巢毁卵破 (소훼난파)

巢毁卵破(소훼난파)

巢毁卵破[cháohuǐluǎnpò]

巢 새집 소 | 毁 헐 훼 | 卵 알 난(란) | 破 깨뜨릴 파, 무너질 피 |

새집이 부서지면 알도 깨진다는 뜻으로, 국가(國家)나 사회(社會) 또는 조직(組織)이나 집단(集團)이 무너지면 그 구성원들도 피해(被害)를 입게 됨을 이르는 말


후한서(後漢書) 정공순(鄭孔荀)열전의 이야기다.

동한(東漢)말기, 공자의 20세손인 공융(孔融)은 한나라 헌제(獻帝) 밑에서 벼슬을 지냈다. 공융은 일찍이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조조(曹操)의 야심을 간파하고 그를 멀리하였다. 때문에 조조는 공융에게 분노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유비와 손권을 공격하려는 조조의 계획을 반대했던 공융은, 그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던 한 대부의 모략으로 조조에게 체포되었다.

공융의 7세 된 딸과 9세 된 아들은, 아버지가 잡혀 가던 순간 묵묵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도망하라고 했지만, 공융의 딸은 매우 침착하게 '새집이 부서졌는데 알이 어찌 깨지지 않겠습니까[安有巢毁而卵不破乎]'라고 말했다. 공융의 딸은 조조에게 붙잡혀 와서도 죽은 뒤에 혼령이나마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고 형의 집행을 기다렸다.

巢毁卵破 이란 조직이나 집단이 무너지면 그 구성원들도 피해를 입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정공순(鄭孔荀)열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鸡飞蛋打[jīfēidàndǎ] 닭은 날아가고 달걀도 깨지다. 양쪽으로 다 망치다 |

반의어·상대어

完好无损[wánhǎowúsǔn] 완전하고 손상이 없다. |

蕭統 (소통, 501~531)

蕭統(소통, 501~531)

중국 남조양나라의 문학평론가. 양(梁) 무제 소연(蕭衍)의 장남으로 황태자가 되었으나, 즉위하기 전에 죽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제(齊)·양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문선(文選)》이 있는데 이는 당 이후로도 문학 학습의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자: 덕시
시호: 문청
국적: 중국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문선(30권)


소명태자(昭明太子)라고도 하며 자는 덕시(德施), 시호는 소명(昭明)이다. 양(梁) 무제 소연(蕭衍)의 장남으로 황태자가 되었으나, 즉위하기 전에 죽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진(秦)·한(漢)나라 이후 제(齊)·양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문선(文選)》(30권)이 있다. 《문선》은 수(隋)나라에 이르러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당(唐)나라에 들어와 성행하였으며, 당 이후로도 문학 학습의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문선》에 엮은 작품들의 선택 기준은 내용에 있지 않고 형식의 아름다움에 있었으나, 작품의 전아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용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문장은 화려하면서도 부박하지 말아야 하며, 전아하면서도 거칠지 않아야 하므로 문과 질이 서로 어울릴 때 군자의 극치를 지니게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문선》에 나타난 소통의 문학관은 후대 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요 작품

文選(문선)

小貪大失 (소탐대실)

小貪大失(소탐대실)

작은 것을 탐내어 큰 것을 잃음.

to covet a little but lose a lot; to seek small gains but incur big losses


贪小失大(tānxiǎoshīdà)

小積大成 (소적대성)

小積大成(소적대성)

小 적을 소 | 積 쌓을 적 | 大 큰 대 | 成 이룰 성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서 큰 것으로 됨.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티끌 모아 태산.
¶ 실도랑이 모여 대동강이 된다.

孫子 (손자) 孫武 (손무)

孫子(손자) 손무(孫武)

중국 고대의 병법서(兵法書).


《오자(吳子)》와 병칭(倂稱)되는 병법 칠서(七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병서로 이 둘을 합쳐 흔히 '손오병법(孫吳兵法)'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춘추시대 오나라 합려(闔閭)를 섬기던 명장 손무(孫武:BC 6세기경)이며, 손자는 그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예전에는 손무의 손자로 전국시대 진(晉)나라에서 활동한 손빈의 저서라고 추정하기도 하였으나, 1972년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 인췌산[銀雀山]에 있는 전한시대의 묘에서 《손자》와 《손빈병법》 2가지가 동시에 출토됨으로써 손빈이 지은 병법서는 별개의 책임이 확인되었다.

사기(史記)》에는 손자 13편이라 하였으나 그 편목은 알 수 없으며,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오손자병법 82편이라 하여 <병서략(兵書略)> 첫머리에 기재하고 주(注)에는 그림 9권이 있었다고 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13편으로 이것은 당초의 것이 아니고, 삼국시대 위(魏)의 조조(曹操)가 82편 중에서 번잡한 것은 삭제하고 정수(精粹)만을 추려 13편 2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3편의 편명은 계(計)·작전(作戰)·모공(謀攻)·군형(軍形)·병세(兵勢)·허실(虛實)·군쟁(軍爭)·구변(九變)·행군(行軍)·지형(地形)·구지(九地)·화공(火攻)·용간(用間)으로 되어 있으며, “병(兵)은 국가의 대사(大事), 사생(死生)의 땅, 존망(存亡)의 길”이라는 입장에서 국책(國策)의 결정, 장군의 선임을 비롯하여 작전·전투 전반에 걸쳐 격조 높은 문장으로 간결하게 요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 뜻하는 바는 항상 주동적 위치를 점하여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을 주로 하고, 또 사상적인 뒷받침도 설하고 있어 병서로서는 모순을 느낄 만큼 비호전적(非好戰的)인 것이 특징이다.

예로부터 작전의 성전(聖典)으로서 많은 무장들에게 존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경영의 요지와 인사의 성패 등에도 비범한 견해를 보이고 있어 인생문제 전반에 적용되는 지혜의 글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예로부터 많은 무신들이 이를 지침으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역관초시(譯官初試)의 교재로 삼기도 하였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하여, “남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명구도 담고 있으며, 전쟁하여 이기는 것보다 전쟁하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손자병법》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인용 번역되고 있다.


손자 관련 한자어

九地篇(구지편)

吳越同舟(오월동주, WúYuètóngzhōu)

軍爭篇(군쟁편)

以迂爲直(이우위직) | 以患爲利(이환위리) | 軍爭

俗人昭昭 我獨昏昏 (속인소소아독혼혼)

속인소소 아독혼혼 (俗人昭昭 我獨昏昏)

세상 사람들 모두 똑똑한데 나만 홀로 어리석다. 노자의 도덕경 20장에 나오는 말.


http://nowgnoy3.blogspot.com/2011/05/blog-post_15.html

少壯不努力老大徒傷悲 (소장불노력노대도상비)

少壯不努力 老大徒傷悲(소장불노력 노대도상비)

젊어서 노력하지 않으면 늙어 부질없이 슬퍼질 따름이다

A lazy youth, lousy age.


출전

심약(沈約) 장가행(長歌行) |


관련 한자어

참조어

少壯不努力 老大徒傷悲(소장불노력 노대도상비) 젊어서 노력하지 않으면, 늙어서는 상심과 슬픔뿐 어쩔 도리 없다네. [심약(沈約) 장가행(長歌行)] |

吏情更覺滄洲遠 老大徒悲未拂衣(이정갱각창주원 노대도비미불의) 벼슬하는 뜻이 신선이 사는 창주와 멀어짐을 새삼 깨닫나니, 늙어서 훌훌 털고 일어서지 못함을 못내 설워하노라. [두보(杜甫) 곡강대주(曲江對酒)] |

旣壯不努力 白首而無知(기장불노력 백수이무지) 젊어서 노력하지 않았더니, 백발 되어서는 아는 것이 없도다. [변계량(卞季良) 감흥(感興)]


중요도·활용도

|

宋襄之仁 (송양지인)

宋襄之仁(송양지인)

송나라 양공(襄公)의 어짊이란 말로 쓸데없는 인정이나 필요없는 동정을 비유하여 쓴다.

춘추시대 약소국이던 송나라의 양공은 제나라의 환공이 죽자 그를 대신해서 覇者(패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의 이복형이자 재상인 목이가 만류했으나 듣지 않았다. 양공은 강국 초나라의 보살핌을 받고 있던 정나라를 공격했다.그러자 초나라는 정나라에 구원병을 보냈다.

목이는 『송나라도 이제 끝장이구나』하고 한탄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양군은 홍수에서 마주쳤다. 송나라 군대는 완벽하게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초나라 군대는 전열을 미처 정비하지 못한 채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를 본 목이가 진언했다.

『적군은 우세하고 아군은 열세이니 정면으로 충돌하면 승산이 없습니다.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공략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군자는 상대의 약점을 노리지 않소. 진용이 정비되지도 않은 적을 치다니 그 따위 비겁한 짓은 할 수 없소』

양공은 절호의 공격기회를 어이없이 놓치고 말았다.

강을 건넌 적은 그래도 아직 진용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고 있어서 또 한번의 기회는 있었다. 목이는 또 다시 강력히 간했으나 양공은 『싸움이란 똑같은 조건하에서 하는 것이오』하고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마침내 진용을 갖춘 초나라 군사는 송나라 군사를 박살내고 말았다.이쯤되면 양공의 「어짊」이 아니라 「어리석음」에 다름아니다.

宋史 (송사) 428

宋史(송사)
脫脫[토크토] 등


卷四百二十八 列傳第一百八十七 道學二(程氏門人)


劉絢

劉絢字質夫,常山人。以蔭為壽安主簿、長子令,督公家逋賦,不假鞭撲而集。歲大旱,府遣吏視傷所,蠲財什二,絢力爭不得,封還其楬,請易之。富弼歎曰:「真縣令也。」元祐初,韓維薦其經明行修,為京兆府教授。王巖叟、朱光庭又薦為太學博士,卒於官。絢力學不倦,最明於《春秋》。程顥每為人言:「他人之學,敏則有矣,未易保也,若絢者,吾無疑焉。」


李吁

李吁字端伯,洛陽人。登進士第。元祐中為秘書省校書郎,卒。程頤謂其才器可以大受,及亡也,祭之以文曰:「自予兄弟倡明道學,能使學者視仿而信從者,吁與劉絢有焉。」


謝良佐

謝良佐字顯道,壽春上蔡人。與游酢、呂大臨、楊時在程門,號「四先生」。登進士第。建中靖國初,官京師,召對,忤旨去。監西京竹木場,坐口語系詔獄,廢為民。良佐記問該贍,對人稱引前史,至不差一字。事有未徹,則顙有泚。與程頤別一年,復來見,問其所進,曰:「但去得一『矜』字爾。」頤喜,謂朱光庭曰:「是子力學,切問而近思者也。」所著《論語說》行於世。


游酢

游酢字定夫,建州建陽人。與兄醇以文行知名,所交皆天下士。程頤見之京師,謂其資可以進道。程顥興扶溝學,招使肄業,盡棄其學而學焉。第進士,調蕭山尉。近臣薦其賢,召為太學錄。遷博士,以奉親不便,求知河清縣。范純仁守穎昌府,辟府教授。純仁入相,復為博士。簽書齊州、泉州判官。晚得監察御史,歷知漢陽軍、和舒濠三州而卒。


張繹

張繹字思叔,河南壽安人。家甚微,年長未知學,傭力於市,出聞邑官傳呼聲,心慕之,問人曰:「何以得此?」人曰:「此讀書所致爾。」即發憤力學,遂以文名。預鄉里計偕,謂科舉之習不足為,嘗游僧捨,見僧道楷,將祝發從之。時周行己官河南,警之曰:「何為捨聖人之學而學佛?異日程先生歸,可師也。」會程頤還自涪,乃往受業,頤賞其穎悟。讀《孟子》「志士不忘在溝壑,勇士不忘喪其元」,慨然若有得。未及仕而卒。頤嘗言「吾晚得二士」,謂繹與尹焞也。


蘇昺

蘇昺字季明,武功人。始學於張載,而事二程卒業。元祐末,呂大中薦之,起布衣為太常博士。坐元符上書入邪籍,編管饒州,卒。


尹焞

尹焞字彥明,一字德充,世為洛人。曾祖仲宣七子,而二子有名:長子源字子漸,是謂河內先生;次子洙字師魯,是謂河南先生。源生林,官至虞部員外郎。林生焞。

少師事程頤,嘗應舉,發策有誅元祐諸臣議,焞曰:「噫,尚可以干祿乎哉!」不對而出,告頤曰:「焞不復應進士舉矣。」頤曰:「子有母在。」□享歸告其母陳,母曰:「吾知汝以善養,不知汝以祿養。」頤聞之曰:「賢哉母也!」於是終身不就舉。焞之從師,與河南張繹同時,繹以高識,焞以篤行。頤既沒,焞聚從洛中,非弔喪問疾不出戶,士大夫宗仰之。

靖康初,種師道薦焞德行可備勸講,召至京師,不欲留,賜號和靖處士。戶部尚書梅執禮、御史中丞呂好問、戶部侍郎邵溥、中書舍人胡安國合奏:「河南布衣尹焞學窮根本,德備中和,言動可以師法,器識可以任大,近世招延之士無出其右者。朝廷特召,而命處士以歸,使焞韜藏國器,不為時用,未副陛下側席求賢之意。望特加識擢,以慰士大夫之望。」不報。

次年,金人陷洛,焞闔門被害,焞死復甦,門人舁置山谷中而免。劉豫命偽帥趙斌以禮聘焞,不從則以兵恐之。焞自商州奔蜀,至閬,得程頤《易傳》十卦於其門人呂稽中,又得全本於其婿邢純,拜而受之。紹興四年,止於涪。涪,頤讀《易》地也,辟三畏齋以居,邦人不識其面。侍讀范沖舉焞自代,授左宣教郎,充崇政殿說書,以疾辭。范沖奏給五百金為行資,遣漕臣奉詔至涪親遣。六年,始就道,作文祭頤而後行。

先是,崇寧以來,禁錮元祐學術,高宗渡江,始召楊時置從班,召胡安國居給捨,范沖、朱震俱在講席,薦焞甚力。既召,而左司諫公輔上疏攻程氏之學,乞加屏絕。

焞至九江,上奏曰:「臣僚上言,程頤之學惑亂天下。焞實師頤垂二十年,學之既專,自信甚篤。使焞濫列經筵,其所敷繹,不過聞於師者。捨其所學,是欺君父,加以疾病衰耗,不能支持。」遂留不進。胡安國奉祠居衡陽,上書言:「欲使學者蹈中庸,師孔、孟,而禁不從程頤之學,是入室而不由戶。」

朱震引疾告去,時趙鼎去位,張浚獨相,於是召安國,俾以內祠兼侍讀,而上章薦焞,言其拒劉豫之節,且謂其所學所養有大過人者,乞令江州守臣疾速津送至國門。復以疾辭,上曰:「焞可謂恬退矣。」詔以秘書郎兼說書,趣起之,焞始入見就職。八年,除秘書少監,未幾,力辭求去。上語參知政事劉大中曰:「焞未論所學淵源,足為後進矜式,班列得老成人,亦是朝廷氣象。」乃以焞直徽猷閣,主管萬壽觀,留侍經筵。資善堂翊善朱震疾亟,薦焞自代。輔臣入奏,上慘然曰:「楊時物故,胡安國與震又亡,朕痛惜之。」趙鼎曰:「尹焞學問淵源,可以繼震。」上指奏牘曰:「震亦薦焞代資善之職,但焞微聵,恐教兒費力爾。」除太常少卿,仍兼說書。未幾,稱疾在告,除權禮部侍郎兼侍講。

時金人遣張通古、蕭哲來議和,焞上疏曰:

臣伏見本朝有遼、金之禍,亙古未聞,中國無人,致其猾亂。昨者城下之戰,詭詐百出,二帝北狩,皇族播遷,宗社之危,已絕而續。陛下即位以來十有二年,雖中原未復,仇敵未殄,然而賴祖宗德澤之厚,陛下勤撫之至,億兆之心無有離異。前年徽宗皇帝、寧德皇后崩問遽來,莫究不豫之狀,天下之人痛心疾首,而陛下方且屈意降志,以迎奉梓宮、請問諱日為事。今又為此議,則人心日去,祖宗積累之業,陛下十二年勤撫之功,當決於此矣。不識陛下亦嘗深謀而熟慮乎,抑在廷之臣不以告也?

《禮》曰:「父母之仇不共戴天,兄弟之仇不反兵。」今陛下信仇敵之譎詐,而覬其肯和以紓目前之急,豈不失不共戴天、不反兵之義乎?又況使人之來,以詔諭為名,以割地為要,今以不戴天之仇與之和,臣切為陛下痛惜之。或以金國內亂,懼我襲己,故為甘言以緩王師。倘或果然,尤當鼓士卒之心,雪社稷之恥,尚何和之為務?

又移書秦檜言:

今北使在廷,天下憂憤,若和議一成,彼日益強,我日益怠,侵尋朘削,天下有被發左衽之憂。比者,竊聞主上以父兄未返,降志辱身於九重之中有年矣,然亦自是未聞金人悔過,還二帝於沙漠。繼之梓宮崩問不詳,天下之人痛恨切骨,金人狼虎貪噬之性,不言可見。天下方將以此望於相公,覬有以革其已然,豈意為之已。甚乎。

今之上策,莫如自治。自治之要,內則進君子而遠小人,外則賞當功而罰當罪,使主上孝弟通於神明,道德成於安強,勿以小智孑義而圖大功,不勝幸甚。

疏及書皆不報,於是焞固辭新命。

九年,以徽猷閣待制提舉萬壽觀兼侍講,又辭,且奏言:

臣職在勸講,蔑有發明,期月之間,病告相繼,坐竊厚祿,無補聖聰。先聖有言:「陳力就列,不能者止。」此當去者一也。臣起自草茅,誤膺召用,守道之語,形於訓詞,而臣貪戀寵榮,遂移素守,使朝廷非常不次之舉,獲懷利苟得之人。此當去者二也。比嘗不量分守,言及國事,識見迂陋,已驗於今,跡其庸愚,豈堪時用。此當去者三也。臣自擢春官,未嘗供職,以疾乞去,更獲超遷,有何功勞,得以祗受。此當去者四也。國朝典法,揆之禮經,年至七十,皆當致仕。今臣年齒已及,加以疾病,血氣既衰,戒之在得。此當去者五也。臣聞聖君有從欲之仁,匹夫有莫奪之志,今臣有五當去之義,無一可留之理,乞檢會累奏,放歸田裡。

疏上,以焞提舉江州太平觀。引年告老,轉一官致仕。

焞自入經筵,即乞休致,朝廷以禮留之;浚、鼎既去,秦檜當國,見焞議和疏及與檜書已不樂,至是,得求去之疏,遂不復留。十二年,卒。

當是時,學於程頤之門者固多君子,然求質直弘毅、實體力行若焞者蓋鮮。頤嘗以「魯」許之,且曰:「我死,而不失其正者尹氏子也。」其言行見於《涪陵記善錄》為詳,有《論語解》及《門人問答》傳於世。


楊時

楊時字中立,南劍將樂人。幼穎異,能屬文,稍長,潛心經史。熙寧九年,中進士第。時河南程顥與弟頤講孔、孟絕學於熙、豐之際,河、洛之士翕然師之。時調官不赴,以師禮見顥於穎昌,相得甚歡。其歸也,顥目送之曰:「吾道南矣。」四年而顥死,時聞之,設位哭寢門,而以書赴告同學者。至是,又見程頤於洛,時蓋年四十矣。一日見頤,頤偶瞑坐,時與游酢侍立不去,頤既覺,則門外雪深一尺矣。關西張載嘗著《西銘》,二程深推服之,時疑其近於兼愛,與其師頤辨論往復,聞理一分殊之說,始豁然無疑。

杜門不仕者十年,久之,歷知瀏陽、餘杭、蕭山三縣,皆有惠政,民思之不忘。張舜民在諫垣,薦之,得荊州教授。時安於州縣,未嘗求聞達,而德望日重,四方之士不遠千里從之遊,號曰龜山先生。

時天下多故,有言於蔡京者,以為事至此必敗,宜引舊德老成置諸左右,庶幾猶可及,時宰是之。會有使高麗者,國主問龜山安在,使回以聞。召為秘書郎,遷著作郎。及面對,奏曰:

堯、舜曰「允執厥中」,孟子曰「湯執中」,《洪範》曰「皇建其有極」,歷世聖人由斯道也。熙寧之初,大臣文六藝之言以行其私,祖宗之法紛更殆盡。元祐繼之,盡復祖宗之舊,熙寧之法一切廢革。至紹聖、崇寧抑又甚焉,凡元祐之政事著在令甲,皆焚之以滅其跡。自是分為二黨,縉紳之禍至今未殄。臣願明詔有司,條具祖宗之法,著為綱目,有宜於今者舉而行之,當損益者損益之,元祐、熙、豐姑置勿問,一趨於中而已。

朝廷方圖燕雲,虛內事外,時遂陳時政之弊,且謂:「燕雲之師宜退守內地,以省轉輸之勞,募邊民為弓弩手,以殺常勝軍之勢。」又言:「都城居四達之衢,無高山巨浸以為阻衛,士人懷異心,緩急不可倚仗。」執政不能用。登對,力陳君臣警戒,正在無虞之時,乞為《宣和會計錄》,以周知天下財物出入之數。徽宗首肯之。

除邇英殿說書。聞金人入攻,謂執政曰:「今日事勢如積薪已然,當自奮勵,以竦動觀聽。若示以怯懦之形,委靡不振,則事去矣。昔汲黯在朝,淮南寢謀。論黯之才,未必能過公孫弘輩也,特其直氣可以鎮壓奸雄之心爾。朝廷威望弗振,使奸雄一以弘輩視之,則無復可為也。要害之地,當嚴為守備,比至都城,尚何及哉?近邊州軍宜堅壁清野,勿與之戰,使之自困。若攻戰略地,當遣援兵追襲,使之腹背受敵,則可以制勝矣。」且謂:「今日之事,當以收人心為先。人心不附,雖有高城深池、堅甲利兵,不足恃也。免夫之役,毒被海內,西城聚斂,東南花石,其害尤甚。前此蓋嘗罷之,詔墨未干,而花石供奉之舟已銜尾矣。今雖復申前令,而禍根不除,人誰信之?欲致人和,去此三者,正今日之先務也。」

金人圍京城,勤王之兵四集,而莫相統一。時言:「唐九節度之師不立統帥,雖李、郭之善用兵,猶不免敗衄。今諸路烏合之眾,臣謂當立統帥,一號令,示紀律,而後士卒始用命。」又言:「童貫為三路大帥,敵人侵疆,棄軍而歸,孥戮之有餘罪,朝廷置之不問,故梁方平、何灌皆相繼而遁。當正典刑,以為臣子不忠之戒。童貫握兵二十餘年,覆軍殺將,馴至今日,比聞防城仍用閹人,覆車之轍,不可復蹈。」疏上,除右諫議大夫兼侍講。

敵兵初退,議者欲割三鎮以講和,時極言其不可,曰:「河朔為朝廷重地,而三鎮又河朔之要藩也。自周世宗迄太祖、太宗,百戰而後得之,一旦棄之北庭,使敵騎疾驅,貫吾腹心,不數日可至京城。今聞三鎮之民以死拒之,三鎮拒其前,吾以重兵躡其後,尚可為也。若種師道、劉光世皆一時名將,始至而未用,乞召問方略。」疏上,欽宗詔出師,而議者多持兩端,時抗疏曰:「聞金人駐磁、相,破大名,劫虜驅掠,無有紀極,誓墨未干,而背不旋踵,吾雖欲專守和議,不可得也。夫越數千里之遠,犯人國都,危道也。彼見勤王之師四面而集,亦懼而歸,非愛我而不攻。朝廷割三鎮二十州之地與之,是欲助寇而自攻也。聞肅王初與之約,及河而返,今挾之以往,此敗盟之大者。臣竊謂朝廷宜以肅王為問,責其敗盟,必得肅王而後已。」時太原圍閉數月,而姚古擁兵逗留不進,時上疏乞誅古以肅軍政,拔偏裨之可將者代之。不報。

李綱之罷,太學生伏闕上書,乞留綱與種師道,軍民集者數十萬,朝廷欲防禁之。吳敏乞用時以靖太學,時得召對,言:「諸生伏闕紛紛,忠於朝廷,非有他意,但擇老成有行誼者,為之長貳,則將自定。」欽宗曰:「無逾於卿。」遂以時兼國子祭酒。首言:「三省政事所出,六曹分治,各有攸司。今乃別辟官屬,新進少年,未必賢於六曹長貳。」又言:

蔡京用事二十餘年,蠹國害民,幾危宗社,人所切齒,而論其罪者,莫知其所本也。蓋京以繼述神宗為名,實挾王安石以圖身利,故推尊安石,加以王爵,配饗孔子廟庭。今日之禍,實安石有以啟之。

謹按安石挾管、商之術,飭六藝以文奸言,變亂祖宗法度。當時司馬光已言其為害當見於數十年之後,今日之事,若合符契。其著為邪說以塗學者耳目,而敗壞其心術者,不可縷數,姑即一二事明之。

昔神宗嘗稱美漢文惜百金以罷露台,安石乃言:「陛下若能以堯、舜之道治天下,雖竭天下以自奉不為過,守財之言非正理。」曾不知堯、舜茅茨土階。禹曰:「克儉於家」,則竭天下以自奉者,必非堯、舜之道。其後王黼以應奉花石之事,竭天下之力,號為享上,實安石有以倡之也。其釋《鳧鷖》守成之詩,於末章則謂:「以道守成者,役使群眾,泰而不為驕,宰制萬物,費而不為侈,孰弊弊然以愛為事。」《詩》之所言,正謂能持盈則神祇祖考安樂之,而無後艱爾。自古釋之者,未有泰而不為驕、費而不為侈之說也。安石獨倡為此說,以啟人主之侈心。後蔡京輩輕費妄用,以侈靡為事。安石邪說之害如此。

伏望追奪王爵,明詔中外,毀去配享之像,使邪說淫辭不為學者之惑。疏上,安石遂降從祀之列。士之習王氏學取科第者,已數十年,不復知其非,忽聞以為邪說,議論紛然。諫官馮澥力主王氏,上疏詆時。會學官中有紛爭者,有旨學官並罷,時亦罷祭酒。

時又言:「元祐黨籍中,惟司馬光一人獨褒顯,而未及呂公著、韓維、范純仁、呂大防、安燾輩。建中初言官陳瓘已褒贈,而未及鄒浩。」於是元祐諸臣皆次第牽復。

尋四上章乞罷諫省,除給事中,辭,乞致仕,除徽猷閣直學士、提舉嵩山崇福宮。時力辭直學士之命,改除徽猷閣待制、提舉崇福宮。陛辭,猶上書乞選將練兵,為戰守之備。

高宗即位,除工部侍郎。陛對言:「自古聖賢之君,未有不以典學為務。」除兼侍讀。乞修《建炎會計錄》,乞恤勤王之兵,乞寬假言者。連章丐外,以龍圖閣直學士提舉杭州洞霄宮。已而告老,以本官致仕,優遊林泉,以著書講學為事。卒年八十三,謚文靖。

時在東郡,所交皆天下士,先達陳瓘、鄒浩皆以師禮事時。暨渡江,東南學者推時為程氏正宗。與胡安國往來講論尤多。時浮沉州縣四十有七年,晚居諫省,僅九十日,凡所論列皆切於世道,而其大者,則辟王氏經學,排靖康和議,使邪說不作。凡紹興初崇尚元祐學術,而朱熹、張栻之學得程氏之正,其源委脈絡皆出於時。

