서, 입을 벌려 주태를 놓아 주고는, 오히려 허둥지둥 도망치고 말았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주태가 부상당한 채 집으로 돌아 오자,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그를 위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돈과 물건을 가지고 와서 그를 도와 주었다.

호구(虎口)에서 살아 돌아온 주태는 그후 주호잔(朱虎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胡蝶夢 (호접몽)

胡蝶夢 (호접몽)

胡(호) 나비, 오랑캐 | 蝶(접) 나비 | 夢(몽) 꿈

호접몽은 '나비의 꿈'이라는 뜻으로 사물과 자기와의 구별을 잊은 것. 바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심경(心境)을 말하는 것


도가사상(道家思想)의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일화.

장자(莊子;BC 365 - 293 (?))가 어느날 낮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다. 꿈속에 나비가 되어 신나게 날아다니며 자연을 만끽했는데, 잠시 쉬려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보니 인간 장자라는 것을 알았다.

이때 莊子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도대체 본래 인간이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본래 나비가 꿈속에서 인간이 되어 이렇게 있는 것인지 구별이 안되었던 것이다.

장자(莊子)는 여기에서 도가사상의 본질(本質)을 깨달았다. 현실주의(現實主義) 바탕에서 인간(人間)이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고 생각하는 공맹(孔孟)의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이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은 별 상관이 없지만, 본래 나비가 꿈속에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것의 끝과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장자는 인간도 역시 모든 우주(宇宙) 만물 속의 하나의 객체(客體)로 인정한다면 나비이든 사람이든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만물(萬物)을 가지런하게 생각하는 도가(道家)의 "만물제동(萬物齊同)"사상이다. 이것은 또한 장자가 주장한 제물론(齊物論)의 핵심이기도 하다.

곧 장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협된 사고의 틀을 벗어나 모든 우주 만물(萬物)의 저절로 그러한 상태인 도(道)를 따르라는, 흔히 이야기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한 것이다.

차별적(差別的)이고 유한적(有限的)인 인간의 세계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의 무한적(無限的) 세계에서 노닐 수 있는 소요유(逍遙遊)의 단계에 도달하면 "無爲自然"의 진리를 얻는다고 본 것이다.



유의어

庄周梦蝶(zhuāngzhōumèngdié)

糊口之策 (호구지책)

糊口之策 (호구지책)

糊口之策 [ húkǒuzhīcè ]

糊 풀칠할 호, 죽 호 | 口 입 구 | 之 갈 지 | 策 꾀 책, 채찍 책 |

입에 풀칠하다라는 뜻으로, 겨우 먹고 살아가는 방책(方策)


초(楚)나라의 호구(狐丘)에 사는 한 영감이 손숙오(孫叔敖)에게 말했다.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원망의 대상이 있습니다. 혹시 그걸 아십니까?" "무슨 말씀이신가요?" "사람들은 직위가 높은 사람을 투기하고, 임금은 벼슬이 높은 사람을 미워하며, 녹을 많이 받는 사람은 세인의 원망을 듣습니다."그러자 손숙오가 이렇게 말했다. "저의 직위가 올라갈수록 저의 뜻은 낮추고, 제 벼슬이 높아질수록 저의 마음을 작게 가지며, 저의 녹이 많아질수록 베풀기를 넓게 한다면 이 세 가지 원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겠지요?"세월이 흘러 손숙오는 병이 들어 죽어갈 때 아들에게 이렇게 훈계했다. "임금님은 나를 자주 봉(封)하려 했지만 내가 받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임금께서는 분명 네게 땅을 봉해 주실 것인즉 너는 절대 이로운 땅을 받지 말아라. 초나라와 월나라 사이에 침구라는 지방이 있으니 이곳은 이롭지도 않고 명성이 아주 나쁘다. 초나라 사람들은 귀신을 믿고 월나라 사람들은 상서를 믿으니 오래도록 차지 할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다."손숙오가 죽자 임금은 과연 기름지고 아름다운 지방을 그의 아들에게 분봉하려 했으나 그의 아들은 부친의 유언대로 이를 사양하고 침구 지방을 받아 그곳에서 자손들이 오래도록 살았다.

[출전]
열자(列子)의 설부편說符篇)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糊口策(호구책) | 糊口之方(호구지방) | 糊口之計(호구지계) | 口食之計(구식지계) |

孑孑單身 (혈혈단신)

孑孑單身(혈혈단신)

孑 외로울 혈 | 孑 외로울 혈 | 單 홑 단, 오랑캐 이름 선 | 身 몸 신, 나라 이름 건 |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홀몸.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單獨一身(단독일신) | 孤獨單身(고독단신)

懸河雄辯 (현하웅변)

懸河雄辯(현하웅변)

懸 달 현 | 河 물 하 | 雄 수컷 웅 | 辯 말씀 변, 두루 미칠 편 |

현하구변.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懸河之辯(현하지변) | 懸河口辯(현하구변) |

懸河口辯 (현하구변)

懸河口辯(현하구변)

懸 달 현 | 河 물 하 | 口 입 구 | 辯 말씀 변, 두루 미칠 편 |

흐르는 물과 같이 거침없이 술술 나오는 말.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懸河之辯(현하지변) | 懸河雄辯(현하웅변) |

螢窓雪案 (형창설안)

螢窓雪案(형창설안)

螢 반딧불 형 | 窓 창 창, 굴뚝 총 | 雪 눈 설 | 案 책상 안 |

반딧불이 비치는 창과 눈에 비치는 책상(冊床)이라는 뜻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학문(學問)에 힘씀을 비유(比喩ㆍ譬喩)한 말.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螢雪之功(형설지공) | 車螢孫雪(차형손설) | 車胤聚螢(차윤취형) | 車胤盛螢(차윤성형) | 孫康映雪(손강영설) |

螢雪之功 (형설지공)

螢雪之功(형설지공)

萤雪之功(yíngxuězhīgōng)

螢 반딧불 형 | 雪 눈 설 | 之 갈 지 | 功 공 공 |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工夫)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


후진(後晉)의 이한(李瀚)이 지은 《몽구(蒙求)》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진(晉)나라의 차윤(車胤)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전한 노력가로 공부를 열심히 했으나 집안이 가난해 등불을 켜는 데 사용하는 기름조차 없었다. 소년은 밤에도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엷은 명주 주머니를 벌레통처럼 만들어 그 속에 반디를 수십 마리 집어넣어 거기서 나오는 빛으로 책을 비추어 읽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한 끝에 상서랑(尙書郞 또는 吏部尙書)이라는 중앙 정부의 고급 관리로 출세했다.

또 같은 시대에 손강(孫康)이라는 소년은 어릴 때부터 악한 무리들과 사귀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으나 역시 집안이 가난해 등불을 켤 기름을 살 수가 없었다. 소년은 궁리 끝에, 겨울날 추위를 견디며 창으로 몸을 내밀고 쌓인 눈에 반사되는 달빛을 의지해 책을 읽었다. 그 결과 어사대부(御史大夫)라는 관원을 단속하는 관청의 장관이 되었다.

이 고사에서 비롯되어 어려운 처지에서 공부하는 것을 '형설지공' 또는 단순히 '형설'이라고 한다. 또 공부하는 서재를 형창설안(螢窓雪案)이라고도 한다.

[유래]
晉書(진서) : 卷83 : 車胤 | 蒙求(몽구)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螢窓雪案(형창설안) | 車螢孫雪(차형손설) | 车萤孙雪(chēyíngsūnxuě) | 車胤聚螢(차윤취형) | 車胤盛螢(차윤성형) | 孫康映雪(손강영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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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書(진서) : 卷83 : 車胤 | 蒙求(몽구) |

衡無心輕重自見 (형무심경중자현)

衡無心輕重自見(형무심경중자현)

衡 저울대 형, 가로 횡 | 無 없을 무 | 心 마음 심 | 輕 가벼울 경 | 重 무거울 중, 아이 동 | 自 스스로 자 | 見 볼 견, 뵈올 현 |

저울대는 무심해서 경중이 절로 드러난다.


[출전]

木几冗談(목궤용담)


관련 한자어

관련어

鏡無心姸媸自見(경무심연치자현) | 衡無心輕重自見(형무심경중자현) | 衡無心輕重自見 鏡無心姸媸自見(형무심경중자현 경무심연치자현) |

懸頭刺股 (현두자고)

懸頭刺股(현두자고)

懸 달 현 | 頭 머리 두 | 刺 찌를 자, 찌를 척, 수라 라(나), 비방할 체 | 股 넓적다리 고 |

상투를 천장에 달아매고, 송곳으로 허벅다리를 찔러서 잠을 깨운다는 뜻으로, 학업(學業)에 매우 힘씀을 이르는 말


漢(한)나라의 孫敬(손경)은 洛陽(낙양)의 대학에 있을 때 공부에만 매달렸다. 공부하다가 졸음이 와서 고개가 숙여지지 못하도록 자신의 머리를 대들보에 끈으로 매달아 놓고(懸頭) 책을 읽었다.

전국시대 遊說家(유세가)로 유명한 蘇秦(소진)은 책을 읽는데 졸음이 오면 송곳을 가져다가 자신의 넓적다리를 찔렀다(刺股). 어떨 때는 흘러내린 피가 발뒤꿈치까지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출전]
초국선현전(楚國先賢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懸梁刺股(현량자고) | 刺股懸梁(자고현량) |

虛虛實實 (허허실실)

虛虛實實(허허실실)

虛 빌 허 | 虛 빌 허 | 實 열매 실, 이를 지 | 實 열매 실, 이를 지 |

허(虛)를 찌르고 실(實)을 꾀하는 계책(計策)으로 싸우는 모양(模樣)을 이르는 말로써, ①계략(計略)이나 수단(手段)을 써서 서로 상대방(相對方)의 약점을 비난(非難)하여 싸움 ②허실을 살펴서 상대방(相對方)의 동정(動靜)을 알아냄을 이르는 말

虛張聲勢 (허장성세)

虛張聲勢(허장성세)

虛 빌 허 | 張 베풀 장 | 聲 소리 성 | 勢 형세 세 |

헛되이 목소리의 기세(氣勢)만 높인다는 뜻으로, 실력(實力)이 없으면서도 허세만 부림.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號曰百萬(호왈백만) | 空城計(공성계) |

虛心坦懷 (허심탄회)

虛心坦懷(허심탄회)

虛 빌 허 | 心 마음 심 | 坦 평탄할 탄, 너그러울 탄 | 懷 품을 회 |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솔직한 태도로 일에 임함.

[비즈니스 중국 고사성어] (6) 일반천금

http://economy.hankooki.com/lpage/hotissue/201003/e2010033116570097010.htm

[비즈니스 중국 고사성어] (6) 일반천금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어찌 다 갚을까요?

정문섭 농업인재개발원장

지난 2008년 5월 스촨성(四川省) 대지진이 일어난 날, TV화면으로 폐허 장면을 지켜보던 필자는 스촨성 출신의 그 소녀가 떠올랐다.

解弦更張 (해현경장)

解弦更張(해현경장)

解 풀 해 | 弦 시위 현 | 更 고칠 경, 다시 갱 | 張 베풀 장 |

'거문고의 줄을 바꾸어 매다'라는 뜻으로, 느슨해진 것을 긴장하도록 다시 고치거나 사회적·정치적으로 제도를 개혁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한(漢)나라 때 동중서(董仲舒)가 무제(武帝)에게 올린 현량대책(賢良對策)에서 유래되었다.


개현경장(改弦更張)·개현역장(改弦易張)·해현역철(解弦易轍)·개현역철(改弦易轍)·개현역조(改弦易調)라고도 한다. 동중서는 이름난 유학자로 어려서부터 《춘추(春秋)》를 공부하였고,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다. 경제를 이어 즉위한 무제는 국사를 운영하면서 수시로 동중서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무제가 널리 인재를 등용하려 하자, 동중서는 '원광원년거현량대책(元光元年擧賢良對策)'이라는 글을 올렸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지금 한나라는 진나라의 뒤를 계승하여 썩은 나무와 똥이 뒤덮인 담장과 같아서 잘 다스리려고 해도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지경입니다. (중략) 이를 비유하자면 거문고를 연주할 때 소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심해지면 반드시 줄을 풀어서 고쳐 매어야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竊譬之琴瑟不調, 甚者必解而更張之, 乃可鼓也]. 마찬가지로 정치도 행하여지지 않는 경우가 심해지면 반드시 옛것을 새롭게 변화하여 개혁하여야만 제대로 다스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줄을 바꿔야 하는데도 바꾸지 않으면 훌륭한 연주가라 하더라도 조화로운 소리를 낼 수 없으며, 개혁하여야 하는데도 실행하지 않으면 대현(大賢)이라 하더라도 잘 다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출전]
漢書(한서) 董仲舒傳(동중서전)

여기서 유래하여 해현경장은 주로 사회적·정치적 개혁을 의미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조선시대 말기에 발생한 갑오경장(甲午更張:갑오개혁)의 명칭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解弦易轍(해현역철) | 改弦易轍(개현역철) | 改弦易調(개현역조) | 改弦易張(개현역장) | 改弦更張(개현경장) |

幸災樂禍 (행재요화)

幸災樂禍(행재요화)

幸 다행 행 | 災 재앙 재 | 樂 좋아할 요, 즐길 락(낙), 노래 악 | 禍 재앙 화 |

남이 재화(災禍)를 입음을 보고 좋아함


출전

顔氏家訓(안씨가훈)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낙화행재(樂禍幸災) | 幸災樂禍(행재낙화) | 幸災樂禍(행재락화) | 幸災樂禍(행재요화)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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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幸災樂禍 (행재낙화)

幸災樂禍(행재낙화)

幸 다행 행 | 災 재앙 재 | 樂 좋아할 요, 즐길 락(낙), 노래 악 | 禍 재앙 화 |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고 즐거워한다'라는 뜻으로, 남의 불행을 즐기는 이기적인 태도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경정(慶鄭)과 자퇴(子頹)와 관련된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좌전(左傳) 희공(僖公) 14년조의 이야기.

경정의 고사에서 유래된 '행재'와 자퇴의 고사에서 유래된 '낙화'가 합쳐진 고사성어이다.

춘추시대, 진(晋)나라에 내란이 발생하자 공자 이오(夷吾)는 진(秦)나라로 도망하였다. 이오는 귀국하기 전에 다섯 성을 진(秦)나라에 감사의 대가로 주기로 하였으나, 진(晋)의 군주, 즉 혜공(惠公)에 즉위하자 생각을 바꾸었다.

기원전 647년, 진(晉)나라 혜공(惠公) 때 큰 흉년이 들었다. 진(秦)나라 진혜왕은 지난 날의 일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대부 백리해(百里奚)의 권유로 진(晋)나라에 양식을 보내 주었다.

이듬해에는 거꾸로 진(秦)나라에 흉년이 들어 진(晉)나라로부터 식량을 사들이고자 하였으나, 진(晉)나라는 지난 해의 고마움을 잊은 듯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大夫)인 경정만은 혜공에게 말하면서, 식량을 팔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은혜를 저버리면 외로운 처지가 될 것이며,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입니다[背施無親, 幸災不仁]"

그러나 혜공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분노한 진(秦)나라는 결국 군사를 일으켜 진(晉)나라를 공격하였고, 혜공은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이 고사는 《좌씨전(左氏傳)》의 '희공(僖公) 14년'조에 실려 있으며, '행재'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춘추시대 주(周)나라의 장왕(莊王)은 애첩과의 사이에서 자퇴라는 아들을 얻었다. 장왕이 죽은 뒤에 희왕에 이어 혜왕(惠王)이 왕위에 올랐다. 혜왕 때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혜왕을 몰아내고 자퇴를 꼭두각시 왕으로 내세웠다. 음탕하고 어리석은 자퇴는 매일 대신들과 음주가무에 빠져 지냈다.

정(鄭)나라의 려왕이 이 소식을 듣고 괵숙에게 "때를 가리지 않고 슬픔과 즐거움을 나타내면 재앙이 반드시 닥친다고 들었다. 지금 자퇴가 가무를 즐기느라 피곤한 줄을 모르는 것은 재앙을 즐기는 짓이다(哀樂失時, 殃咎必至. 今王子頹歌舞不倦, 樂禍也)"라고 말하였다. 이 고사는 《좌씨전》의 '장공(莊公) 20년'조에 실려 있으며, '낙화'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 두 가지 고사에서 유래하여 행재낙화는 남의 불행을 함께 슬퍼하기는커녕 즐거워하는 그릇된 행위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낙화행재(樂禍幸災)라고도 한다.


출전

좌씨전(左氏傳) 희공(僖公) 14년 | 좌씨전(左氏傳) 장공(莊公) 20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낙화행재(樂禍幸災) | 幸災樂禍(행재낙화) | 幸災樂禍(행재락화) | 幸災樂禍(행재요화)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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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海翁好鷗 (해옹호구, hǎiwēnghǎoōu)

海翁好鷗(해옹호구)

海翁好鸥(hǎiwēnghǎoōu)

海 바다 해 | 翁 늙은이 옹 | 好 좋을 호 | 鷗 갈매기 구 |


갈매기를 좋아하는 바닷가 노인이라는 뜻으로, 친하게 지내던 새도 막상 잡으려고 하면 그것을 알고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데서 야심(野心)이나 위험(危險)을 알아차리면 누구라도 접근(接近)하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


《열자(列子)》 〈황제편(皇帝篇)〉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바닷가에 사는 어떤 사람이 갈매기를 좋아했다. 그는 매일 아침 바닷가로 나가서 갈매기들과 더불어 놀았는데, 그에게 놀러오는 갈매기들이 200마리도 넘었다. 어느 날, 그 사람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갈매기들이 모두 너와 더불어 논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갈매기를 잡아오도록 해라. 내가 갈매기를 가지고 놀고 싶구나라고 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바닷가로 나갔다. 그런데, 갈매기들은 그 사람의 머리 위를 맴돌며 날 뿐 내려오지 않았다.

이 이야기 뒤에 '지극한 말이란 말을 떠나는 것이고, 지극한 행위란 작위(作爲)가 없는 것이다. 보통 지혜 있는 자들이 안다고 하는 것은 곧 천박한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인위(人爲)를 부정하는 노장사상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하는 것이다. 도덕이 극치에 이른 사람, 즉 지인(至人)은 무언무위(無言無爲)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런 말도 없고 다른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자연에 융화될 수 있다. 그리하여 갈매기 같은 새들도 사람들이 어떠한 욕망이나 생각 없이 대한다면 함께 어울려 놀 수 있지만 일단 갈매기를 잡겠다는 마음을 가지기만 하여도 갈매기들은 그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해옹호구(海翁好鷗)라는 말이 비롯되었으며, 무위자연을 도덕의 표준으로 삼는 노장사상이 내포된 말이다.

[출전]
列子(열자):皇帝篇(황제편) |


列子, 열자, 列子:皇帝篇, 열자:황제편 |

解語花 (해어화, jiěyǔhuā)

解語花(해어화)

解语花(jiěyǔhuā)

解 풀 해 | 語 말씀 어 | 花 꽃 화 |


'말을 아는 꽃'이라는 뜻으로, ①'미녀(美女)'를 일컫는 말 ②'기생(妓生)'을 달리 이르는 말


개원(開元)의 치(治)라는 칭송을 받았던 당(唐)나라 현종(玄宗)은 얼마 뒤 국가 재정의 곤란과 양귀비(楊貴妃)와의 사치한 궁중 생활 때문에 정치에 싫증을 내게 되었고, 이 때문에 나라는 어지러워졌다.

이러한 당나라 현종(玄宗)이 비빈(妃嬪)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楊貴妃)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何如此解語花耶)"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해어지화(解語之花)'라고도 한다. 중국 오대(五代)의 왕인유(王仁裕)가 엮은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 다음의 글이 실려 있다.

