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漢書(후한서) 范曄(범엽)
卷67 卷68 李杜列傳(이두열전) 卷69
1 李杜列傳: 李固字子堅,漢中南鄭人,司徒郃之子也。郃在數術傳。固貌狀有奇表,鼎角匿犀,足履龜文。少好學,常步行尋師,不遠千里。遂究覽墳籍,結交英賢。四方有志之士,多慕其風而來學。京師咸歎曰:“是復為李公矣。”司隸、益州並命郡舉孝廉,辟司空掾,皆不就。
2 李杜列傳: 陽嘉二年,有地動、山崩、火災之異,公卿舉固對策,詔又特問當世之敝,為政所宜。
3 李杜列傳: 臣聞王者父天母地,寶有山川。王道得則陰陽和穆,政化乖則崩震為災。斯皆關之天心,效於成事者也。夫化以職成,官由能理。古之進者,有德有命;今之進者,唯財與力。伏聞詔書務求寬博,疾惡嚴暴。而今長吏多殺伐致聲名者,必加遷賞;其存寬和無黨援者,輒見斥逐。是以淳厚之風不宣,彫薄之俗未革。雖繁刑重禁,何能有益?前孝安皇帝變亂舊典,封爵阿母,因造妖孽,使樊豐之徒乘權放恣,侵奪主威,改亂嫡嗣,至令聖躬狼狽,親遇其艱。既拔自困殆,龍興即位,天下喁喁,屬望風政。積敝之後,易致中興,誠當沛然思惟善道;而論者猶云,方今之事,復同於前。臣伏從山草,痛心傷臆。實以漢興以來,三百餘年,賢聖相繼,十有八主。豈無阿乳之恩?豈忘貴爵之寵?然上畏天威,俯案經典,知義不可,故不封也。今宋阿母雖有大功勤謹之德,但加賞賜,足以酬其勞苦;至於裂土開國,實乖舊典。聞阿母體性謙虛,必有遜讓,陛下宜許其辭國之高,使成萬安之福。
4 李杜列傳: 夫妃后之家所以少完全者,豈天性當然?但以爵位尊顯,專總權柄,天道惡盈,不知自損,故至顛仆。先帝寵遇閻氏,位號太疾,故其受禍,曾不旋時。老子曰:“其進銳,其退速也。”今梁氏戚為椒房,禮所不臣,尊以高爵,尚可然也。而子弟群從,榮顯兼加,永平、建初故事,殆不如此。宜令步兵校尉冀及諸侍中還居黃門之官,使權去外戚,政歸國家,豈不休乎!
5 李杜列傳: 又詔書所以禁侍中尚書中臣子弟不得為吏察
6 李杜列傳: 孝廉者,以其秉威權,容請託故也。而中常侍日月之側,聲埶振天下,子弟祿仕,曾無限極。雖外託謙默,不干州郡,而諂偽之徒,望風進舉。今可為設常禁,同之中臣。
7 李杜列傳: 昔館陶公主為子求郎,明帝不許,賜錢千萬。所以輕厚賜,重薄位者,為官人失才,害及百姓也。竊聞長水司馬武宣、開陽城門候羊迪等,無它功德,初拜便真。此雖小失,而漸壞舊章。先聖法度,所宜堅守,政教一跌,百年不復。《詩》云:“上帝板板,下民卒癉。”刺周王變祖法度,故使下民將盡病也。
8 李杜列傳: 今陛下之有尚書,猶天之有北斗也。斗為天喉舌,尚書亦為陛下喉舌。斗斟酌元氣,運平四時。尚書出納王命,賦政四海,權尊埶重,責之所歸。若不平心,災眚必至。誠宜審擇其人,以毗聖政。今與陛下共理天下者,外則公卿尚書,內則常侍黃門,譬猶一門之內,一家之事,安則共其福慶,危則通其禍敗。刺史、二千石,外統職事,內受法則。夫表曲者景必邪,源清者流必絜,猶叩樹本,百枝皆動也。周頌曰:“薄言振之,莫不震疊。”此言動之於內,而應於外者也。猶此言之,本朝號令,豈可蹉跌?閒隙一開,則邪人動心;利競暫啟,則仁義道塞。刑罰不能復禁,化導以之寑壞。此天下之紀綱,當今之急務。陛下宜開石室,陳圖書,招會群儒,引問失得,指擿變象,以求天意。其言有中理,即時施行,顯拔其人,以表能者。則聖聽日有所聞,忠臣盡其所知。又宜罷退宦官,去其權重,裁置常侍二人,方直有德者,省事左右;小黃門五人,才智閑雅者,給事殿中。如此,則論者厭塞,升平可致也。臣所以敢陳愚瞽,冒昧自聞者,儻或皇天欲令微臣覺悟陛下。陛下宜熟察臣言,憐赦臣死。
9 李杜列傳: 順帝覽其對,多所納用,即時出阿母還弟舍,諸常侍悉叩頭謝罪,朝廷肅然。以固為議郎。而阿母宦者疾固言直,因詐飛章以陷其罪,事從中下。大司農黃尚等請之於大將軍梁商,又僕射黃瓊救明固事,久乃得拜議郎。
10 李杜列傳: 出為廣漢雒令,至白水關,解印綬,還漢中,杜門不交人事。歲中,梁商請為從事中郎。商以后父輔政,而柔和自守,不能有所整裁,災異數見,下權日重。固欲令商先正風化,退辭高滿,乃奏記曰:“春秋褒儀父以開義路,貶無駭以閉利門。夫義路閉則利門開,利門開則義路閉也。前孝安皇帝內任伯榮、樊豐之屬,外委周廣、謝惲之徒,開門受賂,署用非次,天下紛然,怨聲滿道。朝廷初立,頗存清靜,未能數年,稍復墮損。左右黨進者,日有遷拜,守死善道者,滯涸窮路,而未有改敝立德之方。又即位以來,十有餘年,聖嗣未立,群下繼望。可令中宮博簡嬪媵,兼採微賤宜子之人,進御至尊,順助天意。若有皇子,母自乳養,無委保妾醫巫,以致飛燕之禍。明將軍望尊位顯,當以天下為憂,崇尚謙省,垂則萬方。而新營祠堂,費功億計,非以昭明令德,崇示清儉。自數年以來,災怪屢見,比無雨潤,而沈陰鬱泱。宮省之內,容有陰謀。孔子曰:‘智者見變思刑,愚者睹怪諱名。’天道無親,可為祗畏。加近者月食既於端門之側。月者,大臣之體也。夫窮高則危,大滿則溢,月盈則缺,日中則移。凡此四者,自然之數也。天地之心,福謙忌盛,是以賢達功遂身退,全名養壽,無有怵迫之憂。誠令王綱一整,道行忠立,明公踵伯成之高,全不朽之譽,豈與此外戚凡輩耽榮好位者同日而論哉!固狂夫下愚,不達大體,竊感古人一飯之報,況受顧遇而容不盡乎!”商不能用。
11 李杜列傳: 永和中,荊州盜賊起,彌年不定,乃以固為荊州刺史。固到,遣吏勞問境內,赦寇盜前釁,與之更始。於是賊帥夏密等斂其魁黨六百餘人,自縛歸首。固皆原之,遣還,使自相招集,開示威法。半歲閒,餘類悉降,州內清平。
12 李杜列傳: 上奏南陽太守高賜等臧穢。賜等懼罪,遂共重賂大將軍梁冀,冀為千里移檄,而固持之愈急。冀遂令徙固為太山太守。時太山盜賊屯聚歷年,郡兵常千人,追討不能制。固到,悉罷遣歸農,但選留任戰者百餘人,以恩信招誘之。未滿歲,賊皆弭散。
13 李杜列傳: 遷將作大匠。上疏陳事曰:“臣聞氣之清者為神,人之清者為賢。養身者以練神為寶,安國者以積賢為道。昔秦欲謀楚,王孫圉設壇西門,陳列名臣,秦使戄然,遂為寑兵。魏文侯師卜子夏,友田子方,軾段干木,故群俊競至,名過齊桓,秦人不敢闚兵於西河,斯蓋積賢人之符也。陛下撥亂龍飛,初登大位,聘南陽樊英、江夏黃瓊、廣漢楊厚、會稽賀純,策書嗟歎,待以大夫之位。是以巖穴幽人,智術之士,彈冠振衣,樂欲為用,四海欣然,歸服聖德。厚等在職,雖無奇卓,然夕惕孳孳,志在憂國。臣前在荊州,聞厚、純等以病免歸,誠以悵然,為時惜之。一日朝會,見諸侍中並皆年少,無一宿儒大人可顧問者,誠可歎息。宜徵還厚等,以副群望。瓊久處議郎,已且十年,眾人皆怪始隆崇,今更滯也。光祿大夫周舉,才謨高正,宜在常伯,訪以言議。侍中杜喬,學深行直,當世良臣,久託疾病,可敕令起。”又薦陳留楊倫、河南尹存、東平王惲、陳國何臨、清河房植等。是日有詔徵用倫、厚等,而遷瓊、舉,以固為大司農。
14 李杜列傳: 先是周舉等八使案察天下,多所劾奏,其中並是宦者親屬,輒為請乞,詔遂令勿考。又舊任三府選令史,光祿試尚書郎,時皆特拜,不復選試。固乃與廷尉吳雄上疏,以為八使所糾,宜急誅罰,選舉署置,可歸有司。帝感其言,乃更下免八使所舉刺史、二千石,自是稀復特拜,切責三公,明加考察,朝廷稱善。乃復與光祿勳劉宣上言:“自頃選舉牧守,多非其人,至行無道,侵害百姓。又宜止槃遊,專心庶政。”帝納其言,於是下詔諸州劾奏守令以下,政有乖枉,遇人無惠者,免所居官;其姦穢重罪,收付詔獄。
15 李杜列傳: 及沖帝即位,以固為太尉,與梁冀參錄尚書事。明年帝崩,梁太后以楊、徐盜賊盛強,恐驚擾致亂,使中常侍詔固等,欲須所徵諸王侯到乃發喪。固對曰:“帝雖幼少,猶天下之父。今日崩亡,人神感動,豈有臣子反共掩匿乎?昔秦皇亡於沙丘,胡亥、趙高隱而不發,卒害扶蘇,以至亡國。近北鄉侯薨,閻后兄弟及江京等亦共掩祕,遂有孫程手刃之事。此天下大忌,不可之甚者也。”太后從之,即暮發喪。
16 李杜列傳: 固以清河王蒜年長有德,欲立之,謂梁冀曰:“今當立帝,宜擇長年高明有德,任親政事者,願將軍審詳大計,察周、霍之立文、宣,戒鄧、閻之利幼弱。”冀不從,乃立樂安王子纘,年八歲,是為質帝。時沖帝將北卜山陵,固乃議曰:“今處處寇賊,軍興用費加倍,新創憲陵,賦發非一。帝尚幼小,可起陵於憲陵塋內,依康陵制度,其於役費三分減一。”乃從固議。時太后以比遭不造,委任宰輔,固所匡正,每輒從用,其黃門宦者一皆斥遣,天下咸望遂平,而梁冀猜專,每相忌疾。
17 李杜列傳: 初,順帝時諸所除官,多不以次,及固在事,奏免百餘人。此等既怨,又希望冀旨,遂共作飛章虛誣固罪曰:“臣聞君不稽古,無以承天;臣不述舊,無以奉君。昔堯殂之後,舜仰慕三年,坐則見堯於牆,食則睹堯於羹。斯所謂聿追來孝,不失臣子之節者。太尉李固,因公假私,依正行邪,離閒近戚,自隆支黨。至於表舉薦達,例皆門徒;及所辟召,靡非先舊。或富室財賂,或子婿婚屬,其列在官牒者凡四十九人。又廣選賈豎,以補令史;募求好馬,臨吓呈試。出入踰侈,輜軿曜日。大行在殯,路人掩涕,固獨胡粉飾貌,搔頭弄姿,槃旋偃仰,從容冶步,曾無慘怛傷悴之心。山陵未成,違矯舊政,善則稱己,過則歸君,斥逐近臣,不得侍送,作威作福,莫固之甚。臣聞台輔之位,實和陰陽,琁機不平,寇賊姦軌,則責在太尉。固受任之後,東南跋扈,兩州數郡,千里蕭條,兆人傷損,大化陵遲,而詆疵先主,苟肆狂狷。存無廷爭之忠,沒有誹謗之說。夫子罪莫大於累父,臣惡莫深於毀君。固之過釁,事合誅辟。”事奏,冀以白太后,使下其事。太后不聽,得免。
18 李杜列傳: 冀忌帝聰慧,恐為後患,遂令左右進鴆。帝苦煩甚,使促召固。固入,前問:“陛下得患所由?”帝尚能言,曰:“食煮餅,今腹中悶,得水尚可活。”時冀亦在側,曰:“恐吐,不可飲水。”語未絕而崩。固伏尸號哭,推舉侍醫。冀慮其事泄,大惡之。
19 李杜列傳: 因議立嗣,固引司徒胡廣、司空趙戒,先與冀書曰:“天下不幸,仍遭大憂。皇太后聖德當朝,攝統萬機,明將軍體履忠孝,憂存社稷,而頻年之閒,國祚三絕。今當立帝,天下重器,誠知太后垂心,將軍勞慮,詳擇其人,務存聖明。然愚情眷眷,竊獨有懷。遠尋先世廢立舊儀,近見國家踐祚前事,未嘗不詢訪公卿,廣求群議,令上應天心,下合眾望。且永初以來,政事多謬,地震宮廟,彗星竟天,誠是將軍用情之日。傳曰:‘以天下與人易,為天下得人難。’昔昌邑之立,昏亂日滋,霍光憂愧發憤,悔之折骨。自非博陸忠勇,延年奮發,大漢之祀,幾將傾矣。至憂至重,可不熟慮!悠悠萬事,唯此為大。國之興衰,在此一舉。”冀得書,乃召三公、中二千石、列侯大議所立。固、廣、戒及大鴻臚杜喬皆以為清河王蒜明德著聞,又屬最尊親,宜立為嗣。先是蠡吾侯志當取冀妹,時在京師,冀欲立之。眾論既異,憤憤不得意,而未有以相奪。中常侍曹騰等聞而夜往說冀曰:“將軍累世有椒房之親,秉攝萬機,賓客縱橫,多有過差。清河王嚴明,若果立,則將軍受禍不久矣。不如立蠡吾侯,富貴可長保也。”冀然其言。明日重會公卿,冀意氣凶凶,而言辭激切。自胡廣、趙戒以下,莫不懾憚之。皆曰:“惟大將軍令。”而固獨與杜喬堅守本議。冀厲聲曰:“罷會。”固意既不從,猶望眾心可立,復以書勸冀。冀愈激怒,乃說太后先策免固,竟立蠡吾侯,是為桓帝。
20 李杜列傳: 後歲餘,甘陵劉文、魏郡劉鮪各謀立蒜為天子,梁冀因此誣固與文、鮪共為妖言,下獄。門生勃海王調貫械上書,證固之枉,河內趙承等數十人亦要鈇鑕詣闕通訴,太后明之,乃赦焉。及出獄,京師市里皆稱萬歲。冀聞之大驚,畏固名德終為己害,乃更據奏前事,遂誅之,時年五十四。
21 李杜列傳: 臨命,與胡廣、趙戒書曰:“固受國厚恩,是以竭其股肱,不顧死亡,志欲扶持王室,比隆文、宣。何圖一朝梁氏迷謬,公等曲從,以吉為凶,成事為敗乎?漢家衰微,從此始矣。公等受主厚祿,顛而不扶,傾覆大事,後之良史,豈有所私?固身已矣,於義得矣,夫復何言!”廣、戒得書悲慚,皆長歎流涕。
22 李杜列傳: 州郡收固二子基、茲於郾城,皆死獄中。小子燮得脫亡命。冀乃封廣、戒而露固尸於四衢,令有敢臨者加其罪。固弟子汝南郭亮,年始成童,遊學洛陽,乃左提章鉞,右秉鈇鑕,詣闕上書,乞收固屍。不許,因往臨哭,陳辭於前,遂守喪不去。夏門亭長呵之曰:“李、杜二公為大臣,不能安上納忠,而興造無端。卿曹何等腐生,公犯詔書,干試有司乎?”亮曰:“亮含陰陽以生,戴乾履坤。義之所動,豈知性命,何為以死相懼?”亭長歎曰:“居非命之世,天高不敢不跼,地厚不敢不蹐。耳目適宜視聽,口不可以妄言也。”太后聞而不誅。南陽人董班亦往哭固,而殉尸不肯去。太后憐之,乃聽得襚斂歸葬。二人由此顯名,三公並辟。班遂隱身,莫知所歸。
