推敲(퇴고)
推 밀 추, 밀 퇴 | 敲 두드릴 고, 두드릴 교, 두드릴 학 |
미느냐(推) 두드리느냐(敲)라는 뜻으로, 시문을 지을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침. 당(唐)나라 가도(賈道)가 시를 짓는 데 퇴(推)자를 쓸까 고(敲)자를 쓸까 하고 고심한 고사에서 유래
당(唐)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문득 좋은 시상(詩想)이 떠올라서 즉시 정리해 보았다. 제목은 '이응(李凝)의 유거(幽居)에 제(題)함'으로 정하고, 다음과 같이 초(草)를 잡았다. 閑居少隣竝(한거소린병) 이웃이 드물어 한적한 집草徑入荒園(초경입황원) 풀이 자란 좁은 길은 거친 뜰로 이어져 있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새는 못 속의 나무에 깃들고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스님이 달 아래 문을 밀친다. 그런데, 결구(結句)를 밀다(推)로 해야 할지, 두드리다(敲)로 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궁리하며 가다가 자신을 향해 오는 고관의 행차와 부딪혔다. 그 고관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의 한 사람이며 부현지사(副縣知事)인 한유(韓愈)였다. 가도는 먼저 길을 피하지 못한 까닭을 말하고 사괴했다. 역시 대문장자인 한유는 뜻밖에 만난 시인의 말을 듣고 꾸짖는 것은 잊어버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 내 생각엔 두드리다가 좋을 듯하네."이후 이들은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한다. 이 고사로 인해 퇴(堆)와 고(鼓) 두 자 모두 문장을 다듬는다는 뜻이 전혀 없는데도 그러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潤文(윤문) | 敲推(고퇴) | 改稿(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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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賀 (이하, 790~816)
이하(李賀, 790~816)
異名: 李贺, Lǐ hè, 자 장길(長吉)
국적: 중국 당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안문태수행, 소소소의 노래
이하(李賀, 791년 ~ 817년)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다. 자는 장길(長吉). 허난성 복창(福昌) 사람이며, 당나라 황실의 후예이며, 두보(杜甫)의 먼 친척이기도 하다. 그의 집은 창곡(昌谷:河南省宜陽縣內)의 소지주였으며, 아버지는 변경의 관리로 근무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목표였던 진사시(進士試)는 그의 재주를 시기하는 사람으로부터, 부친의 휘(諱)가 진숙(晉肅)인데 진(晉)과 진(進)은 동음(同音)이라 하여 그 휘를 범한다는 이의(異義)가 나와 단념하였다. 그 이듬해에 봉례랑(奉禮郞)이란 아주 낮은 직위에 2년간 근무하였을 뿐이며, 그것은 27세로 요절한 그의 일생에 영향을 끼쳐, 사상적 경향은 염세적 색채가 짙다.
한유에게 재주를 인정받은 관계로 인해 한유의 문제(門弟)로 취급당하고 있으나, 중당에 있으면서 만당적(晩唐的) 시풍의 선구를 이룬 천재적 시인이다. 낭만적이고 상상력과 색채감이 풍부한 예리한 감각적 시를 지어 화려한 환상적 세계를 창조하였다. 또한 염세주의적인 차가운 눈으로 즐겨 유귀(幽鬼)를 다루기 때문에 ‘귀재(鬼才)’라는 명칭이 붙었다. 귀재란 초인적인 유귀의 재주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북송(北宋)시대의 수필집 《남부신서(南部新書)》 및 그 밖의 책에 적혀 있다.
대표작은 《안문태수행(雁門太守行)》 《소소소(蘇小小)의 노래》 등인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장진주(將進酒)》로서, 후세에 원대(元代)의 통속적인 시문선집(詩文選集)인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수록되었고, 《수호전(水滸傳)》의 원형인 《선화유사(宣和遺事)》에서도 인용하였다. 좌절된 인생에 대한 절망감을 굴절된 표현으로 노래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난해하다는 평을 듣고 있지만, 특이한 매력을 지녀 애호자도 많다.
저서에 《이하가시편(李賀歌詩篇)》(4권), 《외집(外集)》(1권)이 전한다.
異名: 李贺, Lǐ hè, 자 장길(長吉)
국적: 중국 당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안문태수행, 소소소의 노래
이하(李賀, 791년 ~ 817년)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다. 자는 장길(長吉). 허난성 복창(福昌) 사람이며, 당나라 황실의 후예이며, 두보(杜甫)의 먼 친척이기도 하다. 그의 집은 창곡(昌谷:河南省宜陽縣內)의 소지주였으며, 아버지는 변경의 관리로 근무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목표였던 진사시(進士試)는 그의 재주를 시기하는 사람으로부터, 부친의 휘(諱)가 진숙(晉肅)인데 진(晉)과 진(進)은 동음(同音)이라 하여 그 휘를 범한다는 이의(異義)가 나와 단념하였다. 그 이듬해에 봉례랑(奉禮郞)이란 아주 낮은 직위에 2년간 근무하였을 뿐이며, 그것은 27세로 요절한 그의 일생에 영향을 끼쳐, 사상적 경향은 염세적 색채가 짙다.
한유에게 재주를 인정받은 관계로 인해 한유의 문제(門弟)로 취급당하고 있으나, 중당에 있으면서 만당적(晩唐的) 시풍의 선구를 이룬 천재적 시인이다. 낭만적이고 상상력과 색채감이 풍부한 예리한 감각적 시를 지어 화려한 환상적 세계를 창조하였다. 또한 염세주의적인 차가운 눈으로 즐겨 유귀(幽鬼)를 다루기 때문에 ‘귀재(鬼才)’라는 명칭이 붙었다. 귀재란 초인적인 유귀의 재주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북송(北宋)시대의 수필집 《남부신서(南部新書)》 및 그 밖의 책에 적혀 있다.
대표작은 《안문태수행(雁門太守行)》 《소소소(蘇小小)의 노래》 등인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장진주(將進酒)》로서, 후세에 원대(元代)의 통속적인 시문선집(詩文選集)인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수록되었고, 《수호전(水滸傳)》의 원형인 《선화유사(宣和遺事)》에서도 인용하였다. 좌절된 인생에 대한 절망감을 굴절된 표현으로 노래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난해하다는 평을 듣고 있지만, 특이한 매력을 지녀 애호자도 많다.
저서에 《이하가시편(李賀歌詩篇)》(4권), 《외집(外集)》(1권)이 전한다.
Location:
China Guangdong Huizhou Boluo福昌
李白 (이백, 701~762)
李白(이백, 701~762)
異名: 본명 이태백(李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자 태백(太白)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촉나라 장밍현(오늘날의 쓰촨성)
주요작품: 《청평조사(淸平調詞)》
중국 당나라 시인.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며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隴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 ·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 ·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랬다. 그가 43세 되던해인 724년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만 지어 올렸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나게 되었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 ·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
이백 관련 한시
早發白帝城(조발백제성)
淸平調詞(청평조사) 一首(1수) 二首(2수) 三首(3수)
聽蜀僧濬彈琴(청촉승준탄금)
夏日山中(하일산중)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
이백 관련 고사성어
磨斧作針(마부작침) |
異名: 본명 이태백(李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자 태백(太白)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촉나라 장밍현(오늘날의 쓰촨성)
주요작품: 《청평조사(淸平調詞)》
중국 당나라 시인.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며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隴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 ·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 ·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랬다. 그가 43세 되던해인 724년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만 지어 올렸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나게 되었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 ·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
이백 관련 한시
早發白帝城(조발백제성)
淸平調詞(청평조사) 一首(1수) 二首(2수) 三首(3수)
聽蜀僧濬彈琴(청촉승준탄금)
夏日山中(하일산중)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
이백 관련 고사성어
磨斧作針(마부작침) |
Location:
Sichuan, China
半食宰相 (반식재상)
半食宰相(반식재상)
반 반 | 밥 식 | 재상 재 | 서로 상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무능한 재상(대신)을 비꼬아 이르는 말.
당나라 6대 황제인 현종을 도와 당대(唐代) 최성기(最盛期)인 '개원(開元)의 치(治)'를 연 대신은 요숭이었다.
개원2년(713), 현종이 망국의 근원인 사치를 추방하기 위해 문문백관의 소사스럼 비단 관복을 정전(正殿)앞에 쌓아놓고 불사른 일을 비롯, 조세와 부역을 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형벌 제도를 바로잡아 억울한 죄인을 없애고, 농병(農兵)제도를 모병(募兵)제도로 고친 것도 모두 요승의 진언에 다른 개혁이었다.
이처럼 요승은 백성들의 안녕을 꾀하는 일이 곧 나라 번영의 지름길이라 믿고 늘 이 원칙을 관철하는데 힘썼다. 특히 정무재결(政務裁決)에 있어서의 신속적확(迅速的確)함에는 그 어느 재상도 요승을 따르지 못했는데 당시 황문감(黃門監 : 환관 감독부서의 으뜸 벼슬)인 노회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회신은 청렴 결백하고 근면한 사람이었으나 휴가중인 요숭의 직무를 10여일간 대행할 때 요숭처럼 신속히 재결하지 못함으로 해서 정무를 크게 정체시키고 말았다. 이때 자신이 요숭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한 노회신은 이후 매사를 요숭에게 상의한 다음에야 처리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회신을 가리켜 '자리만 차지하고 회식이나 하는 무능한 대신[半食宰相]'이라고 냉평한다.
당나라 | 唐 | 무능 | 재상
반 반 | 밥 식 | 재상 재 | 서로 상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무능한 재상(대신)을 비꼬아 이르는 말.
당나라 6대 황제인 현종을 도와 당대(唐代) 최성기(最盛期)인 '개원(開元)의 치(治)'를 연 대신은 요숭이었다.
개원2년(713), 현종이 망국의 근원인 사치를 추방하기 위해 문문백관의 소사스럼 비단 관복을 정전(正殿)앞에 쌓아놓고 불사른 일을 비롯, 조세와 부역을 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형벌 제도를 바로잡아 억울한 죄인을 없애고, 농병(農兵)제도를 모병(募兵)제도로 고친 것도 모두 요승의 진언에 다른 개혁이었다.