子迪,力學通經,亦嘗師程頤雲。


羅從彥

羅從彥字仲素,南劍人。以累舉恩為惠州博羅縣主簿。聞同郡楊時得河南程氏學,慨然慕之,及時為蕭山令,遂徒步往學焉。時熟察之,乃喜曰:「惟從彥可與言道。」於是日益以親,時弟子千餘人,無及從彥者。從彥初見時三日,即驚汗浹背,曰:「不至是,幾虛過一生矣。」嘗與時講《易》,至《乾》九四爻,云:「伊川說甚善。」從彥即鬻田走洛,見頤問之,頤反覆以告,從彥謝曰:「聞之龜山具是矣。」乃歸卒業。

沙縣陳淵,楊時之婿也,嘗詣從彥,必竟日乃返,謂人曰:「自吾交仲素,日聞所不聞,奧學清節,真南州之冠冕也。既而築室山中,絕意仕進,終日端坐,間謁時將溪上,吟詠而歸,恆充然自得焉。

嘗采祖宗故事為《遵堯錄》,靖康中,擬獻闕下,會國難不果。嘗與學者論治曰:「祖宗法度不可廢,德澤不可恃。廢法度則變亂之事起,恃德澤則驕佚之心生。自古德澤最厚莫若堯、舜,向使子孫可恃,則堯、舜必傳其子。法度之明莫如周,向使子孫世守文、武、成、康之遺緒,雖至今存可也。」又曰:「君子在朝則天下必治,蓋君子進則常有亂世之言,使人主多憂而善心生,故治。小人在朝則天下亂,蓋小人進則常有治世之言,使人主多樂而怠心生,故亂。」又曰:「天下之變不起於四方,而起於朝廷。譬如人之傷氣,則寒暑易侵;木之傷心,則風雨易折。故內有林甫之奸,則外必有祿山之亂,內有盧杞之奸,則外必有朱泚之叛。」

其論士行曰:「周、孔之心使人明道,學者果能明道,則周、孔之心,深自得之。三代人才得周、孔之心,而明道者多,故視死生去就如寒暑晝夜之移,而忠義行之者易。至漢、唐以經術古文相尚,而失周、孔之心,故經術自董生、公孫弘倡之,古文自韓愈、柳宗元啟之,於是明道者寡,故視死生去就如萬鈞九鼎之重,而忠義行之者難。嗚呼,學者所見,自漢、唐喪矣。」又曰:「士之立朝,要以正直忠厚為本。正直則朝廷無過失,忠厚則天下無嗟怨。一於正直而不忠厚,則漸入於刻。一於忠厚而不正直,則流入於懦。」其議論醇正類此。

朱熹謂:「龜山倡道東南,士之遊其門者甚眾,然潛思力行、任重詣極如仲素,一人而已。」紹興中卒,學者稱之曰豫章先生,淳祐間謚文質。


李侗

李侗字願中,南劍州劍浦人。年二十四,聞郡人羅從彥得河、洛之學,遂以書謁之,其略曰:

侗聞之,天下有三本焉,父生之,師教之,君治之,闕其一則本不立。古之聖賢莫不有師,其肄業之勤惰,涉道之淺深,求益之先後,若存若亡,其詳不可得而考。惟洙、泗之間,七十二弟子之徒,議論問答,具在方冊,有足稽焉,是得夫子而益明矣。孟氏之後,道失其傳,枝分派別,自立門戶,天下真儒不復見於世。其聚徒成群,所以相傳授者,句讀文義而已爾,謂之熄焉可也。

其惟先生服膺龜山先生之講席有年矣,況嘗及伊川先生之門,得不傳之道於千五百年之後,性明而修,行完而潔,擴之以廣大,體之以仁恕,精深微妙,各極其至,漢、唐諸儒無近似者。至於不言而飲人以和,與人並立而使人化,如春風發物,蓋亦莫知其所以然也。凡讀聖賢之書,粗有識見者,孰不願得授經門下,以質所疑,至於異論之人,固當置而勿論也。

侗之愚鄙,徒以習舉子業,不得服役於門下,而今日拳拳欲求教者,以謂所求有大於利祿也。抑侗聞之,道可以治心,猶食之充飽,衣之御寒也。人有迫於饑寒之患者,皇皇焉為衣食之謀,造次顛沛,未始忘也。至於心之不治,有沒世不知慮,豈愛心不若口體哉,弗思甚矣。

侗不量資質之陋,徒以祖父以儒學起家,不忍墜箕裘之業,孜孜矻矻為利祿之學,雖知真儒有作,聞風而起,固不若先生親炙之得於動靜語默之間,目擊而意全也。今生二十有四歲,茫乎未有所止,燭理未明而是非無以辨,宅心不廣而喜怒易以搖,操履不完而悔吝多,精神不充而智巧襲,揀焉而不淨,守焉而不敷,朝夕恐懼,不啻如饑寒切身者求充飢御寒之具也。不然,安敢以不肖之身為先生之累哉。

從之累年,授《春秋》、《中庸》、《語》、《孟》之說。從彥好靜坐,侗退入室中,亦靜坐。從彥令靜中看喜怒哀樂未發前氣象,而求所謂「中」者,久之,而於天下之理該攝洞貫,以次融釋,各有條序,從彥亟稱許焉。

既而退居山田,謝絕世故余四十年,食飲或不充,而怡然自適。事親孝謹,仲兄性剛多忤,侗事之得其歡心。閨門內外,夷愉肅穆,若無人聲,而眾事自理。親戚有貧不能婚嫁者,則為經理振助之。與鄉人處,飲食言笑,終日油油如也。

其接後學,答問不倦,雖隨人淺深施教,而必自反身自得始。故其言曰:「學問之道不在多言,但默坐澄心,體認天理。若是,雖一毫私慾之發,亦退聽矣。」又曰:「學者之病,在於未有灑然冰解凍釋處。如孔門諸子,群居終日,交相切磨,又得夫子為之依歸,日用之間觀感而化者多矣。恐於融釋而不脫落處,非言說所及也。」又曰:「讀書者知其所言莫非吾事,而即吾身以求之,則凡聖賢所至而吾所未至者,皆可勉而進矣。若直求之文字,以資誦說,其不為玩物喪志者幾希。」又曰:「講學切在深潛縝密,然後氣味深長,蹊徑不差。若概以理一,而不察其分之殊,此學者所以流於疑似亂真之說而不自知也。」嘗以黃庭堅之稱濂溪周茂叔「胸中酒落,如光風霽月」,為善形容有道者氣象,嘗諷誦之,而顧謂學者存此於胸中,庶幾遇事廓然,而義理少進矣。

其語《中庸》曰:「聖門之傳是書,其所以開悟後學無遺策矣。然所謂『喜怒哀樂未發謂之中』者,又一篇之指要也。若徒記誦而已,則亦奚以為哉?必也體之於身,實見是理,若顏子之歎,卓然若有所見,而不違乎心目之間,然後擴充而往,無所不通,則庶乎其可以言《中庸》矣。」其語《春秋》曰:「《春秋》一事各是發明一例,如觀山水,徙步而形勢不同,不可拘以一法。然所以難言者,蓋以常人之心推測聖人,未到聖人灑然處,豈能無失耶?」

侗既閒居,若無意當世,而傷時憂國,論事感激動人。嘗曰:「今日三綱不振,義利不分。三綱不振,故人心邪僻,不堪任用,是致上下之氣間隔,而中國日衰。義利不分,故自王安石用事,陷溺人心,至今不自知覺。人趨利而不知義,則主勢日孤,人主當於此留意,不然,則是所謂『雖有粟,吾得而食諸』也。」

是時吏部員外郎朱松與侗為同門友,雅重侗,遣子熹從學,熹卒得其傳。沙縣鄧迪嘗謂松曰:「願中如冰壺秋月,瑩徹無瑕,非吾曹所及。」松以謂知言。而熹亦稱同:「姿稟勁特,氣節豪邁,而充養完粹,無復圭角,精純之氣達於面目,色溫言厲,神定氣和,語默動靜,端詳閒泰,自然之中若有成法。平日恂恂,於事若無甚可否,及其酬酢事變,斷以義理,則有截然不可犯者。」又謂自從侗學,辭去復來,則所聞益超絕。其上達不已如此。

侗子友直、信甫皆舉進士,試吏旁郡,更請迎養。歸道武夷,會閩帥汪應辰以書幣來迎,侗往見之,至之日疾作,遂卒,年七十有一。

信甫仕至監察御史,出知衢州,擢廣東、江東憲,以特立不容於朝雲。

宋史 (송사) 365

宋史(송사)
脫脫[토크토] 등


卷三百六十五 列傳第一百二十四


岳飛

维基百科條目︰ 岳飛岳飛字鵬舉,相州湯陰人。世力農。父和,能節食以濟饑者。有耕侵其地,割而與之;貰其財者不責償。飛生時,有大禽若鵠,飛鳴室上,因以為名。未彌月,河決內黃,水暴至,母姚抱飛坐甕中,衝濤及岸得免,人異之。

少負氣節,沈厚寡言,家貧力學,尤好《左氏春秋》、孫吳兵法。生有神力,未冠,挽弓三百斤,弩八石。學射於周同,盡其術,能左右射。同死,朔望設祭於其冢。父義之,曰:「汝為時用,其徇國死義乎。」

宣和四年,真定宣撫劉韐募敢戰士,飛應募。相有劇賊陶俊、賈進和,飛請百騎滅之。遣卒偽為商入賊境,賊掠以充部伍。飛遣百人伏山下,自領數十騎逼賊壘。賊出戰,飛陽北,賊來追之,伏兵起,先所遣卒擒俊及進和以歸。

康王至相,飛因劉浩見,命招賊吉倩,倩以衆三百八十人降。補承信郎。以鐵騎三百往李固渡嘗敵,敗之。從浩解東京圍,與敵相持於滑南,領百騎習兵河上。敵猝至,飛麾其徒曰:「敵雖衆,未知吾虛實,當及其未定擊之。」乃獨馳迎敵。有梟將舞刀而前,飛斬之,敵大敗。遷秉義郎,隸留守宗澤。戰開德、曹州皆有功,澤大奇之,曰:「爾勇智才藝,古良將不能過,然好野戰,非萬全計。」因授以陣圖。飛曰:「陣而後戰,兵法之常,運用之妙,存乎一心。」澤是其言。

康王即位,飛上書數千言,大略謂:「陛下已登大寶,社稷有主,已足伐敵之謀,而勤王之師日集,彼方謂吾素弱,宜乘其怠擊之。黃潛善、汪伯彥輩不能承聖意恢復,奉車駕日益南,恐不足繫中原之望。臣願陛下乘敵穴未固,親率六軍北渡,則將士作氣,中原可復。」書聞,以越職奪官歸。

詣河北招討使張所,所待以國士,借補修武郎,充中軍統領。所問曰:「汝能敵幾何?」飛曰:「勇不足恃,用兵在先定謀,欒枝曳柴以敗荊,莫敖采樵以致絞,皆謀定也。」所矍然曰:「君殆非行伍中人。」飛因說之曰:「國家都汴,恃河北以為固。苟馮據要衝,峙列重鎮,一城受圍,則諸城或撓或救,金人不能窺河南,而京師根本之地固矣。招撫誠能提兵壓境,飛唯命是從。」所大喜,借補武經郎。

命從王彥渡河,至新鄉,金兵盛,彥不敢進。飛獨引所部鏖戰,奪其纛而舞,諸軍爭奮,遂拔新鄉。翌日,戰侯兆川,身被十餘創,士皆死戰,又敗之。夜屯石門山下,或傳金兵復至,一軍皆驚,飛堅臥不動,金兵卒不來。食盡,走彥壁乞糧,彥不許。飛引兵益北,戰于太行山,擒金將拓跋耶烏。居數日,復遇敵,飛單騎持丈八鐵槍,刺殺黑風大王,敵衆敗走。飛自知與彥有隙,復歸宗澤,為留守司統制。澤卒,杜充代之,飛居故職。

二年,戰胙城,又戰黑龍潭,皆大捷。從閭勍保護陵寢,大戰汜水關,射殪金將,大破其衆。駐軍竹蘆渡,與敵相持,選精銳三百伏前山下,令各以薪芻交縛兩束,夜半,爇四端而舉之。金人疑援兵至,驚潰。

三年,賊王善、曹成、孔彥舟等合衆五十萬,薄南薰門。飛所部僅八百,衆懼不敵,飛曰:「吾為諸君破之。」左挾弓,右運矛,橫衝其陣,賊亂,大敗之。又擒賊杜叔五、孫海于東明。借補英州刺史。王善圍陳州,飛戰于清河,擒其將孫勝、孫清,授真刺史。

杜充將還建康,飛曰:「中原地尺寸不可棄,今一舉足,此地非我有,他日欲復取之,非數十萬衆不可。」充不聽,遂與俱歸。師次鐵路步,遇賊張用,至六合遇李成,與戰,皆敗之。成遣輕騎劫憲臣犒軍銀帛,飛進兵掩擊之,成奔江西。時命充守建康,金人與成合寇烏江,充閉門不出。飛泣諫請視師,充竟不出。金人遂由馬家渡渡江,充遣飛等迎戰,王𤫉先遁,諸將皆潰,獨飛力戰。

會充已降金,諸將多行剽掠,惟飛軍秋毫無所犯。兀朮趨杭州,飛要擊至廣德境中,六戰皆捷,擒其將王權,俘簽軍首領四十餘。察其可用者,結以恩遣還,令夜斫營縱火,飛乘亂縱擊,大敗之。駐軍鍾村,軍無見糧,將士忍饑,不敢擾民。金所籍兵相謂曰:「此岳爺爺軍。」爭來降附。

四年,兀朮攻常州,宜興令迎飛移屯焉。盜郭吉聞飛來,遁入湖,飛遣王貴、傅慶追破之,又遣辯士馬皐、林聚盡降其衆。有張威武者不從,飛單騎入其營,斬之。避地者賴以免,圖飛像祠之。

金人再攻常州,飛四戰皆捷;尾襲於鎮江東,又捷;戰于清水亭,又大捷,橫屍十五里。兀朮趨建康,飛設伏牛頭山待之。夜,令百人黑衣混金營中擾之,金兵驚,自相攻擊。兀朮次龍灣,飛以騎三百、步兵二千馳至新城,大破之。兀朮奔淮西,遂復建康。飛奏:「建康為要害之地,宜選兵固守,仍益兵守淮,拱護腹心。」帝嘉納。兀朮歸,飛邀擊于靜安,敗之。

詔討戚方,飛以三千人營于苦嶺。方遁,俄益兵來,飛自領兵千人,戰數十合,皆捷。會張俊兵至,方遂降。范宗尹言張俊自浙西來,盛稱飛可用,遷通、泰鎮撫使兼知泰州。飛辭,乞淮南東路一重難任使,收復本路州郡,乘機漸進,使山東、河北、河東、京畿等路次第而復。

會金攻楚急,詔張俊援之。俊辭,乃遣飛行,而命劉光世出兵援飛。飛屯三墪為楚援,尋抵承州,三戰三捷,殺高太保,俘酋長七十餘人。光世等皆不敢前,飛師孤力寡,楚遂陷。詔飛還守通、泰,有旨可守即守,如不可,但以沙洲保護百姓,伺便掩擊。飛以泰無險可恃,退保柴墟,戰于南霸橋,金大敗。渡百姓於沙上,飛以精騎二百殿,金兵不敢近。飛以泰州失守待罪。

紹興元年,張俊請飛同討李成。時成將馬進犯洪州,連營西山。飛曰:「賊貪而不慮後,若以騎兵自上流絕生米渡,出其不意,破之必矣。」飛請自為先鋒,俊大喜。飛重鎧躍馬,潛出賊右,突其陣,所部從之。進大敗,走筠州。飛抵城東,賊出城,布陣十五里,飛設伏,以紅羅為幟,上刺「岳」字,選騎二百隨幟而前。賊易其少,薄之,伏發,賊敗走。飛使人呼曰:「不從賊者坐,吾不汝殺。」坐而降者八萬餘人。進以餘卒奔成于南康。飛夜引兵至朱家山,又斬其將趙萬。成聞進敗,自引兵十餘萬來。飛與遇於樓子莊,大破成軍,追斬進。成走蘄州,降偽齊。

張用寇江西,用亦相人,飛以書諭之曰:「吾與汝同里,南薰門、鐵路步之戰,皆汝所悉。今吾在此,欲戰則出,不戰則降。」用得書曰:「果吾父也。」遂降。

江、淮平,俊奏飛功第一,加神武右軍副統制,留洪州,彈壓盜賊,授親衞大夫、建州觀察使。建寇范汝為陷邵武,江西安撫李回檄飛分兵保建昌軍及撫州,飛遣人以「岳」字幟植城門,賊望見,相戒勿犯。賊黨姚達、饒青逼建昌,飛遣王萬、徐慶討擒之。升神武副軍都統制。

二年,賊曹成擁衆十餘萬,由江西歷湖湘,據道、賀二州。命飛權知潭州,兼權荊湖東路安撫都總管,付金字牌、黃旗招成。成聞飛將至,驚曰:「岳家軍來矣。」即分道而遁。飛至茶陵,奉詔招之,成不從。飛奏:「比年多命招安,故盜力強則肆暴,力屈則就招,苟不略加剿除,蠭起之衆未可遽殄。」許之。

飛入賀州境,得成諜者,縛之帳下。飛出帳調兵食,吏曰:「糧盡矣,奈何?」飛陽曰:「姑反茶陵。」已而顧諜若失意狀,頓足而入,陰令逸之。諜歸告成,成大喜,期翌日來追。飛命士蓐食,潛趨繞嶺,未明,已至太平場,破其砦。成據險拒飛,飛麾兵掩擊,賊大潰。成走據北藏嶺、上梧關,遣將迎戰,飛不陣而鼓,士爭奮,奪二隘據之。成又自桂嶺置砦至北藏嶺,連控隘道,親以衆十餘萬守蓬頭嶺。飛部才八千,一鼓登嶺,破其衆,成奔連州。飛謂張憲等曰:「成黨散去,追而殺之,則脅從者可憫,縱之則復聚為盜。今遣若等誅其酋而撫其衆,慎勿妄殺,累主上保民之仁。」於是憲自賀、連,徐慶自邵、道,王貴自郴、桂,招降者二萬,與飛會連州。進兵追成,成走宣撫司降。時以盛夏行師瘴地,撫循有方,士無一人死癘者,嶺表平。授武安軍承宣使,屯江州。甫入境,安撫李回檄飛捕劇賊馬友、郝通、劉忠、李通、李宗亮、張式,皆平之。

三年春,召赴行在。江西宣諭劉大中奏:「飛兵有紀律,人恃以安,今赴行在,恐盜復起。」不果行。時虔、吉盜連兵寇掠循、梅、廣、惠、英、韶、南雄、南安、建昌、汀、邵武諸郡,帝乃專命飛平之。飛至虔州,固石洞賊彭友悉衆至雩都迎戰,躍馬馳突,飛麾兵即馬上擒之,餘酋退保固石洞。洞高峻環水,止一徑可入。飛列騎山下,令皆持滿,黎明,遣死士疾馳登山,賊衆亂,棄山而下,騎兵圍之。賊呼丐命,飛令勿殺,受其降。授徐慶等方略,捕諸郡餘賊,皆破降之。初,以隆祐震驚之故,密旨令飛屠虔城。飛請誅首惡而赦脅從,不許;請至三四,帝乃曲赦。人感其德,繪像祠之。餘寇高聚、張成犯袁州,飛遣王貴平之。

秋,入見,帝手書「精忠岳飛」字,製旗以賜之。授鎮南軍承宣使、江南西路沿江制置使,又改神武後軍都統制,仍制置使,李山、吳全、吳錫、李橫、牛皐皆隸焉。 偽齊遣李成挾金人入侵,破襄陽、唐、鄧、隨、郢諸州及信陽軍,湖寇楊么亦與偽齊通,欲順流而下,李成又欲自江西陸行,趨兩浙與么會。帝命飛為之備。

四年,除兼荊南、鄂岳州制置使。飛奏:「襄陽等六郡為恢復中原基本,今當先取六郡,以除心膂之病。李成遠遁,然後加兵湖湘,以殄羣盜。」帝以諭趙鼎,鼎曰:「知上流利害,無如飛者。」遂授黃復州、漢陽軍、德安府制置使。飛渡江中流,顧幕屬曰:「飛不擒賊,不涉此江。」抵郢州城下,偽將京超號「萬人敵」,乘城拒飛。飛鼓衆而登,超投崖死,復郢州,遣張憲、徐慶復隨州。飛趣襄陽,李成迎戰,左臨襄江,飛笑曰:「步兵利險阻,騎兵利平曠。成左列騎江岸,右列步平地,雖衆十萬何能為。」舉鞭指王貴曰:「爾以長槍步卒擊其騎兵。」指牛皐曰:「爾以騎兵擊其步卒。」合戰,馬應槍而斃,後騎皆擁入江,步卒死者無數,成夜遁,復襄陽。劉豫益成兵屯新野,飛與王萬夾擊之,連破其衆。

飛奏:「金賊所愛惟子女金帛,志已驕惰;劉豫僭偽,人心終不忘宋。如以精兵二十萬,直擣中原,恢復故疆,誠易為力。襄陽、隨、郢地皆膏腴,苟行營田,其利為厚。臣候糧足,即過江北剿戮敵兵。」時方重深入之舉,而營田之議自是興矣。

進兵鄧州,成與金將劉合孛堇列砦拒飛。飛遣王貴、張憲掩擊,賊衆大潰,劉合孛堇僅以身免。賊黨高仲退保鄧城,飛引兵一鼓拔之,擒高仲,復鄧州。帝聞之,喜曰:「朕素聞岳飛行軍有紀律,未知能破敵如此。」又復唐州、信陽軍。

襄漢平,飛辭制置使,乞委重臣經畫荊襄,不許。趙鼎奏:「湖北鄂、岳最為上流要害,乞令飛屯鄂、岳,不惟江西藉其聲勢,湖、廣、江、浙亦獲安妥。」乃以隨、郢、唐、鄧、信陽並為襄陽府路隸飛,飛移屯鄂,授清遠軍節度使、湖北路、荊、襄、潭州制置使,封武昌縣開國子。

兀朮、劉豫合兵圍廬州,帝手札命飛解圍,提兵趨廬,偽齊已驅甲騎五千逼城。飛張「岳」字旗與「精忠」旗,金兵一戰而潰,廬州平。飛奏:「襄陽等六郡人戶闕牛、糧,乞量給官錢,免官私逋負,州縣官以招集流亡為殿最。」

五年,入覲,封母國夫人;授飛鎮寧、崇信軍節度使,湖北路、荊襄潭州制置使,進封武昌郡開國侯;又除荊湖南北、襄陽路制置使,神武後軍都統制,命招捕楊么。飛所部皆西北人,不習水戰,飛曰:「兵何常,顧用之何如耳。」先遣使招諭之。賊黨黃佐曰:「岳節使號令如山,若與之敵,萬無生理,不如往降。節使誠信,必善遇我。」遂降。飛表授佐武義大夫,單騎按其部,拊佐背曰:「子知逆順者。果能立功,封侯豈足道?欲復遣子至湖中,視其可乘者擒之,可勸者招之,如何?」佐感泣,誓以死報。

時張浚以都督軍事至潭,參政席益與浚語,疑飛玩寇,欲以聞。浚曰:「岳侯,忠孝人也,兵有深機,胡可易言?」益慙而止。黃佐襲周倫砦,殺倫,擒其統制陳貴等。飛上其功,遷武功大夫。統制任士安不稟王𤫉令,軍以此無功。飛鞭士安使餌賊,曰:「三日賊不平,斬汝。」士安宣言:「岳太尉兵二十萬至矣。」賊見止士安軍,併力攻之。飛設伏,士安戰急,伏四起擊賊,賊走。

會召浚還防秋,飛袖小圖示浚,浚欲俟來年議之。飛曰:「已有定畫,都督能少留,不八日可破賊。」浚曰:「何言之易?」飛曰:「王四廂以王師攻水寇則難,飛以水寇攻水寇則易。水戰我短彼長,以所短攻所長,所以難。若因敵將用敵兵,奪其手足之助,離其腹心之託,使孤立,而後以王師乘之,八日之內,當俘諸酋。」浚許之。

飛遂如鼎州。黃佐招楊欽來降,飛喜曰:「楊欽驍悍,既降,賊腹心潰矣。」表授欽武義大夫,禮遇甚厚,乃復遣歸湖中。兩日,欽說余端、劉詵等降,飛詭罵欽曰:「賊不盡降,何來也?」杖之,復令入湖。是夜,掩賊營,降其衆數萬。么負固不服,方浮舟湖中,以輪激水,其行如飛,旁置撞竿,官舟迎之輒碎。飛伐君山木為巨筏,塞諸港?,又以腐木亂草浮上流而下,擇水淺處,遣善罵者挑之,且行且罵。賊怒來追,則草木壅積,舟輪礙不行。飛亟遣兵擊之,賊奔港中,為筏所拒。官軍乘筏,張牛革以蔽矢石,舉巨木撞其舟,盡壞。么投水,牛皐擒斬之。飛入賊壘,餘酋驚曰:「何神也!」俱降。飛親行諸砦慰撫之,縱老弱歸田,籍少壯為軍,果八日而賊平。浚嘆曰:「岳侯神算也。」初,賊恃其險曰:「欲犯我者,除是飛來。」至是,人以其言為讖。獲賊舟千餘,鄂渚水軍為沿江之冠。詔兼蘄、黃制置使,飛以目疾乞辭軍事,不許,加檢校少保,進封公。還軍鄂州,除荊湖南北、襄陽路招討使。

六年,太行山忠義社梁興等百餘人,慕飛義率衆來歸。飛入覲,面陳:「襄陽自收復後,未置監司,州縣無以按察。」帝從之,以李若虛為京西南路提舉兼轉運、提刑,又令湖北、襄陽府路自知州、通判以下賢否,許飛得自黜陟。

張浚至江上會諸大帥,獨稱飛與韓世忠可倚大事,命飛屯襄陽,以窺中原,曰:「此君素志也。」飛移軍京西,改武勝、定國軍節度使,除宣撫副使,置司襄陽。命往武昌調軍。居母憂,降制起復,飛扶櫬還廬山,連表乞終喪,不許,累詔趣起,乃就軍。又命宣撫河東,節制河北路。首遣王貴等攻虢州,下之,獲糧十五萬石,降其衆數萬。張浚曰:「飛措畫甚大,令已至伊、洛,則太行一帶山砦,必有應者。」飛遣楊再興進兵至長水縣,再戰皆捷,中原響應。又遣人焚蔡州糧。

九月,劉豫遣子麟、侄猊分道寇淮西,劉光世欲舍廬州,張俊欲棄盱眙,同奏召飛以兵東下,欲使飛當其鋒,而己得退保。張浚謂:「岳飛一動,則襄漢何所制?」力沮其議。帝慮俊、光世不足任,命飛東下。飛自破曹成、平楊么,凡六年,皆盛夏行師,致目疾,至是,甚;聞詔即日啟行,未至,麟敗。飛奏至,帝語趙鼎曰:「劉麟敗北不足喜,諸將知尊朝廷為可喜。」遂賜札,言:「敵兵已去淮,卿不須進發,其或襄、鄧、陳、蔡有機可乘,從長措置。」飛乃還軍。時偽齊屯兵窺唐州,飛遣王貴、董先等攻破之,焚其營。奏圖蔡以取中原,不許。飛召貴等還。

七年,入見,帝從容問曰:「卿得良馬否?」飛曰:「臣有二馬,日啖芻豆數斗,飲泉一斛,然非精潔則不受。介而馳,初不甚疾,比行百里始奮迅,自午至酉,猶可二百里。褫鞍甲而不息不汗,若無事然。此其受大而不苟取,力裕而不求逞,致遠之材也。不幸相繼以死。今所乘者,日不過數升,而秣不擇粟,飲不擇泉,攬轡未安,踊踴疾驅,甫百里,力竭汗喘,殆欲斃然。此其寡取易盈,好逞易窮,駑鈍之材也。」帝稱善,曰:「卿今議論極進。」拜太尉,繼除宣撫使兼營田大使。從幸建康,以王德、酈瓊兵隸飛,詔諭德等曰:「聽飛號令,如朕親行。」

