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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요자, 명궁과 참기름 장사

참기름 장사와 명궁

송나라에 진요자라는 명궁이 있었습니다. 그는 활을 어찌나 잘 쏘는지 나라안팎에 그와 겨룰 만한 궁사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모아 놓고 활을 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기름 파는 노인이 그 모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노인은 진요자가 화살 열 개 가운데 아홉개를 명중시키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진요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노인장, 제 궁술의 비결이 뭔지 궁금하십니까?"

그러자 노인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습니다.

"뭐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겠습니까? 활이 당신 손에 푹 익은 것 같군요."

노인의 말에 진요자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니 제 솜씨를 어찌 그렇게 가볍게 평가하십니까? 이건 하루 이틀에 배울 수 있는 궁술이 아닙니다."

노인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 화내지 마시오. 내가 참기름 장사를 오래 하다보니 조금 이치를 아는 것 뿐이라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요자가 묻자 노인은 호리박처럼 생긴 참기름 병을 꺼내 땅 위에 놓더니 엽전으로 그 주둥이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참기름을 국자로 떠서 병 속에 흘려 넣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의 키높이에서 흘려보낸 참기름이 엽전의 조그만 구멍 속으로 정확하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진요자가 살펴보니 엽전에는 침기름이 한 방울도 붇지 않았습니다. 진요자는 노인의 솜씨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아아, 놀라지 마시오. 나도 뭐 별다른 비결이 있는게 아니니까. 다만 손에 푹 익었을 뿐이라오."

그 말을 들은 진요자는 노인에게 깊이 머리 숙여 절을 했습니다. 이후 진요자는 활을 쏘는데 있어 결코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좋은글 중에서]


받은 글입니다.

樂雷發 (악뇌발, Lè Léifā)

樂雷發(악뇌발)

異名: 乐雷发(Lè Léi fā), 낙뢰발


송대(宋代) 시인.


중국 문학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시 문학은 당송 시대를 거치며 완성 단계에 이른다.

그 중 송시(宋詩)는 이민족의 침략과 불안한 정치 현실 속에서 당시를 뛰어넘어 고전 시가의 새 지평을 연 중국 고전 시가이다. 송시는 화려한 봄꽃에 비유되는 당시와 달리 포근하면서도 은은한 멋으로 가을 국화에 비유되곤 한다. 이는 철저한 문치를 내세웠던 송대의 시대의식이 시 속에 고스란히 투영된 결과이다.

당시의 완성도 높은 시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아픔과 사회 문제 등을 깊이 있게 다루어 당시와는 다른 독자적인 시 세계를 보여 주었다.

송대는 성리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성적 사유 세계가 찬란하게 꽃피었던 시기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라 안팎이 혼란하여 정치적 파벌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북방 이민족의 침략으로 북송이 멸망하는 비운을 맞기도 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국가 존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인들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 좌절은 클 수밖에 없었고 이는 시인 자신이 몸담은 조정을 향한 질타, 떠올리기조차 싫은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 그리고 자신의 실존에 대한 번민의 형태로 시 속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또한 금의 건국으로 한족과 이민족 사이의 갈등이 불가피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세계관을 확장해 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국토 회복에 대한 열망은 육유나 문천상 등의 애국 시인들의 출현을 불러오기도 했다.

송대 시인들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남녀 간의 애정, 자연 풍류 등 개인적 서정의 표출은 억제했고, 시대 의식이나 성리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주제를 적극적으로 시에 담아내고자 했다. 이로써 송시는 시 세계가 개인의 감성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비판과 실천적 문제로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고전 시가의 새 지평을 열었다.

송시는 당시의 완성도 높은 시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아픔과 사회 문제 등을 깊이 있게 다루어 송시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했다. 왕우칭, 양만리 등은 소재를 일상생활로 확장하여 도공이나 화전민, 농가의 모습 등을 시 속에 진실하게 담아냈으며, 매요신과 소식 등은 고양이를 제사 지내거나 바위 아래 놓인 개미의 모습을 보며 자유롭게 시상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는 통찰력 있는 세계관과 개성적인 표현으로 진일보한 송시의 일면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악뢰발 관련 한시

秋日行村路(추일행촌로)

三十六計走爲上策 (삼십육계주위상책)

三十六計走爲上策(삼십육계주위상책)

三十六计,走为上策(sānshíliùjì, zǒuwéishàngcè)

三 석 삼 | 十 열 십 | 六 여섯 륙 | 計 꾀 계 | 走 달아날 주 | 爲 할 위 | 上 위 상 | 策 계책 책 |


서른여섯 가지 계책 가운데 도망가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이라는 뜻으로, 상황이 불리할 때는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뜻.