이처럼 요승은 백성들의 안녕을 꾀하는 일이 곧 나라 번영의 지름길이라 믿고 늘 이 원칙을 관철하는데 힘썼다. 특히 정무재결(政務裁決)에 있어서의 신속적확(迅速的確)함에는 그 어느 재상도 요승을 따르지 못했는데 당시 황문감(黃門監 : 환관 감독부서의 으뜸 벼슬)인 노회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회신은 청렴 결백하고 근면한 사람이었으나 휴가중인 요숭의 직무를 10여일간 대행할 때 요숭처럼 신속히 재결하지 못함으로 해서 정무를 크게 정체시키고 말았다. 이때 자신이 요숭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한 노회신은 이후 매사를 요숭에게 상의한 다음에야 처리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회신을 가리켜 '자리만 차지하고 회식이나 하는 무능한 대신[半食宰相]'이라고 냉평한다.
당나라 | 唐 | 무능 | 재상
瞞天過海 (만천과해, mántiānguòhǎi)
瞞天過海(만천과해)
瞒天过海(mán tiān guò hǎi)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제1계.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너다.
☞ Deceive the heavens to cross the ocean
“만천과해”계책은 원래 “진룡천자(眞龍天子)”라 일컬었던 당 태종을 속여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해를 건너게 한 고사에서 나왔다. 명나라 때 쓰여진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이 그 출전이다.
당나라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동쪽의 고구려를 침공하려고 할 때의 일이었다.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워낙 내륙에서 자란 당태종인지라 처음 보는 바다의 모습에 위축되어 배로서 바다를 건너는 것은 무리라 하여 군사를 돌리려 했었다. 그런데 마침 군사를 돌리려는 당태종 앞에 일대의 토호를 자처한 노인이 나타나 30만 군대를 위한 양식을 마련했다며 당태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었다. 당태종으로서도 아무래도 지방의 권력과도 친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 초대에 응해 먹고 마시며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당태종이 일어나 보니 어느새 망망대해에 와 있는 것이었다. 바로 전날 노인의 집이라 초대된 연회장이 배 위였던 것이고, 노인은 막 당태종의 휘하로 들어와 있던 설인귀가 분장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태종이 바다에 겁을 먹어 군대를 되돌릴 것 같자 노인으로 분장하여 당태종이 자신도 모른 새 배에 오르도록 하고는 당태종이 잠든 사이 배를 출발시켜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천자, 즉 황제를 속여 바다를 건너는 것. 그래서 만천과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춘추시대 진문공의 일화가 있다. 진문공은 공자시절 중이라 불리웠었는데, 아버지인 진헌공의 정실로서 해제를 낳아 그를 왕으로 올리고자 하는 여희의 음모로 이오와 더불어 65살 다시 진나라로 돌아와 즉위하기까지 열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해야 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제나라에서의 7년이 유독 사무쳤었는데, 아마도 그 시절이 오랜 망명기간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때문이었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는 춘추오패의 첫머리로 꼽는 제환공이었다. - 중이의 동생인 이오를 진의 목공과 함께 진의 왕으로 올린 것도 바로 이 환공이었다. - 제환공은 중이의 인품을 높이 사서 그에게 자신의 딸 제강과 수레 20승, 말 18필을 주어 후대했는데, 이미 형인 신생이 죽고, 다시 여희와 해제가 죽자 이오가 진혜공이 되어서는 적나라에 망명해 있던 그를 죽이려 하는 등, 참으로 바람잘 날 없던 삶이라, 더구나 당시 중이의 나이는 50을 넘어 있었다. 지금이야 50이면 한창 나이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미 죽을 날을 잡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중이로서도 이래도 편안히 남은 생을 보내자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중이는 혼자몸이 아니었다. 그를 쫓아 그에게 일신을 의탁한 아홉 명의 신하가 있었다. 그들로서는 중이가 한시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일을 도모하여 뜻을 이루어야 할 터인데 저렇게 당장의 편안함에 길들여져 큰 뜻을 잊은 채 허송세월만 하고 있으니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중이의 동생인 이오 - 즉 진혜공의 학정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크게 어지러운 상황이었던데다, 제환공이 죽고 제나라의 내정 또한 혼란하여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더욱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이는 그런 신하들의 마음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찾아가도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쫓겨날 뿐, 결국 몇 번을 그렇게 중이를 만나지도 뫃가고 쫓겨나게 되자 신하들은 아예 사냥을 빌미로 중이를 밖으로 불러내서 그를 납치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뜻하지 않게 제환공의 딸이기도 한 중이의 부인 제강이 끼어들었다.
시녀들을 통해 호언 등의 계획을 들은 제강은 은밀히 호언을 찾아가 진의 내정이 어렵고 혼란스러워 모든 대부와 백성들이 중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처럼 안락함에 빠져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 그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라며 자신이 나서서 돕겠노라 말했다. 자신이 공자 중이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 터이니, 그때 몰래 중이를 업어 마차에 실어 목적한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제환공의 딸다운 배포라 할 터인데, 이전부터도 제강은 몇 번이고 중이로 하여금 진나라의 공자로서 자신을 자각하여 진으로 돌아가 큰 뜻을 펼칠 것을 권하고 했었다. 그럴 경우 제강 자신이 버려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한 여자로서보다는 진나라 공자 중이의 처로서, 제환공의 딸이자 제나라의 공주로서 처신을 선택한 것이었다. 참으로 독심장부라고나 할까?
아무튼 호언 등과 그렇게 약속하고 돌아온 제강은 중이를 만나자 먼저 그 신하들이 중이를 모시고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음을 알고 있다며 중이더러 자신을 버릴 것이냐고 다그쳤다. 당연히 금시초문인 중이는 펄쩍 뛰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사랑스런 제강과 제나라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겨우 마음이 놓이는 표정을 지어 보인 제강은 마치 다짐이라도 하려는 듯 중이에게 함께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자고 제안했다. 그야말로 중이가 떠날 것을 걱정하다가 겨우 마음을 놓이게 된 처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중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호언 등이 몰고 있는 마차 안이었다. 제나라의 국경도 예전에 넘어 있었고 다시 돌아가려 해도 이미 제나라를 떠나온 신하들은 다시 제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아마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생활은 누리지 못할 것이었다. 잠시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일은 이렇게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제강의 손으로 하늘을 가려 바다를 건너는 계책에 당한 것이니, 중이도 마침내 제나라에서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모두 접고 신하들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운명이 가리키는 대로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중이는 제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갔다가 다시 송나라로, 송나라에서 또 초나라로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마침내 진혜공에 이은 진회공의 신의없음과 포악함에 질려버린 진목공의 후원을 받아 그로부터 군사를 빌려 진나라로 돌아가 동생의 아들이기도 한 회공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춘추오패에서 빠지지 않는 세 자리 가운데 하나인 진문공이다. 주왕실의 반란을 진압하고 천토의 회맹으로써 춘추시대의 두번째 패자가 되니, 불과 십 여 년의 짧은 치세지만 이때 진나라는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가히 대단한 능력이라 하겠는데, 거기에는 여자로서의 자신을 희생한 제강의 현숙하면서도 치밀한 노력이 있었다. 진문공 또한 패자였으니 태종과 같이 이것도 만천과해라 하겠다.
그로부터 파생된 뜻은, 위장수단을 사용하여 공개적으로 가짜의 상을 만들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 하고, 없는 듯 하면서 있고, 가짜인 듯 하면서 진짜인 듯 만들어 문제되는 것들을 피하고 난관을 극복함으로써 상대방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승리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평상시 습관처럼 보이면 의심을 품지 않는 법이다. 은밀한 계략과 공개적인 형식은 서로 상반되지 않고, 반대로 음모는 밖으로 드러난 공개적인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역]에서 태음이 바로 태양인 이치와 같다.
36계의 제1계인 만천과해는 승전계(勝戰計)에 속한다. 아군의 형세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 말을 타고 적을 압도하는 작전인 것이다.
흔히 '兵法'이라 하면,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이기는 '신비한' 술책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병법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다수의 아군으로 소수의 적군을 압박하여' 이기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도, 謨攻(모공)편에 이르길, "...그러므로 전쟁의 원칙은 병력이 적군의 10배일 때에는 적을 포위하고, 5배일 때에는 적을 공격하며, 2배일 때에는 계략을 써서 적을 분산시키며, 병력이 적과 비슷할 때에는 전력을 다하여 싸워야 하며, 병력이 적군보다 적을 때에는 적과 부딪치지 말고 싸움터에서 벗어나야 하며,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전투를 피하여야 한다..." 라고 하고 있다.
삼십육계의 구조도 위에 얘기한 손자병법 모공편의 문구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적보다 우세할 때의 '승전계', 적과 세력이 비슷할 때의 '적전계', 적을 공격하기 위한 '공전계', 공방이 혼란할 때의 '혼전계', 다른 아군과 합세하여 싸울 때의 '병전계', 그리고 아군이 불리할 때의 '패전계' 와 같다.
삼십육계 원문에는 '만천과해'에 대한 짤막한 해설이 붙어 있다.
"아군의 수비가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자칫 경계심이 흩어지기 쉽다. 또한 사람은 흔히 보아온 것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게 된다. 그러한 약점에 계략을 찔러넣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헛점을 찌르는 계략은 대수롭지 않게 눈에 뜨이는 곳에 깃들게 하는 것이다. 꼭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備周則意怠,常見則不疑.陰在陽之內,不在陽之對.太陽,太陰.]"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것에 적이 익숙해졌을 때, 그 틈을 찌르는 계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만천과해와 관련하여 많이 드는 예는 삼국지의 태사자 예이다.
북해 태수 공융(孔融)이 황건적에게 포위되었을 때였다. 공융에게 평소 은혜를 입은 태사자의 모친은 공융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사자에게 도우러 가라고 한다. 이에 태사자는 밤을 틈타 황건적의 포위망을 지나 공융에게로 간다. 공융은 유비에게 원군을 부탁하고자 하고, 이 임무를 태사자에게 부탁한다. 태사자(太史慈)는 포위망을 돌파하여 원병을 청하러 가야하나, 적의 포위망이 워낙 튼튼하여 쉽게 돌파하지 못한다.
그는 활과 과녁을 두 기사에게 들리고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성안에 있는 군사나 성밖에 있는 적병들이 이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태사자는 태연히 말을 끌고 성 가까이에 있는 언덕에 과녁을 세우고 활쏘기 연습을 시작했다. 이윽고 연습이 끝나자 그는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이렇게 활쏘기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자 성밖에 있는 적병들 중에는 그것을 구경하는 자도 있고,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자도 있었다. 그는 변함없이 이렇게 활쏘기를 계속하여, 사흘째가 되자 황건적들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관심조차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때를 틈타 태사자는 갑자기 말 위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비호처럼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 적들이 속았구나 하고 손을 쓰려 했을 때 그는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태사자는 말을 채찍질하여 황건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된다. [三國志(正史) 吳志 태사자전]
분명히 뜻풀이만으로 보자면 태사자의 예는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勝戰計' 즉, 아군이 '우세할 때' 쓰는 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 틈을 찌른다'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그보다 이전의 '승전계'라는 전제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또다른 예로는 삼국시대 오나라 손책의 예를 들 수 있다.