飛數見帝,論恢復之略。又手疏言:「金人所以立劉豫於河南,蓋欲荼毒中原,以中國攻中國,粘罕因得休兵觀釁。臣欲陛下假臣月日,便則提兵趨京、洛,據河陽、陝府、潼關,以號召五路叛將。叛將既還,遣王師前進,彼必棄汴而走河北,京畿、陝右可以盡復。然後分兵濬、滑,經略兩河,如此則劉豫成擒,金人可滅,社稷長久之計,實在此舉。」帝答曰:「有臣如此,顧復何憂,進止之機,朕不中制。」又召至寢閣命之曰:「中興之事,一以委卿。」命節制光州。

飛方圖大舉,會秦檜主和,遂不以德、瓊兵隸飛。詔詣都督府與張浚議事,浚謂飛曰:「王德淮西軍所服,浚欲以為都統,而命呂祉以督府參謀領之,如何?」飛曰:「德與瓊素不相下,一旦揠之在上,則必爭。呂尚書不習軍旅,恐不足服衆。」浚曰:「張宣撫如何?」飛曰:「暴而寡謀,尤瓊所不服。」浚曰:「然則楊沂中爾?」飛曰:「沂中視德等爾,豈能馭此軍?」浚艴然曰:「浚固知非太尉不可。」飛曰:「都督以正問飛,不敢不盡其愚,豈以得兵為念耶?」即日上章乞解兵柄,終喪服,以張憲攝軍事,步歸,廬母墓側。浚怒,奏以張宗元為宣撫判官,監其軍。

帝累詔趣飛還職,飛力辭,詔幕屬造廬以死請,凡六日,飛趨朝待罪,帝慰遣之。宗元還言:「將和士銳,人懷忠孝,皆飛訓養所致。」帝大悅。飛奏:「比者寢閣之命,咸謂聖斷已堅,何至今尚未決?臣願提兵進討,順天道,因人心,以曲直為老壯,以逆順為強弱,萬全之効可必。」又奏:「錢塘僻在海隅,非用武地。願陛下建都上游,用漢光武故事,親率六軍,往來督戰。庶將士知聖意所向,人人用命。」未報而酈瓊叛,浚始悔。飛復奏:「願進屯淮甸,伺便擊瓊,期於破滅。」不許,詔駐師江州為淮、浙援。

飛知劉豫結粘罕,而兀朮惡劉豫,可以間而動。會軍中得兀朮諜者,飛陽責之曰:「汝非吾軍中人張斌耶?吾向遣汝至齊,約誘至四太子,汝往不復來。吾繼遣人問,齊已許我,今冬以會合寇江為名,致四太子于清河。汝所持書竟不至,何背我耶?」諜冀緩死,即詭服。乃作蠟書,言與劉豫同謀誅兀朮事,因謂諜曰:「吾今貸汝。」復遣至齊,問舉兵期,刲股納書,戒勿泄。諜歸,以書示兀朮,兀朮大驚,馳白其主,遂廢豫。飛奏:「宜乘廢豫之際,擣其不備,長驅以取中原。」不報。

八年,還軍鄂州。王庶視師江、淮,飛與庶書:「今歲若不舉兵,當納節請閑。」庶甚壯之。秋,召赴行在,命詣資善堂見皇太子。飛退而喜曰:「社稷得人矣,中興基業,其在是乎?」會金遣使將歸河南地,飛言:「金人不可信,和好不可恃,相臣謀國不臧,恐貽後世譏」檜銜之。

九年,以復河南,大赦。飛表謝,寓和議不便之意,有「唾手燕雲,復讎報國」之語。授開府儀同三司,飛力辭,謂:「今日之事,可危而不可安;可憂而不可賀;可訓兵飭士,謹備不虞,而不可論功行賞,取笑敵人。」三詔不受,帝溫言獎諭,乃受。會遣士㒟謁諸陵,飛請以輕騎從洒埽,實欲觀釁以伐謀。又奏:「金人無事請和,此必有肘腋之虞,名以地歸我,實寄之也。」檜白帝止其行。

十年,金人攻拱、亳,劉錡告急,命飛馳援,飛遣張憲、姚政赴之。帝賜札曰:「設施之方,一以委卿,朕不遙度。」飛乃遣王貴、牛皐、董先、楊再興、孟邦傑、李寶等,分布經略西京、汝、鄭、穎昌、陳、曹、光、蔡諸郡;又命梁興渡河,糾合忠義社,取河東、北州縣。又遣兵東援劉錡,西援郭浩,自以其軍長驅以闞中原。將發,密奏言:「先正國本以安人心,然後不常厥居,以示無忘復讎之意。」帝得奏,大褒其忠,授少保,河南府路、陝西、河東北路招討使,尋改河南、北諸路招討使。未幾,所遣諸將相繼奏捷。大軍在穎昌,諸將分道出戰,飛自以輕騎駐郾城,兵勢甚銳。

兀朮大懼,會龍虎大王議,以為諸帥易與,獨飛不可當,欲誘致其師,併力一戰。中外聞之,大懼,詔飛審處自固。飛曰:「金人伎窮矣。」乃日出挑戰,且罵之。兀朮怒,合龍虎大王、蓋天大王與韓常之兵逼郾城。飛遣子雲領騎兵直貫其陣,戒之曰:「不勝,先斬汝!」鏖戰數十合,賊屍布野。

初,兀朮有勁軍,皆重鎧,貫以韋索,三人為聯,號「拐子馬」,官軍不能當。是役也,以萬五千騎來,飛戒步卒以麻札刀入陣,勿仰視,第斫馬足。拐子馬相連,一馬仆,二馬不能行,官軍奮擊,遂大敗之。兀朮大慟曰:「自海上起兵,皆以此勝,今已矣!」兀朮益兵來,部將王剛以五十騎覘敵,遇之,奮斬其將。飛時出視戰地,望見黃塵蔽天,自以四十騎突戰,敗之。

方郾城再捷,飛謂雲曰:「賊屢敗,必還攻穎昌,汝宜速援王貴。」既而兀朮果至,貴將遊奕、雲將背嵬戰于城西。雲以騎兵八百挺前決戰,步軍張左右翼繼之,殺兀朮婿夏金吾、副統軍粘罕索孛堇,兀朮遁去。

梁興會太行忠義及兩河豪傑等,累戰皆捷,中原大震。飛奏:「興等過河,人心願歸朝廷。金兵累敗,兀朮等皆令老少北去,正中興之機。」飛進軍朱仙鎮,距汴京四十五里,與兀朮對壘而陣,遣驍將以背嵬騎五百奮擊,大破之,兀朮遁還汴京。飛檄陵臺令行視諸陵,葺治之。

先是,紹興五年,飛遣梁興等布德意,招結兩河豪傑,山砦韋銓、孫謀等斂兵固堡,以待王師,李通、胡清、李寶、李興、張恩、孫琪等舉衆來歸。金人動息,山川險要,一時皆得其實。盡磁、相、開德、澤、潞、晉、絳、汾、隰之境,皆期日興兵,與官軍會。其所揭旗以「岳」為號,父老百姓爭挽車牽牛,載糗糧以餽義軍,頂盆焚香迎候者,充滿道路。自燕以南,金號令不行,兀朮欲簽軍以抗飛,河北無一人從者。乃嘆曰:「自我起北方以來,未有如今日之挫衂。」金帥烏陵思謀素號桀黠,亦不能制其下,但諭之曰:「毋輕動,俟岳家軍來即降。」金統制王鎮、統領崔慶、將官李覬崔虎華旺等皆率所部降,以至禁衞龍虎大王下忔查千戶高勇之屬,皆密受飛旗牓,自北方來降。金將軍韓常欲以五萬衆內附。飛大喜,語其下曰:「直抵黃龍府,與諸君痛飲爾!」

方指日渡河,而檜欲畫淮以北棄之,風臺臣請班師。飛奏:「金人銳氣沮喪,盡棄輜重,疾走渡河,豪傑向風,士卒用命,時不再來,機難輕失。」檜知飛志銳不可回,乃先請張俊、楊沂中等歸,而後言飛孤軍不可久留,乞令班師。一日奉十二金字牌,飛憤惋泣下,東向再拜曰:「十年之力,廢於一旦。」飛班師,民遮馬慟哭,訴曰:「我等戴香盆、運糧草以迎官軍,金人悉知之。相公去,我輩無噍類矣。」飛亦悲泣,取詔示之曰:「吾不得擅留。」哭聲震野,飛留五日以待其徙,從而南者如市,亟奏以漢上六郡閒田處之。

方兀朮棄汴去,有書生叩馬曰:「太子毋走,岳少保且退矣。」兀朮曰:「岳少保以五百騎破吾十萬,京城日夜望其來,何謂可守?」生曰:「自古未有權臣在內,而大將能立功於外者,岳少保且不免,況欲成功乎?」兀朮悟,遂留。飛既歸,所得州縣,旋復失之。飛力請解兵柄,不許,自廬入觀,帝問之,飛拜謝而已。

十一年,諜報金分道渡淮,飛請合諸帥之兵破敵。兀朮、韓常與龍虎大王疾驅至廬,帝趣飛應援,凡十七札。飛策金人舉國南來,巢穴必虛,若長驅京、洛以擣之,彼必奔命,可坐而敝。時飛方苦寒嗽,力疾而行。又恐帝急於退敵,乃奏:「臣如擣虛,勢必得利,若以為敵方在近,未暇遠圖,欲乞親至蘄、黃,以議攻卻。」帝得奏大喜,賜札曰:「卿苦寒疾,乃為朕行,國爾忘身,誰如卿者?」師至廬州,金兵望風而遁。飛還兵于舒以俟命,帝又賜札,以飛小心恭謹、不專進退為得體。兀朮破濠州,張俊駐軍黃連鎮,不敢進;楊沂中遇伏而敗,帝命飛救之。金人聞飛至,又遁。

時和議既決,檜患飛異己,乃密奏召三大將論功行賞。韓世忠、張俊已至,飛獨後,檜又用參政王次翁計,俟之六七日。既至,授樞密副使,位參知政事上,飛固請還兵柄。五月,詔同俊往楚州措置邊防,總韓世忠軍還駐鎮江。

初,飛在諸將中年最少,以列校拔起,累立顯功,世忠、俊不能平,飛屈己下之,幕中輕銳教飛勿苦降意。金人攻淮西,俊分地也,俊始不敢行,師卒無功。飛聞命即行,遂解廬州圍,帝授飛兩鎮節,俊益恥。楊么平,飛獻俊、世忠樓船各一,兵械畢備,世忠大悅,俊反忌之。淮西之役,俊以前途糧乏訹飛,飛不為止,帝賜札褒諭,有曰:「轉餉艱阻,卿不復顧。」俊疑飛漏言,還朝,反倡言飛逗遛不進,以乏餉為辭。至視世忠軍,俊知世忠忤檜,欲與飛分其背嵬軍,飛議不肯,俊大不悅。及同行楚州城,俊欲修城為備,飛曰:「當戮力以圖恢復,豈可為退保計?」俊變色。

會世忠軍吏景著與總領胡紡言:「二樞密若分世忠軍,恐至生事。」紡上之朝,檜捕著下大理寺,將以扇搖誣世忠。飛馳書告以檜意,世忠見帝自明。俊於是大憾飛,遂倡言飛議棄山陽,且密以飛報世忠事告檜,檜大怒。

初,檜逐趙鼎,飛每對客嘆息,又以恢復為己任,不肯附和議。讀檜奏,至「德無常師,主善為師」之語,惡其欺罔,恚曰:「君臣大倫,根於天性,大臣而忍面謾其主耶!」兀朮遺檜書曰:「汝朝夕以和請,而岳飛方為河北圖,必殺飛,始可和。」檜亦以飛不死,終梗和議,己必及禍,故力謀殺之。以諫議大夫万俟禼與飛有怨,風禼劾飛,又風中丞何鑄、侍御史羅汝楫交章彈論,大率謂:「今春金人攻淮西,飛略至舒、蘄而不進,比與俊按兵淮上,又欲棄山陽而不守。」飛累章請罷樞柄,尋還兩鎮節,充萬壽觀使、奉朝請。檜志未伸也,又諭張俊令劫王貴、誘王俊誣告張憲謀還飛兵。

檜遣使捕飛父子證張憲事,使者至,飛笑曰:「皇天后土,可表此心。」初命何鑄鞠之,飛裂裳以背示鑄,有「盡忠報國」四大字,深入膚理。既而閱實無左驗,鑄明其無辜。改命万俟禼。禼誣:飛與憲書,令虛申探報以動朝廷,雲與憲書,令措置使飛還軍;且言其書已焚。

飛坐繫兩月,無可證者。或教禼以臺章所指淮西事為言,禼喜白檜,簿錄飛家,取當時御札藏之以滅迹。又逼孫革等證飛受詔逗遛,命評事元龜年取行軍時日雜定之,傅會其獄。歲暮,獄不成,檜手書小紙付獄,即報飛死,時年三十九。雲棄市。籍家貲,徙家嶺南。幕屬于鵬等從坐者六人。

初,飛在獄,大理寺丞李若樸何彥猷、大理卿薛仁輔並言飛無罪,禼俱劾去。宗正卿士㒟請以百口保飛,禼亦劾之,竄死建州。布衣劉允升上書訟飛冤,下棘寺以死。凡傅成其獄者,皆遷轉有差。

獄之將上也,韓世忠不平,詣檜詰其實,檜曰:「飛子雲與張憲書雖不明,其事體莫須有。」世忠曰:「『莫須有』三字,何以服天下?」時洪皓在金國中,蠟書馳奏,以為金人所畏服者惟飛,至以父呼之,諸酋聞其死,酌酒相賀。

飛至孝,母留河北,遣人求訪,迎歸。母有痼疾,藥餌必親。母卒,水漿不入口者三日。家無姬侍。吳玠素服飛,願與交驩,飾名姝遺之。飛曰:「主上宵旰,豈大將安樂時?」卻不受,玠益敬服。少豪飲,帝戒之曰:「卿異時到河朔,乃可飲。」遂絕不飲。帝初為飛營第,飛辭曰:「敵未滅,何以家為?」或問天下何時太平,飛曰:「文臣不愛錢,武臣不惜死,天下太平矣。」

師每休捨,課將士注坡跳壕,皆重鎧習之。子雲嘗習注坡,馬躓,怒而鞭之。卒有取民麻一縷以束芻者,立斬以徇。卒夜宿,民開門願納,無敢入者。軍號「凍死不拆屋,餓死不鹵掠。」卒有疾,躬為調藥;諸將遠戍,遣妻問勞其家;死事者哭之而育其孤,或以子婚其女。凡有頒犒,均給軍吏,秋毫不私。

善以少擊衆。欲有所舉,盡召諸統制與謀,謀定而後戰,故有勝無敗。猝遇敵不動,故敵為之語曰:「撼山易,撼岳家軍難。」張俊嘗問用兵之術,曰:「仁、智、信、勇、嚴,闕一不可。」調軍食,必蹙額曰:「東南民力,耗敝極矣。」荊湖平,募民營田,又為屯田,歲省漕運之半。帝手書曹操、諸葛亮、羊祜三事賜之。飛跋其後,獨指操為姦賊而鄙之,尤檜所惡也。

張所死,飛感舊恩,鞠其子宗本,奏以官。李寶自楚來歸,韓世忠留之,寶痛哭願歸飛,世忠以書來諗,飛復曰:「均為國家,何分彼此?」世忠嘆服。襄陽之役,詔光世為援,六郡既復,光世始至,飛奏先賞光世軍。好賢禮士,覽經史,雅歌投壺,恂恂如書生。每辭官,必曰:「將士効力,飛何功之有?」然忠憤激烈,議論持正,不挫於人,卒以此得禍。

檜死,議復飛官。万俟禼謂金方願和,一旦錄故將,疑天下心,不可。及紹興末,金益猖獗,太學生程宏圖上書訟飛冤,詔飛家自便。初,檜惡岳州同飛姓,改為純州,至是仍舊。中丞汪澈宣撫荊、襄,故部曲合辭訟之,哭聲雷震。孝宗詔復飛官,以禮改葬,賜錢百萬,求其後悉官之。建廟於鄂,號忠烈。淳熙六年,謚武穆。嘉定四年,追封鄂王。

五子:雲、雷、霖、震、霆。


子雲

雲,飛養子。年十二,從張憲戰,多得其力,軍中呼曰「贏官人」。飛征伐,未嘗不與,數立奇功,飛輒隱之。每戰,以手握兩鐵椎,重八十斤,先諸軍登城。攻下隨州,又攻破鄧州,襄漢平,功在第一,飛不言。逾年,銓曹辯之,始遷武翼郎、楊么平,功亦第一,又不上。張浚廉得其實,曰:「岳侯避寵榮,廉則廉矣,未得為公也。」奏乞推異數,飛力辭不受。嘗以特旨遷三資,飛辭曰:「士卒冒矢石立奇功,始沾一級,男雲遽躐崇資,何以服衆?」累表不受。穎昌大戰,無慮十數,出入行陣,體被百餘創,甲裳為赤。以功遷忠州防禦使,飛又辭;命帶御器械,飛又力辭之。終左武大夫、提舉醴泉觀。死年二十三。孝宗初,與飛同復元官,以禮祔葬,贈安遠軍承宣使。

雷,忠訓郎、閣門祗候,贈武略郎。霖,朝散大夫、敷文閣待制,贈太中大夫。初,飛下獄,檜令親黨王會搜其家,得御札數篋,束之左藏南庫,霖請於孝宗,還之。霖子珂,以淮西十五御札辯驗彙次,凡出師應援之先後皆可考。嘉定間,為《籲天辯誣集》五卷、《天定錄》二捲上之。震,朝奉大夫、提舉江南東路茶鹽公事。霆,修武郎、閣門祗候。

論曰:西漢而下,若韓、彭、絳、灌之為將,代不乏人,求其文武全器、仁智幷施如宋岳飛者,一代豈多見哉。史稱關雲長通《春秋左氏》學,然未嘗見其文章。飛北伐,軍至汴梁之朱仙鎮,有詔班師,飛自為表答詔,忠義之言,流出肺腑,真有諸葛孔明之風,而卒死於秦檜之手。蓋飛與檜勢不兩立,使飛得志,則金讎可復,宋恥可雪;檜得志,則飛有死而已。昔劉宋殺檀道濟,道濟下獄,嗔目曰:「自壞汝萬里長城!」高宗忍自棄其中原,故忍殺飛,嗚呼寃哉!嗚呼寃哉!

束手無策 (속수무책, shùshǒuwúcè)

束手無策(속수무책)

束手无策(shùshǒuwúcè)

어찌할 방도가 없음.

be at one’s wits end


유의어

一筹莫展(yìchóumòzhǎn, 일주막전) 써 볼 만한 계책이 하나도 없다.

반의어

大刀阔斧(dàdāokuòfǔ, 대도활부) 과감하고 패기가 있다.

宋書 (송서) 沈約 (심약)

宋書(송서) 沈約(심약)

異名: 宋书(sòngshū)
구분: 역사서
저자: 심약(沈約)
시대: 중국 남북조시대(487년)


중국 남조(南朝) 송(宋,420∼479)의 정사(正史).


《제기(帝紀)》 10권, 《지(志)》나라 30권, 《열전(列傳)》 60권, 도합 100권. 487년 남제(南齊) 무제(武帝)의 칙명(勅命)에 따라 심약(沈約)이 488년에 편찬을 완성한 것으로 송나라 60년(420∼479)의 역사를 기록하였으며, 중국의 사서(史書) 중 가장 권위 있는 25정사에 들어간다. 이 사서는 이미 462년 송나라 효무제(孝武帝)의 칙명에 따라 서원(徐爰) 등이 편찬한 것에, 그 뒤의 역사 등을 보충하여 완성한 것이다.


고사성어

乘风破浪(승풍파랑,chéngfēngpòlàng) 바람을 타고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다. 《송서·종각전(宋書·宗慤傳)》에서 유래함 |


참조항목

二十四史(24사,èrshísìshǐ) |

宋史 (송사) 脫脫 (토크토) 등

宋史(송사)
脫脫[토크토] 등


宋史(Sòngshǐ)

구분: 역사서
저자: 토크토[脫脫] 등
시대: 중국 원(元)


중국 원(元)나라 때의 사서(史書).


중국(中國) 이십사사(二十四史)의 하나. 송(宋)나라의 사서(史書)로 본기(本紀) 47권, 지(志) 162권, 표(表) 32권, 열전(列傳) 255권 등 전 496권이다.

1343년 원(元)나라의 토크토[탈탈(脫脫), 탁극탁(托克托)]이 칙명(勅命)으로 『요사(遼史)』『금사(金史)』와 함께 착수(着手)하여 1345년에 완성(完成)하였다. 북송(北宋) 이래 각 황제마다 편찬한 국사나 실록(實錄) ·일력(日曆) 등을 기초로 하였다. 3년간에 속성했기 때문에 교열이 철저(徹底)하지 않아 내용(內容)에 빠진 것이 많다. 편집 때에 삭제된 부분도 많고 원사료(原史料)는 거의 없어졌거나 분실되었다. 특히 남송(南宋) 말의 부분은 다른 기본적 사료가 적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판본으로서는 지정간본(至正刊本)에 의한 백납본(百衲本)이 가장 오래 되고 우수하다. 고려전(高麗傳)이 수록(收錄)되어 있다.


관련 고사성어


卷365 列傳第124

岳飛

莫须有(막수유,mòxūyǒu) |


卷428 列傳第187 道學二

程氏門人 劉絢 李籲 謝良佐 游酢 張繹 蘇昞 尹焞 楊時 羅從彥 李侗


程门立雪(정문입설,Chéngménlìxuě) |


참조항목

二十四史(24사,èrshísìshǐ) |

率獸食人 (솔수식인)

率獸食人(솔수식인)

率 거느릴 솔 | 獸 짐승 수 | 食 먹을 식 | 人 사람 인 |

率獸食人이란 폭정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맹자(孟子) 양혜왕상(梁惠王上)편의 이야기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맹자는 그에게 물었다.

사람을 몽둥이로 죽이는 것이 칼로 죽이는 것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양혜왕은 다름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다른 점이 없다고 하자, 맹자는 말을 계속하였다.

주방에는 살찐 고기가 있고, 마굿간에는 살찐 말이 있는데, 백성들은 굶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다면 이것은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이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조차도 사람들은 미워하는데, 백성의 부모가 되어 가지고 정치를 해나가는데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면[不免於率獸而食人] 백성의 부모노릇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孫龐鬪智 (손방투지, sūnpángdòuzhì)

孫龐鬪智(손방투지)

孙庞斗智(sūn páng dòu zhì)


孫 손자 손 | 龐 어지러울 방 | 鬪 싸울 투 | 智 지혜 지 |


'손빈(孫矉)과 방연(龐涓)이 지혜를 다투다'라는 뜻으로, 대등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지모를 다하여 경쟁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전국시대의 손빈과 방연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손빈과 방연은 귀곡자(鬼谷子)의 문하에서 함께 병법을 배웠다. 방연은 위(魏)나라 혜왕(慧王)에게 기용되어 부근의 약소 국가들을 정벌하는 공을 세웠다. 제나라 사람인 손빈은 그 재능이 방연보다 한 수 위였다. 혜왕도 손빈의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동문수학한 방연에게 그를 초빙하도록 하였다.

방연은 손빈의 재능을 시기하여, 혜왕에게 손빈이 제나라와 밀통한다고 모함하였다. 손빈은 슬개골을 잘리는 형벌을 당하고, 얼굴에는 죄수임을 나타내는 문자가 새겨졌다. 얼마 뒤 손빈은 위나라를 방문한 제나라 사신들에게 구출되어 제나라로 돌아왔다. 제나라의 대장 전기(田忌)는 위왕(威王)에게 손빈을 천거하였다.

354년에 위나라가 조(趙)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위왕은 전기와 손빈을 각각 대장과 군사(軍師)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였다. 손빈은 조나라를 공격하는 데 병력을 투입하여 방비가 허술해진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을 공격하였다. 그리고는 방연이 조나라 공격을 중단하고 철수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위위구조(圍魏救趙: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하다)'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341년에 위나라는 한(韓)나라를 침공하였다. 제나라 선왕(宣王)은 한나라의 구원 요청을 받고 전기와 손빈을 파견하였다. 손빈은 이번에도 한나라를 구하러 가지 않고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위나라가 대군을 보냈을 때 제나라 군대는 이미 물러간 뒤였다. 방연이 제나라 군대가 머물렀던 곳을 살펴보니 병사들이 솥에 밥을 지어 먹은 흔적이 족히 10만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튿날에는 솥의 숫자가 5만 명으로 줄어 있었고, 그 다음 날에는 2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

방연은 제나라 병사들이 탈영하여 줄어든 것이라 믿고, 이 틈에 제나라를 섬멸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였다. 마릉(馬陵)에 이르러 방연이 병사들을 독려하여 진군하는데, 앞에 나무가 쓰러져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방연이 살펴보니 거기에는 "방연이 이 나무 아래서 죽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방연은 즉시 후퇴하려 하였으나 사방에서 제나라 군대가 공격해 왔다. 제나라 군대의 솥 숫자가 줄어든 것은 방연이 경계심을 풀고 공격해 오도록 유도한 손빈의 책략이었던 것이다. 방연은 퇴로가 끊기자 자결하였다.

이 고사는 《사기》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손방투지는 재능이 비슷한 사람이 계책을 써서 기량을 겨루거나,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원수가 되어 생사를 다투는 일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史記(사기):孫子吳起列傳(손자오기열전)


관련 한자

참조어

圍魏救趙(위위구조) |


손빈, 방연, 사기, 사기:손자오기열전

孫矉, 龐涓, 史記, 史記:孫子吳起列傳

宋名臣言行錄 (송명신언행록) 朱熹 (주희)

宋名臣言行錄(송명신언행록) 朱熹(주희)

名臣言行錄(명신언행록). 송(宋)나라 때의 명신의 문집(文集). 전기(傳記)를 뽑아 엮은 책(冊). 주희(朱熹)가 엮었음. 전집(前集) 10권, 후집(後集) 14권, 후(後)에 이유무(李幼武)가 엮은 별집(別集). 외집(外執). 속집(續集) 등(等)이 나왔음.

笑裏藏刀 (소리장도, xiàolǐcángdāo)

笑裏藏刀(소리장도)

笑里藏刀(xiàolǐcángdāo)

笑 웃을 소 | 裏 속 리 | 藏 감출 장 | 刀 칼 도 |


三十六計 敵戰計 第十計. 웃음 속에 칼을 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가지다. '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있다'라는 뜻으로, 겉으로는 웃는 낯으로 상냥하게 대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상대방을 해칠 뜻을 품고 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웃음 속에 칼날을 숨기다. 우리 옛말에 '솜으로 칼을 싼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부드러운 말씨와 미소짓는 표정으로 상대방의 경계심을 풀고 방심하게 하라는 말이다. 병법에서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을 믿게 하여 안심시킨 뒤에 허를 찔러 공격하는 계책이다.

원문의 풀이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성의를 보여 적을 안심시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뜻하는 바를 도모하라. 충분히 준비한 후에 행동하라. 마음 속에 剛(강)을 품고 겉으로는 柔(유)를 보여라.[信而安之,陰以圖之,備而後動,勿使有變.剛中柔外也.]"