23 李杜列傳: 固所著章、表、奏、議、教令、對策、記、銘凡
24 李杜列傳: 十一篇。弟子趙承等悲歎不已,乃共論固言跡,以為德行一篇。
25 李杜列傳: 燮字德公。初,固既策罷,知不免禍,乃遣三子歸鄉里。時燮年十三,姊文姬為同郡趙伯英妻,賢而有智,見二兄歸,具知事本,默然獨悲曰:“李氏滅矣!自太公已來,積德累仁,何以遇此?”密與二兄謀豫藏匿燮,託言還京師,人咸信之。有頃難作,下郡收固三子。二兄受害,文姬乃告父門生王成曰:“君執義先公,有古人之節。今委君以六尺之孤,李氏存滅,其在君矣。”成感其義,乃將燮乘江東下,入徐州界內,令變名姓為酒家傭,而成賣卜於巿。各為異人,陰相往來。
26 李杜列傳: 燮從受學,酒家異之,意非恆人,以女妻燮。燮專精經學。十餘年閒,梁冀既誅而災眚屢見。明年,史官上言宜有赦令,又當存錄大臣冤死者子孫,於是大赦天下,并求固後嗣。燮乃以本末告酒家,酒家具車重厚遣之,皆不受,遂還鄉里,追服。姊弟相見,悲感傍人。既而戒燮曰:“先公正直,為漢忠臣,而遇朝廷傾亂,梁冀肆虐,令吾宗祀血食將絕。今弟幸而得濟,豈非天邪!宜杜絕眾人,勿妄往來,慎無一言加於梁氏。加梁氏則連主上,禍重至矣。唯引咎而已。”燮謹從其誨。後王成卒,燮以禮葬之,感傷舊恩,每四節為設上賓之位而祠焉。
27 李杜列傳: 州郡禮命,四府並辟,皆無所就,後徵拜議郎。及其在位,廉方自守,所交皆舍短取長,好成人之美。時潁川荀爽、賈彪,雖俱知名而不相能,燮並交二子,情無適莫,世稱其平正。
28 李杜列傳: 靈帝時拜安平相。先是安平王續為張角賊所略,國家贖王得還,朝廷議復其國。燮上奏曰:“續在國無政,為妖賊所虜,守藩不稱,損辱聖朝,不宜復國。”時議者不同,而續竟歸藩。燮以謗毀宗室,輸作左校。未滿歲,王果坐不道被誅,乃拜燮為議郎。京師語曰:“
29 李杜列傳: 父不肯立帝,子不肯立王。”
30 李杜列傳: 擢遷河南尹。時既以貨賂為官,詔書復橫發錢三億,以實西園。燮上書陳諫,辭義深切,帝乃止。先是潁川甄邵諂附梁冀,為鄴令。有同歲生得罪於冀,亡奔邵,邵偽納而陰以告冀,冀即捕殺之。邵當遷為郡守,會母亡,邵且埋屍於馬屋,先受封,然後發喪。邵還至洛陽,燮行塗遇之,使卒投車於溝中,笞捶亂下,大署帛於其背曰“諂貴賣友,貪官埋母”。乃具表其狀。邵遂廢錮終身。燮在職二年卒,時人感其世忠正,咸傷惜焉。
31 李杜列傳: 杜喬字叔榮,河內林慮人也。少為諸生,舉孝廉,辟司徒楊震府。稍遷為南郡太守,轉東海相,入拜侍中。
32 李杜列傳: 漢安元年,以喬守光祿大夫,使徇察兗州。表奏太山太守李固政為天下第一;陳留太守梁讓、濟陰太守汜宮、濟北相崔瑗等臧罪千萬以上。讓即大將軍梁冀季父,宮、瑗皆冀所善。還,拜太子太傅,遷大司農。
33 李杜列傳: 時梁冀子弟五人及中常侍等以無功並封,喬上書諫曰:“陛下越從藩臣,龍飛即位,天人屬心,萬邦攸賴。不急忠賢之禮,而先左右之封,傷善害德,興長佞諛。臣聞古之明君,褒罰必以功過;末世闇主,誅賞各緣其私。今梁氏一門,宦者微孽,並帶無功之紱,裂勞臣之土,其為乖濫,胡可勝言!夫有功不賞,為善失其望;姦回不詰,為惡肆其凶。故陳資斧而人靡畏,班爵位而物無勸。苟遂斯道,豈伊傷政,為亂而已,喪身亡國,可不慎哉!”書奏不省。
34 李杜列傳: 益州刺史种暠舉劾永昌太守劉君世以金蛇遺梁冀
35 李杜列傳: ,事發覺,以蛇輸司農。冀從喬借觀之,喬不肯與,冀始為恨。累遷大源臚。時冀小女死,令公卿會喪,喬獨不往,冀又銜之。
36 李杜列傳: 遷光祿勳。建和元年,代胡廣為太尉。桓帝將納梁冀妹,冀欲令以厚禮迎之,喬據執舊典,不聽。又冀屬喬舉汜宮為尚書,喬以宮臧罪明著,遂不肯用,因此日忤於冀。先是李固見廢,內外喪氣,群臣側足而立,唯喬正色無所回橈。由是海內歎息,朝野瞻望焉。在位數月,以地震免。宦者唐衡、左悺等因共譖於帝曰:“陛下前當即位,喬與李固抗議言上不堪奉漢宗祀。”帝亦怨之。及清河王蒜事起,梁冀遂諷有司劾喬及李固與劉鮪等交通,請逮案罪。而梁太后素知喬忠,但策免而已。冀愈怒,使人脅喬曰:“早從宜,妻子可得全。”喬不肯。明日冀遣騎至其門,不聞哭者,遂白執繫之,死獄中。妻子歸故郡。與李固俱暴尸於城北,家屬故人莫敢視者。
37 李杜列傳: 喬故掾陳留楊匡聞之,號泣星行到洛陽,乃著故赤幘,託為夏門亭吏,守衛尸喪,驅護蠅蟲,積十二日,都官從事執之以聞。梁太后義而不罪。匡於是帶鈇鑕詣闕上書,并乞李、杜二公骸骨。太后許之。成禮殯殮,送喬喪還家,葬送行服,隱匿不仕。匡初好學,常在外黃大澤教授門徒。補蘄長,政有異績,遷平原令。時國相徐曾,中常侍璜之兄也,匡恥與接事,託疾牧豕云。
38 李杜列傳: 論曰:夫稱仁人者,其道弘矣!立言踐行,豈徒徇名安己而已哉,將以定去就之概,正天下之風,使生以理全,死與義合也。夫專為義則傷生,專為生則騫義,專為物則害智,專為己則損仁。若義重於生,舍生可也;生重於義,全生可也。上以殘闇失君道,下以篤固盡臣節。臣節盡而死之,則為殺身以成仁,去之不為求生以害仁也。順桓之閒,國統三絕,太后稱制,賊臣虎視。李固據位持重,以爭大義,確乎而不可奪。豈不知守節之觸禍,恥夫覆折之傷任也。觀其發正辭,及所遺梁冀書,雖機失謀乖,猶戀戀而不能已。至矣哉,社稷之心乎!其顧視胡廣、趙戒,猶糞土也。
39 李杜列傳: 贊曰:李、杜司職,朋心合力。致主文、宣,抗情伊、稷。道亡時晦,終離罔極。燮同趙孤,世載弦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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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 (후한서) 范曄 (범엽)
後漢書(후한서) 范曄(범엽)
後汉书(hòuhànshū)
구분: 역사서
저자: 범엽(范曄)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송(宋)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광무제(光武帝)에서 헌제(献帝)에 이르는 후한(後漢)의 13대 196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남조(南朝) 송(宋, 420~479)의 범엽(范曄, 398~445)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되어 있다.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부터 헌제(献帝, 재위 189~220)까지 후한(後漢)의 13대(代) 196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인 ‘25사(史)’ 가운데에서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함께 ‘4사(四史)’로 꼽힌다.
범엽(范曄)이 <후한서(後漢書)>를 편찬하기 전에 오(呉, 222~280)의 사승(謝承), 설형(薛瑩), 화교(華嶠), 동진(東晋, 316~420)의 사마표(司馬彪, ?~306), 사침(謝沈), 원산송(袁山松), 장번(張璠) 등이 쓴 7종의 <후한서(後漢書)>가 전해지고 있었다. 범엽(范曄)은 432년(宋 文帝 元嘉 9년) 선성(宣城) 태수(太守)로 좌천되면서 7종의 <후한서>와 유진(劉珍) 등이 편찬한 <동관한기(東觀漢記)>, 원굉(袁宏, 328~376)이 쓴 <후한기(後漢紀)>,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등을 참고하여 <후한서(後漢書)>를 새로 편찬하였다. 범엽은 사료(史料)들을 새로 폭넓게 수집하고 비교, 정리하여 기존의 사서(史書)들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범엽(范曄)의 <후한서>가 편찬되면서 기존의 <후한서>들은 점차 읽히지 않게 되어 망실(亡失)되었고, 범엽(范曄)의 <후한서>가 후한(後漢)의 정사(正史)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범엽은 445년(元嘉 22년)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 409~451)의 모반(謀叛)에 참여했다가 처형되면서 <후한서>의 지(志) 부분을 완성하지 못했다. 양(梁, 502~557)의 유소(劉昭)는 동진(東晋)의 사마표(司馬彪)가 편찬한 <속한서(續漢書)>에서 율력(律曆), 예의(禮儀), 제사(祭祀), 천문(天文), 오행(五行), 군국(郡國), 백관(百官), 여복(輿服) 등의 ‘팔지(八志)’ 부분에 주석(註釋)을 붙여 30권의 <보주후한지(補注後漢志)>를 편찬하였다. 이로써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이루어진 <후한서(後漢書)>의 체재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북송(北宋, 960∼1126) 초기까지 <후한서(後漢書)>는 90권의 본기(本紀), 열전(列傳)과 30권의 <보주후한지(補注後漢志)>가 따로 간행되었는데, 본기(本紀), 열전(列傳)에는 당(唐, 618~907) 시대에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의 둘째아들인 장회태자(章懐太子) 이현(李賢, 654~684)이 붙인 주석(註釋)이 덧붙여 있었다. 북송(北宋) 진종(眞宗, 재위 997~1022) 때인 1022년(宋 眞宗 乾興 원년), 손석(孫奭)은 이현(李賢)이 주석(註釋)을 붙인 90권의 본기(本紀), 열전(列傳)에 유소(劉昭)가 주석(註釋)을 붙인 30권의 지(志)를 합하여 간행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후한서(後漢書)>의 판본(板本)이다.
<후한서(後漢書)>는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의 체례(體例)를 따르고 있으나, 표(表)가 없으며, 본기(本紀)에 황후기(皇后紀)를 따로 수록하였다. 열전(列傳)에 당고(黨錮), 환자(宦者), 문원(文苑), 독행(獨行), 방술(方術), 일민(逸民), 열녀(列女)의 7개 항목을 새로 둔 것도 특징이다. 청(淸, 1636~1912) 시대에는 <후한서(後漢書)>의 표(表), 지(志), 주(注)에 대한 보완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혜동(惠棟, 1697~1758)의 <후한서보지(後漢書補志)>, 왕선겸(王先謙, 1842~1917)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이자명(李慈銘, 1830~1895)의 <후한서집주(後漢書集注)>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후한서(後漢書)> 85권의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부여(夫余), 읍루(挹婁), 고구려(高句驪), 동옥저(東沃沮), 예 (濊), 삼한(三韓), 왜(倭)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많은 부분이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차이가 있거나 새로운 사실들도 많아 한반도의 고대사(古代史) 연구에 중요한 사료(史料)로 쓰이고 있다.