송(宋) 나라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 141권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제(齊)나라 제5대 황제 명제(明帝) 때 일어난 일이다. 명제는 고제(高帝)의 사촌 형제인데, 고제의 증손(제3, 4대 황제)들을 죽이고 황제위를 빼앗았다. 그는 황제에 즉위한 이후 반란과 보복이 두려워 자기를 반대한 형제와 조카 14명을 살해한 것은 물론 자기 주위 사람들마저도 자신에게 반대하면 여지없이 죽였다. 그뿐만 아니라 와병 중에도 왕족을 10여 명이나 죽였다. 명제의 가차없는 살해 행위에 회계(會稽) 지방 태수(太守) 왕경칙(王敬則)은 개국 공신인데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먼저 군사를 일으켰다. 왕경칙은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건강(建康:지금의 난징)을 향해 진격하였는데, 도중에 명제의 학정(虐政)에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가세하여 군사가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왕경칙은 출정한 지 10여 일 만에 건강과 흥성성(興盛城)을 함락하는 등 그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이때 병석에 누워 있던 명제 대신에 정사를 돌보고 있던 태자 소보권(蕭寶卷)은 건강과 흥성성의 함락 소식을 듣자 피난 준비를 서둘렀다. 소보권의 피난 소식을 들은 왕경칙은 “단(檀) 장군의 36가지 계책 가운데 도망치는 것이 제일 상책이니 너희 부자는 어서 도망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檀公三十六策 走爲上策 計汝父子唯有走耳].”라고 자신 있게 충고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당당한 왕경칙도 결국 제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어 참수당하였다.

승산 없는 싸움은 피하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말이 있듯이 상황이 불리하면 일단 후퇴하였다가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지혜로운 군사적인 전술이다. 삼십육계주위상책도 전세가 매우 불리하면 일단 작전상 후퇴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책이라는 뜻이다. 단 장군은 남북조시대 남조 최초의 왕조인 송(宋) 무제(武帝)의 건국을 도운 명장 단도제(檀道濟)로, 북위(北魏)와 싸울 때 전세가 불리하면 잘 도망쳤다고 한다. 동의어는 삼십육계주위상계(三十六計走爲上計)이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三十六計走爲上計(삼십육계주위상계) | 三十六計走爲上策(삼십육계주위상책) | 走爲上(주위상) | 走爲上計(주위상계) |
走爲上策(주위상책) |

梅妻鶴子 (매처학자, méiqīhèzǐ)

梅妻鶴子(매처학자)

梅妻鹤子(méiqīhèzǐ)

梅 매화 매 | 妻 아내 처 | 鶴 학 학,흴 학 | 子 아들 자 |


매화(梅花)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子息)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선비의 풍류(風流) 생활(生活)을 두고 이르는 말


송나라의 완열(阮閱)이 편집한 시화집《시화총귀(詩話總龜):원명은 시총(詩總)》에 나오는 말이다. 송(宋)나라 때 임포(林浦)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생을 홀아비로 살면서 세속의 영리를 버리고 고적한 가운데 유유자적하며 사는 시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유정(幽靜)하면서도 청고(淸高)하였는데, 시로써 이름이 나는 것을 싫어하여 많은 시를 버리고, 후세에 전하여질 것이 두려워 시를 읊되 기록하지 않기도 하였다.

그가 은둔 생활을 한 곳은 서호(西湖) 근처의 고산(孤山)이란 곳이었다. 자주 호수에 나가 조각배를 띄우고, 간혹 절을 찾아 유한한 정취를 즐겼는데, 임포는 처자가 없는 대신 자신이 머물고 있는 초당 주위에 수많은 매화나무를 심어 놓고 학을 기르며 살았다. 그는 학이 나는 것을 보고 손님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임포를 두고, ‘매화 아내에 학 아들을 가지고 있다(梅妻鶴子)’고 하였다. 그 후 사람들은 풍류를 즐기며 초야에서 정한(靜閑)하게 사는 사람을 가리켜 매처학자라 부르게 되었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妻梅子鶴(처매자학) | 悠悠自適(유유자적) |