外柔內剛(외유내강)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전통적으로 '笑裏藏刀'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은 '呂蒙(여몽)' 이다.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에서 관우를 함정에 빠뜨려 사로잡고, 관우가 죽은 후 그의 혼령에 사로잡혀 죽게된 인물, 그가 바로 여몽이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삼국지연의》에서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형주를 차지해 버리고, 파촉을 차지하고, 한중까지 나아가 급기야는 스스로 '漢中王(한중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자, 위나라의 조조는 오나라의 손권과 손을 잡고 형주를 치려고 하였다. 유비는 관우를 보내 형주를 지키게 하면서 위나라의 번성을 치도록 하였다. 吳의 손권은 형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관우는 吳에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노숙의 뒤를 이어 대도독의 자리에 오른 여몽은 관우가 번성을 치러 간 사이에 형주를 공략하고자 하나, 관우가 남겨놓은 봉화대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에 여몽은 자리에 드러눕고 만다. 손권이 크게 걱정하나 '陸遜(육손)'은 그 속을 꿰뚫어 보고 여몽을 문병간다. 여몽은 형주를 탈환하고 싶지만 관우의 봉화대가 걸림돌이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꾀병을 앓은 것이었다. 이에 육손이 조언을 한다.

"관우는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믿고 자기를 당해낼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소. 염려하는 사람은 오직 장군이 있을 뿐이오. 장군은 이러한 기회에 병을 칭탁하고 사직한 다음, 육구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그 사람에게 관우를 비굴한 말로 찬미케 하면 관우는 마음 가득 교만해져서 형주의 군사를 철수시켜 모두 번성으로 향하게 할 것이오. 만일 형주에 방비가 없다면 어찌 함락시키지 못하겠소?"

육구에 주둔한 오나라의 여몽(呂蒙)은 관우가 마음을 놓도록 하기 위하여 병이 든 것처럼 속여 물러갔고, 육손을 추천하며 사직을 청했다.

"만일 인망이 두터운 사람을 쓴다면 관우는 반드시 대비를 할 것이옵니다. 육손은 사려가 깊으나 아직 이름이 덜 알려졌으니 관우가 경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 대신 임용하시면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이옵니다."

이리하여 무명의 육손(陸遜)이 여몽 대신 육구를 지키게 되었다. 육손은 육구에 부임하여 관우의 무용을 칭송하는 겸손한 내용의 편지 한 통을 써서 명마와 이금, 주례 등을 준비해 번성에 있는 관우에게 보냈다. 편지는 말놀림이 극히 겸손하고 조신했다. 관우는 읽고 나서 크게 웃으며 사자를 돌려보냈다. 관우는 노련한 여몽은 경계하였지만 젊고 무명인 육손에 대해서는 애송이라 여기고, 형주 병력의 태반을 거두어 번성을 공격하는 데 투입하였다. 여몽은 형주의 병력이 취약한 틈을 타서 공격하여 봉화대를 침묵시키고 형주를 함락시켰다. 관우는 여몽과 육손의 소리장도 계책에 넘어간 것이다.

연의에서는 여몽을 깎아내리기 위해 위의 계책도 여몽이 아닌 육손이 낸 것으로 되어있고, 또한 관우가 죽은 후 여몽은 관우의 혼령에 씌어 비참하게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正史에 의하면, 위의 계략은 여몽에 의한 것이었고, 여몽은 단지 병 때문에 죽은 것 뿐이었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겉으로는 상냥하게 남을 위하는 척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당나라 고종 때 중서시랑을 지낸 이의부(李義府)이다. 그는 겉으로는 온화하고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미소를 지으며 선량한 얼굴을 하였다.

그러나 마음 속은 각박하고 간사하여 음험한 계책으로 다른 사람들을 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의부의 웃음 속에는 칼이 숨겨져 있다고 말하였다(故時人言義府笑中有刀). 이 고사는 《구당서(舊唐書)》의 〈이의부전〉에 실려 있다. 당나라 현종 때의 간신 이임보(李林甫)의 고사에서 유래된 구밀복검(口蜜腹劍)과 같은 의미이다.

소리장도의 또 다른 예는 바로 '臥薪嘗膽(와신상담)'이라는 고사의 주인공인 越王(월왕) '구천'이다.

춘추시대 말기, 위대한 전략가 손무와 명장 오자서의 힘으로 강국 초나라를 무찌르고 주변나라를 떨게 했던 吳나라의 왕 합려는 초를 치고 난 후, 越나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이 때 손무는 은퇴한 이후이다). 이에 합려의 뒤를 이어 吳王이 된 합려의 손자인 '부차'는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합려의 상이 끝나자 곧 越을 치기 위해 군사를 움직인다. 손무는 없었지만 명장 오자서의 힘으로 월나라는 궤멸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에 월나라는 오왕의 측근인 백비를 매수하여 '월왕 부부가 신하가 되어 오나라에서 생활하는 것'을 조건으로 멸망은 면하게 된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에 와서 오왕 부차의 신하로 생활하게 된다. 이때 '섶에 누워 쓸개를 빨며' 생활한 것이 '臥薪嘗膽(와신상담)'의 고사가 되었다. 오왕 부차의 경계를 풀기 위해 그의 배설물까지 먹어가며 고생을 하여 결국엔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물론 오자서가 반대했지만, 이미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오왕에겐 충신의 강직한 충언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월왕 구천은 고국으로 돌아가 즉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복수를 계획한다. 그리고 오왕에게 많은 보물과 미인 '서시'를 바친다. '찡그린 얼굴도 그렇게 아름다웠다'는 '西施嚬目(서시빈목)'의 주인공인 서시를 선물로 받은 오왕 부차는 점점 더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커다란 궁궐의 공사까지도 실행하는데 월왕은 커다란 목재를 보내 토목공사의 규모를 더 크게 부추켜 吳의 재정을 파탄나게 한다.

또한 한 해는 越나라에 흉년이 들었는데 吳나라에서 곡식을 꾸기로 했다. 과연 곡식을 빌려줄까 싶었으나 '복수를 꾀하고 있다면 곡식을 빌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에 따라 吳에서는 곡식을 꾸어준다. 다음해에는 越에는 풍년이 들었으나 吳에 흉년이 들었다. 월왕 구천은 이 때를 틈타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이 만류한다. 越은 吳에 빚을 갚는다며 곡식을 보냈는데, 이 때 낱알이 좋은 것만을 골라 살짝 쪄서 보냈다. 이에 吳에서는 곡식의 품종이 좋은 것을 보고 다음해에 종자로 쓰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찐 씨앗이 자랄리가 없는 법. 吳에는 그 해에 유래없는 대흉을 맞게 되고, 이를 기회로 越은 吳를 크게 쳐 무너뜨린다. 吳王 부차는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받아주길 청하지만, 越王은 자신이 이미 그렇게 해서 살아남아 복수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인간의 복수심'을 쉽게 보지 않았다. 그러게 吳는 越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월왕 구천은 한 나라의 王으로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하가 되고, 온갖 허드렛일을 다하고, 다른 사람의 대변까지 먹으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리고는 그 힘든 날들을 지나며 복수심이 무뎌지게 하지 않기 위해 고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섶에 누워 쓸개를 빠는' 생활을 계속했다. 또한 吳王의 경계심이 느슨해지게 하기 위해 많은 뇌물을 보내 그 눈을 흐리게 만들었고, 미인 서시를 보내 정사로부터 관심이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급기야 吳를 무너뜨리기에 이른다. 이야말로 여몽의 예보다 훨씬 처절한 '笑裏藏刀'의 예라 할 것이다. 물론 이 예는 '臥薪嘗膽'으로 더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관련 한자

유사어

口蜜腹劍(구밀복검) | 包藏禍心(포장화심) |

참조어

臥薪嘗膽(와신상담) | 西施嚬目(서시빈목) |


36계, 삼십육계, 삼십육계:적전계, 병법

三十六計, 三十六計:敵戰計

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이로학난성)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학난성)

少 적을 소, 젊을 소 | 年 해 년(연), 아첨할 녕(영) | 易 쉬울 이, 바꿀 역 | 老 늙을 로(노) | 學 배울 학, 가르칠 교, 고지새 할 | 難 어려울 난, 우거질 나 | 成 이룰 성 |

소년(少年)은 늙기 쉬우나 학문(學問)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말


송(宋)나라 대유학자 주자(朱子)의 《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시의 첫 구절이다.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學問)을 이루기는 어렵다[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 학난성)] 순간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 불가경)]


출전

주자(朱子)의 주문공전집(朱文公文集)

送舊迎新 (송구영신, sòngjiùyíngxīn)

送舊迎新 (송구영신)

送 보낼 송 | 舊 예 구, 옛 구 | 迎 맞을 영 | 新 새 신

送旧迎新 (sòngjiùyíngxīn)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뜻으로, ①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함 ②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함


송고영신(送故迎新)에서 나온 말로 관가에서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 했던 데서 유래(由來)


유의어

送迎(송영) |


절기

蕭規曹隨 (소규조수)

蕭規曹隨(소규조수)

蕭 쓸쓸할 소, 맑은대쑥 소 | 規 법 규 | 曹 무리 조, 성씨 조 | 隨 따를 수, 게으를 타 |

'소하(蕭何:?∼BC 193)가 제정한 법규를 조참(曹參:?∼BC 190)이 따른다'라는 뜻으로, 예전부터 사람들이 쓰던 제도(制度)를 그대로 따르거나 이어 나가는 것을 이르는 말


진(秦)나라 말, 소하(蕭何)는 한(漢)나라의 고조(高祖) 유방(劉邦:재위 BC 202∼BC 195)을 도와 반진(反秦)의 의거를 일으켰다. 그는 한신(韓信:?∼BC 196), 장량(張良:?∼BC 168), 조참과 함께 한나라의 개국공신으로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고 한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웠으며, 흔히들 한신(韓信), 장량(張良) 등과 더불어 한흥삼걸(漢興三杰) 이라 부른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진(秦)나라의 수도 셴양(咸陽)을 공격할 때, 병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납치하는데 정신이 없었지만, 소하는 상부(相府)로 달려가서 지도와 법령 등 중요한 문건들을 수습했다.

훗날, 소하는 재상(宰相)이 되자, 이미 확보한 진나라의 문헌과 자료들을 토대로 전국의 지리나 풍토, 민심 등을 파악하여, 한나라의 법령과 제도를 제정하였다.

당시 유방의 수하에는 조참(曹參)이라는 모사(謀士)가 있었다. 그는 유방의 동향 사람으로서 소하와도 관계가 매우 좋았으므로, 사람들은 두 사람을 소조(蕭曹)라고 불렀다. 소하의 추천으로 승상된 조참은 모든 정책과 법령을 고치지 않고, 소하가 결정해 놓은 것을 따라[蕭規曹隨] 계속 집행하였다.

전한(前漢) 말기의 학자 양웅(楊雄:BC 53∼AD 18)이 지은 《법언(法言)》 연건편(淵騫篇)에는 "소하가 만들어 정한 법규를 조참이 그대로 따랐다[蕭也規 曹也隨]"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전

법언(法言)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昭君落雁 (소군낙안)

昭君落雁(소군낙안)

zhāo jūn luò yàn
ciu1 gwan1 lok6 ngaan6

Wang Zhaojun entice birds falling

乘勝長驅 (승승장구)

乘勝長驅(승승장구)

乘 탈 승 | 勝 이길 승 | 長 길 장, 어른 장 | 驅 몰 구 |

싸움에서 이긴 기세(氣勢)를 타고 계속(繼續) 적을 몰아침

make a long drive taking advantage of victory, press hard on the heels of enemy, seize[avail oneself of] an opportunity


출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歲寒三友 (세한삼우, suìhánsānyǒu)

歲寒三友(세한삼우)

岁寒三友(suìhánsānyǒu)

歲 해 세 | 寒 찰 한 | 三 석 삼 | 友 벗 우 |


추운 겨울의 세 벗이라는 뜻으로,

①겨울철 관상용(觀賞用)의 세 가지 나무, 곧 소나무ㆍ대나무ㆍ매화(梅花)나무.
pine, bamboo and plum blossom

②퇴폐(頹廢)한 세상(世上)에서 벗으로 삼을 세 가지 것, 곧 산수(山水)ㆍ송죽(松竹)ㆍ금주(琴酒).
mountain and stream, pine and bamboo, lute and wine

③매(梅)ㆍ죽(竹)ㆍ수선(水仙)


위 세가지 중 화제(畵題)나 시제(詩題)로 되어 온 송(松)·죽(竹)·매(梅)를 주로 의미한다. 삼우(三友)라고도 하며, 기개가 있어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친구를 의미한다.

이것을 한 장의 화면에 그린 것을 삼우도(三友圖) 또는 삼청도(三淸圖)라고 하며, 풍설(風雪)이나 엄동의 추위에도 견디고 또 다른 식물에 앞서 꽃을 피우므로, 고결한 절조(節操)를 높이 여겨 화제로 많이 사용된다.

묵송(墨松)은 당대(唐代) 중기의 필굉(畢宏)·위언(韋偃) 등이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묵죽(墨竹)은 약간 늦은 당대 말기부터 오대(五代)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북송(北宋)의 문동(文同)이나 소식(蘇軾:소동파) 등의 문인화가가 그 묘사 형식을 정리하였고, 이후 많은 후계자를 배출하였다.

묵매(墨梅)의 기원도 명확하지는 않으나 북송의 승려화가 중인(仲仁)이 최초의 양식을 완성하여, 남송의 양보지(楊補之)에 의하여 원대(元代) 이후의 묵매 형식이 확립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송·죽·매는 화제가 됨은 물론 시제(詩題)로서도 애호되었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

松竹梅(송죽매) | 三友(삼우) |

참조어

四君子(사군자) |

歲寒松柏 (세한송백)

歲寒松柏(세한송백)

歲 해 세 | 寒 찰 한 | 松 소나무 송, 더벅머리 송, 따를 종 | 柏 측백 백 |

추운 계절(季節)에도 소나무와 잣나무는 잎이 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역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굳은 절개(節槪ㆍ節介)를 의미(意味)함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歲寒松栢(세한송백) | 雪中松柏(설중송백) | 霜風高節(상풍고절) |

善行無轍迹 (선행무철적)

善行無轍迹(선행무철적)

착한 행실은 자국이 없다는 뜻으로 선행은 자연에 좋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말.

仙風道骨 (선풍도골, xiānfēngdàogǔ)

仙風道骨(선풍도골)

仙风道骨, xiānfēngdàogǔ

1.[도교][성어] 선풍도골. 신선의 풍채와 도인의 골격. 남달리 뛰어나고 고아(高雅)한 풍채.

demeanour of a transcendent being; to have divine poise and sage-like features

2.[성어,비유] 범속(凡俗)을 초월한 풍격의 서예(書藝).

先行其言而後從之 (선행기언이후종지)

先行其言 而後從之(선행기언 이후종지)

先 먼저 선 | 行 다닐 행, 항렬 항 | 其 그 기 | 言 말씀 언, 화기애애할 은 | 而 말 이을 이,능히 능 | 後 뒤 후, 임금 후 | 從 좇을 종 | 之 갈 지 |

자기가 한 말을 실행하게 되면 남들도 따르게 된다.


출전

논어(論語) 위정(爲政) 13章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




城下之盟 (성하지맹)

城下之盟(성하지맹)

城下之盟[chéngxiàzhīméng]

城 재 성 | 下 아래 하 | 之 갈 지 | 盟 맹세 맹 |

수도(首都)의 성 밑까지 적군(敵軍)의 공격(攻擊)을 받아 할 수 없이 강화(講和)를 맹세(盟誓)하고 굳게 약속(約束)한다는 뜻으로, 대단히 굴욕적(屈辱的)인 강화(講和)나 항복(降伏)을 이르는 말


춘추좌전(春秋左傳) 환공 12년조(桓公十二年條)의 이야기.

“그 계책을 따르니 교(絞)의 사람들은 초나라의 인부 30명을 사로잡았다. 이튿날에는 교의 사람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나서서 초나라 인부들을 쫓아 산 속으로 달려갔다. 초나라 군사들이 그 북문을 지키고 산 아래에 숨어 있었으므로 교의 사람들은 대패하여 성 아래에서 맹세하고 돌아갔다[從之 絞人獲三十人 明日絞人爭出 驅楚役徒於山中 楚人坐其北門 而覆諸山下 大敗之 爲城下之盟而還].”

춘추시기, 초(楚)나라 군대가 교(絞)나라를 침공하여 교나라 도읍의 남대문에 이르렀다. 교나라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초나라 군대는 몇 차례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초나라의 장군 굴하(屈瑕)는 무왕(武王)에게 한 가지 계책을 제시하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이튿날, 초나라는 수십명의 병사들을 나뭇꾼으로 변장시켜 성곽 주변의 산에서 나무를 하는 척하게 하였다. 교나라의 군인들은 그들을 즉시 잡아와, 득의만만해 하였다. 이튿날, 초나라의 같은 작전에 속아 넘어간 교나라 군사들이 그들을 잡으러 성문을 열고 나오자, 미리 매복해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교나라 도성을 포위하며, 총공격을 해들어왔다. 교나라는 순식간에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도성 아래에서 굴욕적인 맹약을 맺고 초나라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蟬蛻蛇解 (선태사해)

蟬蛻蛇解(선태사해)

蟬 매미 선, 날 선, 땅 이름 제 | 蛻 허물 세, 허물 태 | 蛇 긴 뱀 사, 구불구불 갈 이 | 解 풀 해 |

매미가 껍질을 벗고 뱀이 허물을 벗듯 그동안 해오던 것에서 약간의 변화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차례 크게 탈바꿈해야 한다’는 의미

先則制人 (선즉제인)

先則制人(선즉제인)

남보다 먼저 도모하면 능히 남을 앞지를 수 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2011년에는 글로벌 리스크를 먼저 감지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자고 독려하며 사용


2011년 | 새해 사자성어

禪主云亭 (선주운정)

禪主云亭(선주운정) 禪 선 선 | 主 임금 주, 주인 주 | 云 이를 운, 구름 운 | 亭 정자 정 | 운(云)과 정(亭)은 천자(天子)를 봉선(封禪)하고 제사(祭祀)하는 곳이니, 운정(云亭)은 태산(泰山)에 있음 [출전] 千字文(천자문)

石田耕牛 (석전경우)

石田耕牛(석전경우)

石 돌 석 | 田 밭 전 | 耕 밭 갈 경 | 牛 소 우 |

척박한 자갈밭을 갈고 있는 우직한 소를 뜻하는 말로 황해도(黃海道) 사람의 근면(勤勉)하고 인내심(忍耐心)이 강(强)한 성격(性格)을 평한 말


관련 한자어

참조어

石田耕牛(석전경우) | 泥田鬪狗(이전투구) |

書自書我自我 (서자서아자아)

書自書我自我(서자서아자아)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 곧 글을 읽되 마음은 딴 데 있다는 말.

雪中送炭 (설중송탄)

雪中送炭(설중송탄)

雪中送炭[xuězhōngsòngtàn]

雪 눈 설 | 中 가운데 중 | 送 보낼 송 | 炭 숯 탄 |

눈 속에 있는 사람에게 땔감을 보내준다는 뜻으로, 급(急)히 필요할 때 필요한 도움을 줌을 이르는 말


송사(宋史) 태종기(太宗紀)의 이야기.

북송(北宋) 초, 토지 겸병을 둘러싼 귀족들의 분란이 깊어지자, 일반 백성들의 삶은 몹시 궁핍해졌다.

서기 993년, 즉 북송 태종(太宗) 조광의(趙光義) 순화(淳化) 4년 봄, 빈곤을 참지 못한 농민 왕소파(王小波)와 이순(李順) 등은 많은 농민들을 이끌고 사천(四川)에서 봉기하였다.

그 해 겨울, 여러 날 동안 눈이 내리고 날씨 또한 매우 추웠다. 태종인 조광의(趙光義)는 왕소파 이순 등의 농민 봉기에 두려움을 느껴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이렇게 추운 날씨에 다시 봉기가 일어날까 염려되어, 사람을 시켜 몇몇 외롭고 늙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돈과 쌀과 땔감을 보냈다[雨雪大寒, 遣中使賜孤老貧窮人千錢米炭].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민심을 수습하려 생각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아부 잘하는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이 일을 역사에 기록하게 하였다.

二月己未朔,日有食之。壬戌,召賜京城高年帛,百歲者一人加賜塗金帶。是日,雨雪,大寒,再遣中使賜孤老貧窮人千錢、米炭。


출전

송사(宋史) 권5 태종본기(太宗本紀)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雪里送炭[xuělǐsòngtàn, 설리송탄] 다른 사람이 급할 때 도움을 주다 |

반의어·상대어

落井下石 [luòjǐngxiàshí, 낙정하석] 남의 어려움을 틈타 해를 가하다 | 乘人之危 [chéngrénzhīwēi, 승인지위] 남의 위급한 상황을 틈타 남을 해치다 |


중요도·활용도

聖人無常心 (성인무상심)

聖人無常心(성인무상심)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성인무상심 이백성심위심
성인은 변하지않는 절대적인 마음이 없이 백성(百姓)의 마음을 그 마음으로 삼는다.
- 도덕경(道德經)

誠意正心 (성의정심)

誠意正心(성의정심)

誠 정성 성 | 意 뜻 의, 기억할 억 | 正 바를 정, 정월 정 | 心 마음 심 |

뜻을 성실(誠實)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짐.

[출전]
大學(대학)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格物致知(격물치지) | 誠意正心(성의정심) | 修身齊家(수신제가) | 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 |

說苑 (설원) 卷09

說苑(설원)

卷八 | 卷九 | 卷十 |


易曰:「王臣蹇蹇,匪躬之故。」人臣之所以蹇蹇為難,而諫其君者非為身也,將欲以匡君之過,矯君之失也。君有過失者,危亡之萌也;見君之過失而不諫,是輕君之危亡也。夫輕君之危亡者,忠臣不忍為也。三諫而不用則去,不去則身亡;身亡者,仁人之所不為也。是故諫有五:一曰正諫,二曰降諫,三曰忠諫,四曰戇諫,五曰諷諫。孔子曰:「吾其從諷諫乎。」夫不諫則危君,固諫則危身;與其危君、寧危身;危身而終不用,則諫亦無功矣。智者度君權時,調其緩急而處其宜,上不敢危君,下不以危身,故在國而國不危,在身而身不殆;昔陳靈公不聽泄冶之諫而殺之,曹羈三諫曹君不聽而去,春秋序義雖俱賢而曹羈合禮。

齊景公遊於海上而樂之,六月不歸,令左右曰:「敢有先言歸者致死不赦。」顏斶趨進諫曰:「君樂治海上而六月不歸,彼儻有治國者,君且安得樂此海也!」景公援戟將斫之,顏斶趨進,撫衣待之曰:「君奚不斫也?昔者桀殺關龍逢,紂殺王子比干,君之賢非此二主也,臣之材,亦非此二子也,君奚不斫?以臣參此二人者,不亦可乎?」景公說,遂歸,中道聞國人謀不內矣。

楚莊王立為君,三年不聽朝,乃令於國曰:「寡人惡為人臣而遽諫其君者,今寡人有國家,立社稷,有諫則死無赦。」蘇從曰:「處君之高爵,食君之厚祿,愛其死而不諫其君,則非忠臣也。」乃入諫。莊王立鼓鐘之間,左伏楊姬,右擁越姬,左裯衽,右朝服,曰:「 吾鼓鐘之不暇,何諫之聽!」蘇從曰:「臣聞之,好道者多資,好樂者多迷,好道者多糧,好樂者多亡;荊國亡無日矣,死臣敢以告王。」王曰善。左執蘇從手,右抽陰刃,刎鐘鼓之懸,明日授蘇從為相。

晉平公好樂,多其賦斂,下治城郭,曰:「敢有諫者死。」國人憂之,有咎犯者,見門大夫曰:「臣聞主君好樂,故以樂見。」門大夫入言曰:「晉人咎犯也,欲以樂見。」平公曰:「內之。」止坐殿上,則出鐘磬竽瑟。坐有頃。平公曰:「客子為樂?」咎犯對曰:「 臣不能為樂,臣善隱。」平公召隱士十二人。咎犯曰:「隱臣竊顧昧死御。」平公諾。咎犯申其左臂而詘五指,平公問於隱官曰:「占之為何?」隱官皆曰:「不知。」平公曰:「歸之。」咎犯則申其一指曰:「是一也,便遊赭盡而峻城闕。二也,柱樑衣繡,士民無褐。三也,侏儒有餘酒,而死士渴。四也,民有饑色,而馬有栗秩。五也,近臣不敢諫,遠臣不敢達。」平公曰善。乃屏鐘鼓,除竽瑟,遂與咎犯參治國。

孟嘗君將西入秦,賓客諫之百通,則不聽也,曰:「以人事諫我,我盡知之;若以鬼道諫我,我則殺之。」謁者入曰:「有客以鬼道聞。」曰:「請客入。」客曰:「臣之來也,過於淄水上,見一土耦人,方與木梗人語,木梗謂土耦人曰:『子先,土也,持子以為耦人,遇天大雨,水潦並至,子必沮壞。』應曰:『我沮乃反吾真耳,今子,東園之桃也,刻子以為梗,遇天大雨,水潦並至,必浮子,泛泛乎不知所止。』今秦,四塞之國也,有虎狼之心,恐其有木梗之患。」於是孟嘗君逡巡而退,而無以應,卒不敢西嚮秦。

吳王欲伐荊,告其左右曰:「敢有諫者,死!」舍人有少孺子者,欲諫不敢,則懷丸操彈,遊於後園,露沾其衣,如是者三旦,吳王曰:「子來何苦沾衣如此?」對曰:「園中有樹,其上有蟬,蟬高居悲鳴飲露,不知螳螂在其後也!螳螂委身曲附,欲取蟬而不顧知黃雀在其傍也!黃雀延頸欲啄螳螂而不知彈丸在其下也!此三者皆務欲得其前利而不顧其後之有患也。」吳王曰:「善哉!」乃罷其兵。

楚莊王欲伐陽夏,師久而不罷,群臣欲諫而莫敢,莊王獵於雲夢,椒舉進諫曰:「王所以多得獸者,馬也;而王國亡,王之馬豈可得哉?」莊王曰:「善,不穀知詘強之可以長諸侯也,知得地之可以為富也;而忘吾民之不用也。」明日飲諸大夫酒,以椒舉為上客,罷陽夏之師。

秦始皇帝太后不謹,幸郎嫪●,封以為長信侯,為生兩子,●專國事,浸益驕奢,與侍中左右貴臣俱博飲,酒醉爭言而鬥,瞋目大叱曰:「吾乃皇帝之假父也,窶人子何敢乃與我亢!」所與鬥者走行白皇帝,皇帝大怒,●懼誅,因作亂,戰咸陽宮。●敗,始皇乃取●四肢車裂之,取其兩弟囊撲殺之,取皇太后遷之於萯陽宮,下令曰:「敢以太后事諫者,戮而殺之!」從蒺藜其脊肉,幹四肢而積之闕下,諫而死者二十七人矣。齊客茅焦乃往上謁曰:「齊客茅焦願上諫皇帝。」皇帝使使者出問客,得無以太后事諫也,茅焦曰然,使者還白曰:「果以太后事諫。」皇帝曰走往告之,若不見闕下積死人邪?使者問茅焦,茅焦曰:「臣聞之天有二十八宿,今死者已有二十七人矣,臣所以來者,欲滿其數耳,臣非畏死人也。」走入白之,茅焦邑子,同食者盡負其衣物行亡,使者入白之,皇帝大怒曰:「是子故來犯吾禁,趣炊鑊湯煮之,是安得積闕下乎!」趣召之入,皇帝按劍而坐,口正沫出,使者召之入,茅焦不肯疾行,足趣相過耳,使者趣之,茅焦曰:「臣至前則死矣,君獨不能忍吾須臾乎?」使者極哀之,茅焦至前再拜謁起,稱曰:「臣聞之,夫有生者不諱死,有國者不諱亡;諱死者不可以得生,諱亡者不可以得存。死生存亡,聖主所欲急聞也,不審陛下欲聞之不?」皇帝曰:「何謂也?」茅焦對曰:「陛下有狂悖之行,陛下不自知邪!」皇帝曰:「何等也?願聞之。」茅焦對曰:「陛下車裂假父,有嫉妒之心;囊撲兩弟,有不慈之名;遷母萯陽宮,有不孝之行;從蒺藜於諫士,有桀紂之治。今天下聞之,盡瓦解無嚮秦者,臣竊恐秦亡為陛下危之,所言已畢,乞行就質。」乃解衣伏質。皇帝下殿,左手接之,右手麾左右曰:「赦之,先生就衣,今願受事。」乃立焦為仲父,爵之上卿;皇帝立駕,千乘萬騎,空左方自行迎太后萯陽宮,歸於咸陽;太后大喜,乃大置酒待茅焦,及飲,太后曰:「抗枉令直,使敗更成,安秦之社稷;使妾母子復得相會者,盡茅君之力也。」

