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徹 (유철, BC 156~BC 87)

한무제 유철(漢武帝 劉徹, BC 156~BC 87)

異名: 刘彻(Liú Chè), 아명 체(彘), 자 통(通), 묘호 세종(世宗), 시호 효무황제(孝武皇帝)

국적: 중국 전한(前漢)

활동분야: 정치


중국 한(漢)의 제7대 황제로서 제후왕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였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쳐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한(漢)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한무제 유철(漢武帝 劉徹, 기원전 156년 ~ 기원전 87년)은 전한의 제7대 황제(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이다. 아명은 체(彘)이며 자는 통(通)이다.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효무황제(孝武皇帝)이다. 경제의 열번째 아들이며 효경왕후 왕지(孝景皇后 王娡)의 소생이다. 유학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다스렸으며 해외 원정을 펼쳐 흉노, 위만조선 등을 멸망시켜 당시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만들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고조선의 세번째 왕조인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韓半道)에 한사군 또는 한군현을 설치하기도 했다. 중국 역사상 진 시황제·강희제 등과 더불어 중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기원전 141년 16세의 나이로 부황 경제(景帝, BC 188~BC 141)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라 기원전 87년까지 55년의 재위 기간 동안 정치·군사·문화 등에서 큰 업적을 남겨 한(漢)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무제(武帝)의 업적은 크게 황제를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한 일과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한 일을 꼽을 수 있다.

무제는 즉위 후 이복 형제와 귀족 등 전대(前代)의 권신(權臣)들을 면직시키고 어질고 겸손한 선비를 등용하여 관리의 자질을 향상시켰다. 왕위 계승의 라이벌로 지목되던 중산정왕 유승을 계속 의심하였는데, 유승은 경제의 서자이자 무제의 이복형이었다. 유승은 이 의심을 피하고자 일부러 주색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여 한무제의 칼날을 피해갔다.

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 BC 170?~BC 120?)의 현량대책(賢良對策)을 받아들여 유학을 관학(官學)으로 하였으며,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에 태학(太學)을 설치했다. 유교 경전인 오경(五經)에 박사(博士)를 두고, 그 아래 각 10명 씩의 박사제자원(博士弟子員)을 두어 매년 시험을 거쳐 성적이 우수한 인물을 관리 후보인 낭중(郎中)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BC 134년에는 지방의 군국(郡國)에서 효행(孝行)이나 청렴(淸廉)한 덕목으로 이름이 높은 인물을 천거받아 낭중(郎中)으로 임명하는 효렴(孝廉)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문신 관료 중심의 유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무제는 경제의 정책을 계승해 제후왕(諸侯王)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좌관율(左官律)을 제정하여 제후왕국에 파견된 관리가 제후왕(諸侯王)과 사사로이 군신(君臣) 관계를 맺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부익율(附益律)을 제정하여 제후왕을 위해 별도의 조세(租稅)를 만들거나 임의로 세액(稅額)을 올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제후왕의 죄를 묵인하지 못하도록 하는 아당율(阿黨律)을 시행하였다. 이로써 중앙의 정책이 제후 왕국에서도 똑같이 시행되었고, 제후왕의 권리는 크게 위축되어 한(漢)의 군국제(郡國制)는 실질적으로 군현제(郡縣制)나 다름 없게 되었다. 나아가 무제는 BC 106년에 수도 주변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13주(州, 혹은 部)로 나누어 각 주(州)에 자사(刺史)를 파견하여 지방관료와 토착세력을 감찰(監察)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한 무제는 치세기간 중 실크로드 건설 개척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BC 139년 대월지국(大月氏國)으로 파견되었던 장건(張騫, ?~BC 114)이 BC 126년에 귀환한 뒤, 무제는 서방 교통로를 중시하여 황허(黃河) 서쪽의 하서(河西) 지역의 장악에 주력하여 최대 사업으로 치세에 서역과 통하는 실크로드 건설을 시작하였다.

건국 초기부터 한(漢)을 위협하던 흉노(匈奴)에 대해 강경 정책을 펼쳤다. BC 129년 흉노와 전쟁을 시작해 위청(衛靑, ?~BC 106), 곽거병(霍去病, BC 140~BC 117) 등의 활약으로 BC 119년에는 흉노를 고비사막 너머로 몰아냈다. 그는 인재 채용에 조건과 자격을 가리지 않아 서역 출신 노예와 흉노 출신 노예 중에서도 인재를 등용하였다. 흉노를 소탕하면서 곽거병이 사로잡은 흉노족 왕자 출신 노예 김일제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발탁하기도 했다.

흉노(匈奴)의 혼야왕(渾邪王)이 투항해 오자 하서(河西) 지역에 4개 군(郡)을 설치하여 서역(西域)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BC 119년 이리(伊犁) 지역의 오손(烏孫)과 동맹을 맺기 위해 다시 장건(張騫)을 사절로 파견했으며, 장건(張騫) 일행은 서역(西域) 제국의 사절을 대동하고 귀국하였다. BC 104년에는 이광리(李廣利)를 파미르고원(Pamir Plat.) 북서의 페르가나(Fergana)에 위치한 대완(大宛) 정벌에 파견하였다. 이러한 무제의 서역(西域) 진출은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 문화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무제는 남쪽과 동쪽으로도 영토 확장에 나섰다. 지금의 푸젠성[福建省]에 있던 민월(閩越)·동월(東越) 두 왕국을 병합(倂合)하고, BC 111년에는 번우(番禺, 지금의 廣東)에 도읍한 남월(南越)을 정복해 9개 군(郡)을 설치하였다. 또한 쓰촨성(四川省) 남부로 진출해 윈난(雲南)·구이저우(貴州) 등지에 분포하던 염방(冉駹)·수(巂) 작(筰) 야랑(夜郞)·전(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켜 그 곳에 6개의 군(郡)을 두었다.

이어 BC 109년에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진국(辰國)과의 직접교역을 반대하고 한나라에 조공바치기를 거부하는 조선의 정벌을 단행한다. 수군과 육군을 동원해 조선(朝鮮)을 침략하였으나 모두 패하고 만다. 그러나 조선은 내부의 내분으로 한군에 투항자가 발생하면서 멸망하게 되었다. BC 108년 왕검성(王儉城)을 함락시키고 낙랑(樂浪)·진번(眞番)·임둔(臨屯)·현도(玄郡)의 4개 군(郡)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무제의 적극적인 대외 정책으로 한(漢)은 넓은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막대한 군사비가 소모되어 재정의 어려움을 가져왔다. 더구나 무제는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궁전과 이궁을 짓고, 불로장생을 믿어 방사(方士)를 모아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하여 재정을 더욱 궁핍하게 했다. 무제(武帝)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상홍양(桑弘羊, BC 152 ?~BC 80) 등의 상인 출신 관료를 등용하여 새로운 재정 정책을 펼쳤다. BC 119년 소금과 철(鐵)과 황에 대해 전매제를 시행하여 경제적 재력 확충을 시도하였으나 훗날 이 정책은 전한의 재정적 부족과 몰락을 재촉하였다.

