置之度外 (치지도외)

置之度外(치지도외)

置之度外(zhìzhīdùwài)

置 둘 치 | 之 갈 지 | 度 법도 도, 헤아릴 탁, 살 택 | 外 바깥 외 |

'생각 밖에 둔다'라는 뜻으로, 내버려 두고서 상대를 하지 아니하는 것을 의미.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의 고사(故事)에서 유래.

give no thought to; have no regard for; not to take into consideration


유수(劉秀)가 왕망(王莽)을 멸하고 한나라를 재건하여 황제에 즉위하니, 그가 광무제이다. 그러나 즉위 초기에는 아직 중국을 완전히 평정하지는 못한 상태였으므로, 광무제에게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는 지방 세력들도 많았다. 광무제는 이로부터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기본적인 통일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로써 감숙(甘肅) 지방의 외효와 촉(蜀) 지방의 공손술(公孫述)이 양대 저항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이때 외효가 표면상으로는 광무제에 대하여 스스로 신하라고 칭하고, 아들을 후한의 수도인 낙양(洛陽)에 보내어 벼슬을 하게 함으로써 귀순할 의사를 나타내었다. 광무제가 형세를 살펴 보니, 외효는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건 아들이 궁중에 인질로 잡혀 있는 셈이니 근심거리가 못 되었다. 또 공손술은 멀리 촉 지방에 있어 중원으로 공격해 올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광무제는 오래 계속된 전쟁으로 피로해진 군대를 쉬게 하고 국력을 추스릴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휘하의 장수들에게 "외효와 공손술 두 사람은 당분간 내버려 두고 문제 삼지 말라(且當置此兩子於度外耳)"하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 광무제는 충분히 휴식한 군대를 이끌고 외효와 공손술을 차례로 정벌함으로써 통일을 완성하였다.

이 고사는 《후한서(後漢書)》의 '외효공손술열전'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치지도외는 내버려 두고 문제로 삼지 않는다거나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後漢書(후한서) 卷13 隗囂公孫述列傳第三(외효공손술열전)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度外視(도외시) |

七顚八起 (칠전팔기)

七顚八起(칠전팔기)

七 일곱 칠 | 顚 엎드러질 전, 이마 전 | 八 여덟 팔 | 起 일어날 기 |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난다는 뜻으로, 여러 번 실패해도 굽히지 않고 다시 일어남.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선다는 뜻으로, 아무리 실패를 거듭해도 결코 포기하거나 굴하지 않고 계속 분투 노력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삼전사기·사전오기·오전육기·육전칠기·팔전구기라고도 쓰며, 모두 실패에 굽히지 않고 다시 분투 노력한다는 뜻이다.

백 번 꺾여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의 백절불굴(百折不屈)·백절불요(百折不搖), 어떠한 위력이나 무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의 위무불굴(威武不屈), 결코 휘지도 굽히지도 않는다는 뜻의 불요불굴(不撓不屈)도 칠전팔기와 뜻이 통한다.

그 밖에 견인불발(堅忍不拔:굳게 참고 견디어 마음을 빼앗기지 않음)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칠전팔기와 일맥상통한다.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선다는 뜻으로 흔히 쓰는 '오뚝이 정신'도 칠전팔기와 같은 뜻이다.

七縱七擒 (칠종칠금, qīqínqīzòng)

七縱七擒(칠종칠금)

七擒七纵(qīqínqīzòng)

七 일곱 칠 | 縱 놓을 종 | 七 일곱 칠 | 擒 사로잡을 금 |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준다는 뜻으로, 상대를 마음대로 다룸을 비유하거나 인내를 가지고 상대가 숙여 들어오기를 기다린다는 말.

As the legend goes,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Zhu Geliang arrested Menghuo seven times and set him free seven times, so that Menghuo was sincerely convinced, and never raised a rebellion again. This allusion indicates that somebody. is good at employing the proper strategy to convince others.