楚莊王築層臺,延石千重,延壤百里,士有三月之糧者,大臣諫者七十二人皆死矣;有諸御己者,違楚百里而耕,謂其耦曰:「吾將入見於王。」其耦曰:「以身乎?吾聞之,說人主者,皆閒暇之人也,然且至而死矣;今子特草茅之人耳。」諸御己曰:「若與子同耕則比力也,至於說人主不與子比智矣。」委其耕而入見莊王。莊王謂之曰:「諸御己來,汝將諫邪?」諸御己曰:「君有義之用,有法之行。且己聞之,土負水者平,木負繩者正,君受諫者聖;君築層臺,延石千重,延壤百里;民之釁咎血成於通塗,然且未敢諫也,己何敢諫乎?顧臣愚,竊聞昔者虞不用宮之奇而晉並之,陳不用子家羈而楚並之,曹不用僖負羈而宋並之,萊不用子猛而齊並之,吳不用子胥而越並之,秦人不用蹇叔之言而秦國危,桀殺關龍逢而湯得之,紂殺王子比干而武王得之,宣王殺杜伯而周室卑;此三天子,六諸侯,皆不能尊賢用辯士之言,故身死而國亡。」遂趨而出,楚王遽而追之曰:「己子反矣,吾將用子之諫;先日說寡人者,其說也不足以動寡人之心,又危(一作色)加諸寡人,故皆至而死;今子之說,足以動寡人之心,又不危加諸寡人,故吾將用子之諫。」明日令曰:「有能入諫者,吾將與為兄弟。」遂解層臺而罷民,楚人歌之曰:「薪乎萊乎?無諸御己訖無子乎?萊乎薪乎?無諸御己訖無入乎!」

齊桓公謂鮑叔曰:「寡人慾鑄大鐘,昭寡人之名焉,寡人之行,豈避堯舜哉?」鮑叔曰:「敢問君之行?」桓公曰:「昔者吾圍譚三年,得而不自與者,仁也;吾北伐孤竹,令支而反者,武也;吾為葵丘之會,以偃天下之兵者,文也;諸侯抱美玉而朝者九國,寡人不受者,義也。然則文武仁義,寡人盡有之矣,寡人之行豈避堯舜哉!」鮑叔曰:「君直言,臣直對;昔者公子糾在上位而不讓,非仁也;背太公之言而侵魯境,非義也;壇場之上,詘於一劍,非武也;姪娣不離懷衽,非文也。凡為不善遍於物不自知者,無天禍必有人害,天處甚高,其聽甚下;除君過言,天且聞之。」桓公曰:「寡人有過乎?幸記之,是社稷之福也,子不幸教,幾有大罪以辱社稷。」

楚昭王欲之荊臺游,司馬子綦進諫曰:「荊臺之游,左洞庭之波,右彭蠡之水;南望獵山,下臨方淮。其樂使人遺老而忘死,人君游者盡以亡其國,願大王勿往游焉。」王曰:「荊臺乃吾地也,有地而游之,子何為絕我游乎?」怒而擊之。於是令尹子西,駕安車四馬,徑於殿下曰:「今日荊臺之游,不可不觀也。」王登車而拊其背曰:「荊臺之游,與子共樂之矣。」步馬十里,引轡而止曰:「臣不敢下車,願得有道,大王肯聽之乎?」王曰:「第言之。」令尹子西曰:「臣聞之,為人臣而忠其君者,爵祿不足以賞也;為人臣而諛其君者,刑罰不足以誅也。若司馬子綦者忠君也,若臣者諛臣也;願大王殺臣之軀,罰臣之家,而祿司馬子綦。」王曰:「若我能止,聽公子,獨能禁我游耳,後世游之,無有極時,奈何?」令尹子西曰:「欲禁後世易耳,願大王山陵崩,為陵於荊臺;未嘗有持鐘鼓管絃之樂而游於父之墓上者也。」於是王還車,卒不游荊臺,令罷先置。孔子從魯聞之曰:「美哉!令尹子西,諫之於十里之前,而權之於百世之後者也。」

荊文王得如黃之狗,箘簬之矰,以畋於雲夢,三月不反;得舟(一作丹)之姬,淫期年不聽朝。保申諫曰:「先王卜以臣為保吉,今王得如黃之狗,箘簬之矰,畋於雲澤,三月不反;及得舟之姬,淫期年不聽朝,王之罪當笞。」匍伏將笞王,王曰:「不穀免於襁褓,託於諸侯矣,願請變更而無笞。」保申曰:「臣承先王之命不敢廢,王不受笞,是廢先王之命也;臣寧得罪於王,無負於先王。」王曰:「 敬諾。」乃席王,王伏,保申束細箭五十,跪而加之王背,如此者再,謂王起矣。王曰:「有笞之名一也。」遂致之。保申曰:「臣聞之,君子恥之,小人痛之;恥之不變,痛之何益?」保申趨出,欲自流,乃請罪於王,王曰:「此不穀之過,保將何罪?」王乃變行從保申,殺如黃之狗,折箘簬之矰,逐舟之姬,務治乎荊;兼國三十,令荊國廣大至於此者,保申敢極言之功也。蕭何王陵聞之曰:「聖主能奉先世之業,而以成功名者,其惟荊文王乎!故天下譽之至今,明主忠臣孝子以為法。」

晉平公使叔向聘於吳,吳人拭舟以逆之,左五百人,右五百人;有繡衣而豹裘者,有錦衣而狐裘者,叔向歸以告平公,平公曰:「吳其亡乎!奚以敬舟?奚以敬民?」叔向對曰:「君為馳底之臺,上何以發千兵?下何以陳鐘鼓?」諸侯聞君者,亦曰『奚以敬臺,奚以敬民?』所敬各異也。」於是平公乃罷臺。

趙簡子舉兵而攻齊,令軍中有敢諫者罪至死,被甲之士,名曰公盧,望見簡子大笑;簡子曰:「子何笑?」對曰:「臣有夙笑。」簡子曰:「有以解之則可,無以解之則死。」對曰:「當桑之時,臣鄰家夫與妻俱之田,見桑中女,因往追之,不能得,還反,其妻怒而去之,臣笑其曠也。」簡子曰:「今吾伐國失國,是吾曠也。」於是罷師而歸。

景公為臺,臺成,又欲為鐘,晏子諫曰:「君不勝欲為臺,今復欲為鐘,是重斂於民,民之哀矣;夫斂民之哀而以為樂,不祥。」景公乃止。

景公有馬,其圉人殺之,公怒,援戈將自擊之,晏子曰:「此不知其罪而死,臣請為君數之,令知其罪而殺之。」公曰:「諾。」晏子舉戈而臨之曰:「汝為吾君養馬而殺之,而罪當死;汝使吾君以馬之故殺圉人,而罪又當死;汝使吾君以馬故殺人,聞於四鄰諸侯,汝罪又當死。」公曰:「夫子釋之!夫子釋之!勿傷吾仁也。」

景公好弋,使燭雛主鳥而亡之,景公怒而欲殺之,晏子曰:「燭雛有罪,請數之以其罪,乃殺之。」景公曰:「可。」於是乃召燭雛數之景公前曰:「汝為吾君主鳥而亡之,是一罪也;使吾君以鳥之故殺人,是二罪也;使諸侯聞之以吾君重鳥而輕士,是三罪也。數燭雛罪已畢,請殺之。」景公曰:「止,勿殺而謝之。」

景公正晝被髮乘六馬,御婦人出正閨,刖跪擊其馬而反之,曰:「爾非吾君也。」公慚而不朝,晏子睹裔敖而問曰:「君何故不朝?」對曰:「昔者君正晝被髮乘六馬,御婦人出正閨,刖跪擊其馬而反之曰:『爾非吾君也。』公慚而反,不果出,是以不朝。」晏子入見,公曰:「昔者寡人有罪,被髮乘六馬以出正閨,刖跪擊其馬而反之,曰:『爾非吾君也。』寡人以天子大夫之賜,得率百姓以守宗廟,今見戮於刖跪以辱社稷,吾猶可以齊於諸侯乎?」晏子對曰:「君無惡焉。臣聞之,下無直辭,上無隱君;民多諱言,君有驕行。古者明君在上,下有直辭;君上好善,民無諱言。今君有失行,而刖跪有直辭,是君之福也,故臣來慶,請賞之,以明君之好善;禮之,以明君之受諫!」公笑曰:「可乎?」晏子曰:「可。」於是令刖跪倍資無正,時朝無事。

景公飲酒,移於晏子家,前驅報閭曰:「君至」。晏子被玄端立於門曰:「諸侯得微有故乎?國家得微有故乎?君何為非時而夜辱?」公曰:「酒醴之味,金石之聲,願與夫子樂之。」晏子對曰:「夫布薦席,陳簠簋者有人,臣不敢與焉。」公曰:「移於司馬穰苴之家。」前驅報閭曰:「君至」。司馬穰苴介冑操戟立於門曰:「諸侯得微有兵乎?大臣得微有叛者乎?君何為非時而夜辱?」公曰:「酒醴之味,金石之聲,願與夫子樂之。」對曰:「夫布薦蓆,陳簠簋者有人,臣不敢與焉。」公曰:「移於梁丘據之家。」前驅報閭曰:「君至」。梁丘據左操瑟,右挈竽,行歌而至,公曰:「樂哉!今夕吾飲酒也,微彼二子者何以治吾國!微此一臣者何以樂吾身!賢聖之君皆有益友,無偷樂之臣。」景公弗能及,故兩用之,僅得不亡。

吳以伍子胥孫武之謀,西破強楚,北威齊晉,南伐越,越王句踐迎擊之,敗吳於姑蘇,傷闔廬指,軍卻,闔廬謂太子夫差曰:「爾忘句踐殺而父乎?」夫差對曰:「不敢。」是夕闔廬死,夫差既立為王,以伯嚭為太宰,習戰射,三年伐越,敗於夫湫,越王句踐乃以兵五千人(一作入)棲於會稽山上,使大夫種厚幣遣吳太宰嚭以請和,委國為臣妾,吳王將許之,伍子胥諫曰:「越王為人能辛苦,今王不滅,後必悔之。」吳王不聽,用太宰嚭計與越平。其後五年,吳王聞齊景公死,而大臣爭寵,新君弱,乃興師北伐齊,子胥諫曰:「不可。句踐食不重味,弔死問疾,且能用人,此人不死,必為吳患;今越,腹心之疾,齊猶疥癬耳,而王不先越,乃務伐齊,不亦謬乎?」吳王不聽,伐齊,大敗齊師於艾陵,遂與鄒魯之君會以歸,益疏子胥之言。其後四年,吳將復北伐齊,越王句踐用子胥之謀,乃率其眾以助吳,而重寶以獻遺太宰嚭,太宰嚭既數受越賂,其愛信越殊甚,日夜為言於吳王,王信用嚭之計,伍子胥諫曰:「夫越,腹心之疾,今信其游辭偽詐而貪齊,譬猶石田,無所用之,盤庚曰:『古人有顛越不恭』。是商所以興也,願王釋齊而先越,不然,將悔之無及也。」吳王不聽,使子胥於齊,子胥謂其子曰:「吾諫王,王不我用,吾今見吳之滅矣,女與吳俱亡無為也。」乃屬其子於齊鮑氏而歸報吳王。太宰嚭既與子胥有隙,因讒曰:「子胥為人,剛暴少恩,其怨望猜賊為禍也,深恨前日王欲伐齊,子胥以為不可,王卒伐之,而有大功,子胥計謀不用,乃反怨望;今王又復伐齊,子胥專愎強諫,沮毀用事,徼幸吳之敗,以自勝其計謀耳。今王自行,悉國中武力以伐齊,而子胥諫不用,因輟佯病不行,王不可不備,此起禍不難,且臣使人微伺之,其使齊也,乃屬其子於鮑氏。夫人臣內不得意,外交諸侯,自以先王謀臣,今不用,常怏怏,願王早圖之。」吳王曰:「微子之言,吾亦疑之。」乃使使賜子胥屬鏤之劍,曰:「子以此死。」子胥曰:「 嗟乎!讒臣宰嚭為亂,王顧反誅我,我令若父霸,又若立時,諸子弟爭立,我以死爭之於先王,幾不得立,若既立,欲分吳國與我,我顧不敢當,然若之何聽讒臣殺長者!」乃告舍人曰:「必樹吾墓上以梓,令可以為器,而抉吾眼著之吳東門,以觀越寇之滅吳也。」乃自刺殺,吳王聞之大怒,乃取子胥屍,盛以鴟夷革,浮之江中,吳人憐之,乃為立祠於江上,因名曰胥山。後十餘年,越襲吳,吳王還與戰不勝,使大夫行成於越不許,吳王將死曰:「吾以不用子胥之言至於此;令死者無知則已,死者有知,吾何面目以見子胥也?」遂蒙絮覆面而自刎。

齊景公有臣曰諸御鞅,諫簡公曰:「田常與宰予,此二人者甚相憎也,臣恐其相攻;相攻雖叛而危之,不可。願君去一人。」簡公曰:「非細人之所敢議也。」居無幾何,田常果攻宰予於庭,賊簡公於朝,簡公喟焉太息,曰:「余不用鞅之言以至此患也。故忠臣之言,不可不察也。」

魯襄公朝荊,至淮,聞荊康王卒,公欲還,叔仲昭伯曰:「君之來也,為其威也;今其王死,其威未去,何為還?」大夫皆欲還,子服景伯曰:「子之來也,為國家之利也,故不憚勤勞,不遠道塗,而聽於荊也,畏其威也!夫義人者,固將慶其喜而弔其憂,況畏而聘焉者乎!聞畏而往,聞喪而還,其誰曰非侮也。姓是嗣王,太子又長矣,執政未易,事君任政,求說其侮,以定嗣君,而示後人,其讎滋大,以戰小國,其誰能止之?若從君而致患,不若違君以避難,且君子計而後行,二三子其計乎?有御楚之術,有守國之備,則可;若未有也,不如行!」乃遂行。

孝景皇帝時,吳王濞反,梁孝王中郎枚乘字叔聞之,為書諫王,其辭曰:「君王之外臣乘,竊聞得全者全昌,失全者全亡。舜無立錐之地,以有天下;禹無十戶之聚,以王諸侯。湯武之地,方不過百里;上不絕三光之明,下不傷百姓之心者,有王術也!故父子之道,天性也,忠臣不敢避誅以直諫,故事無廢棄而功流於萬世也,臣誠願披腹心而效愚忠,恐大王不能用之;臣誠願大王少加意念惻怛之心於臣乘之言。夫以一縷之任,係千鈞之重,上懸之無極之高,下垂不測之淵,雖甚愚之人,且猶知哀其將絕也。馬方駭而重驚之,係方絕而重鎮之;係絕於天,不可復結;墜入深淵,難以復出;其出不出,間不容髮!誠能用臣乘言,一舉必脫;必若所欲為,危如重卵,難於上天;變所欲為,易於反掌,安於太山。今欲極天命之壽,弊無窮之樂,保萬乘之勢,不出反掌之易,以居太山之安;乃欲乘重卵之危,走上天之難,此愚臣之所大惑也!人性有畏其影而惡其跡者,卻背而走無益也,不知就陰而止,影滅跡絕。欲人勿聞,莫若勿言;欲人勿知,莫若勿為。欲湯之冷,令一人炊之,百人揚之,無益也;不如絕薪止火而已。不絕之於彼,而救之於此,譬猶抱薪救火也。養由基,楚之善射者也,去楊葉百步,百發百中,楊葉之小,而加百中焉,可謂善射矣,所止乃百步之中耳,比於臣未知操弓持矢也。福生有基,禍生有胎;納其基,絕其胎;禍何從來哉?泰山之溜穿石,引繩久之,乃以挈木;水非石之鑽,繩非木之鋸也,而漸靡使之然。夫銖銖而稱之,至石必差;寸寸而度之,至丈必過;石稱丈量,徑而寡失。夫十圍之木,始生於,可引而絕,可擢而拔,據其未生,先其未形;磨礱砥礪,不見其損,有時而盡;種樹畜長,不見其益,有時而大;積德修行,不知其善,有時而用;行惡為非,棄義背理,不知其惡,有時而亡。臣誠願大王孰計而身行之,此百王不易之道也。」吳王不聽,卒死丹徒。

吳王欲從民飲酒,伍子胥諫曰:「不可。昔白龍下清冷之淵,化為魚,漁者豫且射中其目,白龍上訴天帝,天帝曰:『當是之時,若安置而形?』白龍對曰:『我下清冷之淵化為魚。』天帝曰:『魚固人之所射也;若是,豫且何罪?』夫白龍,天帝貴畜也;豫且,宋國賤臣也。白龍不化,豫且不射;今棄萬乘之位而從布衣之士飲酒,臣恐其有豫且之患矣。」王乃止。

孔子曰:「良藥苦於口,利於病;忠言逆於耳,利於行。故武王諤諤而昌,紂嘿嘿而亡,君無諤諤之臣,父無諤諤之子,兄無諤諤之弟,夫無諤諤之婦,士無諤諤之友;其亡可立而待。故曰君失之,臣得之;父失之,子得之;兄失之,弟得之;夫失之,婦得之;士失之,友得之。故無亡國破家,悖父亂子,放兄棄弟,狂夫淫婦,絕交敗友。」

晏子復於景公曰:「朝居嚴乎?」公曰:「朝居嚴,則曷害於國家哉?」晏子對曰:「朝居嚴,則下無言,下無言,則上無聞矣。下無言則謂之喑,上無聞則謂之聾;聾喑則非害治國家如何也?具合菽粟之微以滿倉廩,合疏縷之緯以成幃幕,太山之高,非一石也,累卑然後高也。夫治天下者,非用一士之言也,固有受而不用,惡有距而不入者哉?」

說苑 (설원, shuōyuàn) 유향 (劉向)

說苑(설원)

Alternative Names (異名): 说苑(shuōyuàn)
구분: 구분 설화집
저자: 유향
시대: 중국 전한


중국의 교훈적인 설화집.


전한(前漢) 말에 유향(劉向)이 편집하였다. 〈군도(君道)〉 〈신술(臣術)〉 등 20편(編)으로 구성되었다. 같은 저자의 《신서(新序)》와 그 체재가 비슷하며, 내용도 중복된 것이 있다. 고대의 제후나 선현들의 행적이나 일화·우화 등을 수록한 것이며 위정자를 설득하기 위한 훈계독본으로 이용하였다.


구성 및 고사성어

卷一 君道

卷二 臣術

卷三 建本

卷四 立節

卷五 貴德

卷六 復恩

卷七 政理

卷八 尊賢


卷九 正諫


螳螂窺蟬(당랑규선) |

卷十 敬慎

卷十一 善說

卷十二 奉使

卷十三 權謀

卷十四 至公

卷十五 指武

卷十六 談叢

卷十七 雜言

卷十八 辨物

卷十九 修文

卷二十 反質

說往說來 (설왕설래, shuōwǎngshuōlái)

說往說來(설왕설래)

说往说来(shuōwǎngshuōlái)

서로 변론하느라고 옥신각신함.


說來說去(说来说去, shuōláishuōqù)to repeat over and over again

成人不自在 (성인불자재)

成人不自在(성인불자재)

成人不自在[chéngrénbúzìzai]

成 이룰 성 | 人 사람 인 | 不 아닐 불 | 自 스스로 자 | 在 있을 재 |

성공하려면 안일(安逸)에 빠지지 말고 반드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출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成人不自在 自在不成人(성인불자재 자재불성인)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

書言故事 (서언고사, Shūyángùshi) 胡繼宗 (호계종)

書言故事(서언고사) 胡繼宗(호계종)

Alternative Names (異名):
书言故事(Shūyángùshi)


중국(中國)의 고사 성어를 분류ㆍ해석(解釋)하고 그 출전(出典)을 밝힌 책.


중국 송나라의 호계종(胡繼宗)이 고사 성어를 모아서 인군류(人君類)와 유학류(儒學類)로 분류, 해석하고 그 출전을 밝힌 책. 12권.


관련 고사성어

嘗糞(상분) | 跖狗吠堯(척구폐요) |

成允成功 (성윤성공)

成允成功(성윤성공)

成 이룰 성 | 允 맏 윤, 진실로 윤, 마을 이름 연 | 功 공 공 |

성실을 다하면 성공이 온다.

[출전]
書經

誠心誠意 (성심성의, chéngxīnchéngyì)

誠心誠意(성심성의)

诚心诚意(chéngxīnchéngyì)

정성스러운 마음과 뜻.

earnestly and sincerely; in all sincerity


동의어

诚心实意(chéngxīnshíyì)

西施嚬目 (서시빈목)

西施嚬目(서시빈목)

西 서녘 서 | 施 베풀 시 | 嚬 눈살 찌푸릴 빈 | 目 눈 목 |

서시(西施)가 가슴을 움켜쥠.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흉내낸다는 뜻으로, 쓸데없이 남의 흉내를 내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또는 남의 단점을 장점인 줄 알고 본뜸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일반적으로 중국 4대 미인이라고 하면 서시(西施), 양귀비((楊貴妃), 왕소군(王昭君), 초선(貂嬋)을 꼽는다.

그리고 혹자는 중국 역사상 3대 미인으로 서시(西施), 양귀비(楊貴妃), 향비(香妃)를 꼽는다. 이 3대 미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녀들을 탐닉한 오왕, 현종, 건융제 등 세 임금이 한결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것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월 말엽,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오왕(吳王)부차(夫差)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절세의 미인 서시를 바쳤다. 결국 夫差는 句踐에게 敗해 自決하고 만다.(「臥薪嘗膽(와신상담)」「長頸烏喙(장경오훼)」참고).

서시는 가슴앎이로 말미암아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길을 걸을 때 가슴의 통증 때문에 늘 눈살을 찌뿌리고 다녔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넔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것을 본 그래서 옆집에 살고 있던 추녀(醜女)동시(東施)라고 하는 女人이 자기도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면 예쁘게 보일 것으로 믿고 서시의 흉내를 냈다. [西施病心而, 其里之醜人, 見而美之, 歸亦捧心而]

그것을 본 이는 그 동네에서 제일 가는 富者 老人이었다. 老人은 그녀의 추한 模襲에 놀라 그만 문을 걸어 잠근 채 며칠을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富者가 杜門不出하자 이번에는 가난한 옆집 老人이 世上에 무슨 큰일이나 난줄 알고는 처자식을 데리고 딴 동네로 逃亡쳐버리고 말았다.

이 추녀는 미간을 찡그린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만 염두에 두었을 뿐, 찡그림이 아름다운 까닭을 알지 못했다. 즉, 서시는 본래 아름다우므로 자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 고사는 원래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에게 노(魯)나라의 악사장(樂師長)인 사금(師金)이 한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 장은 사금의 말을 빌려서 장자(莊子)가 공자의 상고주의(尙古主義)를 '외형에 사로잡혀 본질을 망각한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한 것이다. 장자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제도나 도덕도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춘추시대 말엽의 난세에 태어난 공자(孔子)가 그 옛날 주왕조(周王朝)의 이상정치(理想政治)를 그대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재현하려 하는 것은 마치 추녀가 서시를 무작정 흉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빈정대어 말한 것이다.

[출전] 莊子 天運篇

故西施病心而矉其里,其里之醜人見而美之,歸亦捧心而矉其里。其里之富人見之,堅閉門而不出;貧人見之,挈妻子而去之走。彼知矉美而不知矉之所以美。惜乎!而夫子其窮哉!

In the same way, when Xi Shi was troubled in mind, she would knit her brows and frown on all in her neighbourhood. An ugly woman of the neighbourhood, seeing and admiring her beauty, went home, and also laying her hands on her heart proceeded to stare and frown on all around her. When the rich people of the village saw her, they shut fast their doors and would not go out; when the poor people saw her, they took their wives and children and ran away from her. The woman knew how to admire the frowning beauty, but she did not know how it was that she, though frowning, was beautiful. Alas! it is indeed all over with your Master!'


관련 한자어

동의어

西施捧心(서시봉심, xī shī pěng xīn) | 西施效嚬(서시효빈, xī shī xiào pín) | 效嚬(효빈, xiào pín) |

서시(西施, Xīshī) 관련 한자어

西施顰目(서시빈목) | 西施矉目(서시빈목) 서시가 눈을 찡그린다는 뜻으로, 함부로 남을 흉내내다가 웃음거리가 됨을 이르는 말 |

西施捧心(서시봉심) 서시(西施)가 가슴을 쓰다듬는다는 뜻으로, 함부로 흉내내다가 웃음거리가 됨을 이르는 말 |

病西施(bìngxīshī) 병든 듯한 자태를 띠는 미인. A sick, beautiful woman (西施: Xishi of China who, according to legend, is sickly but exceptionally beautiful because of her sickliness) |

唐突西施(tángtūxīshī) 추악한 것을 아름다운 것에 비유하여 아름다운 것을 모독함을 이르는 말. |

西施有所醜(서시유소추) | 西施有所丑(서시유소추, xīshīyǒusuǒchǒu) 미인인 서시에게도 추한 데가 있다는 뜻으로, 현인에게도 단점이 있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 |

纖纖玉手 (섬섬옥수, xiānxiānyùshǒu)

纖纖玉手(섬섬옥수)

纤纤玉手(xiānxiān yùshǒu)

가냘프고 고운 여자의 손.


纤纤 [xiānxiān] 形容词 [文言] Slim.

玉手 [yùshǒu] jade hands—slender white hands

攝生 (섭생)

攝生(섭생)

자신의 생을 억누르면 생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

善攝生者 以其無死地
선섭생자 이기무사지
섭생을 잘하는 자는 죽음의땅에 들어가지 않는다
- 도덕경

性相近也習相遠也 (성상근야습상원야)

性相近也 習相遠也 (성상근야 습상원야)

By nature, men are nearly alike; by practice, they get to be wide apart.
- Confucius

사람의 천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성으로 서로가 멀어진다.
- 공자


孔子, 공자, Confucius

雪上加霜 (설상가상, xuěshàngjiāshuāng)

雪上加霜(설상가상)

雪上加霜(xuěshàngjiāshuāng)

눈 위에 서리가 내리다. 불행한 일이 엎친 데 덮쳐 일어남을 이르는 말.

to add frost to snow—one disaster after another

西施沉魚 (서시침어)

西施沉魚(서시침어)

xī shī chén yú
sai1 si1 cam4 jyu4

Xi Shi sinks fish


http://en.wikipedia.org/wiki/Four_Beauties

成事在天 (성사재천)

成事在天(성사재천)

成事在天[chéngshìzàitiān]

일이 되고 안 됨은 오로지 천운(天運)에 달렸다는 말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謀事在人成事在天(모사재인성사재천) | 謀事在人(모사재인) | 成事在天(성사재천) |

聲東擊西 (성동격서, shēngdōngjīxī)

聲東擊西(성동격서)

声东击西(shēngdōngjīxī)

聲 소리 성 | 東 동녘 동 | 擊 칠 격 | 西 서녘 서 |


三十六計 勝戰計 第六計. 동쪽에 소리내고 서쪽을 친다. 상대편에게 그럴듯한 속임수를 써서 공격하는 것을 이르는 말.

to make a feint to the east and attack in the west


원문의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적의 정세판단이 흩어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게 되면 고여있던 물이 점차 불어나 넘쳐흐르는 상태가 되어 막지 못한다.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이익을 챙길 따름이다.[敵志亂萃,不虞,坤下兌上之象,利其不自主而取之.]"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을 친다'라는 뜻으로, 동쪽을 쳐들어가는 듯하면서 상대를 교란시켜 실제로는 서쪽을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통전(通典)》 병전(兵典)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중국 한(漢)나라의 유방(劉邦:BC 247?∼BC 195)과 초(楚)나라의 항우(項羽:BC 232∼BC 202)가 서로 싸우던 중 위(魏)나라의 왕 표(豹)가 항우에게 항복하였다. 유방은, 항우와 표가 양쪽에서 쳐들어오는 위험에 처하자 한신(韓信:?∼BC 196)에게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위나라의 왕인 표는 백직(柏直)을 대장으로 하여 황허강[黃河]의 동쪽 포판(蒲坂)에 진을 치고 한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하였다. 한신은 포판을 쳐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병사들에게 낮에는 큰 소리로 훈련하도록 하고 밤에는 불을 밝혀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표시를 나타내게 하였다. 백직은 이러한 한나라 군대의 작전을 보고 어리석다며 비웃었다. 한신은 비밀리에 한나라 군대를 이끌고 하양에 다다라 뗏목으로 황허강을 건너서 매우 빠르게 전진하여 위나라 왕 표의 후방 본거지(本據地)인 안이[安邑]를 점령하고 표를 사로잡았다.