상인에게 배나 수레를 기준으로 조세를 부과하고, 재산을 허위로 신고하는 자를 엄벌하는 고민령(告緡令)을 제정했다. BC 113년에는 수형도위(水衡都尉)라는 관서(官署)를 설치해 각 군국(郡國)에서 화폐를 주조하는 것을 금지하고 독점적으로 화폐를 주조(鑄造)하도록 했다. BC 110년에는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실시했다. 균수법(均輸法)은 국가가 각 지방의 산물을 조세로 징수하여 다른 지방에 운송하여 판매하여 이익을 거두는 방법으로 쓰였고, 평준법(平準法)도 물가안정을 내세웠지만, 물건이 쌀 때 국가가 매입하였다가 가격이 오르면 내다팔아 그 차액을 국가의 수입으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BC 98년 술의 전매제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국가가 상인의 역할을 대행하여 재정 확대를 꾀한 것이었으므로 상인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리고 국민의 생활을 엄격히 통제하여 많은 불만을 낳았다.

토지분배 정책에서는 둔전제를 강력히 시행·추진하였고, 둔전제의 일부를 개정하여 정복한 북방지역에 주민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면서 북방으로 이주한 백성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를 대전법(代田法)이라 한다.

기원전 91년 무당 강충(江充)이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을 하자 무제는 여태자를 의심하였고다. 그러나 여태자가 강충을 살해하자 무제는 태자를 폐위시키고 체포를 명하였다. 체포에 불복한 여태자는 거병하여 관군과 대항하였으나 패하여 자결하였고, 여태자의 비인 사량제 역시 자결하였다. 뒤에 관군을 이끌던 손자 유진 내외 역시 자살하고 반군은 진압되었다. 이를 ‘무고(巫蠱)의 난(亂)’이라고 한다.

무제는 위황후를 폐출하고 사형에 처하였다. 무제는 여태자의 장인과 장모, 처족, 위황후 일족에게 연좌율을 적용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여태자의 손자이자 무제의 증손은 여태자의 처조모의 친정으로 빼돌려졌다.

국민의 불만과 정치적 불안이 이어지자 결국 무제는 BC 89년 대외전쟁을 중지하고 내정(內政)에만 치중하겠다는 교서(敎書)를 발표하였다.

여태후의 친정 일가들의 폐단을 보았던 한무제는 여태자 일가를 역모로 처단한 뒤, 창읍애왕마저 기원전 88년 죽자, 구익부인 조씨 소생 전한 소제을 후계자로 결정한다.

총애하는 후궁이었던 구익부인이 14개월 또는 24개월 만에 아들을 낳자 요임금의 어머니가 14개월 만에 출산한 것을 예로 들어가며 총애를 더하였지만 아들 불릉을 황태자로 세운 뒤 어린 아들 뒤에 젊은 어미가 있으면 외척의 발호와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구익부인을 역모로 몰아 살해하였다. 그뒤 임종이 가까워 오자 곽광과 김일제를 불러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을 유언하고 사망하였다.

BC 87년 무제가 사망한 뒤 소제(昭帝, BC 94~BC 74)가 8세에 즉위하였고 곽광(霍光, ?~BC 68)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 뒤 한(漢)은 외척(外戚)의 전횡(專橫)으로 정치적 불안정이 가속화되었고 급격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무제 유철 관련 한시

秋風辭(추풍사)

陸地行船 (육지행선)

陸地行船(육지행선)

뭍으로 배를 저으려 함. 되지도 않을 일을 억지로 하려 함.

劉知幾 (유지기, 661~721)

劉知幾(유지기, 661~721)

7세기 말 당나라 때의 역사학자. 고종·측천무후 등의 실록과《당서》등 수찬에 참여했다. 벼슬이 좌산기상시에 이르렀고, 거소현자에 봉해졌다. 저서《사통》은 중국 역사학사상 고전이다.


자 자현(子玄). 12세 때에 《좌전(左傳)》을 독파(讀破)한 수재로서, 17세 때까지 한 ·당(漢唐)의 정사(正史) ·실록을 거의 섭렵할 정도로 역사서에 능통하였다. 20세 때에 진사에 급제하고 수사국(修史局)에 들어가, 고종 ·측천무후 ·중종 ·예종 등의 실록과 《당서(唐書)》 《성족계록(姓族系錄)》 등 수찬(修撰)에 참여하였다. 그뒤 벼슬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에 이르고 거소현자(居巢縣子)에 봉해졌다. 맏아들 황(貺)의 무죄를 호소하다가, 현종의 노여움을 사 유형당한 뒤 죽었다. 저서인 《사통(史通)》은 중국 역사학사상 고전으로 귀중한 사료이다.


史通(사통)

有志竟成 (유지경성)

有志竟成(유지경성)

有志竟成(yǒuzhìjìngchéng)

有 있을 유 | 志 뜻 지, 기치 치 | 竟 마침내 경 | 成 이룰 성 |

뜻이 있어 마침내 이루다라는 뜻으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成功)한다는 것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중국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와 수하 장수 경엄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이라고도 한다. 경엄은 원래 선비였는데, 무관들이 말을 타고 칼을 쓰며 무용을 자랑하는 광경을 본 뒤로 자신도 장차 대장군이 되어 공을 세우고자 마음먹었다. 나중에 유수(劉秀:훗날의 광무제)가 병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그의 수하가 된 뒤로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경엄이 유수의 명을 받고 장보(張步)의 군대를 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장보의 군대는 전력이 상당히 두터워 공략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장보는 요처에 병사들을 배치하고 경엄을 맞아 싸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세에 몰렸다.

이에 장보가 직접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하였다. 어지럽게 싸우는 가운데 경엄은 적군의 화살을 다리에 맞아 피가 철철 흐르고 통증도 심하였다. 그러자 경엄의 부하가 잠시 퇴각한 뒤에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공격하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경엄은 "승리하여 술과 안주를 갖추어 주상을 영접하여야 마땅하거늘, 어찌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주상께 골칫거리를 남겨 드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장보를 공격하였다. 장보는 마침내 패하여 도망쳤다.

유수는 경엄이 부상을 당하고서도 분전하여 적을 물리친 것을 알고 매우 기뻐하였다. 유수는 경엄을 칭찬하여 "장군이 전에 남양에서 천하를 얻을 큰 계책을 건의할 때는 아득하여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뜻이 있는 자는 마침내 성공하는구려[將軍前在南陽, 建此大策, 常以爲落落難合, 有志者事竟成也]"라고 말하였다.