관련 고사성어
紀
列傳
013 卷11 劉玄劉盆子列傳第一(유현유분자열전)
鐵中錚錚(철중쟁쟁) 쇠 중(中)에서 소리가 가장 맑다는 뜻으로, 동류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 |
庸中佼佼(용중교교) ①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라는 뜻으로 ‘철중쟁쟁’과 함께 그만그만한 자 중에서 조금 나은 자를 두고 이르는 말. ②아름다운 여인. |
015 卷13 隗囂公孫述列傳第三(외효공손술열전)
置之度外(치지도외) |
026 卷24 馬援列傳第十四(마원열전)
老益壯(노익장) | 老當益壯(노당익장, 老当益壮,lǎodāngyìzhuàng)) 늙을수록 더욱 강인한 마음과 뜻을 지녀야 한다. 《후한서·마원전(後漢書·馬援傳)》에 나오는 “大丈夫爲者 窮當益堅 老當益壯 (丈夫为志,穷当益坚,老当益壮; 사나이의 마음가짐은 어려울수록 더욱 굳세어져야 하고, 늙을수록 더욱 강인해져야 한다.)”란 말에서 유래함 |
050 卷58 虞傅蓋臧列傳第四十八(우전개장열전) 虞詡・傳燮・蓋勳・臧洪
盤根錯節(반근착절) | 兵不厭詐(병불염사)
068 卷63 李杜列傳(이두열전)第五十三 李固・杜喬
狼狽(낭패) |
志
참조항목
二十四史(이십사사) | 十八史略(십팔사략) |
http://zh.wikipedia.org/wiki/後漢書
http://ko.wikipedia.org/wiki/후한서
後汉书(hòuhànshū)
구분: 역사서
저자: 범엽(范曄)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송(宋)의 범엽(范曄)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광무제(光武帝)에서 헌제(献帝)에 이르는 후한(後漢)의 13대 196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남조(南朝) 송(宋, 420~479)의 범엽(范曄, 398~445)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되어 있다.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부터 헌제(献帝, 재위 189~220)까지 후한(後漢)의 13대(代) 196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인 ‘25사(史)’ 가운데에서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함께 ‘4사(四史)’로 꼽힌다.
범엽(范曄)이 <후한서(後漢書)>를 편찬하기 전에 오(呉, 222~280)의 사승(謝承), 설형(薛瑩), 화교(華嶠), 동진(東晋, 316~420)의 사마표(司馬彪, ?~306), 사침(謝沈), 원산송(袁山松), 장번(張璠) 등이 쓴 7종의 <후한서(後漢書)>가 전해지고 있었다. 범엽(范曄)은 432년(宋 文帝 元嘉 9년) 선성(宣城) 태수(太守)로 좌천되면서 7종의 <후한서>와 유진(劉珍) 등이 편찬한 <동관한기(東觀漢記)>, 원굉(袁宏, 328~376)이 쓴 <후한기(後漢紀)>,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등을 참고하여 <후한서(後漢書)>를 새로 편찬하였다. 범엽은 사료(史料)들을 새로 폭넓게 수집하고 비교, 정리하여 기존의 사서(史書)들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범엽(范曄)의 <후한서>가 편찬되면서 기존의 <후한서>들은 점차 읽히지 않게 되어 망실(亡失)되었고, 범엽(范曄)의 <후한서>가 후한(後漢)의 정사(正史)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범엽은 445년(元嘉 22년)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 409~451)의 모반(謀叛)에 참여했다가 처형되면서 <후한서>의 지(志) 부분을 완성하지 못했다. 양(梁, 502~557)의 유소(劉昭)는 동진(東晋)의 사마표(司馬彪)가 편찬한 <속한서(續漢書)>에서 율력(律曆), 예의(禮儀), 제사(祭祀), 천문(天文), 오행(五行), 군국(郡國), 백관(百官), 여복(輿服) 등의 ‘팔지(八志)’ 부분에 주석(註釋)을 붙여 30권의 <보주후한지(補注後漢志)>를 편찬하였다. 이로써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이루어진 <후한서(後漢書)>의 체재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북송(北宋, 960∼1126) 초기까지 <후한서(後漢書)>는 90권의 본기(本紀), 열전(列傳)과 30권의 <보주후한지(補注後漢志)>가 따로 간행되었는데, 본기(本紀), 열전(列傳)에는 당(唐, 618~907) 시대에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의 둘째아들인 장회태자(章懐太子) 이현(李賢, 654~684)이 붙인 주석(註釋)이 덧붙여 있었다. 북송(北宋) 진종(眞宗, 재위 997~1022) 때인 1022년(宋 眞宗 乾興 원년), 손석(孫奭)은 이현(李賢)이 주석(註釋)을 붙인 90권의 본기(本紀), 열전(列傳)에 유소(劉昭)가 주석(註釋)을 붙인 30권의 지(志)를 합하여 간행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후한서(後漢書)>의 판본(板本)이다.
<후한서(後漢書)>는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의 체례(體例)를 따르고 있으나, 표(表)가 없으며, 본기(本紀)에 황후기(皇后紀)를 따로 수록하였다. 열전(列傳)에 당고(黨錮), 환자(宦者), 문원(文苑), 독행(獨行), 방술(方術), 일민(逸民), 열녀(列女)의 7개 항목을 새로 둔 것도 특징이다. 청(淸, 1636~1912) 시대에는 <후한서(後漢書)>의 표(表), 지(志), 주(注)에 대한 보완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혜동(惠棟, 1697~1758)의 <후한서보지(後漢書補志)>, 왕선겸(王先謙, 1842~1917)의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 이자명(李慈銘, 1830~1895)의 <후한서집주(後漢書集注)>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후한서(後漢書)> 85권의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부여(夫余), 읍루(挹婁), 고구려(高句驪), 동옥저(東沃沮), 예 (濊), 삼한(三韓), 왜(倭)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많은 부분이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차이가 있거나 새로운 사실들도 많아 한반도의 고대사(古代史) 연구에 중요한 사료(史料)로 쓰이고 있다.
관련 고사성어
紀
列傳
013 卷11 劉玄劉盆子列傳第一(유현유분자열전)
鐵中錚錚(철중쟁쟁) 쇠 중(中)에서 소리가 가장 맑다는 뜻으로, 동류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 |
庸中佼佼(용중교교) ①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라는 뜻으로 ‘철중쟁쟁’과 함께 그만그만한 자 중에서 조금 나은 자를 두고 이르는 말. ②아름다운 여인. |
015 卷13 隗囂公孫述列傳第三(외효공손술열전)
置之度外(치지도외) |
026 卷24 馬援列傳第十四(마원열전)
老益壯(노익장) | 老當益壯(노당익장, 老当益壮,lǎodāngyìzhuàng)) 늙을수록 더욱 강인한 마음과 뜻을 지녀야 한다. 《후한서·마원전(後漢書·馬援傳)》에 나오는 “大丈夫爲者 窮當益堅 老當益壯 (丈夫为志,穷当益坚,老当益壮; 사나이의 마음가짐은 어려울수록 더욱 굳세어져야 하고, 늙을수록 더욱 강인해져야 한다.)”란 말에서 유래함 |
050 卷58 虞傅蓋臧列傳第四十八(우전개장열전) 虞詡・傳燮・蓋勳・臧洪
盤根錯節(반근착절) | 兵不厭詐(병불염사)
068 卷63 李杜列傳(이두열전)第五十三 李固・杜喬
狼狽(낭패) |
志
참조항목
二十四史(이십사사) | 十八史略(십팔사략) |
http://zh.wikipedia.org/wiki/後漢書
http://ko.wikipedia.org/wiki/후한서
畵虎類狗 (화호유구)
畵虎類狗(화호유구)
畵 그릴 화 | 虎 범 호 | 類 같을 류 | 狗 개 구 |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를 그린 꼴이 됨.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시기,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은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이라는 경박한 조카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계형자엄돈서(誡兄子嚴敦書)'라는 편지를 썼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장점이나 단점을 비난한다거나, 국가의 대사(大事)를 함부로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 한다. 나는 사람됨이 후덕하고 신중하며 청렴했던 산도현(山都縣)의 현령 용백고(龍伯高)와 의협심이 강한 월기사마(越騎司馬) 두계량(杜季良)을 존경하고 있지만, 너희들이 그들을 본받기는 바라지 않는다. 용백고처럼 되는지 못한다하더라도 조정의 신임을 받는 관리는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너희들이 두계량을 본받는다면,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천하의 경박한 사람이 될까 두렵다. 이는 마치 호랑이를 그리려다 도리어 개를 그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畵虎不成反類狗者也].
畵虎類狗란 서투른 솜씨로 큰일을 하려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침을 비유한 말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각곡류목(刻鵠類鶩) | 화룡유구(畵龍類狗) | 화호불성반류구(畵虎不成反類狗) |
畵 그릴 화 | 虎 범 호 | 類 같을 류 | 狗 개 구 |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를 그린 꼴이 됨.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시기,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은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이라는 경박한 조카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계형자엄돈서(誡兄子嚴敦書)'라는 편지를 썼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장점이나 단점을 비난한다거나, 국가의 대사(大事)를 함부로 말하는 것을 가장 싫어 한다. 나는 사람됨이 후덕하고 신중하며 청렴했던 산도현(山都縣)의 현령 용백고(龍伯高)와 의협심이 강한 월기사마(越騎司馬) 두계량(杜季良)을 존경하고 있지만, 너희들이 그들을 본받기는 바라지 않는다. 용백고처럼 되는지 못한다하더라도 조정의 신임을 받는 관리는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너희들이 두계량을 본받는다면,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천하의 경박한 사람이 될까 두렵다. 이는 마치 호랑이를 그리려다 도리어 개를 그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畵虎不成反類狗者也].
畵虎類狗란 서투른 솜씨로 큰일을 하려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침을 비유한 말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각곡류목(刻鵠類鶩) | 화룡유구(畵龍類狗) | 화호불성반류구(畵虎不成反類狗) |
合浦珠還 (합포주환)
合浦珠還(합포주환)
合 합할 합/쪽문 합, 홉 홉 | 浦 개 포 | 珠 구슬 주 | 還 돌아올 환, 돌 선 |
합포(合浦)에 구슬이 다시 돌아왔다는 뜻으로, 지방(地方) 장관(長官)이 선정(善政)을 베풂을 이르는 말. 중국의 한(漢)나라 때 맹상(孟嘗)이라는 관리의 고사(故事)에서 유래.
후한서(後漢書) 맹상전(孟嘗傳)의 이야기.
중국 광서(廣西)지방의 합포(合浦)현은 지금의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합포현(合浦縣)의 북동쪽에 있는 지명이다. 합포는 농사는 잘 안 되었지만 바다에서 진주가 많이 채취되어, 주민들은 인근의 교지(交趾)와 진주를 교역하며 생활하였다. 합포에서 나는 진주는 둥글고 크며 빛깔이 순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합포주(合浦珠)'라고 부르며 귀하게 여겼다.
한(漢)나라 때, 합포군의 백성들은 모두 진주조개를 채취하여 생활을 하였으나, 합포에 부임한 관리들은 귀한 진주를 수탈하느라 주민들을 괴롭히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주민들은 진주를 캐 보아야 빼앗길 것이 뻔하므로 캐지 않게 되었고, 이리하여 채취량은 점점 줄어들었다. 양식을 바꿀 진주가 없어 주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였고, 굶어 죽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진주 조개들이 합포에서 살기 싫어 모두 월남땅으로 달아났네'라고 한탄하였다.
동한(東漢)의 순제(順帝)가 즉위하자, 곧 맹상을 합포의 태수로 파견하였다. 맹상은 먼저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불법행위를 엄단하여 진주 조개의 생산과 보호를 적극 지원하였다.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아, 합포 바다에는 다시 진주 조개가 나타나고 생산량도 증가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모두 '떠났던 진주가 다시 돌아왔네[曾未踰歲, 去珠復還]'라고 말했다.
여기서 유래하여 합포주환은 물건이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오거나 떠나갔던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 진귀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경우 등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순리열전(循吏列傳) | 후한서(後漢書) 맹상전(孟嘗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合 합할 합/쪽문 합, 홉 홉 | 浦 개 포 | 珠 구슬 주 | 還 돌아올 환, 돌 선 |
합포(合浦)에 구슬이 다시 돌아왔다는 뜻으로, 지방(地方) 장관(長官)이 선정(善政)을 베풂을 이르는 말. 중국의 한(漢)나라 때 맹상(孟嘗)이라는 관리의 고사(故事)에서 유래.
후한서(後漢書) 맹상전(孟嘗傳)의 이야기.
중국 광서(廣西)지방의 합포(合浦)현은 지금의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합포현(合浦縣)의 북동쪽에 있는 지명이다. 합포는 농사는 잘 안 되었지만 바다에서 진주가 많이 채취되어, 주민들은 인근의 교지(交趾)와 진주를 교역하며 생활하였다. 합포에서 나는 진주는 둥글고 크며 빛깔이 순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합포주(合浦珠)'라고 부르며 귀하게 여겼다.
한(漢)나라 때, 합포군의 백성들은 모두 진주조개를 채취하여 생활을 하였으나, 합포에 부임한 관리들은 귀한 진주를 수탈하느라 주민들을 괴롭히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주민들은 진주를 캐 보아야 빼앗길 것이 뻔하므로 캐지 않게 되었고, 이리하여 채취량은 점점 줄어들었다. 양식을 바꿀 진주가 없어 주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였고, 굶어 죽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진주 조개들이 합포에서 살기 싫어 모두 월남땅으로 달아났네'라고 한탄하였다.
동한(東漢)의 순제(順帝)가 즉위하자, 곧 맹상을 합포의 태수로 파견하였다. 맹상은 먼저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불법행위를 엄단하여 진주 조개의 생산과 보호를 적극 지원하였다.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아, 합포 바다에는 다시 진주 조개가 나타나고 생산량도 증가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모두 '떠났던 진주가 다시 돌아왔네[曾未踰歲, 去珠復還]'라고 말했다.