명황(明皇) 가을 8월에 태액지(太液池)에 천 송이의 흰 연꽃이 피었다. 그 중 몇 가지에는 꽃이 무성하게 피었다. 황제는 양귀비와 더불어 잔치하고 감상했다. 좌우가 감탄하고 부러워했다. 오래도록 감상하다가 황제가 양귀비를 가리키며 좌우에게 일러 말했다. "내 말을 이해하는 꽃과 견줄 만하도다[爭如我解語花]." 여기서 명황은 당나라의 현종을 가리키는 말이고, 태액지는 장안성(長安城)의 동북간에 있는 성에 인접하여 만든 정원으로 대명궁내(大明宮內)에 있는 연못이다. 이 태액지에 피어 있는 연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모두들 넋을 잃고 바라보자, 현종이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알아듣는 이 꽃(양귀비)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하여 양귀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했던 것이다.

양귀비는 촉주(蜀州) 사호(司戶)였던 양현담(楊玄啖)의 딸로, 어렸을 때의 이름은 옥환(玉環)이었다. 일찍 부모를 여읜 그녀는 숙부 밑에서 자랐다. 원래 양귀비는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壽王)의 비(妃)였으나 무혜비(武惠妃)를 잃은 현종의 눈에 띄어 그녀의 나이 27세 때 귀비(貴妃)로 책봉되었다. 그후 현종의 총애를 받아 그 일족이 모두 높은 벼슬에 오르는 등 영화를 누렸으나,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피난가던 도중 길가의 불당에서 목매어 죽임을 당하였다.

[유래]
開元天寶遺事(개원천보유사) 王仁裕(왕인유)


관련 한자어

유의어

傾國之色(경국지색) |


開元天寶遺事, 개원천보유사, 미녀, 美女, 기생, 妓生 |

解衣推食 (해의추식)

解衣推食(해의추식)

解衣推食 [jiěyītuīshí]

解 풀 해 | 衣 옷 의 | 推 옮을 추, 밀 추, 밀 퇴 | 食 밥 식, 먹을 식, 먹이 사, 사람 이름 이 |

옷을 벗어주고 음식(飮食)을 밀어준다라는 뜻으로, 남에게 은혜(恩惠)를 베푸는 것


사기(史記) 회음후(淮陰侯)열전의 이야기.

한신(韓信)은 본시 초나라 항우(項羽) 밑에서 말단 군관을 지냈으나, 항우가 자신을 크게 써주지 않자 유방(劉邦)에게 귀순하였다. 유방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한신이 군대를 이끌고 제(齊)나라를 공격했을 때, 제나라는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항우는 부하 장수 용저(龍且)에게 20만 대군을 이끌고 제나라를 돕게 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초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제왕(齊王)에 봉하여졌다. 한신의 능력에 두려움을 느낀 항우는 무섭(武涉)이라는 세객(說客)을 보내어 한신으로 하여금 한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초·한·제의 세 나라로 천하를 삼분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자 한신은 그의 말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과거 내가 내가 항왕(항우)을 섬길 때는 낭중(郞中)에 불과하여 창을 들고 문지기 노릇을 하였소. 내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초나라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귀순한 것이오. 이제 한왕(유방)은 내게 장군의 인수(印綬)를 내리고 수만의 병력을 맡겼으며, 자기 옷을 벗어 내게 입혀 주고 자기 밥을 나누어 주었으며, 내 계책을 받아들였으므로 내가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이오[漢王授我上將軍印, 予我數萬衆, 解衣衣我, 推食食我, 言聽計用, 故吾得以至於此]. 무릇 남이 나를 깊이 신뢰하는데 내가 그를 배신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설령 죽더라도 뜻을 바꿀 수는 없소."

여기서 유래하여 해의추식은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벗어 주고, 자기 밥을 나누어 줄 정도로 다른 사람을 각별히 친절하게 대하거나 돌보아 주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추식해의(推食解衣)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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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行百里者半於九十 (행백리자반어구십)

行百里者 半於九十(행백리자 반어구십)

백리를 가고자 하는 자는 구십리가 반이라는 말로 마무리가 중요함을 뜻함.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진(秦) 무왕(武王)의 교만함을 걱정한 신하가 '시경(詩經)'을 인용하여 충고한 데서 비롯된 말로 '백 리를 가려는 사람은 구십 리를 가고서 이제 절반쯤 왔다고 여긴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 마무리가 중요하고 어려우므로 끝마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는 뜻을 나타내는 성어(成語)이며,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 ‘행백리자반어구십(行百里者半於九十)’, ‘행백리자반구십리(行百里者半九十里)’라고도 한다.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秦) 무왕(武王, 재위 BC 310~BC 307)은 나라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점차 자만심에 빠지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주(周) 난왕(赧王) 8년(기원전 307년)에 한 신하가 무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臣)은 왜 대왕이 제(齊)와 초(楚) 두 나라를 가벼이 여기고 한(韓)을 업신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 왕자(王者)는 싸움에 이겨도 교만하지 않고, 패자(覇者)는 맹주가 되어도 쉽게 분노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기고도 교만하지 않기에 이웃나라가 복종하는 법입니다. 지금 대왕은 위(魏), 조(趙) 두 나라를 얻은 것에 만족하여 제(齊)를 잃은 것을 너무 가벼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의양(宜陽) 싸움에서 승리한 뒤 초(楚)와의 국교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쉽게 분노를 드러낸 것입니다. 교만과 분노는 패왕(覇王)이 지녀야 할 바가 아닙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처음은 누구나 잘하지만 끝을 잘 마무리하는 사람은 적다(靡不有初 鮮克有終)’는 말이 있습니다. 선왕(先王)들은 시작과 끝을 다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역사에는 처음에는 잘하다가도 끝마무리를 잘하지 못해 멸망한 경우가 많습니다. 춘추시대 말기 진(晉)에서 공경(公卿)들의 세력다툼이 일어났을 때 지백(智伯) 요(瑤)는 범(范)과 중행(中行)을 물리치고 조양자(趙襄子)를 진양(晋陽)에 몰아넣고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한(韓), 위(魏), 조(趙)의 연합군에게 멸망되어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오왕(吳王) 부차(夫差)도 회계(會稽)에서 월왕(越王) 구천(句踐)에게 항복을 받고 애릉(艾陵)에서 제(齊)를 대파하였지만, 황지(黃池)의 회맹(會盟)에서 송(宋)에 무례하게 굴다가 결국 구천(句踐)에게 사로잡혀 간수(干隨)에서 죽었습니다. 양혜왕(梁惠王)도 초(楚)와 제(齊) 두 나라를 물리치고, 조(趙)와 한(韓) 두 나라의 군사를 제압한 뒤 12제후(諸侯)를 이끌고 맹진(孟津)에서 천자(天子)에게 조회(朝會)하였지만, 결국 태자 신(申)은 죽고 자신은 제(齊)로 끌려가 억류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공(功)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시작은 잘했지만 끝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그러한 종말을 맞이한 것입니다.

지금 대왕은 의양(宜陽)에서 승리하고 삼천(三川) 일대를 점령하면서 제후들로 하여금 감히 대항하지 못하게 하였고, 한(韓)과 초(楚) 두 나라의 군사들이 감히 진격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만일 대왕이 마무리만 잘하면 삼왕[三王, 중국 고대의 세 임금인 하(夏)의 우왕(禹王), 상(商)의 탕왕(湯王), 주(周)의 문왕(文王)을 가리킨다]과 나란히 사왕(四王)으로 칭송되고, 오백[五伯, 춘추 오패(五覇)를 가리킨다]이 육백(六伯)으로 되어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멸망의 화를 입을 것입니다. 신(臣)은 제후(諸侯)들과 선비들이 장차 대왕을 오왕(吳王) 부차(夫差)나 지백(智伯) 요(瑤)처럼 여기게 될까 두렵습니다. <시경(詩經)>에서는 ‘1백리를 가는 사람은 90리를 절반으로 여긴다[행백리자 반어구십(行百里者 半於九十)]’고 했습니다. 이는 마무리의 어려움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 대왕과 초왕(楚王)은 교만(驕慢)한 기색이 뚜렷합니다. 신(臣)이 생각건대 천하의 패업은 제후들의 선택에 따라 초(楚) 아니면 진(秦)이 반드시 병화(兵禍)를 입는 것으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진(秦), 위(魏), 초(楚), 한(韓) 네 나라의 병력은 균형을 이루고 있어 다시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齊)와 송(宋) 두 나라가 저울추의 역할을 하게 되어 이들을 먼저 손에 넣는 쪽이 공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백리자반구십’이란 말이 비롯되었으며, 일을 마치기 전에 교만하지 말고 끝마무리를 잘 지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나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행백리자반구십’은 마무리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성어(成語)라고 할 수 있다.


참조어

事貴作始 成功之半(사귀작시 성공지반)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

行不由徑 (행불유경)

行不由徑(행불유경)

行 다닐 행, 항렬 항 | 不 아닐 불, 아닐 부 | 由 말미암을 유, 여자의 웃는 모양 요 | 徑 지름길 경, 길 경 |

길을 가는 데 지름길을 취하지 아니하고 큰길로 간다는 뜻으로, 행동(行動)을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함을 비유(比喩ㆍ譬喩)함


논어(論語) 옹야(雍也)편의 이야기.

자유(子遊)는 공자의 제자로 공문십철(孔門十哲)에 속하며, 자하(子夏)와 더불어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가 노(魯)나라에서 벼슬하여 무성(武城)의 재상으로 임명되었을 때의 일이다. 공자는 사랑하는 제자가 벼슬을 하게 되자, 일하는 모습도 볼 겸 축하도 할 겸해서 직접 무성으로 찾아갔다.

공자는 자유에게 물었다.

"일을 잘하려면 좋은 협력자가 필요하다. 네게도 아랫사람 중에 훌륭한 인물이 필요할 텐데, 그래 쓸만한 인물이 있느냐?"

그러자 자유가 대답하였다.

"예, 안심하십시오. 성은 담대(澹臺), 이름은 멸명(滅明)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인물로, 언제나 천하의 대도를 갈 뿐, 결코 지름길이나 뒤안길을 가지 않습니다[行不由徑]. 공적인 일이 아니면 저의 방에 찾아 오는 일이 없습니다. 정말 존경할 만한 훌륭한 인물입니다."

공자는 기뻐하며 훌륭한 인물은 소중히 대하라며 제자를 격려했다.

徑은 지름길이나 샛길을 뜻한다. 行不由徑이란 지름길이나 샛길을 가지 않고 떳떳하게 큰 길로 가는 것이니, 이는 곧 눈 앞의 이익을 탐하지 않고 정정 당당한 방법으로 일을 처리함을 비유한 말이다.

여기서 행불유경(行不由徑)이란 말이 나왔으며, 군자는 큰길을 택해서 간다는 뜻의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이란 말과 뜻이 통하는 말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君子大路行(군자대로행) | 行不由徑(행불유경) |

海不讓水 (해불양수)

海不讓水(해불양수)

海 바다 해 | 不 닐 불,아닐 부 | 讓 사양할 양 | 水 물 수 |

바다는 어떠한 물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여 거대한 대양을 이룬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을 차별않고 포용할 수 있다는 뜻.

중국 고문 중 명문으로 손꼽히는 ‘간축객서(諫逐客書)’의 ‘하해불택세류 고능취기심(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이라는 말에 나온다.

杏林春滿 (행림춘만)

杏林春滿(행림춘만)

杏 살구나무 행 | 林 수풀 림 | 春 봄 춘 | 滿 찰 만 |

진(晋)나라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 동봉(董奉)편의 이야기다. 삼국(三國)시대, 오(吳)나라에 동봉이라는 명의(名醫)가 있었다. 그의 집은 진찰 받으러 온 사람들로 하루 종일 붐볐으나, 그는 다른 의사들과는 달리 환자들로부터 치료비를 받지 않고, 완치된 후에는 몇 그루의 살구나무를 심게 하였다. 중병이었던 사람은 다섯 그루, 병이 가벼웠던 사람은 한 그루를 심게 하였다. 몇 년후, 그의 집은 수십만 그루의 살구나무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그 살구나무 숲을 동선행림(董仙杏林)이라 했다.

살구가 익을 때면 사람들이 살구를 사러 왔지만, 동봉은 한 그릇의 쌀과 한 그릇의 살구를 맞바꾸었다. 때로 반 그릇의 쌀을 놓고 한 그릇의 살구를 슬쩍 따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럴 때면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이들을 쫓아냈기 때문에, 후에는 아무도 양심을 속이려 들지 않았다. 동봉은 이렇게 하여 모아진 쌀로 가난한 이들을 도왔으며, 어느 날 신선이 되어 승천하였다고 한다. 杏林春滿이란 의술이 고명(高明)함을 비유한 말이다.

害群之馬 (해군지마)

害群之馬(해군지마)

중국 고전 ‘장자’에 나오는 고사성어다. 황제가 현명한 목동에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목동이 “‘말(言)을 듣지 않는 말(馬)’만 없애도 말 무리 전체가 편안해진다”고 답한데서 유래했다.

下筆成文 (하필성문, xiàbǐchéngwén)

下筆成文(하필성문)

下笔成文(xiàbǐchéngwén)

下 아래 하 | 筆 붓 필 | 成 이룰 성 | 文 글월 문 |


'붓을 들어 쓰기만 하면 문장이 이루어진다'라는 뜻으로, 뛰어난 글재주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시인 조식(曹植)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하필성장(下筆成章) 또는 하필성편(下筆成篇)이라고도 한다. 조식은 조조(曹操)의 셋째 아들로, 건안문학(建安文學)의 대표적 시인을 꼽힌다. 한번은 조조가 조식이 쓴 문장을 보고 그 출중함에 매우 놀라며 짐짓 "누가 대신 써 준 것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조식은 "저는 입을 열기만 하면 말이 되고, 붓을 놀리기만 하면 문장이 이루어지는데(言出爲論, 下筆成章), 누구에게 대신 써 달라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그 무렵 조조가 세운 동작대(銅雀臺)가 완성되어, 조조는 축성식에 참석한 아들들에게 동작대를 주제로 하여 부(賦)를 한 편씩 지어 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식은 순식간에 한 편의 빼어난 작품을 완성하여 사람들은 탄복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유명한 《동작대부(銅雀臺賦)》이다. 이 고사는 《삼국지(三國志)》의 〈위서(魏書)·진사왕식전(陳思王植傳)〉에 실려 있다. 진사왕은 조식의 시호이다.

또 조식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왕찬(王粲)을 높이 평가하여, 〈왕중선뢰〉를 지어 "문장은 봄꽃과 같고, 생각은 샘처럼 솟아오른다. 하는 말마다 읊조릴 만하고, 붓을 놀리면 작품이 된다(文若春華, 思若湧泉. 發言可詠, 下筆成篇)"라고 칭송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하필성문은 뛰어난 글재주나 그러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

下笔成章(하필성장,xiàbǐchéngzhāng) | 하필성편(下筆成篇) |

참조어

才占八斗(재점팔두) | 七步之才(칠보지재, qībùzhīcái) | 煮豆燃萁(자두연기) | 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 |


관련 한시

七步之詩(칠보지시) |


삼국지, 三國志, 삼국지:위서, 三國志:魏書, 삼국지:위서:진사왕식전, 三國志:魏書:陳思王植傳, 조식, 曹植 |

含哺鼓腹 (함포고복)

含哺鼓腹(함포고복)

含哺鼓腹(hánbǔgǔfù)

음식(飮食)을 먹으며 배를 두드린다라는 뜻으로, 천하(天下)가 태평(太平)하여 즐거운 모양(模樣)

출전
십팔사략(十八史略)

合浦珠還 (합포주환)

合浦珠還(합포주환)

合 합할 합/쪽문 합, 홉 홉 | 浦 개 포 | 珠 구슬 주 | 還 돌아올 환, 돌 선 |

합포(合浦)에 구슬이 다시 돌아왔다는 뜻으로, 지방(地方) 장관(長官)이 선정(善政)을 베풂을 이르는 말. 중국의 한(漢)나라 때 맹상(孟嘗)이라는 관리의 고사(故事)에서 유래.


후한서(後漢書) 맹상전(孟嘗傳)의 이야기.

중국 광서(廣西)지방의 합포(合浦)현은 지금의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합포현(合浦縣)의 북동쪽에 있는 지명이다. 합포는 농사는 잘 안 되었지만 바다에서 진주가 많이 채취되어, 주민들은 인근의 교지(交趾)와 진주를 교역하며 생활하였다. 합포에서 나는 진주는 둥글고 크며 빛깔이 순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합포주(合浦珠)'라고 부르며 귀하게 여겼다.

한(漢)나라 때, 합포군의 백성들은 모두 진주조개를 채취하여 생활을 하였으나, 합포에 부임한 관리들은 귀한 진주를 수탈하느라 주민들을 괴롭히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주민들은 진주를 캐 보아야 빼앗길 것이 뻔하므로 캐지 않게 되었고, 이리하여 채취량은 점점 줄어들었다. 양식을 바꿀 진주가 없어 주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였고, 굶어 죽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진주 조개들이 합포에서 살기 싫어 모두 월남땅으로 달아났네'라고 한탄하였다.

동한(東漢)의 순제(順帝)가 즉위하자, 곧 맹상을 합포의 태수로 파견하였다. 맹상은 먼저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불법행위를 엄단하여 진주 조개의 생산과 보호를 적극 지원하였다.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아, 합포 바다에는 다시 진주 조개가 나타나고 생산량도 증가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모두 '떠났던 진주가 다시 돌아왔네[曾未踰歲, 去珠復還]'라고 말했다.

여기서 유래하여 합포주환은 물건이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오거나 떠나갔던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 진귀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경우 등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순리열전(循吏列傳) | 후한서(後漢書) 맹상전(孟嘗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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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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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涸澤之蛇 (학택지사)

涸澤之蛇(학택지사)

涸 마를 학 | 澤 못 택 | 之 갈 지 | 蛇 뱀 사 |

물 마른 연못의 뱀. 남을 교묘히 이용하여 함께 이익을 얻는 일.


한비자 설림(說林)편에 나오는 물이 말라버린 어느 연못에 사는 뱀의 이야기.

어느 여름 날 가뭄에 연못의 물이 말라버렸다. 그 속에 사는 뱀들은 다른 연못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연못에 사는 작은 뱀이 나서서 큰 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앞장서고 내가 뒤 따라 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보통 뱀인 줄 알고 죽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저를 당신의 등에 태우고 가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조그만 내가 당신처럼 큰 뱀이 떠받드는 것을 보고 나를 아주 신성한 뱀, 즉 신군(神君)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 아무런 해도 안 끼치고 오히려 떠받들 것입니다."

큰 뱀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뱀들은 당당히 사람들이 많은 길로 이동하였다.

사람들은 큰 뱀이 작은 뱀을 떠받드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고 뱀들을 건들지 않았고, 결국 뱀들은 목적지까지 아무런 장애도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제(齊)나라 리더였던 전성자(田成子)가 위기에 빠져 정치적 목적으로 연(燕)나라로 갈 때 그의 부하였던 치이자피(鴟夷子皮)란 사람이 이 학택지사의 고사를 들어 자신이 모시던 전성자를 설득할 때 나온 이야기이다.

그는 이렇게 설득하였다.

"주군은 훌륭하시지만 저는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당신을 따른다면 남들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겠지만, 주군처럼 훌륭하신 분이 저를 받들고 따르신다면 세상 사람들은 저의 지위를 짐작 못하고 모두 융숭한 대접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같이 훌륭한 사람이 받드는 사람에 대한 나의 신분은 상상이 안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성자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이들 일행이 연나라에 들어갈 때 가는 곳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출전

한비자 설림(說林)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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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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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賀知章 (하지장, 659~744)

하지장 (賀知章, 659~744)

異名: 贺知章(Hè Zhīzhāng), 사명광객(四明狂客), 비서외감(秘書外監), 자 계진(季眞)·유마(維摩)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월주(越州) 영흥(永興:浙江省 會稽)


현종(玄宗)을 섬겼고, 시인 이백(李白)의 발견자로 알려진 중국 당나라의 시인.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부시랑(禮部侍郞), 공부시랑, 이어 태자빈객(太子賓客), 비서감(秘書監)을 역임했다.