이 고사는 《후한서(後漢書)》의 '경엄전'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유지경성은 뜻을 올바르게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성취할 수 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경엄전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有志者事竟成(유지자사경성) |

允執其中 (윤집기중)

允執其中(윤집기중)

允 맏 윤, 진실로 윤, 마을 이름 연 | 執 잡을 집 | 其 그 기 | 中 가운데 중 |

중용을 취한다.


동양의 고전 중용(中傭)에 나오는 말로 "진실로 中庸의 道理를 지켜라" 는 뜻. 고대 중국의 위대한 요나라 임금이 그의 후계자 순임금에게 자리를 물려 주면서 나라 다스림의 뿌리를 경륜으로 일러 주었다. 나라의 중심축(軸)이 제왕의 자리임을 깨우쳐 주시면서 삐뚤어진 축으로 말미암아 나라 경영에 일어나는 막힘을 경고한 말.

출전
論語(논어) 요왈편(堯曰篇)

堯曰 咨爾舜 天之歷數 在爾躬 允執其中 四海困窮 天祿永終 舜亦以命禹

요왈 자이순 천지역수 재이궁 윤집기중 사해곤궁 천록영종 순역이명우

요임금이 말하였다. 그대 순이여! 하늘의 뜻이 너에게 있으니 진실로 中庸의 道理를 지켜라. 세상이 곤궁하다면 하늘의 복은 영원히 그칠 것이다. 순임금도 똑 같이 우에게 명하였다.

宥坐之器 (유좌지기, yòuzuòzhīqì)

宥坐之器(유좌지기)

宥坐之器(yòuzuòzhīqì)

宥 용서할 유 | 坐 앉을 좌 | 之 어조사 지 | 器 그릇 기 |


항상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는 뜻으로, 마음을 가지런히 하기 위한 스스로의 기준을 이르는 말.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일찍이 공자가 주(周)나라 환공(桓公)의 사당(祠堂)을 찾았다. 사당 안에는 의식 때 쓰는 그릇인 의기(儀器)가 놓여 있었다. 이것을 본 공자가, "저것은 무엇에 쓰는 그릇입니까?" 하고 물었다. 사당지기는, "항상 곁에 두고 보는 그릇입니다(宥坐之器)"라고 하였다. 공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나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그릇은 속이 비면 기울어지고 가득 채우면 엎질러지는데, 알맞게 물이 차면 바로 선다고 하더군요."

공자의 말대로, '유좌지기'는 비거나 차면 기울고 엎어지지만 적당하면 곧게 서 있을 수 있는 그릇이다. 선인들이 이것을 마음 깊이 간직했던 이유는, 자신의 마음을 알맞게 적정선으로 유지하여 너무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게 조절한다는 평상심의 뜻이 있었다.


공자가어, 孔子家語, 孔子家語:卷二

有終之美 (유종지미)

有終之美(유종지미)

시작한 일의 끝맺음이 좋음.

唯一無二 (유일무이)

唯一無二(유일무이)

오직 하나뿐이고 둘도 없음.

類類相從 (유유상종, lèilèixiāngcóng)

類類相從(유유상종)

类类相从(lèi lèi xiāng cóng)

類 무리 유 | 類 무리 유 | 相 서로 상 | 從 좇을 종 |


같은 종류의 사람들끼리 서로 왕래하여 사귄다는 뜻으로, 비슷한 부류의 인간 모임을 비유한 말.

Each follows its own kind. or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


유유상종의 근원은 알 수 없으나, 《주역(周易)》의 〈계사(繫辭)〉 상편에서 그 전거를 찾을 수 있다. 방이유취 물이군분 길흉생의(方以類聚 物以群分 吉凶生矣), 즉 "삼라만상은 그 성질이 유사한 것끼리 모이고, 만물은 무리를 지어 나뉘어 산다. 거기서 길흉이 생긴다" 하였다. 이후로 이 말이 연관되어 생성된 듯하다.

《전국책》의 〈제책(齊策)〉편에 이 말과 관련된 고사가 전한다.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은 순우곤(淳于髡)에게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인재를 찾아 등용하도록 하였다. 며칠 뒤에 순우곤이 일곱 명의 인재를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자 선왕이 이렇게 말하였다. "귀한 인재를 한번에 일곱 명씩이나 데려 오다니, 너무 많지 않은가?"

그러자 순우곤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같은 종의 새가 무리지어 살듯, 인재도 끼리끼리 모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인재를 모으는 것은 강에서 물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인재의 모임보다 배타적 카테고리라는 의미가 더 강하며, 비꼬는 말로 주로 쓰인다. '끼리끼리' 또는 '초록은 동색'과 통하는 경우가 많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物以類聚(물이유취) 끼리끼리 어울리다, 나쁜 사람들이 의기투합하다.

草綠同色(초록동색)


주역, 주역:계사, 전국책, 전국책:제책, 끼리끼리

周易, 周易:繫辭, 戰國策, 戰國策:齊策

陸游 (육유, 1125~1209)

陸游(육유)

중국 남송(南宋)의 시인(1125~1209). 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 남송 제일의 시인으로, 금(金)나라가 남침했을 때 이민족에 대해 끝까지 대항하여 싸울 것을 주장한 철저한 항전주의자였다. 65세 때에 향리에 은퇴하여 농촌에 묻혀 지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약 1만 수(首)에 달하는 시를 남겨 중국 시 사상 최다작의 시인으로 꼽히며, 당시풍(唐詩風)의 강렬한 서정을 부흥시킨 점이 최대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나라의 상황을 개탄한 시나 전원의 한적한 생활을 주제로 한 시가 많다. 글씨도 뛰어났다.

작품으로는 시집 검남시고(劍南詩稿)와 기행문 입촉기(入蜀記), 사서(史書) 남당서(南唐書) 등이 있다.


관련 한시

九月四日鷄未鳴起作(구월사일계미명기작) |


관련 한자어

大材小用(대재소용) | 靑天霹靂(청천벽력) |

流言蜚語 (유언비어)

流言蜚語(유언비어)

근거없는 좋지 못한 뜬 말.

rumor


유의어

浪說(낭설), 巷說(항설), 浮言流說(부언유설), 浮言浪說(부언낭설), 浮言(부언), 浮說(부설), 街談巷說(가담항설)

酉陽雜俎 (유양잡조) 段成式 (단성식) 卷16 廣動植之一

酉陽雜俎(유양잡조) 段成式(단성식)

卷15 卷16 廣動植之一 卷17


廣動植之一

(並序)

成式以天地間所化所產,突而旋成形者樊然矣,故《山海經》、《爾雅》所不能究。因拾前儒所著,有草木禽魚未列經史,已載事未悉者,或接諸耳目,簡編所無者,作《廣動植》,冀掊土培丘陵之學也。昔曹丕著論於火布,滕循獻疑於蝦須,蔡謨不識彭蜞,劉絳誤呼荔挺,至今可笑,學者豈容略乎?總敘。

