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娘半老(서낭반로)
徐娘半老(Xúniángbànlǎo)
徐 천천히 할 서 | 娘 아가씨 낭 | 半 반 반 | 老 늙을 로 |
서소패(徐昭佩)처럼 우아하다.
서소패(徐昭佩)처럼 우아하다. 《南史·梁元帝徐妃傳(남사·양원제서비전)》에 나오는 양(梁) 원제(元帝)의 후궁인 서(徐)씨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정다감했었다고 함.
우아한 자태를 지닌 중년 부인. 여전히 풍류가 남아 있는 중년 부인. 조롱의 의미를 내포함.
관련 한자어
동의어
半老徐娘(bànlǎoXúniáng) |
南史(남사):卷12:梁元帝徐妃傳(양원제서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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嘗糞 (상분, chángfèn)
嘗糞(상분)
尝粪(chángfèn)
嘗 맛볼 상 | 糞 똥 분 |
상분(嘗糞)이란 사람의 대변의 맛을 보아 그 건강한 정도를 살펴보는 의학적 행위를 말한다. 중국의 고사성어에서 유래되었으며, 지극한 효성 또는 도가 지나친 아첨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쓰인다.
고사유래
《서언고사(書言故事)》와 《남사(南史)》의 〈유검루전(庾黔婁傳)〉에 나오는 말이다.
《남사(南史)》의 〈유검루전(庾黔婁傳)〉에 보면, 남북조 시대의 이름난 효자인 유검루(庾黔縷)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받았지만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번번이 사양하였다. 평소 호랑이가 그 효성에 감동하여 그가 다니는 곳에는 나타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잔릉(棧陵)에서 현령(縣令)으로 근무할 때, 아버지의 병환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으로 달려가니, 의원이 변의 맛을 보아야 정확한 진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유검루가 주저 않고 손가락으로 변을 찍어 맛을 보니, 단 맛이 나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이질을 앓고 심한 설사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이후로 매일 북극성에 빌어 아버지의 쾌유를 빌었으나, 하늘의 소리가 이르길, 아비의 수명이 다했으나, 효심을 보아 한달만 수명을 연장케 해주겠다고 하였다. 하늘의 말대로 그의 아버지는 한 달후에 죽었고, 유검루가 3년간 상을 치렀다. 제나라의 화제(和帝)는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높은 벼슬을 내렸지만 끝내 사양하였다. 이 때부터 변을 맛봄[嘗糞]이 지극한 효성을 뜻하게 되었다.
상분은 손가락을 잘라 절명하려는 부모의 입에 피를 넣어 드리는 단지주혈(斷指注血)과 먹을 것이 없자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그 고기를 부모님에게 먹였다는 할고(割股)와 함께 효행의 사례로 널리 알려졌다.
중국 송나라의 호계종이 고사성어를 집대성한 책인 서언고사(書言故事)에 상분이 지나친 아첨이라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인 유래도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당나라에 곽홍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시어사(侍禦史)라는 직위에 근무할 때, 상관인 대부(大夫) 위원충(魏元忠)이 병을 앓고 있었다. 이에 주위 동료들이 모두 함께 병문안을 갔는데, 그 자리에 곽홍패가 없는 것을 보고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곽홍패는 혼자 몰래 문병을 갔다. 곽홍패만은 몰래 혼자 그의 상관을 찾아가 대변을 보여 주라고 말했다. 대변을 가져오자 거침없이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대변의 맛이 달면 병이 중한 것입니다. 다행히 대부님의 것은 쓴 맛이 나니, 곧 쾌유하실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위원충은 그의 이 해괴한 아첨에 오히려 배알이 뒤틀려 버렸다. 후에 병이 나아 조정에 나가자, 위원충은 조정에 가서 이 사실을 폭로해 버렸다. 상관의 변을 맛볼 정도로 아부하는 곽홍패의 처신을 두고 지나친 아부를 말할 때 상분이라고 하며, 그런 무리들을 상분지도(嘗糞之徒)라고 한다.
관련 한자어
斷指注血(단지주혈) | 割股(할고) |
서언고사 | 남사 | 남사:유검루전 | 호계종 | 효도 | 아첨 |
書言故事 | 南史 | 南史:庾黔婁傳 | 南史:卷50:庾黔婁傳 |
尝粪(chángfèn)
嘗 맛볼 상 | 糞 똥 분 |
상분(嘗糞)이란 사람의 대변의 맛을 보아 그 건강한 정도를 살펴보는 의학적 행위를 말한다. 중국의 고사성어에서 유래되었으며, 지극한 효성 또는 도가 지나친 아첨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쓰인다.
고사유래
《서언고사(書言故事)》와 《남사(南史)》의 〈유검루전(庾黔婁傳)〉에 나오는 말이다.
《남사(南史)》의 〈유검루전(庾黔婁傳)〉에 보면, 남북조 시대의 이름난 효자인 유검루(庾黔縷)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받았지만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번번이 사양하였다. 평소 호랑이가 그 효성에 감동하여 그가 다니는 곳에는 나타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잔릉(棧陵)에서 현령(縣令)으로 근무할 때, 아버지의 병환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으로 달려가니, 의원이 변의 맛을 보아야 정확한 진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유검루가 주저 않고 손가락으로 변을 찍어 맛을 보니, 단 맛이 나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이질을 앓고 심한 설사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이후로 매일 북극성에 빌어 아버지의 쾌유를 빌었으나, 하늘의 소리가 이르길, 아비의 수명이 다했으나, 효심을 보아 한달만 수명을 연장케 해주겠다고 하였다. 하늘의 말대로 그의 아버지는 한 달후에 죽었고, 유검루가 3년간 상을 치렀다. 제나라의 화제(和帝)는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높은 벼슬을 내렸지만 끝내 사양하였다. 이 때부터 변을 맛봄[嘗糞]이 지극한 효성을 뜻하게 되었다.
상분은 손가락을 잘라 절명하려는 부모의 입에 피를 넣어 드리는 단지주혈(斷指注血)과 먹을 것이 없자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그 고기를 부모님에게 먹였다는 할고(割股)와 함께 효행의 사례로 널리 알려졌다.
중국 송나라의 호계종이 고사성어를 집대성한 책인 서언고사(書言故事)에 상분이 지나친 아첨이라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인 유래도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당나라에 곽홍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시어사(侍禦史)라는 직위에 근무할 때, 상관인 대부(大夫) 위원충(魏元忠)이 병을 앓고 있었다. 이에 주위 동료들이 모두 함께 병문안을 갔는데, 그 자리에 곽홍패가 없는 것을 보고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곽홍패는 혼자 몰래 문병을 갔다. 곽홍패만은 몰래 혼자 그의 상관을 찾아가 대변을 보여 주라고 말했다. 대변을 가져오자 거침없이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대변의 맛이 달면 병이 중한 것입니다. 다행히 대부님의 것은 쓴 맛이 나니, 곧 쾌유하실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위원충은 그의 이 해괴한 아첨에 오히려 배알이 뒤틀려 버렸다. 후에 병이 나아 조정에 나가자, 위원충은 조정에 가서 이 사실을 폭로해 버렸다. 상관의 변을 맛볼 정도로 아부하는 곽홍패의 처신을 두고 지나친 아부를 말할 때 상분이라고 하며, 그런 무리들을 상분지도(嘗糞之徒)라고 한다.
관련 한자어
斷指注血(단지주혈) | 割股(할고) |
서언고사 | 남사 | 남사:유검루전 | 호계종 | 효도 | 아첨 |
書言故事 | 南史 | 南史:庾黔婁傳 | 南史:卷50:庾黔婁傳 |
南史:卷50 (列傳第四十)
南史(남사)
李延壽(이연수)
列傳第四十
劉瓛明僧紹庾易劉虯
瓛篤志好學,博通訓義。年五歲,聞舅孔熙先讀管甯傳,欣然欲讀,舅更為說之,精意聽受,曰:「此可及也。」宋大明四年,舉秀才,兄璲亦有名,先應州舉,至是別駕東海王元曾與瓛父惠書曰:「比歲賢子充秀,州閭可謂得人。」
除奉朝請不就,兄弟三人共處蓬室一間,為風所倒,無以葺之。怡然自樂,習業不廢。聚徒教授,常有數十。丹陽尹袁粲於後堂夜集,聞而請之,指聽事前古柳樹謂瓛曰:「人謂此是劉尹時樹,每想高風;今複見卿清德,可謂不衰矣。」薦為秘書郎,不見用。
後拜安成王撫軍行參軍,公事免。瓛素無宦情,自此不復仕。袁粲誅,瓛微服往哭,並致賻助。
齊高帝踐阼,召瓛入華林園談語,問以政道。答曰:「政在孝經。宋氏所以亡,陛下所以得之是也。」帝咨嗟曰:「儒者之言,可寶萬世。」又謂瓛曰:「吾應天革命,物議以為何如?」瓛曰:「陛下戒前軌之失,加之以寬厚,雖危可安;若循其覆轍,雖安必危。」及出,帝謂司徒褚彥回曰:「方直乃爾。學士故自過人。」敕瓛使數入,而瓛自非詔見,未嘗到宮門。
上欲用瓛為中書郎,使吏部尚書何戢喻旨。戢謂瓛曰:「上意欲以鳳池相處,恨君資輕,可且就前除。少日當轉國子博士,便即所授。」瓛笑曰:「平生無榮進意,今聞得中書郎而拜記室,豈本心哉。」
後以母老闕養,拜彭城郡丞,司徒褚彥回宣旨喻之,答曰:「自省無廊廟才,所願唯保彭城丞耳。」上又以瓛兼總明觀祭酒,除豫章王驃騎記室參軍,丞如故。瓛終不就。武陵王曄為會稽太守,上欲令瓛為曄講,除會稽郡丞。學徒從之者轉眾。
永明初,竟陵王子良請為征北司徒記室,瓛與張融、王思遠書曰:
奉教使恭召,會當停公事;但念生平素抱,有乖恩顧。吾性拙人間,不習仕進,昔嘗為行佐,便以不能及公事免黜,此眷者所共知也。量己審分,不敢期榮,夙嬰貧困,加以疏懶,衣裳容發,有足駭者。中以親老供養,褰裳徒步,脫爾逮今,二代一紀。先朝使其更自修正,勉勵於階級之次,見其襤縷,或複賜以衣裳。袁、褚諸公,鹹加勸勵,終於不能自反也。一不復為,安可重為哉。昔人有以冠一免,不重加於首,每謂此得進止之儀。又上下年尊,益不願居官次廢晨昏也。先朝為此,曲申從許,故得連年不拜。既習此歲久,又齒長疾侵,豈宜攝齋河間之聽,廁跡東平之僚?本無絕俗之操,亦非能偃蹇為高,此又聽覽所當深察者也。近初奉教,便自希得托跡客遊之末,而固辭榮級,其故何邪?以古之王侯大人,或以此延四方之士,有追申、白而入楚,羨鄒、枚而游梁,吾非敢叨夫曩賢,庶欲從九九之遺跡,既于聞道集泮不殊,而幸無職司拘礙,可得奉溫凊,展私計,志在此耳。除步兵校尉,不拜。
瓛姿狀纖小,儒業冠於當時,都下士子貴游,莫不下席受業,當世推其大儒,以比古之曹、鄭。性謙率,不以高名自居,之詣於人,唯一門生持胡床隨後。主人未通,便坐門待答。住在檀橋,瓦屋數間,上皆穿漏,學徒敬慕,不敢指斥,呼為青溪焉。竟陵王子良親往修謁。七年,表武帝為瓛立館,以楊烈橋故主第給之,生徒皆賀。瓛曰:「室美豈為人哉,此華宇豈吾宅邪?幸可詔作講堂,猶恐見害也。」未及徙居,遇疾。子良遣從瓛學者彭城劉繪、順陽範縝將廚于瓛宅營齋。及卒,門人受學者並吊服臨送。
瓛有至性,祖母病疽經年,手持膏藥,漬指為爛。母孔氏甚嚴明,謂親戚曰:「阿稱便是今世曾子。」稱,瓛小名也。年四十餘,未有婚對。建元中,高帝與司徒褚彥回為瓛娶王氏女。王氏穿壁掛履,土落孔氏床上,孔氏不悅。瓛即出其妻。及居母憂,住墓下不出廬,足為之屈,杖不能起。此山常有鴝鵒鳥,瓛在山三年不敢來,服釋還家,此鳥乃至。
梁武帝少時嘗經伏膺,及天監元年下詔為瓛立碑,諡曰貞簡先生。所著文集行於世。
初,瓛講月令畢,謂學生嚴植之曰:「江左以來,陰陽律數之學廢矣,吾今講此,曾不得其彷佛。」學者美其退讓。時濟陽蔡仲熊禮學博聞,謂人曰:「五音本在中土,故氣韻調平。今既東南土氣偏詖,故不能感動木石。」瓛亦以為然。仲熊執經議論,往往與時宰不合,亦終不改操求同,故坎稟不進,歷年方至尚書左丞,當時恨其不遇。
又東陽婁幼瑜字季玉,著禮捃拾三十卷。
瓛弟璡字子璥,方軌正直,儒雅不及瓛而文采過之。宋泰豫中,為明帝挽郎。齊建元初,為武陵王曄冠軍征虜參軍。曄與僚佐飲,自割鵝炙。璡曰:「應刃落俎,是膳夫之事。殿下親執鸞刀,下官未敢安席。」因起請退。與友人會稽孔逖同舟入東,於塘上遇一女子,逖目送曰:「美而豔。」璡曰:「斯豈君子所宜言乎,非吾友也。」於是解裳自隔。或曰:與友孔徹同舟入東,徹留目觀岸上女子。璡舉席自隔,不復同坐。兄瓛夜隔壁呼璡,璡不答,方下床著衣立,然後應。瓛怪其久,璡曰:「向束帶未竟。」其立操如此。
文惠太子召璡入侍東宮,每上事輒削草。尋署射聲校尉,卒于官。
時濟陽江重欣亦清介,雖處闇室,如對嚴賓,而不及璡也。重欣位至射聲校尉。
顯字嗣芳,瓛族子也。父琉字仲翔,博識強正,名行自居。幼為外祖臧質所鞠養。質既富盛,恒有音樂。質亡後,母沒十許年,琉每聞絲竹之聲,未嘗不歔欷流涕。梁天監初,終於晉安內史。
顯幼而聰敏,六歲能誦呂相絕秦、賈誼過秦。琅邪王思遠、吳國張融見而稱賞,號曰神童。族伯瓛儒學有重名,卒無嗣,齊武帝詔顯為後,時年八歲。本名頲,齊武以字難識,改名顯。天監初,舉秀才,解褐中軍臨川王行參軍,俄署法曹。
顯博涉多通。任昉嘗得一篇缺簡,文字零落,示諸人莫能識者,顯見雲是古文尚書所刪逸篇。昉檢周書,果如其說。昉因大相賞異。丁母憂,服闋,尚書令沈約時領太子少傅,引為少傅五官。約為丹陽尹,命駕造焉。于坐策顯經史十事,顯對其九。約曰:「老夫昏忘,不可受策;雖然,聊試數事,不可至十。」顯問其五,約對其二。陸倕聞之擊席喜曰:「劉郎子可謂差人,雖吾家平原詣張壯武,王粲謁伯喈,必無此對。」其為名流推賞如此。
五兵尚書傅昭掌著作,撰國史,顯自兼廷尉正,被引為佐。及革選尚書五都,顯以法曹兼吏部郎。後為尚書儀曹郎。嘗為上朝詩,沈約見而美之,命工書人題之于郊居宅壁。後兼中書通事舍人,再遷驃騎鄱陽王記室,兼中書舍人。後為中書郎,舍人如故。
顯與河東裴子野、南陽劉之遴、吳郡顧協連職禁中,遞相師友,人莫不慕之。顯博聞強記,過於裴、顧。時波斯獻生師子,帝問曰:「師子有何色?」顯曰:「黃師子超不及白師子超。」魏人送古器,有隱起字無識者,顯案文讀之無滯,考校年月,一字不差。武帝甚嘉焉。
遷尚書左丞,除國子博士。時有沙門訟田,帝大署曰「貞「。有司未辯,遍問莫知。顯曰:「貞字文為與上人。」帝因忌其能,出之。後為雲麾邵陵王長史、尋陽太守。魏使李諧至聞之,恨不相識。歎曰:「梁德衰矣。善人國之紀也,而出之,無乃不可乎。」王遷鎮郢州,除平西府諮議參軍,久在府不得志。大同九年終於夏口,時年六十三。
凡佐兩府,並事驕王,人為之憂,而反見禮重。友人劉之遴啟皇太子為之銘志,葬於秣陵縣劉真長舊塋。
子莠、恁、臻。臻早有名,載北史。顯從弟彀字仲寶。形貌短小,儒雅博洽,善辭翰,隨湘東王在蕃十餘年,寵寄甚深。當時文檄皆其所為。位吏部尚書、國子祭酒。魏克江陵,入長安。
明僧紹字休烈,平原鬲人,一字承烈。其先吳太伯之裔,百里奚子孟明,以名為姓,其後也。祖玩,州中從事。父略,給事中。僧紹明經有儒術,宋元嘉中,再舉秀才,永光中,鎮北府辟功曹,並不就。隱長廣郡嶗山,聚徒立學。魏克淮北,乃度江。
升明中,齊高帝為太傅,教辟僧紹及顧歡、臧榮緒,以旌幣之禮,征為記室參軍,不至。僧紹弟慶符為青州,僧紹乏糧食,隨慶符之鬱洲,住弇榆山,棲雲精舍,欣玩水石,竟不一入州城。
泰始季年,岷、益有山崩,淮水竭齊郡,僧紹竊謂其弟曰:「夫天地之氣,不失其序,若夫陽伏而不泄,陰迫而不蒸,於是乎有山崩川竭之變。昔伊、洛竭而夏亡,河竭而殷亡,三川竭岐山崩而周亡,五山崩而漢亡。夫有國必依山川而為固,山川作變,不亡何待?今宋德如四代之季,爾志吾言而勿泄也。」竟如其言。
齊建元元年冬,征為正員郎,稱疾不就。其後帝與崔祖思書,令僧紹與慶符俱歸。帝又曰:「不食周粟而食周薇,古猶發議,在今甯得息談邪?聊以為笑。」
慶符罷任,僧紹隨歸住江乘攝山。僧紹聞沙門釋僧遠夙德,往候定林寺。高帝欲出寺見之,僧遠問僧紹曰:「天子若來,居士若為相對?」僧紹曰:「山藪之人,政當鑿壞以遁;若辭不獲命,便當依戴公故事。」既而遁還攝山、建棲霞寺而居之,高帝甚以為恨。昔戴顒高臥牖下,以山人之服加其身,僧紹故雲。
高帝后謂慶符曰:「卿兄高尚其事,亦堯之外臣。朕夢想幽人,固已勤矣。所謂'徑路絕,風雲通'。」仍賜竹根如意、筍籜冠,隱者以為榮焉。勃海封延伯者,高行士也,聞之歎曰:「明居士身彌後而名彌先,亦宋、齊之儒仲也。」永明中,征國子博士不就,卒。
僧紹長兄僧胤能言玄,仕宋為江夏王義恭參軍,王別為立榻,比之徐孺子。位冀州刺史。子慧照,元徽中,為齊高帝平南主簿,從拒桂陽,累至驃騎中兵參軍,與荀伯玉對領直。建元元年,為巴州刺史,綏懷蠻蜒,上許為益州刺史,未遷卒。僧胤次弟僧暠亦好學,宋大明中再使魏,于時新誅司空劉誕。孝武謂曰:「若問廣陵之事,何以答之?」對曰:「周之管、蔡,漢之淮南。」帝大悅。及至魏,魏問曰:「卿銜此命,當緣上國無相踰者邪?」答曰:「聰明特達,舉袂成帷,比屋之甿,又無下僕。晏子所謂'看國善惡。'故再辱此庭。」位至青州刺史。
僧紹子元琳、仲璋、山賓並傳家業,山賓最知名。
山賓字孝若,七歲能言名理。十三,博通經傳,居喪盡禮,起家奉朝請。兄仲璋痼疾,家道屢空,山賓乃行幹祿,後為廣陽令,頃之去官。會詔使公卿舉士,左衛將軍江祏上書薦山賓才堪理劇。齊明帝不重學,謂祏曰:「聞山賓談書不輟,何堪官邪。」遂不用。
梁台建,累遷右軍記室參軍,掌吉禮。時初置五經博士,山賓首應其選。曆中書侍郎,國子博士,太子率更令,中庶子。天監十五年,出為持節、都督緣淮諸軍事、北兗州刺史。普通二年,征為太子右衛率,加給事中。遷禦史中丞,以公事左遷黃門侍郎。四年,為散騎常侍。東宮新置學士,又以山賓居之。俄以本官兼國子祭酒。
初,山賓在州,所部平陸縣不稔,啟出倉米以振百姓。後刺史檢州曹,失簿,以山賓為耗損。有司追責,籍其宅入官。山賓不自理,更市地造宅。昭明太子聞築室不就,有令曰:「明祭酒雖出撫大蕃,擁旌推轂,珥金拖紫,而恒事屢空。聞構宇未成,今送薄助。」並詒詩曰:「平仲古稱奇,夷吾昔擅美,令則挺伊賢,東秦固多士。築室非道傍,置宅歸仁裏。庚桑方有系,原生今易擬。必來三徑人,將招五經士。」
山賓性篤實,家中嘗乏困,貨所乘牛。既售受錢,乃謂買主曰:「此牛經患漏蹄,療差已久,恐後脫髮,無容不相語。」買主遽追取錢。處士阮孝緒聞之,歎曰:「此言足使還淳反朴,激薄停澆矣。」
五年,又假節攝北兗州事,後卒官,贈侍中,諡曰質子。山賓累居學官,甚有訓導之益,然性頗疏通,接于諸生多狎比,人皆愛之。所著吉禮儀注二百二十四卷,禮儀二十卷,孝經喪服義十五卷。
子震字興道,亦傳父業,位太子舍人,尚書祠部郎,余姚令。
山賓弟少遐字處默,亦知名,位都官尚書。簡文謂人曰:「我不喜明得尚書,更喜朝廷得人。」後拜青州刺史。太清之亂奔魏,仕北齊,卒于太子中庶子。子罕,司空記室。
明氏南度雖晚,並有名位,自宋至梁為刺史者六人。
庾易字幼簡,新野人也,徙居江陵。祖玫,巴郡太守。父道驥,安西參軍。
易志性恬靜,不交外物,齊臨川王映臨州,表薦之,餉麥百斛。易謂使人曰:「走樵采麋鹿之伍,終其解毛之衣,馳騁日月之車,得保自耕之祿,于大王之恩亦已深矣。」辭不受,以文義自樂。安西長史袁彖欽其風,贈以鹿角書格、蚌盤、蚌研、白象牙筆。並贈詩曰:「白日清明,青雲遼亮,昔聞巢、許,今睹台、尚。」易以連理幾、竹翹書格報之。
建武三年,詔征為司空主簿,不就,卒。子黔婁。
黔婁字子貞,一字貞正。少好學,多所講誦。性至孝,不曾失色於人。南陽高士劉虯、宗測並歎異之。仕齊為編令,政有異績。先是縣境多猛獸暴,黔婁至,猛獸皆度往臨沮界,時以為仁化所感。
徙孱陵令,到縣未旬,易在家遘疾,黔婁忽心驚,舉身流汗,即日棄官歸家。家人悉驚其忽至。時易疾始二日,醫雲欲知差劇,但嘗糞甜苦。易泄利,黔婁輒取嘗之,味轉甜滑,心愈憂苦。至夕,每稽顙北辰,求以身代。俄聞空中有聲曰:「征君壽命盡,不復可延。汝誠禱既至,政得至月末。」及晦而易亡。黔婁居喪過禮,廬於塚側。
梁台建,黔婁自西台尚書儀曹郎為益州刺史鄧元起表為府長史、巴西梓潼二郡太守。及成都平,城中珍寶山積,元起悉分與僚佐,唯黔婁一無所取。元起惡其異眾,厲聲曰:「長史何獨為高?」黔婁示不違之,請書數篋。尋除蜀郡太守,在職清素,百姓便之。元起死於蜀郡,部曲皆散,黔婁身營殯斂,攜持喪柩歸鄉里。
東宮建,以中軍記室參軍侍皇太子讀,甚見知重。詔與太子中庶子殷鈞、中舍人到洽、國子博士明山賓遞日為太子講五經義。遷散騎侍郎,卒。弟于陵。
於陵字子介,七歲能言玄理。及長,清警博學,有才思。齊隨王子隆為荊州,召為主簿,使與謝朓、宗夬抄撰群書。子隆代還,又以為送故主簿。子隆為明帝所害,僚吏畏避莫至,唯於陵與夬獨留經理喪事。永元末,除東陽遂安令,為人吏所稱。
梁天監初,為建康獄平,遷尚書功論郎,待詔文德殿。後兼中書通事舍人,拜太子洗馬。舊東宮官屬通為清選,洗馬掌文翰,尤其清者。近代用人,皆取甲族有才望者,時于陵與周舍並擢充此職。武帝曰:「官以人清,豈限甲族。」時論以為美。累遷中書黃門侍郎,舍人如故。後終於鴻臚卿。弟肩吾。
肩吾字慎之,八歲能賦詩,為兄于陵所友愛。初為晉安王國常侍,王每徙鎮,肩吾常隨府。在雍州被命與劉孝威、江伯搖、孔敬通、申子悅、徐防、徐摛、王囿、孔鑠、鮑至等十人抄撰眾籍,豐其果饌,號高齋學士。王為皇太子,兼東宮通事舍人。後為安西湘東王錄事、諮議參軍,太子率更令,中庶子。簡文開文德省置學士,肩吾子信、徐摛子陵、吳郡張長公、北地傅弘、東海鮑至等充其選。齊永明中,王融、謝朓、沈約文章始用四聲,以為新變,至是轉拘聲韻,彌為麗靡,複踰往時。簡文與湘東王書論之曰:
比見京師文體,懦鈍殊常,競學浮疏,爭事闡緩,既殊比興,正背風騷。若夫六典三禮,所施則有地,吉凶嘉賓,用之則有所,未聞吟詠情性,反擬內則之篇,操筆寫志,更模酒誥之作。遲遲春日,翻學歸藏,湛湛江水,遂同大傳。
吾既拙于為文,不敢輕有掎摭,但以當世之作,曆方古之才人,遠則楊、馬、曹、王,近則潘、陸、顏、謝,觀其遣辭用心,了不相似。若以今文為是,則昔賢為非,若以昔賢可稱,則今體宜棄。俱為盍各,則未之敢許。又時有效謝康樂、裴鴻臚文者,亦頗有惑焉。何者?謝客吐言天拔,出於自然,時有不拘,是其糟粕。裴氏乃是良史之才,了無篇什之美。是為學謝則不屆其精華,但得其冗長;師裴則蔑絕其所長,唯得其所短。謝故巧不可階,裴亦質不宜慕。故胸馳臆斷之侶,好名忘實之類,決羽謝生,豈三千之可及,伏膺裴氏,懼兩唐之不傳。故玉徽金銑,反為拙目所嗤,巴人下俚,更合郢中之聽。陽春高而不和,妙聲絕而不尋。竟不精討錙銖,覆量文質,有異巧心,終愧妍手。是以握瑜懷玉之士,瞻鄭邦而知退,章甫翠履之人,望閩鄉而歎息。詩既若此,筆又如之。徒以煙墨不言,受其驅染,紙劄無情,任其搖襞。甚矣哉,文章橫流,一至於此。
至如近世謝朓、沈約之詩,任昉、陸倕之筆,斯文章之冠冕,述作之楷模。張士簡之賦,周升逸之辯,亦成佳手,難可複遇。文章未墜,必有英絕,領袖之者,非弟而誰。每欲論之,無可與語,思吾子建,一共商榷。辨茲清濁,使如涇、渭,論茲月旦,類彼汝南。朱白既定,雌黃有別,使夫懷鼠知慚,濫竽自恥。相思不見,我勞如何!