병법(兵法)의 한 가지로, 한쪽을 공격할 듯하면서 약삭빠르게 상대편을 속여서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다른쪽으로 쳐들어가 적을 무찌르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또 다른 예로 三國志(正史) 曺操傳(조조전)에 등장하는 예를 살펴보자.

하북의 강자, 원소는 조조를 치기 위해 군사를 몰아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허창)로 향했다. 그리고는 선발대를 황하 건너로 보내 백마를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조조는 병력을 이끌고 백마를 구원하러 가고자 했다. 이 때 조조의 병력은 원소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그 때 조조의 모사 중 한사람인 순유가 건의한다.

"적은 수가 많으니 우선 분산시키지 않으면 부수기 힘듭니다. 먼저 서쪽의 연진으로 향해서, 황하를 건너 적의 배후로 우회하는 듯한 태세를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원소는 반드시 서쪽으로 군을 이동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그 틈에 재빨리 백마로 급행해서 불시에 무찔러야 합니다."

조조는 바로 이 '성동격서'의 전략을 택했고, 그 선택은 적중했다. 원소는 급히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보냈고, 조조는 원소의 분할된 군대를 섬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예를 하나 살펴보자.

유비가 吳로부터 형주를 얻어 안주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익주를 다스리고 있던 유장은 한중의 장로(오두미교의 교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에 유장은 동족인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되고, 유비는 방통의 조언을 받아들여 유장을 치고자 마음먹는다.

이후 방통의 계략에 따라 익주의 성들을 하나둘 장악해 나간다. 하지만 방통이 낙봉파에서 죽게 되고, 기세가 꺾인 유비는 제갈량에게 원군을 보내달라 한다. 이에 제갈량은 관우에게 형주를 맡기고 스스로 나선다. 이때 조운, 장비도 함께 나서게 된다.

기세 좋게 전진해 나가던 장비였으나 巴郡(파군)에서 발이 멈추고 만다. 파군을 지키는 노장 엄안에게 발이 묶여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엄안이 싸움에 임하지 않자 장비는 초조해졌다. 그 때 부하 장수 한 사람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파군을 지나갈 수 있는 샛길을 발견한다. 이에 장비는 그 날 밤으로 바로 군사들을 이끌고 샛길로 지나갈 계획을 세운다.

"오늘 밤 이경에 밥을 지어먹고 삼경에 달이 밝은 틈을 이용하여 영채를 거두고 모두 출발한다. 사람은 입에 함매를 물고 말방울은 모두 떼어낸 뒤 조용히 가야 할 것이다. 내가 직접 앞에서 길을 열 것이니, 너희들은 조용히 따라오도록 하라."

하지만 엄안이 파견한 염탐꾼들이 이 소식을 알고 즉각 엄안에게 보고했다. 엄안은 즉시 병사들에게 싸움에 나설 준비를 시킨다.

밤이 되고, 삼경이 지나 장비는 조용히 군사들을 이끌고 전진했다. 엄안은 장비와 병사들의 이동을 확인한 후 병사들을 움직어 기습을 가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큰소리가 나며 한 무리의 군사들이 덮쳐왔다.

"늙은 놈아, 달아나지 말라! 내 너를 만나기를 고대했는데, 마침 잘 만났구나!"

엄안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는데 그 곳에는 앞에 지나갔을 터인 장비가 있었다. 먼저 지나간 장비는 가짜였던 것이다. 샛길로 가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뒤에 대기하고 있다가 엄안이 나오자 공격한 것이다. 장비가 엄안을 잡기 위해 계책을 세운 것이었다. 엄안은 장비에게 붙잡히고 만다.

"너희들은 의리도 없이 우리 주군(유장)을 침략하고 있다! 그러니 斷頭將軍(단두장군 : 머리 잘린 장군)은 있을 지언정 어찌 降將軍(항장군 : 항복한 장군)이 있으리오!"

하지만 엄안은 붙잡히고 나서도 오히려 당당한 태도를 보여 장비는 그에게 감탄하게 된다. 그래서 장비는 엄안의 목숨을 살려주고, 엄안은 장비의 恩義(은의)에 감복하여 항복한다.

이 역시 샛길로 가는 척하면서 적을 꾀어내어 공격하는 '성동격서'의 예라 할 것이다.

여기의 장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이 부분에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재편한 모종강은 총평에 이렇게 쓰고 있다.

"장비는 평생 속시원한 일을 몇 번 했다. 督郵(독우)를 매질하고, 呂布(여포)에게 욕을 하고, 長坂橋(장판교)에서 호통을 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용기는 嚴顔(엄안)을 사로잡은 지혜만 못했다. 또한 엄안을 사로잡은 지혜는 엄안을 살려준 현명함만 못하다."

술 좋아하고, 성격 급하고, 머리 나쁜 모습으로 흔히 묘사되는 장비이지만, 正史(정사)에 의하면 장비는 知勇(지용)를 겸비한 名將(명장)이었다고 한다. 연의에서는 후반부에서나 제갈량에게 감화되어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 식으로 간간히 계략을 쓰는 모습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장비가 쓴 계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출전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第六計(제6계) | 통전(通典) 병전(兵典) |


관련 한자어

참조어

明修棧道 暗渡陳倉(명수잔도 암도진창)

明修栈道 暗渡陈仓 (míngxiūzhàndào, àndùchéncāng)

明 밝을 명 | 修 닦을 수,길 수 | 棧 우리 잔 | 道 길 도 |
暗 어두울 암,햇빛 침침할 암 | 渡 건널 도 | 陳 늘어놓을 진 | 倉 창고 창 |

1. 한군(漢軍)이 겉으로는 잔도를 내는 체하면서 몰래 군사를 되돌려 초군(楚軍)의 진창(陳倉)을 기습하다. 2. 성동격서(聲東擊西)하다. 가상(假象)으로 적을 미혹시켜 목적을 달성하다.

To pretend to advance along one path while secretly going along another; to do one thing under cover of another

調虎離山(조호이산)

调虎离山(diàohǔlíshān)

調 고를 조 | 虎 호랑이 호 | 離 떠날 이 | 山 메 산 |

범을 산으로부터 유인해 내다. 적을 유리한 장소나 진지로부터 유인해 내어 그 허점을 이용하여 공략하다.

先難後獲 (선난후획)

先難後獲(선난후획)

先 먼저 선 | 難 어려울 난, 우거질 나 | 後 뒤 후, 임금 후 | 獲 얻을 획, 실심할 확 |

먼저 어려운 일을 하고, 보상은 그 뒤에 생각한다.

[출전]
論語(논어) 雍也(옹야)

仁者先難而後獲,可謂仁矣。

Benevolence involves being the first to volunteer for a difficult job and the last to think about rewards and recognition.

善男善女 (선남선녀)

善男善女(선남선녀)

불교에 귀의한 신앙 깊은 사람들, 불신도.

徐娘半老 (서낭반로, Xúniángbànlǎo)

徐娘半老(서낭반로)

徐娘半老(Xúniángbànlǎo)

徐 천천히 할 서 | 娘 아가씨 낭 | 半 반 반 | 老 늙을 로 |


서소패(徐昭佩)처럼 우아하다.


서소패(徐昭佩)처럼 우아하다. 《南史·梁元帝徐妃傳(남사·양원제서비전)》에 나오는 양(梁) 원제(元帝)의 후궁인 서(徐)씨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정다감했었다고 함.

우아한 자태를 지닌 중년 부인. 여전히 풍류가 남아 있는 중년 부인. 조롱의 의미를 내포함.


관련 한자어

동의어

半老徐娘(bànlǎoXúniáng) |


南史(남사):卷12:梁元帝徐妃傳(양원제서비전)

先公後私 (선공후사)

先公後私(선공후사)

공적인 것을 앞세우고 사적인 것은 뒤로 함.

先見之明 (선견지명)

先見之明(선견지명)

앞일을 미리 보아 판단하는 총명.

塞翁之馬 (새옹지마)

塞翁之馬(새옹지마)

세상 모든 것이 變轉無常(변전무상)하여 인생살이도 항시 바뀌므로 예측할 수 없다는 말.

옛날 중국 북방 오랑캐들이 사는 胡地(호지)와의 국경 要塞(요새)근처에 한 늙은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늙은이의 말이 아무 까닭도 없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늙은이는 전혀 아까워 하는 기색 없이 예사롭게 말했다.

『누가 알겠소. 이것이 복이 될는지』

몇달이 지난 어느 날, 그 말이 오랑캐의 駿馬(준마) 한 마리를 데리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축하하러 몰려들었다.

『누가 알겠소. 이것이 禍根(화근)이 될는지』

늙은이는 조금도 기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지 얼마 지나서 늙은이의 아들이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또 다시 위로하러 왔다.

『누가 알겠소. 이것이 복이 될는지』

늙은이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태연히 말하는 것이었다.

1년이 지난 뒤 오랑캐가 쳐들어와서 마을의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가 거의 모두 戰死(전사)했다. 그러나 늙은이의 아들은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무사했다.

生面不知 (생면부지)

生面不知(생면부지)

한 번도 본일이 없는 사람.

生老病死 (생로병사)

生老病死(생로병사)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 사람이 받아야 하는 네 가지 고통.

死後藥方文 (사후약방문)

死後藥方文(사후약방문)

死 죽을 사 | 後 뒤 후 | 藥 약 약 | 方 모 방 | 文 글월 문 |

사람이 죽은 뒤에 약을 짓는다는 뜻으로, 일을 그르친 뒤에 아무리 뉘우쳐야 이미 늦었다는 말

the day after the fair; the doctor after death.


한자어

반의어·상대어

有備無患(유비무환)

참조어

만시지탄(晩時之歎)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 도둑맞고 사립문 고친다.

上火下澤 (상화하택)

上火下澤(상화하택)

上 윗 상 | 火 불 화 | 下 아래 하 | 澤 못 택, 풀 석, 전국술역, 별이름 탁

위에는 불, 아래는 못. 서로 이반하고 분열하는 현상

교수신문에서 선정한 2005년 올해의 사자성어


2005년 | 올해의 사자성어 | 교수신문

山海珍味 (산해진미)

山海珍味(산해진미)

산과 바다에서 나는 물건으로 만든 맛 좋은 음식.

山海經 (산해경) 第08 海外北經

山海經(산해경)

第08 海外北經

海外自東北陬至西北陬者。無之國在長股東,為人無。

鍾山之神,名曰燭陰,視為晝,瞑為夜,吹為冬,呼為夏,不飲,不食,不息,息為風,身長千裏。在無之東。其為物,人麵,蛇身,赤色,居鍾山下。

一目國在其東,一目中其麵而居。一曰有手足。

柔利國在一目東,為人一手一足,反厀,曲足居上。一雲留利之國,人足反折。

共工之臣曰相柳氏,九首,以食於九山。相柳之所抵,厥為澤溪。禹殺相柳,其血腥,不可以樹五穀種。禹厥之,三仞三沮,乃以為眾帝之台。在崑崙之北,柔利之東。相柳者,九首人麵,蛇身而青。不敢北射,畏共工之台。台在其東。台四方,隅有一蛇,虎色,首衝南方。

深目國在其東,為人舉一手一目,在共工台東。無腸之國在深目東,其為人長而無腸。

聶耳之國在無腸國東,使兩文虎,為人兩手聶其耳。縣居海水中,及水所出入奇物。兩虎在其東。

誇父與日逐走,入日。渴欲得飲,飲於河渭;河渭不足,北飲大澤。未至,道渴而死。棄其杖,化為鄧林。

博父國在聶耳東,其為人大,右手操青蛇,左手操黃蛇。鄧林在其東,二樹木。一曰博父。禹所積石之山在其東,河水所入。拘纓之國在其東,一手把纓。一曰利纓之國。

尋木長千裏,在拘纓南,生河上西北。跂踵國在拘纓東,其為人大,兩足亦大。一曰大踵。歐絲之野在大踵東,一女子跪據樹歐絲。三桑無枝,在歐絲東,其木長百仞,無枝。

範林方三百裏,在三桑東,洲環其下。

務隅之山,帝顓頊葬於陽,九嬪葬於陰。一曰爰有熊、羆、文虎、離朱、丘久、視肉。

平丘在三桑東,爰有遺玉、青鳥、視肉、楊柳、甘柤、甘華,百果所生,有兩山夾上穀,二大丘居中,名曰平丘。

北海內有獸,其狀如馬,名曰騊駼。有獸焉,其名曰駮,狀如白馬,鋸牙,食虎豹。有素獸焉,狀如馬,名曰蛩蛩。有青獸焉,狀如虎,名曰羅羅。

北方禺強,人麵鳥身,珥兩青蛇。踐兩青蛇。

山海經 (산해경) 第03 北山經

山海經(산해경)

第03 北山經

北山經之首,曰單狐之山,多機木,其上多華草。漨水出焉,而西流注於泑水,其中多芘石文石。

又北二百五十裏,曰求如之山,其多銅,其下上多玉,無草木。滑水出焉,而西流注於諸<囟比>之水。其中多滑魚。其狀如鱓,赤背,其音如梧,食之已疣。其中多水馬,其狀如馬,文臂牛尾,其音如呼。

又北三百裏,曰帶山,其上多玉,其下多青碧。有獸焉,其狀如馬,一角有錯,其名曰疏,可以辟火。有鳥焉,其狀如烏,五采而赤文,名曰鵸餘,是自為牝牡,食之不疽。彭水出焉,而西流注於芘湖之水,其中多儵魚,其狀如雞而赤毛,三尾六足、四首,其音如鵲,食之可以已憂。

又北四百裏,曰譙明之山。譙水出焉,西流注於河。其中多何羅之魚,一首而十身,其音如吠犬,食之已癰。有獸焉,其狀如貆而赤豪,其音如榴榴,名曰孟槐,可以禦凶。是山也,無草木,多青雄黃。

又北三百五十裏,曰涿光之山。囂水出焉,而西流注於河。其中多鰼々之魚,其狀如鵲而十翼,鱗皆在羽端,其音如鵲,可以禦火,食之不癉。其上多鬆柏,其下多棕橿,其獸多麢羊,其鳥多蕃。

又北三百八十裏,曰虢山,其上多漆,其下多桐椐。其陽多玉,其陰多鐵。伊水出焉,西流注於河。其獸多橐駝,其鳥多寓,狀如鼠而鳥翼,其音如羊,可以禦兵。

又北四百裏,至於虢山之尾,其上多玉而無石。魚水出焉,西流注於河,其中多文貝。

又北二百裏,曰丹熏之山,其上多樗柏,其草多韭Ε,多丹雘。熏水出焉,而西流注於棠水。有獸焉,其狀如鼠,而菟首麋身,其音如獆犬,以其尾飛,名曰耳鼠,食之不采,又可以禦百毒。

又北二百八十裏,曰石者之山,其上無草木,多瑤碧。泚水出焉,西流注於河。有獸焉,其狀如豹,而文題白身,名曰孟極,是善伏,其鳴自呼。

又北百一十裏,曰邊春之山,多蔥、葵、韭、桃、李。杠水出焉,而西流注於泑澤。有獸焉,其狀如禺而文身,善笑,見人則臥,名曰幽鴳,其鳴自呼。

又北二百裏,曰蔓聯之山,其上無草木,有獸焉,其狀如禺而有鬛,牛尾、文臂、馬虒,見人則呼,名曰足訾,其鳴自呼。有鳥焉,群居而朋飛,其毛如雌雉,名曰,其鳴自呼,食之已風。

又北百八十裏,曰單張之山,其上無草木。有獸焉,其狀如豹而長尾,人首而牛耳,一目,名曰諸犍,善吒,行則銜其尾。居則蟠其尾。有鳥焉,其狀如雉,而文首、白翼、黃足,名曰白夜,食之已嗌痛,可以已痸。櫟水出焉,在而南流注於杠水。

又北三百二十裏,曰灌題之山,其上多樗柘,其下多流沙,多砥。有獸焉,其狀如牛而白尾,其音如[A041],名曰那父。有鳥焉,其狀如雌雉而人麵,見人則躍,名曰竦斯,其鳴自呼也。匠韓之水出焉,而西流注於泑澤,其中多磁石。

又北二百裏,曰潘侯之山,其上多鬆柏,其下多榛楛,其陽多玉,其陰多鐵。有獸焉,其狀如牛,而四節生毛,或曰旄牛。邊水出焉,而南流注於櫟澤。

又北二百三十裏,曰小鹹之山,無草木,冬夏有雪。

北二百八十裏,曰大鹹之山,無草木,其下多玉。是山也,四方,不可以上。有蛇名曰長蛇,其毛如彘豪,其音如鼓柝。

又北三百二十裏,曰敦薨之山,其上多棕楠,其下多茈草。敦薨之水出焉,而西流注於泑澤。出於崑崙之東北隅,實惟河原。其中多赤鮭,其獸多兕,旄牛,其鳥多鳲鳩。

又北二百裏,曰少鹹之山,無草木,多青碧。有獸焉,其狀如牛,而赤身、人麵、馬足,名曰窫窳,其音如嬰兒,是食人。敦水出焉,東流注於雁門之水,其中多市々之魚。食之殺人。

又北二百裏,曰獄法之山。瀤澤之出焉,而東北流注於泰澤。其中多巢魚,其狀如鯉而雞足,食之已疣。有獸焉,其狀如犬而人麵,善投,見人則笑,其名山犭軍,其行如風,見則天下大風。

又北二百裏,曰北嶽之山,多枳棘剛木。有獸焉,其狀如牛,而四角、人目、彘耳,其名曰諸懷,其音如鳴雁,是食人。諸懷之水出焉,而西流注於囂水,其中多鮨魚,魚身而犬首,其音如嬰兒,食之已狂。

又北百八十裏,曰渾夕之山,無草木,多銅玉。囂水出焉,而西流注於海。有蛇一首兩身,名曰肥遺,見則其國大旱。又北五十裏,曰北單之山,無草木,多蔥韭。

又北百裏,曰羆差之山,無草木,多馬。

又北百八十裏,曰北鮮之山,是多馬。鮮水出焉,而西北流注於塗吾之水。

又北百七十裏,曰堤山,多馬。有獸焉,其狀如豹而文首,名曰狕。堤水出焉,而東流注於泰澤,其中多龍龜。

凡北山經之首,自單狐之山至於堤山,凡二十五山,五千四百九十裏,其神皆人麵蛇身。其祠之,毛用一雄雞彘瘞,吉玉用一珪,瘞而為不糈。其山北人,皆生食不火之物。

《北次二經》之首,在河之東,其首枕汾,其名曰管涔之山。其上無木而多草,其下多玉。汾水出焉,而西流注於河。

又西二百五十裏,曰少陽之山,其上多玉,其下多赤銀。酸水出焉,而東流注於汾水,其中多美赭。

又北五十裏,曰縣雍之山,其上多玉,其下多銅,其獸多閭麋,其鳥多白翟白有。晉水出焉,而東南流注於汾水。其中多鮆魚,其狀如儵而赤麟,其音如叱,食之不驕。

又北二百裏,曰狐岐之山,無草木,多青碧。勝水出焉,而東北流注於汾水,其中多蒼玉。

又北三百五十裏,曰白沙山,廣員三百裏,盡沙也,無草木鳥獸。鮪水出於其上,潛於其下,是多白玉。又北四百裏,曰爾是之山,無草木,無水。

又北三百八十裏,曰狂山,無草木,是山也,冬夏有雪。狂水出焉,而西流注於浮水,其中多美玉。

又北三百八十裏,曰諸餘之山,其上多銅玉,其下多鬆柏。諸餘之水出焉,而東流注於旄水。

又北三百五十裏,曰敦頭之山,其上多金玉,無草木。旄水出焉,而東流注於印澤。其中多孛馬,牛尾而白身,一角,其音如呼。

又北三百五十裏,曰鉤吾之山,其上多玉,其下多銅。有獸焉,其狀如羊身人麵,其目在腋下,虎齒人爪,其音如嬰兒,名曰麅鴞,是食人。

又北三百裏,曰北囂之山,無石,其陽多碧,其陰多玉。有獸焉,其狀如虎,而白身犬首,馬尾彘鬛,名曰獨犭穀。有鳥焉,其狀如烏,人麵,名曰{般鳥}冒,宵飛而晝伏,食之已暍。涔水出焉,而東流注於邛澤。

又北三百五十裏,曰梁渠之山,無草木,多金玉。修水出焉,而東流注於雁門,其獸多居暨,其狀如彙而赤毛,其音如豚。有鳥焉,其狀如誇父,四翼、一目、犬尾,名曰囂,其音如鵲,食之已腹痛,可以止衕。

又北四百裏,曰姑灌之山,無草木。是山也,冬夏有雪。

又北三百八十裏,曰湖灌之山,其陽多玉,其陰多碧,多馬。湖灌之水出焉,而東流注於海,其中多旦。有木焉,其葉如柳而赤理。

又北水行五百裏,流沙三百裏,至於洹山,其上多金玉。三桑生之,其樹皆無枝,其高百仞。百果樹生之。其下多怪蛇。又北三百裏,曰敦題之山,無草木,多金玉。是錞於北海。

凡《北次二經》之首,自管涔之山至於敦題之山,凡十七山,五千六百九十裏。其神皆蛇身人麵。其祠:毛用一雄雞彘瘞;用一璧一珪,投而不糈。

《北次三經》之首曰太行之山。其首曰歸山,其上有金玉,其下有碧。有獸焉,其狀如麢羊而四角,馬尾而有距,其名曰軍,善還,其名自[A041]有鳥焉,其狀如鵲,白身、赤尾、六足,其名曰賁,是善驚,其鳴自[A041]。

又東北二百裏,曰龍侯之山,無草木,多金玉。決決之水出焉,而東流注於河。其中多人魚,其狀如帝魚,四足,其音如嬰兒,食之無癡疾。

又東北二百裏,曰馬成之山,其上多文石,其陰多金玉。有獸焉,其狀如白犬而黑頭,見人則飛,其名曰天馬,其鳴自[A041],有鳥焉,其狀如烏,首白而身青、足黃,是名曰鶌鶋。其名自[A041],食之不饑,可以已寓。

又東北七十裏,曰鹹山,其上有玉,其下多銅,是多鬆柏,草多茈草。條菅之水出焉,而西南流注於長澤。其中多器酸,三歲一成,食之已癘。

又東北二百裏,曰天池之山,其上無草木,多文石。有獸焉,其狀如兔而鼠首,以其背飛,其名曰飛鼠。澠水出焉,潛於其下,其中多黃堊。

又東三百裏,曰陽山,其上多玉,其下多金銅。有獸焉,其狀如牛而尾,其頸{⒚肉},其狀如句瞿,其名曰領胡,其鳴自詨,食之已狂。有鳥焉,其狀如雌雉,而五采以文,是自為牝牡,名曰象蛇,其鳴自詨。留水出焉,而南流注於河。其中有臽父之魚,其狀如鮒魚,魚首而彘身,食之已嘔。

又東三百五十裏,曰賁聞之山,其上多蒼玉,其下多黃堊,多涅石。

又北百裏,曰王屋之山,是多石。氵聯水出焉,而西北流注於泰澤。

又東北三百裏,曰教山,其上多玉而無石。教水出焉,西流注於河,是水冬幹而夏流,實惟幹河。其中有兩山。是山也,廣員三百步,其名曰發丸之山,其上有金玉。

又南三百裏,曰景山,南望鹽販之澤,北望少澤。其上多草、藇,其草多秦椒,其陰多赭,其陽多玉。有鳥焉,其狀如蛇,而四翼、六目、三足,名曰酸與,其鳴自詨,見則其邑有恐。

又東南三百二十裏,曰孟門之山,其上多蒼玉,多金,其下多黃堊,多涅石。

又東南三百二十裏,曰平山。平水出於其上,潛於其下,是多美玉。

又東二百裏,曰京山,有美玉,多漆木,多竹,其陽有赤銅,其陰有玄肅。高水出焉,南流注於河。

又東二百裏,曰蟲尾之山,其上多金玉,其下多竹,多青碧。丹水出焉,南流注於河。薄水出焉,而東南流注於黃澤。

又東三百裏,曰彭毗之山,其上無草木,多金玉,其下多水。蚤林之水出焉,東南流注於河。肥水出焉,而南流注於床水,其中多肥遺之蛇。

又東百八十裏,曰小侯之山。明漳之水出焉,南流注於黃澤。有鳥焉,其狀如烏而白文,名曰鴣[A220],食之不灂。

又東三百七十裏,曰泰頭之山。共水出焉,南流注於虖池。其上多金玉,其下多竹箭。

又東北二百裏,曰軒轅之山,其上多銅,其下多竹。有鳥焉,其狀如梟而白首,其名曰黃鳥,其鳴自詨,食之不妒。

又北二百裏,曰謁戾之山,其上多鬆柏,有金玉。沁水出焉,南流注於河。其東有林焉,名曰丹林。丹林之水出焉,南流注於河。嬰侯之水出焉,北流注於氾水。

東三百裏,曰沮洳之山,無草木,有金玉。濝水出焉,南流注於河。

又北三百裏,曰神囷之山,其上有文石,其下有白蛇,有飛蟲。黃水出焉,而東流注於洹。滏水出焉,而東流注於歐水。

又北二百裏,曰發鳩之山,其上多柘木。有鳥焉,其狀如烏,文首、白喙、赤足,名曰精衛,其鳴自詨。是炎帝之少女名曰女娃,女娃遊於東海,溺而不返,故為精衛。常銜西山之木石,以堙於東海。漳水出焉,東流注於河。

又東北百二十裏,曰少山,其上有金玉,其下有銅。清漳之水出焉,東流注於濁漳之水。

又東北二百裏,曰錫山,其上多玉,其下有砥。牛首之水出焉,而東流注於滏水。又北二百裏,曰景山,有美玉。景水出焉,東南流注於海澤。又北百裏,曰題首之山,有玉焉,多石,無水。