삼국 시대 오나라의 손책(孫策)이 수일을 연하여 회계성을 쳤으나 성은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다. 성벽은 높고 해자는 또한 넓고 깊었다. 손책이 무리를 모아 놓고 성 칠 일을 의논하니, 군중에 함께 따라와 있던 그의 숙부 손정(孫靜)이 계책을 말했다.
"성이 원체 견고하고 왕랑이 또한 죽기로써 지키는 터이라, 이대로 쳐서는 깨뜨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회계땅의 전량(錢糧)이 태반이나 사독에 있고, 그곳이 여기서 불과 수십 리니, 먼저 그곳을 점거하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이른바 '공기무비(攻其無備)요 출기불의(出其不意)'라, 그 방비 없음을 치고, 예상치 못한 때에 나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손책은 크게 기뻐하였다.
"숙부님의 묘계로 족히 적을 깨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즉시 각문에 영을 내려 불을 밝히며 기호(旗號)를 많이 세워 의병(擬兵)을 삼게 하고, 밤을 이용하여 에움을 푼 다음 사독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한 장수가 말했다.
"주공께서 대군을 거두시어 떠나는 것을 알게 되면, 적이 필연코 성을 나와 뒤를 쫓을 것이니 기병(奇兵)을 쓰시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내 이미 준비를 하여 놓았네. 회계성은 오늘밤 안으로 우리 장중에 들어오게 될 걸세."
손책의 군마가 물러갔다는 첩보를 받은 회계성의 장수 왕랑은 무리들과 함께 성루로 올라갔다. 성밖을 두루 살펴보니, 성 아래에 연기와 불이 함께 일어나며 무수한 정기(旌旗)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왕랑이 마음에 의심하기를 마지않을 때, 부장 주흔이 말했다.
"손책이 겁을 집어먹고 군사를 거두어 달아나는가 봅니다. 그래서 정기를 휘날려 우리를 의심케 하는 것이니, 지금 곧 군사를 내시어 뒤를 치도록 하십시오."
이때 한 장수가 말했다.
"손책이 이번에 간 것이 혹시 사독을 치기 위함이나 아닐까요. 일군을 따로 뽑아 뒤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랑은 드디어 뜻을 정하였다.
"사독은 곧 우리의 둔량처(屯糧處)이니 아무래도 방비를 엄히 해야만 하겠소."
왕랑의 군사는 남으로 사독을 향해 급히 뒤를 쫓아 20여 리를 갔다. 때는 초경이 가까운데, 갑자기 밀림속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며 횃불이 일시에 일어났다. 왕랑의 군사들이 깜짝 놀라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려 할 때, 한 장수가 창을 빗겨 잡고 말을 내달아 나오니 그는 바로 손책이었다. 이 싸움에서 왕랑은 크게 패하여 마침내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는데, 이는 바로 상대를 속여 그 약점을 누르고 때를 보아 기습하여 전승을 거둔 예이다.
또다른 예로는 전국시대 초기, 魏文侯(위문후)가 중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元帥(원수)로 삼은 '악양'의 사례가 있다.
위나라는 晉(진)나라가 나뉜 삼국(위, 조, 한) 중의 하나이다. 이때 晉의 동쪽에 中山國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진나라에 계속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진이 삼국으로 나뉜 후로는 어느 나라를 섬겨야 할지 몰라서 아무 곳에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중산국의 위치는 서쪽의 조나라와 가깝고 남쪽의 위나라와는 꽤 먼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나라가 중산국을 차지하면 위나라는 북쪽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을 것이 뻔했다.
중산국을 치기로 마음먹은 위문후는 누구를 원수로 삼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 책황이 악양을 천거한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가 중산국에서 벼슬을 삼고 있다는 이유로 악양을 원수로 삼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위문후가 악양을 불러 물어보니, 악양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어찌 公事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이에 위문후는 악양을 원수로 삼아 중산국을 치게 한다.
악양의 병법은 탁월하여 중산국의 병사들을 계속 이겨나가, 마침내 중산국의 수도인 중산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중산국의 임금인 희굴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를 내세워서 '항복하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가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니 한달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악양이 승낙하자 희굴은 악양이 아들인 악서의 처지를 걱정하여 공격을 미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달이 지나도 뾰족한 계책이 서지 않자 희굴은 또 악서를 보내 다시 한달의 여유를 얻어낸다. 이렇게 악양은 악서에게 세 달의 여유를 주었다.
그러자 중산국은 물론 위나라의 병사들까지도 '악양은 아들을 걱정하여 중산국을 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일조에 원수가 된 악양을 시기하는 대신들이 위문후에게 악양을 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문후는 악양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사자를 보내 악양을 위로하고, 악양이 돌아오면 하사하기 위하여 도성 안에 좋은 집까지 마련해 두었다.
한 편, 악양은 약속한 3개월이 지나도 중산국이 항복을 하지 않자 병사들에게 총공격을 준비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병사들은 또다시 한달의 여유를 줄 것이 뻔한데 뭐하러 준비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자 악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중산국을 치러 온 것은 그 임금이 무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중산국을 위나라에 영원히 편입시켜야 한다. 우리가 처음에 힘으로 중산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상처를 입고 우리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산국은 결코 위나라 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려 온 것은 백성들을 구하고 그들을 위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함인 것이다."
사태가 급해진 중산국에서는 악서를 인질로 삼으려 하나 악양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너는 참으로 불초한 자식이다. 벼슬을 살면서도 그 나라를 위해 계책을 세우지 못했고, 적과 싸워 이기지도 못했으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또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면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화평을 청하도록 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야 하거늘, 그런 것도 못하고 부끄럽지 않느냐! 너 같은 놈을 살려두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
악양은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 활을 들어 악서를 쏘려 했다. 그러자 악서는 황급히 숨어 들어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희굴은 악서를 죽여 그 시체로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낸다. 악양이 충격을 받은 틈을 타서 공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악양은 오히려 악서의 머리를 보고 꾸짖으며 국을 다 먹었다. 그러고는 중산국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임금이 국을 보내주어 잘 먹었다. 중산성을 함락하는 즉시 내 너희 임금에게 직접 감사하리라. 너는 임금에게 돌아가 우리 군중에도 국을 끓이는 가마솥이 있음을 알려라!"
이후 악양은 중산국을 완전히 점령하고, 중산국 임금은 자살한다.
永樂大典(영락대전) | 三十六計(삼십육계) | 三國志(Sānguózhì) |
瞒天过海(mán tiān guò hǎi)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제1계.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너다.
☞ Deceive the heavens to cross the ocean
“만천과해”계책은 원래 “진룡천자(眞龍天子)”라 일컬었던 당 태종을 속여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해를 건너게 한 고사에서 나왔다. 명나라 때 쓰여진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이 그 출전이다.
당나라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동쪽의 고구려를 침공하려고 할 때의 일이었다.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워낙 내륙에서 자란 당태종인지라 처음 보는 바다의 모습에 위축되어 배로서 바다를 건너는 것은 무리라 하여 군사를 돌리려 했었다. 그런데 마침 군사를 돌리려는 당태종 앞에 일대의 토호를 자처한 노인이 나타나 30만 군대를 위한 양식을 마련했다며 당태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었다. 당태종으로서도 아무래도 지방의 권력과도 친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 초대에 응해 먹고 마시며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당태종이 일어나 보니 어느새 망망대해에 와 있는 것이었다. 바로 전날 노인의 집이라 초대된 연회장이 배 위였던 것이고, 노인은 막 당태종의 휘하로 들어와 있던 설인귀가 분장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태종이 바다에 겁을 먹어 군대를 되돌릴 것 같자 노인으로 분장하여 당태종이 자신도 모른 새 배에 오르도록 하고는 당태종이 잠든 사이 배를 출발시켜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천자, 즉 황제를 속여 바다를 건너는 것. 그래서 만천과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춘추시대 진문공의 일화가 있다. 진문공은 공자시절 중이라 불리웠었는데, 아버지인 진헌공의 정실로서 해제를 낳아 그를 왕으로 올리고자 하는 여희의 음모로 이오와 더불어 65살 다시 진나라로 돌아와 즉위하기까지 열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해야 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제나라에서의 7년이 유독 사무쳤었는데, 아마도 그 시절이 오랜 망명기간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때문이었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는 춘추오패의 첫머리로 꼽는 제환공이었다. - 중이의 동생인 이오를 진의 목공과 함께 진의 왕으로 올린 것도 바로 이 환공이었다. - 제환공은 중이의 인품을 높이 사서 그에게 자신의 딸 제강과 수레 20승, 말 18필을 주어 후대했는데, 이미 형인 신생이 죽고, 다시 여희와 해제가 죽자 이오가 진혜공이 되어서는 적나라에 망명해 있던 그를 죽이려 하는 등, 참으로 바람잘 날 없던 삶이라, 더구나 당시 중이의 나이는 50을 넘어 있었다. 지금이야 50이면 한창 나이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미 죽을 날을 잡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중이로서도 이래도 편안히 남은 생을 보내자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중이는 혼자몸이 아니었다. 그를 쫓아 그에게 일신을 의탁한 아홉 명의 신하가 있었다. 그들로서는 중이가 한시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일을 도모하여 뜻을 이루어야 할 터인데 저렇게 당장의 편안함에 길들여져 큰 뜻을 잊은 채 허송세월만 하고 있으니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중이의 동생인 이오 - 즉 진혜공의 학정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크게 어지러운 상황이었던데다, 제환공이 죽고 제나라의 내정 또한 혼란하여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더욱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이는 그런 신하들의 마음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찾아가도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쫓겨날 뿐, 결국 몇 번을 그렇게 중이를 만나지도 뫃가고 쫓겨나게 되자 신하들은 아예 사냥을 빌미로 중이를 밖으로 불러내서 그를 납치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뜻하지 않게 제환공의 딸이기도 한 중이의 부인 제강이 끼어들었다.
시녀들을 통해 호언 등의 계획을 들은 제강은 은밀히 호언을 찾아가 진의 내정이 어렵고 혼란스러워 모든 대부와 백성들이 중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처럼 안락함에 빠져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 그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라며 자신이 나서서 돕겠노라 말했다. 자신이 공자 중이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 터이니, 그때 몰래 중이를 업어 마차에 실어 목적한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제환공의 딸다운 배포라 할 터인데, 이전부터도 제강은 몇 번이고 중이로 하여금 진나라의 공자로서 자신을 자각하여 진으로 돌아가 큰 뜻을 펼칠 것을 권하고 했었다. 그럴 경우 제강 자신이 버려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한 여자로서보다는 진나라 공자 중이의 처로서, 제환공의 딸이자 제나라의 공주로서 처신을 선택한 것이었다. 참으로 독심장부라고나 할까?