及簡文即位,以肩吾為度支尚書。時上流蕃鎮,並據州拒侯景,景矯詔遣肩吾使江州喻當陽公大心。大心乃降賊,肩吾因逃入東。後賊宋子仙破會稽,購得肩吾欲殺之,先謂曰:「吾聞汝能作詩,今可即作,若能,將貸汝命。」肩吾操筆便成,辭采甚美,子仙乃釋以為建昌令。仍間道奔江陵,曆江州刺史,領義陽太守,封武康縣侯。卒,贈散騎常侍、中書令。子信。劉虯字靈預,一字德明,南陽涅陽人,晉豫州刺史喬七世孫也。徙居江陵。
虯少而抗節好學,須得祿便隱。宋泰始中,仕至晉平王驃騎記室、當陽令。罷官歸家靜處,常服鹿皮袷,斷穀,餌術及胡麻。齊建元初,豫章王嶷為荊州,教辟虯為別駕,與同郡宗測、新野庾易並遺書禮請之。虯等各修箋答而不應命。
永明三年,刺史廬陵王子卿表虯及同郡宗測、宗尚之、庾易、劉昭五人,請加蒲車束帛之命。詔征為通直郎,不就。竟陵王致書通意,虯答曰:「虯四節臥疾病,三時營灌植,暢餘陰於山澤,托暮情於魚鳥,甯非唐、虞重恩,周、邵宏施。」
虯精信釋氏,衣粗布,禮佛長齋,注法華經,自講佛義。以江陵西沙洲去人遠,乃徙居之。建武二年,詔征國子博士,不就。其冬虯病,正晝有白雲徘徊簷戶之內,又有香氣及磬聲。其日卒,年五十八。虯子之遴。
之遴字思貞,八歲能屬文。虯曰:「此兒必以文興吾宗。」常謂諸子曰:「若比之顏氏,之遴得吾之文。」由是州裏稱之。時有沙門僧惠有異識,每詣虯必呼之遴小字曰:「僧伽福德兒。」握手而進之。
年十五,舉茂才,明經對策,沈約、任昉見而異之。吏部尚書王瞻嘗候任昉,遇之遴在坐,昉謂瞻曰:「此南陽劉之遴,學優未仕,水鏡所宜甄擢。」即辟為太學博士。昉曰:「為之美談,不如面試。」時張稷新除尚書僕射,托昉為讓表,昉令之遴代作,操筆立成。昉曰:「荊南秀氣,果有異才,後仕必當過僕。」禦史中丞樂藹即之遴之舅,憲台奏彈,皆令之遴草焉。後為荊州中從事,梁簡文臨荊州,仍遷宣惠記室。之遴篤學明審,博覽群籍,時劉顯、韋棱並稱強記,之遴每與討論,鹹不過也。
累遷中書侍郎,後除南郡太守。武帝謂曰:「卿母年德並高,故令卿衣錦還鄉,盡榮養之理。」轉西中郎湘東王繹長史,太守如故。初,之遴在荊府,常寄居南郡,忽夢前太守袁彖謂曰:「卿後當為折臂太守,即居此中。」之遴後牛奔墮車折臂,右手偏直,不復得屈伸,書則以手就筆,歎曰:「豈黥而王乎?」周舍嘗戲之曰:「雖複並坐可橫,政恐陋巷無枕。」後連相兩王,再為此郡,曆秘書監。
出為郢州行事,之遴意不願出,固辭曰:「去歲命絕離巽,不敢東下;今年所忌又在西方。」武帝手敕曰:「朕聞妻子具,孝衰於親,爵祿具,忠衰於君。卿既內足,理忘奉公之節。」遂為有司奏免。後為都官尚書、太常卿。
之遴好古愛奇,在荊州聚古器數十百種,有一器似甌可容一斛,上有金錯字,時人無能知者。又獻古器四種於東宮。其第一種,鏤銅鴟夷榼二枚,兩耳有銀鏤,銘雲:「建平二年造。」其第二種,金銀錯鏤古鐏二枚,有篆銘雲:「秦容成侯適楚之歲造。」其第三種,外國澡灌一口,有銘雲:「元封二年,龜茲國獻。」其第四種,古制澡盤一枚,銘雲:「初平二年造。」
時鄱陽嗣王范得班固所撰漢書真本獻東宮,皇太子令之遴與張纘、到溉、陸襄等參校異同,之遴錄其異狀數十事,其大略雲:「案古本漢書稱永平十六年五月二十一日己酉,郎班固上,而今本無上書年月日子。又案古本敘傳號為中篇,今本稱為敘傳,又今本敘傳載班彪事行,而古本雲「彪自有傳」。又今本紀及表志列傳不相合為次,而古本相合為次,總成三十八卷。又今本外戚在西域後,古本外戚次帝紀下。又今本高五子、文三王、景十三王、孝武六子、宣元六王雜在諸傳帙中,古本諸王悉次外戚下,在陳項傳上。又今本韓彭英盧吳述雲:「信惟餓隸,布實黥徒,越亦狗盜,芮尹江湖。雲起龍驤,化為侯王。」古本述雲:「淮陰毅毅,仗劍周章,邦之傑子,實惟彭、英。化為侯王,雲起龍驤。」又古本第三十七卷解音釋義,以助雅詁;而今本無此卷也。」
之遴好屬文,多學古體,與河東裴子野、沛國劉顯恒共討論古籍,因為交好。時周易、尚書、禮記、毛詩並有武帝義疏,唯左氏傳尚闕,之遴乃著春秋大意十科,左氏十科,三傳同異十科。合三十事上之。帝大悅,詔答曰:「省所撰春秋義,比事論書,辭微旨遠,編年之教,言闡義繁。丘明傳洙、泗之風,公羊宗西河之學,鐸椒之解不追,瑕丘之說無取。繼踵胡母,仲舒雲盛,因循谷梁,千秋最篤。張蒼之傳左氏,賈誼之襲荀卿,源本分鑣,指歸殊致,詳略紛然,其來舊矣。昔在弱年,久經研味,一從遺置,迄將五紀。兼晚秋晷促,機事罕暇,夜分求衣,未遑披括。須待夏景,試欲推尋,若溫故可求,別酬所問也。」
始武帝于齊代為荊府諮議,時之遴父虯隱在百里洲,早相知聞。帝偶匱乏,遣就虯換穀百斛。之遴時在父側,曰:「蕭諮議躓士,雲何能得舂,願與其米。」虯從之。及帝即位常懷之。侯景初以蕭正德為帝,之遴時落景所,將使授璽紱。之遴預知,仍剃發披法服乃免。先是,平昌伏挺出家,之遴為詩嘲之曰:「傳聞伏不鬥,化為支道林。」及之遴遇亂,遂披染服,時人笑之。
尋避難還鄉,湘東王繹嘗嫉其才學,聞其西上至夏口,乃密送藥殺之。不欲使人知,乃自製志銘,厚其賻贈。前後文集五十卷。
子三達字三善,數歲能清言及屬文。州將湘東王繹聞之,盛集賓客,召而試之。說義屬詩,皆有理致。年十二,聽江陵令賀革講禮還,仍覆述,不遺一句。年十八卒。之遴深懷悼恨,乃題墓曰「梁妙士」以旌之。之遴弟之亨。
之亨字嘉會,年四歲,出後叔父嵩。及長好學,美風姿,善占對。武帝之臨荊州,唯與虯談。虯見之遴之亨,帝曰:「之遴必以文章顯,之亨當以功名著。」後州舉秀才,除大學博士,仍代兄之遴為中書通事舍人。累遷步兵校尉,湘東王繹諮議參軍,敕賜金策並賜詩焉。
大通六年,出師南鄭,詔湘東王節度諸軍。之亨以司農卿為行台承制,途出本州北界,總督眾軍,杖節而西,樓船戈甲甚盛。老小緣岸觀曰:「是前舉秀才者。」鄉部偉之。是行也,大致克復,軍士有功皆錄,唯之亨為蘭欽所訟,執政因而陷之,故封賞不行,但複本位而已。久之,帝讀陳湯傳,恨其立功絕域而為文吏所抵。宦者張僧胤曰:「外聞論者,竊謂劉之亨似之。」帝感悟,乃封為臨江子。固辭不拜。
之亨美績嘉聲,在朱異之右,既不協,懼為所害,故美出之,以代之遴為安西東湘王繹長史、南郡太守。上問朱異曰:「之亨代兄喜不?兄弟因循,豈直大馮、小馮而已。」又謂尚書令何敬容曰:「荊州長史、南郡太守,皆是僕射出入。今者之亨便是九轉。」在郡有異績,吏人稱之。卒,荊土懷之,不復稱名,號為大南郡小南郡。
子廣德,亦好學,負才任氣。承聖中,位湘東太守。魏平荊州,依于王琳。琳平,陳太建中,曆河東太守,卒官。
之亨弟之遲,位荊州中從事史。子仲威,少有志氣,頗涉文史。梁承聖中,為中書侍郎。蕭莊稱尊號,以為禦史中丞,隨莊終鄴中。
坦字德度,虯從弟也。仕齊曆孱陵令,南中郎錄事參軍,所居以幹濟稱。
梁武帝起兵,時輔國將軍楊公則為湘州刺史,帥師赴夏口。西朝議行州事者,坦求行,乃除輔國長史、長沙太守,行湘州刺史。坦嘗在湘州,多舊恩,道迎者甚眾。齊東昏遣安成太守劉希祖破西台所選太守范僧簡于平都,希祖移檄湘部,於是始興內史王僧粲應之,湘部諸郡,悉皆蜂起。州人鹹欲泛舟逃走,坦悉聚船焚之。前湘州鎮軍鍾玄紹潛應僧粲,坦聞其謀,偽為不知,因理訟至夜,城門遂不閉以疑之。玄紹未及發,明旦詣坦問其故。久留與語,密遣親兵收其家。玄紹在坐未起,而收兵已報具得其文書本末。玄紹即首伏,於坐斬之,焚其文書,餘党悉無所問。
梁天監初,論功封荔浦子。三年,遷西中郎長史、蜀郡太守,行益州事。未至蜀,道卒。
論曰:劉瓛弟兄,僧紹父子,並業盛專門,飾以儒行,持身之節,異夫苟得患失者焉。庾易、劉虯取高一代,其所以行己,事兼隱德,諸子學業之美,各著家聲。顯及之遴見嫉時主,或以非罪而斥,或以非疾而亡,異夫自古哲王屈己下賢之道,有以知武皇之不弘,元後之多忌。梁祚之不永也,不亦宜哉。
李延壽(이연수)
列傳第四十
劉瓛明僧紹庾易劉虯
瓛篤志好學,博通訓義。年五歲,聞舅孔熙先讀管甯傳,欣然欲讀,舅更為說之,精意聽受,曰:「此可及也。」宋大明四年,舉秀才,兄璲亦有名,先應州舉,至是別駕東海王元曾與瓛父惠書曰:「比歲賢子充秀,州閭可謂得人。」
除奉朝請不就,兄弟三人共處蓬室一間,為風所倒,無以葺之。怡然自樂,習業不廢。聚徒教授,常有數十。丹陽尹袁粲於後堂夜集,聞而請之,指聽事前古柳樹謂瓛曰:「人謂此是劉尹時樹,每想高風;今複見卿清德,可謂不衰矣。」薦為秘書郎,不見用。
後拜安成王撫軍行參軍,公事免。瓛素無宦情,自此不復仕。袁粲誅,瓛微服往哭,並致賻助。
齊高帝踐阼,召瓛入華林園談語,問以政道。答曰:「政在孝經。宋氏所以亡,陛下所以得之是也。」帝咨嗟曰:「儒者之言,可寶萬世。」又謂瓛曰:「吾應天革命,物議以為何如?」瓛曰:「陛下戒前軌之失,加之以寬厚,雖危可安;若循其覆轍,雖安必危。」及出,帝謂司徒褚彥回曰:「方直乃爾。學士故自過人。」敕瓛使數入,而瓛自非詔見,未嘗到宮門。
上欲用瓛為中書郎,使吏部尚書何戢喻旨。戢謂瓛曰:「上意欲以鳳池相處,恨君資輕,可且就前除。少日當轉國子博士,便即所授。」瓛笑曰:「平生無榮進意,今聞得中書郎而拜記室,豈本心哉。」
後以母老闕養,拜彭城郡丞,司徒褚彥回宣旨喻之,答曰:「自省無廊廟才,所願唯保彭城丞耳。」上又以瓛兼總明觀祭酒,除豫章王驃騎記室參軍,丞如故。瓛終不就。武陵王曄為會稽太守,上欲令瓛為曄講,除會稽郡丞。學徒從之者轉眾。
永明初,竟陵王子良請為征北司徒記室,瓛與張融、王思遠書曰:
奉教使恭召,會當停公事;但念生平素抱,有乖恩顧。吾性拙人間,不習仕進,昔嘗為行佐,便以不能及公事免黜,此眷者所共知也。量己審分,不敢期榮,夙嬰貧困,加以疏懶,衣裳容發,有足駭者。中以親老供養,褰裳徒步,脫爾逮今,二代一紀。先朝使其更自修正,勉勵於階級之次,見其襤縷,或複賜以衣裳。袁、褚諸公,鹹加勸勵,終於不能自反也。一不復為,安可重為哉。昔人有以冠一免,不重加於首,每謂此得進止之儀。又上下年尊,益不願居官次廢晨昏也。先朝為此,曲申從許,故得連年不拜。既習此歲久,又齒長疾侵,豈宜攝齋河間之聽,廁跡東平之僚?本無絕俗之操,亦非能偃蹇為高,此又聽覽所當深察者也。近初奉教,便自希得托跡客遊之末,而固辭榮級,其故何邪?以古之王侯大人,或以此延四方之士,有追申、白而入楚,羨鄒、枚而游梁,吾非敢叨夫曩賢,庶欲從九九之遺跡,既于聞道集泮不殊,而幸無職司拘礙,可得奉溫凊,展私計,志在此耳。除步兵校尉,不拜。
瓛姿狀纖小,儒業冠於當時,都下士子貴游,莫不下席受業,當世推其大儒,以比古之曹、鄭。性謙率,不以高名自居,之詣於人,唯一門生持胡床隨後。主人未通,便坐門待答。住在檀橋,瓦屋數間,上皆穿漏,學徒敬慕,不敢指斥,呼為青溪焉。竟陵王子良親往修謁。七年,表武帝為瓛立館,以楊烈橋故主第給之,生徒皆賀。瓛曰:「室美豈為人哉,此華宇豈吾宅邪?幸可詔作講堂,猶恐見害也。」未及徙居,遇疾。子良遣從瓛學者彭城劉繪、順陽範縝將廚于瓛宅營齋。及卒,門人受學者並吊服臨送。
瓛有至性,祖母病疽經年,手持膏藥,漬指為爛。母孔氏甚嚴明,謂親戚曰:「阿稱便是今世曾子。」稱,瓛小名也。年四十餘,未有婚對。建元中,高帝與司徒褚彥回為瓛娶王氏女。王氏穿壁掛履,土落孔氏床上,孔氏不悅。瓛即出其妻。及居母憂,住墓下不出廬,足為之屈,杖不能起。此山常有鴝鵒鳥,瓛在山三年不敢來,服釋還家,此鳥乃至。
梁武帝少時嘗經伏膺,及天監元年下詔為瓛立碑,諡曰貞簡先生。所著文集行於世。