자 계진(季眞) ·유마(維摩). 호 사명광객(四明狂客) ·비서외감(秘書外監). 월주(越州) 영흥(永興:浙江省 會稽) 출생. 695년에 진사에 등과하였다.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725년 예부시랑(禮部侍郞), 이듬해 공부시랑, 이어 태자빈객(太子賓客) ·비서감(秘書監)을 역임하였으며, 744년 귀향한 후 병사하였다. 현종(玄宗)을 섬겼고, 시인 이백(李白)의 발견자로 알려졌으며, 그 자신도 풍류인으로서 이름이 높아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도 읊은 것이 있다.


하지장(賀知章) 관련 한시

題袁氏別業(제원씨별업)
回鄕偶書(회향우서) 一首(1수) 二首(2수)

對酒憶賀監(대주억하감) 一首(1수) 李白(이백)

閒中眞味 (한중진미)

閒中眞味(한중진미)

한가한 가운데 깃드는 참된 멋

涸轍鮒魚 (학철부어)

涸轍鮒魚(학철부어)

涸 마를 후, 마를 학 | 轍 바퀴 자국 철 | 鮒 붕어 부 | 魚 물고기 어 |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물에 있는 붕어라는 뜻으로, 몹시 곤궁(困窮)하거나 위급(危急)한 처지(處地)에 있는 사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a fish in a dry rut-in extremities


장자(莊子) 외물(外物)편에는 다음과 같은 비유가 실려있다.

장주(莊周:장자)는 집이 가난하였다. 그래서 감하후(監河侯)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 장주에게 감하후가 말하였다.

"장차 내 봉읍(封邑)에서 사금을 받아들이려 하는데, 그것을 받아서 삼백 금쯤 꾸어 주겠소."

이에 장주가 화를 내며 안색을 고치고 말하였다.

"내 어제 이리로 올 때, 도중에 누가 부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 속에 붕어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내가 그놈을 보고, '붕어야, 왜 그러느냐'하자, 붕어가 말하기를, '저는 동해의 파신(波臣)입니다. 어디서 한 말이나 한 되쯤 되는 물을 가져다가 저를 살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좋다. 나는 지금 남쪽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로 가서 시장[西江]의 물을 터놓아 너를 맞아가게 하겠다. 그래도 되겠느냐?'하였죠. 그러자 붕어가 화를 내고 안색을 고치며 말하기를, '저는 제가 있어야 할 물을 잃어, 지금 있을 곳이 없습니다. 저는 단지 한 말이나 한 되쯤 되는 물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일찌감치 건어물(乾魚物) 가게로 가셔서 저를 찾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 속의 붕어와의 대화를 빌려, 부질없는 의문에 관심을 두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책을 마련하는 것이 인생의 제일의(第一義)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먼 물은 가까운 불을 끄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몹시 고단하고 옹색함에 대한 비유이다. 이 말은 철부지급(轍鮒之急), 학철지부(涸轍之鮒)라고도 한다.


출전

박택편(泊宅編), 장자(莊子) 외물편(外物篇)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枯魚之肆(고어지사) | 轍鮒之急(철부지급) | 涸轍鮒魚(학철부어) | 涸轍之鮒(학철지부) |

合從連衡 (합종연횡)

합종연횡 (合從連衡)

合 합할 합, 쪽문 합, 홉 홉 | 從 좇을 종 | 連 잇닿을 연 | 衡 저울대 형, 가로 횡 |


①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행(行)해졌던 최강국인 진(秦)과 연(燕)·제(齊)·초(楚)·한(韓)·위(魏)·조(趙)의 6국 사이의 외교(外交)방식(方式)으로 합종책(合從策)과 연횡책(連衡策)을 말함 ② 약자(弱者)끼리 세로로 연합(聯合)하여 강자(强者)에게 대항(對抗)하거나, 약자(弱者)들이 가로로 나란히 서서 강자(强者)와 화해(和解)함


소진(蘇秦)의 합종설(合從說)과 장의(張儀)의 연횡설(連衡說), 곧 전국(戰國) 시대(時代)의 군사(軍事) 동맹(同盟)의 형태(形態)에서 유래.

BC 4세기 말 여러 나라를 유세하고 있던 소진(蘇秦)은 우선 연에게, 이어서 다른 5국에게 '진 밑에서 쇠꼬리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닭의 머리가 되자'고 설득하여, 한위조연초제(韓魏趙燕楚齊) 6국을 종적(縱的)으로 연합시켜 서쪽의 강대한 진나라와 대결할 공수동맹을 맺도록 하였다. 이것을 합종(合從:從은 縱)이라 한다.

소진은 자신이 거쳐온 조나라를 시작으로 한, 위, 제, 초를 차례로 유세해 최종적으로 6국 동맹이라는 합종의 마지막 수순을 완성하였다. 소진 자신은 6국의 공동재상이 되어 각국을 돌며 강대국 진나라에 공동으로 맞서는 전략을 설파하고 다듬어 나갔다. 합종은 1강 독주체제를 막기 위한 전략이지만, 나머지 6국이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예측불허의 변수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와해될 수 있는 심각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뒤에 위나라 장의(張儀)는 합종은 일시적 허식에 지나지 않으며 진을 섬겨야 한다고, 6국을 돌며 연합할 것을 설득하여 진이 6국과 개별로 횡적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을 연횡(連衡:衡은 橫)이라고 한다.

장의의 연횡론은 진나라의 동방에 횡으로 늘어서 있는 6국을 각개 겨파해 최종적으로 천하를 통일한다는 전략이다. 철두철미하게 합종에 대응하는 전략으로 6국의 동맹을 와해시키는 것을 최종 목표로 했다. 장의의 연횡은 지극히 현실적인 전략이며, 궁극적으로는 6국의 소멸을 전제로 한 힘의 논리 그 자체였다.

결국 진은 합종을 타파한 뒤 6국을 차례로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하였다.

[출전]
사기(史記) |


사기(史記) |

項莊舞劍意在沛公 (항장무검의재패공)

項莊舞劍 意在沛公(항장무검 의재패공)

项庄舞剑 意在沛公(XiàngZhuāngwǔjiàn yìzàiPèigōng)

項 목 항 | 莊 장엄할 장 | 舞 춤출 무 | 劍 칼 검 | 意 뜻 의 | 在 있을 재 | 沛 성한 모양 패 | 公 함께 공 |


다른 의도가 있다. 목적은 다른 데 있다.


항장(項莊)이 검무를 추는 의도는 유방(劉邦)을 죽이는 데 있다. 《사기·항우본기(史記·項羽本紀)》에서, 한(漢)고조 유방(劉邦)이 초패왕 항우(項羽)가 베푸는 홍문연(鴻門宴)에 갔을 때, 항우의 모사인 범증(范增)이 항우의 무장인 항장에게 검무를 추는 척하면서 유방을 찔러 죽이게 하였는데, 유방의 모사인 장량(張良)이 범증의 의도를 간파하고 유방의 무장인 번쾌(樊噲)에게 “지금 항장이 검을 뽑아 검무를 추는 의도는 패공〔유방〕을 죽이는 데 있다.”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함.

[출전]
史記(사기):項羽本紀(항우본기)


史記, 사기, 史記:項羽本紀, 사기:항우본기 |

韓愈 (한유, 768~824)

한유(韓愈, 768~824)

異名: 자 퇴지(退之), 시호 문공(文公)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철학
출생지: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河南省)


송 대 이후 성리학의 선구자였던 중국 당나라의 문학가 겸 사상가. 산문의 문체개혁(文體改革)과 시에 있어 지적인 흥미를 정련(精練)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하는 등 문학상의 공적을 세웠다. 이는 송 대 이후 중국 산문문체의 표준이 되고 제재(題材)의 확장을 주는 등 영향을 주었다.


자 퇴지(退之). 시호 문공(文公).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河南省) 출생. 792년 진사에 등과, 지방 절도사의 속관을 거쳐 803년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을 때, 수도(首都)의 장관을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양산현(陽山縣:廣東省)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소환된 후로는 주로 국자감(國子監)에서 근무하였으며, 817년 오원제(吳元濟)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워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으나, 819년 헌종황제(憲宗皇帝)가 불골(佛骨)을 모신 것을 간하다가 조주(潮州:廣東省) 자사(刺史)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헌종 사후에 소환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올랐다.

문학상의 공적은 첫째, 산문의 문체개혁(文體改革)을 들 수 있다. 종래의 대구(對句)를 중심으로 짓는 변문(騈文)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형의 고문(古文)을 친구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창도하였다. 고문은 송대 이후 중국 산문문체의 표준이 되었으며, 그의 문장은 그 모범으로 알려졌다. 둘째, 시에 있어 지적인 흥미를 정련(精練)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 그 결과 때로는 난해하고 산문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대의 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 ·불교를 배격하였으며, 송대 이후 성리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작품은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40권) 《외집(外集)》(10권) 《유문(遺文)》(1권) 등의 문집에 수록되었다.


한유(韓愈) 관련 한시

過鴻溝(과홍구)
春雪(춘설)


한유 관련 고사성어

泰山北斗(태산북두)

汗牛充棟 (한우충동)

汗牛充棟(한우충동)

汗牛充栋(hànniúchōngdòng)

汗 땀 한, 현 이름 간 | 牛 소 우 | 充 채울 충 | 棟 마룻대 동 |

책이 매우 많음. 수레에 실어 운반(運搬)하면 소가 땀을 흘리게 되고, 쌓아올리면 들보에 닿을 정도(程度)의 양이라는 뜻으로, 장서(藏書)가 많음을 이르는 말

too many books to make the ox sweat or to fill the house to the rafters—an immense number of books


당나라의 명문가로 알려진 유종원(柳宗元)이 같은 시대의 역사학자 육문통을 위해 쓴 묘표(墓表)에 있는 말이다. 묘표란 죽은 사람의 사적과 덕행(德行)을 기리는 문장으로 돌에 새겨 무덤 앞에 세우는 것이다. "공자(孔子) '춘추'의 해석을 둘러싸고 1000명의 학자가 온갖 주석을 하고 있지만, 비뚤어진 해석이나 다른 학파에 대한 비난, 공격만이 눈에 띈다. 더욱이 그런 패거리들의 저작만이 세상(世上)에 횡행하고.「其爲書 處則充棟宇 出則汗牛馬 그 저서(著書)나 장서의 엄청남이란, 소장하면 건물을 꽉 메우고, 꺼내어 운반하게 되면 수레를 끄는 마소도 그 무게에 땀을 흘릴 정도다」라는 상태다. 한편 공자(孔子)의 본뜻에 합치한 학설은 세상(世上)에 묻힌 채로 있다."그는 학문계의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한탄했다.

[출전]
유종원(柳宗元)의 육문통(陸文通) 묘표(墓表)


관련 한자어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 (유의어)

五車(오거) | 五車書(오거서) | 五車之書(오거지서) | 充棟(충동)


독서 |

項羽 (항우)

項羽(항우)

이름: 项羽(Xiàng Yǔ), 본명 적(籍), 자 우(羽)
국적: 중국 진
활동분야: 군사, 정치
출생지: 중국 임회군 하상현


중국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과 천하를 놓고 다툰 무장.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봉기하여 진군을 도처에서 무찌르고 관중으로 들어갔다. 진을 멸망시킨 뒤 서초 패왕이라 칭했으나 해하에서 유방에게 포위되어 자살했다.


이름은 적(籍), 우(羽)는 자이다. 임회군 하상현(臨淮郡 下相縣:江蘇省) 출생.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젊은 시절 '문자는 제 이름을 쓸 줄 알면 충분하고, 검술이란 1인을 상대할 뿐인 하찮은 것'이라 하고, 회계산(會稽山)에 행차하는 시황제의 성대한 행렬을 보고 '저 녀석을 대신해 줄 테다'라고 호언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BC 209년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으로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봉기하여 회계군 태수를 참살하고 인수(印綬)를 빼앗은 것을 비롯하여 진군을 도처에서 무찌르고, 드디어 함곡관[函谷關]을 넘어 관중(關中)으로 들어갔다.

이어 앞서 들어와 있던 유방과 홍문(鴻門)에서 만나 이를 복속시켰으며, 진왕 자영(子拏)을 죽이고 도성 함양(咸陽)을 불사른 뒤에 팽성(彭城:徐州)에 도읍하여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각지에 봉한 제후를 통솔하지 못하여 해하(垓下)에서 한왕(漢王) 유방에게 포위되어 자살하였다.


항우 관련 한시

垓下歌(해하가)

韓偓 (한악)

한악(韓偓, 844~923)

異名: 자 치요(致堯)
국적: 중국 당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장안
주요저서: 향렴집


중국 당나라 말의 시인. 시집《향렴집(香奩集)》으로 유명하며 관능적인 정경을 화려하고 곱게 직설적으로 나타냈다. 그 시풍은 후세에 '향렴체(香奩體)'로 불렸다. 이외의 작품집으로 《옥초산인집(玉樵山人集)》등이 있다.


자 치요(致堯). 장안(長安) 출생. 889년 진사에 등과하여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병부시랑(兵部侍郞)까지 승진하였다. 소종(昭宗)의 신뢰가 두터웠고 멸망 직전의 당나라에 충절을 다하였으나, 주전충(朱全忠:뒤에 後梁의 太祖)의 미움을 받고 좌천되어 만년에는 민(閩:福建省)의 지배자 왕심지(王審知)의 비호를 받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염체(艶體)의 시집 《향렴집(香奩集)》(1권, 또는 3권)으로 유명하며, 온정균(溫庭筠)·이상은(李商隱)만큼 깊이는 없으나 보다 관능적인 정경을 염려(艶麗)하게 직설적으로 나타냈다. 그 시풍은 후세에 '향렴체(香奩體)'로 불렸다. 또 염체 이외의 작품집으로는 《옥초산인집(玉樵山人集)》 1권 (또는 《한림임집(韓翰林集)》 3권)이 있다.


한악(韓偓) 관련 한시

繞廊(요랑)

何紹基 (하소기, 1799~1873)

何紹基(하소기, 1799~1873)

이름: 何绍基(Hé Shào jī), 호 동주거사(東洲居士) 혹은 원수, 자(字) 자정(子貞)
국적: 중국 청(淸)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도주(道州:湖南省)


청나라 때 학자이며 서가이자 시인으로 한림원의 편수(編修)와 푸젠성[福建省]의 향시정고관(鄕試正考官)을 지냈다. 한비의 전예를 중심으로 한 임서(臨書)에 전념하였고, 독자적인 서경(書境)을 열어 제1류의 서가가 되었다.


자(字) 자정(子貞). 호 동주거사(東洲居士) 혹은 원수(猨叟). 도주(道州:湖南省) 출생. 1836년(道光16) 진사(進士)에 급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편수(編修)가 되었다. 푸젠성[福建省]의 향시정고관(鄕試正考官)이 되었으며, 1855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송(宋)나라의 소동파(蘇東坡)와 황산곡(黃山谷)의 시(詩)에 경도(傾倒), 시인으로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서(書)는 처음에 당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을 배우다가, 후에 완원(阮元)에 사사(師事)하여 금석비첩(金石碑帖)을 배워 한비(漢碑) ·북비(北碑)를 연구, 한비의 전예(篆隸)를 중심으로 한 임서(臨書)에 전념하였고, 독자적인 서경(書境)을 열어 제1류의 서가(書家)가 되었다. 그의 행초서(行草書)는 특이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소업(紹業) ·소기(紹祺) ·소경(紹京) 등 동생 모두 서(書)에 뛰어나 하씨사걸(何氏四傑)이라 불렸다.


하소기(何紹基) 관련 한시

慈仁寺荷花池(자인사하화지)

漢書 (한서) 班固 (반고) 097 外戚傳 (외척전)

漢書(한서) 班固(반고)

西域傳(서역전) 外戚傳(외척전) 元后傳(원후전)


《外戚傳上》

1 外戚傳上: 自古受命帝王及繼體守文之君,非獨內德茂也,蓋亦有外戚之助焉。夏之興也以塗山,而桀之放也用末喜;殷之興也以有娀又有榇,而紂之滅也嬖妲己;周之興也以姜嫄及太任、太姒,而幽王之禽也淫褒姒。故易基乾坤,詩首關雎,書美釐降,春秋譏不親迎。夫婦之際,人道之大倫也。禮之用,唯昏姻為兢兢。夫樂調而四時和,陰陽之變,萬物之統也,可不慎與!人能弘道,末如命何。甚哉妃匹之愛,君不能得之臣,父不能得之子,況卑下乎!既驩合矣,或不能成子姓,成子姓矣,而不能要其終,豈非命也哉!孔子罕言命,蓋難言之。非通幽明之變,惡能識乎性命!

2 外戚傳上: 漢興,因秦之稱號,帝母稱皇太后,祖母稱太皇太后,適稱皇后,妾皆稱夫人。又有美人、良人、八子、七子、長使、少使之號焉。至武帝制婕妤、娙娥、傛華、充依,各有爵位,而元帝加昭儀之號,凡十四等云。昭儀位視丞相,爵比諸侯王。婕妤視上卿,比列侯。娙娥視中二千石,比關內侯。傛華視真二千石,比大上造。美人視二千石,比少上造。八子視千石,比中更。充依視千石,比左更。七子視八百石,比右庶長。良人視八百石,比左庶長。長使視六百石,比五大夫。少使視四百石,比公乘。五官視三百石。順常視二百石。無涓、共和、娛靈、保林、良使、夜者皆視百石。上家人子、中家人子視有秩斗食云。五官以下,葬司馬門外。

3 外戚傳上: 高祖呂皇后,父呂公,單父人也,好相人。高祖微時,呂公見而異之,乃以女妻高祖,生惠帝、魯元公主。高祖為漢王,元年封呂公為臨泗侯,二年立孝惠為太子。

4 外戚傳上: 後漢王得定陶戚姬,愛幸,生趙隱王如意。太子為人仁弱,高祖以為不類己,常欲廢之而立如意,“如意類我”。戚姬常從上之關東,日夜啼泣,欲立其子。呂后年長,常留守,希見,益疏。如意且立為趙王,留長安,幾代太子者數。賴公卿大臣爭之,及叔孫通諫,用留侯之策,得無易。

5 外戚傳上: 呂后為人剛毅,佐高帝定天下,兄二人皆為列將,從征伐。長兄澤為周呂侯,次兄釋之為建成侯,逮高祖而侯者三人。高祖四年,臨泗侯呂公薨。

6 外戚傳上: 高祖崩,惠帝立,呂后為皇太后,乃令永巷囚戚夫人,髡鉗衣赭衣,令舂。戚夫人舂且歌曰:“子為王,母為虜,終日舂薄暮,常與死為伍!相離三千里,當誰使告女?”太后聞之大怒,曰:“乃欲倚女子邪?”乃召趙王誅之。使者三反,趙相周昌不遣。太后召趙相,相徵至長安。使人復召趙王,王來。惠帝慈仁,知太后怒,自迎趙王霸上,入宮,挾與起居飲食。數月,帝晨出射,趙王不能蚤起,太后伺其獨居,使人持鴆飲之。遲帝還,趙王死。太后遂斷戚夫人手足,去眼熏耳,飲瘖藥,使居鞠域中,名曰“人彘”。居數月,乃召惠帝視“人彘”。帝視而問知其戚夫人,乃大哭,因病,歲餘不能起。使人請太后曰:“此非人所為。臣為太后子,終不能復治天下!”以此日飲為淫樂,不聽政,七年而崩。

7 外戚傳上: 太后發喪,哭而泣不下。留侯子張辟彊為侍中,年十五,謂丞相陳平曰:“太后獨有帝,今哭而不悲,君知其解未?”陳平曰:“何解?”辟彊曰:“帝無壯子,太后畏君等。今請拜呂台、呂產為將,將兵居南北軍,及諸呂皆官,居中用事。如此則太后心安,君等幸脫禍矣!”丞相如辟彊計請之,太后說,其哭乃哀。呂氏權由此起。乃立孝惠後宮子為帝,太后臨朝稱制。復殺高祖子趙幽王友、共王恢及燕靈王建。遂立周呂侯子台為呂王,台弟產為梁王,建城侯釋之子祿為趙王,台子通為燕王,又封諸呂凡六人皆為列侯,追尊父呂公為呂宣王,兄周呂侯為悼武王。