詩話總龜(시화총귀) | 詩總(시총) |

文天祥 (문천상, Wén Tiānxiáng, 1236~1282)

문천상 [文天祥, 1236~1282]

異名: Wén Tiānxiáng, 호 문산(文山), 자 송서(宋瑞), 이선(履善)
국적: 중국 남송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중국 장시성[江西省] 지수이현[吉水縣]
주요저서: 정기가(正氣歌), 문산전집


13세기 중국 남송의 정치가, 시인. 송나라(남송)가 원나라에 항복하자 저항하다 체포되었고 쿠빌라이칸이 그의 재능을 아껴 몽고에 전향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자 송서(宋瑞) ·이선(履善). 호 문산(文山). 장시성[江西省] 지수이현[吉水縣] 출생. 1255년 20세때 진사에 수석으로 합격한 수재였다. 1259년 몽골군의 쓰촨성[四川省] 침입으로 합주(合州)가 포위되고 천도설이 유력하게 대두되자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천도를 강경히 반대하는 글을 올려 그날로 면직되었다. 후에 복직하였으나, 가사도(賈似道)와 의견이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

이듬해 원(元)나라 군대가 남하하여 수도 임안(臨安)에 다다르자 문관으로서 근왕병(勤王兵) 1만명을 이끌고 임안 방위에 급히 참가하여 분전(奮戰)하였다. 송(宋)나라가 원나라에 항복하자 공제(恭帝)의 명을 받아 원나라로 가서 강화를 청하였다. 원나라의 총수(總帥) 백안(伯顔)과 회견하면서 항론(抗論)하다가 구류되었다.

그 동안에 임안은 함락되고, 송나라는 멸망하였다. 포로가 되어 북송(北送)되던 중 탈주하여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에서 제왕을 칭하고 있던 탁종(度宗)의 장자 익왕(益王)을 받들었다. 잔병(殘兵)을 모아 싸웠으나 광둥성[廣東省] 오파령(五坡玲)전투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독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대도(大都: 北京)로 송치되어 3년 간 감옥에 갇혔다.

원나라의 세조(쿠빌라이칸)가 그의 재능을 아껴 벼슬을 간절히 권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사형되었다. 시(詩)에도 능하여 옥중(獄中)의 작 《정기가(正氣歌)》로 유명하다. 문집에《문산전집》이 있다.


주요 작품

集杜詩(집두시)

孔子穿珠 (공자천주, Kǒngzǐchuānzhū)

孔子穿珠(공자천주)

孔子穿珠(Kǒngzǐchuānzhū)

孔 구멍 공 | 子 아들 자 | 穿 꿸 천 | 珠 구슬 주 |


공자가 구슬을 꿴다는 뜻으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


이 고사는 송(宋)나라의 목암선경(睦庵善卿)이 편찬한 《조정사원(祖庭事苑)》에 나온다. 공자(孔子)가 진(陳)나라를 지나갈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공자는 전에 어떤 사람에게 진기한 구슬을 얻었는데, 이 구슬의 구멍이 아홉구비나 되었다. 그는 이것을 실로 꿰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문득 바느질을 하는 아낙네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가까이 있던 뽕밭에서 뽕잎을 따고 있던 아낙네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공자의 이야기를 듣고난 그 아낙은 이렇게 말했다.

"찬찬히 꿀[蜜]을 두고 생각해 보세요." 공자는 그 아낙의 말대로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 "그렇지" 하고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는 나무 아래에 왔다갔다 하는 개미를 한 마리 붙잡아 그 허리에 실을 묶고는 개미를 구슬의 한쪽 구멍에 밀어넣고, 반대편 구멍에는 꿀을 발라 놓았다. 그 개미는 꿀 냄새를 맡고 이쪽 구멍에서 저쪽 구멍으로 나왔다. 이리하여 구슬에 실을 꿸 수 있게 되었다.

공자는 배우는 일에 있어서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의 이와 같은 언행을 두고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도 한다. 그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라고 하여 세 사람이 어떤 일을 같이 할 때에는 선악간(善惡間)에 반드시 스승으로서 배울 만한 사람이 있는 법이라 하였다.


관련 한자어

참조어

不恥下問(불치하문) | 三人行必有我師(삼인행필유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