初,瓛講月令畢,謂學生嚴植之曰:「江左以來,陰陽律數之學廢矣,吾今講此,曾不得其彷佛。」學者美其退讓。時濟陽蔡仲熊禮學博聞,謂人曰:「五音本在中土,故氣韻調平。今既東南土氣偏詖,故不能感動木石。」瓛亦以為然。仲熊執經議論,往往與時宰不合,亦終不改操求同,故坎稟不進,歷年方至尚書左丞,當時恨其不遇。
又東陽婁幼瑜字季玉,著禮捃拾三十卷。
瓛弟璡字子璥,方軌正直,儒雅不及瓛而文采過之。宋泰豫中,為明帝挽郎。齊建元初,為武陵王曄冠軍征虜參軍。曄與僚佐飲,自割鵝炙。璡曰:「應刃落俎,是膳夫之事。殿下親執鸞刀,下官未敢安席。」因起請退。與友人會稽孔逖同舟入東,於塘上遇一女子,逖目送曰:「美而豔。」璡曰:「斯豈君子所宜言乎,非吾友也。」於是解裳自隔。或曰:與友孔徹同舟入東,徹留目觀岸上女子。璡舉席自隔,不復同坐。兄瓛夜隔壁呼璡,璡不答,方下床著衣立,然後應。瓛怪其久,璡曰:「向束帶未竟。」其立操如此。
文惠太子召璡入侍東宮,每上事輒削草。尋署射聲校尉,卒于官。
時濟陽江重欣亦清介,雖處闇室,如對嚴賓,而不及璡也。重欣位至射聲校尉。
顯字嗣芳,瓛族子也。父琉字仲翔,博識強正,名行自居。幼為外祖臧質所鞠養。質既富盛,恒有音樂。質亡後,母沒十許年,琉每聞絲竹之聲,未嘗不歔欷流涕。梁天監初,終於晉安內史。
顯幼而聰敏,六歲能誦呂相絕秦、賈誼過秦。琅邪王思遠、吳國張融見而稱賞,號曰神童。族伯瓛儒學有重名,卒無嗣,齊武帝詔顯為後,時年八歲。本名頲,齊武以字難識,改名顯。天監初,舉秀才,解褐中軍臨川王行參軍,俄署法曹。
顯博涉多通。任昉嘗得一篇缺簡,文字零落,示諸人莫能識者,顯見雲是古文尚書所刪逸篇。昉檢周書,果如其說。昉因大相賞異。丁母憂,服闋,尚書令沈約時領太子少傅,引為少傅五官。約為丹陽尹,命駕造焉。于坐策顯經史十事,顯對其九。約曰:「老夫昏忘,不可受策;雖然,聊試數事,不可至十。」顯問其五,約對其二。陸倕聞之擊席喜曰:「劉郎子可謂差人,雖吾家平原詣張壯武,王粲謁伯喈,必無此對。」其為名流推賞如此。
五兵尚書傅昭掌著作,撰國史,顯自兼廷尉正,被引為佐。及革選尚書五都,顯以法曹兼吏部郎。後為尚書儀曹郎。嘗為上朝詩,沈約見而美之,命工書人題之于郊居宅壁。後兼中書通事舍人,再遷驃騎鄱陽王記室,兼中書舍人。後為中書郎,舍人如故。
顯與河東裴子野、南陽劉之遴、吳郡顧協連職禁中,遞相師友,人莫不慕之。顯博聞強記,過於裴、顧。時波斯獻生師子,帝問曰:「師子有何色?」顯曰:「黃師子超不及白師子超。」魏人送古器,有隱起字無識者,顯案文讀之無滯,考校年月,一字不差。武帝甚嘉焉。
遷尚書左丞,除國子博士。時有沙門訟田,帝大署曰「貞「。有司未辯,遍問莫知。顯曰:「貞字文為與上人。」帝因忌其能,出之。後為雲麾邵陵王長史、尋陽太守。魏使李諧至聞之,恨不相識。歎曰:「梁德衰矣。善人國之紀也,而出之,無乃不可乎。」王遷鎮郢州,除平西府諮議參軍,久在府不得志。大同九年終於夏口,時年六十三。
凡佐兩府,並事驕王,人為之憂,而反見禮重。友人劉之遴啟皇太子為之銘志,葬於秣陵縣劉真長舊塋。
子莠、恁、臻。臻早有名,載北史。顯從弟彀字仲寶。形貌短小,儒雅博洽,善辭翰,隨湘東王在蕃十餘年,寵寄甚深。當時文檄皆其所為。位吏部尚書、國子祭酒。魏克江陵,入長安。
明僧紹字休烈,平原鬲人,一字承烈。其先吳太伯之裔,百里奚子孟明,以名為姓,其後也。祖玩,州中從事。父略,給事中。僧紹明經有儒術,宋元嘉中,再舉秀才,永光中,鎮北府辟功曹,並不就。隱長廣郡嶗山,聚徒立學。魏克淮北,乃度江。
升明中,齊高帝為太傅,教辟僧紹及顧歡、臧榮緒,以旌幣之禮,征為記室參軍,不至。僧紹弟慶符為青州,僧紹乏糧食,隨慶符之鬱洲,住弇榆山,棲雲精舍,欣玩水石,竟不一入州城。
泰始季年,岷、益有山崩,淮水竭齊郡,僧紹竊謂其弟曰:「夫天地之氣,不失其序,若夫陽伏而不泄,陰迫而不蒸,於是乎有山崩川竭之變。昔伊、洛竭而夏亡,河竭而殷亡,三川竭岐山崩而周亡,五山崩而漢亡。夫有國必依山川而為固,山川作變,不亡何待?今宋德如四代之季,爾志吾言而勿泄也。」竟如其言。
齊建元元年冬,征為正員郎,稱疾不就。其後帝與崔祖思書,令僧紹與慶符俱歸。帝又曰:「不食周粟而食周薇,古猶發議,在今甯得息談邪?聊以為笑。」
慶符罷任,僧紹隨歸住江乘攝山。僧紹聞沙門釋僧遠夙德,往候定林寺。高帝欲出寺見之,僧遠問僧紹曰:「天子若來,居士若為相對?」僧紹曰:「山藪之人,政當鑿壞以遁;若辭不獲命,便當依戴公故事。」既而遁還攝山、建棲霞寺而居之,高帝甚以為恨。昔戴顒高臥牖下,以山人之服加其身,僧紹故雲。
高帝后謂慶符曰:「卿兄高尚其事,亦堯之外臣。朕夢想幽人,固已勤矣。所謂'徑路絕,風雲通'。」仍賜竹根如意、筍籜冠,隱者以為榮焉。勃海封延伯者,高行士也,聞之歎曰:「明居士身彌後而名彌先,亦宋、齊之儒仲也。」永明中,征國子博士不就,卒。
僧紹長兄僧胤能言玄,仕宋為江夏王義恭參軍,王別為立榻,比之徐孺子。位冀州刺史。子慧照,元徽中,為齊高帝平南主簿,從拒桂陽,累至驃騎中兵參軍,與荀伯玉對領直。建元元年,為巴州刺史,綏懷蠻蜒,上許為益州刺史,未遷卒。僧胤次弟僧暠亦好學,宋大明中再使魏,于時新誅司空劉誕。孝武謂曰:「若問廣陵之事,何以答之?」對曰:「周之管、蔡,漢之淮南。」帝大悅。及至魏,魏問曰:「卿銜此命,當緣上國無相踰者邪?」答曰:「聰明特達,舉袂成帷,比屋之甿,又無下僕。晏子所謂'看國善惡。'故再辱此庭。」位至青州刺史。
僧紹子元琳、仲璋、山賓並傳家業,山賓最知名。
山賓字孝若,七歲能言名理。十三,博通經傳,居喪盡禮,起家奉朝請。兄仲璋痼疾,家道屢空,山賓乃行幹祿,後為廣陽令,頃之去官。會詔使公卿舉士,左衛將軍江祏上書薦山賓才堪理劇。齊明帝不重學,謂祏曰:「聞山賓談書不輟,何堪官邪。」遂不用。
梁台建,累遷右軍記室參軍,掌吉禮。時初置五經博士,山賓首應其選。曆中書侍郎,國子博士,太子率更令,中庶子。天監十五年,出為持節、都督緣淮諸軍事、北兗州刺史。普通二年,征為太子右衛率,加給事中。遷禦史中丞,以公事左遷黃門侍郎。四年,為散騎常侍。東宮新置學士,又以山賓居之。俄以本官兼國子祭酒。
初,山賓在州,所部平陸縣不稔,啟出倉米以振百姓。後刺史檢州曹,失簿,以山賓為耗損。有司追責,籍其宅入官。山賓不自理,更市地造宅。昭明太子聞築室不就,有令曰:「明祭酒雖出撫大蕃,擁旌推轂,珥金拖紫,而恒事屢空。聞構宇未成,今送薄助。」並詒詩曰:「平仲古稱奇,夷吾昔擅美,令則挺伊賢,東秦固多士。築室非道傍,置宅歸仁裏。庚桑方有系,原生今易擬。必來三徑人,將招五經士。」
山賓性篤實,家中嘗乏困,貨所乘牛。既售受錢,乃謂買主曰:「此牛經患漏蹄,療差已久,恐後脫髮,無容不相語。」買主遽追取錢。處士阮孝緒聞之,歎曰:「此言足使還淳反朴,激薄停澆矣。」
五年,又假節攝北兗州事,後卒官,贈侍中,諡曰質子。山賓累居學官,甚有訓導之益,然性頗疏通,接于諸生多狎比,人皆愛之。所著吉禮儀注二百二十四卷,禮儀二十卷,孝經喪服義十五卷。
子震字興道,亦傳父業,位太子舍人,尚書祠部郎,余姚令。
山賓弟少遐字處默,亦知名,位都官尚書。簡文謂人曰:「我不喜明得尚書,更喜朝廷得人。」後拜青州刺史。太清之亂奔魏,仕北齊,卒于太子中庶子。子罕,司空記室。
明氏南度雖晚,並有名位,自宋至梁為刺史者六人。
庾易字幼簡,新野人也,徙居江陵。祖玫,巴郡太守。父道驥,安西參軍。
易志性恬靜,不交外物,齊臨川王映臨州,表薦之,餉麥百斛。易謂使人曰:「走樵采麋鹿之伍,終其解毛之衣,馳騁日月之車,得保自耕之祿,于大王之恩亦已深矣。」辭不受,以文義自樂。安西長史袁彖欽其風,贈以鹿角書格、蚌盤、蚌研、白象牙筆。並贈詩曰:「白日清明,青雲遼亮,昔聞巢、許,今睹台、尚。」易以連理幾、竹翹書格報之。
建武三年,詔征為司空主簿,不就,卒。子黔婁。
黔婁字子貞,一字貞正。少好學,多所講誦。性至孝,不曾失色於人。南陽高士劉虯、宗測並歎異之。仕齊為編令,政有異績。先是縣境多猛獸暴,黔婁至,猛獸皆度往臨沮界,時以為仁化所感。
徙孱陵令,到縣未旬,易在家遘疾,黔婁忽心驚,舉身流汗,即日棄官歸家。家人悉驚其忽至。時易疾始二日,醫雲欲知差劇,但嘗糞甜苦。易泄利,黔婁輒取嘗之,味轉甜滑,心愈憂苦。至夕,每稽顙北辰,求以身代。俄聞空中有聲曰:「征君壽命盡,不復可延。汝誠禱既至,政得至月末。」及晦而易亡。黔婁居喪過禮,廬於塚側。
梁台建,黔婁自西台尚書儀曹郎為益州刺史鄧元起表為府長史、巴西梓潼二郡太守。及成都平,城中珍寶山積,元起悉分與僚佐,唯黔婁一無所取。元起惡其異眾,厲聲曰:「長史何獨為高?」黔婁示不違之,請書數篋。尋除蜀郡太守,在職清素,百姓便之。元起死於蜀郡,部曲皆散,黔婁身營殯斂,攜持喪柩歸鄉里。
東宮建,以中軍記室參軍侍皇太子讀,甚見知重。詔與太子中庶子殷鈞、中舍人到洽、國子博士明山賓遞日為太子講五經義。遷散騎侍郎,卒。弟于陵。
於陵字子介,七歲能言玄理。及長,清警博學,有才思。齊隨王子隆為荊州,召為主簿,使與謝朓、宗夬抄撰群書。子隆代還,又以為送故主簿。子隆為明帝所害,僚吏畏避莫至,唯於陵與夬獨留經理喪事。永元末,除東陽遂安令,為人吏所稱。
梁天監初,為建康獄平,遷尚書功論郎,待詔文德殿。後兼中書通事舍人,拜太子洗馬。舊東宮官屬通為清選,洗馬掌文翰,尤其清者。近代用人,皆取甲族有才望者,時于陵與周舍並擢充此職。武帝曰:「官以人清,豈限甲族。」時論以為美。累遷中書黃門侍郎,舍人如故。後終於鴻臚卿。弟肩吾。
肩吾字慎之,八歲能賦詩,為兄于陵所友愛。初為晉安王國常侍,王每徙鎮,肩吾常隨府。在雍州被命與劉孝威、江伯搖、孔敬通、申子悅、徐防、徐摛、王囿、孔鑠、鮑至等十人抄撰眾籍,豐其果饌,號高齋學士。王為皇太子,兼東宮通事舍人。後為安西湘東王錄事、諮議參軍,太子率更令,中庶子。簡文開文德省置學士,肩吾子信、徐摛子陵、吳郡張長公、北地傅弘、東海鮑至等充其選。齊永明中,王融、謝朓、沈約文章始用四聲,以為新變,至是轉拘聲韻,彌為麗靡,複踰往時。簡文與湘東王書論之曰:
比見京師文體,懦鈍殊常,競學浮疏,爭事闡緩,既殊比興,正背風騷。若夫六典三禮,所施則有地,吉凶嘉賓,用之則有所,未聞吟詠情性,反擬內則之篇,操筆寫志,更模酒誥之作。遲遲春日,翻學歸藏,湛湛江水,遂同大傳。
吾既拙于為文,不敢輕有掎摭,但以當世之作,曆方古之才人,遠則楊、馬、曹、王,近則潘、陸、顏、謝,觀其遣辭用心,了不相似。若以今文為是,則昔賢為非,若以昔賢可稱,則今體宜棄。俱為盍各,則未之敢許。又時有效謝康樂、裴鴻臚文者,亦頗有惑焉。何者?謝客吐言天拔,出於自然,時有不拘,是其糟粕。裴氏乃是良史之才,了無篇什之美。是為學謝則不屆其精華,但得其冗長;師裴則蔑絕其所長,唯得其所短。謝故巧不可階,裴亦質不宜慕。故胸馳臆斷之侶,好名忘實之類,決羽謝生,豈三千之可及,伏膺裴氏,懼兩唐之不傳。故玉徽金銑,反為拙目所嗤,巴人下俚,更合郢中之聽。陽春高而不和,妙聲絕而不尋。竟不精討錙銖,覆量文質,有異巧心,終愧妍手。是以握瑜懷玉之士,瞻鄭邦而知退,章甫翠履之人,望閩鄉而歎息。詩既若此,筆又如之。徒以煙墨不言,受其驅染,紙劄無情,任其搖襞。甚矣哉,文章橫流,一至於此。
至如近世謝朓、沈約之詩,任昉、陸倕之筆,斯文章之冠冕,述作之楷模。張士簡之賦,周升逸之辯,亦成佳手,難可複遇。文章未墜,必有英絕,領袖之者,非弟而誰。每欲論之,無可與語,思吾子建,一共商榷。辨茲清濁,使如涇、渭,論茲月旦,類彼汝南。朱白既定,雌黃有別,使夫懷鼠知慚,濫竽自恥。相思不見,我勞如何!