又北百裏,曰繡山,其上有玉、青碧,其木多栒,其草多芍藥、芎藭。洧水出焉,而東流注於河,其中有鱯、黽。又北百二十裏,曰鬆山,陽水出焉,東北流注於河。

又北百二十裏,曰敦與之山,其上無草木,有金玉。溹水出於其陽,而東流注於泰陸之水;泜水出於其陰,而東流注於彭水。槐水出焉,而東流注於泜澤。

又北百七十裏,曰柘山,其陽有金玉,其陰有鐵。曆聚之水出焉,而北流注於洧水。

又北三百裏,曰維龍之山,其上有碧玉,其陽有金,其陰有鐵。肥水出焉,而東流注於皋澤,其中多礨石。敞鐵之水出焉,而北流注於大澤。

又北百八十裏,曰白馬之山,其陽多石玉,其陰多鐵,多赤銅。木馬之水出焉,而東北流注於虖沱。

又北二百裏,曰空桑之山,無草木,冬夏有雪。空桑之水出焉,東流注於虖沱。

又北三百裏,曰泰戲之山,無草木,多金玉。有獸焉,其狀如羊,一角一目,目在耳後,其名曰東々,其鳴自[A041]。虖沱之水出焉,而東流注於漊水。液女之水出於其陽,南流注於沁水。

又北三百裏,曰石山,多藏金玉。濩之水出焉,而東流注於虖沱;鮮於之水出焉,而南流注於虖沱。又北二百裏,曰童戎之山。皋塗之水出焉,而東流注於漊液水。

又北三百裏,曰高是之山。滋水出焉,而南流注於虖沱。其木多棕,其草多條。滱水出焉,東流注於河。又北三百裏,曰陸山,多美玉。薑阝水出焉,而東流注於河。

又北二百裏,曰沂山般水出焉,而東流注於河。北百二十裏,曰燕山,多嬰石。燕水出焉,東流注於河。

又北山行五百裏,水行五百裏,至於饒山。是無草木,多瑤碧,其獸多橐駞,其鳥多留。曆虢之水出焉,而東流注於河,其中有師魚,食之殺人。

又北四百裏,曰乾山,無草木,其陽有金玉,其陰有鐵而無水。有獸焉,其狀如牛而三足,其名曰獂,其鳴自詨。

又北五百裏,曰倫山。倫水出焉,而東流注於河。有獸焉,其狀如麋,其川在尾上,其名曰羆。

又北五百裏,曰碣石之山。繩水出焉,而東流注於河,其中多蒲夷之魚。其上有玉,其下多青碧。又北水行五百裏,至於雁門之山,無草木。

又北水行四百裏,至於泰澤。其中有山焉,曰帝都之山,廣員百裏,無草木,有金玉。

又北五百裏,曰錞於毋逢之山,北望雞號之山,其風如[C152]。西望幽都之山,浴水出焉。是有大蛇,赤首白身,其音如牛,見則其邑大旱。

凡《北次三經》之首,自太行之山以至於無逢之山,凡四十六山,萬二千三百五十裏。其神狀皆馬身而人麵者廿神。其祠之,皆用一藻茝瘞之。其十四神狀皆彘身而載玉。其祠之,皆玉,不瘞。其十神狀皆彘身而八足蛇尾。其祠之,皆用一璧瘞之。大凡四十四神,皆用稌糈米祠之。此皆不火食。

右北經之山誌,凡八十七山,二萬三千二百三十裏。

山海經 (산해경) 第01 南山經

山海經(산해경)

第01 南山經

南山經之首曰䧿山。其首曰招搖之山,臨於西海之上,多桂,多金玉。有草焉,其狀如韭而青華,其名曰祝餘,食之不饑。有木焉,其狀如榖而黑理,其華四照,其名曰迷穀,佩之不迷。有獸焉,其狀如禺而白耳,伏行人走,其名曰狌狌,食之善走。麗��之水出焉,而西流注於海,其中多育沛,佩之無瘕疾。

又東三百里,曰堂庭之山,多棪木,多白猿,多水玉,多黃金。

又東三百八十里,曰猨翼之山,其中多怪獸,水多怪魚,多白玉,多蝮蟲,多怪蛇,多怪木,不可以上。

又東三百七十里,曰杻陽之山,其陽多赤金,其陰多白金。有獸焉,其狀如馬而白首,其文如虎而赤尾,其音如謠,其名曰鹿蜀,佩之宜子孫。怪水出焉,而東流注於憲翼之水。其中多玄龜,其狀如龜而鳥首虺尾,其名曰旋龜,其音如判木,佩之不聾,可以為底。

又東三百里柢山,多水,無草木。有魚焉,其狀如牛,陵居,蛇尾有翼,其羽在魼下,其音如留牛,其名曰鯥,冬死而夏生,食之無腫疾。

又東四百里,曰亶爰之山,多水,無草木,不可以上。有獸焉,其狀如狸而有髦,其名曰類,自為牝牡,食者不妒。

又東三百里,曰基山,其陽多玉,其陰多怪木。有獸焉,其狀如羊,九尾四耳,其目在背,其名曰猼訑,佩之不畏。有鳥焉,其狀如雞而三首六目、六足三翼,其名曰����,食之無臥。

又東三百里,曰青丘之山,其陽多玉,其陰多青䨼。有獸焉,其狀如狐而九尾,其音如嬰兒,能食人;食者不蠱。有鳥焉,其狀如鳩,其音若呵,名曰灌灌,佩之不惑。英水出焉,南流注於即翼之澤。其中多赤鱬,其狀如魚而人面,其音如鴛鴦,食之不疥。

又東三百五十里,曰箕尾之山,其尾踆於東海,多沙石。汸水出焉,而南流注於淯,其中多白玉。

凡䧿山之首,自招搖之山,以至箕尾之山,凡十山,二千九百五十里。其神狀皆鳥身而龍首,其祠之禮:毛用一璋玉瘞,糈用稌米,一璧,稻米、白菅為席。

《南次二經》之首,曰櫃山,西臨流黃,北望諸毗,東望長右。英水出焉,西南流注於赤水,其中多白玉,多丹粟。有獸焉,其狀如豚,有距,其音如狗吠,其名曰狸力,見則其縣多土功。有鳥焉,其狀如鴟而人手,其音如痹,其名曰鴸,其名自號也,見則其縣多放士。

東南四百五十里曰長右之山,無草木,多水。有獸焉,其狀如禺而四耳,其名長右,其音如吟,見則郡縣大水。

又東三百四十里,曰堯光之山,其陽多玉,其陰多金。有獸焉,其狀如人而彘鬛,穴居而冬蟄,其名曰猾褢,其音如斫木,見則縣有大繇。

又東三百五十里,曰羽山,其下多水,其上多雨,無草木,多蝮蟲。又東三百七十里,曰瞿父之山,無草木,多金玉。又東四百里,曰句餘之山,無草木,多金玉。

又東五百里,曰浮玉之山,北望具區,東望諸毗。有獸焉,其狀如虎而牛尾,其音如吠犬,其名曰彘,是食人。苕水出於其陰,北流注於具區。其中多鮆魚。

又東五百里,曰成山,四方而三壇,其上多金玉,其下多青雘。��水出焉,而南流注於虖勺,其中多黃金。

又東五百里,曰會稽之山,四方,其上多金玉,其下多砆石。勺水出焉,而南流注於湨。

又東五百里,曰夷山。無草木,多沙石,湨水出焉,而南流注於列塗。

又東五百里,曰仆勾之山,其上多金玉,其下多草木,無鳥獸,無水。又東五百里,曰鹹陰之山,無草木,無水。

又東四百里,曰洵山,其陽多金,其陰多玉。有獸焉,其狀如羊而無口,不可殺也,其名曰䍺。洵水出焉,而南流注於閼之澤,其中多芘蠃。

又東四百里,曰虖勺之山,其上多梓楠,其下多荊杞。滂水出焉,而東流注於海。

又東五百里,曰區吳之山,無草木,多沙石。鹿水出焉,而南流注於滂水。

又東五百里,曰鹿吳之山,上無草木,多金石。澤更之水出焉,而南流注於滂水。水有獸焉,名曰蠱雕,其狀如雕而有角,其音如嬰兒之音,是食人。

東五百里,曰漆吳之山,無草木,多博石,無玉。處於東海,望丘山,其光載出載入,是惟日次。

凡《南次二經》之首,自櫃山至於漆吳之山,凡十七山,七千二百里。其神狀皆龍身而鳥首。其祠:毛用一璧瘞,糈用稌。

《南次三經》之首,曰天下虞之山,其下多水,不可以上。

東五百里,曰禱過之山,其上多金玉,其下多犀、兕,多象。有鳥焉,其狀如鵁,而白首、三足、人面,其名曰瞿如,其鳴自號也。泿水出焉,而南流注於海。其中有虎蛟,其狀魚身而蛇尾,其音如鴛鴦,食者不腫,可以已痔。

又東五百里,曰丹穴之山,其上多金玉。丹水出焉,而南流注於渤海。有鳥焉,其狀如雞,五采而文,名曰鳳皇,首文曰德,翼文曰義,背文曰禮,膺文曰仁,腹文曰信。是鳥也,飲食自然,自歌自舞,見則天下安寧。

又東五百里,曰發爽之山,無草木,多水,多白猿。汎水出焉,而南流注於渤海。

又東四百里,至於旄山之尾,其南有穀,曰育遺,多怪鳥,凱風自是出。

又東四百里,至於非山之首,其上多金玉,無水,其下多蝮蟲。又東五百里,曰陽夾之山,無草木,多水。又東五百里,曰灌湘之山,上多木,無草;多怪鳥,無獸。

又東五百里,曰雞山,其上多金,其下多丹雘。黑水山焉,而南流注於海。其中有鱄魚,其狀如鮒而彘毛,其音如豚,見則天下大旱。

又東四百里,曰令丘之山,無草木,多火。其南有穀焉,曰中穀,條風自是出。有鳥焉,其狀如梟,人面四目而有耳,其名曰顒,其鳴自號也,見則天下大旱。

又東三百七十里,曰侖者之山,其上多金玉,其下多青雘。有木焉,其狀如穀而赤理其汗如漆,其味如飴,食者不饑,可以釋勞,其名曰白䓘,可以血玉。

又東五百八十里,曰禺稿之山,多怪獸,多大蛇。

又東五百八十里,曰南禺之山,其上多金玉,其下多水。有穴焉,水出輒入,夏乃出,冬則閉。佐水出焉,而東南流注於海,有鳳皇、鵷雛。

凡《南次三經》之首,自天虞之山以至南禺之山,凡一十四山,六千五百三十里。其神皆龍身而人面。其祠皆一白狗祈,糈用稌。

右南經之山誌,大小凡四十山,萬六千三百八十里。

山海經 (산해경) 第02 西山經

山海經(산해경)

第02 西山經

西山經華山之首,曰錢來之山,其上多松,其下多洗石。有獸焉,其狀如羊而馬尾,名曰羬羊,其脂可以已腊。

西四十五里,曰松果之山。濩水出焉,北流注於渭,其中多銅。有鳥焉,其名曰䳋渠,其狀如山雞,黑身赤足,可以已��。

又西六十里,曰太華之山,削成而四方,其高五千仞,其廣十里,鳥獸莫居。有蛇焉,名曰肥��,六足四翼,見則天下大旱。

又西八十里,曰小華之山,其木多荊杞,其獸多㸲牛,其陰多磬石,其陽多㻬琈之玉,鳥多赤鷩,可以禦火,其草有萆荔,狀如烏韭,而生於石上,赤緣木而生,食之已心痛。

又西八十里,曰符禺之山,其陽多銅,其陰多鐵。其上有木焉,名曰文莖,其實如棗,可以已聾。其草多條,其狀如葵,而赤華黃實,如嬰兒舌,食之使人不惑。符禺之水出焉,而北流注於渭。其獸多蔥聾,其狀如羊而赤鬛。其鳥多鴖,其狀如翠而赤喙,可以禦火。

又西六十里,曰石脆之山,其木多棕楠,其草多條,其狀如韭,而白華黑實,食之已疥。其陽多㻬琈之玉,其陰多銅。灌水出焉,而北流注於禺水。其中有流赭,以塗牛馬無病。

又西七十里,曰英山,其上多杻橿,其陰多鐵,其陽多赤金。禺水出焉,北流注於招水,其中多䰷魚,其狀如鱉,其音如羊。其陽多箭䉋,其獸多㸲牛羬羊。有鳥焉,其狀如鶉,黃身而赤喙,其名曰肥遺,食之已癘,可以殺蟲。

又西五十二里,曰竹山,其上多喬木,其陰多鐵。有草焉,其名曰黃雚,其狀如樗,其葉如麻,白華而赤實,其狀如赭,浴之已疥,又可以已胕。竹水出焉,北流注於渭,其陽多竹箭,多蒼玉。丹水出焉,東南流注於洛水,其中多水玉,多人魚。有獸焉,其狀如豚而白毛,大如笄而黑端,名曰豪彘。

又西百二十里曰浮山,多盼木,枳葉而無傷,木蟲居之。有草焉,名曰薰草,麻葉而方莖,赤華而黑實,臭如蘼蕪,佩之可以已癘。

又西七十里,曰羭次之山,漆水出焉,北流注於渭。其上多棫橿,其下多竹箭,其陰多赤銅,其陽多嬰垣之玉。有獸焉,其狀如禺而長臂,善投,其名曰囂。有鳥焉,其狀如梟,人面而一足,曰橐��,冬見夏蟄,服之不畏雷。

又西百五十里,曰時山,無草木。逐水出焉,北流注於渭,其中多水玉。

又西百七十里,曰南山,上多丹粟。丹水出焉,北流注於渭。獸多猛豹,鳥多尸鳩。

又西四百八里,曰大時之山,上多榖、柞,下多杻、橿,陰多銀,陽多白玉。涔水出焉,北流注於渭。清水出焉,南流注於漢水。

又西三百二十里,曰嶓冢之山,漢水出焉,而東南流注於沔;囂水出焉,北流注於湯水。其上多桃枝鉤端,獸多犀兕熊羆,鳥多白翰赤鷩。有草焉,其葉如蕙,其本如桔梗,黑華而不實,名曰蓇蓉。食之使人無子。

又西三百五十里,曰天帝之山,上多棕楠,下多菅蕙。有獸焉,其狀如狗,名曰溪邊,席其皮者不蠱。有鳥焉,其狀如鶉,黑文而赤翁,名曰櫟,食之已痔。有草焉,其狀如葵,共其臭如蘼蕪,名曰杜衡,可以走馬,食之已癭。

西南三百八十里,曰皋途之山,薔水出焉,西流注於諸資之水;涂水出焉,南流注於集獲之水。其陽多丹粟,其陰多銀、黃金,其上多桂木。有白石焉,其名曰礜,可以毒鼠。有草焉,其狀如槁茇,其葉如葵赤背,名曰無條,可以毒鼠。有獸焉,其狀如鹿而白尾,馬腳人手而四角,名曰��如。有鳥焉,其狀如鴟而人足,名曰數斯,食之已癭。

又西百八十里,曰黃山,無草木,多竹箭。盼水出焉,西流注於赤水,其中多玉。有獸焉,其狀如牛,而蒼黑大目,其狀曰��。有鳥焉,其狀如鴞,青羽赤喙,人舌能言,名曰鸚鵡。

又西二百里,曰翠山,其上多棕楠,其下多竹箭,其陽多黃金、玉,其陰多旄牛、麢麝;其鳥多鸓,其狀如鵲,赤黑而兩首四足,可以禦火。

又西二百五十里,曰騩山,是錞於西海,無草木,多玉。淒水出焉,西流注於海,其中多采石、黃金,多丹粟。

凡西經之首,自錢來之山至於騩山,凡十九山,二千九百五十七里。華山冢也,其祠之禮:太牢。俞山神也,祠之用燭,齋百日以百犧,瘞用百瑜,湯其酒百樽,嬰以百珪百璧。其餘十七山之屬,皆毛牷用一羊祠之。燭者百草之未灰,白席采等純之。

《西次二經》之首,曰鈐山,其上多銅,其下多玉,其木多杻、橿。

西二百里,曰泰冒之山,其陽多玉,其陰多鐵。浴水出焉,東流注於河,其中多藻玉,多白蛇。

又西一百七十里,曰數曆之山,其上多黃金,其下多銀,其木多杻橿,其鳥多鸚鵡。楚水出焉,而南流注於渭,其中多白珠。

又西北五十里高山,其上多銀,其下多青碧、雄黃,其木多棕,其草多竹。涇水出焉,而東流注於渭,其中多磬石、青碧。

西南三百里,曰女床之山,其陽多赤銅,其陰多石涅,其獸多虎豹犀兕。有鳥焉,其狀如翟而五采文,名曰鸞鳥,見則天下安寧。

又西二百里,曰龍首之山,其陽多黃金,其陽多鐵。苕水出焉,東南流注於涇水,其中多美玉。

又西二百里,曰鹿台之山,其上多白玉,其下多銀,其獸多㸲牛、羬羊、白豪。有鳥焉,其狀如雄雞而人面,名曰鳧徯,其鳴自叫也,見則有兵。

西南二百里,曰鳥危之山,其陽多磬石,其陰多檀楮,其中多女床。鳥危之水出焉,西流注於赤水,其中多丹粟。

又西四百里,曰小次之山,其上多白玉,其下多赤銅。有獸焉,其狀如猿,而白首赤足,名曰朱厭,見則大兵。

又西三百里,曰大次之山,其陽多堊,其陰多碧,其獸多㸲牛、麢羊。

又西四百里,曰薰吳之山,無草木,多金玉。

又西四百里,曰㕄陽之山,其木多㮨、柟、豫章,其獸多犀、兕、虎、犳、㸲牛。

又西二百五十里,曰眾獸之山,其上多㻬琈之玉,其下多檀楮,多黃金,其獸多犀兕。

又西五百里,曰皇人之山,其上多金玉,其下多青雄黃。皇水出焉,西流注於赤水,其中多丹粟。

又西三百里,曰中皇之山,其上多黃金,其下多蕙、棠。

又西三百五十里,曰西皇之山,其陽多黃金,其陰多鐵,其獸多麋、鹿、㸲牛。

又西三百裏五十里,曰萊山,其木多檀楮,其鳥多羅羅,是食人。

凡《西次二經》之首,自鈐山至於萊山,凡十七山,四千一百四十里。其十神者,皆人面而馬身。其七神皆人面而牛身,四足而一臂,操杖以行:是為飛獸之神;其祠之,毛用少牢,白菅為席。其十輩神者,其祠之,毛一雄雞,鈐而不糈;毛采。

《西次三經》之首,曰崇吾之山,在河之南,北望冢遂,南望䍃之澤,西望帝之搏獸之丘,東望䗡淵。有木焉,員葉而白柎,赤華而黑理,其實如枳,食之宜子孫。有獸焉,其狀如禺而文臂,豹虎而善投,名曰舉父。有鳥焉,其狀如鳧,而一翼一目,相得乃飛,名曰蠻蠻,見則天下大水。

西北三百里,曰長沙之山。泚水出焉,北流注於泑水,無草木,多青雄黃。

又西北三百七十里,曰不周之山。北望諸毗之山,臨彼嶽崇之山,東望泑澤,河水所潛也,其原渾渾泡泡。爰有嘉果,其實如桃,其葉如棗,黃華而赤柎,食之不勞。

又西北四百二十里,曰峚山,其上多丹木,員葉而赤莖,黃華而赤實,其味如飴,食之不饑。丹水出焉,西流注於稷澤,其中多白玉。是有玉膏,其原沸沸湯湯,黃帝是食是饗。是生玄玉。玉膏所出,以灌丹木,丹木五歲,五色乃清,五味乃馨。黃帝乃取峚山之玉榮,而投之鍾山之陽。瑾瑜之玉為良,堅粟精密,濁澤有而光。五色發作,以和柔剛。天地鬼神,是食是饗;君子服之,以禦為祥。自峚山至於鍾山,四百六十裏,其間盡澤也。是多奇鳥、怪獸、奇魚,皆異物焉。

又西北四百二十里,曰鍾山。其子曰鼓,其狀如人面而龍身,是與欽䲹殺葆江於昆侖之陽,帝乃戮之鍾山之東曰��崖。欽䲹化為大鶚,其狀如雕而黑文曰首,赤喙而虎爪,其音如晨鵠,見則有大兵;鼓亦化為鵕鳥,其狀如鴟,赤足而直喙,黃文而白首,其音如鵠,見即其邑大旱。

又西百八十里,曰泰器之山。觀水出焉,西流注於流沙。是多文鰩魚,狀如鯉魚,魚身而鳥翼,蒼文而白首,赤喙,常行西海,遊於東海,以夜飛。其音如鸞雞,其味酸甘,食之已狂,見則天下大穰。

又西三百二十里,曰槐江之山。丘時之水出焉,而北流注於泑水。其中多蠃母,其上金青雄黃,多藏琅玕、黃金、玉,其陽多丹粟。其陰有多采黃金銀。實惟帝之平圃,神英招司之,其狀馬身而人面,虎文而鳥翼,徇於四海,其音如榴。南望昆侖,其光熊熊,其氣魂魂。西望大澤,后稷所潛也;其中多玉,其陰多榣木之有若。北望諸毗,槐鬼離侖居之,鷹鸇之所宅也。東望恒山四成,有窮鬼居之,各在一搏。爰有淫水,其清洛洛。有天神焉,其狀如牛,而八足二首馬尾,其音如勃皇,見則其邑有兵。

西南四百里,曰昆侖之丘,是實惟帝之下都,神陸吾司之。其神狀虎身而九尾,人面而虎爪;是神也,司天之九部及帝之囿時。有獸焉,其狀如羊而四角,名曰土螻,是食人。有鳥焉,其狀如蜂,大如鴛鴦,名曰欽原,蠚鳥獸則死,蠚木則枯,有鳥焉,其名曰鶉鳥,是司帝之百服。有木焉,其狀如棠,黃華赤實,其味如李而無核,名曰沙棠,可以禦水,食之使人不溺。有草焉,名曰薲草,其狀如葵,其味如蔥,食之已勞。河水出焉,而南流注於無達。赤水出焉,而東南流注於氾天之水。洋水出焉,而西南流注於醜涂之水。黑水出焉,而西流於大杅。是多怪鳥獸。

又西三百七十里,曰樂遊之山。桃水出焉,西流注於稷澤,是多白玉,其中多䱻魚,其狀如蛇而四足,是食魚。

西水行四百里,曰流沙,二百裏至於蠃母之山,神長乘司之,是天之九德也。其神狀如人而犳尾。其上多玉,其下多青石而無水。

又西北三百五十里,曰玉山,是西王母所居也。西王母其狀如人,豹尾虎齒而善嘯,蓬髪戴勝,是司天之厲及五殘。有獸焉,其狀如犬而豹文,其角如牛,其名曰狡,其音如吠犬,見則其國大穰。有鳥焉,其狀如翟而赤,名曰勝遇,是食魚,其音如錄,見則其國大水。

又西四百八十里,曰軒轅之丘,無草木。洵水出焉,南流注於黑水,其中多丹粟,多青雄黃。

又西三百里,曰積石之山,其下有石門,河水冒以西流,是山也,萬物無不有焉。

又西二百里,曰長留之山,其神白帝少昊居之。其獸皆文尾,其鳥皆文首。是多文玉石。實惟員神磈氏之宮。是神也,主司反景。

又西二百八十里,曰章莪之山,無草木,多瑤碧。所為甚怪。有獸焉,其狀如赤豹,五尾一角,其音如擊石,其名如猙。有鳥焉,其狀如鶴,一足,赤文青質而白喙,名曰畢方,其鳴自叫也,見則其邑有訛火。

又西三百里,曰陰山。濁浴之水出焉,而南流注於蕃澤,其中多文貝。有獸焉,其狀如狸而白首,名曰天狗,其音如榴榴,可以禦凶。

又西二百里,曰符惕之山,其上多棕楠,下多金玉。神江疑居之。是山也,多怪雨,風雲之所出也。

又西二百二十里,曰三危之山,三青鳥居之。是山也,廣員百里。其上有獸焉,其狀如牛,白身四角,其豪如披蓑,其名曰����,是食人。有鳥焉,一首而三身,其狀如��,其名曰鴟。

又西一百九十里,曰騩山,其上多玉而無石。神耆童居之,其音常如鍾磬。其下多積蛇。

又西三百五十里,曰天山,多金玉,有青雄黃。英水出焉,而西南流注於湯穀。有神焉,其狀如黃囊,赤如丹火,六足四翼,渾敦無面目,是識歌舞,實為帝江也。

又西二百九十里,曰泑山,神蓐收居之。其上多嬰短之玉,其陽多瑾瑜之玉,其陰多青雄黃。是山也,西望日之所入,其氣員,神紅光之所司也。

西水行百里,至於翼望之山,無草木,多金玉。有獸焉,其狀如狸,一目而三尾,名曰讙,其音如��百聲,是可以禦凶,服之已癉。有鳥焉,其狀如烏,三首六尾而善笑,名曰鵸餘,服之使人不厭,又可以禦凶。

凡《西次三經》之首,崇吾之山至於翼望之山,凡二十三山,六千七百四十四里。其神狀皆羊身人面。其祠之禮,用一吉玉瘞,糈用稷米。

《西次四經》之首,曰陰山,上多穀,無石,其草多茆、蕃。陰水出焉,西流注於洛。

北五十里,曰勞山,多茈草。弱水出焉,而西流注於洛。

西五十里,曰罷父之山,洱水出焉,而西流注於洛,其中多茈、碧。

北七十里,曰申山,其上多榖、柞,其下多杻、橿,其陽多金玉。區水出焉,而江流注於河。

北百二百里,曰鳥山,其上多桑,其下多楮,其陰多鐵,其陽多玉。辱水出焉,而東流注於河。

又北二十里,曰上申之山,上無草木,而多硌石,下多榛楛,獸多白鹿。其鳥多當扈,其狀如雉,以其髯飛,食之不旬目。湯水出焉,東流注於河。

又北八十里,曰諸次之山,諸次之水出焉,而東流注於河。是山也,多木無草,鳥獸莫居,是多眾蛇。

又北百八十里,曰號山,其木多漆、棕,其草多藥、虈芎藭。多汵石。端水出焉,而東流注於河。

又北二百二十里,曰盂山,其陰多鐵,其陽多銅,其獸多白狼白虎,其鳥多白雉白翟。生水出焉,而東流注於河。

西二百五十里,曰白於之山,上多松柏,下多櫟檀,其獸多㸲牛、羬羊,其鳥多鴞。洛水出於其陽,而東流注於渭;夾水出於其陰,東流注於生水。

西北三百里,曰申首之山,無草木,冬夏有雪。申水出於其上,潛於其下,是多白玉。

又西五十五里,曰涇谷之山。涇水出焉,東南流注於渭,是多白金白玉。

又西百二十里,曰剛山,多柒木,多㻬琈之玉。剛水出焉,北流注於渭。是多神��,其狀人面獸身,一足一手,其音如欽。

又西二百里,至剛山之尾。洛水出焉,而北流注於河。其中多蠻蠻,其狀鼠身而鱉首,其音如吠犬。

又西三百五十里,曰英鞮之山,上多漆木,下多金玉,鳥獸盡白。涴水出焉,而北流注於陵羊之澤。是多冉遺之魚,魚身蛇首六足,其目如馬耳,食之使人不眯,可以禦凶。

又西三百里,曰中曲之山,其陽多玉,其陰多雄黃、白玉及金。有獸焉,其狀如馬而白身黑尾,一角,虎牙爪,音如鼓音,其名曰駮,是食虎豹,可以禦兵。有木焉,其狀如棠,而員葉赤實,實大如木瓜,名曰櫰木,食之多力。

又西二百六十里,曰邽山。其上有獸焉,其狀如牛,猬毛,名曰窮奇,音如獆狗,是食人。濛水出焉,南流注於洋水,其中多黃貝;蠃魚,魚身而鳥翼,音如鴛鴦,見則其邑大水。

又西二百二十里,曰鳥鼠同穴之山,其上多白虎、白玉。渭水出焉,而東流注於河。其中多鰠魚,其狀如鱣魚,動則其邑有大兵。濫水出於其西,西流注於漢水,多��魮之魚,其狀如覆銚,鳥首而魚翼魚尾,音如磬石之聲,是生珠玉。

西南三百六十里,曰崦嵫之山,其上多丹木,其葉如穀,其實大如瓜,赤符而黑理,食之已癉,可以禦火。其陽多龜,其陰多玉。苕水出焉,而西流注於海,其中多砥礪。有獸焉,其狀馬身而鳥翼,人面蛇尾,是好舉人,名曰孰湖。有鳥焉,其狀如鴞而人面,蜼身犬尾,其名自號也,見則其邑大旱。

凡《西次四經》自陰山以下,至於崦嵫之山,凡十九山,三千六百八十里。其神祠禮,皆用一白雞祈,糈以稻米,白菅為席。

右西經之山,凡七十七山,一萬七千五百一十七里。

山海經 (산해경, Shānhǎijīng)

山海經(산해경)

Alternative Names (異名):
山海經(산해경), 山海经(Shānhǎijīng)


중국 최고(最古)의 지리서(地理書). 고대의 지리·산물·신화·무술(巫術)·종교 등을 기록한 선진(先秦) 문헌.