羽嘉生飛龍,飛龍生鳳,鳳生鸞,鸞生庶鳥。應龍生建鳥,建鳥生麒麟,騏麟生庶獸。分鱗生蛟龍,蛟龍生鯤鯁,鯤鯁生建邪,建邪生庶魚。分潭生先龍,先龍生玄亢,玄亢生靈龜,靈龜生庶龜。日馮生玄陽閼,玄陽閼生鱗胎,鱗胎生幹木,幹木生庶木。招搖生程君(一曰若),程君生玄玉,玄玉生醴泉,醴泉生應黃,應黃生黃華,黃華生庶草。海間生屈龍,屈(一曰尾)龍生容華,容華生{艹栗},{艹栗}生藻,藻生浮草。甲蟲影伏,羽蟲體伏。食草者多力而愚,食肉者勇敢而悍。吞者八竅而卵生,咀嚼者九竅而胎生。無角者膏而先前,有角者脂而先後。食葉者有絲,食土者不息。食而不飲者蠶,飲而不食者蟬,不飲不食者蜉蝣。ㄇ(一曰蚓)屬卻行,蛇屬糸虧行,蜻辦屬往鳴,蜩屬旁鳴,發皇翼鳴,蚣婿股鳴,榮原胃鳴。蜩三十日而死。魚三月上官於孟津。鷓鴣向日飛。鯿與鯽魚,車螯與移角,並相似。鳳雄鳴節節,雌鳴足足,行鳴曰歸嬉,止鳴曰提衤失。麒麟牡鳴曰逝(一曰遊)聖,牝鳴曰歸和,春鳴曰扶助,夏鳴曰養綏。鱉無耳為守神。虎五指為ァ。魚滿三百六十年,則為蛟龍,引飛去水。魚二千斤為蛟。武陽小魚,一斤千頭。東海大魚,瞳子大如三鬥盎。桃文竹以四寸為一節,木瓜一尺一百二十一節。木蘭去皮不死。荊木心方。蛇有水、草、木、土四種。孔雀尾端一寸名珠毛。鶴左右腳裏第一指名兵爪。蜀郡無兔鴿。江南(一曰來)無狼馬。朱提以南無鳩鵲。鳥有四千五百種,獸有二千四百種。,楚鳩所生(騾不滋乳)。蔡中郎以反舌為蝦蟆,《淮南子》以蛩為蠛蠓,《詩義》以蟊為螻蛄,高誘以乾鵲為蟋蟀。兔吐子。鸕鶿吐雛。瓜瓠子曰犀,胡桃人曰蝦蟆。蝦蟆無腸。龜(一曰黿)腸屬於頭。科斗尾脫則足生。鳥未孕者為禽,鳥養子曰乳。蛇蟠向王,鵲巢背太歲,燕伏戊巳,虎奮沖破,乾鵲知來,猩猩知往。鸛影抱,蝦蟆聲抱。蟬化齊後,鳥生杜宇。椰子為越王頭,壺樓為杜宇項。一鷓鴣鳴曰「向南不北」,逃閭鳴「玄壺盧系項」(一曰頸)。豆以二七為族,粟累十二為寸。

人參處處生,蘭長生為瑞。有實曰果。又在木曰果。小麥忌戌,大麥忌子。薺、葶藶、菥莫為三葉,孟夏煞之。烏頭殼外有毛,石劫應節生花。木再花,夏有雹。李再花,秋大霜。木無故叢生,枝盡向下,又生及一尺至一丈自死,皆兇。邑中終歲無鳥,有寇。郡中忽無鳥者,日烏亡。雞無故自飛去,家有蠱。雞日中不下樹,妻妾奸謀。見蛇交,三年死。蛇冬見寢室,主兵急。人夜臥無故失髻者,鼠妖也。屋柱木無故生芝者,白為喪,赤為血,黑為賊,黃為喜。其形如人面者亡財,如牛馬者遠役,如龜蛇者田蠶耗。德及幽隱,則比目魚至(一曰生)。妾媵有制,則白燕來巢。山上有蔥,下有銀。山上有薤,下有金。山上有姜,下有銅錫。山有寶玉,木旁枝皆下垂。

葛稚川嘗就上林令魚泉,得朝臣所上草木名二十餘種。鄰人石瓊,就之求借,一皆遺棄。語曰:「買魚得與,不如食茹。」「寧去累世宅,不去{制魚}魚額。」「洛鯉伊魴,貴於牛羊。」「得合瀾屬,雖不足豪,亦足以高。」「檳榔扶留,可以忘憂。」「白馬甜榴,一實直牛。」「草木暉暉,蒼黃亂飛。」


羽篇

鳳,骨黑,雄雌夕旦鳴各異。黃帝使伶倫制十二寫之,其雄聲,其雌音。樂有鳳凰臺,此鳳腳,下物如白石者。鳳有時來儀,候其所止處,掘深三尺,有圓石如卵,正白,服之安心神。

孔雀,釋氏書言,孔雀因雷聲而孕。

鸛,江淮謂群鸛旋飛為鸛井。鶴亦好旋飛,必有風雨。人探巢取鸛子,六十裏早。能群飛薄霄激雨,雨為之散。

烏鳴地上無好聲。人臨行,烏鳴而前引,多喜,此舊占所不載。貞元四年,鄭、汴二州,群鳥飛入田李納緒境內,銜木為城,高至二三尺,方十餘裏。納緒惡而命焚之,信宿如舊,烏口皆流血。俗候烏飛翅重,天將雨。

鵲巢中必有梁。崔圓相公妻在家時,與姊妹戲於後園。見二鵲構巢,共銜一木,如筆管,長尺余,安巢中,眾悉不見。俗言見鵲上樑必貴。大歷八年,乾陵上仙觀天尊殿有雙鵲,銜柴及泥補葺隙,壞一十五處,宰臣上表賀。

貞元三年,中書省梧桐樹上有鵲,以泥為巢。焚其巢,可禳狐魅。

燕,凡狐白貉鼠之類,燕見之則毛脫。或言燕蟄於水(一曰月)底。舊說燕不入室,是井之虛也。取桐為男女各一,投井中,燕必來。胸班黑,聲大,名胡燕。其巢有容匹素練者。

雀,釋氏書言,雀沙生,因浴沙塵受卵。蜀吊烏山,至雉雀來吊最悲,百姓夜燃火伺取之。無嗉不食,似持(一曰特)悲者,以為義,則不殺。

鴿,大理丞鄭復禮言,波斯舶上多養鴿。鴿能飛行數千裏,輒放一隻至家,以為平安信。

鸚鵡,能飛。眾鳥趾前三後一,唯鸚鵡四趾齊分。凡鳥下瞼眨上,獨此鳥兩瞼俱動,如人目。玄宗時,有五色鸚鵡能言,上令左右試牽帝衣,鳥輒目叱吒。岐府文學能延京獻《鸚鵡篇》,以贊其事。張燕公有表賀,稱為時樂鳥。