及簡文即位,以肩吾為度支尚書。時上流蕃鎮,並據州拒侯景,景矯詔遣肩吾使江州喻當陽公大心。大心乃降賊,肩吾因逃入東。後賊宋子仙破會稽,購得肩吾欲殺之,先謂曰:「吾聞汝能作詩,今可即作,若能,將貸汝命。」肩吾操筆便成,辭采甚美,子仙乃釋以為建昌令。仍間道奔江陵,曆江州刺史,領義陽太守,封武康縣侯。卒,贈散騎常侍、中書令。子信。劉虯字靈預,一字德明,南陽涅陽人,晉豫州刺史喬七世孫也。徙居江陵。
虯少而抗節好學,須得祿便隱。宋泰始中,仕至晉平王驃騎記室、當陽令。罷官歸家靜處,常服鹿皮袷,斷穀,餌術及胡麻。齊建元初,豫章王嶷為荊州,教辟虯為別駕,與同郡宗測、新野庾易並遺書禮請之。虯等各修箋答而不應命。
永明三年,刺史廬陵王子卿表虯及同郡宗測、宗尚之、庾易、劉昭五人,請加蒲車束帛之命。詔征為通直郎,不就。竟陵王致書通意,虯答曰:「虯四節臥疾病,三時營灌植,暢餘陰於山澤,托暮情於魚鳥,甯非唐、虞重恩,周、邵宏施。」
虯精信釋氏,衣粗布,禮佛長齋,注法華經,自講佛義。以江陵西沙洲去人遠,乃徙居之。建武二年,詔征國子博士,不就。其冬虯病,正晝有白雲徘徊簷戶之內,又有香氣及磬聲。其日卒,年五十八。虯子之遴。
之遴字思貞,八歲能屬文。虯曰:「此兒必以文興吾宗。」常謂諸子曰:「若比之顏氏,之遴得吾之文。」由是州裏稱之。時有沙門僧惠有異識,每詣虯必呼之遴小字曰:「僧伽福德兒。」握手而進之。
年十五,舉茂才,明經對策,沈約、任昉見而異之。吏部尚書王瞻嘗候任昉,遇之遴在坐,昉謂瞻曰:「此南陽劉之遴,學優未仕,水鏡所宜甄擢。」即辟為太學博士。昉曰:「為之美談,不如面試。」時張稷新除尚書僕射,托昉為讓表,昉令之遴代作,操筆立成。昉曰:「荊南秀氣,果有異才,後仕必當過僕。」禦史中丞樂藹即之遴之舅,憲台奏彈,皆令之遴草焉。後為荊州中從事,梁簡文臨荊州,仍遷宣惠記室。之遴篤學明審,博覽群籍,時劉顯、韋棱並稱強記,之遴每與討論,鹹不過也。
累遷中書侍郎,後除南郡太守。武帝謂曰:「卿母年德並高,故令卿衣錦還鄉,盡榮養之理。」轉西中郎湘東王繹長史,太守如故。初,之遴在荊府,常寄居南郡,忽夢前太守袁彖謂曰:「卿後當為折臂太守,即居此中。」之遴後牛奔墮車折臂,右手偏直,不復得屈伸,書則以手就筆,歎曰:「豈黥而王乎?」周舍嘗戲之曰:「雖複並坐可橫,政恐陋巷無枕。」後連相兩王,再為此郡,曆秘書監。
出為郢州行事,之遴意不願出,固辭曰:「去歲命絕離巽,不敢東下;今年所忌又在西方。」武帝手敕曰:「朕聞妻子具,孝衰於親,爵祿具,忠衰於君。卿既內足,理忘奉公之節。」遂為有司奏免。後為都官尚書、太常卿。
之遴好古愛奇,在荊州聚古器數十百種,有一器似甌可容一斛,上有金錯字,時人無能知者。又獻古器四種於東宮。其第一種,鏤銅鴟夷榼二枚,兩耳有銀鏤,銘雲:「建平二年造。」其第二種,金銀錯鏤古鐏二枚,有篆銘雲:「秦容成侯適楚之歲造。」其第三種,外國澡灌一口,有銘雲:「元封二年,龜茲國獻。」其第四種,古制澡盤一枚,銘雲:「初平二年造。」
時鄱陽嗣王范得班固所撰漢書真本獻東宮,皇太子令之遴與張纘、到溉、陸襄等參校異同,之遴錄其異狀數十事,其大略雲:「案古本漢書稱永平十六年五月二十一日己酉,郎班固上,而今本無上書年月日子。又案古本敘傳號為中篇,今本稱為敘傳,又今本敘傳載班彪事行,而古本雲「彪自有傳」。又今本紀及表志列傳不相合為次,而古本相合為次,總成三十八卷。又今本外戚在西域後,古本外戚次帝紀下。又今本高五子、文三王、景十三王、孝武六子、宣元六王雜在諸傳帙中,古本諸王悉次外戚下,在陳項傳上。又今本韓彭英盧吳述雲:「信惟餓隸,布實黥徒,越亦狗盜,芮尹江湖。雲起龍驤,化為侯王。」古本述雲:「淮陰毅毅,仗劍周章,邦之傑子,實惟彭、英。化為侯王,雲起龍驤。」又古本第三十七卷解音釋義,以助雅詁;而今本無此卷也。」
之遴好屬文,多學古體,與河東裴子野、沛國劉顯恒共討論古籍,因為交好。時周易、尚書、禮記、毛詩並有武帝義疏,唯左氏傳尚闕,之遴乃著春秋大意十科,左氏十科,三傳同異十科。合三十事上之。帝大悅,詔答曰:「省所撰春秋義,比事論書,辭微旨遠,編年之教,言闡義繁。丘明傳洙、泗之風,公羊宗西河之學,鐸椒之解不追,瑕丘之說無取。繼踵胡母,仲舒雲盛,因循谷梁,千秋最篤。張蒼之傳左氏,賈誼之襲荀卿,源本分鑣,指歸殊致,詳略紛然,其來舊矣。昔在弱年,久經研味,一從遺置,迄將五紀。兼晚秋晷促,機事罕暇,夜分求衣,未遑披括。須待夏景,試欲推尋,若溫故可求,別酬所問也。」
始武帝于齊代為荊府諮議,時之遴父虯隱在百里洲,早相知聞。帝偶匱乏,遣就虯換穀百斛。之遴時在父側,曰:「蕭諮議躓士,雲何能得舂,願與其米。」虯從之。及帝即位常懷之。侯景初以蕭正德為帝,之遴時落景所,將使授璽紱。之遴預知,仍剃發披法服乃免。先是,平昌伏挺出家,之遴為詩嘲之曰:「傳聞伏不鬥,化為支道林。」及之遴遇亂,遂披染服,時人笑之。
尋避難還鄉,湘東王繹嘗嫉其才學,聞其西上至夏口,乃密送藥殺之。不欲使人知,乃自製志銘,厚其賻贈。前後文集五十卷。
子三達字三善,數歲能清言及屬文。州將湘東王繹聞之,盛集賓客,召而試之。說義屬詩,皆有理致。年十二,聽江陵令賀革講禮還,仍覆述,不遺一句。年十八卒。之遴深懷悼恨,乃題墓曰「梁妙士」以旌之。之遴弟之亨。
之亨字嘉會,年四歲,出後叔父嵩。及長好學,美風姿,善占對。武帝之臨荊州,唯與虯談。虯見之遴之亨,帝曰:「之遴必以文章顯,之亨當以功名著。」後州舉秀才,除大學博士,仍代兄之遴為中書通事舍人。累遷步兵校尉,湘東王繹諮議參軍,敕賜金策並賜詩焉。
大通六年,出師南鄭,詔湘東王節度諸軍。之亨以司農卿為行台承制,途出本州北界,總督眾軍,杖節而西,樓船戈甲甚盛。老小緣岸觀曰:「是前舉秀才者。」鄉部偉之。是行也,大致克復,軍士有功皆錄,唯之亨為蘭欽所訟,執政因而陷之,故封賞不行,但複本位而已。久之,帝讀陳湯傳,恨其立功絕域而為文吏所抵。宦者張僧胤曰:「外聞論者,竊謂劉之亨似之。」帝感悟,乃封為臨江子。固辭不拜。
之亨美績嘉聲,在朱異之右,既不協,懼為所害,故美出之,以代之遴為安西東湘王繹長史、南郡太守。上問朱異曰:「之亨代兄喜不?兄弟因循,豈直大馮、小馮而已。」又謂尚書令何敬容曰:「荊州長史、南郡太守,皆是僕射出入。今者之亨便是九轉。」在郡有異績,吏人稱之。卒,荊土懷之,不復稱名,號為大南郡小南郡。
子廣德,亦好學,負才任氣。承聖中,位湘東太守。魏平荊州,依于王琳。琳平,陳太建中,曆河東太守,卒官。
之亨弟之遲,位荊州中從事史。子仲威,少有志氣,頗涉文史。梁承聖中,為中書侍郎。蕭莊稱尊號,以為禦史中丞,隨莊終鄴中。
坦字德度,虯從弟也。仕齊曆孱陵令,南中郎錄事參軍,所居以幹濟稱。
梁武帝起兵,時輔國將軍楊公則為湘州刺史,帥師赴夏口。西朝議行州事者,坦求行,乃除輔國長史、長沙太守,行湘州刺史。坦嘗在湘州,多舊恩,道迎者甚眾。齊東昏遣安成太守劉希祖破西台所選太守范僧簡于平都,希祖移檄湘部,於是始興內史王僧粲應之,湘部諸郡,悉皆蜂起。州人鹹欲泛舟逃走,坦悉聚船焚之。前湘州鎮軍鍾玄紹潛應僧粲,坦聞其謀,偽為不知,因理訟至夜,城門遂不閉以疑之。玄紹未及發,明旦詣坦問其故。久留與語,密遣親兵收其家。玄紹在坐未起,而收兵已報具得其文書本末。玄紹即首伏,於坐斬之,焚其文書,餘党悉無所問。
梁天監初,論功封荔浦子。三年,遷西中郎長史、蜀郡太守,行益州事。未至蜀,道卒。
論曰:劉瓛弟兄,僧紹父子,並業盛專門,飾以儒行,持身之節,異夫苟得患失者焉。庾易、劉虯取高一代,其所以行己,事兼隱德,諸子學業之美,各著家聲。顯及之遴見嫉時主,或以非罪而斥,或以非疾而亡,異夫自古哲王屈己下賢之道,有以知武皇之不弘,元後之多忌。梁祚之不永也,不亦宜哉。
南史:卷12
南史(남사)
李延壽(이연수)
卷12
列傳第二後妃下
梁文獻張惶後武德郗皇后武丁貴嬪武阮修容簡文王皇后元徐妃敬夏太后敬王皇后陳武宣章皇后文沈皇后廢帝王皇后宣柳皇后後主沈皇后
天監元年五月甲辰,追上尊號為皇后,諡曰獻。
穆之字思靜,晉司空華六世孫也。少方雅,有識鑒。初為員外散騎侍郎,深被始興王浚引納。穆之鑒其禍萌,求為交址太守,政有異績。宋文帝將以為交州刺史,會病卒。子弘籍字真藝,齊初為鎮西參軍,卒於官。梁武踐阼,追贈穆之光祿大夫,加金章紫綬。贈弘籍廷尉卿。弘籍無子,從父弟弘策以子纘嗣,別有傳。
武德郗皇后諱徽,高平金鄉人也。祖紹,宋國子祭酒、領東海王師。父曄,太子舍人,早卒。後母宋文帝女尋陽公主也,方娠,夢當生貴子。及後生,有赤光照室,器物盡明,家人怪之。巫言此女光高,將有所妨,乃于水濱祓除之。
後幼明慧,善隸書,讀史傳。女工之事,無不閑習。宋後廢帝將納為後,齊初,安陸王緬又欲結婚,郗氏並辭以女疾,乃止。齊建元末,嬪于武帝,生永興公主玉姚、永世公主玉婉、永康公主玉嬛。及武帝為雍州刺史,殂于襄陽官舍,年三十二。其年歸葬南徐州南東海武進縣東城裏山。中興二年,武帝為梁公,齊帝詔贈後為梁公妃。及武帝踐阼,追崇為皇后,諡曰德。陵曰修陵。後父曄,贈金紫光祿大夫。
後酷妒忌,及終,化為龍入于後宮井,通夢於帝。或見形,光彩照灼。帝體將不安,龍輒激水騰湧。于露井上為殿,衣服委積,常置銀鹿盧金瓶灌百味以祀之。故帝卒不置後。
武丁貴嬪諱令光,譙國人也。祖父從官襄陽,因居沔北五女村,寓於劉惠明廡下。貴嬪生於樊城,初產有神光之異,紫氣滿室,故以「光」為名。相者雲「當大貴」。少時與鄰女月下紡績,諸女並患蚊蚋,而貴嬪弗之覺也。鄉人魏益德將娉之,未及成,而武帝鎮樊城,嘗登樓以望,見漢濱五采如龍,下有女子擘絖,則貴嬪也。又丁氏因人以相者言聞之於帝,帝贈以金環,納之,時年十四。貴嬪生而有赤志在左臂,療之不滅;又體多疣子,至是無何並失所在。德後酷忌,遇貴嬪無道,使日舂五斛,舂每中程,若有助者,被遇雖嚴,益小心祗敬。嘗於供養經案側,髣佛若見神人,心獨異之。
天監元年五月,有司奏為貴人,未拜;其年八月,又奏為貴嬪,居顯陽殿。及太子定位,有司奏曰:「皇太子副貳宸極,率土鹹執吏禮。既盡禮皇儲,則所生不容無敬。王侯妃主常得通信問者,及六宮三夫人雖與貴嬪同列,並應以敬皇太子之禮敬貴嬪。宋元嘉中,始興、武陵國臣並以吏敬敬王所生潘淑妃、路淑媛。貴嬪于宮臣雖非小君,其義不異,與宋泰豫朝議百官以吏敬敬帝所生,事義政同。謂宮僚施敬,宜同吏禮,詣神獸門奉箋致謁,年節稱慶,亦同如此。且儲妃作配,率由盛則,以婦踰姑,彌乖從序,謂貴嬪典章,一與太子不異。」於是貴嬪備典章禮數,同乎太子,言則稱令。
貴嬪性仁恕,及居宮接馭,自下皆得其歡心。不好華飾,器服無珍麗。未嘗為親戚私謁。及武帝弘佛教,貴嬪長進蔬膳。受戒日,甘露降於殿前,方一丈五尺。帝所立經義,皆得其指歸,尤精淨名經。普通七年十一月庚辰,薨,移殯於東宮臨雲殿,時年四十二。詔吏部郎張纘為哀冊文,有司奏諡曰穆,葬甯陵,祔於小廟。簡文即位,追崇曰太后。
貴嬪父道遷,天監初,為曆陽太守。廬陵威王之生,武帝謂之曰:「賢女複育一男。」答曰:「莫道豬狗子。」世人以為笑。後位兗州刺史、宣城太守。
文宣阮太后諱令嬴,會稽余姚人也。本姓石。初,齊始安王遙光納焉。遙光敗,入東昏宮。建康城平,為武帝采女。在孕,夢龍罩其床。天監七年八月,生元帝于後宮。是日大赦。尋拜為修容,賜姓阮氏。嘗隨元帝出藩。大同九年六月,薨于江州正寢,時年六十七。其年十一月,歸葬江寧縣通望山,諡曰宣。元帝即位,有司奏追崇為文宣太后,還祔小廟。