8 外戚傳上: 太后持天下八年,病犬禍而崩,語在五行志。病困,以趙王祿為上將軍居北軍,梁王產為相國居南軍,戒產、祿曰:“高祖與大臣約,非劉氏王者天下共擊之,今王呂氏,大臣不平。我即崩,恐其為變,必據兵衛宮,慎毋送喪,為人所制。”太后崩,太尉周勃、丞相陳平、朱虛侯劉章等共誅產、祿,悉捕諸呂男女,無少長皆斬之。而迎立代王,是為孝文皇帝。

9 外戚傳上: 孝惠張皇后。宣平侯敖尚帝姊魯元公主,有女。惠帝即位,呂太后欲為重親,以公主女配帝為皇后。欲其生子,萬方終無子,乃使陽為有身,取後宮美人子名之,殺其母,立所名子為太子。

10 外戚傳上: 惠帝崩,太子立為帝,四年,乃自知非皇后子,出言曰:“太后安能殺吾母而名我!我壯即為所為。”太后聞而患之,恐其作亂,乃幽之永巷,言帝病甚,左右莫得見。太后下詔廢之,語在高后紀。遂幽死,更立恆山王弘為皇帝,而以呂祿女為皇后。欲連根固本牢甚,然而無益也。呂太后崩,大臣正之,卒滅呂氏。少帝恆山、淮南、濟川王,皆以非孝惠子誅。獨置孝惠皇后,廢處北宮,孝文後元年薨,葬安陵,不起墳。

11 外戚傳上: 高祖薄姬,文帝母也。父吳人,秦時與故魏王宗女魏媼通,生薄姬。而薄姬父死山陰,因葬焉。及諸侯畔秦,魏豹立為王,而魏媼內其女於魏宮。許負相薄姬,當生天子。是時項羽方與漢王相距滎陽,天下未有所定。豹初與漢擊楚,及聞許負言,心喜,因背漢而中立,與楚連和。漢使曹參等虜魏王豹,以其國為郡,而薄姬輸織室。豹已死,漢王入織室,見薄姬,有詔內後宮,歲餘不得幸。

12 外戚傳上: 始姬少時,與管夫人、趙子兒相愛,約曰:“先貴毋相忘!”已而管夫人、趙子兒先幸漢王。漢王四年,坐河南成皋靈臺,此兩美人侍,相與笑薄姬初時約。漢王問其故,兩人俱以實告。漢王心悽然憐薄姬,是日召欲幸之。對曰:“昨暮夢龍據妾胸。”上曰:“是貴徵也,吾為汝成之。”遂幸,有身。歲中生文帝,年八歲立為代王。自有子後,希見。高祖崩,諸幸姬戚夫人之屬,呂后怒,皆幽之不得出宮。而薄姬以希見故,得出從子之代,為代太后。太后弟薄昭從如代。

13 外戚傳上: 代王立十七年,高后崩。大臣議立後,疾外家呂氏彊暴,皆稱薄氏仁善,故迎立代王為皇帝,尊太后為皇太后,封弟昭為軹侯。太后母亦前死,葬櫟陽北。乃追尊太后父為靈文侯,會稽郡致園邑三百家,長丞以下使奉守寢廟,上食祠如法。櫟陽亦置靈文夫人園,令如靈文侯園儀。太后蚤失父,其奉太后外家魏氏有力,乃召復魏氏,賞賜各以親疏受之。薄氏侯者一人。

14 外戚傳上: 太后後文帝二歲,孝景前二年崩,葬南陵。用呂后不合葬長陵,故特自起陵,近文帝。

15 外戚傳上: 孝文竇皇后,景帝母也,呂太后時以良家子選入宮。太后出宮人以賜諸王各五人,竇姬與在行中。家在清河,願如趙,近家,請其主遣宦者吏“必置我籍趙之伍乃”。宦者忘之,誤置籍代伍中。籍奏,詔可。當行,竇姬涕泣,怨其宦者,不欲往,相彊乃肯行。至代,代王獨幸竇姬,生女嫖。孝惠七年,生景帝。

16 外戚傳上: 代王王后生四男,先代王未入立為帝而王后卒,及代王為帝後,王后所生四男更病死。文帝立數月,公卿請立太子,而竇姬男最長,立為太子。竇姬為皇后,女為館陶長公主。明年,封少子武為代王,後徙梁,是為梁孝王。

17 外戚傳上: 竇皇后親蚤卒,葬觀津。於是薄太后乃詔有司追封竇后父為安成侯,母曰安成夫人,令清河置園邑二百家,長丞奉守,比靈文園法。

18 外戚傳上: 竇后兄長君。弟廣國字少君,年四五歲時,家貧,為人所略賣,其家不知處。傳十餘家至宜陽,為其主人入山作炭。暮臥岸下百餘人,岸崩,盡厭殺臥者,少君獨脫不死。自卜,數日當為侯。從其家之長安,聞皇后新立,家在觀津,姓竇氏。廣國去時雖少,識其縣名及姓,又嘗與其姊采桑,墮,用為符信,上書自陳。皇后言帝,召見問之,具言其故,果是。復問其所識,曰:“姊去我西時,與我決傳舍中,饨沐沐我,已,飯我,乃去。”於是竇皇后持之而泣,侍御左右皆悲。乃厚賜之,家於長安。絳侯、灌將軍等曰:“吾屬不死,命乃且縣此兩人。此兩人所出微,不可不為擇師傅,又復放呂氏大事也。”於是乃選長者之有節行者與居。竇長君、少君由此為退讓君子,不敢以富貴驕人。

19 外戚傳上: 竇皇后疾,失明。文帝幸邯鄲慎夫人、尹姬,皆無子。文帝崩,景帝立,皇后為皇太后,乃封廣國為章武侯。長君先死,封其子彭祖為南皮侯。吳楚反時,太后從昆弟子竇嬰俠,喜士,為大將軍,破吳楚,封魏其侯。竇氏侯者凡三人。

20 外戚傳上: 竇太后好黃帝、老子言,景帝及諸竇不得不讀老子尊其術。太后後景帝六歲,凡立五十一年,元光六年崩,合葬霸陵。遺詔盡以東宮金錢財物賜長公主嫖。至武帝時,魏其侯竇嬰為丞相,後誅。

21 外戚傳上: 孝景薄皇后,孝文薄太后家女也。景帝為太子時,薄太后取以為太子妃。景帝立,立薄妃為皇后,無子無寵。立六年,薄太后崩,皇后廢。廢後四年薨,葬長安城東平望亭南。

22 外戚傳上: 孝景王皇后,武帝母也。父王仲,槐里人也。母臧兒,故燕王臧荼孫也,為仲妻,生男信與兩女。而仲死,臧兒更嫁為長陵田氏婦,生男蚡、勝。臧兒長女嫁為金王孫婦,生一女矣,而臧兒卜筮曰兩女當貴,欲倚兩女,奪金氏。金氏怒,不肯與決,乃內太子宮。太子幸愛之,生三女一男。男方在身時,王夫人夢日入其懷,以告太子,太子曰:“此貴徵也。”未生而文帝崩,景帝即位,王夫人生男。是時,薄皇后無子。後數歲,景帝立齊栗姬男為太子,而王夫人男為膠東王。

23 外戚傳上: 長公主嫖有女,欲與太子為妃,栗姬妒,而景帝諸美人皆因長公主見得貴幸,栗姬日怨怒,謝長主,不許。長主欲與王夫人,王夫人許之。會薄皇后廢,長公主日譖栗姬短。景帝嘗屬諸姬子,曰:“吾百歲後,善視之。”栗姬怒不肯應,言不遜,景帝心銜之而未發也。

24 外戚傳上: 長公主日譽王夫人男之美,帝亦自賢之。又耳曩者所夢日符,計未有所定。王夫人又陰使人趣大臣立栗姬為皇后。大行奏事,文曰:“‘子以母貴,母以子貴。’今太子母號宜為皇后。”帝怒曰:“是乃所當言邪!”遂案誅大行,而廢太子為臨江王。栗姬愈恚,不得見,以憂死。卒立王夫人為皇后,男為太子。封皇后兄信為蓋侯。

25 外戚傳上: 初,皇后始入太子家,後女弟兒姁亦復入,生四男。兒姁蚤卒,四子皆為王。皇后長女為平陽公主,次南宮公主,次隆慮公主。

26 外戚傳上: 皇后立九年,景帝崩。武帝即位,為皇太后,尊太后母臧兒為平原君,封田蚡為武安侯,勝為周陽侯。王氏、田氏侯者凡三人。蓋侯信好酒,田蚡、勝貪,巧於文辭。蚡至丞相,追尊王仲為共侯,槐里起園邑二百家,長丞奉守。及平原君薨,從田氏葬長陵,亦置園邑如共侯法。

27 外戚傳上: 初,皇太后微時所謂金王孫生女俗,在民間,蓋諱之也。武帝始立,韓嫣白之。帝曰:“何為不蚤言?”乃車駕自往迎之。其家在長陵小市,直至其門,使左右入求之。家人驚恐,女逃匿。扶將出拜,帝下車立曰:“大姊,何藏之深也?”載至長樂宮,與俱謁太后,太后垂涕,女亦悲泣。帝奉酒,前為壽。錢千萬,奴婢三百人,公田百頃,甲第,以賜姊。太后謝曰:“為帝費。”因賜湯沐邑,號修成君。男女各一人,女嫁諸侯,男號修成子仲,以太后故,橫於京師。太后凡立二十五年,後景帝十五歲,元朔三年崩,合葬陽陵。

28 外戚傳上: 孝武陳皇后,長公主嫖女也。曾祖父陳嬰與項羽俱起,後歸漢,為堂邑侯。傳子至孫午,午尚長公主,生女。

29 外戚傳上: 初,武帝得立為太子,長主有力,取主女為妃。及帝即位,立為皇后,擅寵驕貴,十餘年而無子,聞衛子夫得幸,幾死者數焉。上愈怒。后又挾婦人媚道,頗覺。元光五年,上遂窮治之,女子楚服等坐為皇后巫蠱祠祭祝詛,大逆無道,相連及誅者三百餘人。楚服梟首於市。使有司賜皇后策曰:“皇后失序,惑於巫祝,不可以承天命。其上璽綬,罷退居長門宮。”

30 外戚傳上: 明年,堂邑侯午薨,主男須嗣侯。主寡居,私近董偃。十餘年,主薨。須坐淫亂,兄弟爭財,當死,自殺,國除。後數年,廢后乃薨,葬霸陵郎官亭東。

31 外戚傳上: 孝武衛皇后字子夫,生微也。其家號曰衛氏,出平陽侯邑。子夫為平陽主謳者。武帝即位,數年無子。平陽主求良家女十餘人,飾置家。帝祓霸上,還過平陽主。主見所偫美人,帝不說。既飲,謳者進,帝獨說子夫。帝起更衣,子夫侍尚衣軒中,得幸。還坐驩甚,賜平陽主金千斤。主因奏子夫送入宮。子夫上車,主拊其背曰:“行矣!強飯勉之。即貴,願無相忘!”入宮歲餘,不復幸。武帝擇宮人不中用者斥出之,子夫得見,涕泣請出。上憐之,復幸,遂有身,尊寵。召其兄衛長君、弟青侍中。而子夫生三女,元朔元年生男據,遂立為皇后。

32 外戚傳上: 先是衛長君死,乃以青為將軍,擊匈奴有功,封長平侯。青三子皆襁褓中,皆為列侯。及皇后姊子霍去病亦以軍功為冠軍侯,至大司馬票騎將軍。青為大司馬大將軍。衛氏支屬侯者五人。青還,尚平陽主。

33 外戚傳上: 皇后立七年,而男立為太子。後色衰,趙之王夫人、中山李夫人有寵,皆蚤卒。後有尹婕妤、鉤弋夫人更幸。衛后立三十八年,遭巫蠱事起,江充為姦,太子懼不能自明,遂與皇后共誅充,發兵,兵敗,太子亡走。詔遣宗正劉長樂、執金吾劉敢奉策收皇后璽綬,自殺。黃門蘇文、姚定漢輿置公車令空舍,盛以小棺,瘞之城南桐柏。衛氏悉滅。宣帝立,及改葬衛后,追諡曰思后,置園邑三百家,長丞周衛奉守焉。

34 外戚傳上: 孝武李夫人,本以倡進。初,夫人兄延年性知音,善歌舞,武帝愛之。每為新聲變曲,聞者莫不感動。延年侍上起舞,歌曰:“北方有佳人,絕世而獨立,一顧傾人城,再顧傾人國。寧不知傾城與傾國,佳人難再得!”上嘆息曰:“善!世豈有此人乎?”平陽主因言延年有女弟,上乃召見之,實妙麗善舞。由是得幸,生一男,是為昌邑哀王。李夫人少而蚤卒,上憐閔焉,圖畫其形於甘泉宮。及衛思后廢後四年,武帝崩,大將軍霍光緣上雅意,以李夫人配食,追上尊號曰孝武皇后。

35 外戚傳上: 初,李夫人病篤,上自臨候之,夫人蒙被謝曰:“妾久寢病,形貌毀壞,不可以見帝。願以王及兄弟為託。”上曰:“夫人病甚,殆將不起,一見我屬託王及兄弟,豈不快哉?”夫人曰:“婦人貌不修飾,不見君父。妾不敢以燕惰見帝。”上曰:“夫人弟一見我,將加賜千金,而予兄弟尊官。”夫人曰:“尊官在帝,不在一見。”上復言欲必見之,夫人遂轉鄉歔欷而不復言。於是上不說而起。夫人姊妹讓之曰:“貴人獨不可一見上屬託兄弟邪?何為恨上如此?”夫人曰:“所以不欲見帝者,乃欲以深託兄弟也。我以容貌之好,得從微賤愛幸於上。夫以色事人者,色衰而愛弛,愛弛則恩絕。上所以攣攣顧念我者,乃以平生容貌也。今見我毀壞,顏色非故,必畏惡吐棄我,意尚肯復追思閔錄其兄弟哉!”及夫人卒,上以后禮葬焉。其後,上以夫人兄李廣利為貳師將軍,封海西侯,延年為協律都尉。

36 外戚傳上: 上思念李夫人不已,方士齊人少翁言能致其神。乃夜張燈燭,設帷帳,陳酒肉,而令上居他帳,遙望好女如李夫人之貌,還幄坐而步。又不得就視,上愈益相思悲感,為作詩曰:“是邪,非邪?立而望之,偏何姍姍其來遲!”令樂府諸音家絃歌之。上又自為作賦,以傷悼夫人,其辭曰:

37 外戚傳上: 美連娟以脩嫮兮,命樔絕而不長,飾新宮以延貯兮,泯不歸乎故鄉。慘鬱鬱其蕪穢兮,隱處幽而懷傷,釋輿馬於山椒兮,奄修夜之不陽。秋氣潛以淒淚兮,桂枝落而銷亡,神煢煢以遙思兮,精浮游而出谗。託沈陰以壙久兮,惜蕃華之未央,念窮極之不還兮,惟幼眇之相羊。函荾荴以俟風兮,芳雜襲以彌章,的容與以猗靡兮,縹飄姚虖愈莊。燕淫衍而撫楹兮,連流視而娥揚,既激感而心逐兮,包紅顏而弗明。驩接狎以離別兮,宵寤夢之芒芒,忽遷化而不反兮,魄放逸以飛揚。何靈魂之紛紛兮,哀裴回以躊躇,勢路日以遠兮,遂荒忽而辭去。超兮西征,屑兮不見。寢淫敞胧,寂兮無音,思若流波,怛兮在心。

38 外戚傳上: 亂曰:佳俠函光,隕朱榮兮,嫉妒闟葺,將安程兮!方時隆盛,年夭傷兮,弟子增欷,洿沬悵兮。悲愁於邑,喧不可止兮。嚮不虛應,亦云己兮。嫶妍太息,嘆稚子兮,懰慄不言,倚所恃兮。仁者不誓,豈約親兮?既往不來,申以信兮。去彼昭昭,就冥冥兮,既下新宮,不復故庭兮。嗚呼哀哉,想魂靈兮!

39 外戚傳上: 其後李延年弟季坐姦亂後宮,廣利降匈奴,家族滅矣。

40 外戚傳上: 孝武鉤弋趙婕妤,昭帝母也,家在河間。武帝巡狩過河間,望氣者言此有奇女,天子亟使使召之。既至,女兩手皆拳,上自披之,手即時伸。由是得幸,號曰拳夫人。先是其父坐法宮刑,為中黃門,死長安,葬雍門。

41 外戚傳上: 拳夫人進為婕妤,居鉤弋宮,大有寵,元始三年生昭帝,號鉤弋子。任身十四月乃生,上曰:“聞昔堯十四月而生,今鉤弋亦然。”乃命其所生門曰堯母門。後衛太子敗,而燕王旦、廣陵王胥多過失,寵姬王夫人男齊懷王、李夫人男昌邑哀王皆蚤薨,鉤弋子年五六歲,壯大多知,上常言“類我”,又感其生與眾異,甚奇愛之,心欲立焉,以其年稚母少,恐女主顓恣亂國家,猶與久之。

42 外戚傳上: 鉤弋婕妤從幸甘泉,有過見譴,以憂死,因葬雲陽。後上疾病,乃立鉤弋子為皇太子。拜奉車都尉霍光為大司馬大將軍,輔少主。明日,帝崩。昭帝即位,追尊鉤弋婕妤為皇太后,發卒二萬人起雲陵,邑三千戶。追尊外祖趙父為順成侯,詔右扶風置園邑二百家,長丞奉守如法。順成侯有姊君姁,賜錢二百萬,奴婢第宅以充實焉。諸昆弟各以親疏受賞賜。趙氏無在位者,唯趙父追封。

43 外戚傳上: 孝昭上官皇后。祖父桀,隴西上邽人也。少時為羽林期門郎,從武帝上甘泉,天大風,車不得行,解蓋授桀。桀奉蓋,雖風常屬車;雨下,蓋輒御。上奇其材力,遷未央廄令。上嘗體不安,及愈,見馬,馬多瘦,上大怒:“令以我不復見馬邪!”欲下吏,桀頓首曰:“臣聞聖體不安,日夜憂懼,意誠不在馬。”言未卒,泣數行下。上以為忠,由是親近,為侍中,稍遷至太僕。武帝疾病,以霍光為大將軍,太僕桀為左將軍,皆受遺詔輔少主。以前捕斬反者莽通功,封桀為安陽侯。

44 外戚傳上: 初,桀子安取霍光女,結婚相親,光每休沐出,桀常代光入決事。昭帝始立,年八歲,帝長姊鄂邑蓋長公主居禁中,共養帝。蓋主私近子客河間丁外人。上與大將軍聞之,不絕主驩,有詔外人侍長主。長主內周陽氏女,令配耦帝。時上官安有女,即霍光外孫,安因光欲內之。光以為尚幼,不聽。安素與丁外人善,說外人曰:“聞長主內女,安子容貌端正,誠因長主時得入為后,以臣父子在朝而有椒房之重,成之在於足下,漢家故事常以列侯尚主,足下何憂不封侯乎?”外人喜,言於長主。長主以為然,詔召安女入為婕妤,安為騎都尉。月餘,遂立為皇后,年甫六歲。

45 外戚傳上: 安以后父封桑樂侯,食邑千五百戶,遷車騎將軍,日以驕淫。受賜殿中,出對賓客言:“與我婿飲,大樂!”見其服飾,使人歸,欲自燒物。安醉則裸行內,與後母及父諸良人、侍御皆亂。子病死,仰而罵天。數守大將軍光,為丁外人求侯,及桀欲妄官祿外人,光執正,皆不聽。又桀妻父所幸充國為太醫監,闌入殿中,下獄當死。冬月且盡,蓋主為充國入馬二十匹贖罪,乃得減死論。於是桀、安父子深怨光而重德蓋主。知燕王旦帝兄,不得立,亦怨望,桀、安即記光過失予燕王,令上書告之,又為丁外人求侯。燕王大喜,上書稱:“子路喪姊,期而不除,孔子非之。子路曰:‘由不幸寡兄弟,不忍除之。’故曰:‘觀過知仁’。今臣與陛下獨有長公主為姊,陛下幸使丁外人侍之,外人宜蒙爵號。”書奏,上以問光,光執不許。及告光罪過,上又疑之,愈親光而疏桀、安。桀、安寖恚,遂結黨與謀殺光,誘徵燕王至而誅之,因廢帝而立桀。或曰:“當如皇后何?”安曰:“逐麋之狗,當顧菟邪!且用皇后為尊,一旦人主意有所移,雖欲為家人亦不可得,此百世之一時也。”事發覺,燕王、蓋主皆自殺。語在霍光傳。桀、安宗族既滅,皇后以年少不與謀,亦光外孫,故得不廢。皇后母前死,葬茂陵郭東,追尊曰敬夫人,置園邑二百家,長丞奉守如法。皇后自使私奴婢守桀、安冢。