杜鵑,始陽相催而鳴,先鳴者吐血死。嘗有人山行,見一群寂然,聊學其聲,即死。初鳴先聽其聲者,主離別。廁上聽其聲,不祥。厭之法,當為大聲應之。

雛鵒,舊言可使取火,效人言,勝鸚鵡。取其目睛,和人乳研,滴眼中,能見煙霄外物也。

鵝,濟南郡張公城西北有鵝浦。南燕世,有漁人居水側,常聽鵝之聲。眾中有鈴聲甚清亮,候之,見一鵝咽頸極長,羅得之,項上有銅鈴,綴以銀鎖,隱起「元鼎元年」字。

晉時,營道縣令何潛之,於縣界得鳥,大如白鷺,膝上髀下自然有銅貫之。

,舊言辟火災。巢於高樹,生子穴中,銜其母翅飛下養之。

玄(即鴟字),相傳鶻生三子,一為玄。肅宗張皇後專權,每進酒,常置玄腦酒。玄腦酒令人久醉健忘。

異鳥,天寶二年,平盧有紫蟲食禾苗。時東北有赤頭鳥,群飛食之。開元二十三年,榆關有予方蟲,延入平州界,亦有群雀食之。又開元中,具州蝗蟲食禾,有大白鳥數千,小白鳥數萬,盡食其蟲。

大歷八年,大鳥見武功,群鳥隨噪之。行營將張日芬射獲之,肉翅,狐首,四足,足有爪,廣四尺三寸,狀類蝙蝠。又州有白頭鳥,乳鴝鵒。

王母使者,齊郡函山有鳥,足青,觜赤,黃素翼,絳顙,名王母使者。昔漢武登此山,得玉函,長五寸。帝下山,玉函忽化為白鳥飛去。世傳山上有王母藥函,常令鳥守之。

吐綬鳥,魚復縣南山有鳥,大如鴝鵒,羽色(一曰毛)多黑,雜以黃白,頭頰似雉,有時吐物,長數寸,丹彩彪炳,形色類綬,因名為吐綬鳥。又食必蓄嗉,臆前大如鬥,慮觸其嗉,行每遠草木,故一名避株鳥。

鸛鵓,一名墮羿,形似鵲。人射之,則銜矢反射人。

蒙雕,喙大而勾,長一尺,赤黃色,受二升,南人以為酒杯也。

菘節鳥,四腳,尾似鼠,形如雀,終南深谷中有之。

老羞,秦中山谷間有鳥如梟,色青黃,肉翅,好食煙。見人輒驚落,隱首草穴中,常露身。其聲如嬰兒啼,名老羞。

柴蒿,京之近山有柴蒿,鳥頭,有冠如戴勝,大若野雞。

兜兜鳥,其聲自號,正月以後作聲,至五月節不知所在。其形似鴝鵒。

蝦蟆護,南山下有鳥名蝦蟆護,多在田中,頭有冠,色蒼,足赤,形似鷺。

夜行遊女,一曰天帝女,一曰釣星。夜飛晝隱如鬼神,衣毛為飛鳥,脫毛為婦人。無子,喜取人子,胸前有乳。凡人飴小兒不可露處,小兒衣亦不可露曬,毛落衣中,當為鳥祟。或以血點其衣為誌。或言產死者所化。

鬼車鳥,相傳此鳥昔有十首,能收人魂,一首為犬所噬。秦中天陰,有時有聲,聲如力車鳴,或言是水雞過也。

《白澤圖》謂之蒼虞,《帝嚳書》謂之逆,夫子、子夏所見。寶歷中,國子四門助教史迥語成式,嘗見裴瑜所註《爾雅》,言糜鴰是九頭鳥也。

細鳥,漢武時,畢勒國獻細鳥,以方尺玉為籠,數百頭,狀如蠅,聲如鴻鵠。此國以候日,因名候日蟲。集宮人衣,輒蒙愛幸。

嗽金鳥,出昆明國。形如雀,色黃,常翺翔於海上。魏明帝時,其國來獻此鳥。飴以真珠及龜腦,常吐金屑如粟,鑄之乃為器服。宮人爭以鳥所吐金為釵珥,謂之辟寒金,以鳥不畏寒也。宮人相嘲弄曰:「不服辟寒金,那得帝王心。不服辟寒鈿,那得帝王憐。」

背明鳥,吳時,越雋之南獻背明鳥。形如鶴,止不向明,巢必對北,其聲百變。

岢嵐鳥,出河西赤塢鎮。狀似烏而大,飛翔於陣上,多不利。

,狀如燕稍大,足短,趾似鼠。未嘗見下地,常止林中。偶失勢控地,不能自振。及舉,上淩青霄。出涼州。

鳥,武州縣合火山,山上有鳥。形類鳥,觜赤如丹。一名赤觜鳥,亦曰阿鳥。

訓胡,惡鳥也。鳴則後竅應之。

百勞,博勞也。相傳伯奇所化。取其所踏枝鞭小兒,能令速語。南人繼母有娠,乳兒病如虐,唯具毛治之。


毛篇

師子,釋氏書言,師子筋為弦,鼓之眾弦皆絕。西域有黑師子、捧師子。集賢校理張希復言,舊有師子尾拂,夏月,蠅蚋不敢集其上。

舊說蘇合香,師子糞也。

象,舊說象性久識,見其子皮必泣。一枚重千斤。

釋氏書言,象七九柱地六牙。牙生理,必因雷聲。

又言,龍象六十歲,骨方足。今荊地象色黑,兩牙,江豬也。鹹亨二年,周澄國遣使上表,言:「訶伽國有白象,首垂四牙,身運五足,象之所在,其土必豐。以水洗牙,飲之愈疾。請發兵迎取。」象膽,隨四時在四腿,春在前左,夏在前右,如龜無定體也。鼻端有爪,可拾針。肉有十二般,唯鼻是其本肉。陶貞白言,夏月合藥,宜置象牙於藥旁。南人言象妒,惡犬聲。獵者裹糧登高樹,構熊巢伺之。有群象過,則為犬聲,悉舉鼻吼叫,循守不復去。或經五六日,困倒其下,因潛殺之。耳後有穴,薄如鼓皮,一刺而斃。胸前小橫骨灰之酒,服令人能浮水出沒。食其肉,令人體重。古訓言,象孕五歲始生。

虎交而月暈。仙人鄭思遠常騎虎,故人許隱齒痛求治,鄭曰:「唯得虎須,及熱插齒間即愈。」鄭為拔數莖與之,因知虎須治齒也。虎殺人,能令屍起自解衣,方食之。虎威如乙字,長一寸,在脅兩旁皮內,尾端亦有之。佩之臨官佳,無官人所冒嫉。虎夜視,一目放光,一目看物。獵人候而射之,光墜入地成白石,主小兒驚。