작가는 하(夏)나라 우왕(禹王) 또는 백익(伯益)이라고도 한다. 실제는 BC 4세기 전국시대 후의 저작으로, 한대(漢代:BC 202∼AD 220) 초에는 이미 이 책이 있었던 듯하다. 원래는 23권이 있었으나 전한(前漢) 말기에 유흠(劉歆)이 교정(校定)한 18편만 오늘에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남산경(南山經)> 이하의 <오장산경(五藏山經)> 5편이 가장 오래 된 것이며, 한(漢)나라 초인 BC 2세기 이전에 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다음으로 <해외사경(海外四經)> 4편, <해내사경(海內四經)> 4편이 이어졌고, 한대(漢代)의 지명을 포함하였으며, <대황사경(大荒四經)> 4편, <해내경(海內經)> 1편은 가장 새롭다.

<오장산경>에서는 천하의 명산을 산맥을 따라 기술하고 산과 산의 거리 ·산물(그 산에 사는 怪獸와 鳥類)등을 적었으며 보옥(寶玉)·동철(銅鐵)·약초 등의 산물이 기술되어 있으므로 전국시대에서 진(秦)시대에 걸쳐 성행하였던 방사(方士)의 연단술(鍊丹術)과의 관련을 생각할 수 있다. <해외경(海外經)> 이하에서는 먼 나라의 주민과 그에 관한 신화 ·전설을 많이 실었다. 이 책은 고대 중국의 자연관을 아는 데 귀중하며 신화의 기재(記載)가 비교적 적은 중국 고전 중 예외적 존재로서도 중요시된다.


고사성어

山經

卷一 南山經(山海經第一)

狡猾(교활,jiǎohuá) 其名曰猾褢 |

卷二 西山經(山海經第二)

狡猾(교활,jiǎohuá) 其名曰狡 |

卷三 北山經(山海經第三)

精卫填海(jīngwèitiánhǎi) 정위조(精衛鳥)가 동해 바다를 메우다. 《산해경·북산경(山海經·北山經)》에서, 염제(炎帝)의 딸이 동해에 빠져 죽은 후 원한이 맺혀 그 영혼이 정위조로 변하여 서산의 나뭇가지와 돌을 물어다 동해 바다를 메우고자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함 |

海經

卷八 海外北經(山海經第八)

夸父追日(Kuāfùzhuīrì) 과보(夸父)가 태양을 좇다. 《산해경·해외북경(山海經·海外北經)》에 나오는 신화적 인물인 과보가 태양을 좇다가 목이 말라서 황하(黄河)와 위수(渭水)의 물을 다 마시고도 갈증이 풀리지 않아 북쪽으로 물을 찾으러 가는 도중에 목이 말라 죽었는데, 그가 남긴 지팡이가 드넓은 숲을 이루어 그 숲을 둥림(鄧林)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함 |

事必歸正 (사필귀정)

事必歸正(사필귀정)

모든 일은 반드시 정리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


경계

死灰復燃 (사회부연)

死灰復燃(사회부연)

死 죽을 사 | 灰 재 회 | 復 다시 부, 회복할 복, 돌아올 복 | 燃 탈 연, 불사를 연 |

다 탄 재가 다시 불이 붙었다는 뜻으로, ①세력(勢力)을 잃었던 사람이 다시 세력(勢力)을 잡음 ②혹은 곤경(困境)에 처해 있던 사람이 훌륭하게 됨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사그라진 재에 다시 불이 붙었다'라는 뜻으로, 잃었던 권세(權勢)를 다시 찾거나 어려움에 처했던 사람이 다시 훌륭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싸움에 패하였다가 다시 쳐들어오거나 어떤 일에 실패한 뒤 힘을 쌓아 그 일에 다시 착수한다는 의미의 '권토중래(捲土重來)'와 비슷한 말이다. 사마 천(司馬遷)이 저술한 《사기(史記)》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에서 유래한 성어(成語)이다.

중국 전한시대(前漢時代) 문제(文帝:재위 BC 180∼BC 157)의 둘째 아들인 양(梁)나라 효왕(孝王) 때의 관리 한안국(韓安國:자는 長孺)이라는 관리가 있었다. 그는 효왕과 한나라 효경제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여 관직에 올랐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훗날, 그는 법을 어겨서 감옥에 갇혔다. 당시의 옥사쟁이 전갑(田甲)이 한안국을 모욕함으로써 한안국은 "다 타버린 재에서도 다시 불길이 살아나지 않는가[死灰獨不復燃(然)乎]"라고 하며 잃어버린 권력과 세력을 다시 찾겠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전갑은 "다시 불이 타면 오줌을 싸서 꺼겠다[然卽溺之]"라고 하면서 한안국을 비웃었다. [연(然)은 연(燃)과 통용]

얼마 후, 양나라에 내사(內史) 자리가 비게 되었다. 한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한안국을 양나라의 내사로 임명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한안국은 곧 석방되어 다시 높은 관직에 올랐다. 이 소식을 들은 전갑은 놀라 달아나 버렸다. 한안국은 전갑이 관직에 복귀하지 않으면 일족을 멸하겠다라고 포고했다. 벌벌 떨며 자수해 온 전갑에게 한안국은 웃으면서 말했다.

"오줌을 누어 보아라. 너희 같은 무리들은 문책할 가치조차 없느니라."

세력을 잃은 사람이 다시 활동하거나 득세(得勢)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출전

사기(史記)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捲土重來(권토중래)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四通五達 (사통오달)

四通五達(사통오달)

사방으로 막힘 없이 통함.

史通 (사통) 劉知幾 (유지기)

史通(사통) 劉知幾(유지기)

당나라의 역사학자 유지기(劉知幾)가 저술한 책.


중국의 사학(史學) 이론과 사학비평의 고전으로 중국 사학사상 최초의 명저이다. 710년에 완성하였다. 내편(內編) 10권 36편, 외편(外編) 10권 13편, 합계 20권 49편으로 되어 있다. 저자는 소년시절부터 사서(史書)에 친숙하여 측천무후(則天武后)시대에서 현종(玄宗) 초에 걸쳐 오랫동안 사관(史官)으로 사사(仕事)하면서 당나라 왕조실록과 《성족계록(姓族系錄)》 등의 편찬에 종사하였다.

이 《사통》은 저자가 스스로의 체험과 사색을 결정(結晶)시킨 저서로 내편에서는 기전(紀傳) ·편년(編年)과 같은 사서의 체례(體例)를 체계적으로 논술하였으며, 외편에서는 역대 사서의 연혁과 그 득실을 비평하였다. 당시 권위를 가진 유교의 경전(經典)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비판을 가하였으며, 동시대의 관찬(官撰), 수사기구(修史機構)의 결함을 통론하는 등 저자의 독자적인 주장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또 문장은 변려문(騈儷文)으로 표현하였으며, 주석(註釋)에 청(淸)나라 포기룡(浦起龍)의 《사통통석(史通通釋)》이 있다.

三尺童子 (삼척동자)

三尺童子(삼척동자)

키가 석 자에 지나지 않는 어린애. 곧, 철모르는 어린애.

社稷之臣 (사직지신)

社稷之臣(사직지신)

사직(왕조)을 지탱할 만한 신하.

山重水復 (산중수복)

山重水復(산중수복)

山 뫼 산 | 重 무거울 중, 아이 동 | 水 물 수 | 復 회복할 복, 다시 부 |

갈 길은 먼데 길은 보이지 않고 난제가 가득한 형국

蛇足 (사족)

蛇足(사족)

뱀의 발. 뱀을 그리고 발을 그려 넣다. 있어도 쓸모없는 것 또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공연스레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畵蛇添足(화사첨족)이라고도 한다.


楚(초)나라의 令尹(영윤․재상) 昭陽(소양)은 魏(위)나라를 치고 나서 다시 齊(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겁이 난 제나라 왕이 때마침 秦(진)나라의 사신으로 와있던 陳軫(진진)에게 소양의 야심을 꺾어 달라고 부탁했다.

진진은 곧 소양을 찾아가 말했다. “초나라에서는 적군을 격파하고 敵將(적장)을 죽인 자에게 어떤 恩賞(은상)을 내립니까?”

“上柱國(상주국)이란 벼슬을 주고 작위는 上執珪(상집규)에 해당하지요.”

“상주국보다 더 높은 벼슬은 뭡니까.” “오직 영윤이 있을 뿐이오.” “그렇지요. 영윤은 둘일 수가 없지요. 영윤인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겠소. 어떤 사람이 하인들에게 큰 잔에 따른 술을 내렸답니다. 그것은 여럿이 마시기에는 모자라고 혼자서 마시기에는 넉넉했습니다. 하인들은 의논끝에 땅바닥에 뱀을 그려서 가장 먼저 그린 사람이 그 술을 다 마시기로 했지요. 그래서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윽고 한 사람이 ‘내가 뱀을 가장 먼저 그렸다’ 고 외치고는 술잔을 집어들더니 ‘나는 발도 그릴 수 있지’ 하면서 그린 뱀에 발을 덧붙여 그렸답니다.

그러자 그제사 뱀을 다 그린 자가 술잔을 뺏어 마시면서 ‘뱀에 무슨 발이 있어. 자네가 그린 발 달린 뱀은 뱀이 아니야’ 했다는 군요. 당신은 위나라를 치고 제나라를 두려워하게 만들어 이미 충분히 공을 세웠소. 영윤인 당신이 더이상 받을 官爵(관작)은 없소. 더 욕심을 내다가 목숨이라도 잃는다면 뱀의 발을 그렸다가 술잔을 빼앗긴 자와 무엇이 다르겠소.” 진진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던 소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군사를 거두었다.

事齊事楚 (사제사초)

事齊事楚(사제사초)

제(齊)나라도 섬기고 초(楚)나라도 섬긴다라는 뜻으로, 양쪽의 중간에서 난처한 경우를 이르는 말.


맹자(孟子) '양혜왕장구편(梁惠王章句篇)'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성어(成語)로 양쪽 사이에서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지도 못하여 난감한 상황을 말한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등(滕)나라는 면적이 매우 작았으나, 등나라 근처에 있는 제나라와 초나라는 큰 나라였다. 두 강대국 사이에서 위협을 받은 등나라는 제나라와 친밀하게 지낼 수도 없고 초나라와 가까이하기도 어려웠다. 제나라와 초나라 가운데 한쪽과 친하게 지내면 서로 트집을 잡았기 때문에 등나라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딱한 처지였다.

전국시대의 맹자가 등나라의 왕 문공(文公)을 찾아왔을 때, 문공은 맹자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제나라와 초나라의 사이에 위치한 작은 나라인 우리 등나라는 제나라와 초나라 중 어느 나라를 섬겨야 합니까?[滕 小國也 間於齊楚 事齊乎 事楚乎]."

출전
맹자(孟子):양혜왕장구편(梁惠王章句篇)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間於齊楚(간어제초) | 鯨戰蝦死(경전하사) | 事齊事楚(사제사초) |

山戰水戰 (산전수전)

山戰水戰(산전수전)

세상 일에 경험이 많음.

桑田碧海 (상전벽해)

桑田碧海(상전벽해)

뽕나무 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됨. 곧 세상사가 몰라볼 정도로 덧없이 바뀜을 뜻하는 말이다.


초당(初唐)의 시인 劉廷芝가 지은 시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 흰 머리를 슬퍼하는 노인을 대신하여)의 제4련(聯)은 이렇게 되어있다.

송백도 찍혀서 땔감됨을 이미 봤고(已見松栢) 뽕밭이 바뀌어서 바다됨을 또 들었네(更聞桑田變成海).

이 시로부터 상전벽해란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지만 '신선전(神仙傳)'이란 책에는 이런 기록도 전한다.

마고(麻姑)라는 선녀가 어느날 왕방평(王方平)이라는 신선에게 말했다. “지금껏 곁에서 모셔오면서 저는 동해가 세 번이나 뽕나무 밭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에 봉래산(蓬萊山)에 가보았는데 도중의 바다가 다시 얇아져서 이전의 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또 육지가 되려는 것일까요.”

왕방평이 대답했다. “그래서 성인들께서도 ‘바다의 녀석들이 먼지를 일으킨다’ 고 하지 않던가.”

또 ‘태평어람(太平御覽)’ 에는 이런 이야기도 적고 있다. 옛날 어느 곳에서 노인 셋이 만나 서로 자기 나이가 많음을 허풍스럽게 자랑하는데 두번째 노인의 주장이 이랬다. “나는 푸른 바다가 뽕나무 밭으로 바뀔 때마다 산(算)가지 한 개씩을 놓아 그것을 세어왔는데 이제 그 산가지가 열 채의 집에 가득 찰 정도로 쌓여 있다네.”

물론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지만 이처럼 푸른 바다가 뽕나무 밭으로도 변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창해상전(滄海桑田)이라고도 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滄海桑田(창해상전) | 與世推移(여세추이) | 與世浮沈(여세부침) | 桑海之變(상해지변) | 桑滄之變(상창지변) | 桑田碧海(상전벽해) | 陵谷之變(능곡지변) | 隔世之感(격세지감) | 滄桑之變(창상지변) |

四知 (사지)

四知(사지)

四 넉 사 | 知 알 지 |

두 사람만의 사이일지라도 하늘과 땅, 나와 상대편(相對便)이 다 알고 있다는 뜻으로, 비밀(秘密)은 언젠가는 반드시 탄로(綻露)나게 마련임을 이르는 말


後漢(후한)의 楊震(양진)은 그의 해박한 지식과 淸廉潔白(청렴결백)으로 關西公子(관서공자)라는 칭호를 들었다고 한다.

후한(後漢)의 양진(楊震)이 왕밀(王密)을 추천하여 왕밀이 창읍령(昌邑令)이 되었는데, 양진이 동래 태수(東萊太守)로 부임할 때 昌邑(창읍)에서 묵게 되었다. 그러자, 王密(왕밀)이 밤에 찾아와서 10금을 내밀며 뇌물로 바쳤다. 양진은 좋은 말로 타이르며 거절했다.

“나는 당신을 정직한 사람으로 믿어 왔는데, 당신은 나를 이렇게 대한단 말인가.”

왕밀은 말했다.

“지금은 밤중이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자 양진이 나무랐다.

“아무도 모르다니,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아는데[天知地知子知我知] 어째서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단 말인가.”

여기에서 사지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훗날 양진은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환관과 황제의 유모인 왕성의 청탁을 거절했다가 모함을 받게 되자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四知 란 天知地知子知我知를 가리키는 말이며, 세상에는 비밀이 있을 수 없음을 뜻한다. 四知 와 비슷한 서양식 표현으로는 영어의 'Walls have ears'라는 속담을 들 수 있다.


출전

십팔사략(十八史略) 양진전(楊震傳)


관련 속담

Walls have ears.


관련 한시

應過數粒食 得近四知金(응과수립식 득근사지금)
두어 술 밥이 내 분수에 응당 과분하나니, 어찌 넷이나 알고 있는 돈을 가까이 하리오.

- 두보(杜甫) 풍질주중복침서회정호남친우36운(風疾舟中伏枕書懷呈湖南親友三十六韻)

所寶惟金 楊震四知之說(소보유금 양진사지지설)
값진 것이 오직 금이로되 양진은 사지의 설을 말했네.

- 무명씨(無名氏) 기욕개동유현자절지부(嗜欲皆同惟賢者節之賦)

山紫水明 (산자수명)

山紫水明(산자수명)

산천의 경치가 아주 아름답다는 말

三人行必有我師 (삼인행필유아사, sānrénxíngbìyǒuwǒshī)

三人行必有我師(삼인행필유아사)

三人行必有我师(sānrénxíng, bìyǒuwǒshī)


三 석 삼 | 人 사람 인 | 行 갈 행 | 必 반드시 필 | 有 있을 유 | 我 나 아 | 師 스승 사 |


세 사람이 같이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뜻으로, 어디라도 자신이 본받을 만한 것은 있다는 말.


《논어(論語)》의 〈술이편(述而篇)〉에 나오는 말이다. "세 사람이 길을 같이 걸어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살펴 스스로 고쳐야 한다[三人行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삼인행필유아사는 좋은 것은 좇고 나쁜 것은 고치니 좋은 것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고, 나쁜 것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음의 글을 보더라도 공자 자신도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내가 나면서부터 저절로 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찾아 배워 알게 되었을 뿐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원문 해석도 반드시 어디를 갈 때만이 아니라 행동할 때도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뜻이며, 하찮은 것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근거 없는 말도 여러 사람이 하면 믿게 된다는 뜻의 삼인성시호(三人成市虎)와 대조를 이루는 고사성어이다.


관련 한자어

참조어

孔子穿珠(공자천주) | 不恥下問(불치하문) |


대조어

三人成市虎(삼인성시호) |


논어,논어:술이편

論語,論語:述而篇

三益之友 (삼익지우, sānyìzhīyǒu)

三益之友(삼익지우)

三益之友(sān yì zhī yǒu)

三 석 삼│ 益 더할 익, 넘칠 일│ 之 갈 지│ 友 벗 우


사귀어 이로운 세 부류(部類)의 벗으로서, 정직(正直)한 사람과 성실(誠實)한 사람과 견문(見聞)이 넓은 사람을 이름


유래

논어(論語)


Tag

관계│벗

事人如天 (사인여천)

事人如天(사인여천)

동학사상(東學思想)으로 사람 대하기를 하늘같이 떠받들라는 말.

三人成市虎 (삼인성시호, sānrénchéngshìhǔ)

三人成市虎(삼인성시호)

三人成市虎(sān rén chéng shì hǔ)

三 석 삼 | 人 사람 인 | 成 이룰 성 | 市 시장 시 | 虎 범 호 |


세 명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곧이 믿게 된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똑같이 하면 믿게 된다는 말.


《한비자(韓非子)》의 〈내저설(內儲說)〉과 《전국책(戰國策)》의 〈위책 혜왕(魏策 惠王)〉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전국시대 위(魏)나라 혜왕 때 일어난 일이다. 위나라는 외교 관례상 조(趙)나라에 인질로 태자와 그의 수행원을 보내야만 하였다. 태자의 수행원으로 중신 방총(龐蔥)이 선발되었다. 방총은 조나라의 도읍 한단으로 떠나기 전에 왕을 알현하고 왕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화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첫 번째는 한 사람이, 두 번째는 두 사람이 연이어 말하더라도 왕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렇지만 세 번째로 세 사람이 와서 똑같은 말을 하면 믿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방총이 “시장에는 분명히 호랑이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세 사람이 연이어 똑같은 말을 하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됩니다[夫市之無虎明矣 然而三人言而成虎].”라고 하였다. 방총은 자신이 조나라로 떠난 이후 자신을 비방하는 자가 한둘이 아닐 것이니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였다. 왕은 어떤 중상이든지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방총이 조나라로 떠나자마자 방총을 비방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몇 년 후 인질로 간 태자는 풀려났으나 왕의 의심을 받은 방총은 귀국하지 못한 신세가 되었다. 방총은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왕에게 간언한 것이다.

근거 없는 말도 여러 사람이 하면 믿게 된다는 뜻이며, 유언비어로 진실을 숨기는 것을 비유할 때도 종종 사용된다. 동의어로 시유호(市有虎), 시호삼전(市虎三傳), 삼인언이성호(三人言而成虎)가 있다. 비슷한 한자 숙어로 증삼살인(曾參殺人:공자의 제자인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인데,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하면 믿을 수밖에 없다는 뜻), 십작목무부전(十斫木無不顚: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는 뜻으로,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도 같은 거짓말을 여러 번 듣게 되면 곧이 듣게 된다는 말) 등이 있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

三人成市虎(삼인성시호) | 三人成虎(삼인성호) | 시유호(市有虎) | 시호삼전(市虎三傳) | 삼인언이성호(三人言而成虎) |

유의어

증삼살인(曾參殺人) | 십작목무부전(十斫木無不顚) |

대조어

三人行必有我師(삼인행필유아사) |

三人成虎 (삼인성호)

三人成虎(삼인성호)

三 석 삼 | 人 사람 인 | 成 이룰 성 | 虎 범 호 |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에는 위나라 혜왕(惠王)과 그의 대신 방총이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방총은 태자를 수행하고 조(趙)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없는 사이에 자신을 중상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위 혜왕에게 몇 마디 아뢰게 된다.

"만약 어떤이가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을 한다면 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위 혜왕은 "그걸 누가 믿겠는가?"라고 하였다. 방총이 다시 "다른 사람이 또 와서 같은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왕은 "그렇다면 반신반의하게 될 것이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방총이 "세 사람째 와서 똑같은 말을 한다면 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라고 하자 왕은 곧 "과인은 그것을 믿겠네."라고 하였다. 이에 방총은 "시장에 호랑이가 없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三人言而成虎]"라고 말하면서, 그는 자신을 중상모략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않기를 청하였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

三人成市虎(삼인성시호) | 三人成虎(삼인성호) | 시유호(市有虎) | 시호삼전(市虎三傳) | 삼인언이성호(三人言而成虎) |

유의어

증삼살인(曾參殺人) | 십작목무부전(十斫木無不顚) |

上屋抽梯 (상옥추제, shàngwūchōutī)

上屋抽梯(상옥추제)

上屋抽梯(shàng wū chōu tī)

上 위 상 | 屋 집 옥 | 抽 뽑을 추 | 梯 사다리 제 |


'지붕 위에 올라가게 한 뒤에 사다리를 치워 버린다'라는 말로, 적을 유인하여 사지에 빠뜨리거나 상대방을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주도권을 잡는다는 뜻이다. 삼십육계 가운데 28번째 계책이다.


三十六計(삼십육계) 倂戰計(병전계) 제28계 지붕 위로 유인한 뒤 사다리를 치우다. 상옥추제계(上屋抽梯計)라고도 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병법 가운데 하나인 삼십육계 가운데 하나이다. 곧, 적에게 작은 이득을 주어 아군의 깊숙한 곳으로 유인한 뒤에 원군의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차단함으로써 적을 사지에 빠뜨리는 계책이다.

원문의 풀이글은 다음과 같다.
"상대방을 작은 이익으로 유혹하여 나아가게 하고 퇴로를 차단하여 사지에 빠져들게 한다. 적이 해독을 입는 것은 빠져서는 안되는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다.[假之以便,唆之使前,斷其援應,陷之死地.遇毒,位不當也.]"

중국 고대의 병법서인 《손자(孫子)》의 〈구지(九地)〉편에도 "장수가 병사들을 이끌고 싸울 때에는 마치 높은 곳에 올라가게 한 뒤에 사다리를 치우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帥與之期, 如登高而去其梯)"고 하였다.

이 고사성어의 전거가 되는 이야기는 《삼국지》의 〈제갈량전〉 또는 三國志演義 '搏望坡(박망파)'에 실려 있다.

후한(後漢) 시대 말기에 유표(劉表)의 맏아들 유기(劉琦)는 계모의 미움을 받았다. 연의에서는 당시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 초려를 세번 방문해서 제갈량을 얻은 상태였다. 하지만 형주는 유표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음모들로 흉흉한 상태였다. 또한 유비 자신도 유표에게 '장자를 후계자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가 유표의 후처인 채부인에게 미움을 사, 채모에게 죽을뻔 한 일도 있었다.

유표는 자신이 죽은 후의 일을 부탁하고자 유비를 불렀다. 유표는 '자신이 죽고 나면 유비가 형주의 주인이 되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물러나왔다. 역관에서 쉬고 있는데 유기가 와서 유비에게 말했다.
"계모(채부인)가 용납하지 않아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옵니다. 바라옵건대 숙부께서는 불쌍히 여겨 구해주소서."

채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유종(유표의 작은아들)을 유표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유비와 유기를 제거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비는 유기에게 그것은 집안일이므로 자신이 어찌할 일이 아니라 했다. 유기가 다시 제갈량에게 물었으나 제갈량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유비가 유기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내일 내가 공명에게 답방토록 하겠으니 현질은 이렇게이렇게 하시게. 그러면 계책을 알려줄걸세."

다음날 유비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공명에게 유기를 답방케 했다. 차를 마시고 난 후 유기가 말했다.
"저는 계모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한 말씀하여 구해주시면 다행이겠사옵니다."
"저는 손님에 불과한데 어찌 남의 집안일에 대해 말할 수 있겠소이까? 혹 누설되기라도 한다면 그 해가 적지 않을 터이옵니다."

말을 마친 공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유기가 술이라도 하자며 공명을 만류했다. 술을 마시다가 또 유기가 말했다.
"계모가 나를 용납하지 않으니 제발 선생께서 한 말씀하여 나를 구해주소서."
"그것은 제가 감히 도모할 바가 아니옵니다."
말을 마치자 또 작별하고 가려고 하였다.

"말씀을 안해주시면 그만이지, 어찌 금방 가시려고만 하시옵니까?"
그래서 제갈량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유기가 말했다.
"저에게 古書(고서) 한 권이 있는데, 선생께서 한 번 보아주시오."
그래서 제갈량은 유기를 따라 작은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책은 어디에 있소?"
"계모가 용납하지 않아 저는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오. 선생은 서운하게도 한 말씀도 해주시지 않습니까?"
제갈량은 일어나 다락을 내려가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다리가 치워진 후였다.

유기가 말했다.
"선생은 누설될까 염려하여 제게 방책을 가르쳐주지 않으셨소이다. 지금 위로는 하늘도 듣지 못하고 아래로는 땅도 듣지 못하오이다. 선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저의 귀로 들어갈 뿐이니 가르쳐 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남의 친족은 이간질할 수 없다고 하였소. 내 어찌 공자를 위해 도모할 수 있겠소?"
"선생은 끝내 저에게 가르쳐주지 않겠소이까? 그렇다면 어차피 저는 죽은 목숨이니 선생 앞에서 죽겠소이다!"
유기는 즉시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찌르려 하였다. 제갈량이 말리며 말했다.
"좋은 방책이 있기는 하오."
"어서 가르쳐 주소서."
"공자는 신생과 중이의 일도 못 들으셨사옵니까? 신생은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죽었고, 중이는 밖에 있었기 때문에 무사했소. 지금 황조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강하는 지키는 사람이 없는데 공자는 어찌 강하로 가서 지키겠다고 하지 않으시옵니까? 그렇게 하면 화는 면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에 유기는 두 번 절하며 가르쳐 준 것을 고마워했다. 그리고는 사다리를 다시 가져오게 하여 제갈량을 내려가게 했다.

여기서 유래하여 상옥추제는 적을 유인하여 사지에 몰아넣거나 상대방을 곤경에 처하게 함으로써 주도권을 잡는 계책을 의미한다. 또한 배수진(背水陣)이나 파부침주(破釜沈舟)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퇴로를 끊음으로써 사력을 다해 싸우게 하는 일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때 제갈량이 유비에게 왔고, 박망파에서 初戰(초전)을 치룬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正史(정사)에 따르면 이때는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가기 전이고, 박망파 전투는 유비의 전략으로 승리한 것이었다. 박망파에서 승리한 이후에 유비가 제갈량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을 띄워주기 위해서 박망파에서 크게 승리한 것을 제갈량의 공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