46 外戚傳上: 光欲皇后擅寵有子,帝時體不安,左右及醫皆阿意,言宜禁內,雖宮人使令皆為窮恊,多其帶,後宮莫有進者。

47 外戚傳上: 皇后立十歲而昭帝崩,后年十四五云。昌邑王賀徵即位,尊皇后為皇太后。光與太后共廢王賀,立孝宣帝。宣帝即位,為太皇太后。凡立四十七年,年五十二,建昭二年崩,合葬平陵。

48 外戚傳上: 衛太子史良娣,宣帝祖母也。太子有妃,有良娣,有孺子,妻妾凡三等,子皆稱皇孫。史良娣家本魯國,有母貞君,兄恭。以元鼎四年入為良娣,生男進,號史皇孫。

49 外戚傳上: 武帝末,巫蠱事起,衛太子及良娣、史皇孫皆遭害。史皇孫有一男,號皇曾孫,時生數月,猶坐太子繫獄,積五歲乃遭赦。治獄使者邴吉憐皇曾孫無所歸,載以附史恭。恭母貞君年老,見孫孤,甚哀之,自養視焉。

50 外戚傳上: 後曾孫收養於掖庭,遂登至尊位,是為宣帝。而貞君及恭已死,恭三子皆以舊恩封。長子高為樂陵侯,曾為將陵侯,玄為平臺侯,及高子丹以功德封武陽侯,侯者凡四人。高至大司馬車騎將軍,丹左將軍,自有傳。

51 外戚傳上: 史皇孫王夫人,宣帝母也,名翁須,太始中得幸於史皇孫。皇孫妻妾無號位,皆稱家人子。征和二年,生宣帝。帝生數月,衛太子、皇孫敗,家人子皆坐誅,莫有收葬者,唯宣帝得全。即尊位後,追尊母王夫人諡曰悼后,祖母史良娣曰戾后,皆改葬,起園邑,長丞奉守。語在戾太子傳。地節三年,求得外祖母王媼,媼男無故,無故弟武皆隨使者詣闕。時乘黃牛車,故百姓謂之黃牛嫗。

52 外戚傳上: 初,上即位,數遣使者求外家,久遠,多似類而非是。既得王媼,令太中大夫任宣與丞相御史屬雜考問鄉里識知者,皆曰王嫗。嫗言名妄人,家本涿郡蠡吾平鄉。年十四嫁為同鄉王更得妻。更得死,嫁為廣望王迺始婦,產子男無故、武,女翁須。翁須年八九歲時,寄居廣望節侯子劉仲卿宅,仲卿謂迺始曰:“予我翁須,自養長之。”媼為翁須作縑單衣,送仲卿家。仲卿教翁須歌舞,往來歸取冬夏衣。居四五歲,翁須來言“邯鄲賈長兒求歌舞者,仲卿欲以我與之。”媼即與翁須逃走,之平鄉。仲卿載迺始共求媼,媼惶急,將翁須歸,曰:“兒居君家,非受一錢也,奈何欲予它人?”仲卿詐曰:“不也。”後數日,翁須乘長兒車馬過門,呼曰:“我果見行,當之柳宿。”媼與迺始之柳宿,見翁須相對涕泣,謂曰:“我欲為汝自言。”翁須曰:“母置之,何家不可以居?自言無益也。”媼與迺始還求錢用,隨逐至中山盧奴,見翁須與歌舞等比五人同處,媼與翁須共宿。明日,迺始留視翁須,媼還求錢,欲隨至邯鄲。媼歸,糶買未具,迺始來歸曰:“翁須已去,我無錢用隨也。”因絕至今,不聞其問。賈長兒妻貞及從者師遂辭:“往二十歲,太子舍人侯明從長安來求歌舞者,請翁須等五人。長兒使遂送至長安,皆入太子家。”及廣望三老更始、劉仲卿妻其等四十五人辭,皆驗。宣奏王媼悼后母明白,上皆召見,賜無故、武爵關內侯,旬月間,賞賜以鉅萬計。頃之,制詔御史賜外祖母號為博平君,以博平、蠡吾兩縣戶萬一千為湯沐邑。封舅無故為平昌侯,武為樂昌侯,食邑各六千戶。

53 外戚傳上: 初,迺始以本始四年病死,後三歲,家乃富貴,追賜諡曰思成侯。詔涿郡治冢室,置園邑四百家,長丞奉守如法。歲餘,博平君薨,諡曰思成夫人。詔徙思成侯合葬奉明顧成廟南,置園邑長丞,罷涿郡思成園。王氏侯者二人,無故子接為大司馬車騎將軍,而武子商至丞相,自有傳。

54 外戚傳上: 孝宣許皇后,元帝母也。父廣漢,昌邑人,少時為昌邑王郎。從武帝上甘泉,誤取它郎鞍以被其馬,發覺,吏劾從行而盜,當死,有詔募下蠶室。後為宦者丞。上官桀謀反時,廣漢部索,其殿中廬有索長數尺可以縛人者數千杖,滿一篋緘封,廣漢索不得,它吏往得之。廣漢坐論為鬼薪,輸掖庭,後為暴室嗇夫。時宣帝養於掖庭,號皇曾孫,與廣漢同寺居。時掖庭令張賀,本衛太子家吏,及太子敗,賀坐下刑,以舊恩養視皇曾孫甚厚。及曾孫壯大,賀欲以女孫妻之。是時,昭帝始冠,長八尺二寸。賀弟安世為右將軍,與霍將軍同心輔政,聞賀稱譽皇曾孫,欲妻以女,安世怒曰:“曾孫乃衛太子後也,幸得以庶人衣食縣官,足矣,勿復言予女事。”於是賀止。時許廣漢有女平君,年十四五,當為內者令歐侯氏子婦。臨當入,歐侯氏子死。其母將行卜相,言當大貴,母獨喜。賀聞許嗇夫有女,乃置酒請之,酒酣,為言“曾孫體近,下人,乃關內侯,可妻也。”廣漢許諾。明日嫗聞之,怒。廣漢重令為介,遂與曾孫,一歲生元帝。數月,曾孫立為帝,平君為婕妤。是時,霍將軍有小女,與皇太后有親。公卿議更立皇后,皆心儀霍將軍女,亦未有言。上乃詔求微時故劍,大臣知指,白立許婕妤為皇后。既立,霍光以后父廣漢刑人不宜君國,歲餘乃封為昌成君。

55 外戚傳上: 霍光夫人顯欲貴其小女,道無從。明年,許皇后當娠,病。女醫淳于衍者,霍氏所愛,嘗入宮侍皇后疾。衍夫賞為掖庭戶衛,謂衍“可過辭霍夫人行,為我求安池監。”衍如言報顯。顯因生心,辟左右,字謂衍:“少夫幸報我以事,我亦欲報少夫,可乎?”衍曰:“夫人所言,何等不可者!”顯曰:“將軍素愛小女成君,欲奇貴之,願以累少夫。”衍曰:“何謂邪?”顯曰:“婦人免乳大故,十死一生。今皇后當免身,可因投毒藥去也,成君即得為皇后矣。如蒙力事成,富貴與少夫共之。”衍曰:“藥雜治,當先嘗,安可?”顯曰:“在少夫為之耳。將軍領天下,誰敢言者?緩急相護,但恐少夫無意耳!”衍良久曰:“願盡力。”即擣附子,齎入長定宮。皇后免身後,衍取附子并合大醫大丸以飲皇后。有頃曰:“我頭岑岑也,藥中得無有毒?”對曰:“無有。”遂加煩懣,崩。衍出,過見顯,相勞問,亦未敢重謝衍。後人有上書告諸醫侍疾無狀者,皆收繫詔獄,劾不道。顯恐事急,即以狀具語光,因曰:“既失計為之,無令吏急衍!”光驚鄂,默然不應。其後奏上,署衍勿論。

56 外戚傳上: 許后立三年而崩,諡曰恭哀皇后,葬杜南,是為杜陵南園。後五年,立皇太子,乃封太子外祖父昌成君廣漢為平恩侯,位特進。後四年,復封廣漢兩弟,舜為博望侯,延壽為樂成侯。許氏侯者凡三人。廣漢薨,諡曰戴侯,無子,絕。葬南園旁,置邑三百家,長丞奉守如法。宣帝以延壽為大司馬車騎將軍,輔政。元帝即位,復封延壽中子嘉為平恩侯,奉戴侯後,亦為大司馬車騎將軍。

57 外戚傳上: 孝宣霍皇后,大司馬大將軍博陸侯光女也。母顯,既使淳于衍陰殺許后,顯因為成君衣補,治入宮具,勸光內之,果立為皇后。

58 外戚傳上: 初許后起微賤,登至尊日淺,從官車服甚節儉,五日一朝皇太后於長樂宮,親奉案上食,以婦道共養。及霍后立,亦修許后故事。而皇太后親霍后之姊子,故常竦體,敬而禮之。皇后轝駕侍從甚盛,賞賜官屬以千萬計,與許后時縣絕矣。上亦寵之,顓房燕。立三歲而光薨。後一歲,上立許后男為太子,昌成君者為平恩侯。顯怒恚不食,歐血,曰:“此乃民間時子,安得立?即后有子,反為王邪!”復教皇后令毒太子。皇后數召太子賜食,保阿輒先嘗之,后挾毒不得行。後殺許后事頗泄,顯遂與諸婿昆弟謀反,發覺,皆誅滅。使有司賜皇后策曰:“皇后熒惑失道,懷不德,挾毒與母博陸宣成侯夫人顯謀欲危太子,無人母之恩,不宜奉宗廟衣服,不可以承天命。烏呼傷哉!其退避宮,上璽綬有司。”霍后立五年,廢處昭臺宮。後十二歲,徙雲林館,乃自殺,葬昆吾亭東。

59 外戚傳上: 初,霍光及兄驃騎將軍去病皆自以功伐封侯居位,宣帝以光故,封去病孫山、山弟雲皆為列侯,侯者前後四人。

60 外戚傳上: 孝宣王皇后。其先高祖時有功賜爵關內侯,自沛徙長陵,傳爵至后父奉光。奉光少時好鬥雞,宣帝在民間數與奉光會,相識。奉光有女年十餘歲,每當適人,所當適輒死,故久不行。及宣帝即位,召入後宮,稍進為婕妤。是時,館陶主母華婕妤及淮陽憲王母張婕妤、楚孝王母衛婕妤皆愛幸。

61 外戚傳上: 霍皇后廢後,上憐許太子蚤失母,幾為霍氏所害,於是乃選後宮素謹慎而無子者,遂立王婕妤為皇后,令母養太子。自為后後,希見無寵。封父奉光為邛成侯。立十六年,宣帝崩,元帝即位,為皇太后。封太后兄舜為安平侯。後二年,奉光薨,諡曰共侯,葬長門南,置園邑二百家,長丞奉守如法。元帝崩,成帝即位,為太皇太后。復爵太皇太后弟駿為關內侯,食邑千戶。王氏列侯二人,關內侯一人。舜子章,章從弟咸,皆至左右將軍。時成帝母亦姓王氏,故世號太皇太后為邛成太后。

62 外戚傳上: 邛成太后凡立四十九年,年七十餘,永始元年崩,合葬杜陵,稱東園。奉光孫勳坐法免。元始中,成帝太后下詔曰:“孝宣王皇后,朕之姑,深念奉質共脩之義,恩結于心。惟邛成共侯國廢祀絕,朕甚閔焉。其封共侯曾孫堅固為邛成侯。”至王莽乃絕。



《外戚傳下》

1 外戚傳下: 孝元王皇后,成帝母也。家凡十侯,五大司馬,外戚莫盛焉。自有傳。

2 外戚傳下: 孝成許皇后,大司馬車騎將軍平恩侯嘉女也。元帝悼傷母恭哀后居位日淺而遭霍氏之辜,故選嘉女以配皇太子。初入太子家,上令中常侍黃門親近者侍送,還白太子懽說狀,元帝喜謂左右:“酌酒賀我!”左右皆稱萬歲。久之,有一男,失之。及成帝即位,立許妃為皇后,復生一女,失之。

3 外戚傳下: 初后父嘉自元帝時為大司馬車騎將軍輔政,已八九年矣。及成帝立,復以元舅陽平侯王鳳為大司馬大將軍,與嘉並。杜欽以為故事后父重於帝舅,乃說鳳曰:“車騎將軍至貴,將軍宜尊重之敬之,無失其意。蓋輕細微眇之漸,必生乖忤之患,不可不慎。衛將軍之日盛於蓋侯,近世之事,語尚在於長老之耳,唯將軍察焉。”久之,上欲專委任鳳,乃策嘉曰:“將軍家重身尊,不宜以吏職自絫。賜黃金二百斤,以特進侯就朝位。”後歲餘薨,諡曰恭侯。

4 外戚傳下: 后聰慧,善史書,自為妃至即位,常寵於上,後宮希得進見。皇太后及帝舅憂上無繼嗣,時又數有災異,劉向、谷永等皆陳其咎在於後宮。上然其言。於是省減椒房掖廷用度。皇后乃上疏曰:

5 外戚傳下: 妾誇布服糲食,加以幼稚愚惑,不明義理,幸得免離茅屋之下,備後宮埽除。蒙過誤之寵,居非命所當託,洿穢不修,曠職尸官,數逆至法,踰越制度,當伏放流之誅,不足以塞責。乃壬寅日大長秋受詔:“椒房儀法,御服輿駕,所發諸官署,及所造作,遺賜外家群臣妾,皆如竟寧以前故事。”妾伏自念,入椒房以來,遺賜外家未嘗踰故事,每輒決上,可覆問也。今誠時世異制,長短相補,不出漢制而已,纖微之間,未必可同。若竟寧前與黃龍前,豈相放哉?家吏不曉,今壹受詔如此,且使妾搖手不得。今言無得發取諸官,殆謂未央宮不屬妾,不宜獨取也。言妾家府亦不當得,妾竊惑焉。幸得賜湯沐邑以自奉養,亦小發取其中,何害於誼而不可哉?又詔書言服御所造,皆如竟寧前,吏誠不能揆其意,即且令妾被服所為不得不如前。設妾欲作某屏風張於某所,曰故事無有,或不能得,則必繩妾以詔書矣。此二事誠不可行,唯陛下省察。

6 外戚傳下: 官吏忮佷,必欲自勝。幸妾尚貴時,猶以不急事操人,況今日日益侵,又獲此詔,其操約人,豈有所訴?陛下見妾在椒房,終不肯給妾纖微內邪?若不私府小取,將安所仰乎?舊故,中宮乃私奪左右之賤繒,及發乘輿服繒,言為待詔補,已而伛易其中。左右多竊怨者,甚恥為之。又故事以特牛祠大父母,戴侯、敬侯皆得蒙恩以太牢祠,今當率如故事,唯陛下哀之!

7 外戚傳下: 今吏甫受詔讀記,直豫言使后知之,非可復若私府有所取也。其萌牙所以約制妾者,恐失人理。今但損車駕,及毋若未央宮有所發,遺賜衣服如故事,則可矣。其餘誠太迫急,奈何?妾薄命,端遇竟寧前。竟寧前於今世而比之,豈可耶?故時酒肉有所賜外家,輒上表乃決。又故杜陵梁美人歲時遺酒一石,肉百斤耳。妾甚少之,遺田八子誠不可若是。事率眾多,不可勝以文陳。俟自見,索言之,唯陛下深察焉!

8 外戚傳下: 上於是采劉向、谷永之言以報曰:

9 外戚傳下: 皇帝問皇后,所言事聞之。夫日者眾陽之宗,天光之貴,王者之象,人君之位也。夫以陰而侵陽,虧其正體,是非下陵上,妻乘夫,賤踰貴之變與?春秋二百四十二年,變異為眾,莫若日蝕大。自漢興,日蝕亦為呂、霍之屬見。以今揆之,豈有此等之效與?諸侯拘迫漢制,牧相執持之也,又安獲齊、趙七國之難?將相大臣褢誠秉忠,唯義是從,又惡有上官、博陸、宣成之謀?若乃徒步豪桀,非有陳勝、項梁之群也;匈奴、夷狄,非有冒頓、郅支之倫也。方外內鄉,百蠻賓服,殊俗慕義,八州懷德,雖使其懷挾邪意,猶不足憂,又況其無乎?求於夷狄無有,求於臣下無有,微後宮也當,何以塞之?

10 外戚傳下: 日者,建始元年正月,白氣出於營室。營室者,天子之後宮也。正月於尚書為皇極。皇極者,王氣之極也。白者西方之氣,其於春當廢。今正於王極之月,興廢氣於後宮,視后妾無能懷任保全者,以著繼嗣之微,賤人將起也。至其九月,流星如瓜,出於文昌,貫紫宮,尾委曲如龍,臨於鉤陳,此又章顯前尤,著在內也。其後則有北宮井溢,南流逆理,數郡水出,流殺人民。後則訛言傳相驚震,女童入殿,咸莫覺知。夫河者水陰,四瀆之長,今乃大決,沒漂陵邑,斯昭陰盛盈溢,違經絕紀之應也。乃昔之月,鼠巢于樹,野鵲變色。五月庚子,鳥焚其巢太山之域。《易》曰:“鳥焚其巢,旅人先笑後號咷。喪牛于易,凶。”言王者處民上,如鳥之處巢也,不顧卹百姓,百姓畔而去之,若鳥之自焚也,雖先快意說笑,其後必號而無及也。百姓喪其君,若牛亡其毛也,故稱凶。泰山,王者易姓告代之處,今正於岱宗之山,甚可懼也。三月癸未,大風自西搖祖宗寢廟,揚裂帷席,折拔樹木,頓僵車輦,毀壞檻屋,災及宗廟,足為寒心!四月己亥,日蝕東井,轉旋且索,與既無異。己猶戊也,亥復水也,明陰盛,咎在內。於戊己,虧君體,著絕世於皇極,顯禍敗及京都。於東井,變怪眾備,末重益大,來數益甚。成形之禍月以迫切,不救之患日寖婁深,咎敗灼灼若此,豈可以忽哉!

11 外戚傳下: 《書》云“高宗肜日,粵有雊雉。祖己曰:‘惟先假王正厥事。’”又曰“雖休勿休,惟敬五刑,以成三德。”即飭椒房及掖庭耳。今皇后有所疑,便不便,其條刺,使大長秋來白之。吏拘於法,亦安足過?蓋矯枉者過宜,古今同之。且財帛之省,特牛之祠,其於皇后,所以扶助德美,為華寵也。咎根不除,災變相襲,祖宗且不血食,何戴侯也!傳不云乎?“以約失之者鮮。”審皇后欲從其奢與?朕亦當法孝武皇帝也,如此則甘泉、建章可復興矣。世俗歲殊,時變日化,遭事制宜,因時而移,舊之非者,何可放焉!君子之道,樂因循而重改作。昔魯人為長府,閔子騫曰:“仍舊貫如之何?何必改作!”蓋惡之也。《詩》云:“雖無老成人,尚有典刑,曾是莫聽,大命以傾。”孝文皇帝,朕之師也。皇太后,皇后成法也。假使太后在彼時不如職,今見親厚,又惡可以踰乎!皇后其刻心秉德,毋違先后之制度,力誼勉行,稱順婦道,減省群事,謙約為右。其孝東宮,毋闕朔望,推誠永究,爰何不臧!養名顯行,以息眾讙,垂則列妾,使有法焉。皇后深惟毋忽!