馬,虜中護蘭馬,玉白馬也,亦曰玉面諳真馬,十三歲馬也。以十三歲已下,可以留種。舊種馬,戎馬八尺,田馬七尺,怒馬六尺。瓜州飼馬以草,沙州以茨萁,涼州以勃突渾,蜀以稗草。以蘿蔔根飼馬,馬肥。安比飼馬以沙蓬根針。大食國馬解人語。悉怛國、怛國出好馬。馬四歲,兩齒。至二十歲,齒盡平。體名有輸鼠、外鳧、烏頭、龍翅、虎口。豬槽飼馬,石灰泥槽,汗而系門,三事落駒。回毛在頸,白馬。黑馬鞍下腋下回毛,右脅白毛,左右後足白。馬四足黑,目下橫毛;黃馬白喙,旋毛在吻後,汗溝上通尾本,目赤睫亂及反睫;白馬黑目,目白卻視,並不可騎。夜眼名附蟬,屍肝名懸逢,亦曰雞舌、綠衤失。方言以地黃、甘草啖五十歲,生三駒。

牛,北人牛瘦者,多以蛇灌鼻口,則為獨肝。水牛有獨肝者殺人,逆賊李希烈食之而死。相牛法,岐胡有壽,膺匡欲廣,毫筋欲橫,啼後筋也。常有聲,有黃也。角冷有病。旋毛在珠泉無壽。睫亂觸人。銜烏角偏妨主。毛少骨多有力。溺射前,良半也。疏肋難養。三歲二齒,四歲四齒,五歲六齒。六歲以後,每一年接脊骨一節。

寧公所飯牛,陰虹屬頸。陰虹,雙筋自尾屬頸也。

北虜之先索國有泥師都,二妻生四子。一子化為鴻,遂委三子,謂曰:「爾可從古旃。」古旃,牛也。三子因隨牛,牛所糞,悉成肉酪。太原縣北有銀牛山,漢建武二十一年,有人騎白牛蹊人田,田父訶詰之,乃曰:「吾北海使,將看天子登封。」遂乘牛上山。田父尋至山上,唯見牛跡,遺糞皆為銀也。明年,世祖封禪。

鹿,虞部郎中陸紹弟,為盧氏縣尉。嘗觀獵人獵,忽遇鹿五六頭臨澗,見人不驚,毛班如畫。陸怪獵人不射,問之,獵者言:「此仙鹿也,射之不能傷,且復不利。」陸不信,強之。獵者不得已,一發矢,鹿帶箭而去。及返,射者墜崖,折左足。

《南康記》雲:「合浦有鹿,額上戴科藤一枝,四條直上,各一丈。」

犀之通天者必惡影,常飲濁水。當其溺時,人趁不復移足。角之理,形似百物。或雲犀角通者是其病,然其理有倒插、正插、腰鼓插。倒者,一半已下通。正者,一半已上通。腰鼓者,中斷不通。故波斯謂牙為白暗,犀為黑暗。成式門下醫人吳士臯,嘗職於南海郡,見舶主說本國取犀,先於山路多植木,如狙┉,雲犀前腳直,常倚木而息,木欄折則不能起。犀牛一名奴角,有鴆處必有犀也。犀,三毛一孔。劉孝標言,犀墮角埋之,以假角易之。

駝,性羞。《木蘭篇》「明駝千裏腳」,多誤作「鳴」字。駝臥,腹不帖地,屈足漏明,則行千裏。

天鐵熊,高宗時,加(一曰伽)毗葉國獻天鐵熊,擒白象、師子。

狼,大如狗,蒼色,作聲諸竅皆沸。{月坒}中筋大如鴨卵,有犯盜者,薰之,當令手攣縮。或言狼筋如織絡,小囊蟲所作也。狼糞煙直上,烽火用之。或言狼狽是兩物,狽前足絕短,每行常駕於狼腿上,狽失狼則不能動,故世言事乖者稱狼狽。臨濟郡西有狼冢。近世曾有人獨行於野,遇狼數十頭,其人窘急,遂登草積上。有兩狼乃入穴中,負出一老狼。老狼至,以口拔數莖草,群狼遂競拔之。積將崩,遇獵者救之而免。其人相率掘此冢,得狼百餘頭殺之,疑老狼即狽也。

貊澤,大如犬,其膏宣利,以手所承及於銅鐵瓦器中,貯悉透,以骨盛則不漏。

犭吉犭屈,僥外勃樊州重陸香所出也,如楓脂,犭吉犭屈好啖之。大者重十斤,狀似獺。其頭身四支了無毛,唯從鼻上竟脊至尾有青毛,廣一寸,長三四分。獵得者斫刺不傷,積薪焚之不死,乃大杖擊之,骨碎乃死。

黃{要目},一名唐已,人見之不祥,俗相傳食虎。

香貍,取其水道連囊,以酒澆乾之,其氣如真麝。

耶希,有鹿兩頭,食毒草,是其胎矢也。夷謂鹿為耶,矢為希。

鬼,似黃狗,圊有常處。若行遠不及其家(一雲處),則以草塞其尻。

犭犭國,蜀西南高山上有物如猴狀,長七尺,名犭犭國,一曰馬化。好竊人妻,多時形皆類之,盡姓楊,蜀中姓楊者往往ㄑ爪。

狒狒,飲其血可以見鬼。力負千斤,笑輒上吻掩額,狀如獼猴,作人言,如鳥聲,能知生死。血可染緋,發可為{髟皮}。舊說反踵,獵者言無膝,睡常倚物。宋建武高城郡進雌雄二頭。

在子者,鱉身人首,灸之以藿,則鳴曰在子。

大尾羊,康居出大尾羊,尾上旁廣,重十斤。又僧玄奘至西域,大雪山高嶺下有一村養羊,大如驢。賓國出野青羊,尾如翠色,土人食之。

柔弱勝强剛 (유약승강강)

柔弱勝强剛(유약승강강)

柔 부드러울 유 | 弱 약할 약 | 勝 이길 승 | 强 강할 강 | 剛 굳셀 강 |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출전]
노자 36장

酉陽雜俎 (유양잡조, Yǒuyángzázǔ) 段成式 (단성식)

酉陽雜俎(유양잡조) 段成式(단성식)

酉阳杂俎(Yǒuyángzázǔ)

구분: 수필집
저자: 단성식
시대: 중국 당(唐)


단성식(段成式:?~863)이 지은 중국 당나라 때의 수필집.