여기서 유래하여 합포주환은 물건이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오거나 떠나갔던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 진귀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경우 등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순리열전(循吏列傳) | 후한서(後漢書) 맹상전(孟嘗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置之度外 (치지도외)
置之度外(치지도외)
置之度外(zhìzhīdùwài)
置 둘 치 | 之 갈 지 | 度 법도 도, 헤아릴 탁, 살 택 | 外 바깥 외 |
'생각 밖에 둔다'라는 뜻으로, 내버려 두고서 상대를 하지 아니하는 것을 의미.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의 고사(故事)에서 유래.
give no thought to; have no regard for; not to take into consideration
유수(劉秀)가 왕망(王莽)을 멸하고 한나라를 재건하여 황제에 즉위하니, 그가 광무제이다. 그러나 즉위 초기에는 아직 중국을 완전히 평정하지는 못한 상태였으므로, 광무제에게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는 지방 세력들도 많았다. 광무제는 이로부터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기본적인 통일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로써 감숙(甘肅) 지방의 외효와 촉(蜀) 지방의 공손술(公孫述)이 양대 저항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이때 외효가 표면상으로는 광무제에 대하여 스스로 신하라고 칭하고, 아들을 후한의 수도인 낙양(洛陽)에 보내어 벼슬을 하게 함으로써 귀순할 의사를 나타내었다. 광무제가 형세를 살펴 보니, 외효는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건 아들이 궁중에 인질로 잡혀 있는 셈이니 근심거리가 못 되었다. 또 공손술은 멀리 촉 지방에 있어 중원으로 공격해 올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광무제는 오래 계속된 전쟁으로 피로해진 군대를 쉬게 하고 국력을 추스릴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휘하의 장수들에게 "외효와 공손술 두 사람은 당분간 내버려 두고 문제 삼지 말라(且當置此兩子於度外耳)"하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 광무제는 충분히 휴식한 군대를 이끌고 외효와 공손술을 차례로 정벌함으로써 통일을 완성하였다.
이 고사는 《후한서(後漢書)》의 '외효공손술열전'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치지도외는 내버려 두고 문제로 삼지 않는다거나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後漢書(후한서) 卷13 隗囂公孫述列傳第三(외효공손술열전)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度外視(도외시) |
置之度外(zhìzhīdùwài)
置 둘 치 | 之 갈 지 | 度 법도 도, 헤아릴 탁, 살 택 | 外 바깥 외 |
'생각 밖에 둔다'라는 뜻으로, 내버려 두고서 상대를 하지 아니하는 것을 의미.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의 고사(故事)에서 유래.
give no thought to; have no regard for; not to take into consideration
유수(劉秀)가 왕망(王莽)을 멸하고 한나라를 재건하여 황제에 즉위하니, 그가 광무제이다. 그러나 즉위 초기에는 아직 중국을 완전히 평정하지는 못한 상태였으므로, 광무제에게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는 지방 세력들도 많았다. 광무제는 이로부터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기본적인 통일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로써 감숙(甘肅) 지방의 외효와 촉(蜀) 지방의 공손술(公孫述)이 양대 저항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이때 외효가 표면상으로는 광무제에 대하여 스스로 신하라고 칭하고, 아들을 후한의 수도인 낙양(洛陽)에 보내어 벼슬을 하게 함으로써 귀순할 의사를 나타내었다. 광무제가 형세를 살펴 보니, 외효는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건 아들이 궁중에 인질로 잡혀 있는 셈이니 근심거리가 못 되었다. 또 공손술은 멀리 촉 지방에 있어 중원으로 공격해 올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광무제는 오래 계속된 전쟁으로 피로해진 군대를 쉬게 하고 국력을 추스릴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휘하의 장수들에게 "외효와 공손술 두 사람은 당분간 내버려 두고 문제 삼지 말라(且當置此兩子於度外耳)"하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 광무제는 충분히 휴식한 군대를 이끌고 외효와 공손술을 차례로 정벌함으로써 통일을 완성하였다.
이 고사는 《후한서(後漢書)》의 '외효공손술열전'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치지도외는 내버려 두고 문제로 삼지 않는다거나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後漢書(후한서) 卷13 隗囂公孫述列傳第三(외효공손술열전)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度外視(도외시) |
鐵中錚錚 (철중쟁쟁)
鐵中錚錚(철중쟁쟁)
鐵 쇠 철 | 中 가운데 중 | 錚 쇳소리 쟁 | 錚 쇳소리 쟁 |
쇠 중(中)에서 소리가 가장 맑다는 뜻으로, 동류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
후한(後漢)의 시조 광무제(光武帝)가 서선(徐宣)의 사람됨을 평한 데서 연유함.
광무제는 후한의 초대 황제로 이름은 유수(劉秀)이며, 전한(前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9세손이다. 그는 황제위에 올랐으나 적미(赤眉)를 비롯하여 왕망 때부터의 유적(流賊)들이 날뛰고 있어서 옥좌에 편히 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광무제는 먼저 적미를 토벌하기로 했다. 적미는 유분자(劉盆子)를 황제로 추대하고 있었는데, 광무제는 등우(鄧禹)와 풍이(馮異)를 보냈으나 전세가 불리해져 그가 몸소 출진하여 가까스로 항복을 받아냈다. 광무제는 항복한 적미의 잔병 10여 만이 뤄양[洛陽]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장 번숭(樊崇)이 유분자와 함께 웃통을 벗어 스스로를 벌하는 모습으로 항복해왔다. 광무제는 먼저 유분자에게 죄를 묻자, 유분자는 ‘만 번 죽어 마땅하나 제발 살려달라’고 했다. 이어 번숭에게 ‘아군의 실정을 보고 항복한 것을 혹시 후회하지 않는가’를 물었다. 이때 함께 항복한 그들의 승상인 서선은, 숭이 대답하기도 전에 머리를 땅에 내리치면서 “천만의 말씀입니다. 호구를 벗어나 자모의 품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광무제는 다소 비웃듯이 “경은 철중쟁쟁(鐵中錚錚), 용중교교(庸中佼佼)한 자로군.”이라고 쌀쌀하게 말했다.
여기서 ‘철중쟁쟁’은 ‘용중교교’와 함께 대응을 이루어 ‘보통 사람 중에서 조금 나은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용중교교’란 ‘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라는 뜻으로 ‘철중쟁쟁’과 함께 그만그만한 자 중에서 조금 나은 자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광무제는 통찰력이 있는 인재라면 시세의 추이를 보고 벌써 귀순했을 것이고, 대세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라면 아직도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티고 있을 것이므로, 서선이 항복한 시기가 결코 이른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어리석은 자에 비하면 그래도 조금 낫다고 본 것이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卷13 유분자전(劉盆子傳)
관련 한자어
참조어
庸中佼佼(용중교교) |
鐵 쇠 철 | 中 가운데 중 | 錚 쇳소리 쟁 | 錚 쇳소리 쟁 |
쇠 중(中)에서 소리가 가장 맑다는 뜻으로, 동류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을 가리키는 말.
후한(後漢)의 시조 광무제(光武帝)가 서선(徐宣)의 사람됨을 평한 데서 연유함.
광무제는 후한의 초대 황제로 이름은 유수(劉秀)이며, 전한(前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9세손이다. 그는 황제위에 올랐으나 적미(赤眉)를 비롯하여 왕망 때부터의 유적(流賊)들이 날뛰고 있어서 옥좌에 편히 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광무제는 먼저 적미를 토벌하기로 했다. 적미는 유분자(劉盆子)를 황제로 추대하고 있었는데, 광무제는 등우(鄧禹)와 풍이(馮異)를 보냈으나 전세가 불리해져 그가 몸소 출진하여 가까스로 항복을 받아냈다. 광무제는 항복한 적미의 잔병 10여 만이 뤄양[洛陽]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장 번숭(樊崇)이 유분자와 함께 웃통을 벗어 스스로를 벌하는 모습으로 항복해왔다. 광무제는 먼저 유분자에게 죄를 묻자, 유분자는 ‘만 번 죽어 마땅하나 제발 살려달라’고 했다. 이어 번숭에게 ‘아군의 실정을 보고 항복한 것을 혹시 후회하지 않는가’를 물었다. 이때 함께 항복한 그들의 승상인 서선은, 숭이 대답하기도 전에 머리를 땅에 내리치면서 “천만의 말씀입니다. 호구를 벗어나 자모의 품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광무제는 다소 비웃듯이 “경은 철중쟁쟁(鐵中錚錚), 용중교교(庸中佼佼)한 자로군.”이라고 쌀쌀하게 말했다.
여기서 ‘철중쟁쟁’은 ‘용중교교’와 함께 대응을 이루어 ‘보통 사람 중에서 조금 나은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용중교교’란 ‘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라는 뜻으로 ‘철중쟁쟁’과 함께 그만그만한 자 중에서 조금 나은 자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광무제는 통찰력이 있는 인재라면 시세의 추이를 보고 벌써 귀순했을 것이고, 대세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라면 아직도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티고 있을 것이므로, 서선이 항복한 시기가 결코 이른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어리석은 자에 비하면 그래도 조금 낫다고 본 것이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卷13 유분자전(劉盆子傳)
관련 한자어
참조어
庸中佼佼(용중교교) |
一日千里 (일일천리)
一日千里(일일천리)
一日千里[yírìqiānlǐ]
一 한 일 | 日 해 일, 날 일 | 千 일천 천, 밭두둑 천, 그네 천 | 里 마을 리(이), 속 리(이) |
하루에 천 리(千里)를 달린다는 뜻으로, ①말이 매우 빨리 달림을 이르는 말 ②진보(進步)하는 것이 빠름 ③물이 급히 흐름 ④뛰어난 재능(才能)을 가진 사람
후한서(後漢書) 왕윤(王允)전의 이야기다.
왕윤은 동한(東漢)때의 인물로서, 헌제(獻帝) 재위 시기에 사도(司徒)를 지냈다. 그는 젊은 시절, 열심히 공부하고 무예를 연마하였다. 그와 동향(同鄕)인 곽림종(郭林宗)은 왕윤의 총명함과 학문하는 태도를 보고, 그를 칭찬하여 왕윤의 학문은 매우 빨리 발전하고 있는데[王生一日千里], 장차 제왕(帝王)을 보좌하여 대사(大事)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王佐才也]라고 하였다.
왕윤이 사도로 재임하던 때에, 동탁(董卓)은 전권을 잡고 방탕하고 도리를 모르는 포악한 생활을 하였다. 왕윤은 겉으로는 동탁에게 순종하였지만, 몰래 여포(呂布)를 부추겨 미인계로써 동탁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동탁의 부하인 이각(李 )과 곽사(郭 )에게 살해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 56세.
一日千里 라는 말은 본시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나온다. 기록에 의하면, 서주(西周)시대 주나라 목왕(穆王)의 휘하에 조보(造父)라는 마부가 있었는데, 그가 모는 말은 하
루에 천리길을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一日千里 란 본시 말이 매우 빠르게 달리는 것을 뜻하였으나, 지금은 진보나 발전의 속도가 매우 빠름 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인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왕윤(王允)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日新月异[rìxīnyuèyì, 일신월이] 나날이 새로워지다. |
반의어·상대어
一成不变[yìchéngbúbiàn, 일성불변] 법이 한번 정해지면 고칠 수 없다. 고정불변하다. 옛 것을 고수하여 잘 고치려 하지 않다. |
一日千里[yírìqiānlǐ]
一 한 일 | 日 해 일, 날 일 | 千 일천 천, 밭두둑 천, 그네 천 | 里 마을 리(이), 속 리(이) |
하루에 천 리(千里)를 달린다는 뜻으로, ①말이 매우 빨리 달림을 이르는 말 ②진보(進步)하는 것이 빠름 ③물이 급히 흐름 ④뛰어난 재능(才能)을 가진 사람
후한서(後漢書) 왕윤(王允)전의 이야기다.
왕윤은 동한(東漢)때의 인물로서, 헌제(獻帝) 재위 시기에 사도(司徒)를 지냈다. 그는 젊은 시절, 열심히 공부하고 무예를 연마하였다. 그와 동향(同鄕)인 곽림종(郭林宗)은 왕윤의 총명함과 학문하는 태도를 보고, 그를 칭찬하여 왕윤의 학문은 매우 빨리 발전하고 있는데[王生一日千里], 장차 제왕(帝王)을 보좌하여 대사(大事)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王佐才也]라고 하였다.
왕윤이 사도로 재임하던 때에, 동탁(董卓)은 전권을 잡고 방탕하고 도리를 모르는 포악한 생활을 하였다. 왕윤은 겉으로는 동탁에게 순종하였지만, 몰래 여포(呂布)를 부추겨 미인계로써 동탁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동탁의 부하인 이각(李 )과 곽사(郭 )에게 살해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 56세.
一日千里 라는 말은 본시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나온다. 기록에 의하면, 서주(西周)시대 주나라 목왕(穆王)의 휘하에 조보(造父)라는 마부가 있었는데, 그가 모는 말은 하
루에 천리길을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一日千里 란 본시 말이 매우 빠르게 달리는 것을 뜻하였으나, 지금은 진보나 발전의 속도가 매우 빠름 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인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왕윤(王允)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日新月异[rìxīnyuèyì, 일신월이] 나날이 새로워지다. |
반의어·상대어
一成不变[yìchéngbúbiàn, 일성불변] 법이 한번 정해지면 고칠 수 없다. 고정불변하다. 옛 것을 고수하여 잘 고치려 하지 않다. |
庸中佼佼 (용중교교)
庸中佼佼(용중교교)
庸中佼佼(yōngzhōngjiǎojiǎo)
庸 떳떳할 용,쓸 용 | 中 가운데 중 | 佼 예쁠 교 | 佼 예쁠 교 |
①아름다운 여인. ②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
a giant among dwarfs
후한(後漢)의 시조 광무제(光武帝)가 서선(徐宣)의 사람됨을 평한 데서 연유함.