아무튼 호언 등과 그렇게 약속하고 돌아온 제강은 중이를 만나자 먼저 그 신하들이 중이를 모시고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음을 알고 있다며 중이더러 자신을 버릴 것이냐고 다그쳤다. 당연히 금시초문인 중이는 펄쩍 뛰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사랑스런 제강과 제나라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겨우 마음이 놓이는 표정을 지어 보인 제강은 마치 다짐이라도 하려는 듯 중이에게 함께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자고 제안했다. 그야말로 중이가 떠날 것을 걱정하다가 겨우 마음을 놓이게 된 처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중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호언 등이 몰고 있는 마차 안이었다. 제나라의 국경도 예전에 넘어 있었고 다시 돌아가려 해도 이미 제나라를 떠나온 신하들은 다시 제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아마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생활은 누리지 못할 것이었다. 잠시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일은 이렇게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제강의 손으로 하늘을 가려 바다를 건너는 계책에 당한 것이니, 중이도 마침내 제나라에서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모두 접고 신하들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운명이 가리키는 대로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중이는 제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갔다가 다시 송나라로, 송나라에서 또 초나라로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마침내 진혜공에 이은 진회공의 신의없음과 포악함에 질려버린 진목공의 후원을 받아 그로부터 군사를 빌려 진나라로 돌아가 동생의 아들이기도 한 회공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춘추오패에서 빠지지 않는 세 자리 가운데 하나인 진문공이다. 주왕실의 반란을 진압하고 천토의 회맹으로써 춘추시대의 두번째 패자가 되니, 불과 십 여 년의 짧은 치세지만 이때 진나라는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가히 대단한 능력이라 하겠는데, 거기에는 여자로서의 자신을 희생한 제강의 현숙하면서도 치밀한 노력이 있었다. 진문공 또한 패자였으니 태종과 같이 이것도 만천과해라 하겠다.
그로부터 파생된 뜻은, 위장수단을 사용하여 공개적으로 가짜의 상을 만들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 하고, 없는 듯 하면서 있고, 가짜인 듯 하면서 진짜인 듯 만들어 문제되는 것들을 피하고 난관을 극복함으로써 상대방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승리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평상시 습관처럼 보이면 의심을 품지 않는 법이다. 은밀한 계략과 공개적인 형식은 서로 상반되지 않고, 반대로 음모는 밖으로 드러난 공개적인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역]에서 태음이 바로 태양인 이치와 같다.
36계의 제1계인 만천과해는 승전계(勝戰計)에 속한다. 아군의 형세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 말을 타고 적을 압도하는 작전인 것이다.
흔히 '兵法'이라 하면,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이기는 '신비한' 술책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병법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다수의 아군으로 소수의 적군을 압박하여' 이기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도, 謨攻(모공)편에 이르길, "...그러므로 전쟁의 원칙은 병력이 적군의 10배일 때에는 적을 포위하고, 5배일 때에는 적을 공격하며, 2배일 때에는 계략을 써서 적을 분산시키며, 병력이 적과 비슷할 때에는 전력을 다하여 싸워야 하며, 병력이 적군보다 적을 때에는 적과 부딪치지 말고 싸움터에서 벗어나야 하며,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전투를 피하여야 한다..." 라고 하고 있다.
삼십육계의 구조도 위에 얘기한 손자병법 모공편의 문구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적보다 우세할 때의 '승전계', 적과 세력이 비슷할 때의 '적전계', 적을 공격하기 위한 '공전계', 공방이 혼란할 때의 '혼전계', 다른 아군과 합세하여 싸울 때의 '병전계', 그리고 아군이 불리할 때의 '패전계' 와 같다.
삼십육계 원문에는 '만천과해'에 대한 짤막한 해설이 붙어 있다.
"아군의 수비가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자칫 경계심이 흩어지기 쉽다. 또한 사람은 흔히 보아온 것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게 된다. 그러한 약점에 계략을 찔러넣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헛점을 찌르는 계략은 대수롭지 않게 눈에 뜨이는 곳에 깃들게 하는 것이다. 꼭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備周則意怠,常見則不疑.陰在陽之內,不在陽之對.太陽,太陰.]"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것에 적이 익숙해졌을 때, 그 틈을 찌르는 계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만천과해와 관련하여 많이 드는 예는 삼국지의 태사자 예이다.
북해 태수 공융(孔融)이 황건적에게 포위되었을 때였다. 공융에게 평소 은혜를 입은 태사자의 모친은 공융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사자에게 도우러 가라고 한다. 이에 태사자는 밤을 틈타 황건적의 포위망을 지나 공융에게로 간다. 공융은 유비에게 원군을 부탁하고자 하고, 이 임무를 태사자에게 부탁한다. 태사자(太史慈)는 포위망을 돌파하여 원병을 청하러 가야하나, 적의 포위망이 워낙 튼튼하여 쉽게 돌파하지 못한다.
그는 활과 과녁을 두 기사에게 들리고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성안에 있는 군사나 성밖에 있는 적병들이 이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태사자는 태연히 말을 끌고 성 가까이에 있는 언덕에 과녁을 세우고 활쏘기 연습을 시작했다. 이윽고 연습이 끝나자 그는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이렇게 활쏘기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자 성밖에 있는 적병들 중에는 그것을 구경하는 자도 있고,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자도 있었다. 그는 변함없이 이렇게 활쏘기를 계속하여, 사흘째가 되자 황건적들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관심조차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때를 틈타 태사자는 갑자기 말 위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비호처럼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 적들이 속았구나 하고 손을 쓰려 했을 때 그는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태사자는 말을 채찍질하여 황건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된다. [三國志(正史) 吳志 태사자전]
분명히 뜻풀이만으로 보자면 태사자의 예는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勝戰計' 즉, 아군이 '우세할 때' 쓰는 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 틈을 찌른다'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그보다 이전의 '승전계'라는 전제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또다른 예로는 삼국시대 오나라 손책의 예를 들 수 있다.
삼국 시대 오나라의 손책(孫策)이 수일을 연하여 회계성을 쳤으나 성은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다. 성벽은 높고 해자는 또한 넓고 깊었다. 손책이 무리를 모아 놓고 성 칠 일을 의논하니, 군중에 함께 따라와 있던 그의 숙부 손정(孫靜)이 계책을 말했다.
"성이 원체 견고하고 왕랑이 또한 죽기로써 지키는 터이라, 이대로 쳐서는 깨뜨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회계땅의 전량(錢糧)이 태반이나 사독에 있고, 그곳이 여기서 불과 수십 리니, 먼저 그곳을 점거하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이른바 '공기무비(攻其無備)요 출기불의(出其不意)'라, 그 방비 없음을 치고, 예상치 못한 때에 나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손책은 크게 기뻐하였다.
"숙부님의 묘계로 족히 적을 깨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즉시 각문에 영을 내려 불을 밝히며 기호(旗號)를 많이 세워 의병(擬兵)을 삼게 하고, 밤을 이용하여 에움을 푼 다음 사독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한 장수가 말했다.
"주공께서 대군을 거두시어 떠나는 것을 알게 되면, 적이 필연코 성을 나와 뒤를 쫓을 것이니 기병(奇兵)을 쓰시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내 이미 준비를 하여 놓았네. 회계성은 오늘밤 안으로 우리 장중에 들어오게 될 걸세."
손책의 군마가 물러갔다는 첩보를 받은 회계성의 장수 왕랑은 무리들과 함께 성루로 올라갔다. 성밖을 두루 살펴보니, 성 아래에 연기와 불이 함께 일어나며 무수한 정기(旌旗)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왕랑이 마음에 의심하기를 마지않을 때, 부장 주흔이 말했다.
"손책이 겁을 집어먹고 군사를 거두어 달아나는가 봅니다. 그래서 정기를 휘날려 우리를 의심케 하는 것이니, 지금 곧 군사를 내시어 뒤를 치도록 하십시오."
이때 한 장수가 말했다.
"손책이 이번에 간 것이 혹시 사독을 치기 위함이나 아닐까요. 일군을 따로 뽑아 뒤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랑은 드디어 뜻을 정하였다.
"사독은 곧 우리의 둔량처(屯糧處)이니 아무래도 방비를 엄히 해야만 하겠소."
왕랑의 군사는 남으로 사독을 향해 급히 뒤를 쫓아 20여 리를 갔다. 때는 초경이 가까운데, 갑자기 밀림속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며 횃불이 일시에 일어났다. 왕랑의 군사들이 깜짝 놀라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려 할 때, 한 장수가 창을 빗겨 잡고 말을 내달아 나오니 그는 바로 손책이었다. 이 싸움에서 왕랑은 크게 패하여 마침내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는데, 이는 바로 상대를 속여 그 약점을 누르고 때를 보아 기습하여 전승을 거둔 예이다.
또다른 예로는 전국시대 초기, 魏文侯(위문후)가 중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元帥(원수)로 삼은 '악양'의 사례가 있다.
위나라는 晉(진)나라가 나뉜 삼국(위, 조, 한) 중의 하나이다. 이때 晉의 동쪽에 中山國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진나라에 계속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진이 삼국으로 나뉜 후로는 어느 나라를 섬겨야 할지 몰라서 아무 곳에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중산국의 위치는 서쪽의 조나라와 가깝고 남쪽의 위나라와는 꽤 먼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나라가 중산국을 차지하면 위나라는 북쪽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을 것이 뻔했다.
중산국을 치기로 마음먹은 위문후는 누구를 원수로 삼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 책황이 악양을 천거한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가 중산국에서 벼슬을 삼고 있다는 이유로 악양을 원수로 삼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위문후가 악양을 불러 물어보니, 악양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어찌 公事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이에 위문후는 악양을 원수로 삼아 중산국을 치게 한다.
악양의 병법은 탁월하여 중산국의 병사들을 계속 이겨나가, 마침내 중산국의 수도인 중산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중산국의 임금인 희굴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를 내세워서 '항복하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가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니 한달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악양이 승낙하자 희굴은 악양이 아들인 악서의 처지를 걱정하여 공격을 미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달이 지나도 뾰족한 계책이 서지 않자 희굴은 또 악서를 보내 다시 한달의 여유를 얻어낸다. 이렇게 악양은 악서에게 세 달의 여유를 주었다.