12 外戚傳下: 是時大將軍鳳用事,威權尤盛。其後,比三年日蝕,言事者頗歸咎於鳳矣。而谷永等遂著之許氏,許氏自知為鳳所不佑。久之,皇后寵亦益衰,而後宮多新愛。后姊平安剛侯夫人謁等為媚道祝謯後宮有身者王美人及鳳等,事發覺,太后大怒,下吏考問,謁等誅死,許后坐廢處昭臺宮,親屬皆歸故郡山陽,后弟子平恩侯旦就國。凡立十四年而廢,在昭臺歲餘,還徙長定宮。

13 外戚傳下: 後九年,上憐許氏,下詔曰:“蓋聞仁不遺遠,誼不忘親。前平安剛侯夫人謁坐大逆罪,家屬幸蒙赦令,歸故郡。朕惟平恩戴侯,先帝外祖,魂神廢棄,莫奉祭祀,念之未嘗忘于心。其還平恩侯旦及親屬在山陽郡者。”是歲,廢后敗。先是廢后姊缅寡居,與定陵侯淳于長私通,因為之小妻。長紿之曰:“我能白東宮,復立許后為左皇后。”廢后因缅私賂遺長,數通書記相報謝。長書有誖謾,發覺,天子使廷尉孔光持節賜廢后藥,自殺,葬延陵交道廄西。

14 外戚傳下: 孝成班婕妤,帝初即位選入後宮。始為少使,蛾而大幸,為婕妤,居增成舍,再就館,有男,數月失之。成帝遊於後庭,嘗欲與婕妤同輦載,婕妤辭曰:“觀古圖畫,賢聖之君皆有名臣在側,三代末主乃有嬖女,今欲同輦,得無近似之乎?”上善其言而止。太后聞之,喜曰:“古有樊姬,今有班婕妤。”婕妤誦詩及窈窕、德象、女師之篇。每進見上疏,依則古禮。

15 外戚傳下: 自鴻嘉後,上稍隆於內寵。婕妤進侍者李平,平得幸,立為婕妤。上曰:“始衛皇后亦從微起。”乃賜平姓曰衛,所謂衛婕妤也。其後趙飛燕姊弟亦從自微賤興,踰越禮制,寖盛於前。班婕妤及許皇后皆失寵,稀復進見。鴻嘉三年,趙飛燕譖告許皇后、班婕妤挾媚道,祝詛後宮,詈及主上。許皇后坐廢。考問班婕妤,婕妤對曰:“妾聞‘死生有命,富貴在天。’修正尚未蒙福,為邪欲以何望?使鬼神有知,不受不臣之愬;如其無知,愬之何益?故不為也。”上善其對,憐憫之,賜黃金百斤。

16 外戚傳下: 趙氏姊弟驕妒,婕妤恐久見危,求共養太后長信宮,上許焉。婕妤退處東宮,作賦自傷悼,其辭曰:

17 外戚傳下: 承祖考之遺德兮,何性命之淑靈,登薄軀於宮闕兮,充下陳於後庭。蒙聖皇之渥惠兮,當日月之盛明,揚光烈之翕赫兮,奉隆寵於增成。既過幸於非位兮,竊庶幾乎嘉時,每寤寐而絫息兮,申佩離以自思,陳女圖以鏡監兮,顧女史而問詩。悲晨婦之作戒兮,哀褒、閻之為郵;美皇、英之女虞兮,榮任、姒之母周。雖愚陋其靡及兮,敢舍心而忘茲?歷年歲而悼懼兮,閔蕃華之不滋。痛陽祿與柘館兮,仍繈褓而離災,豈妾人之殃咎兮?將天命之不可求。

18 外戚傳下: 白日忽已移光兮,遂晻莫而昧幽,猶被覆載之厚德兮,不廢捐於罪郵。奉共養于東宮兮,託長信之末流,共洒埽於帷幄兮,永終死以為期。願歸骨於山足兮,依松柏之餘休。

19 外戚傳下: 重曰:潛玄宮兮幽以清,應門閉兮禁闥扃。華殿塵兮玉階労,中庭萋兮綠草生。廣室陰兮帷幄暗,房櫳虛兮風泠泠。感帷裳兮發紅羅,紛綷縩兮紈素聲。神眇眇兮密靚處,君不御兮誰為榮?俯視兮丹墀,思君兮履綦。仰視兮雲屋,雙涕兮橫流。顧左右兮和顏,酌羽觴兮銷憂。惟人生兮一世,忽一過兮若浮。已獨享兮高明,處生民兮極休。勉虞精兮極樂,與福祿兮無期。綠衣兮白華,自古兮有之。

20 外戚傳下: 至成帝崩,婕妤充奉園陵,薨,因葬園中。

21 外戚傳下: 孝成趙皇后,本長安宮人。初生時,父母不舉,三日不死,乃收養之。及壯,屬陽阿主家,學歌舞,號曰飛燕。成帝嘗微行出,過陽阿主,作樂。上見飛燕而說之,召入宮,大幸。有女弟復召入,俱為婕妤,貴傾後宮。

22 外戚傳下: 許后之廢也,上欲立趙婕妤。皇太后嫌其所出微甚,難之。太后姊子淳于長為侍中,數往來傳語,得太后指,上立封趙婕妤父臨為成陽侯。後月餘,乃立婕妤為皇后。追以長前白罷昌陵功,封為定陵侯。

23 外戚傳下: 皇后既立,後寵少衰,而弟絕幸,為昭儀。居昭陽舍,其中庭彤朱,而殿上觋漆,切皆銅沓冒黃金塗,白玉階,壁帶往往為黃金釭,函藍田璧,明珠、翠羽飾之,自後宮未嘗有焉。姊弟顓寵十餘年,卒皆無子。

24 外戚傳下: 末年,定陶王來朝,王祖母傅太后私賂遺趙皇后、昭儀,定陶王竟為太子。

25 外戚傳下: 明年春,成帝崩。帝素彊,無疾病。是時楚思王衍、梁王立來朝,明旦當辭去,上宿供張白虎殿。又欲拜左將軍孔光為丞相,已刻侯印書贊。昏夜平善,鄉晨,傅恊拦欲起,因失衣,不能言,晝漏上十刻而崩。民間歸罪趙昭儀,皇太后詔大司馬莽、丞相大司空曰:“皇帝暴崩,群眾讙譁怪之。掖庭令輔等在後庭左右,侍燕迫近,雜與御史、丞相、廷尉治問皇帝起居發病狀。”趙昭儀自殺。

26 外戚傳下: 哀帝既立,尊趙皇后為皇太后,封太后弟侍中駙馬都尉欽為新成侯。趙氏侯者凡二人。後數月,司隸解光奏言:

27 外戚傳下: 臣聞許美人及故中宮史曹宮皆御幸孝成皇帝,產子,子隱不見。

28 外戚傳下: 臣遣從事掾業、史望驗問知狀者掖庭獄丞籍武,故中黃門王舜、吳恭、靳嚴,官婢曹曉、道房、張棄,故趙昭儀御者于客子、王偏、臧兼等,皆曰宮即曉子女,前屬中宮,為學事史,通詩,授皇后。房與宮對食,元延元年中宮語房曰:“陛下幸宮。”後數月,曉入殿中,見宮腹大,問宮。宮曰:“御幸有身。”其十月中,宮乳掖庭牛官令舍,有婢六人。中黃門田客持詔記,盛綠綈方底,封御史中丞印,予武曰:“取牛官令舍婦人新產兒,婢六人,盡置暴室獄,毋問兒男女,誰兒也!”武迎置獄。宮曰:“

29 外戚傳下: 善臧我兒胞,丞知是何等兒也!”後三日,客持詔記與武,問“兒死未?手書對牘背。”武即書對:“兒見在,未死。”有頃,客出曰:“上與昭儀大怒,奈何不殺?”武叩頭啼曰:“

30 外戚傳下: 不殺兒,自知當死;殺之,亦死!”即因客奏封事,曰:“陛下未有繼嗣,子無貴賤,唯留意!”奏入,客復持詔記予武曰:“今夜漏上五刻,持兒與舜,會東交掖門。”武因問客:“陛下得武書,意何如?”曰:“储也。”武以兒付舜。舜受詔,內兒殿中,為擇乳母,告“善養兒,且有賞。毋令漏泄!”舜擇棄為乳母,時兒生八九日。後三日,客復持詔記,封如前予武,中有封小綠篋,記曰:“告武以篋中物書予獄中婦人,武自臨飲之。”武發篋中有裹藥二枚,赫蹄書,曰“告偉能:努力飲此藥,不可復入。女自知之!”偉能即宮。宮讀書已,曰:“果也,欲姊弟擅天下!我兒男也,額上有壯髮,類孝元皇帝。今兒安在?危殺之矣!奈何令長信得聞之?”宮飲藥死。後宮婢六人召入,出語武曰:“昭儀言‘女無過。寧自殺邪,若外家也?’我曹言願自殺。”即自繆死。武皆表奏狀。棄所養兒十一日,宮長李南以詔書取兒去,不知所置。

31 外戚傳下: 許美人前在上林涿沐館,數召入飾室中若舍,一歲再三召,留數月或半歲御幸。元延二年褱子,其十一月乳。詔使嚴持乳毉及五種和藥丸三,送美人所。後客子、偏、兼聞昭儀謂成帝曰:“常紿我言從宮中來,即從中宮來,許美人兒何從生中?許氏竟當復立邪!”懟,以手自擣,以頭擊壁戶柱,從床上自投地,啼泣不肯食,曰:“今當安置我,欲歸耳!”帝曰:“今故告之,反怒為!殊不可曉也。”帝亦不食。昭儀曰:“陛下自知是,不食為何?陛下常自言‘約不負女’,今美人有子,竟負約,謂何?”帝曰:“約以趙氏,故不立許氏。使天下無出趙氏上者,毋憂也!”後詔使嚴持綠囊書予許美人,告嚴曰:“美人當有以予女,受來,置飾室中簾南。”美人以葦篋一合盛所生兒,緘封,及綠囊報書予嚴。嚴持篋書,置飾室簾南去。帝與昭儀坐,使客子解篋緘。未已,帝使客子、偏、兼皆出,自閉戶,獨與昭儀在。須臾開戶,呼客子、偏、兼,使緘封篋及綠綈方底,推置屏風東。恭受詔,持篋方底予武,皆封以御史中丞印,曰:“告武:篋中有死兒,埋屏處,勿令人知。”武穿獄樓垣下為坎,埋其中。

32 外戚傳下: 故長定許貴人及故成都、平阿侯家婢王業、任孋、公孫習前免為庶人,詔召入,屬昭儀為私婢。成帝崩,未幸梓宮,倉卒悲哀之時,昭儀自知罪惡大,知業等故許氏、王氏婢,恐事泄,而以大婢羊子等賜予業等各且十人,以慰其意,屬無道我家過失。

33 外戚傳下: 元延二年五月,故掖庭令吾丘遵謂武曰:“掖庭丞吏以下皆與昭儀合通,無可與語者,獨欲與武有所言。我無子,武有子,是家輕族人,得無不敢乎?掖庭中御幸生子者輒死,又飲藥傷墯者無數,欲與武共言之大臣,票騎將軍貪耆錢,不足計事,奈何令長信得聞之?”遵後病困,謂武:“今我已死,前所語事,武不能獨為也,慎語!”

34 外戚傳下: 皆在今年四月丙辰赦令前。臣謹案永光三年男子忠等發長陵傅夫人冢。事更大赦,孝元皇帝下詔曰:“比朕不當所得赦也。”窮治,盡伏辜,天下以為當。魯嚴公夫人殺世子,齊桓召而誅焉,春秋予之。趙昭儀傾亂聖朝,親滅繼嗣,家屬當伏天誅。前平安剛侯夫人謁坐大逆,同產當坐,以蒙赦令,歸故郡。今昭儀所犯尤誖逆,罪重於謁,而同產親屬皆在尊貴之位,迫近幃幄,群下寒心,非所以懲惡崇誼示四方也。請事窮竟,丞相以下議正法。

35 外戚傳下: 哀帝於是免新成侯趙欽、欽兄子成陽侯訢,皆為庶人,將家屬徙遼西郡。時議郎耿育上疏言:

36 外戚傳下: 臣聞繼嗣失統,廢適立庶,聖人法禁,古今至戒。然大伯見歷知適,逡循固讓,委身吳粵,權變所設,不計常法,致位王季,以崇聖嗣,卒有天下,子孫承業,七八百載,功冠三王,道德最備,是以尊號追及大王。故世必有非常之變,然後乃有非常之謀。孝成皇帝自知繼嗣不以時立,念雖末有皇子,萬歲之後未能持國,權柄之重,制於女主,女主驕盛則耆欲無極,少主幼弱則大臣不使,世無周公抱負之輔,恐危社稷,傾亂天下。知陛下有賢聖通明之德,仁孝子愛之恩,懷獨見之明,內斷於身,故廢後宮就館之漸,絕微嗣禍亂之根,乃欲致位陛下以安宗廟。愚臣既不能深援安危,定金匱之計,又不知推演聖德,述先帝之志,乃反覆校省內,暴露私燕,誣汙先帝傾惑之過,成結寵妾妒媚之誅,甚失賢聖遠見之明,逆負先帝憂國之意。

37 外戚傳下: 夫論大德不拘俗,立大功不合眾,此乃孝成皇帝至思所以萬萬於眾臣,陛下聖德盛茂所以符合於皇天也,豈當世庸庸斗筲之臣所能及哉!且褒廣將順君父之美,匡捄銷滅既往之過,古今通義也。事不當時固爭,防禍於未然,各隨指阿從,以求容媚,晏駕之後,尊號已定,萬事已訖,乃探追不及之事,訐揚幽昧之過,此臣所深痛也!

38 外戚傳下: 願下有司議,即如臣言,宜宣布天下,使咸曉知先帝聖意所起。不然,空使謗議上及山陵,下流後世,遠聞百蠻,近布海內,甚非先帝託後之意也。蓋孝子善述父之志,善成人之事,唯陛下省察!

39 外戚傳下: 哀帝為太子,亦頗得趙太后力,遂不竟其事。傅太后恩趙太后,趙太后亦歸心,故成帝母及王氏皆怨之。

40 外戚傳下: 哀帝崩,王莽白太后詔有司曰:“前皇太后與昭儀俱侍帷幄,姊弟專寵錮寢,執賊亂之謀,殘滅繼嗣以危宗廟,誖天犯祖,無為天下母之義。貶皇太后為孝成皇后,徙居北宮。”後月餘,復下詔曰:“皇后自知罪惡深大,朝請希闊,失婦道,無共養之禮,而有狼虎之毒,宗室所怨,海內之讎也,而尚在小君之位,誠非皇天之心。夫小不忍亂大謀,恩之所不能已者義之所割也,今廢皇后為庶人,就其園。”是日自殺。凡立十六年而誅。先是有童謠曰:“燕燕,尾龚龚,張公子,時相見。木門倉琅根,燕飛來,啄皇孫。皇孫死,燕啄矢。”成帝每微行出,常與張放俱,而稱富平侯家,故曰張公子。倉琅根,宮門銅鍰也。

41 外戚傳下: 孝元傅昭儀,哀帝祖母也。父河內溫人,蚤卒,母更嫁為魏郡鄭翁妻,生男惲。昭儀少為上官太后才人,自元帝為太子,得進幸。元帝即位,立為婕妤,甚有寵。為人有材略,善事人,下至宮人左右,飲酒酹地,皆祝延之。產一男一女,女為平都公主,男為定陶恭王。恭王有材藝,尤愛於上。元帝既重傅婕妤,及馮婕妤亦幸,生中山孝王,上欲殊之於後宮,以二人皆有子為王,上尚在,未得稱太后,乃更號曰昭儀,賜以印綬,在婕妤上。昭其儀,尊之也。至成、哀時,趙昭儀、董昭儀皆無子,猶稱焉。

42 外戚傳下: 元帝崩,傅昭儀隨王歸國,稱定陶太后。後十年,恭王薨,子代為王。王母曰丁姬。傅太后躬自養視,既壯大,成帝無繼嗣。時中山孝王在。元延四年,孝王及定陶王皆入朝。傅太后多以珍寶賂遺趙昭儀及帝舅票騎將軍王根,陰為王求漢嗣。皆見上無子,欲豫自結為久長計,更稱譽定陶王。上亦自器之,明年,遂徵定陶王立為太子,語在哀紀。月餘,天子立楚孝王孫景為定陶王,奉恭王後。太子議欲謝,少傅閻崇以為“春秋不以父命廢王父命,為人後之禮不得顧私親,不當謝。”太傅趙玄以為當謝,太子從之。詔問所以謝狀,尚書劾奏玄,左遷少府,以光祿勳師丹為太傅。詔傅太后與太子母丁姬自居定陶國邸。下有司議皇太子得與傅太后、丁姬相見不,有司奏議不得相見。頃之,成帝母王太后欲令傅太后、丁姬十日一至太子家,成帝曰:“太子丞正統,當共養陛下,不得復顧私親。”王太后曰:“太子小,而傅太后抱養之,今至太子家,以乳母恩耳,不足有所妨。”於是令傅太后得至太子家。丁姬以不小養太子,獨不得。

43 外戚傳下: 成帝崩,哀帝即位。王太后詔令傅太后、丁姬十日一至未央宮。高昌侯董宏希指,上書言宜立丁姬為帝太后。師丹劾奏“宏懷邪誤朝,不道。”上初即位,謙讓,從師丹言止。後乃白令王太后下詔,尊定陶恭王為恭皇。哀帝因是曰:“春秋‘母以子貴’,尊傅太后為恭皇太后,丁姬為恭皇后,各置左右詹事,食邑如長信宮、中宮。追尊恭皇太后父為崇祖侯,恭皇后父為褒德侯。”後歲餘,遂下詔曰:“漢家之制,推親親以顯尊尊,定陶恭皇之號不宜復稱定陶。其尊恭皇太后為帝太太后,丁后為帝太后。”後又更號帝太太后為皇太太后,稱永信宮,帝太后稱中安宮,而成帝母太皇太后本稱長信宮,成帝趙后為皇太后,並四太后,各置少府、太僕,秩皆中二千石。為恭皇立寢廟於京師,比宣帝父悼皇考制度,序昭穆於前殿。

44 外戚傳下: 傅太后父同產弟四人,曰子孟、中叔、子元、幼君。子孟子喜至大司馬,封高武侯。中叔子晏亦大司馬,封孔鄉侯。幼君子商封汝昌侯,為太后父崇祖侯後,更號崇祖曰汝昌哀侯。太后同母弟鄭惲前死,以惲子業為陽信侯,追尊惲為陽信節侯。鄭氏、傅氏侯者凡六人,大司馬二人,九卿二千石六人,侍中諸曹十餘人。

45 外戚傳下: 傅太后既尊,後尤驕,與成帝母語,至謂之嫗。與中山孝王母馮太后並事元帝,追怨之,陷以祝詛罪,令自殺。元壽元年崩,合葬渭陵,稱孝元傅皇后云。

46 外戚傳下: 定陶丁姬,哀帝母也,易祖師丁將軍之玄孫。家在山陽瑕丘,父至廬江太守。始定陶恭王先為山陽王,而丁氏內其女為姬。王后姓張氏,其母鄭禮,即傅太后同母弟也。太后以親戚故,欲其有子,然終無有。唯丁姬河平四年生哀帝。丁姬為帝太后,兩兄忠、明。明以帝舅封陽安侯。忠蚤死,封忠子滿為平周侯。太后叔父憲、望。望為左將軍,憲為太僕。明為大司馬票騎將軍輔政。丁氏侯者凡二人,大司馬一人,將軍、九卿、二千石六人,等中諸曹亦十餘人。丁、傅以一二年間暴興尤盛。然哀帝不甚假以權勢,權勢不如王氏在成帝世也。