광무제는 후한의 초대 황제로 이름은 유수(劉秀)이며, 전한(前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9세손이다. 그는 황제위에 올랐으나 적미(赤眉)를 비롯하여 왕망 때부터의 유적(流賊)들이 날뛰고 있어서 옥좌에 편히 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광무제는 먼저 적미를 토벌하기로 했다. 적미는 유분자(劉盆子)를 황제로 추대하고 있었는데, 광무제는 등우(鄧禹)와 풍이(馮異)를 보냈으나 전세가 불리해져 그가 몸소 출진하여 가까스로 항복을 받아냈다. 광무제는 항복한 적미의 잔병 10여 만이 뤄양[洛陽]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장 번숭(樊崇)이 유분자와 함께 웃통을 벗어 스스로를 벌하는 모습으로 항복해왔다. 광무제는 먼저 유분자에게 죄를 묻자, 유분자는 ‘만 번 죽어 마땅하나 제발 살려달라’고 했다. 이어 번숭에게 ‘아군의 실정을 보고 항복한 것을 혹시 후회하지 않는가’를 물었다. 이때 함께 항복한 그들의 승상인 서선은, 숭이 대답하기도 전에 머리를 땅에 내리치면서 “천만의 말씀입니다. 호구를 벗어나 자모의 품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광무제는 다소 비웃듯이 “경은 철중쟁쟁(鐵中錚錚), 용중교교(庸中佼佼)한 자로군.”이라고 쌀쌀하게 말했다.
여기서 ‘철중쟁쟁’은 ‘용중교교’와 함께 대응을 이루어 ‘보통 사람 중에서 조금 나은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용중교교’란 ‘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라는 뜻으로 ‘철중쟁쟁’과 함께 그만그만한 자 중에서 조금 나은 자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광무제는 통찰력이 있는 인재라면 시세의 추이를 보고 벌써 귀순했을 것이고, 대세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라면 아직도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티고 있을 것이므로, 서선이 항복한 시기가 결코 이른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어리석은 자에 비하면 그래도 조금 낫다고 본 것이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卷13 유분자전(劉盆子傳)
관련 한자어
참조어
庸中佼佼(용중교교) | 鐵中錚錚(철중쟁쟁) |
庸中佼佼(yōngzhōngjiǎojiǎo)
庸 떳떳할 용,쓸 용 | 中 가운데 중 | 佼 예쁠 교 | 佼 예쁠 교 |
①아름다운 여인. ②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
a giant among dwarfs
후한(後漢)의 시조 광무제(光武帝)가 서선(徐宣)의 사람됨을 평한 데서 연유함.
광무제는 후한의 초대 황제로 이름은 유수(劉秀)이며, 전한(前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9세손이다. 그는 황제위에 올랐으나 적미(赤眉)를 비롯하여 왕망 때부터의 유적(流賊)들이 날뛰고 있어서 옥좌에 편히 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광무제는 먼저 적미를 토벌하기로 했다. 적미는 유분자(劉盆子)를 황제로 추대하고 있었는데, 광무제는 등우(鄧禹)와 풍이(馮異)를 보냈으나 전세가 불리해져 그가 몸소 출진하여 가까스로 항복을 받아냈다. 광무제는 항복한 적미의 잔병 10여 만이 뤄양[洛陽]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장 번숭(樊崇)이 유분자와 함께 웃통을 벗어 스스로를 벌하는 모습으로 항복해왔다. 광무제는 먼저 유분자에게 죄를 묻자, 유분자는 ‘만 번 죽어 마땅하나 제발 살려달라’고 했다. 이어 번숭에게 ‘아군의 실정을 보고 항복한 것을 혹시 후회하지 않는가’를 물었다. 이때 함께 항복한 그들의 승상인 서선은, 숭이 대답하기도 전에 머리를 땅에 내리치면서 “천만의 말씀입니다. 호구를 벗어나 자모의 품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광무제는 다소 비웃듯이 “경은 철중쟁쟁(鐵中錚錚), 용중교교(庸中佼佼)한 자로군.”이라고 쌀쌀하게 말했다.
여기서 ‘철중쟁쟁’은 ‘용중교교’와 함께 대응을 이루어 ‘보통 사람 중에서 조금 나은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용중교교’란 ‘범인(凡人) 중에서 좀 나은 자’라는 뜻으로 ‘철중쟁쟁’과 함께 그만그만한 자 중에서 조금 나은 자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광무제는 통찰력이 있는 인재라면 시세의 추이를 보고 벌써 귀순했을 것이고, 대세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라면 아직도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티고 있을 것이므로, 서선이 항복한 시기가 결코 이른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어리석은 자에 비하면 그래도 조금 낫다고 본 것이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卷13 유분자전(劉盆子傳)
관련 한자어
참조어
庸中佼佼(용중교교) | 鐵中錚錚(철중쟁쟁) |
梁上君子 (양상군자)
梁上君子 (양상군자)
① 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으로, 도둑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 ② 천장의 쥐
後漢(후한) 말엽, 陳寔(진식)이란 사람이 태구현의 현감으로 있을때의 일이다. 진식은 학문을 좋아할 뿐 아니라 매사를 공정하고 관대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현민들한테서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흉년이 들어 현민들이 몹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어느 날 밤 진식이 책을 읽고 있는데 도둑이 살며시 들어와 대들보 위에 숨었다. 그는 짐짓 모르는 척하고 책읽기를 끝내고는 아들과 손자들을 불러들여 訓戒(훈계)를 했다.
『사람들은 모름지기 스스로 힘써야만 한다. 악을 행하는 사람도 본래는 악한 사람이 아니다. 나쁜 습관이 성품이 되어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도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니라』
도둑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대들보에서 뛰어내려와 이마를 방바닥에 조아리며 사죄했다. 진식은 도둑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렇게 깨우쳐 주었다.
『너의 얼굴 모습을 보아하니 악한 사람 같지는 않구나. 깊이 반성하여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죽 살기에 힘겨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나』
진식은 도둑에게 비단 두 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 일이 알려지자 태구현에는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한다.
후한서 진식전(陳寔傳)
① 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으로, 도둑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 ② 천장의 쥐
後漢(후한) 말엽, 陳寔(진식)이란 사람이 태구현의 현감으로 있을때의 일이다. 진식은 학문을 좋아할 뿐 아니라 매사를 공정하고 관대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현민들한테서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흉년이 들어 현민들이 몹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어느 날 밤 진식이 책을 읽고 있는데 도둑이 살며시 들어와 대들보 위에 숨었다. 그는 짐짓 모르는 척하고 책읽기를 끝내고는 아들과 손자들을 불러들여 訓戒(훈계)를 했다.
『사람들은 모름지기 스스로 힘써야만 한다. 악을 행하는 사람도 본래는 악한 사람이 아니다. 나쁜 습관이 성품이 되어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도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니라』
도둑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대들보에서 뛰어내려와 이마를 방바닥에 조아리며 사죄했다. 진식은 도둑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렇게 깨우쳐 주었다.
『너의 얼굴 모습을 보아하니 악한 사람 같지는 않구나. 깊이 반성하여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죽 살기에 힘겨웠으면 이런 짓을 했겠나』
진식은 도둑에게 비단 두 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 일이 알려지자 태구현에는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한다.
후한서 진식전(陳寔傳)
心腹之患 (심복지환, xīnfùzhīhuàn)
心腹之患(심복지환)
心腹之患(xīnfùzhīhuàn)
心 마음 심 | 腹 배 복 | 之 갈 지 | 患 근심 환 |
'가슴이나 배에 생긴 병'이라는 뜻으로, 쉽게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 또는 없애기 어려운 근심이나 병폐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좌씨전(左氏傳)》과 《후한서(後漢書)》 등에서 유래되었다.
심복지질(心腹之疾) 또는 복심지질(腹心之疾)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에 오(吳)나라 왕 합려(闔閭)는 월(越)나라 왕 구천(勾踐)과 싸우다 상처를 입어 죽었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군사력을 키워 월나라를 정벌함으로써 아버지의 원한을 갚았다. 부차가 제(齊)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 구천이 신하들을 이끌고 와서 부차와 대신들에게 재물을 바쳤으므로, 오나라 대신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러나 오자서(伍子胥)만은 월나라의 그러한 행동이 오나라의 경계심을 늦추게 하려는 속셈임을 간파하였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제나라는 우리에게 쓸모없는 자갈밭과 마찬가지이니 공격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월나라는 우리에게 가슴이나 배에 생긴 질병과 같은 존재입니다(越在我, 心腹之疾也). 월나라가 지금은 겉으로 복종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계책을 도모하고 있을 것입니다. 왕께서 빨리 월나라를 멸하여 후환을 없애지 않고, 도리어 제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부차는 이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오나라는 나중에 월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이 고사는 《좌씨전》의 '애공(哀公) 11년'조(條)에 실려 있다.
또 《후한서》의 〈진번전(陳蕃傳)〉에 "나라 밖에 왜구나 도적이 있는 것은 사지에 든 병과 같지만, 나라 안의 정치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가슴이나 배에 생긴 병과 같다(寇賊在外, 四支之疾, 內政不理, 心腹之疾也)"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심복지환은 몸 속의 가슴이나 배에 생긴 질병처럼 없애기 어려운 근심거리나 병폐, 환란 등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左氏傳(좌씨전):哀公(애공) 11년 | 後漢書(후한서):陳蕃傳(진번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
心腹之疾(심복지질) | 腹心之疾(복심지질) |
참조어
吴市吹箫(오시취소,Wúshìchuīxiāo) | 掘墓鞭屍(굴묘편시) | 日暮途遠(일모도원) | 心腹之患(심복지환) |
좌씨전, 좌씨전:애공, 후한서, 후한서:진번전, 사기, 사기:오자서열전
左氏傳, 左氏傳:哀公, 後漢書, 後漢書:陳蕃傳, 史記, 史記:伍子胥列傳
心腹之患(xīnfùzhīhuàn)
心 마음 심 | 腹 배 복 | 之 갈 지 | 患 근심 환 |
'가슴이나 배에 생긴 병'이라는 뜻으로, 쉽게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 또는 없애기 어려운 근심이나 병폐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좌씨전(左氏傳)》과 《후한서(後漢書)》 등에서 유래되었다.
심복지질(心腹之疾) 또는 복심지질(腹心之疾)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에 오(吳)나라 왕 합려(闔閭)는 월(越)나라 왕 구천(勾踐)과 싸우다 상처를 입어 죽었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군사력을 키워 월나라를 정벌함으로써 아버지의 원한을 갚았다. 부차가 제(齊)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 구천이 신하들을 이끌고 와서 부차와 대신들에게 재물을 바쳤으므로, 오나라 대신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러나 오자서(伍子胥)만은 월나라의 그러한 행동이 오나라의 경계심을 늦추게 하려는 속셈임을 간파하였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제나라는 우리에게 쓸모없는 자갈밭과 마찬가지이니 공격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월나라는 우리에게 가슴이나 배에 생긴 질병과 같은 존재입니다(越在我, 心腹之疾也). 월나라가 지금은 겉으로 복종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계책을 도모하고 있을 것입니다. 왕께서 빨리 월나라를 멸하여 후환을 없애지 않고, 도리어 제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부차는 이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오나라는 나중에 월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이 고사는 《좌씨전》의 '애공(哀公) 11년'조(條)에 실려 있다.
또 《후한서》의 〈진번전(陳蕃傳)〉에 "나라 밖에 왜구나 도적이 있는 것은 사지에 든 병과 같지만, 나라 안의 정치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가슴이나 배에 생긴 병과 같다(寇賊在外, 四支之疾, 內政不理, 心腹之疾也)"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심복지환은 몸 속의 가슴이나 배에 생긴 질병처럼 없애기 어려운 근심거리나 병폐, 환란 등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左氏傳(좌씨전):哀公(애공) 11년 | 後漢書(후한서):陳蕃傳(진번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
心腹之疾(심복지질) | 腹心之疾(복심지질) |
참조어
吴市吹箫(오시취소,Wúshìchuīxiāo) | 掘墓鞭屍(굴묘편시) | 日暮途遠(일모도원) | 心腹之患(심복지환) |
좌씨전, 좌씨전:애공, 후한서, 후한서:진번전, 사기, 사기:오자서열전
左氏傳, 左氏傳:哀公, 後漢書, 後漢書:陳蕃傳, 史記, 史記:伍子胥列傳
巢毁卵破 (소훼난파)
巢毁卵破(소훼난파)
巢毁卵破[cháohuǐluǎnpò]
巢 새집 소 | 毁 헐 훼 | 卵 알 난(란) | 破 깨뜨릴 파, 무너질 피 |
새집이 부서지면 알도 깨진다는 뜻으로, 국가(國家)나 사회(社會) 또는 조직(組織)이나 집단(集團)이 무너지면 그 구성원들도 피해(被害)를 입게 됨을 이르는 말
후한서(後漢書) 정공순(鄭孔荀)열전의 이야기다.
동한(東漢)말기, 공자의 20세손인 공융(孔融)은 한나라 헌제(獻帝) 밑에서 벼슬을 지냈다. 공융은 일찍이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조조(曹操)의 야심을 간파하고 그를 멀리하였다. 때문에 조조는 공융에게 분노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유비와 손권을 공격하려는 조조의 계획을 반대했던 공융은, 그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던 한 대부의 모략으로 조조에게 체포되었다.
공융의 7세 된 딸과 9세 된 아들은, 아버지가 잡혀 가던 순간 묵묵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도망하라고 했지만, 공융의 딸은 매우 침착하게 '새집이 부서졌는데 알이 어찌 깨지지 않겠습니까[安有巢毁而卵不破乎]'라고 말했다. 공융의 딸은 조조에게 붙잡혀 와서도 죽은 뒤에 혼령이나마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고 형의 집행을 기다렸다.
巢毁卵破 이란 조직이나 집단이 무너지면 그 구성원들도 피해를 입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정공순(鄭孔荀)열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鸡飞蛋打[jīfēidàndǎ] 닭은 날아가고 달걀도 깨지다. 양쪽으로 다 망치다 |
반의어·상대어
完好无损[wánhǎowúsǔn] 완전하고 손상이 없다. |
巢毁卵破[cháohuǐluǎnpò]
巢 새집 소 | 毁 헐 훼 | 卵 알 난(란) | 破 깨뜨릴 파, 무너질 피 |
새집이 부서지면 알도 깨진다는 뜻으로, 국가(國家)나 사회(社會) 또는 조직(組織)이나 집단(集團)이 무너지면 그 구성원들도 피해(被害)를 입게 됨을 이르는 말
후한서(後漢書) 정공순(鄭孔荀)열전의 이야기다.