그러자 중산국은 물론 위나라의 병사들까지도 '악양은 아들을 걱정하여 중산국을 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일조에 원수가 된 악양을 시기하는 대신들이 위문후에게 악양을 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문후는 악양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사자를 보내 악양을 위로하고, 악양이 돌아오면 하사하기 위하여 도성 안에 좋은 집까지 마련해 두었다.
한 편, 악양은 약속한 3개월이 지나도 중산국이 항복을 하지 않자 병사들에게 총공격을 준비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병사들은 또다시 한달의 여유를 줄 것이 뻔한데 뭐하러 준비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자 악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중산국을 치러 온 것은 그 임금이 무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중산국을 위나라에 영원히 편입시켜야 한다. 우리가 처음에 힘으로 중산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상처를 입고 우리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산국은 결코 위나라 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려 온 것은 백성들을 구하고 그들을 위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함인 것이다."
사태가 급해진 중산국에서는 악서를 인질로 삼으려 하나 악양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너는 참으로 불초한 자식이다. 벼슬을 살면서도 그 나라를 위해 계책을 세우지 못했고, 적과 싸워 이기지도 못했으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또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면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화평을 청하도록 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야 하거늘, 그런 것도 못하고 부끄럽지 않느냐! 너 같은 놈을 살려두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
악양은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 활을 들어 악서를 쏘려 했다. 그러자 악서는 황급히 숨어 들어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희굴은 악서를 죽여 그 시체로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낸다. 악양이 충격을 받은 틈을 타서 공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악양은 오히려 악서의 머리를 보고 꾸짖으며 국을 다 먹었다. 그러고는 중산국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임금이 국을 보내주어 잘 먹었다. 중산성을 함락하는 즉시 내 너희 임금에게 직접 감사하리라. 너는 임금에게 돌아가 우리 군중에도 국을 끓이는 가마솥이 있음을 알려라!"
이후 악양은 중산국을 완전히 점령하고, 중산국 임금은 자살한다.
永樂大典(영락대전) | 三十六計(삼십육계) | 三國志(Sānguózhì) |
望雲之情 (망운지정)
望雲之情(망운지정)
자녀가 부모를 그리는 정.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타향에서 산에 올라가 고향쪽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부모를 생각했다는 고사에서 유래.
자녀가 부모를 그리는 정.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타향에서 산에 올라가 고향쪽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부모를 생각했다는 고사에서 유래.
馬耳東風 (마이동풍)
馬耳東風 (마이동풍)
말의 귀를 동풍이 스친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 버리는 태도를 비유하는 말. 한국 속담 ‘소 귀에 경 읽기”와 상통하는 말.
馬耳東風이란 말은 唐(당)나라의 대시인 李白(이백)의 「추운 밤에 홀로 잔을 드는 왕십이의 심경에 답하노라(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라는 장편시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 시는 왕십이란 사람이 이백에게「차가운 밤에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느낀 바 있어서(寒夜獨酌有懷․한야독작유회)」란 시를 보내온 데 대해 회답한 시라고 한다.
왕십이란 사람은 자신의 불우한 신세와 쓸쓸한 심경을 시로써 이백에게 호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백은 썰렁한 밤에 외로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왕십이의 모습을 그리면서 答詩(답시)를 지은 것이다.
이백은 이 시에서 「인생은 허무한 것, 오래 산다 해도 백년을 살지 못한다. 이 허무함을 술로써 씻어버리지 않겠는가」고 권하고 「당신과 같은 고결하고 훌륭한 인물은 지금 세상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지금은 鬪鷄(투계․닭싸움인데 당나라때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한 놀이)의 기술이 뛰어난 자가 天子(천자)의 귀염을 받아 큰 길을 으스대고 다니고,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데 하찮은 공을 세운 자들이 대단한 충신인 양 날뛰는 세상이다. 당신이나 내가 어찌 그들의 흉내를 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차라리 햇볕이 들지 않는 북쪽 창에 기대어 시나 읊으세. 그러나 우리의 작품이 아무리 걸작이라 해도 지금 세상에서는 찬 물 한그릇값에도 못미치네」.
시는 이렇게 이어지다가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말을 듣고도 고개를 내저으니 동풍이 말의 귓가를 스치는 것과 다를 바 없네(有如東風射馬耳․유여동풍사마이)」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말의 귀를 동풍이 스친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 버리는 태도를 비유하는 말. 한국 속담 ‘소 귀에 경 읽기”와 상통하는 말.
馬耳東風이란 말은 唐(당)나라의 대시인 李白(이백)의 「추운 밤에 홀로 잔을 드는 왕십이의 심경에 답하노라(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라는 장편시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 시는 왕십이란 사람이 이백에게「차가운 밤에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느낀 바 있어서(寒夜獨酌有懷․한야독작유회)」란 시를 보내온 데 대해 회답한 시라고 한다.
왕십이란 사람은 자신의 불우한 신세와 쓸쓸한 심경을 시로써 이백에게 호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백은 썰렁한 밤에 외로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왕십이의 모습을 그리면서 答詩(답시)를 지은 것이다.
이백은 이 시에서 「인생은 허무한 것, 오래 산다 해도 백년을 살지 못한다. 이 허무함을 술로써 씻어버리지 않겠는가」고 권하고 「당신과 같은 고결하고 훌륭한 인물은 지금 세상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지금은 鬪鷄(투계․닭싸움인데 당나라때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한 놀이)의 기술이 뛰어난 자가 天子(천자)의 귀염을 받아 큰 길을 으스대고 다니고,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데 하찮은 공을 세운 자들이 대단한 충신인 양 날뛰는 세상이다. 당신이나 내가 어찌 그들의 흉내를 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차라리 햇볕이 들지 않는 북쪽 창에 기대어 시나 읊으세. 그러나 우리의 작품이 아무리 걸작이라 해도 지금 세상에서는 찬 물 한그릇값에도 못미치네」.
시는 이렇게 이어지다가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말을 듣고도 고개를 내저으니 동풍이 말의 귓가를 스치는 것과 다를 바 없네(有如東風射馬耳․유여동풍사마이)」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白居易 (백거이, Bái Jūyì, 772~846)
백거이 [白居易, 772~846]
異名: 호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자 낙천(樂天)
국적: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뤄양[洛陽] 부근 신정[新鄭]
주요저서: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816)
중국 중당 기(中唐期)의 시인. 작품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 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一代)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했다. 주요 저서에는《장한가(長恨歌)》,《비파행(琵琶行)》등이 있다.
Bai Juyi, a Tang Dynasty poet
자 낙천(樂天). 호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본적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 출생.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유명하다.
807년 36세로 한림학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좌습유(左拾遺)가 되어 유교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정치 ·사회의 결함을 비판하는 일군의 작품을 계속 써냈다. 《신악부(新樂府) 50수》(805)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811년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814년 태자 좌찬선태부(左贊善太夫)에 임용되었으나, 이듬해에 일찍이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시가의 대상이 되었던 고급관료들의 반감을 사서 주장[九江]의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다. 그 곳에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문학에 대한 반성을 거쳐 명시 《비파행(琵琶行)》(816)을 지었다. 818년 중저우자사[忠州刺史]가 되었으며, 임기를 마치고 장안(長安)에 돌아오자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하여 822년 자진해서 항저우자사[杭州刺史]가 되었다. 항저우의 아름다운 풍광(風光)에 촉발되어 시작(詩作)은 계속되었고, 문학적 지기(知己)로서 트고 지내던 원진(元拂)과 만나게 되어 그것을 계기로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50권, 824)을 편집하였다. 825년 쑤저우자사[蘇州刺史]로 전임하였으나 827년에는 중앙으로 불리어 비서감(秘書監)에 임명되었다.
829년 58세가 되던 해 뤄양에 영주하기로 결심, 허난부[河南府]의 장관이 되었던 때도 있었으나 대개 태자보도관(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만의 직책에 자족하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하는 나날을 보냈다. 831년 원진 등 옛친구들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황혼을 의식하고 뤄양 교외의 룽먼[龍門]의 여러 절을 자주 찾았고 그 곳 향산사(香山寺)를 보수 복원하여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불교로 기울어졌다. 이에, 문학에 대한 충동도 번뇌로 보여서 참회하는 입장에서 ‘광언기어(狂言綺語)’의 문집인 《유백창화집(劉白唱和集)》 5권, 《백씨문집(白氏文集)》 60권을, 다시 65권, 67권을 834∼839년에 걸쳐 마음의 증표로서 연고 있는 사찰에 봉납하였다. 842년 71세 때 형부상서(刑部尙書)의 대우로 퇴직하였는데, 《백씨문집》은 70권에 이르렀다. 그 뒤로도 ‘광영(狂詠)’은 계속되었고 정부의 불교탄압정책을 풍자하는 작품을 통해서 자기 시대의 종말을 예감하고 인생의 마무리로서 75권의 전집을 편정(編定), 그것이 완성된 이듬해 그 생애를 마쳤다. 이 밖에 시문(詩文)을 짓는 편의를 위해서 고사성어를 모은 《백씨육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 30권도 있다.
그 긴 생애 동안에 그의 문학은 자주 변모하였다. 즉, 젊은 날의 낭만주의적인 경향은 지적인 빛을 띠며 이상주의적 입장으로 옮겨갔고, 문학의 존재의의를 주장하며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다가 이윽고 정치나 사회 가운데서 개인을 발견하여 자기의 내면을 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다시 개인에 비추어 널리 인간의 생활 자세를 추구하여 인생의 지혜를 표상하는 문학을 지향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정형(定型)의 한계적 조건하에서 언어의 온갖 기능을 다 구사하는 ‘창화(唱和)’라는 새로운 형태의 창조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 속에 일관하고 있던 것은, 문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며 생활의식이나 생활감정이 뒷밤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었다. 따라서 제재는 경험적이고 언어는 일상성을 띠며, 발상은 심리의 자연에 따르고,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一代)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하였다.
그의 생존시에 이미 그의 시는 민중 속에 파고들어, 소치는 아이나 말몰이꾼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고, 배나 절의 기둥이나 벽에 써붙여지기도 하였으며, 멀리 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는 한국에도 일찍부터 전해져 널리 애송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백씨장경집》 75권 가운데 71권이 있고, 《백향산시집》 40권도 있다. 현존하는 작품수는 3,800여 수이고, 그 중에서 《비파행》 《장한가》 《유오진사시(遊悟眞寺詩)》는 불멸의 걸작이다.
異名: 호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자 낙천(樂天)
국적: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뤄양[洛陽] 부근 신정[新鄭]
주요저서: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816)
중국 중당 기(中唐期)의 시인. 작품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 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一代)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했다. 주요 저서에는《장한가(長恨歌)》,《비파행(琵琶行)》등이 있다.