47 外戚傳下: 建平二年,丁太后崩。上曰:“《詩》云‘穀則異室,死則同穴’。昔季武子成寢,杜氏之墓在西階下,請合葬而許之。附葬之禮,自周興焉。孝子事亡如事存,帝太后宜起陵恭皇之園。”遣大司馬票騎將軍明東送葬于定陶,貴震山東。

48 外戚傳下: 哀帝崩,王莽秉政,使有司舉奏丁、傅罪惡。莽以太皇太后詔皆免官爵,丁氏徙歸故郡。莽奏貶傅太后號為定陶共王母,丁太后號曰丁姬。

49 外戚傳下: 元始五年,莽復言“共王母、丁姬前不臣妾,至葬渭陵,冢高與元帝山齊,懷帝太后、皇太太后璽綬以葬,不應禮。禮有改葬,請發共王母及丁姬冢,取其璽綬消滅,徙共王母及丁姬歸定陶,葬共王冢次,而葬丁姬復其故。”太后以為既已之事,不須復發。莽固爭之,太后詔曰:“因故棺為致槨作冢,祠以太牢。”謁者護既發傅太后冢,崩壓殺數百人;開丁姬槨戶,火出炎四五丈,吏卒以水沃滅乃得入,燒燔槨中器物。

50 外戚傳下: 莽復奏言:“前共王母生,僭居桂宮,皇天震怒,災其正殿;丁姬死,葬踰制度,今火焚其槨。此天見變以告,當改如媵妾也。臣前奏請葬丁姬復故,非是。共王母及丁姬棺皆名梓宮,珠玉之衣非藩妾服,請更以木棺代,去珠玉衣,葬丁姬媵妾之次。”奏可。既開傅太后棺,臭聞數里。公卿在位皆阿莽指,入錢帛,遣子弟及諸生四夷,凡十餘萬人,操持作具,助將作掘平共王母、丁姬故冢,二旬間皆平。莽又周棘其處以為世戒云。時有群燕數千,銜土投丁姬穿中。丁、傅既敗,孔鄉侯晏將家屬徙合浦,宗族皆歸故郡。唯高武侯喜得全,自有傳。

51 外戚傳下: 孝哀傅皇后,定陶太后從弟子也。哀帝為定陶王時,傅太后欲重親,取以配王。王入為漢太子,傅氏女為妃。哀帝即位,成帝大行尚在前殿,而傅太后封傅妃父晏為孔鄉侯,與帝舅陽安侯丁明同日俱封。時師丹諫,以為“天下自王者所有,親戚何患不富貴?而倉卒若是,其不久長矣!”晏封後月餘,傅妃立為皇后。傅氏既盛,晏最尊重。哀帝崩,王莽白太皇太后詔曰:“定陶共王太后與孔鄉侯晏同心合謀,背恩忘本,專恣不軌,與至尊同稱號,終沒,至乃配食於左坐,誖逆無道。今令孝哀皇后退就桂宮。”後月餘,復與孝成趙皇后俱廢為庶人,就其園自殺。

52 外戚傳下: 孝元馮昭儀,平帝祖母也。元帝即位二年,以選入後宮。時父奉世為執金吾。昭儀始為長使,數月至美人,後五年就館生男,拜為婕妤。時父奉世為右將軍光祿勳,奉世長男野王為左馮翊,父子並居朝廷,議者以為器能當其位,非用女寵故也。而馮婕妤內寵與傅昭儀等。

53 外戚傳下: 建昭中,上幸虎圈鬥獸,後宮皆坐。熊佚出圈,攀檻欲上殿。左右貴人傅昭儀等皆驚走,馮婕妤直前當熊而立,左右格殺熊。上問:“人情驚懼,何故前當熊?”婕妤對曰:“猛獸得人而止,妾恐熊至御坐,故以身當之。”元帝嗟嘆,以此倍敬重焉。傅昭儀等皆慚。明年夏,馮婕妤男立為信都王,尊婕妤為昭儀。元帝崩,為信都太后,與王俱居儲元宮。河平中,隨王之國。後徙中山,是為孝王。

54 外戚傳下: 後徵定陶王為太子,封中山王舅參為宜鄉侯。參,馮太后少弟也。是歲,孝王薨,有一男,嗣為王,時未滿歲,有眚病,太后自養視,數禱祠解。

55 外戚傳下: 哀帝即位,遣中郎謁者張由將毉治中山小王。由素有狂易病,病發怒去,西歸長安。尚書簿責擅去狀,由恐,因誣言中山太后祝詛上及太后。太后即傅昭儀也,素常怨馮太后,因是遣御史丁玄案驗,盡收御者官吏及馮氏昆弟在國者百餘人,分繫雒陽、魏郡、鉅鹿。數十日無所得,更使中謁者令史立與丞相長史大鴻臚丞雜治。立受傅太后指,幾得封侯,治馮太后女弟習及寡弟婦君之,死者數十人。巫劉吾服祝詛。毉徐遂成言習、君之曰“武帝時毉修氏刺治武帝得二千萬耳,今愈上,不得封侯,不如殺上,令中山王代,可得封。”立等劾奏祝詛謀反,大逆。責問馮太后,無服辭。立曰:“熊之上殿何其勇,今何怯哉!”太后還謂左右:“此乃中語,前世事,吏何用知之?是欲陷我效也!”乃飲藥自殺。

56 外戚傳下: 先未死,有司請誅之,上不忍致法,廢為庶人,徙雲陽宮。既死,有司復奏“太后死在未廢前。”有詔以諸侯王太后儀葬之。宜鄉侯參、君之、習夫及子當相坐者,或自殺,或伏法。參女弁為孝王后,有兩女,有司奏免為庶人,與馮氏宗族徙歸故郡。張由以先告賜爵關內侯,史立遷中太僕。

57 外戚傳下: 哀帝崩,大司徒孔光奏“由前誣告骨肉,立陷人入大辟,為國家結怨於天下,以取秩遷,獲爵邑,幸蒙赦令,請免為庶人,徙合浦”云。

58 外戚傳下: 中山衛姬,平帝母也。父子豪,中山盧奴人,官至衛尉。子豪女弟為宣帝婕妤,生楚孝王;長女又為元帝婕妤,生平陽公主。成帝時,中山孝王無子,上以衛氏吉祥,以子豪少女配孝王。元延四年,生平帝。

59 外戚傳下: 年二歲,孝王薨,代為王。哀帝崩,無嗣,太皇太后與新都侯莽迎中山王立為帝。莽欲顓國權,懲丁、傅行事,以帝為成帝後,母衛姬及外家不當得至京師。乃更立宗室桃鄉侯子成都為中山王,奉孝王後,遣少傅左將軍甄豐賜衛姬璽綬,即拜為中山孝王后,以苦陘縣為湯沐邑。又賜帝舅衛寶、寶弟玄爵關內侯。賜帝三妹,謁臣號修義君,哉皮為承禮君,鬲子為尊德君,食邑各二千戶。莽長子宇非莽隔絕衛氏,恐久後受禍,即私與衛寶通書記,教衛后上書謝恩,因陳丁、傅舊惡,幾得至京師。莽白太皇太后詔有司曰:“中山孝王后深分明為人後之義,條陳故定陶傅太后、丁姬誖天逆理,上僭位號,徙定陶王於信都,為共王立廟於京師,如天子制,不畏天命,侮聖人言,壞亂法度,居非其制,稱非其號。是以皇天震怒,火燒其殿,六年之間大命不遂,禍殃仍重,竟令孝哀帝受其餘災,大失天心,夭命暴崩,又令共王祭祀絕廢,精魂無所依歸。朕惟孝王后深說經義,明鏡聖法,懼古人之禍敗,近事之咎殃,畏天命,奉聖言,是乃久保一國,長獲天祿,而令孝王永享無彊之祀,福祥之大者也。朕甚嘉之。夫褒義賞善,聖王之制,其以中山故安戶七千益中山后湯沐邑,加賜及中山王黃金各百斤,增傅相以下秩。”

60 外戚傳下: 衛后日夜啼泣,思見帝,而但益戶邑。宇復教令上書求至京師。會事發覺,莽殺宇,盡誅衛氏支屬。衛寶女為中山王后,免后,徙合浦。唯衛后在,王莽篡國,廢為家人,後歲餘卒,葬孝王旁。

61 外戚傳下: 孝平王皇后,安漢公太傅大司馬莽女也。平帝即位,年九歲,成帝母太皇太后稱制,而莽秉政。莽欲依霍光故事,以女配帝,太后意不欲也。莽設變詐,令女必入,因以自重,事在莽傳。太后不得已而許之,遣長樂少府夏侯藩、宗正劉宏、少府宗伯鳳、尚書令平晏納采,太師光、大司徒馬宮、大司空甄豐、左將軍孫建、執金吾尹賞、行太常事太中大夫劉歆及太卜、太史令以下四十九人賜皮弁素績,以禮雜卜筮,太牢祠宗廟,待吉月日。明年春,遣大司徒宮、大司空豐、左將軍建、右將軍甄邯、光祿大夫歆奉乘輿法駕,迎皇后於安漢公第。宮、豐、歆授皇后璽紱,登車稱警蹕,便時上林延壽門,入未央宮前殿。群臣就位行禮,大赦天下。益封父安漢公地滿百里,賜迎皇后及行禮者,自三公以下至騶宰執事長樂、未央宮、安漢公第者,皆增秩,賜金帛各有差。皇后立三月,以禮見高廟。尊父安漢公號曰宰衡,位在諸侯王上。賜公夫人號曰功顯君,食邑。封公子安為褒新侯,臨為賞都侯。

62 外戚傳下: 后立歲餘,平帝崩。莽立孝宣帝玄孫嬰為孺子,莽攝帝位,尊皇后為皇太后。三年,莽即真,以嬰為定安公,改皇太后號為定安公太后。太后時年十八矣,為人婉瘱有節操。自劉氏廢,常稱疾不朝會。莽敬憚傷哀,欲嫁之,乃更號為黃皇室主,令立國將軍成新公孫建世子襐飾將毉往問疾。后大怒,笞鞭其旁侍御。因發病,不肯起,莽遂不復彊也。及漢兵誅莽,燔燒未央宮,后曰:“

63 外戚傳下: 何面目以見漢家!”自投火中而死。

64 外戚傳下: 贊曰:易著吉凶而言謙盈之效,天地鬼神至于人道靡不同之。夫女寵之興,繇至微而體至尊,窮富貴而不以功,此固道家所畏,禍福之宗也。序自漢興,終于孝平,外戚後庭色寵著聞二十有餘人,然其保位全家者,唯文、景、武帝太后及邛成后四人而已。至如史良娣、王悼后、許恭哀后身皆夭折不辜,而家依託舊恩,不敢縱恣,是以能全。其餘大者夷滅,小者放流,烏呼!鑒茲行事,變亦備矣。

下石上臺 (하석상대)

下石上臺(하석상대)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둘러 맞춤.

鶴首苦待 (학수고대)

鶴首苦待 (학수고대)

학의 목처럼 길게 늘여 기다린다는 뜻으로, 몹시 기다림

漢書 (한서) 班固 (반고)

漢書(한서) 班固(반고)

汉书(hànshū)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저술한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


12제기(帝紀)·8표(表)·10지(志), 70열전(列傳)으로 전 100권으로 이루어졌다. 《전한서(前漢書)》 또는 《서한서(西漢書)》라고도 한다. 《사기(史記)》와 더불어 중국 사학사상(史學史上) 대표적인 저작이다. 한 무제에서 끊긴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뒤를 이은 정사(正史)로 여겨지므로 '두 번째의 정사(正史)'라 하기도 한다.

처음 반고의 아버지 반표(班彪)가 《사기》에 부족한 점을 느꼈고, 또 무제(武帝) 이후의 일은 사기에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사서를 편집코자 《후전(後傳)》 65편을 편집하였다. 하지만 반표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54년에 사망하였다. 반고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수사(修史)의 일을 시작하였으나 한때 국사(國史)를 마음대로 한다는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다. 하지만 이후 누명을 벗어 명제(明帝)의 명으로 한서 저작에 종사하게 된다. 그 자세한 경과는 다음과 같다. 반고는 아버지의 유고를 정리하다가 "나라의 역사를 사사로이 개작하고 있다"(私改作國史)는 혐의로 고발당한다. 하지만 그가 소장하고 있던 문헌들이 압수되어 검토된 결과 오히려 명제(明帝)에게 난대령사(蘭臺令史)의 직책을 받아 역사 편찬 작업에 대한 지원을 받게 된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반고에 의해 장제(章帝) 건초연간(建初年間)에 일단 완성을 보았으나 <팔표(八表)>와 <천문지(天文志)>는 그의 죽음으로 미완성으로 남았다. 이를 누이동생 반소(班昭)가 화제(和帝)의 명으로 계승하였고, 다시 마속(馬續)의 보완(補完)으로 완성되었다.

《사기》가 상고시대부터 무제까지의 통사(通史)인 데 비하여 《한서》는 전한(前漢)만을 다룬 단대사(斷代史)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부터 왕망(王莽)의 난(亂)까지 12대(代) 230년 간의 기록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12제기(帝紀) ·8표(表) ·10지(志), 70열전(列傳)으로 그 체재(體裁)는 중국 정사편집의 전형(典型)으로서 답습되었다.《한서》는 《사기》와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곳도 있으나, 이미 후한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응소(應邵)·복건(服虔)·여순(如淳)·맹강(孟康) 등 20여 명의 주석가(注釋家)가 나타났으며, 그들의 주석은 당(唐)나라의 안사고(顔師古)의 주석으로 집대성되어 현재의 간본은 모두 안사고의 주석을 부각(付刻)한 것이다. 안사고 이후의 제가(諸家)의 주석은 청나라 말기의 왕선겸(王先謙)이 엮은 《한서보주(漢書補注)》에 집대성되어 있다.


관련 고사성어



04. 食貨志(식화지)

朝令暮改(조령모개) |



26. 董仲舒傳(동중서전)

临渊羡鱼(임연선어,línyuānxiànyú) 못에 가서 물고기를 탐내다. 《한서·동중서전(漢書·董仲舒傳)》의 “못에 가서 물고기를 탐내는 것보다는 물러나서 그물을 뜨는 편이 낫다.”는 고사에서 유래함 |

目不窥园(목불규전,mùbùkuīyuán) 정원의 꽃밭에 한눈팔지 않다. 《한서·동중서전(漢書·董仲舒傳)》에서, 동중서(董仲舒)가 독서에 전념하느라고 삼 년 동안 정원의 꽃밭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함 |

46. 趙尹韓張兩王傳(조윤한장양왕전)

五日京兆(오일경조,wǔrìjīngzhào) 경조윤(京兆尹)의 직책이 5일밖에 남지 않다. 《한서·장창전(漢書·張敞傳)》에서 서한(西漢)의 장창(張敞)이 경조윤(京兆尹)에서 면직되기 며칠전 부하 직원이 ‘경조윤은 5일밖에 더 못하는데 무슨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느냐?’며 태업을 한 고사에서 유래함 |

67. 外戚傳(외척전)

傾國之色(경국지색) |


참조항목

二十四史(이십사사) | 十八史略(십팔사략) |

韓非子 (한비자) 韓非 (한비) 036 難一 (난일)

韓非子(한비자) 韓非(한비)

外儲說右下(외제설우하) 難一(난일) 難二(난이)


1 難一: 晉文公將與楚人戰,召舅犯問之,曰:“吾將與楚人戰,彼眾我寡,為之奈何?”舅犯曰:“臣聞之,繁禮君子,不厭忠信;戰陣之閒,不厭詐偽。君其詐之而已矣。”文公辭舅犯,因召雍季而問之,曰:“我將與楚人戰,彼眾我寡,為之奈何?”雍季對曰:“焚林而田,偷取多獸,後必無獸;以詐遇民,偷取一時,後必無復。”文公曰:“善。”辭雍季,以舅犯之謀與楚人戰以敗之。歸而行爵,先雍季而後舅犯。群臣曰:“城濮之事,舅犯謀也,夫用其言而後其身可乎?”文公曰:“此非君所知也。夫舅犯言,一時之權也;雍季言,萬世之利也。”仲尼聞之,曰:“文公之霸也宜哉!既知一時之權,又知萬世之利。”

2 難一: 或曰:雍季之對,不當文公之問。凡對問者,有因問小大緩急而對也,所問高大而對以卑狹,則明主弗受也。今文公問以少遇眾,而對曰“後必無復”,此非所以應也。且文公不知一時之權,又不知萬世之利。戰而勝,則國安而身定,兵強而威立,雖有後復,莫大於此,萬世之利,奚患不至?戰而不勝,則國亡兵弱,身死名息,拔拂今日之死不及,安暇待萬世之利?待萬世之利在今日之勝,今日之勝在詐於敵,詐敵,萬世之利而已。故曰:雍季之對不當文公之問。且文公又不知舅犯之言,舅犯所謂不厭詐偽者,不謂詐其民,請詐其敵也。敵者,所伐之國也,後雖無復,何傷哉?文公之所以先雍季者,以其功耶?則所以勝楚破軍者,舅犯之謀也;以其善言耶?則雍季乃道其後之無復也,此未有善言也。舅犯則以兼之矣。舅犯曰“繁禮君子,不厭忠信”者,忠、所以愛其下也,信、所以不欺其民也。夫既以愛而不欺矣,言孰善於此?然必曰出於詐偽者,軍旅之計也。舅犯前有善言,後有戰勝,故舅犯有二功而後論,雍季無一焉而先賞。“文公之霸,不亦宜乎,”仲尼不知善賞也。

3 難一: 歷山之農者侵畔,舜往耕焉,期年,甽畝正。河濱之漁者爭坻,舜往漁焉,期年,而讓長。東夷之陶者器苦窳,舜往陶焉,期年而器牢。仲尼歎曰:“耕、漁與陶,非舜官也,而舜往為之者,所以救敗也。舜其信仁乎!乃躬藉處苦而民從之,故曰:聖人之德化乎!”