동한(東漢)말기, 공자의 20세손인 공융(孔融)은 한나라 헌제(獻帝) 밑에서 벼슬을 지냈다. 공융은 일찍이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조조(曹操)의 야심을 간파하고 그를 멀리하였다. 때문에 조조는 공융에게 분노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유비와 손권을 공격하려는 조조의 계획을 반대했던 공융은, 그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던 한 대부의 모략으로 조조에게 체포되었다.
공융의 7세 된 딸과 9세 된 아들은, 아버지가 잡혀 가던 순간 묵묵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도망하라고 했지만, 공융의 딸은 매우 침착하게 '새집이 부서졌는데 알이 어찌 깨지지 않겠습니까[安有巢毁而卵不破乎]'라고 말했다. 공융의 딸은 조조에게 붙잡혀 와서도 죽은 뒤에 혼령이나마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고 형의 집행을 기다렸다.
巢毁卵破 이란 조직이나 집단이 무너지면 그 구성원들도 피해를 입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정공순(鄭孔荀)열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鸡飞蛋打[jīfēidàndǎ] 닭은 날아가고 달걀도 깨지다. 양쪽으로 다 망치다 |
반의어·상대어
完好无损[wánhǎowúsǔn] 완전하고 손상이 없다. |
釜底游魚 (부저유어)
釜底游魚(부저유어)
釜 가마 부 | 底 밑 저 | 游 헤엄칠 유 | 魚 고기 어 |
물고기가 솥바닥에서 헤엄친다는 뜻으로, 상황(狀況)이 극히 위험(危險)한 상태(狀態)에 이름을 비유한 말.
후한서(後漢書) 장강(張綱)전의 이야기.
동한(東漢) 순제(順帝) 때, 조정에는 장강(張綱)이라는 낮은 벼슬아치가 있었다. 그는 충실하고 강직하여 아부를 몰랐다. 당시 대장군으로 양기(梁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황후인 누이를 믿고 마음대로 행동하였다.
장강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황제에게 양기의 탐욕스런 행위를 밝혀 조정 백관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양기의 세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황제도 감히 그를 어찌하지는 못했다. 그 후 양기는 장강에게 깊은 앙심을 품게 되었다.
얼마 후, 광릉(廣陵)의 장영(張嬰)이 모반을 일으키고 자사(刺史)를 죽이자 사태가 긴박해졌다. 양기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보복을 하고자, 장강을 광릉의 태수로 임명하여 그를 광릉으로 보냈다.
時<廣陵>賊<張嬰>等衆數萬人, 殺刺史、二千石, 寇亂<揚徐>閒, 積十餘年, 朝廷不能討. <冀>乃諷尙書, 以<綱>爲<廣陵>太守, 因欲以事中之. 前遣郡守, 率多求兵馬, <綱>獨請單車之職.
장강은 양기의 이러한 계책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임지로 떠났다. 장강은 부임하자 곧 장영을 만나 그를 설득하며 반드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장영은 장강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희들은 살기 위하여 이렇게 모여 일을 일으켰습니다. 물고기가 솥바닥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이, 잠시 숨만을 쉬고 있을 뿐입니다[若魚游釜中, 喘息須臾間耳]. 이제 대인께서 명철하시니 저희들에 살길이 있다면 기꺼이 조정에 귀순하겠습니다."
<嬰>初大驚, 旣見<綱>誠信, 乃出拜謁. <綱>延置上坐, 問所疾苦. 乃譬之曰:前後二千石多肆貪暴, 故致公等懷憤相聚. 二千石信有罪矣, 然爲之者又非義也. 今主上仁聖, 欲以文德服叛, 故遣太守, 思以爵祿相榮, 不願以刑罰相加, 今誠轉禍爲福之時也. 若聞義不服, 天子赫然震怒, <荊>、<揚>、<兗>、<豫>大兵雲合, 豈不危乎? 若不料彊弱, 非明也;弃善取惡, 非智也;去順效逆, 非忠也;身絶血嗣, 非孝也;背正從邪, 非直也;見義不爲, 非勇也:六者成敗之幾, 利害所從, 公其深計之. <嬰>聞, 泣下, 曰:荒裔愚人, 不能自通朝廷, 不堪侵枉, 遂復相聚偸生, 若魚遊釜中, 喘息須臾閒耳. 今聞明府之言, 乃<嬰>等更生之(晨)[辰]也. 旣陷不義, 實恐投兵之日, 不免孥戮.
이튿날, 장강은 그들의 투항을 받아들이고, 곧 다시 그들을 석방하였다. 이렇게 하여 장강은 큰 공을 세우며,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부임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綱>在郡一年, 年四十六卒. 百姓老幼相携, 詣府赴哀者不可勝數.
출전
후한서 권86 열전(列傳) 제46 장강전(張綱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劫數難逃(겁수난도) 액운(厄運)은 벗어나기 어려움 |
釜 가마 부 | 底 밑 저 | 游 헤엄칠 유 | 魚 고기 어 |
물고기가 솥바닥에서 헤엄친다는 뜻으로, 상황(狀況)이 극히 위험(危險)한 상태(狀態)에 이름을 비유한 말.
후한서(後漢書) 장강(張綱)전의 이야기.
동한(東漢) 순제(順帝) 때, 조정에는 장강(張綱)이라는 낮은 벼슬아치가 있었다. 그는 충실하고 강직하여 아부를 몰랐다. 당시 대장군으로 양기(梁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황후인 누이를 믿고 마음대로 행동하였다.
장강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황제에게 양기의 탐욕스런 행위를 밝혀 조정 백관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양기의 세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황제도 감히 그를 어찌하지는 못했다. 그 후 양기는 장강에게 깊은 앙심을 품게 되었다.
얼마 후, 광릉(廣陵)의 장영(張嬰)이 모반을 일으키고 자사(刺史)를 죽이자 사태가 긴박해졌다. 양기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보복을 하고자, 장강을 광릉의 태수로 임명하여 그를 광릉으로 보냈다.
時<廣陵>賊<張嬰>等衆數萬人, 殺刺史、二千石, 寇亂<揚徐>閒, 積十餘年, 朝廷不能討. <冀>乃諷尙書, 以<綱>爲<廣陵>太守, 因欲以事中之. 前遣郡守, 率多求兵馬, <綱>獨請單車之職.
장강은 양기의 이러한 계책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임지로 떠났다. 장강은 부임하자 곧 장영을 만나 그를 설득하며 반드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장영은 장강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희들은 살기 위하여 이렇게 모여 일을 일으켰습니다. 물고기가 솥바닥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이, 잠시 숨만을 쉬고 있을 뿐입니다[若魚游釜中, 喘息須臾間耳]. 이제 대인께서 명철하시니 저희들에 살길이 있다면 기꺼이 조정에 귀순하겠습니다."
<嬰>初大驚, 旣見<綱>誠信, 乃出拜謁. <綱>延置上坐, 問所疾苦. 乃譬之曰:前後二千石多肆貪暴, 故致公等懷憤相聚. 二千石信有罪矣, 然爲之者又非義也. 今主上仁聖, 欲以文德服叛, 故遣太守, 思以爵祿相榮, 不願以刑罰相加, 今誠轉禍爲福之時也. 若聞義不服, 天子赫然震怒, <荊>、<揚>、<兗>、<豫>大兵雲合, 豈不危乎? 若不料彊弱, 非明也;弃善取惡, 非智也;去順效逆, 非忠也;身絶血嗣, 非孝也;背正從邪, 非直也;見義不爲, 非勇也:六者成敗之幾, 利害所從, 公其深計之. <嬰>聞, 泣下, 曰:荒裔愚人, 不能自通朝廷, 不堪侵枉, 遂復相聚偸生, 若魚遊釜中, 喘息須臾閒耳. 今聞明府之言, 乃<嬰>等更生之(晨)[辰]也. 旣陷不義, 實恐投兵之日, 不免孥戮.
이튿날, 장강은 그들의 투항을 받아들이고, 곧 다시 그들을 석방하였다. 이렇게 하여 장강은 큰 공을 세우며,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부임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綱>在郡一年, 年四十六卒. 百姓老幼相携, 詣府赴哀者不可勝數.
출전
후한서 권86 열전(列傳) 제46 장강전(張綱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劫數難逃(겁수난도) 액운(厄運)은 벗어나기 어려움 |
盤根錯節 (반근착절)
盤根錯節(반근착절)
盤 소반 반 | 根 뿌리 근 | 錯 어긋날 착, 둘 조 | 節 마디 절 |
구부러진 나무뿌리와 어긋난 나무 마디란 뜻으로, ①얽히고 설켜 처리(處理)하기에 곤란(困難)한 사건(事件) ②세상일(世上-)에 난관이 많음의 비유(比喩ㆍ譬喩) ③세력(勢力)이 단단히 뿌리박혀 흔들리지 아니함
후한의 6대 황제 안제(安帝)가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모후(母后)가 수렴청정하고 모후의 오빠 등즐은 대장군에 올라 병권을 장악하였다. 이 무렵 서북 변방에 있는 티베트계의 유목민족인 강족(羌族)이 빈번하게 침략하였고, 선비와 흉노도 침략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가뭄으로 흉년마저 일어나자 등즐은 재정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병주(幷州)만 방어하고 양주(凉州)는 포기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벼슬이 낭중(郎中)인 우후는, 양주는 선인이 애써 개척한 지역이며, 걸출한 많은 인재와 무사를 배출하였으므로 반드시 지켜야 할 상징적인 의미가 컸고, 서쪽을 포기하면 그 주민이 내지로 들어와 토착민과 마찰을 일으킬 것이 자명하므로 등즐의 결정에 반발하였다. 중신들도 우후의 의견과 같았기 때문에 등즐의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자 등즐은 우후를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등즐은 우후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그를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때 조가현(朝歌縣)에서 폭도들이 현령을 살해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등즐은 우후를 조가현의 현령으로 임명하였다. 우후의 친지들은 한결같이 조문을 했다고 한다. 기세가 다양한 적(敵)과 싸워서 전사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후는 “안이한 뜻을 구하지 않고 험한 일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도리가 아닌가. 서린 뿌리와 뒤틀린 마디를 피한다면 어디서 이 예리한 칼날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志不求易 事不避難 臣之職也 不遇盤根錯節 何以別利器乎]”라고 반문하고 나서 조가현에 부임하고 지략을 발휘하여 반란을 평정하였다.
출전
後漢書(후한서) 虞詡傳(우후전)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盤根錯節(반근착절) | 盤錯(반착) |
盤 소반 반 | 根 뿌리 근 | 錯 어긋날 착, 둘 조 | 節 마디 절 |
구부러진 나무뿌리와 어긋난 나무 마디란 뜻으로, ①얽히고 설켜 처리(處理)하기에 곤란(困難)한 사건(事件) ②세상일(世上-)에 난관이 많음의 비유(比喩ㆍ譬喩) ③세력(勢力)이 단단히 뿌리박혀 흔들리지 아니함
후한의 6대 황제 안제(安帝)가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모후(母后)가 수렴청정하고 모후의 오빠 등즐은 대장군에 올라 병권을 장악하였다. 이 무렵 서북 변방에 있는 티베트계의 유목민족인 강족(羌族)이 빈번하게 침략하였고, 선비와 흉노도 침략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가뭄으로 흉년마저 일어나자 등즐은 재정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병주(幷州)만 방어하고 양주(凉州)는 포기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벼슬이 낭중(郎中)인 우후는, 양주는 선인이 애써 개척한 지역이며, 걸출한 많은 인재와 무사를 배출하였으므로 반드시 지켜야 할 상징적인 의미가 컸고, 서쪽을 포기하면 그 주민이 내지로 들어와 토착민과 마찰을 일으킬 것이 자명하므로 등즐의 결정에 반발하였다. 중신들도 우후의 의견과 같았기 때문에 등즐의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자 등즐은 우후를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등즐은 우후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그를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때 조가현(朝歌縣)에서 폭도들이 현령을 살해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등즐은 우후를 조가현의 현령으로 임명하였다. 우후의 친지들은 한결같이 조문을 했다고 한다. 기세가 다양한 적(敵)과 싸워서 전사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후는 “안이한 뜻을 구하지 않고 험한 일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도리가 아닌가. 서린 뿌리와 뒤틀린 마디를 피한다면 어디서 이 예리한 칼날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志不求易 事不避難 臣之職也 不遇盤根錯節 何以別利器乎]”라고 반문하고 나서 조가현에 부임하고 지략을 발휘하여 반란을 평정하였다.
출전
後漢書(후한서) 虞詡傳(우후전)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盤根錯節(반근착절) | 盤錯(반착) |
妄自尊大 (망자존대)
妄自尊大(망자존대)
妄 허망할 망 | 自 스스로 자 | 尊 높을 존 | 大 큰 대 |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의 이야기. 동한(東漢) 초, 유수(劉秀)는 동한을 건국하고 광무제(光武帝)가 되었지만, 전국은 여전히 군웅들이 날뛰는 상태였다. 당시 최대의 세력 중의 하나인 공손술(公孫述)은 사천지방에서 황제가 되었다. 한편 감숙 일대를 점거하고 있던 외효( )는 정치적인 출로(出路)를 찾기 위해, 마원을 공손술에게 보냈다. 마원은 공손술과 동향이었므로, 그가 자신을 환영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마원은 공손술의 의례적인 접견에 매우 실망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 왔다. 그는 외효에게 말하였다.
공손술은 진지한 마음으로 인재들을 받아들여 함께 일을 하려고 하기는 커녕 스스로 잘난체 교만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식견이 얕은 사람으로서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을 뿐이며, 스스로 잘난 체 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었습니다[井底蛙耳, 妄自尊大]. 우리의 뜻을 동쪽의 유수에게 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妄自尊大란 교만을 부리며 잘난 체함을 뜻한다.