Bai Juyi, a Tang Dynasty poet
자 낙천(樂天). 호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본적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 출생.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유명하다.
807년 36세로 한림학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좌습유(左拾遺)가 되어 유교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정치 ·사회의 결함을 비판하는 일군의 작품을 계속 써냈다. 《신악부(新樂府) 50수》(805)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811년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814년 태자 좌찬선태부(左贊善太夫)에 임용되었으나, 이듬해에 일찍이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시가의 대상이 되었던 고급관료들의 반감을 사서 주장[九江]의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다. 그 곳에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문학에 대한 반성을 거쳐 명시 《비파행(琵琶行)》(816)을 지었다. 818년 중저우자사[忠州刺史]가 되었으며, 임기를 마치고 장안(長安)에 돌아오자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하여 822년 자진해서 항저우자사[杭州刺史]가 되었다. 항저우의 아름다운 풍광(風光)에 촉발되어 시작(詩作)은 계속되었고, 문학적 지기(知己)로서 트고 지내던 원진(元拂)과 만나게 되어 그것을 계기로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50권, 824)을 편집하였다. 825년 쑤저우자사[蘇州刺史]로 전임하였으나 827년에는 중앙으로 불리어 비서감(秘書監)에 임명되었다.
829년 58세가 되던 해 뤄양에 영주하기로 결심, 허난부[河南府]의 장관이 되었던 때도 있었으나 대개 태자보도관(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만의 직책에 자족하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하는 나날을 보냈다. 831년 원진 등 옛친구들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황혼을 의식하고 뤄양 교외의 룽먼[龍門]의 여러 절을 자주 찾았고 그 곳 향산사(香山寺)를 보수 복원하여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불교로 기울어졌다. 이에, 문학에 대한 충동도 번뇌로 보여서 참회하는 입장에서 ‘광언기어(狂言綺語)’의 문집인 《유백창화집(劉白唱和集)》 5권, 《백씨문집(白氏文集)》 60권을, 다시 65권, 67권을 834∼839년에 걸쳐 마음의 증표로서 연고 있는 사찰에 봉납하였다. 842년 71세 때 형부상서(刑部尙書)의 대우로 퇴직하였는데, 《백씨문집》은 70권에 이르렀다. 그 뒤로도 ‘광영(狂詠)’은 계속되었고 정부의 불교탄압정책을 풍자하는 작품을 통해서 자기 시대의 종말을 예감하고 인생의 마무리로서 75권의 전집을 편정(編定), 그것이 완성된 이듬해 그 생애를 마쳤다. 이 밖에 시문(詩文)을 짓는 편의를 위해서 고사성어를 모은 《백씨육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 30권도 있다.
그 긴 생애 동안에 그의 문학은 자주 변모하였다. 즉, 젊은 날의 낭만주의적인 경향은 지적인 빛을 띠며 이상주의적 입장으로 옮겨갔고, 문학의 존재의의를 주장하며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다가 이윽고 정치나 사회 가운데서 개인을 발견하여 자기의 내면을 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다시 개인에 비추어 널리 인간의 생활 자세를 추구하여 인생의 지혜를 표상하는 문학을 지향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정형(定型)의 한계적 조건하에서 언어의 온갖 기능을 다 구사하는 ‘창화(唱和)’라는 새로운 형태의 창조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 속에 일관하고 있던 것은, 문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며 생활의식이나 생활감정이 뒷밤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었다. 따라서 제재는 경험적이고 언어는 일상성을 띠며, 발상은 심리의 자연에 따르고,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一代)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하였다.
그의 생존시에 이미 그의 시는 민중 속에 파고들어, 소치는 아이나 말몰이꾼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고, 배나 절의 기둥이나 벽에 써붙여지기도 하였으며, 멀리 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는 한국에도 일찍부터 전해져 널리 애송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백씨장경집》 75권 가운데 71권이 있고, 《백향산시집》 40권도 있다. 현존하는 작품수는 3,800여 수이고, 그 중에서 《비파행》 《장한가》 《유오진사시(遊悟眞寺詩)》는 불멸의 걸작이다.
Location:
Shanxi, China
孟浩然 (맹호연, Mèng Hàorán)
孟浩然(맹호연)
異名: 孟浩然(Mèng Hàorán)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샹양현[襄陽縣]
주요저서: 《맹호연집》 등
주요작품: 《춘효(春曉)》 등
중국 당나라의 시인. 고독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한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春眠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라는 《춘효(春曉)》의 시가 유명하다. 주요 저서는 《맹호연집》4권이 있으며, 약 200 수의 시가 전한다.
후베이성[湖北省] 샹양현[襄陽縣] 출생. 고향에서 공부에 힘쓰다가 40세쯤에 장안(長安)으로 올라와 진사(進士) 시험을 쳤으나, 낙방하여 고향에 돌아와 은둔생활을 하였다. 만년에 재상(宰相) 장구령(張九齡)의 부탁으로 잠시 그 밑에서 일한 것 이외에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도연명(陶淵明)을 존경하여, 고독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한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春眠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라는 《춘효(春曉)》의 시가 유명하다. 일찍이 왕유(王維)의 천거로 현종(玄宗)을 배알(拜謁)하였을 때 근작(近作)의 시를 올렸다가 ‘不才明主棄’라는 구절 때문에 현종의 노여움을 사서 모처럼의 벼슬길을 놓쳤다는 일화가 전하나, 확인되지 않았다. 시집(詩集)으로 《맹호연집》 4권이 있으며, 약 200 수의 시가 전한다.
맹호연 관련 한시
夜歸鹿門山歌(야귀녹문산가)
夏日南亭懷辛大(하일남정회신대)
異名: 孟浩然(Mèng Hàorán)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샹양현[襄陽縣]
주요저서: 《맹호연집》 등
주요작품: 《춘효(春曉)》 등
중국 당나라의 시인. 고독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한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春眠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라는 《춘효(春曉)》의 시가 유명하다. 주요 저서는 《맹호연집》4권이 있으며, 약 200 수의 시가 전한다.
후베이성[湖北省] 샹양현[襄陽縣] 출생. 고향에서 공부에 힘쓰다가 40세쯤에 장안(長安)으로 올라와 진사(進士) 시험을 쳤으나, 낙방하여 고향에 돌아와 은둔생활을 하였다. 만년에 재상(宰相) 장구령(張九齡)의 부탁으로 잠시 그 밑에서 일한 것 이외에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도연명(陶淵明)을 존경하여, 고독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한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春眠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라는 《춘효(春曉)》의 시가 유명하다. 일찍이 왕유(王維)의 천거로 현종(玄宗)을 배알(拜謁)하였을 때 근작(近作)의 시를 올렸다가 ‘不才明主棄’라는 구절 때문에 현종의 노여움을 사서 모처럼의 벼슬길을 놓쳤다는 일화가 전하나, 확인되지 않았다. 시집(詩集)으로 《맹호연집》 4권이 있으며, 약 200 수의 시가 전한다.
맹호연 관련 한시
夜歸鹿門山歌(야귀녹문산가)
夏日南亭懷辛大(하일남정회신대)
Location:
Xiangyang, Xiangfan, Hubei, China
杜審言 (두심언, Dù Shěnyán, ~708)
두심언(杜審言, 648?~708)
별칭: 杜审言, Dù Shěn yán, 자 필간(必簡)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중국 당나라 초기의 시인. 국자감 주부(國子監主簿), 수문 관 직학사(修文館直學士)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젊어서부터 문명을 떨쳐 이교(李嶠) ·최융(崔融) ·소미도(蘇味道)와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라 불렸다. 무후조(武后朝)의 궁정시인으로서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과 견주었다.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출생이라고 하나, 일설에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이라고도 한다. 자는 필간(必簡). 진(晉)의 명장이고 학자이기도 하였던 두예(杜預)의 자손이며, 성당(盛唐)의 대시인 두보(杜甫)의 조부이다. 670년 진사에 급제하고 측천무후(則天武后)와 중종을 섬겼으나, 한때 북(北)베트남의 교지(交趾)에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죄에서 풀려나온 후 국자감 주부(國子監主簿) ·수문관 직학사(修文館直學士)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젊어서부터 문명을 떨쳐 이교(李嶠) ·최융(崔融) ·소미도(蘇味道)와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라 불렸다고 하며, 또한 무후조(武后朝)의 궁정시인으로서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과 견주었다고 하나, 오늘날 시 43수만이 전할 뿐이다.
두심언 관련 한시
和晉陵路丞早春游望(화진능노승조춘유망)
별칭: 杜审言, Dù Shěn yán, 자 필간(必簡)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중국 당나라 초기의 시인. 국자감 주부(國子監主簿), 수문 관 직학사(修文館直學士)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젊어서부터 문명을 떨쳐 이교(李嶠) ·최융(崔融) ·소미도(蘇味道)와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라 불렸다. 무후조(武后朝)의 궁정시인으로서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과 견주었다.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출생이라고 하나, 일설에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이라고도 한다. 자는 필간(必簡). 진(晉)의 명장이고 학자이기도 하였던 두예(杜預)의 자손이며, 성당(盛唐)의 대시인 두보(杜甫)의 조부이다. 670년 진사에 급제하고 측천무후(則天武后)와 중종을 섬겼으나, 한때 북(北)베트남의 교지(交趾)에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죄에서 풀려나온 후 국자감 주부(國子監主簿) ·수문관 직학사(修文館直學士)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젊어서부터 문명을 떨쳐 이교(李嶠) ·최융(崔融) ·소미도(蘇味道)와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라 불렸다고 하며, 또한 무후조(武后朝)의 궁정시인으로서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과 견주었다고 하나, 오늘날 시 43수만이 전할 뿐이다.
두심언 관련 한시
和晉陵路丞早春游望(화진능노승조춘유망)
杜甫 (두보, Dù Fǔ, 712~770)
두보 [杜甫, 712~770]
이름: 본명 두보(杜甫, Dù Fǔ), 호 소릉(少陵), 자 자미(子美)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시
출생지: 중국 허난성[河南省] 궁현[鞏縣]
주요작품: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널리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주요 작품에는 《북정(北征)》,《추흥(秋興)》 등이 있다.