4 難一: 或問儒者曰:“方此時也,堯安在?”其人曰:“堯為天子。”“然則仲尼之聖堯奈何?聖人明察在上位,將使天下無姦也。今耕漁不爭,陶器不窳,舜又何德而化?舜之救敗也,則是堯有失也;賢舜則去堯之明察,聖堯則去舜之德化;不可兩得也。楚人有鬻楯與矛者,譽之曰:‘吾楯之堅,莫能陷也。’又譽其矛曰:‘吾矛之利,於物無不陷也。’或曰:‘以子之矛陷子之楯,何如?’其人弗能應也。夫不可陷之楯與無不陷之矛,不可同世而立。今堯、舜之不可兩譽,矛楯之說也。且舜救敗,期年已一過,三年已三過,舜有盡,壽有盡,天下過無已者,以有盡逐無已,所止者寡矣。賞罰使天下必行之,令曰:‘中程者賞,弗中程者誅。’令朝至暮變,暮至朝變,十日而海內畢矣,奚待期年?舜猶不以此說堯令從己,乃躬親,不亦無術乎?且夫以身為苦而後化民者,堯、舜之所難也;處勢而驕下者,庸主之所易也。將治天下,釋庸主之所易,道堯、舜之所難,未可與為政也。”

5 難一: 管仲有病,桓公往問之,曰:“仲父病,不幸卒於大命,將奚以告寡人?”管仲曰:“微君言,臣故將謁之。願君去豎刁,除易牙,遠衛公子開方。易牙為君主味,君惟人肉未嘗,易牙烝其子首而進之;夫人情莫不愛其子,今弗愛其子,安能愛君?君妒而好內,豎刁自宮以治內,人情莫不愛其身,身且不愛,安能愛君?聞開方事君十五年,齊、衛之間不容數日行,棄其母久宦不歸,其母不愛,安能愛君?臣聞之:‘矜偽不長,蓋虛不久。’願君去此三子者也。”管仲卒死,桓公弗行,及桓公死,蟲出尸不葬。

6 難一: 或曰:管仲所以見告桓公者,非有度者之言也。所以去豎刁、易牙者,以不愛其身,適君之欲也。曰“不愛其身,安能愛君”,然則臣有盡死力以為其主者,管仲將弗用也。曰“不愛其死力,安能愛君”,是君去忠臣也。且以不愛其身,度其不愛其君,是將以管仲之不能死公子糾度其不死桓公也,是管仲亦在所去之域矣。明主之道不然,設民所欲以求其功,故為爵祿以勸之;設民所惡以禁其姦,故為刑罰以威之。慶賞信而刑罰必,故君舉功於臣,而姦不用於上,雖有豎刁,其奈君何?且臣盡死力以與君市,君垂爵祿以與臣市,君臣之際,非父子之親也,計數之所出也。君有道,則臣盡力而姦不生;無道,則臣上塞主明而下成私。管仲非明此度數於桓公也,使去豎刁,一豎刁又至,非絕姦之道也。且桓公所以身死蟲流出尸不葬者,是臣重也;臣重之實,擅主也。有擅主之臣,則君令不下究,臣情不上通,一人之力能隔君臣之間,使善敗不聞,禍福不通,故有不葬之患也。明主之道,一人不兼官,一官不兼事。卑賤不待尊貴而進,論,大臣不因左右而見。百官修通,群臣輻湊。有賞者君見其功,有罰者君知其罪。見知不悖於前,賞罰不弊於後,安有不葬之患?管仲非明此言於桓公也,使去三子,故曰管仲無度矣。

7 難一: 襄子圍於晉陽中,出圍,賞有功者五人,高赫為賞首。張孟談曰:“晉陽之事,赫無大功,今為賞首何也?”襄子曰:“晉陽之事,寡人國家危,社稷殆矣。吾群臣無有不驕侮之意者,惟赫子不失君臣之禮,是以先之。”仲尼聞之曰:“善賞哉襄子!賞一人而天下為人臣者莫敢失禮矣。”

8 難一: 或曰:仲尼不知善賞矣。夫善賞罰者,百官不敢侵職,群臣不敢失禮。上設其法,而下無姦詐之心,如此,則可謂善賞罰矣。使襄子於晉陽也,令不行,禁不止,是襄子無國,晉陽無君也,尚誰與守哉?今襄子於晉陽也,知氏灌之,臼灶生龜,而民無反心,是君臣親也;襄子有君臣親之澤,操令行禁止之法,而猶有驕侮之臣,是襄子失罰也。為人臣者,乘事而有功則賞。今赫僅不驕侮而襄子賞之,是失賞也。明主賞不加於無功,罰不加於無罪。今襄子不誅驕侮之臣,而賞無功之赫,安在襄子之善賞也?故曰仲尼不知善賞。

9 難一: 晉平公與群臣飲,飲酣,乃喟然歎曰:“莫樂為人君!惟其言而莫之違。”師曠侍坐於前,援琴撞之,公披衽而避,琴壞於壁。公曰:“太師誰撞?”師曠曰:“今者有小人言於側者,故撞之。”公曰:“寡人也。”師曠曰:“啞!是非君人者之言也。”左右請除之。公曰:“釋之,以為寡人戒。”

10 難一: 或曰:平公失君道,師曠失臣禮。夫非其行而誅其身,君之於臣也;非其行則陳其言,善諫不聽則遠其身者,臣之於君也。今師曠非平公之行,不陳人臣之諫,而行人主之誅,舉琴而親其體,是逆上下之位,而失人臣之禮也。夫為人臣者,君有過則諫,諫不聽則輕爵祿以待之,此人臣之禮義也。今師曠非平公之過,舉琴而親其體,雖嚴父不加於子,而師曠行之於君,此大逆之術也。臣行大逆,平公喜而聽之,是失君道也。故平公之跡,不可明也,使人主過於聽而不悟其失。師曠之行亦不可明也,使姦臣襲極諫而飾弒君之道。不可謂兩明,此為兩過。故曰:平公失君道,師曠亦失臣禮矣。

11 難一: 齊桓公時,有處士曰小臣稷,桓公三往而弗得見。桓公曰:“吾聞布衣之士,不輕爵祿,無以易萬乘之主;萬乘之主,不好仁義,亦無以下布衣之士。”於是五往乃得見之。

12 難一: 或曰:桓公不知仁義。夫仁義者,憂天下之害,趨一國之患,不避卑辱謂之仁義。故伊尹以中國為亂,道為宰于湯;百里奚以秦為亂,道為虜于穆公;皆憂天下之害,趨一國之患,不辭卑辱,故謂之仁義。今桓公以萬乘之勢,下匹夫之士,將欲憂齊國,而小臣不行,見小臣之忘民也,忘民不可謂仁義。仁義者,不失人臣之禮,不敗君臣之位者也。是故四封之內,執會而朝名曰臣,臣吏分職受事名曰萌。今小臣在民萌之眾,而逆君上之欲,故不可謂仁義。仁義不在焉,桓公又從而禮之。使小臣有智能而遁桓公,是隱也,宜刑;若無智能而虛驕矜桓公,是誣也,宜戮;小臣之行,非刑則戮。桓公不能領臣主之理,而禮刑戮之人,是桓公以輕上侮君之俗教於齊國也,非所以為治也。故曰:桓公不知仁義。

13 難一: 靡笄之役,韓獻子將斬人,郤獻子聞之,駕往救之,比至,則已斬之矣。郤子因曰:“胡不以徇?”其僕曰:“曩不將救之乎?”郤子曰:“吾敢不分謗乎?”

14 難一: 或曰:郤子言不可不察也,非分謗也。韓子之所斬也,若罪人則不可救,救罪人,法之所以敗也,法敗則國亂;若非罪人,則勸之以徇,勸之以徇,是重不辜也,重不辜,民所以起怨者也,民怨則國危。郤子之言,非危則亂,不可不察也。且韓子之所斬若罪人,郤子奚分焉?斬若非罪人,則已斬之矣,而郤子乃至,是韓子之謗已成,而郤子且後至也。夫郤子曰“以徇”,不足以分斬人之謗,而又生徇之謗。是子言分謗也?昔者紂為炮烙,崇侯、惡來又曰斬涉者之脛也,奚分於紂之謗?且民之望於上也甚矣,韓子弗得,且望郤子之得之也;今郤子俱弗得,則民絕望於上矣,故曰:郤子之言非分謗也,益謗也。且郤子之往救罪也,以韓子為非也,不道其所以為非,而勸之“以徇”,是使韓子不知其過也。夫下使民望絕於上,又使韓子不知其失,吾未得郤子之所以分謗者也。

15 難一: 桓公解管仲之束縛而相之。管仲曰:“臣有寵矣,然而臣卑。”公曰:“使子立高、國之上。”管仲曰:“臣貴矣,然而臣貧。”公曰:“使子有三歸之家。”管仲曰:“臣富矣,然而臣疏。”於是立以為仲父。霄略曰:“管仲以賤為不可以治國,故請高、國之上;以貧為不可以治富,故請三歸;以疏為不可以治親,故處仲父。管仲非貪,以便治也。”

16 難一: 或曰:今使臧獲奉君令詔卿相,莫敢不聽,非卿相卑而臧獲尊也,主令所加,莫敢不從也。今使管仲之治,不緣桓公,是無君也,國無君不可以為治。若負桓公之威,下桓公之令,是臧獲之所以信也,奚待高、國、仲父之尊而後行哉?當世之行事都丞之下徵令者,不辟尊貴,不就卑賤。故行之而法者,雖巷伯信乎卿相;行之而非法者,雖大吏詘乎民萌。今管仲不務尊主明法,而事增寵益爵,是非管仲貪欲富貴,必闇而不知術也。故曰:管仲有失行,霄略有過譽。

17 難一: 韓宣王問於樛留:“吾欲兩用公仲、公叔其可乎?”樛留對曰:“昔魏兩用樓、翟而亡西河,楚兩用昭、景而亡鄢、郢,今君兩用公仲、公叔,此必將爭事而外市,則國必憂矣。”

18 難一: 或曰:昔者齊桓公兩用管仲、鮑叔,成湯兩用伊尹、仲虺。夫兩用臣者國之憂,則是桓公不霸,成湯不王也。湣王一用淖齒而手死乎東廟,主父一用李兌,減食而死。主有術,兩用不為患;無術,兩用則爭事而外市,一則專制而劫弒。今留無術以規上,使其主去兩用一,是不有西河、鄢、郢之憂,則必有身死減食之患。是樛留未有善以知言也。

韓非子 (한비자) 韓非 (한비) 022 說林上 (설림상)

韓非子(한비자) 韓非(한비)

喻老(유노) 說林上(설림상) 說林下(설림하)


1 說林上: 湯以伐桀,而恐天下言己為貪也,因乃讓天下於務光。而恐務光之受之也,乃使人說務光曰:“湯殺君而欲傳惡聲于子,故讓天下於子。”務光因自投於河。

2 說林上: 秦武王令甘茂擇所欲為於僕與行事,孟卯曰:“公不如為僕。公所長者、使也,公雖為僕,王猶使之於公也。公佩僕璽而為行事,是兼官也。”

3 說林上: 子圉見孔子於商太宰,孔子出,子圉入,請問客,太宰曰:“吾已見孔子,則視子猶蚤蝨之細者也。吾今見之於君。”子圉恐孔子貴於君也,因謂太宰曰:“君已見孔子,亦將視子猶蚤蝨也。”太宰因弗復見也。

4 說林上: 魏惠王為臼里之盟,將復立於天子,彭喜謂鄭君曰:“君勿聽,大國惡有天子,小國利之。若君與大不聽,魏焉能與小立之。”

5 說林上: 晉人伐邢,齊桓公將救之,鮑叔曰:“太蚤。邢不亡,晉不敝,晉不敝,齊不重。且夫持危之功,不如存亡之德大。君不如晚救之以敝晉,齊實利。待邢亡而復存之,其名實美。”桓公乃弗救。

6 說林上: 子胥出走,邊候得之,子胥曰:“上索我者,以我有美珠也。今我已亡之矣,我且曰子取吞之。”候因釋之。

7 說林上: 慶封為亂於齊而欲走越,其族人曰:“晉近,奚不之晉?”慶封曰:“越遠,利以避難。”族人曰:“變是心也,居晉而可。不變是心也,雖遠越,其可以安乎!”

8 說林上: 智伯索地於魏宣子,魏宣子弗予,任章曰:“何故不予?”宣子曰:“無故請地,故弗予。”任章曰:“無故索地,鄰國必恐,彼重欲無厭,天下必懼,君予之地,智伯必驕而輕敵,鄰邦必懼而相親,以相親之兵待輕敵之國,則智伯之命不長矣。《周書》曰:“將欲敗之,必姑輔之,將欲取之,必姑予之。”君不如予之以驕智伯。且君何釋以天下圖智氏,而獨以吾國為智氏質乎?”君曰:“善。”乃與之萬戶之邑,智伯大悅。因索地於趙,弗與,因圍晉陽,韓、魏反之外,趙氏應之內,智氏自亡。

9 說林上: 秦康公築臺三年,荊人起兵,將欲以兵攻齊,任妄曰:“饑召兵,疾召兵,勞召兵,亂召兵。君築臺三年,今荊人起兵將攻齊,臣恐其攻齊為聲,而以襲秦為實也,不如備之。”戍東邊,荊人輟行。

10 說林上: 齊攻宋,宋使臧孫子南求救於荊,荊大說,許救之,甚歡,臧孫子憂而反,其御曰:“索救而得,今子有憂色何也?”臧孫子曰:“宋小而齊大,夫救小宋而惡於大齊,此人之所以憂也,而荊王說,必以堅我也。我堅而齊敝,荊之所利也。”臧孫子乃歸,齊人拔五城於宋而荊救不至。

11 說林上: 魏文侯借道於趙而攻中山,趙肅侯將不許,趙刻曰:“君過矣。魏攻中山而弗能取,則魏必罷,罷則魏輕,魏輕則趙重。魏拔中山,必不能越趙而有中山也,是用兵者魏也,而得地者趙也。君必許之。許之而大歡,彼將知君利之也,必將輟行。君不如借之道,示以不得已也。”

12 說林上: 鴟夷子皮事田成子,田成子去齊,走而之燕,鴟夷子皮負傳而從,至望邑,子皮曰:“子獨不聞涸澤之蛇乎?澤涸,蛇將徙,有小蛇謂大蛇曰:子行而我隨之,人以為蛇之行者耳,必有殺子,不如相銜負我以行,人以我為神君也。乃相銜負以越公道,人皆避之,曰:神君也。今子美而我惡,以子為我上客,千乘之君也;以子為我使者,萬乘之卿也。子不如為我舍人。”田成子因負傳而隨之,至逆旅,逆旅之君待之甚敬,因獻酒肉。

13 說林上: 溫人之周,周不納客,問之曰:“客耶?”對曰:“主人。”問其巷人而不知也,吏因囚之,君使人問之曰:“子非周人也,而自謂非客何也?”對曰:“臣少也誦《詩》曰:普天之下,莫非王土,率土之濱,莫非王臣。今君,天子,則我天子之臣也,豈有為人之臣而又為之客哉?故曰主人也。”君使出之。

14 說林上: 韓宣王謂樛留曰:“吾欲兩用公仲、公叔其可乎?”對曰:“不可。晉用六卿而國分,簡公兩用田成、闞止而簡公殺,魏兩用犀首、張儀而西河之外亡。今王兩用之,其多力者樹其黨,寡力者借外權。群臣有內樹黨以驕主,有外為交以削地,則王之國危矣。”

15 說林上: 紹績昧醉寐而亡其裘,宋君曰:“醉足以亡裘乎?”對曰:“桀以醉亡天下,而。《康誥》曰:‘毋彝酒。’者,彝酒、常酒也,常酒者,天子失天下,匹夫失其身。”

16 說林上: 管仲、隰朋從於桓公而伐孤竹,春往冬反,迷惑失道,管仲曰:“老馬之智可用也。”乃放老馬而隨之,遂得道。行山中無水,隰朋曰:“蟻冬居山之陽,夏居山之陰,蟻壤一寸而仞有水。”乃掘地,遂得水。以管仲之聖,而隰朋之智,至其所不知,不難師於老馬與蟻,今人不知以其愚心而師聖人之智,不亦過乎。

17 說林上: 有獻不死之藥於荊王者,謁者操之以入,中射之士問曰:“可食乎?”曰:“可。”因奪而食之,王大怒,使人殺中射之士,中射之士使人說王曰:“臣問謁者曰可食,臣故食之,是臣無罪,而罪在謁者也。且客獻不死之藥,臣食之而王殺臣,是死藥也,是客欺王也。夫殺無罪之臣,而明人之欺王也,不如釋臣。”王乃不殺。

18 說林上: 田駟欺鄒君,鄒君將使人殺之,田駟恐,告惠子,惠子見鄒君曰:“今有人見君,則眇其一目,奚如?”君曰:“我必殺之。”惠子曰:“瞽,兩目眇,君奚為不殺?”君曰:“不能勿犁。”惠子曰:“田駟東慢齊侯,南欺荊王,駟之於欺人,瞽也,君奚怨焉?”鄒君乃不殺。

19 說林上: 魯穆公使眾公子或宦於晉,或宦於荊,犁鉏曰:“假人於越而救溺子,越人雖善遊,子必不生矣。失火而取水於海,海水雖多,火必不滅矣,遠水不救近火也。今晉與荊雖強,而齊近,魯患其不救乎?”

20 說林上: 嚴遂不善周君,患之,馮沮曰:“嚴遂相,而韓傀貴於君,不如行賊於韓傀,則君必以為嚴氏也。”

21 說林上: 張譴相韓,病將死,公乘無正懷三十金而問其疾,居一月自問張譴曰:“若子死,將誰使代子?”答曰:“無正重法而畏上,雖然,不如公子食我之得民也。”張譴死,因相公乘無正。

22 說林上: 樂羊為魏將而攻中山,其子在中山,中山之君烹其子而遺之羹,樂羊坐於幕下而啜之,盡一杯,文侯謂堵師贊曰:“樂羊以我故而食其子之肉。”答曰:“其子而食之,且誰不食?”樂羊罷中山,文侯賞其功而疑其心。

23 說林上: 孟孫獵得麑,使秦西巴持之歸,其母隨之而啼,秦西巴弗忍而與之,孟孫歸,至而求麑,答曰:“余弗忍而與其母。”孟孫大怒,逐之,居三月,復召以為其子傅,其御曰:“曩將罪之,今召以為子傅何也?”孟孫曰:“夫不忍麑,又且忍吾子乎?”故曰:“巧詐不如拙誠。”樂羊以有功見疑,秦西巴以有罪益信。

24 說林上: 曾從子,善相劍者也。衛君怨吳王,曾從子曰:“吳王好劍,臣相劍者也,臣請為吳王相劍,拔而示之,因為君刺之。”衛君曰:“子為之是也,非緣義也,為利也。吳強而富,衛弱而貧,子必往,吾恐子為吳王用之於我也。”乃逐之。

25 說林上: 紂為象箸而箕子怖,以為象箸必不盛羹於土簋,則必犀玉之杯,玉杯象箸必不盛菽藿,則必旄象豹胎,旄象豹胎必不衣短褐,而舍茅茨之下,則必錦衣九重,高臺廣室也。稱此以求,則天下不足矣。聖人見微以知萌,見端以知末,故見象箸而怖,知天下不足也。

26 說林上: 周公旦已勝殷,將攻商、蓋,辛公甲曰:“大難攻,小易服,不如服眾小以劫大。”乃攻九夷而商、蓋服矣。

27 說林上: 紂為長夜之飲,懼以失日,問其左右盡不知也,乃使人問箕子,箕子謂其徒曰:“為天下主而一國皆失日,天下其危矣。一國皆不知而我獨知之,吾其危矣。”辭以醉而不知。

28 說林上: 魯人身善織屨,妻善織縞,而欲徒於越,或謂之曰:“子必窮矣。”魯人曰:“何也?”曰:“屨為履之也,而越人跣行;縞為冠之也,而越人被髮。以子之所長,游於不用之國,欲使無窮,其可得乎?”

29 說林上: 陳軫貴於魏王,惠子曰:“必善事左右,夫楊橫樹之即生,倒樹之即生,折而樹之又生。然使十人樹之而一人拔之,則毋生楊至。以十人之眾,樹易生之物,而不勝一人者何也?樹之難而去之易也。子雖工自樹於王,而欲去子者眾,子必危矣。”

30 說林上: 魯季孫新弒其君,吳起仕焉。或謂起曰:“夫死者,始死而血,已血而衄,已衄而灰,已灰而土,及其土也,無可為者矣。今季孫乃始血,其毋乃未可知也。”吳起因去之晉。

31 說林上: 隰斯彌見田成子,田成子與登臺四望,三面皆暢,南望,隰子家之樹蔽之,田成子亦不言,隰子歸,使人伐之,斧離數創,隰子止之,其相室曰:“何變之數也?”隰子曰:“古者有諺曰:知淵中之魚者不祥。夫田子將有大事,而我示之知微,我必危矣。不伐樹未有罪也,知人之所不言,其罪大矣。”乃不伐也。

32 說林上: 楊子過於宋東之逆旅,有妾二人,其惡者貴,美者賤。楊子問其故,逆旅之父答曰:“美者自美,吾不知其美也,惡者自惡,吾不知其惡也。”楊子謂弟子曰:“行賢而去自賢之心,焉往而不美。”

33 說林上: 衛人嫁其子而教之曰:“必私積聚。為人婦而出,常也。其成居,幸也。”其子因私積聚,其姑以為多私而出之,其子所以反者倍其所以嫁。其父不自罪於教子非也,而自知其益富。今人臣之處官者皆是類也。

34 說林上: 魯丹三說中山之君而不受也,因散五十金事其左右,復見,未語,而君與之食。魯丹出,而不反舍,遂去中山。其御曰:“反見,乃始善我,何故去之?”魯丹曰:“夫以人言善我,必以人言罪我。”未出境,而公子惡之曰:“為趙來閒中山。”君因索而罪之。

35 說林上: 田伯鼎好士而存其君,白公好士而亂荊,其好士則同,其所以為則異。公孫友自刖而尊百里,豎刁自宮而諂桓公,其自刑則同,其所以自刑之為則異。慧子曰:“狂者東走,逐者亦東走,其東走則同,其所以東走之為則異。故曰:同事之人,不可不審察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