承聖二年,追贈太后父齊故奉朝請石靈寶散騎常侍、左衛將軍、封武康縣侯,母陳氏武康侯夫人。
簡文王皇后諱靈賓,琅邪臨沂人也。祖儉,齊太尉、南昌文憲公。父騫,金紫光祿大夫、南昌安侯。後幼而柔明,叔父暕見之曰:「吾家女師也。」天監十一年,拜晉安王妃。生哀太子大器、南郡王大連、長山公主妙挈。大通三年十月,拜皇太子妃。太清三年三月,薨於永福省,時年四十五。其年,簡文即位,追崇為皇后,諡曰簡。大寶元年九月,葬莊陵。
元帝徐妃諱昭佩,東海郯人也。祖孝嗣,齊太尉、枝江文忠公。父緄,侍中、信武將軍。妃以天監十六年十二月拜湘東王妃,生世子方等、益昌公主含貞。妃無容質,不見禮,帝三二年一入房。妃以帝眇一目,每知帝將至,必為半面妝以俟,帝見則大怒而出。妃性嗜酒,多洪醉,帝還房,必吐衣中。與荊州後堂瑤光寺智遠道人私通。酷妒忌,見無寵之妾,便交杯接坐。才覺有娠者,即手加刀刃。帝左右暨季江有姿容,又與淫通。季江每歎曰:「柏直狗雖老猶能獵,蕭溧陽馬雖老猶駿,徐娘雖老猶尚多情。」時有賀徽者美色,妃要之於普賢尼寺,書白角枕為詩相贈答。既而貞惠世子方諸母王氏寵愛,未幾而終,元帝歸咎於妃;及方等死,愈見疾。太清三年,遂逼令自殺。妃知不免,乃透井死。帝以屍還徐氏,謂之出妻。葬江陵瓦官寺。帝制金樓子述其淫行。初,妃嫁夕,車至西州,而疾風大起,髮屋折木。無何,雪霰交下,帷簾皆白。及長還之日,又大雷震西州聽事兩柱俱碎。帝以為不祥,後果不終婦道。
敬夏太后,會稽人也。普通中,納于湘東王宮,生敬帝。承聖元年冬,拜晉安王國太妃。紹泰元年,尊為太后。明年冬,降為江陰國太妃。
敬王皇后,琅邪臨沂人也。承聖元年十一月,拜晉安王妃。紹泰元年十月,拜皇后。明年,降為江陰王妃。父僉自有傳。陳武宣章皇后,諱要兒,吳興烏程人。本姓鈕,父景明為章氏所養,因改姓焉。後母蘇,嘗遇道士以小龜遺己,光采五色,曰「三年有征」。及期,後生,紫光照室,因失龜所在。後少聰慧,美容儀,手爪長五寸,色並紅白。每有期功之服,則一爪先折。武帝先娶同郡錢仲方女,早卒,後乃聘後。後善書計,能誦詩及楚辭。帝為長城縣公,後拜夫人。永定元年,立為皇后。追贈後父梁散騎侍郎景明特進、金紫光祿大夫,加金章紫綬。拜後母蘇安吉縣君。二年,安吉君卒,與後父葬吳興。明年,追封後父為廣德縣侯,諡曰溫。
武帝崩,後與中書舍人蔡景曆定計,秘不發喪。時衡陽獻王昌未至,召文帝。及即位,尊後為皇太后,宮曰慈訓。廢帝即位,後為太皇太后。
光大二年,後下令黜廢帝為臨海王,命宣帝嗣立。太建元年,複為皇太后。二年三月丙申,崩於紫極殿,時年六十五。遺令喪事並從儉約,諸饋奠不用牲牢。其年四月,群臣上諡曰宣,祔葬萬安陵。
後親屬無在朝者,唯本族兄鈕洽官至中散大夫。
文沈皇后諱妙容,吳興武康人也。父法深,梁安前中錄事參軍。後年十歲余,以梁大同中歸於文帝。武帝之討侯景,文帝時在吳興,及後並被收,景平,乃獲免。武帝踐阼,後為臨川王妃。文帝即位,為皇后。追贈後父法深光祿大夫,加金章紫綬,封建城縣侯,諡曰恭。追贈後母高為綏安縣君,諡曰定。廢帝即位,尊後為皇太后,宮曰安德。
時宣帝與僕射到仲舉、舍人劉師知等,並受遺輔政。師知與仲舉恒居禁中,參決眾事,而宣帝為揚州刺史,與左右三百人,入居尚書省。師知忌宣帝權重,矯敕令還東府理州務。宣帝將出,毛喜止帝曰:「今若出外,便受制於人,如曹爽願作富家公不可得也。」宣帝乃稱疾,召師知留與語,使毛喜先入,言之於後。後曰:「今伯宗年幼,政事並委二郎,此非我意。」喜又言於廢帝,廢帝曰:「此自師知等所為,非朕意也。」喜出報宣帝,帝因囚師知。自入見後及帝,極陳師知之短。仍自草敕請畫,以師知付廷尉,其夜於獄賜死。自是政歸宣帝。後憂悶,計無所出,乃密賂宦者蔣裕,令誘建安人張安國使據郡反,冀因此圖帝。安國事發被誅,時後左右近侍頗知其事,後恐連逮黨與,並殺之。
宣帝即位,以後為文皇后。陳亡入隋,大業初自長安歸於江南,頃之卒。
後兄欽,襲爵建城侯,位尚書左僕射。欽素無伎能,奉己而已。卒,諡曰成。子觀嗣,頗有學識,官至禦史中丞。
廢帝王皇后,琅邪臨沂人也。天嘉元年,為皇太子妃。廢帝即位,立為皇后。廢帝為臨海王,後廢為妃。至德中薨。後生臨海嗣王至澤。至澤,光大元年為皇太子,太建元年,襲封臨海嗣王。陳亡,入長安。後父固自有傳。
宣柳皇后諱敬言,河東解縣人也。曾祖世隆,祖惲,父偃,並有傳。後九歲,幹理家事,有若成人。侯景之亂,後與弟盼往江陵,依梁元帝,帝以長城公主故,待遇甚厚,以配宣帝。承聖二年,後生後主于江陵。及魏克江陵,宣帝遷于關右,後與後主俱留穰城。天嘉二年,與後主還朝,後為安成王妃。宣帝即位,立為皇后。後美姿容,身長七尺二寸,手垂過膝。初,宣帝居鄉里,先娶吳興錢氏,及即位,拜貴妃,甚有寵。後傾心下之,每尚方供奉物,其上者皆推于貴妃,而己禦其次焉。宣帝崩,始興王叔陵為亂,後主賴後與吳媼救而獲免。後主即位,尊後為皇太后,宮曰弘範。是時新失淮南地,隋師臨江,又國遭大喪,後主患創不能聽政。其誅叔陵,供大行喪事,邊境防守及百司眾務,雖假後主之敕,實皆決之於後。後主創愈,乃歸政焉。後性謙謹,未嘗以宗族為請,雖衣食亦無所分遺。陳亡,入長安。隋大業十二年,薨於東都,年八十三。葬於洛陽之芒山。
後主沈皇后諱婺華,吳興武康人也。父君理自有傳。後母即武帝女會稽穆公主,早亡。時後尚幼,而毀瘠過甚。及服畢,每歲時朔望,恒獨坐涕泣,哀動左右,內外敬異焉。太建元年,拜為皇太子妃。後主即位,立為皇后。
後性端靜,有識量,寡嗜欲,聰敏強記,涉獵經史,工書翰。後主在東宮,而後父君理卒,居憂處別殿,哀毀逾禮。後主遇後既薄,而張貴妃有寵,總後宮之政,後澹然未嘗有所忌怨。而身居儉約,衣服無錦繡之飾,左右近侍才百許人,唯尋閱圖史及釋典為事。嘗遇歲旱,自暴而誦佛經,應時雨降。無子,養孫姬子胤為己子。數上書諫爭,後主將廢之,而立張貴妃,會國亡不果,乃與後主俱入長安。及後主薨,後自為哀辭,文甚酸切。
隋煬帝每巡幸,恒令從駕。及煬帝被殺,後自廣陵過江,於毗陵天靜寺為尼,名觀音。貞觀初卒。
張貴妃名麗華,兵家女也。父兄以織席為業。後主為太子,以選入宮。時龔貴嬪為良娣,貴妃年十歲,為之給使。後主見而悅之,因得幸,遂有娠,生太子深。後主即位,拜為貴妃。性聰慧,甚被寵遇。
後主始以始興王叔陵之亂,被傷,臥於承香殿。時諸姬並不得進,唯貴妃侍焉。而柳太后猶居柏梁殿,即皇后之正殿也。而沈皇后素無寵於後主,不得侍疾,別居求賢殿。
至德二年,乃於光昭殿前起臨春、結綺、望仙三閣,高數十丈,並數十間。其窗牖、壁帶、縣楣、欄檻之類,皆以沈檀香為之,又飾以金玉,間以珠翠,外施珠簾。內有寶床寶帳,其服玩之屬,瑰麗皆近古未有。每微風暫至,香聞數裏,朝日初照,光映後庭。其下積石為山,引水為池,植以奇樹,雜以花藥。後主自居臨春閣,張貴妃居結綺閣,龔、孔二貴嬪居望仙閣,並複道交相往來。又有王、季二美人,張、薛二淑媛,袁昭儀、何婕妤、江修容等七人,並有寵,遞代以遊其上。以宮人有文學者袁大舍等為女學士。後主每引賓客,對貴妃等游宴,則使諸貴人及女學士與狎客共賦新詩,互相贈答。采其尤豔麗者,以為曲調,被以新聲。選宮女有容色者以千百數,令習而歌之,分部疊進,持以相樂。其曲有玉樹後庭花、臨春樂等。其略雲:「璧月夜夜滿,瓊樹朝朝新。」大抵所歸,皆美張貴妃、孔貴嬪之容色。
張貴妃發長七尺,鬒黑如漆,其光可鑒。特聰慧,有神彩,進止閑華,容色端麗。每瞻視眄睞,光彩溢目,照映左右。嘗於閣上靚妝,臨於軒檻,宮中遙望,飄若神仙。才辯強記,善候人主顏色。薦諸宮女,後宮鹹德之,競言其善。又工厭魅之術,假鬼道以惑後主。置淫祀于宮中,聚諸女巫使之鼓舞。
時後主怠於政事,百司啟奏,並因宦者蔡臨兒、李善度進請,後主倚隱囊,置張貴妃于膝上共決之。李、蔡所不能記者,貴妃並為疏條,無所遺脫。因參訪外事,人間有一言一事,貴妃必先知白之,由是益加寵異,冠絕後庭。而後宮之家,不遵法度,有絓於理者,但求恩于貴妃,貴妃則令李、蔡先啟其事,而後從容為言之。大臣有不從者,因而譖之,言無不聽。於是張、孔之權,熏灼四方,內外宗族,多被引用,大臣執政,亦從風而靡。閹宦便佞之徒,內外交結,轉相引進。賄賂公行,賞罰無常,綱紀瞀亂矣。及隋軍克台城,貴妃與後主俱入井,隋軍出之,晉王廣命斬之於青溪中橋。
論曰:飲食男女,人之大欲存焉,故聖人順于人情而為之度。王宮六列,士室二等,皆隨事升降,以立節文。若夫義篤閫闈,政刑邦國,古先哲王有以之致化矣。夫後妃專夕,配以德升,姬嬙並禦,進非色幸,欲使情有覃被,愛罔偏流,專貞內表,妖蠱外息,乃可以輔興君德,燮理陰政。
宋氏因晉之舊典,聘納有方,俔天作儷,必四嶽之後。自元嘉以降,內職稍繁,所選止於軍署,徵引極乎廝皁,非若晉氏采擇,濫及冠冕者焉。而愛止帷房,權無外授,戚屬餼賚,歲時不過肴漿,斯為美矣。及文帝之傾惑潘嫗,謀及婦人;大明之淪沒殷姬,並後匹嫡,其為喪敗,亦已甚矣。
齊氏孝、昭二後,並有賢明之訓,惜乎早世,不得母臨萬國。有婦人焉,空慕周典,禎符顯瑞,徒萃徽名。高皇受命,宮禁貶約,衣不文繡,色無紅采,永巷貧空,有同素室。武帝嗣位,運藉休平,壽昌前興,鳳華晚構,香柏文檉,花梁繡柱,雕金鏤寶,照燭房帷,趙瑟吳趨,承閑奏曲,事由私蓄,無損國儲。明帝統業,矯情儉陋,奉己之制,曾莫雲改。東昏喪道,侈風大扇,哲婦傾城,同符殷、夏,可以垂誡,其在斯乎。梁武志在約己,示存宮掖,雖貴嬪之徽華早著,誕育元良,唯見崇重,無聞正位。徐妃無行,其殲滅也宜哉。
陳武撫茲歸運,奄開帝業。若夫儷天作則,燮隆王化,則宣太后其懿焉。文、宣宮壼,無聞於喪德;後主嗣業,實敗于椒房,既曰牝晨,亦唯家之索也。
李延壽(이연수)
卷12
列傳第二後妃下
梁文獻張惶後武德郗皇后武丁貴嬪武阮修容簡文王皇后元徐妃敬夏太后敬王皇后陳武宣章皇后文沈皇后廢帝王皇后宣柳皇后後主沈皇后
天監元年五月甲辰,追上尊號為皇后,諡曰獻。
穆之字思靜,晉司空華六世孫也。少方雅,有識鑒。初為員外散騎侍郎,深被始興王浚引納。穆之鑒其禍萌,求為交址太守,政有異績。宋文帝將以為交州刺史,會病卒。子弘籍字真藝,齊初為鎮西參軍,卒於官。梁武踐阼,追贈穆之光祿大夫,加金章紫綬。贈弘籍廷尉卿。弘籍無子,從父弟弘策以子纘嗣,別有傳。
武德郗皇后諱徽,高平金鄉人也。祖紹,宋國子祭酒、領東海王師。父曄,太子舍人,早卒。後母宋文帝女尋陽公主也,方娠,夢當生貴子。及後生,有赤光照室,器物盡明,家人怪之。巫言此女光高,將有所妨,乃于水濱祓除之。
後幼明慧,善隸書,讀史傳。女工之事,無不閑習。宋後廢帝將納為後,齊初,安陸王緬又欲結婚,郗氏並辭以女疾,乃止。齊建元末,嬪于武帝,生永興公主玉姚、永世公主玉婉、永康公主玉嬛。及武帝為雍州刺史,殂于襄陽官舍,年三十二。其年歸葬南徐州南東海武進縣東城裏山。中興二年,武帝為梁公,齊帝詔贈後為梁公妃。及武帝踐阼,追崇為皇后,諡曰德。陵曰修陵。後父曄,贈金紫光祿大夫。
後酷妒忌,及終,化為龍入于後宮井,通夢於帝。或見形,光彩照灼。帝體將不安,龍輒激水騰湧。于露井上為殿,衣服委積,常置銀鹿盧金瓶灌百味以祀之。故帝卒不置後。
武丁貴嬪諱令光,譙國人也。祖父從官襄陽,因居沔北五女村,寓於劉惠明廡下。貴嬪生於樊城,初產有神光之異,紫氣滿室,故以「光」為名。相者雲「當大貴」。少時與鄰女月下紡績,諸女並患蚊蚋,而貴嬪弗之覺也。鄉人魏益德將娉之,未及成,而武帝鎮樊城,嘗登樓以望,見漢濱五采如龍,下有女子擘絖,則貴嬪也。又丁氏因人以相者言聞之於帝,帝贈以金環,納之,時年十四。貴嬪生而有赤志在左臂,療之不滅;又體多疣子,至是無何並失所在。德後酷忌,遇貴嬪無道,使日舂五斛,舂每中程,若有助者,被遇雖嚴,益小心祗敬。嘗於供養經案側,髣佛若見神人,心獨異之。