传说三国时诸葛亮南征孟获,捉了他七次,又放了他七次,才使孟获心服口服,不再背叛。后用这个典故指善于运用策略,使对方心悦诚服。


제갈량(諸葛亮)이 맹획(孟獲)을 사로잡은 고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음대로 잡았다 놓아주었다 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칠금(七擒)'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삼국지(三國志)》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제1대 황제인 유비(劉備)는 제갈 량에게 나랏일을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은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을 보필하게 되었는데, 그때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위(魏)나라를 공략하여 생전의 유비의 뜻을 받들어야 했던 제갈 량은 먼저 내란부터 수습해야 했다. 유선이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한 제갈 량은 적진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간책을 썼다. 과연 반란군은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 서로 살육을 일삼았다. 그 결과 마지막으로 등장한 반란군이 바로 맹획이라는 장수였다. 맹획이 반기를 들자 제갈량은 노강 깊숙이 들어가 그를 생포했다. 제갈량의 계략에 걸려들어 생포된 맹획은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맹획을 생포한 제갈량은 오랑캐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대해 촉한의 무장인 마속(馬謖)도 '용병의 도리는 최상이 민심을 공략하는 것으로, 군사전은 하책일 뿐 심리전을 펴 적의 마음을 정복하라'고 했다. 제갈 량은 오랑캐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면 그들의 인적, 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북벌(北伐)도 한결 용이할 것이라 생각하여 맹획을 풀어주었다. 고향에 돌아온 맹획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제갈량은 자신의 지략을 이용하여 맹획을 다시 사로잡았지만 또 풀어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일곱 번, 마침내 맹획은 제갈량에게 마음속으로 복종하여 부하 되기를 자청했다. 여기서 '칠종칠금'이란 말이 나왔으며, 오늘날 이 말은 '상대편을 마음대로 요리한다'는 뜻으로 비유되어 사용된다.


관련 한자어

참조어

欲擒姑縱(욕금고종) |

七顚八倒 (칠전팔도)

七顚八倒(칠전팔도)

七顚八倒(qīdiānbādǎo)

七 일곱 칠 | 顚 엎드러질 전, 이마 전 | 八 여덟 팔 | 倒 넘어질 도 |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엎어진다는 뜻으로, 어려운 고비를 많이 넘김을 가리키는 말.

[출전]
주자어록(朱子語類)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十顚九倒(십전구도) |

沈魚落雁 (침어낙안)

沈魚落雁(침어낙안)

沈 잠길 침, 성씨 심 | 魚 물고기 어 | 落 떨어질 낙(락) | 雁 기러기 안 |

고기를 물 속으로 가라앉게 하고 기러기를 땅으로 떨어지게 할 만큼 아름다운 여자


진(晉)나라 헌공(獻公)의 애인 여희(麗姬)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녀를 보면 그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물고기는 물 속으로 깊이 숨어버리고 기러기는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대열에서 떨어졌다[沈魚落雁]'고 하고, 또 '환한 달은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고 꽃은 부끄러워 시들었다[閉月羞花:폐월수화]'고 여희의 미모를 극찬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다음은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이야기로 설결(齧缺)과 왕예(王倪)의 문답을 에피소드의 형식을 빌려 왕예의 말로 기록하고 있다.

"백성들은 소와 돼지고기를 먹고, 큰 사슴과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여기고, 새나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다. 이 네 가지는 모두 올바른 맛을 알고 있다. 원숭이는 편저라는 추한 원숭이를 암컷으로 쫓고, 큰 사슴은 사슴과 더불어 교미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더불어 논다. '모장과 여희'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는 바이다.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깊이 들어가고, 새는 그들을 보면 높이 날고, 큰 사슴과 사슴은 그녀들을 보면 결단코 도망갈 것이다. 이 네 가지 중 누가 천하의 올바른 색(色)을 알겠는가? 내가 보건대 인의(仁義)의 끝과 옳고 그른 것의 한계가 뒤섞여 혼란하다. 내 어찌 능히 그 구별을 알랴!" 여기서 '모장과 여희'의 이야기가 나오고,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깊이 들어가고, 새는 그들을 보면 높이 난다'는 구절에서 '침어낙안'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장자》에 나오는 이 말은 최대의 미인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미인으로 보이는 것이라 해도 물고기와 새에게는 단지 두려운 존재일 뿐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출전]
莊子(장자) 齊物論(제물론)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傾國之色(경국지색) | 丹脣皓齒(단순호치) | 沈魚落雁(침어낙안) |

針小棒大 (침소봉대)

針小棒大(침소봉대)

針 바늘 침 | 小 작을 소 | 棒 막대 봉 | 大 클 대, 큰 대, 클 태, 클 다 |

바늘 만한 것을 몽둥이 만하다고 말함이란 뜻으로, 곧, 작은 일을 크게 과장(誇張)하여 말함을 이름

七步成詩 (칠보성시)

七步成詩(칠보성시)

七 일곱 칠 | 步 걸음 보 | 成 이룰 성 | 詩 시 시 |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文學)편에는 위(魏) 문제(文帝)인 조비(曹丕)와 그의 동생인 동아왕(東阿王) 조식(曹植) 간에 일어난 고사가 실려 있다.

문제는 동아왕에게 일곱 걸음을 떼는 사이에 시를 지으라고 하면서(文帝嘗令東阿王七步作詩), 못지을 경우에는 국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동아왕은 대답을 마치자 마자 한 수의 시를 지었다.

콩을 삶아 콩국을 끓이고 콩물을 짜서 즙을 만드네. 콩깍지는 솥 아래서 불에 타고 콩은 솥 안에서 눈물짓네. 본시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건만 서로 지저댐이 어찌 이리도 급할까!

문제는 조식의 이 시를 듣고 몹시 부끄러웠다고 한다.