통행본(通行本)은 전집(前集) 20권, 속집(續集) 10권. 이상한 사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도서 ·의식(衣食) ·풍습 ·동식물 ·의학 ·종교 ·인사(人事) 등 온갖 사항에 관한 것을 탁월한 문장으로 흥미있게 기술하였다. 당나라 때의 사회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되며, 또한 고증적인 내용은 문학이나 역사연구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고사성어

打草驚蛇(타초경사) 풀을 두드려 뱀을 놀라게 한다는 뜻으로, 을(乙)을 징계하여 갑(甲)을 깨우침을 비유하거나 또는 변죽을 울려 적의 정체를 드러나게 하거나 공연히 문제를 일으켜 화를 자초함을 비유한 말. |


卷十六 廣動植之一


狼狽(낭패) 난감한 처지에 있다는 뜻. |

狼狽爲奸(낭패위간) 동물인 낭과 패가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것처럼 악한(惡漢)들이 모여서 나쁜 짓을 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꾀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 |


참고

신데렐라(Cinderella) 신데렐라 유형의 이야기는 유럽에서만도 500가지가 넘으며, 아시아에도 많이 퍼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문헌으로는 중국의 《유양잡조(酉陽雜俎)》로 9세기 때의 것이다. 한국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찾는다면 《콩쥐팥쥐》를 들 수 있다. |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이야기 (제주 설화) 중국 설화집인 『유양잡조(酉陽雜俎)』에 신라시대 이야기라고 실려 있는 「방이설화(旁謬說話)」와 비슷한 이야기의 구전 설화이다. |

南大川 月花亭 說話(남대천 월화정 설화, 강릉 설화) 월화정과 관련된 설화는 강릉김씨 시조의 부모와 관련된 이야기로 잉어에 의해 다시 만났다는 화소를 갖고 있다. 잉어가 편지를 전달하는 전설은 당나라 때 단성식(段成式)이 편찬한 『유양잡조(酉陽雜俎)』의 가섭처녀 이야기와 유사하고, 고악부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의 내용과 아주 비슷하다. |

柳暗花明 (유암화명)

柳暗花明(유암화명)

버들은 무성(茂盛)하여 그윽이 어둡고 꽃은 활짝 피어 밝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강촌(江村)의 봄 경치(景致)를 이르는 말. 화류항(花柳巷)


삼성경제연구소의 곽수종, 최명해 수석연구원은 처음에는 불신하지만 점차 실질적이고 정상적인 궤도로 진입할 것으로 생각하여 2011년 미국과 중국관계를 표현하는 한자성어로 선정 (2011.01.07)

有眼不识泰山 (유안불식태산, yǒuyǎnbùshíTàishān)

有眼不识泰山(유안불식태산,yǒuyǎnbùshíTàishān)

눈이 있어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다. 견식이 부족해 신분·지위·능력 등이 대단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다. 어른을 몰라보다.

唯我獨尊 (유아독존)

유아독존(唯我獨尊)

①[불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이 세상(世上)에 나보다 존귀(尊貴)한 사람은 없다는 말 ②자기(自己)만 잘 났다고 자부(自負)하는 독선적(獨善的)인 태도(態度)의 비유(比喩ㆍ譬喩)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

有粟不食 (유속불식)

유속불식(有粟不食)

곡식이 있어도 먹지 못한다는 뜻으로 아무리 귀중한 물건도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쓸모없음을 이르는 말.


전한(前漢)시대의 중요한 자료인 '염철론(鹽鐵論)' 에 나온 말이다. 《염철론》은 전한 선제(宣帝) 때 환관(桓寬)이 쓴 것으로 전한의 정치·사회·경제·외교·학문 등에 관해서 알 수 있으나 주요 내용은 한무제 때 실시한 소금과 철의 전매제도의 존속여부를 놓고 학자들 사이의 시비(是非) 논쟁을 기록한 것이다.

한무제(漢武帝)는 오랫동안 대외전쟁에 국력을 소모하여 재정이 궁핍해지자 소금과 철을 국가가 전매하는 균수평준법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백성의 원성이 높았다. 무제가 죽고 나자 이 제도를 계속 시행해서는 안된다는 쪽과 그렇지 않다는 편에 선 조정 대신들의 논쟁이 가열되었는데 이때 환관이라는 사람이 이 조정 회의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 바로 《염철론》으로 다음은 그 기록의 일부이다.

곡식이 아무리 창고에 가득차 있어도 이것을 찧어 밥을 해먹지 않는다면 배고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有粟不食 無益於饑). 바다에서 소금이 나지만 사람이 소금을 만드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소금이 되지 않는다. 산에서 쇠가 나지만 광석을 캐내어 쇠를 가려내고 제련하지 않는다면 쇠가 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풍부한 자원을 활용하려는 지혜와 노력이 보태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창고에 있는 조가 그대로 밥이 되어 입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아무리 가치있는 것이라도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소용에 닿지 못한다는 이 말은 현대적인 용어를 말하면 부가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염철론(鹽鐵論)

游仙窟 (유선굴) 張鷟 (장작)

游仙窟(유선굴) 張鷟(장작)

저자장작
장르소설
발표연도중국 당대(唐代)

중국 당대(唐代)의 소설.


1권. 장작(張鷟:660?∼740) 작. 작자가 풍부한 재능을 가지면서도 사회의 제약에 묶여서 발휘하지 못하는 분한 마음을, 당나라와 토번(吐蕃:티베트) 사이의 전운(戰雲)이 감도는 변경(邊境:甘肅省 寧縣)의 임지에서, 교양 있고 아름다운 여자 도사(道士)나 창기(娼妓)와의 사랑으로 연소시켰던 일을 바탕으로 하여 지은 것이다.

내용은 주인공 장생(張生)이 적석산(積石山)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하룻밤을 지내게 된 신선의 굴에서 최십랑(崔十娘)과 왕오수(王五嫂)의 환대를 받는다는 이야기이며, 유선굴이란 미인의 저택이라는 뜻이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산문에는 변문(騈文)을 쓰고, 대화에는 운문을 쓰고 있으며, 구어체의 어휘를 많이 구사한 화려한 글이다. 주고받는 시는 오언(五言)의 사구(四句)와 팔구, 칠언(七言)의 사구, 오언과 칠언의 장구(長句) 등 다채로우며, 변문에 많은 시를 섞어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는 형식은, 전기(傳奇) 형식에 변문의 영향이 가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有備無患 (유비무환)

有備無患(유비무환)

有备无患(yǒubèi wúhuàn)。

有 있을 유 | 備 갖출 비 | 無 없을 무 | 患 근심 환 |

사전에 준비가 갖추어져 있으면 뒷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說命(열명)'은 殷(은)나라 高宗(고종)이 傅說(부열)이란 어진 재상(宰相)을 얻게 되는 경위와 부열의 어진 정사(政事)에 대한 의견과 그 의견을 실천하게 하는 내용을 기록한 글인데, 이 '有備無患'이란 말은 부열이 고종 임금에게 한 말 가운데 들어 있다.