天監元年五月,有司奏為貴人,未拜;其年八月,又奏為貴嬪,居顯陽殿。及太子定位,有司奏曰:「皇太子副貳宸極,率土鹹執吏禮。既盡禮皇儲,則所生不容無敬。王侯妃主常得通信問者,及六宮三夫人雖與貴嬪同列,並應以敬皇太子之禮敬貴嬪。宋元嘉中,始興、武陵國臣並以吏敬敬王所生潘淑妃、路淑媛。貴嬪于宮臣雖非小君,其義不異,與宋泰豫朝議百官以吏敬敬帝所生,事義政同。謂宮僚施敬,宜同吏禮,詣神獸門奉箋致謁,年節稱慶,亦同如此。且儲妃作配,率由盛則,以婦踰姑,彌乖從序,謂貴嬪典章,一與太子不異。」於是貴嬪備典章禮數,同乎太子,言則稱令。
貴嬪性仁恕,及居宮接馭,自下皆得其歡心。不好華飾,器服無珍麗。未嘗為親戚私謁。及武帝弘佛教,貴嬪長進蔬膳。受戒日,甘露降於殿前,方一丈五尺。帝所立經義,皆得其指歸,尤精淨名經。普通七年十一月庚辰,薨,移殯於東宮臨雲殿,時年四十二。詔吏部郎張纘為哀冊文,有司奏諡曰穆,葬甯陵,祔於小廟。簡文即位,追崇曰太后。
貴嬪父道遷,天監初,為曆陽太守。廬陵威王之生,武帝謂之曰:「賢女複育一男。」答曰:「莫道豬狗子。」世人以為笑。後位兗州刺史、宣城太守。
文宣阮太后諱令嬴,會稽余姚人也。本姓石。初,齊始安王遙光納焉。遙光敗,入東昏宮。建康城平,為武帝采女。在孕,夢龍罩其床。天監七年八月,生元帝于後宮。是日大赦。尋拜為修容,賜姓阮氏。嘗隨元帝出藩。大同九年六月,薨于江州正寢,時年六十七。其年十一月,歸葬江寧縣通望山,諡曰宣。元帝即位,有司奏追崇為文宣太后,還祔小廟。
承聖二年,追贈太后父齊故奉朝請石靈寶散騎常侍、左衛將軍、封武康縣侯,母陳氏武康侯夫人。
簡文王皇后諱靈賓,琅邪臨沂人也。祖儉,齊太尉、南昌文憲公。父騫,金紫光祿大夫、南昌安侯。後幼而柔明,叔父暕見之曰:「吾家女師也。」天監十一年,拜晉安王妃。生哀太子大器、南郡王大連、長山公主妙挈。大通三年十月,拜皇太子妃。太清三年三月,薨於永福省,時年四十五。其年,簡文即位,追崇為皇后,諡曰簡。大寶元年九月,葬莊陵。
元帝徐妃諱昭佩,東海郯人也。祖孝嗣,齊太尉、枝江文忠公。父緄,侍中、信武將軍。妃以天監十六年十二月拜湘東王妃,生世子方等、益昌公主含貞。妃無容質,不見禮,帝三二年一入房。妃以帝眇一目,每知帝將至,必為半面妝以俟,帝見則大怒而出。妃性嗜酒,多洪醉,帝還房,必吐衣中。與荊州後堂瑤光寺智遠道人私通。酷妒忌,見無寵之妾,便交杯接坐。才覺有娠者,即手加刀刃。帝左右暨季江有姿容,又與淫通。季江每歎曰:「柏直狗雖老猶能獵,蕭溧陽馬雖老猶駿,徐娘雖老猶尚多情。」時有賀徽者美色,妃要之於普賢尼寺,書白角枕為詩相贈答。既而貞惠世子方諸母王氏寵愛,未幾而終,元帝歸咎於妃;及方等死,愈見疾。太清三年,遂逼令自殺。妃知不免,乃透井死。帝以屍還徐氏,謂之出妻。葬江陵瓦官寺。帝制金樓子述其淫行。初,妃嫁夕,車至西州,而疾風大起,髮屋折木。無何,雪霰交下,帷簾皆白。及長還之日,又大雷震西州聽事兩柱俱碎。帝以為不祥,後果不終婦道。
敬夏太后,會稽人也。普通中,納于湘東王宮,生敬帝。承聖元年冬,拜晉安王國太妃。紹泰元年,尊為太后。明年冬,降為江陰國太妃。
敬王皇后,琅邪臨沂人也。承聖元年十一月,拜晉安王妃。紹泰元年十月,拜皇后。明年,降為江陰王妃。父僉自有傳。陳武宣章皇后,諱要兒,吳興烏程人。本姓鈕,父景明為章氏所養,因改姓焉。後母蘇,嘗遇道士以小龜遺己,光采五色,曰「三年有征」。及期,後生,紫光照室,因失龜所在。後少聰慧,美容儀,手爪長五寸,色並紅白。每有期功之服,則一爪先折。武帝先娶同郡錢仲方女,早卒,後乃聘後。後善書計,能誦詩及楚辭。帝為長城縣公,後拜夫人。永定元年,立為皇后。追贈後父梁散騎侍郎景明特進、金紫光祿大夫,加金章紫綬。拜後母蘇安吉縣君。二年,安吉君卒,與後父葬吳興。明年,追封後父為廣德縣侯,諡曰溫。
武帝崩,後與中書舍人蔡景曆定計,秘不發喪。時衡陽獻王昌未至,召文帝。及即位,尊後為皇太后,宮曰慈訓。廢帝即位,後為太皇太后。
光大二年,後下令黜廢帝為臨海王,命宣帝嗣立。太建元年,複為皇太后。二年三月丙申,崩於紫極殿,時年六十五。遺令喪事並從儉約,諸饋奠不用牲牢。其年四月,群臣上諡曰宣,祔葬萬安陵。
後親屬無在朝者,唯本族兄鈕洽官至中散大夫。
文沈皇后諱妙容,吳興武康人也。父法深,梁安前中錄事參軍。後年十歲余,以梁大同中歸於文帝。武帝之討侯景,文帝時在吳興,及後並被收,景平,乃獲免。武帝踐阼,後為臨川王妃。文帝即位,為皇后。追贈後父法深光祿大夫,加金章紫綬,封建城縣侯,諡曰恭。追贈後母高為綏安縣君,諡曰定。廢帝即位,尊後為皇太后,宮曰安德。
時宣帝與僕射到仲舉、舍人劉師知等,並受遺輔政。師知與仲舉恒居禁中,參決眾事,而宣帝為揚州刺史,與左右三百人,入居尚書省。師知忌宣帝權重,矯敕令還東府理州務。宣帝將出,毛喜止帝曰:「今若出外,便受制於人,如曹爽願作富家公不可得也。」宣帝乃稱疾,召師知留與語,使毛喜先入,言之於後。後曰:「今伯宗年幼,政事並委二郎,此非我意。」喜又言於廢帝,廢帝曰:「此自師知等所為,非朕意也。」喜出報宣帝,帝因囚師知。自入見後及帝,極陳師知之短。仍自草敕請畫,以師知付廷尉,其夜於獄賜死。自是政歸宣帝。後憂悶,計無所出,乃密賂宦者蔣裕,令誘建安人張安國使據郡反,冀因此圖帝。安國事發被誅,時後左右近侍頗知其事,後恐連逮黨與,並殺之。
宣帝即位,以後為文皇后。陳亡入隋,大業初自長安歸於江南,頃之卒。
後兄欽,襲爵建城侯,位尚書左僕射。欽素無伎能,奉己而已。卒,諡曰成。子觀嗣,頗有學識,官至禦史中丞。
廢帝王皇后,琅邪臨沂人也。天嘉元年,為皇太子妃。廢帝即位,立為皇后。廢帝為臨海王,後廢為妃。至德中薨。後生臨海嗣王至澤。至澤,光大元年為皇太子,太建元年,襲封臨海嗣王。陳亡,入長安。後父固自有傳。
宣柳皇后諱敬言,河東解縣人也。曾祖世隆,祖惲,父偃,並有傳。後九歲,幹理家事,有若成人。侯景之亂,後與弟盼往江陵,依梁元帝,帝以長城公主故,待遇甚厚,以配宣帝。承聖二年,後生後主于江陵。及魏克江陵,宣帝遷于關右,後與後主俱留穰城。天嘉二年,與後主還朝,後為安成王妃。宣帝即位,立為皇后。後美姿容,身長七尺二寸,手垂過膝。初,宣帝居鄉里,先娶吳興錢氏,及即位,拜貴妃,甚有寵。後傾心下之,每尚方供奉物,其上者皆推于貴妃,而己禦其次焉。宣帝崩,始興王叔陵為亂,後主賴後與吳媼救而獲免。後主即位,尊後為皇太后,宮曰弘範。是時新失淮南地,隋師臨江,又國遭大喪,後主患創不能聽政。其誅叔陵,供大行喪事,邊境防守及百司眾務,雖假後主之敕,實皆決之於後。後主創愈,乃歸政焉。後性謙謹,未嘗以宗族為請,雖衣食亦無所分遺。陳亡,入長安。隋大業十二年,薨於東都,年八十三。葬於洛陽之芒山。
後主沈皇后諱婺華,吳興武康人也。父君理自有傳。後母即武帝女會稽穆公主,早亡。時後尚幼,而毀瘠過甚。及服畢,每歲時朔望,恒獨坐涕泣,哀動左右,內外敬異焉。太建元年,拜為皇太子妃。後主即位,立為皇后。
後性端靜,有識量,寡嗜欲,聰敏強記,涉獵經史,工書翰。後主在東宮,而後父君理卒,居憂處別殿,哀毀逾禮。後主遇後既薄,而張貴妃有寵,總後宮之政,後澹然未嘗有所忌怨。而身居儉約,衣服無錦繡之飾,左右近侍才百許人,唯尋閱圖史及釋典為事。嘗遇歲旱,自暴而誦佛經,應時雨降。無子,養孫姬子胤為己子。數上書諫爭,後主將廢之,而立張貴妃,會國亡不果,乃與後主俱入長安。及後主薨,後自為哀辭,文甚酸切。
隋煬帝每巡幸,恒令從駕。及煬帝被殺,後自廣陵過江,於毗陵天靜寺為尼,名觀音。貞觀初卒。
張貴妃名麗華,兵家女也。父兄以織席為業。後主為太子,以選入宮。時龔貴嬪為良娣,貴妃年十歲,為之給使。後主見而悅之,因得幸,遂有娠,生太子深。後主即位,拜為貴妃。性聰慧,甚被寵遇。
後主始以始興王叔陵之亂,被傷,臥於承香殿。時諸姬並不得進,唯貴妃侍焉。而柳太后猶居柏梁殿,即皇后之正殿也。而沈皇后素無寵於後主,不得侍疾,別居求賢殿。
至德二年,乃於光昭殿前起臨春、結綺、望仙三閣,高數十丈,並數十間。其窗牖、壁帶、縣楣、欄檻之類,皆以沈檀香為之,又飾以金玉,間以珠翠,外施珠簾。內有寶床寶帳,其服玩之屬,瑰麗皆近古未有。每微風暫至,香聞數裏,朝日初照,光映後庭。其下積石為山,引水為池,植以奇樹,雜以花藥。後主自居臨春閣,張貴妃居結綺閣,龔、孔二貴嬪居望仙閣,並複道交相往來。又有王、季二美人,張、薛二淑媛,袁昭儀、何婕妤、江修容等七人,並有寵,遞代以遊其上。以宮人有文學者袁大舍等為女學士。後主每引賓客,對貴妃等游宴,則使諸貴人及女學士與狎客共賦新詩,互相贈答。采其尤豔麗者,以為曲調,被以新聲。選宮女有容色者以千百數,令習而歌之,分部疊進,持以相樂。其曲有玉樹後庭花、臨春樂等。其略雲:「璧月夜夜滿,瓊樹朝朝新。」大抵所歸,皆美張貴妃、孔貴嬪之容色。
張貴妃發長七尺,鬒黑如漆,其光可鑒。特聰慧,有神彩,進止閑華,容色端麗。每瞻視眄睞,光彩溢目,照映左右。嘗於閣上靚妝,臨於軒檻,宮中遙望,飄若神仙。才辯強記,善候人主顏色。薦諸宮女,後宮鹹德之,競言其善。又工厭魅之術,假鬼道以惑後主。置淫祀于宮中,聚諸女巫使之鼓舞。
時後主怠於政事,百司啟奏,並因宦者蔡臨兒、李善度進請,後主倚隱囊,置張貴妃于膝上共決之。李、蔡所不能記者,貴妃並為疏條,無所遺脫。因參訪外事,人間有一言一事,貴妃必先知白之,由是益加寵異,冠絕後庭。而後宮之家,不遵法度,有絓於理者,但求恩于貴妃,貴妃則令李、蔡先啟其事,而後從容為言之。大臣有不從者,因而譖之,言無不聽。於是張、孔之權,熏灼四方,內外宗族,多被引用,大臣執政,亦從風而靡。閹宦便佞之徒,內外交結,轉相引進。賄賂公行,賞罰無常,綱紀瞀亂矣。及隋軍克台城,貴妃與後主俱入井,隋軍出之,晉王廣命斬之於青溪中橋。
論曰:飲食男女,人之大欲存焉,故聖人順于人情而為之度。王宮六列,士室二等,皆隨事升降,以立節文。若夫義篤閫闈,政刑邦國,古先哲王有以之致化矣。夫後妃專夕,配以德升,姬嬙並禦,進非色幸,欲使情有覃被,愛罔偏流,專貞內表,妖蠱外息,乃可以輔興君德,燮理陰政。
宋氏因晉之舊典,聘納有方,俔天作儷,必四嶽之後。自元嘉以降,內職稍繁,所選止於軍署,徵引極乎廝皁,非若晉氏采擇,濫及冠冕者焉。而愛止帷房,權無外授,戚屬餼賚,歲時不過肴漿,斯為美矣。及文帝之傾惑潘嫗,謀及婦人;大明之淪沒殷姬,並後匹嫡,其為喪敗,亦已甚矣。
齊氏孝、昭二後,並有賢明之訓,惜乎早世,不得母臨萬國。有婦人焉,空慕周典,禎符顯瑞,徒萃徽名。高皇受命,宮禁貶約,衣不文繡,色無紅采,永巷貧空,有同素室。武帝嗣位,運藉休平,壽昌前興,鳳華晚構,香柏文檉,花梁繡柱,雕金鏤寶,照燭房帷,趙瑟吳趨,承閑奏曲,事由私蓄,無損國儲。明帝統業,矯情儉陋,奉己之制,曾莫雲改。東昏喪道,侈風大扇,哲婦傾城,同符殷、夏,可以垂誡,其在斯乎。梁武志在約己,示存宮掖,雖貴嬪之徽華早著,誕育元良,唯見崇重,無聞正位。徐妃無行,其殲滅也宜哉。
陳武撫茲歸運,奄開帝業。若夫儷天作則,燮隆王化,則宣太后其懿焉。文、宣宮壼,無聞於喪德;後主嗣業,實敗于椒房,既曰牝晨,亦唯家之索也。
南史 (李延壽)
南史(남사)
李延壽(이연수)
南史(nánshǐ)