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 ·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東四川]의 쯔저우[梓州] ·랑저우[閬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東端)의 쿠이저우[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 ·후난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 ·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訓뭍)에 뛰어났으며,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두보(杜甫) 관련 한시/b>
春望(춘망)
春夜喜雨(춘야희우)
참조
성당(盛唐)
중국 당(唐) 300년은 시에 있어서 황금시대로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의 4가지로 당시(唐詩)를 구분하고 있다. 그 중에 성당(盛唐)은 시문학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로, 현종(玄宗)의 개원(開元) 원년(713)에서 숙종(肅宗)의 상원(上元) 2년(761)에 이르는 48년간을 말한다. 성당 전반기에는 이백(李白), 후반기에는 두보(杜甫)가 활약하였고 대표적 시인에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고적(高適), 왕창령(王昌齡) 등이 있다.
이름: 본명 두보(杜甫, Dù Fǔ), 호 소릉(少陵), 자 자미(子美)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시
출생지: 중국 허난성[河南省] 궁현[鞏縣]
주요작품: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널리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주요 작품에는 《북정(北征)》,《추흥(秋興)》 등이 있다.
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 ·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東四川]의 쯔저우[梓州] ·랑저우[閬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東端)의 쿠이저우[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 ·후난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 ·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訓뭍)에 뛰어났으며,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두보(杜甫) 관련 한시/b>
春望(춘망)
春夜喜雨(춘야희우)
참조
성당(盛唐)
중국 당(唐) 300년은 시에 있어서 황금시대로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의 4가지로 당시(唐詩)를 구분하고 있다. 그 중에 성당(盛唐)은 시문학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로, 현종(玄宗)의 개원(開元) 원년(713)에서 숙종(肅宗)의 상원(上元) 2년(761)에 이르는 48년간을 말한다. 성당 전반기에는 이백(李白), 후반기에는 두보(杜甫)가 활약하였고 대표적 시인에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고적(高適), 왕창령(王昌齡) 등이 있다.
段成式 (단성식, Duàn Chéngshì)
단성식 [段成式, ?~863]
별칭: Duàn Chéng shì, 자 가고(柯古)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학자
주요저서: 《유양잡조(酉陽雜俎)》(20권) 《속집(續集)》(10권)
당(唐)나라 때의 학자. 박학(博學)이라는 영예를 안으면서 연구에 정진하여, 비각(秘閣)의 책은 모두 읽었다고 전한다. 상서랑(尙書郞) ·강주자사(江州刺史) ·태상소향(太常少鄕)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에 《유양잡조(酉陽雜俎)》가 있다.
자 가고(柯古). 박학(博學)이라는 영예를 안으면서 연구에 정진하여, 비각(秘閣)의 책은 모두 읽었다고 전한다. 상서랑(尙書郞) ·강주자사(江州刺史) ·태상소향(太常少鄕)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주요저서에 《유양잡조(酉陽雜俎)》(20권) 《속집(續集)》(10권)이 있다. 《유양잡조》는 당대를 주로 한 괴이한 사건, 언어와 그리고 풍속 따위를 기술한 책이다.
단성식 관련 한시
折楊柳枝詞(절양류지사)
별칭: Duàn Chéng shì, 자 가고(柯古)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학자
주요저서: 《유양잡조(酉陽雜俎)》(20권) 《속집(續集)》(10권)
당(唐)나라 때의 학자. 박학(博學)이라는 영예를 안으면서 연구에 정진하여, 비각(秘閣)의 책은 모두 읽었다고 전한다. 상서랑(尙書郞) ·강주자사(江州刺史) ·태상소향(太常少鄕)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에 《유양잡조(酉陽雜俎)》가 있다.
자 가고(柯古). 박학(博學)이라는 영예를 안으면서 연구에 정진하여, 비각(秘閣)의 책은 모두 읽었다고 전한다. 상서랑(尙書郞) ·강주자사(江州刺史) ·태상소향(太常少鄕)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주요저서에 《유양잡조(酉陽雜俎)》(20권) 《속집(續集)》(10권)이 있다. 《유양잡조》는 당대를 주로 한 괴이한 사건, 언어와 그리고 풍속 따위를 기술한 책이다.
단성식 관련 한시
折楊柳枝詞(절양류지사)
羅雀掘鼠 (나작굴서)
羅雀掘鼠(나작굴서)
그물 라 | 참새 작 | 팔 굴 | 쥐 서 |
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다는 뜻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新唐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통치 말기, 장순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충직한 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주도 많고 무인답게 담력 또한 컸으며 대의가 분명한 그런 인물이었다. 정치가 부패하자 변방의 안록산(安祿山)은 군대를 일으켜 당나라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서시 756년, 진원(眞源) 현령 장순(張巡)은 군대를 동원하여 안록산 토벌에 나섰다. 이듬해,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安慶緖)는 윤자기(尹子琦)를 보내 십만 대군으로 장순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당시 장순에게는 겨우 삼 천명의 병력 뿐으로 수적으로 열세였다. 윤자기의 군대는 어떤 때에는 하루에 20여 차례나 공격을 해 왔지만, 장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윤자기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우세하였지만, 성(城)을 함락하지 못하며, 몇 달 동안 대치하게 되었다. 장순은 몇 달 동안 구원군을 기다렸지만 그들이 오지 않자, 성 안의 식량과 풀이 다 바닥날 상황이었다. 형세가 급박하게 변하자 장순은 부하 남제운(南霽雲)을 보내 포위망을 뚫고 임회(臨淮) 태수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위급한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임회태수는 장순의 명성을 시기하여, 그들의 위급함을 보고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윤자기는 강공(强攻)으로는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바꾸어 장순에게 투항을 권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쉴새 없이 공격해 오는 적들을 모두 물리쳤다. 얼마 후, 성안의 식량이 점점 줄어들자, 군인들은 매일 한 수저의 쌀만을 먹었다. 이에 장순은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심지어는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으며, 갑옷과 활에 붙어있는 소가죽을 삶아서 굶주림을 달래라고 하였다(至羅雀掘鼠, 煮鎧弩以食).
장순은 지휘관의 입장에서 자식같은 병사들의 몸부림을 안타깝게 여겨 자기 아내를 죽여 국을 끓여서 병사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악화되어 갔고, 더 이상 성을 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성으로 진격해 들어오는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순이 항복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복을 요구하는 반란군들을 향해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는 청청병력 같은 소리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반란군은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장순의 부하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의 죽음과 바꾼 충성심에 새삼 고개를 떨구게 되었다.
그물 라 | 참새 작 | 팔 굴 | 쥐 서 |
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다는 뜻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新唐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통치 말기, 장순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충직한 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주도 많고 무인답게 담력 또한 컸으며 대의가 분명한 그런 인물이었다. 정치가 부패하자 변방의 안록산(安祿山)은 군대를 일으켜 당나라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서시 756년, 진원(眞源) 현령 장순(張巡)은 군대를 동원하여 안록산 토벌에 나섰다. 이듬해,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安慶緖)는 윤자기(尹子琦)를 보내 십만 대군으로 장순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당시 장순에게는 겨우 삼 천명의 병력 뿐으로 수적으로 열세였다. 윤자기의 군대는 어떤 때에는 하루에 20여 차례나 공격을 해 왔지만, 장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윤자기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우세하였지만, 성(城)을 함락하지 못하며, 몇 달 동안 대치하게 되었다. 장순은 몇 달 동안 구원군을 기다렸지만 그들이 오지 않자, 성 안의 식량과 풀이 다 바닥날 상황이었다. 형세가 급박하게 변하자 장순은 부하 남제운(南霽雲)을 보내 포위망을 뚫고 임회(臨淮) 태수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위급한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임회태수는 장순의 명성을 시기하여, 그들의 위급함을 보고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윤자기는 강공(强攻)으로는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바꾸어 장순에게 투항을 권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쉴새 없이 공격해 오는 적들을 모두 물리쳤다. 얼마 후, 성안의 식량이 점점 줄어들자, 군인들은 매일 한 수저의 쌀만을 먹었다. 이에 장순은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심지어는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으며, 갑옷과 활에 붙어있는 소가죽을 삶아서 굶주림을 달래라고 하였다(至羅雀掘鼠, 煮鎧弩以食).
장순은 지휘관의 입장에서 자식같은 병사들의 몸부림을 안타깝게 여겨 자기 아내를 죽여 국을 끓여서 병사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악화되어 갔고, 더 이상 성을 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성으로 진격해 들어오는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순이 항복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복을 요구하는 반란군들을 향해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는 청청병력 같은 소리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반란군은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장순의 부하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의 죽음과 바꾼 충성심에 새삼 고개를 떨구게 되었다.
羅隱 (나은, Luó Yǐn)
羅隱
異名: 나은, 罗隐, Luó Yǐn, 자 소간(昭諫)
중국 당(唐)나라 말기 사람. 자는 소간(昭諫). 시(詩)를 잘했는데 특히 영사시(詠史詩)에 능했음. 그러나 성품이 거만하고 풍자를 잘해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는데, 오대(五代) 시대에 들어와 오월(吳越)의 전유(錢鏐)의 부름을 받아 절도판관부사(節度判官副使)를 거쳐 간의대부급사중(諫議大夫給事中)에 이르렀다.
당나라 이덕유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도 한림학사가 되어 장상을 두루 지냈고, 나은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는 데도 역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으며, 후량이 당나라를 찬탈하고는 그를 불러 간의를 삼았으나 나아가지 않아 그 절의조차 높았다. ; 唐之李德裕不第 而爲翰林學士 出入將相 羅隱不第 而亦顯於世 後梁纂唐 召以爲諫議 不就 其節亦高 [중종실록 권제98, 78장 뒤쪽, 중종 37년 7월 27일(을해)]
異名: 나은, 罗隐, Luó Yǐn, 자 소간(昭諫)
중국 당(唐)나라 말기 사람. 자는 소간(昭諫). 시(詩)를 잘했는데 특히 영사시(詠史詩)에 능했음. 그러나 성품이 거만하고 풍자를 잘해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는데, 오대(五代) 시대에 들어와 오월(吳越)의 전유(錢鏐)의 부름을 받아 절도판관부사(節度判官副使)를 거쳐 간의대부급사중(諫議大夫給事中)에 이르렀다.
당나라 이덕유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도 한림학사가 되어 장상을 두루 지냈고, 나은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는 데도 역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으며, 후량이 당나라를 찬탈하고는 그를 불러 간의를 삼았으나 나아가지 않아 그 절의조차 높았다. ; 唐之李德裕不第 而爲翰林學士 出入將相 羅隱不第 而亦顯於世 後梁纂唐 召以爲諫議 不就 其節亦高 [중종실록 권제98, 78장 뒤쪽, 중종 37년 7월 27일(을해)]
郭子儀 (곽자의, Guō Zǐyí, 697~781)
郭子儀(곽자의, 697~781)
異名: 郭子仪(Guō Zǐyí)
국적: 중국 당
활동분야: 군사
중국 당(唐)나라의 무장(武將).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중원(中原)의 반란군을 토벌했고 위구르의 원군을 얻어 창안과 뤄양을 수복했다. 토번(티베트)이 창안을 치려 하자 위구르를 회유(懷柔)하고 토번을 무찔렀다.