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행동(行動)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시기에 맞게 하십시오. 그 能(능)한 것을 자랑하게 되면 그 功(공)을 잃게 됩니다. 오직 모든 일은 다 그 갖춘 것이 있는 법이니 갖춘 것이 있어야만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處善以動 動有厥時 矜其能 喪厥功 惟事事 及其有備 有備無患.]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춘추시대 어느 해 鄭(정)나라가 宋(송)나라를 침략하자 송나라는 위급함을 晋(진)나라에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진의 국왕인 悼公(도공)은 즉각 魯(노) 齊(제) 曹(조) 등 10여개국에 이 사실을 통고하고 연합군을 편성했다. 진의 위강이 통솔한 연합군은 정의 도성을 에워싸고 송에서 철수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정나라는 재빨리 송 진 제 등 열두나라와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북쪽 나라들의 이런 결속에 위협을 느낀 남쪽의 楚(초)나라가 정나라를 침공했다. 열세를 깨달은 정나라는 초나라와도 盟約(맹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연합국측이 불만을 품고 정나라를 쳤다. 또다시 정나라가 화친을 요구하자 진(秦)나라는 마지 못해 이에 응함으로써 싸움은 끝났다.

도공은 감사의 표시로 정나라에서 보내온 보물과 미녀들을 위강에게 보냈다. 싸움에 지쳐있을 그를 달래주려고 마음을 썼던 것이다. 하지만 대쪽같은 위강이 그런 선물을 받을 턱이 없었다. 선물을 되돌려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평안히 지낼 때에도 위태로운 때를 생각해야 하고 위태로운 때를 생각한다면 언제나 준비가 있어야 하며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근심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居安思危 思危 則有備 有備則無患.]』

이 말을 전해 들은 도공은 새삼 위강의 남다른 식견에 머리를 끄덕이며 미녀들을 모두 정나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출전

서경(書經)의 열명편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居安思危(거안사위) | 曲突徙薪(곡돌사신) | 安居危思(안거위사) |

반의어·상대어

亡羊補牢(망양보뢰) | 死後淸心丸(사후청심환) | 死後藥方文 사후약방문)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有蓬之心 (유봉지심)

有蓬之心(유봉지심)

有 있을 유 | 蓬 쑥 봉 | 之 갈 지 | 心 마음 심 |

멋대로 흐트러지면서 자라는 쑥도 삼밭에 심어주면 지주를 세워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는 뜻으로 사람의 마음도 쑥처럼 환경에 좌우됨을 의미.

[출전]
莊子(장자) 소요유

流芳百世 (유방백세)

流芳百世(유방백세)

流芳百世(liúfāng bǎishì)。

流 흐를 유(류) | 芳 꽃다울 방 | 百 일백 백, 힘쓸 맥 | 世 인간 세, 대 세 |

향기(香氣)가 백대에 걸쳐 흐름이란 뜻으로, 꽃다운 이름이 후세(後世)에 길이 전(傳)함.


동진(東晉)의 장군 환온(桓溫)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환온(312~373)은 선성(宣城) 태수를 지낸 환이(桓彛)의 아들로, 자는 원자(元子)이다. 동진 명제(明帝)의 사위가 되었고, 여러 차례에 걸쳐 북방 이민족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동진의 실권자가 되었다.

환온은 오랫동안 권력을 장악하자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 싹텄다. 어느 날 그는 베개를 쓰다듬으며 "꽃다운 이름을 후세에 전할 수 없다면, 더러운 이름인들 만세에 남길 수 있겠는가[不能流芳後世, 不足復遺臭萬載邪]?"라고 탄식하였다.

환온은 왕돈(王敦)의 무덤가를 지나가면서 "본받을 만한 사람이야(可人)"라고 말한 일이 있다. 왕돈은 명문세가 출신으로 동진 원제(元帝:사마예) 때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니, 환온의 야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중에 환온은 제위에 있던 사마혁(司馬奕)을 폐위시켜 동해왕(東海王)으로 삼고, 사마욱(司馬昱)을 간문제(簡文帝)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감추지 않았으나 사안(謝安)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병사하고 말았다.

이 고사(故事)는 《진서(晉書)》의 환온전(桓溫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유방백세는 훌륭한 명성이나 공적이 후대에 길이 전하여지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한편, 더러운 이름이 후세에 오래도록 남아 있음을 비유하는 유취만년(遺臭萬年)이라는 고사성어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출전

晋書(진서) 桓溫傳(환온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流芳(유방) | 流芳千古(liúfāng qiāngǔ)。 |

반의어·상대어

遺臭萬年(유취만년)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有名無實 (유명무실)

有名無實(유명무실)

有名无实 [yǒumíngwúshí]

이름만 있고 실속은 없음.

only exist in name but not in reality; merely nominal; titular


반의어

名副其实, 名不虚传

類萬不同 (유만부동)

類萬不同(유만부동)

비슷한 것들은 수만 가지가 있어도 같지는 않다는 뜻으로 많은 것이 서로 같지 않음을 의미.

柔能制剛 (유능제강)

柔能制剛(유능제강)

柔 부드러울 유 | 能 능할 능, 견딜 내 | 制 절제할 제 | 剛 굳셀 강 |

유(柔)한 것이 강(强)한 것을 이긴다는 뜻으로, 약한 것을 보이고 적의 허술한 틈을 타 능히 강(强)한 것을 제압(制壓)함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Softness overcomes hardness. Soft words win hard hearts[turn away wrath]. One's heart softens before so much kindness. Soft and fair goes far.



‘부드러운 것이 능히 단단한 것을 이기고 약한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긴다[柔能制强 弱能勝强].’ 병법(兵法)을 적은 책인 《황석공소서》에 나와 있는 이 말은 이미 노자의 《도덕경》에도 수록되어 있다. 노자가 말한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는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드러나 있다.

“세상에 부드럽고 약하기로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 더구나 견고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능히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중략) 약한 것은 강한 것에 이기고, 부드러운 것은 굳센 것을 이긴다는 것을 천하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지만 능히 이를 행하지는 못한다. 사람도 태어날 때에는 부드럽고 약하나 그 죽음에 이르러서는 굳고 강해진다. 풀과 나무도 생겨날 때에는 부드럽고 연하지만 그 죽음에 이르러서는 마르고 굳어진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또한 군대가 강하면 멸망하고 나무는 강하면 꺾인다.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위치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자리잡는다.”

이러한 유능제강을 다르게 표현한 책으로 병법서인 《육도삼략(六韜三略)》이 있다. “부드러움은 능히 굳셈을 제어하고, 약한 것은 능히 강함을 제어한다. 부드러움은 덕이고 굳셈은 도둑이다. 약함은 사람을 돕는 것이고 강함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다.”

출전

삼략(三略), 유능승강(柔能勝剛), 도덕경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柔能勝剛(유능승강) | 柔能制剛(유능제강) |

有口無言 (유구무언)

有口無言(유구무언)

입은 있으나 말이 없다는 뜻으로, 변명할 말이 없거나 변명하지 못함을 이름.


유의어

훼장삼척(喙長三尺) 주둥이가 석 자나 길어도 변명할 수 없다는 뜻으로, 허물이 드러나서 숨겨 감출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