구분: 역사서
저자: 이연수(李延壽)
시대: 중국 당
중국 당(唐)의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사서(史書). 기전체(紀傳體)로 송(宋), 남제(南齊), 양(梁), 진(陳) 등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의 네 왕조의 역사를 기술한 중국 25사(二十五史)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 당(唐)의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사서(史書)로 중국 각 왕조(王朝)의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25사(二十五史) 가운데 하나이다. 송(宋, 420~479), 남제(南齊, 479~502), 양(梁, 502~557), 진(陳, 557~589) 등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420~589) 남조(南朝)의 네 왕조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서술하였다. 유유(劉裕)가 진(晋)의 공제(恭帝)에게 양위(讓位)를 받아 송(宋)을 건국한 420년(宋 武帝 永初 원년)부터 진(陳)이 수(隋) 문제(文帝)에게 멸망된 589년(陳 後主 禎明 3년)까지 170년 동안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70권 등 모두 80권으로 되어 있다.
남사(南史)의 편찬은 이연수(李延壽)의 아버지인 이대사(李大師, 570~628)부터 시작되었다. 이대사(李大師)는 종래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각 왕조의 역사 기술이 공정하지 못하고 일관성과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고, 이를 하나의 체재(體裁)로 통일하여 통사(通史)를 만들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이연수(李延壽)는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계승하여 643년부터 659년까지 17년 동안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국가들의 사서(史書)와 기록들을 연구, 정리하여 본기(本紀) 12권, 열전(列傳) 88권의 북사(北史)와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70권의 남사(南史)를 편찬하였다.
남사(南史)는 송서(宋書), 제서(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등에 기록된 남조(南朝) 국가들의 역사를 정선(精選)하여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서술이 간략하고 남조(南朝)의 역사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편찬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간행되자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4서(書)는 잘 읽히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남사(南史)는 지(志)와 표(表)가 따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 청(淸) 시대에 주가유(周嘉猷)가 남북사표(南北史表) 6권을 만들었으며, 지(志)는 수서(隋書)의 내용으로 보완한다. 또한 남사(南史) 79권(卷)의 ‘이맥전(夷貊傳)’에는 조선(朝鮮), 마한(馬韓), 진한(辰韓),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등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한반도 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史料)로 쓰인다.
관련 고사성어
列傳
卷12 列傳第2 后妃下
徐娘半老(서낭반로,Xúniángbànlǎo) |
卷50 列傳第40 劉瓛 明僧紹 庾易 劉虯
嘗糞(상분) |
十八史略, 십팔사략, 二十四史, 이십사사
李延壽(이연수)
南史(nánshǐ)
구분: 역사서
저자: 이연수(李延壽)
시대: 중국 당
중국 당(唐)의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사서(史書). 기전체(紀傳體)로 송(宋), 남제(南齊), 양(梁), 진(陳) 등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의 네 왕조의 역사를 기술한 중국 25사(二十五史)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 당(唐)의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사서(史書)로 중국 각 왕조(王朝)의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25사(二十五史) 가운데 하나이다. 송(宋, 420~479), 남제(南齊, 479~502), 양(梁, 502~557), 진(陳, 557~589) 등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420~589) 남조(南朝)의 네 왕조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서술하였다. 유유(劉裕)가 진(晋)의 공제(恭帝)에게 양위(讓位)를 받아 송(宋)을 건국한 420년(宋 武帝 永初 원년)부터 진(陳)이 수(隋) 문제(文帝)에게 멸망된 589년(陳 後主 禎明 3년)까지 170년 동안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70권 등 모두 80권으로 되어 있다.
남사(南史)의 편찬은 이연수(李延壽)의 아버지인 이대사(李大師, 570~628)부터 시작되었다. 이대사(李大師)는 종래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각 왕조의 역사 기술이 공정하지 못하고 일관성과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고, 이를 하나의 체재(體裁)로 통일하여 통사(通史)를 만들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이연수(李延壽)는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계승하여 643년부터 659년까지 17년 동안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국가들의 사서(史書)와 기록들을 연구, 정리하여 본기(本紀) 12권, 열전(列傳) 88권의 북사(北史)와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70권의 남사(南史)를 편찬하였다.
남사(南史)는 송서(宋書), 제서(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등에 기록된 남조(南朝) 국가들의 역사를 정선(精選)하여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서술이 간략하고 남조(南朝)의 역사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편찬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간행되자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4서(書)는 잘 읽히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남사(南史)는 지(志)와 표(表)가 따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 청(淸) 시대에 주가유(周嘉猷)가 남북사표(南北史表) 6권을 만들었으며, 지(志)는 수서(隋書)의 내용으로 보완한다. 또한 남사(南史) 79권(卷)의 ‘이맥전(夷貊傳)’에는 조선(朝鮮), 마한(馬韓), 진한(辰韓),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등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한반도 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史料)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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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傳
卷12 列傳第2 后妃下
徐娘半老(서낭반로,Xúniángbànlǎo) |
卷50 列傳第40 劉瓛 明僧紹 庾易 劉虯
嘗糞(상분) |
十八史略, 십팔사략, 二十四史, 이십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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