妄 허망할 망 | 自 스스로 자 | 尊 높을 존 | 大 큰 대 |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의 이야기. 동한(東漢) 초, 유수(劉秀)는 동한을 건국하고 광무제(光武帝)가 되었지만, 전국은 여전히 군웅들이 날뛰는 상태였다. 당시 최대의 세력 중의 하나인 공손술(公孫述)은 사천지방에서 황제가 되었다. 한편 감숙 일대를 점거하고 있던 외효( )는 정치적인 출로(出路)를 찾기 위해, 마원을 공손술에게 보냈다. 마원은 공손술과 동향이었므로, 그가 자신을 환영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마원은 공손술의 의례적인 접견에 매우 실망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 왔다. 그는 외효에게 말하였다.
공손술은 진지한 마음으로 인재들을 받아들여 함께 일을 하려고 하기는 커녕 스스로 잘난체 교만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식견이 얕은 사람으로서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을 뿐이며, 스스로 잘난 체 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었습니다[井底蛙耳, 妄自尊大]. 우리의 뜻을 동쪽의 유수에게 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妄自尊大란 교만을 부리며 잘난 체함을 뜻한다.
當同伐異 (당동벌이)
當同伐異(당동벌이)
當 마땅 당 | 同 한가지 동 | 伐 칠 벌 | 異 다를 이
옳고 그름의 여하간에 한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무리의 사람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을 이르는 말.
《후한서(後漢書)》 당동전(黨同傳)에서 비롯된 말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룩한 이래 중국의 권력은 오직 황제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자연히 황제를 둘러싼 친위 집단이 권력을 농단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을 이룬 것이 환관과 외척 세력이었다. 또 한(漢)나라 때에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유학을 공부한 선비 집단이 성장하였다. 그런데 왕망(王莽)이 제위를 찬탈하자 선비들은 초야로 피해 청의(淸議)를 일삼고, 자연스럽게 명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하는 무리들이 모였다. 이를 당인(黨人)이라 한다.
후한 때에는 화제(和帝) 이후 역대 황제가 모두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래서 황태후가 섭정이 되고, 이 과정에서 황태후의 친인척인 외척들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후일 장성한 황제는 이들의 전횡을 탐탁치 않게 여겨 자신의 친위 세력을 키우고 이들을 제거해 나가는데, 그 중심이 된 세력이 바로 환관이었다.
환관들은 신분 상승의 욕구 때문에 스스로 거세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집단의 결속력이 유달리 강하고, 사회적 책임이나 정치적 경륜보다는 자신들의 이해에 민감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권력을 쥐면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게 마련이었다. 유교적 교양을 쌓은 예비 관료 집단인 선비들이 환관의 농단으로 국정이 문란하고 풍속이 타락해 가는 것을 방관만 하고 있을 리 없었다.
이들도 명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모여 전국적으로 방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비 집단과 외척, 환관 세력이 서로 물고 물리는 정권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옳고 그름을 떠나 다른 집단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은 예상되는 일이었다. 이를 가리키는 말이 당동벌이이다.
좁게는 당고(黨錮)의 옥(獄) 이후 이응(李膺)을 중심으로 한 당인들이 유교적 지식 계급 이외의 세력을 적대시하던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전한은 외척이 망쳤고, 후한은 환관이 망쳤다고 한다. 후한 말에 이르러 환관들은 외척과 선비 집단을 철저히 탄압하고, 그 결과로 지식인 관료 집단인 선비 집단이 황실을 버림으로써 후한이 자멸하게 되었다.
當 마땅 당 | 同 한가지 동 | 伐 칠 벌 | 異 다를 이
옳고 그름의 여하간에 한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무리의 사람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을 이르는 말.
《후한서(後漢書)》 당동전(黨同傳)에서 비롯된 말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룩한 이래 중국의 권력은 오직 황제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자연히 황제를 둘러싼 친위 집단이 권력을 농단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을 이룬 것이 환관과 외척 세력이었다. 또 한(漢)나라 때에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유학을 공부한 선비 집단이 성장하였다. 그런데 왕망(王莽)이 제위를 찬탈하자 선비들은 초야로 피해 청의(淸議)를 일삼고, 자연스럽게 명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하는 무리들이 모였다. 이를 당인(黨人)이라 한다.
후한 때에는 화제(和帝) 이후 역대 황제가 모두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래서 황태후가 섭정이 되고, 이 과정에서 황태후의 친인척인 외척들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후일 장성한 황제는 이들의 전횡을 탐탁치 않게 여겨 자신의 친위 세력을 키우고 이들을 제거해 나가는데, 그 중심이 된 세력이 바로 환관이었다.
환관들은 신분 상승의 욕구 때문에 스스로 거세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집단의 결속력이 유달리 강하고, 사회적 책임이나 정치적 경륜보다는 자신들의 이해에 민감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권력을 쥐면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게 마련이었다. 유교적 교양을 쌓은 예비 관료 집단인 선비들이 환관의 농단으로 국정이 문란하고 풍속이 타락해 가는 것을 방관만 하고 있을 리 없었다.
이들도 명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모여 전국적으로 방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비 집단과 외척, 환관 세력이 서로 물고 물리는 정권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옳고 그름을 떠나 다른 집단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은 예상되는 일이었다. 이를 가리키는 말이 당동벌이이다.
좁게는 당고(黨錮)의 옥(獄) 이후 이응(李膺)을 중심으로 한 당인들이 유교적 지식 계급 이외의 세력을 적대시하던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전한은 외척이 망쳤고, 후한은 환관이 망쳤다고 한다. 후한 말에 이르러 환관들은 외척과 선비 집단을 철저히 탄압하고, 그 결과로 지식인 관료 집단인 선비 집단이 황실을 버림으로써 후한이 자멸하게 되었다.
狼狽 (낭패, lángbèi)
狼狽(낭패)
狼狈(lángbèi)
狼 이리 낭(랑) | 狽 이리 패,낭패할 패 |
① 다리 없는 두 마리의 이리가 처한 곤경. 패(狽)와 낭(狼)은 다 이리의 일종으로서 낭은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으며, 패는 그와 반대이므로 그 두 짐승이 같이 나란히 걷다가 서로 사이가 벌어지면 균형을 잃고 넘어지게 되므로 당황하게 되는 데서 유래한 말 ② 계획(計劃)하거나 기대(期待)한 일이 실패(失敗)하거나 어긋나 딱하게 됨
'낭패'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 생활 중에 자주 쓰이는 말이다. 어떤 일을 도모했을 때 잘 풀리지 않아 처지가 고약하게 꼬이는 경우에 사용한다.
'낭'이나 '패'나 한결같이 개사슴록(犬)변으로 이뤄졌다. 한자에서 犬변이 들어 있는 글자는 모두 동물이거나 또는 동물의 특성을 함축한 글자다.
예를 들면 여우 호(弧), 개 구(狗), 삵쾡이 리(狸), 돼지 저(猪), 고양이 묘(猫) 등등이다.
낭(狼)과 패(狽)도 마찬가지다. 낭과 패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낭(狼)은 태어날 때부터 뒷다리 두 개가 없거나 아주 짧다. 그런가 하면 패(狽)는 앞다리 두 개가 없거나 짧다. 그런 이유로 걸을 때 狈(패)는 낭의 몸에 앞다리를 걸쳐야 했다. 하지만 두 마리가 같이 걸으려면 어지간히 사이가 좋지 않고서는 넘어지기 일쑤였다.
낭과 패의 성품을 분석해 보면, 낭은 성질이 흉포하지만 지모(智謀)가 부족하다. 반대로 패는 순한 듯 싶은데도 지모가 뛰어나다. 그래서 함께 먹이를 찾으러 나갈 때엔 패의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도 마음이 바뀌면 문제가 생긴다. 서로 고집을 피우면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곤경에 처한 의미가 파생되었다.
[출전]
後漢書(후한서) : 李杜列傳(이두열전) | 酉陽雜俎(유양잡조) : 卷十六 |
간사하고 꾀가 많다는 뜻의 교활(狡猾)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 역시 개사슴록 (犬)변이다. 교(狡)나 활(猾)도 모두 동물 이름이다. 물론 실존하는 것은 아니며 전설상의 동물이다.
《산해경》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 동물에 대한 특성이 있다.
교(狡)는 옥산(玉山)에 살며 개와 같지만 표범 무늬를 하고 있다. 머리에는 쇠뿔을 달고 있으니 그 형상이 괴이하다. 울음소리 역시 개와 비슷하다고 적혀 있다. 한가지 특별한 것은 이놈이 나타나면 그해엔 여지없이 풍작이다. 그런 점에서 교는 길조이며 어느 누구나 반긴다.
교(狡)의 주변에는 활(猾)이 있다. 이놈은 아주 간악하다. 사는 곳은 요광산 (堯光山)인데 몸뚱이에는 돼지털이 나 있으며 동굴 안에서 겨울잠을 잔다. 한소리 기합을 지르듯 울어대면 온 천하가 큰 혼란에 빠져 버린다. 사람들은 모두 흉조의 상징이기 때문에 활을 두려워 한다.
교(狡)나 활(猾)은 산 속에서 호랑이 같은 맹수를 만나면 스스로의 몸을 구부려 공처럼 만들어 버린다.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삼키려 들면 재빨리 입안으로 들어가 내장으로 굴러가 그것을 파먹는다. 배가 아파 호랑이가 날뛰면 맘껏 내장을 뜯어 먹는다. 그리고 호랑이가 죽으면 그제야 유유히 뱃속에서 빠져 나온다.
[출전]
山海經(산해경) : 南山經, 西山經 |
망설여 결행하지 못하는 뜻의 유예(猶豫)라는 말도 동물에서 나왔다. 유(猶)는 의심이 많은 동물이다. 이놈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나무 위로 숨어 버린다. 유의 본래 뜻은 원숭이다. 예(豫)는 상(象)자가 있으므로 코끼리다. 아마 지금의 큰 코끼리보다 더 커서 매우 동작이 느렸을 것이다.
참조 한자어
유의어
狼狽不堪(낭패불감) | 進退兩難(진퇴유곡) | 進退惟谷(진퇴양난) |
참조어
到處狼狽(도처낭패) ①하는 일마다 모두 실패(失敗)함 ②가는 곳마다 뜻밖의 화를 입음 |
勸上搖木(권상요목) 나무에 오르라 하고, 흔들어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남을 부추겨 놓고 낭패를 보도록 방해(妨害)함이라는 말 |
觸處逢敗(촉처봉패) 가서 닥치는 곳마다 낭패를 당(當)함 |
後漢書(후한서) : 李杜列傳(이두열전) | 酉陽雜俎(유양잡조) : 卷十六 | 山海經(산해경) : 南山經, 西山經 |
狼狈(lángbèi)
狼 이리 낭(랑) | 狽 이리 패,낭패할 패 |
① 다리 없는 두 마리의 이리가 처한 곤경. 패(狽)와 낭(狼)은 다 이리의 일종으로서 낭은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으며, 패는 그와 반대이므로 그 두 짐승이 같이 나란히 걷다가 서로 사이가 벌어지면 균형을 잃고 넘어지게 되므로 당황하게 되는 데서 유래한 말 ② 계획(計劃)하거나 기대(期待)한 일이 실패(失敗)하거나 어긋나 딱하게 됨
'낭패'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 생활 중에 자주 쓰이는 말이다. 어떤 일을 도모했을 때 잘 풀리지 않아 처지가 고약하게 꼬이는 경우에 사용한다.
'낭'이나 '패'나 한결같이 개사슴록(犬)변으로 이뤄졌다. 한자에서 犬변이 들어 있는 글자는 모두 동물이거나 또는 동물의 특성을 함축한 글자다.
예를 들면 여우 호(弧), 개 구(狗), 삵쾡이 리(狸), 돼지 저(猪), 고양이 묘(猫) 등등이다.
낭(狼)과 패(狽)도 마찬가지다. 낭과 패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낭(狼)은 태어날 때부터 뒷다리 두 개가 없거나 아주 짧다. 그런가 하면 패(狽)는 앞다리 두 개가 없거나 짧다. 그런 이유로 걸을 때 狈(패)는 낭의 몸에 앞다리를 걸쳐야 했다. 하지만 두 마리가 같이 걸으려면 어지간히 사이가 좋지 않고서는 넘어지기 일쑤였다.
낭과 패의 성품을 분석해 보면, 낭은 성질이 흉포하지만 지모(智謀)가 부족하다. 반대로 패는 순한 듯 싶은데도 지모가 뛰어나다. 그래서 함께 먹이를 찾으러 나갈 때엔 패의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도 마음이 바뀌면 문제가 생긴다. 서로 고집을 피우면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곤경에 처한 의미가 파생되었다.
[출전]
後漢書(후한서) : 李杜列傳(이두열전) | 酉陽雜俎(유양잡조) : 卷十六 |
간사하고 꾀가 많다는 뜻의 교활(狡猾)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 역시 개사슴록 (犬)변이다. 교(狡)나 활(猾)도 모두 동물 이름이다. 물론 실존하는 것은 아니며 전설상의 동물이다.
《산해경》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 동물에 대한 특성이 있다.
교(狡)는 옥산(玉山)에 살며 개와 같지만 표범 무늬를 하고 있다. 머리에는 쇠뿔을 달고 있으니 그 형상이 괴이하다. 울음소리 역시 개와 비슷하다고 적혀 있다. 한가지 특별한 것은 이놈이 나타나면 그해엔 여지없이 풍작이다. 그런 점에서 교는 길조이며 어느 누구나 반긴다.
교(狡)의 주변에는 활(猾)이 있다. 이놈은 아주 간악하다. 사는 곳은 요광산 (堯光山)인데 몸뚱이에는 돼지털이 나 있으며 동굴 안에서 겨울잠을 잔다. 한소리 기합을 지르듯 울어대면 온 천하가 큰 혼란에 빠져 버린다. 사람들은 모두 흉조의 상징이기 때문에 활을 두려워 한다.
