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行無常 (제행무상)

諸行無常(제행무상)

諸 모두 제, 김치 저, 어조사 저 | 行 다닐 행, 항렬 항 | 無 없을 무 | 常 떳떳할 상, 항상 상 |

①인생(人生)의 덧없음 ②우리가 거처(居處)하는 우주(宇宙)의 만물(萬物)은 항상(恒常) 돌고 변(變)하여 잠시(暫時)도 한 모양(模樣)으로 머무르지 않음

題烏江亭 (제오강정) 杜牧 (두목)

題烏江亭(제오강정) 杜牧(두목)

勝敗兵家不可期 (승패불가병가기)
包羞忍恥是男兒 (포수인치시남아)
江東子弟多豪傑 (강동자제다재준)
捲土重來未可知 (권토중래미가지)

승패는 兵家(병가)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니
부끄러움을 삭이면서 참는 자가 남아로다
강동의 자제들 가운데는 호걸들이 많지만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올지 아직은 모르겠네

齊人攫金 (제인확금)

齊人攫金(제인확금)

齊 나라이름 제 | 人 사람 인 | 攫 붙잡을 확 | 金 쇠 금 |

금만 보이고 곁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앞뒤 가리고 않고 자신의 이익만 챙긴다는 뜻.


여씨춘추(呂氏春秋) 거유(去宥)편에는 한 날치기의 이야기가 나온다.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매우 탐욕스럽고 재물(財物)을 좋아하여,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는게 하루 일과였다.

어느날 아침, 그는 의관(衣冠)을 잘 차려 입고 시장으로 구경을 나갔다. 그런데 그는 금(金)을 팔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매우 기뻤다. 그는 느닷없이 그 사람에게 달려들어 금을 한 웅큼 웅켜쥐고 도망하기 시작하였다[攫其金而去]. 금을 팔던 사람은 '도둑이야, 저 놈이 내 금을 훔쳐간다'라고 외쳤다.

금을 훔쳐 도망가던 그 사람은 얼마 가지 않아 순찰을 돌던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포졸들이 그에게 대낮에 남의 금을 훔쳐간 이유를 묻자, 그는 뻔뻔스럽게도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금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금만 보았지 사람은 보지 못했소."

齊人攫金이란 앞 뒤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것 을 비유한 말이다.

諸葛亮 (제갈량, Zhūgě Liàng)

諸葛亮(제갈량)

異名: 诸葛亮(Zhūgě Liàng), 자 공명, 시호 충무후, 와룡선생
국적: 중국 삼국시대 촉한
활동분야: 정치·군사
출생지: 중국 산둥성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 겸 전략가.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점령하였다. 221년 한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다.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후(忠武侯)이며, 낭야군 양도현(瑯琊郡 陽都縣;山東省 沂南縣)에서 태어났다.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주(荊州;湖北省)에서 숙부 제갈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後漢) 말의 전란을 피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207년(건안 12)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水魚之交]에 비유하였다.

이듬해 오나라의 손권(孫權)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였고, 적벽의 싸움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 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신기묘산(神機妙算)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것으로 묘사되지만,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에는 별다른 활약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형주와 익주 등 강남을 손에 넣은 유비가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아 영릉(零陵)·계양(桂陽)·장사(長沙) 등 3군(郡)을 감독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세간에 구전하는 제갈량의 초인적 지략은 대부분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기인하지만, 유비의 신임을 받아 중용된 것은 소설과 역사서의 기록이 일치한다. 214년(건안 16) 유비는 성도(成都)를 평정하고 나서 그를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아 자신이 출병한 뒤 군량과 병사를 대도록 하였고, 촉한의 황제에 오른 뒤에는 그를 승상(丞相)으로 삼았으며, 죽음을 앞두고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업을 이루도록 당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자신의 아들 유선(劉禪)을 보좌하되, 아들이 무능하면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취하여도 좋다고 유언하였으나 제갈량은 끝까지 후주(後主) 유선을 보필하였다. 재차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한의 경영에 힘썼다.

그러나 상승하는 위나라에 비하여 국력의 열세가 뚜렷한 가운데 오장원(五丈原)에서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하다가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위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와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이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충정으로 가득한 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후인들이 중국 곳곳에 무후사(武侯祠)를 지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제갈량 관련 한시

梁甫吟(양보음)

除舊布新 (제구포신)

除舊布新(제구포신)

除 덜 제 | 舊 예 구 | 布 베풀 포 | 新 새 신 |

묵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베푸는 일.



제구포신은 ‘춘추좌전’에 나오는 말로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펼쳐낸다’는 뜻이다. 춘추좌전의 기록을 보면, 소공(昭公) 17년 겨울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자 노나라의 대부(大夫) 신수(申須)가 이를 제구포신의 징조로 해석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혜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길함의 상징으로 여겨져왔는데 오히려 이를 변혁의 징조로 본 것이다.

[출전]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