화저우[華州:陝西省] 정셴[鄭縣] 출생. 천보(天寶) 연간(742~756)에는 북경(北境) 방위를 맡아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휘하에 있었는데,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삭방의 군사를 거느리고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이광필(李光弼)과 함께 중원(中原)의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756년에 숙종(肅宗)이 서북의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후에는 황태자 광평왕(廣平王:뒤의 代宗) 밑에서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관군의 총지휘를 맡았으며, 위구르(Uigur:回紇)의 원군을 얻어 창안[長安]과 뤄양[洛陽]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공로에도 불구하고 환관(宦官) 어조은(魚朝恩) 등의 배척으로 한때 실각하였다. 그 후 대종의 광덕(廣德) ·영태(永泰) 연간에 토번(吐蕃:티베트)이 복고회은(僕固懷恩) 등과 연합하여 창안을 치려고 하자 다시 기용되어, 위구르를 회유(懷柔)하고 토번을 무찔러 당나라를 구하였다. 그의 무공은 비할 데가 없다고 칭송되어, 상부(尙父)의 칭호를 받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으며, 당나라 최대의 공신으로서 영광을 누렸다.
異名: 郭子仪(Guō Zǐyí)
국적: 중국 당
활동분야: 군사
중국 당(唐)나라의 무장(武將).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중원(中原)의 반란군을 토벌했고 위구르의 원군을 얻어 창안과 뤄양을 수복했다. 토번(티베트)이 창안을 치려 하자 위구르를 회유(懷柔)하고 토번을 무찔렀다.
화저우[華州:陝西省] 정셴[鄭縣] 출생. 천보(天寶) 연간(742~756)에는 북경(北境) 방위를 맡아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휘하에 있었는데,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삭방의 군사를 거느리고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이광필(李光弼)과 함께 중원(中原)의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756년에 숙종(肅宗)이 서북의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후에는 황태자 광평왕(廣平王:뒤의 代宗) 밑에서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관군의 총지휘를 맡았으며, 위구르(Uigur:回紇)의 원군을 얻어 창안[長安]과 뤄양[洛陽]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공로에도 불구하고 환관(宦官) 어조은(魚朝恩) 등의 배척으로 한때 실각하였다. 그 후 대종의 광덕(廣德) ·영태(永泰) 연간에 토번(吐蕃:티베트)이 복고회은(僕固懷恩) 등과 연합하여 창안을 치려고 하자 다시 기용되어, 위구르를 회유(懷柔)하고 토번을 무찔러 당나라를 구하였다. 그의 무공은 비할 데가 없다고 칭송되어, 상부(尙父)의 칭호를 받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으며, 당나라 최대의 공신으로서 영광을 누렸다.
顧況 (고황, Gù Kuàng, 727~816)
顧況(고황, 727~816)
異名: 顾况(Gù Kuàng)
당대의 또 다른 시인인 顧況(약715-814년)은 “越泥는 옥처럼 아름답다”는 말로 越窯 청자가 옥처럼 윤택한 빛깔임을 형용한 바 있다.
고황(顧況)이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무렵 15세의 백거이가 수도인 장안(長安)에 있던 고황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당시 고황은 나이 50여세였는데, 어린 소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그의 이름 '거이(居易)'를 빗대어 "장안의 쌀값이 비싸니 살아가기 어려울 것(長安米貴, 居住不易)"이라며 비꼬았다. 그러나 백거이가 시 〈부득고원초송별〉를 보여주자 "이런 재주가 있다면 살아가기가 쉬울 것(有才如此, 居亦容易)"이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언덕 위에 우거진 풀들(離離原上草),
해마다 한 번 시들었다 무성해진다네(一歲一枯榮).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野火燒不盡),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난다네(春風吹又生).
방초는 멀리 뻗어 옛길을 덮고(遠芳侵古道)
맑은 하늘 푸른 빛은 황폐한 성까지 닿네(晴翠接荒城).
또 그대를 떠나보내니(又送王孫去)
이별의 슬픔 가득하다네(萋萋滿別情).
異名: 顾况(Gù Kuàng)
당대의 또 다른 시인인 顧況(약715-814년)은 “越泥는 옥처럼 아름답다”는 말로 越窯 청자가 옥처럼 윤택한 빛깔임을 형용한 바 있다.
고황(顧況)이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무렵 15세의 백거이가 수도인 장안(長安)에 있던 고황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당시 고황은 나이 50여세였는데, 어린 소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그의 이름 '거이(居易)'를 빗대어 "장안의 쌀값이 비싸니 살아가기 어려울 것(長安米貴, 居住不易)"이라며 비꼬았다. 그러나 백거이가 시 〈부득고원초송별〉를 보여주자 "이런 재주가 있다면 살아가기가 쉬울 것(有才如此, 居亦容易)"이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언덕 위에 우거진 풀들(離離原上草),
해마다 한 번 시들었다 무성해진다네(一歲一枯榮).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野火燒不盡),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난다네(春風吹又生).
방초는 멀리 뻗어 옛길을 덮고(遠芳侵古道)
맑은 하늘 푸른 빛은 황폐한 성까지 닿네(晴翠接荒城).
또 그대를 떠나보내니(又送王孫去)
이별의 슬픔 가득하다네(萋萋滿別情).
賈幼隣 (가유린, Gǔ Yòulín, 718~772)
賈幼隣(가유린, 718~772)
이름: 본명 가유린(賈幼隣, 贾幼邻, Gǔ Yòulín), 가지(賈至, 贾至, Jiǎ Zhì)
국적: 중국
활동분야: 문학, 예술
출생지: 중국 뤄양
주요저서: 문집 30권
당나라의 문신 겸 시인. 기거사인(起居舍人), 지제고(知制誥)가 되었고,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에는 현종(玄宗)을 따라 촉(蜀)나라에 갔다. 경조윤(京兆尹)이 되었고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시문에도 능했으며 문집 30권을 남겼다.
751년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 ·지제고(知制誥)가 되었고,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에는 현종(玄宗)을 따라 촉(蜀)나라에 갔다. 766년 경조윤(京兆尹)이 되었고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였고 그 준일(俊逸)한 기품은 남조(南朝) 때 송(宋)나라의 포조(鮑照) ·유신(庾信) 등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문집 30권이 있다.
이름: 본명 가유린(賈幼隣, 贾幼邻, Gǔ Yòulín), 가지(賈至, 贾至, Jiǎ Zhì)
국적: 중국
활동분야: 문학, 예술
출생지: 중국 뤄양
주요저서: 문집 30권
당나라의 문신 겸 시인. 기거사인(起居舍人), 지제고(知制誥)가 되었고,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에는 현종(玄宗)을 따라 촉(蜀)나라에 갔다. 경조윤(京兆尹)이 되었고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시문에도 능했으며 문집 30권을 남겼다.
751년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 ·지제고(知制誥)가 되었고,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에는 현종(玄宗)을 따라 촉(蜀)나라에 갔다. 766년 경조윤(京兆尹)이 되었고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였고 그 준일(俊逸)한 기품은 남조(南朝) 때 송(宋)나라의 포조(鮑照) ·유신(庾信) 등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문집 30권이 있다.
家書萬金 (가서만금)
가서만금(家書萬金)
家 집 가, 여자 고 | 書 글 서 | 萬 일만 만 | 金 쇠 금, 성씨 김 |
타국(他國)이나 타향(他鄕)에 살 때는 고향(故鄕) 가족(家族)의 편지(便紙)가 더없이 반갑고, 그 소식(消息)의 값이 황금(黃金) 만 냥보다 더 소중(所重)하다는 말. 가서저만금(家書抵萬金)의 준말
여행 중에 가인(家人)으로부터 서신을 받으면 그 기쁨이 만금을 얻는 데 해당한다.
시성(詩聖)인 당(唐)나라 두보(杜甫 712∼770, 字:子美, 號:少陵)의 '춘망(春望)'이라는 시(詩)에 나오는 구절.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春城草木深 (춘성초목심)
感時和賤淚 (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 (백두소경단)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남아있고,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우거졌구나.
시절을 느껴 꽃에 눈물을 뿌리고,
이별을 한스러워하니 새 소리에도 놀란다.
봉화불은 삼 개월이나 계속 피고 있고,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에 해당하는구나.
대머리 긁어서 더욱 빠지고,
상투를 하고자 하나 비녀를 이기지 못하는구나.
유명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붙잡혀서 이듬해(757년) 탈주했다. 수도 장안(長安)에 구속된 몸이 되었을 때, 전란으로 심하게 황폐해진 장안의 봄을 아파해서 만든 저 유명한 시 가운데 한 구절. 家書는 아내 혹은 가족으로부터의 편지.
출전
두보 춘망시(春望詩)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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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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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 집 가, 여자 고 | 書 글 서 | 萬 일만 만 | 金 쇠 금, 성씨 김 |
타국(他國)이나 타향(他鄕)에 살 때는 고향(故鄕) 가족(家族)의 편지(便紙)가 더없이 반갑고, 그 소식(消息)의 값이 황금(黃金) 만 냥보다 더 소중(所重)하다는 말. 가서저만금(家書抵萬金)의 준말
여행 중에 가인(家人)으로부터 서신을 받으면 그 기쁨이 만금을 얻는 데 해당한다.
시성(詩聖)인 당(唐)나라 두보(杜甫 712∼770, 字:子美, 號:少陵)의 '춘망(春望)'이라는 시(詩)에 나오는 구절.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春城草木深 (춘성초목심)
感時和賤淚 (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 (백두소경단)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남아있고,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우거졌구나.
시절을 느껴 꽃에 눈물을 뿌리고,
이별을 한스러워하니 새 소리에도 놀란다.
봉화불은 삼 개월이나 계속 피고 있고,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에 해당하는구나.
대머리 긁어서 더욱 빠지고,
상투를 하고자 하나 비녀를 이기지 못하는구나.
유명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붙잡혀서 이듬해(757년) 탈주했다. 수도 장안(長安)에 구속된 몸이 되었을 때, 전란으로 심하게 황폐해진 장안의 봄을 아파해서 만든 저 유명한 시 가운데 한 구절. 家書는 아내 혹은 가족으로부터의 편지.
출전
두보 춘망시(春望詩) |
관련 한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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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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