교(狡)나 활(猾)은 산 속에서 호랑이 같은 맹수를 만나면 스스로의 몸을 구부려 공처럼 만들어 버린다.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삼키려 들면 재빨리 입안으로 들어가 내장으로 굴러가 그것을 파먹는다. 배가 아파 호랑이가 날뛰면 맘껏 내장을 뜯어 먹는다. 그리고 호랑이가 죽으면 그제야 유유히 뱃속에서 빠져 나온다.
[출전]
山海經(산해경) : 南山經, 西山經 |
망설여 결행하지 못하는 뜻의 유예(猶豫)라는 말도 동물에서 나왔다. 유(猶)는 의심이 많은 동물이다. 이놈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나무 위로 숨어 버린다. 유의 본래 뜻은 원숭이다. 예(豫)는 상(象)자가 있으므로 코끼리다. 아마 지금의 큰 코끼리보다 더 커서 매우 동작이 느렸을 것이다.
참조 한자어
유의어
狼狽不堪(낭패불감) | 進退兩難(진퇴유곡) | 進退惟谷(진퇴양난) |
참조어
到處狼狽(도처낭패) ①하는 일마다 모두 실패(失敗)함 ②가는 곳마다 뜻밖의 화를 입음 |
勸上搖木(권상요목) 나무에 오르라 하고, 흔들어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남을 부추겨 놓고 낭패를 보도록 방해(妨害)함이라는 말 |
觸處逢敗(촉처봉패) 가서 닥치는 곳마다 낭패를 당(當)함 |
後漢書(후한서) : 李杜列傳(이두열전) | 酉陽雜俎(유양잡조) : 卷十六 | 山海經(산해경) : 南山經, 西山經 |
擧案齊眉 (거안제미)
擧案齊眉(거안제미)
举案齐眉(jǔ àn qí méi)。
擧 들 거 | 案 책상 안 | 齊 가지런할 제, 재계할 재, 옷자락 자, 자를 전 | 眉 눈썹 미 |
밥상을 눈썹 높이로 들어 공손(恭遜)히 남편(男便) 앞에 가지고 간다는 뜻으로, 남편(男便)을 깍듯이 공경(恭敬)함을 일컫는 말
후한서(後漢書) 양홍전(梁鴻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시대, 집은 가난하지만 절개가 곧은 양홍(梁鴻)이란 학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 부모를 잃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태학(太學)을 마쳐 많은 학식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들에서 돼지를 기르며 살았다.
그런데 맹(孟)씨라는 사람의 집에 다 자란 딸 맹광(孟光)이 있었는데, 그녀는 뚱뚱한 몸매에 시커먼 얼굴, 게다가 힘은 장사였다. 그녀의 부모가 그녀에게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묻자, 그녀는 '양홍(梁鴻)같은 훌륭한 분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라고 대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양홍(梁鴻)은 이 처녀에게 청혼을 하여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며칠이 지나도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자 색시가 궁금하여 그 이유를 물었다.
양홍(梁鴻)이 대답(對答)하기를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 옷을 입고 깊은 산 속에서 살 수 있는 그런 여자였소."라고 했다. 그러자 색시는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對答)했다.
그 후로 그녀는 화장도 하지 않고 산골 농부의 차림으로 양홍(梁鴻)과 산 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생활했다. 양홍(梁鴻)은 농사짓는 틈틈이 시를 지어 친구(親舊)들에게 보냈는데, 왕실을 비방하는 시가 발각되어 오(吳)나라로 건너가 고백통이라는 병문가의 방앗간지기가 되어 지냈다. 그러나 양홍(梁鴻)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내는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올려 남편에게 공손하게 바쳤다고 한다. [不敢于鴻前仰視, 擧案齊眉] 고백통은 양홍(梁鴻) 내외를 보통으로 보지 않고 그들을 도왔고, 양홍(梁鴻)은 수십 편의 책을 저술할 수가 있었다.
擧案齊眉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함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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举案齐眉(jǔ àn qí méi)。
擧 들 거 | 案 책상 안 | 齊 가지런할 제, 재계할 재, 옷자락 자, 자를 전 | 眉 눈썹 미 |
밥상을 눈썹 높이로 들어 공손(恭遜)히 남편(男便) 앞에 가지고 간다는 뜻으로, 남편(男便)을 깍듯이 공경(恭敬)함을 일컫는 말
후한서(後漢書) 양홍전(梁鴻傳)의 이야기다.
동한(東漢)시대, 집은 가난하지만 절개가 곧은 양홍(梁鴻)이란 학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 부모를 잃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태학(太學)을 마쳐 많은 학식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들에서 돼지를 기르며 살았다.
그런데 맹(孟)씨라는 사람의 집에 다 자란 딸 맹광(孟光)이 있었는데, 그녀는 뚱뚱한 몸매에 시커먼 얼굴, 게다가 힘은 장사였다. 그녀의 부모가 그녀에게 결혼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묻자, 그녀는 '양홍(梁鴻)같은 훌륭한 분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라고 대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양홍(梁鴻)은 이 처녀에게 청혼을 하여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며칠이 지나도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자 색시가 궁금하여 그 이유를 물었다.
양홍(梁鴻)이 대답(對答)하기를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 옷을 입고 깊은 산 속에서 살 수 있는 그런 여자였소."라고 했다. 그러자 색시는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對答)했다.
그 후로 그녀는 화장도 하지 않고 산골 농부의 차림으로 양홍(梁鴻)과 산 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생활했다. 양홍(梁鴻)은 농사짓는 틈틈이 시를 지어 친구(親舊)들에게 보냈는데, 왕실을 비방하는 시가 발각되어 오(吳)나라로 건너가 고백통이라는 병문가의 방앗간지기가 되어 지냈다. 그러나 양홍(梁鴻)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내는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올려 남편에게 공손하게 바쳤다고 한다. [不敢于鴻前仰視, 擧案齊眉] 고백통은 양홍(梁鴻) 내외를 보통으로 보지 않고 그들을 도왔고, 양홍(梁鴻)은 수십 편의 책을 저술할 수가 있었다.
擧案齊眉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함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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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水馬龍 (거수마용)
車水馬龍(거수마용)
車 수레 거, 수레 차 | 水 물 수 | 馬 말 마 | 龍 용 룡(용), 언덕 롱(농), 얼룩 망, 은총 총 |
수레는 흐르는 물과 같고 말의 움직임은 하늘을 오르는 용과 같다는 뜻으로, 수레와 말의 왕래(往來)가 많아 매우 떠들석한 상황(狀況). 즉, 행렬(行列)이 성대(盛大)한 모양(模樣)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명덕마황후기(明德馬皇后紀)에 실린 이야기다.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가 죽자 태자 유장(劉莊)이 보위를 이으니, 그가 곧 2대 황제인 명제(明帝)다. 동한(東漢)의 명장(名將)인 마원(馬援)의 딸은 한나라 명제(明帝)의 비(妃)로 뽑혀 입궁하였다가 얼마후에는 후(后)의 자리에 올랐다.
마황후는 어질고 덕성스런 여자였다. 명색이 황후이면서도 옷차림이나 생활 태도가 극히 검소하고, 상하 구별을 두지 않고 인자하게 대했으므로 사람들의 경모와 칭송이 자자했다.
마황후의 한 가지 흠결이라면 아들을 못 낳는 것이었다. 그래서 명제는 후궁인 고씨(賈氏)한테서 난 아들을 태자로 삼아 마황후로 하여금 기르도록 했는데, 그녀는 이 아이를 친자식처럼 사랑하며 길렀다. 태자 역시 그녀를 친어머니처럼 여겨 효행이 지극했다.
명제는 제위 18년 만에 죽고, 태자가 보위를 이어받았다. 그가 3대 황제 장제(章帝)다. 따라서 마황후는 자연히 황태후로 대궐의 가장 웃어른이 되어 권위가 막강했다.
일부 간신들은 황태후의 형제들을 제후에 봉해 줄 것을 황제에게 건의하여, 황태후에게 아부하려고 생각하였다. 이에 황태후 마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상(今上),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일찍이 광무 황제께서는 ‘후비(后妃)의 가족은 제후에 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셨지요. 그 뜻이 무엇이겠소? 황실 외척의 세력이 턱없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친정집에 인사차 찾아가는 손님들의 행렬을 보니, ‘수레는 흐르는 물 같고 말들은 늘어져 꿈틀대는 용처럼 보입디다[車如流水 馬如遊龍(거여유수 마여유용)]’. 아부배들이 하는 소리는 절대 이 어미가 바라지도 허락하지도 않을 일이니 명심하세요.”
車水馬龍이란 권세있는 자에게 줄을 대보려는 아부꾼들의 차량 행렬을 묘사한 말이며, 수레들의 왕래가 많아 매우 떠들석한 상황을 뜻한다.
출전
후한서(後漢書)의 마후기(馬后記)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車如流水馬如遊龍(거여유수 마여유용) |
車 수레 거, 수레 차 | 水 물 수 | 馬 말 마 | 龍 용 룡(용), 언덕 롱(농), 얼룩 망, 은총 총 |
수레는 흐르는 물과 같고 말의 움직임은 하늘을 오르는 용과 같다는 뜻으로, 수레와 말의 왕래(往來)가 많아 매우 떠들석한 상황(狀況). 즉, 행렬(行列)이 성대(盛大)한 모양(模樣)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명덕마황후기(明德馬皇后紀)에 실린 이야기다.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가 죽자 태자 유장(劉莊)이 보위를 이으니, 그가 곧 2대 황제인 명제(明帝)다. 동한(東漢)의 명장(名將)인 마원(馬援)의 딸은 한나라 명제(明帝)의 비(妃)로 뽑혀 입궁하였다가 얼마후에는 후(后)의 자리에 올랐다.
마황후는 어질고 덕성스런 여자였다. 명색이 황후이면서도 옷차림이나 생활 태도가 극히 검소하고, 상하 구별을 두지 않고 인자하게 대했으므로 사람들의 경모와 칭송이 자자했다.
마황후의 한 가지 흠결이라면 아들을 못 낳는 것이었다. 그래서 명제는 후궁인 고씨(賈氏)한테서 난 아들을 태자로 삼아 마황후로 하여금 기르도록 했는데, 그녀는 이 아이를 친자식처럼 사랑하며 길렀다. 태자 역시 그녀를 친어머니처럼 여겨 효행이 지극했다.
명제는 제위 18년 만에 죽고, 태자가 보위를 이어받았다. 그가 3대 황제 장제(章帝)다. 따라서 마황후는 자연히 황태후로 대궐의 가장 웃어른이 되어 권위가 막강했다.
일부 간신들은 황태후의 형제들을 제후에 봉해 줄 것을 황제에게 건의하여, 황태후에게 아부하려고 생각하였다. 이에 황태후 마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상(今上),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일찍이 광무 황제께서는 ‘후비(后妃)의 가족은 제후에 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셨지요. 그 뜻이 무엇이겠소? 황실 외척의 세력이 턱없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친정집에 인사차 찾아가는 손님들의 행렬을 보니, ‘수레는 흐르는 물 같고 말들은 늘어져 꿈틀대는 용처럼 보입디다[車如流水 馬如遊龍(거여유수 마여유용)]’. 아부배들이 하는 소리는 절대 이 어미가 바라지도 허락하지도 않을 일이니 명심하세요.”
車水馬龍이란 권세있는 자에게 줄을 대보려는 아부꾼들의 차량 행렬을 묘사한 말이며, 수레들의 왕래가 많아 매우 떠들석한 상황을 뜻한다.
출전
후한서(後漢書)의 마후기(馬后記)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車如流水馬如遊龍(거여유수 마여유용) |
矯枉過正 (교왕과정)
矯枉過正(교왕과정)
矯 바로잡을 교 | 枉 굽을 왕 | 過 지날 과 | 正 바를 정 |
矯枉過正은 교왕과직(矯枉過直)이라고도 하며, 잘못을 바로 잡음에 그 정도가 지나침을 뜻한다.
후한서 중장통(仲長統)전의 이야기. 중장통은 동한(東漢) 영제(靈帝) 때의 유명한 문인이다. 그는 이란편(理亂篇)이라는 글에서, 당시의 정치적 혼란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제왕(帝王)들 중 어떤 이는 썩 총명하지 못하여, 나라 안에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만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라 안의 모든 업적을 모두 자기의 공로로 돌리며 아무도 자신을 뒤엎지 못하리라 믿게 된다. 그 결과, 온 나라가 분란에 휘말리게 되고, 이민족들은 이 틈을 노려 침범해 오며, 마침내 나라는 무너지고 왕조는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하였다.
정치가 잘 이루어지는 때가 되면, 사람들은 모두 부정한 기풍과 혼란을 바로 잡고자 하나, 굽은 것을 바로 잡으면서 마땅한 정도를 지나치게 되기도 한다[復入于矯枉過正之檢]. 때문에, 효과를 얻으려다 도리어 예상한 목적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矯枉過正(교왕과정) | 矯枉過直(교왕과직) |
矯 바로잡을 교 | 枉 굽을 왕 | 過 지날 과 | 正 바를 정 |
矯枉過正은 교왕과직(矯枉過直)이라고도 하며, 잘못을 바로 잡음에 그 정도가 지나침을 뜻한다.
후한서 중장통(仲長統)전의 이야기. 중장통은 동한(東漢) 영제(靈帝) 때의 유명한 문인이다. 그는 이란편(理亂篇)이라는 글에서, 당시의 정치적 혼란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제왕(帝王)들 중 어떤 이는 썩 총명하지 못하여, 나라 안에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만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라 안의 모든 업적을 모두 자기의 공로로 돌리며 아무도 자신을 뒤엎지 못하리라 믿게 된다. 그 결과, 온 나라가 분란에 휘말리게 되고, 이민족들은 이 틈을 노려 침범해 오며, 마침내 나라는 무너지고 왕조는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하였다.
정치가 잘 이루어지는 때가 되면, 사람들은 모두 부정한 기풍과 혼란을 바로 잡고자 하나, 굽은 것을 바로 잡으면서 마땅한 정도를 지나치게 되기도 한다[復入于矯枉過正之檢]. 때문에, 효과를 얻으려다 도리어 예상한 목적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矯枉過正(교왕과정) | 矯枉過直(교왕과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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