조조(曹操)와 그의 큰 아들인 조비, 셋째 아들인 조식은 중국 문학에서 삼조(三曹)라 칭하는 유명한 문장가들이다. 이들 중 조식의 시재(詩才)가 특히 뛰어났기 때문에, 조비는 천자(天子)가 된 후에도 조식에 대한 시기심이 변하지 않았다.

조비는 조식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를 죽일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어서 이러한 시를 짓게 했던 것이다. 七步成詩는 문재(文才)가 민첩함 을 말하며, 칠보재(七步才)란 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관련 한자어

참조어

七步才(칠보재) | 七步之才(칠보지재) |

七步之才 (칠보지재, qībùzhīcái)

七步之才(칠보지재)

七步之才(qībùzhīcái)

七 일곱 칠 | 步 걸음 보 | 之 갈 지 | 才 재주 재 |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지을 수 있는 재주라는 뜻으로, 아주 뛰어난 글재주를 이르는 말.


위(魏)나라 문제(文帝)는 그의 아우 동아왕(東阿王)을 몹시 미워했다. 문제는 조조(曹操)의 맏아들 조비(曹丕)이고, 동아왕은 조조의 셋째 아들 조식(曹植)이다. 조조는 무장 출신이었으나 시문을 애호하여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그로 인해 건안문학(建安文學)의 융성을 이루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조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맏아들인 조비와 셋째 아들 조식도 글재주가 뛰어났다. 특히 조식의 시재(詩才)는 당대의 대가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할 정도로 출중했다. 조조는 이러한 셋째를 더욱 총애하게 되어 한때는 맏아들 비를 제쳐 놓고 식으로 후사를 이을 생각까지 했었다. 조비는 어릴 때부터 동생 식의 글재주를 시기해왔으며, 후사 문제까지 동생에게 밀리는 느낌을 받은 적도 있어서 식에 대한 증오심과 질투심은 그 정도가 깊었다.

조조가 죽은 뒤 조비는 위왕을 세습하고 후한(後漢)의 헌제(獻帝)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문제라 일컬었다. 어느 날 문제는 동아왕으로 책봉된 조식에게, 자기가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를 지으라고 명령했다. 만약 그 동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칙명(勅命)을 어긴 이유로 중벌에 처한다고 했다. 조식은 걸음을 옮기며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煮豆燃豆萁 (자두연두기) 콩을 삶는데 콩깍지를 때니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콩이 솥 안에 있어 운다.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본래 이들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는데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서로 삶기를 어찌하여 급하게 구는가.

형을 콩대에, 자신을 콩에 비유하여 육친의 불화를 상징적으로 노래한 이 시가 바로 그 유명한 ‘칠보시(七步詩)’이다. 즉 ‘부모를 같이하는 친형제간인데 어째서 이렇게 자기를 들볶는 것이냐’는 뜻을 넌지시 읊은 것이었다. 문제는 이 시를 듣자 민망하여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이후 ‘자두연두기’에서 나온 ‘자두연기’는 형제 또는 동족간의 싸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참조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七步才(칠보재) | 七步成詩(칠보성시) | 倚馬之才(의마지재) |

참조어

下筆成文(하필성문) | 下笔成章(xiàbǐchéngzhāng) | 煮豆燃萁(자두연기) | 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 | 才占八斗(재점팔두) |


관련 한시

七步之詩(칠보지시) |


세설신어, 世說新語, 세설신어:문학편, 世說新語:文學篇, 조식, 曹植 |

治大國若烹小鮮 (치대국약팽소선)

治大國若烹小鮮(치대국약팽소선)

治 다스릴 치, 강 이름 이 | 大 클 대, 큰 대, 클 태, 클 다 | 國 나라 국 | 若 같을 약, 반야 야 | 烹 삶을 팽 | 小 작을 소 | 鮮 고울 선, 생선 선 |

약팽소선(若烹小鮮).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무엇이든 가만히 두면서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란 뜻

Govern a great powers as you would cook a small fish. - It is the best politics to keep hands off.

[출전]
老子(노자) 道德經(도덕경)


관련 인물

老子(노자, Lao-tzu, 604 BC-?)


유의어

若烹小鮮(약팽소선) |

枕戈待旦 (침과대단)

枕戈待旦(침과대단)

枕 벨 침 | 戈 창 과 | 待 기다릴 대 | 旦 아침 단 |

'창을 베고 자면서 아침을 기다린다'라는 뜻으로, 항상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는 군인의 자세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의 진(晉)나라 때 유곤(劉琨)과 조적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남북조시대의 진나라 때 유곤과 조적은 모두 성격이 활달하고 의협(義俠)을 중시하는 지사(志士)들이었다. 그 무렵 진나라는 표면상으로는 아직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곤과 조적은 함께 밤 늦도록 국가의 형세를 논하였고, 한밤중에 닭 울음소리를 경계 삼아(당시에는 닭이 밤에 우는 것을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무술을 연마하였다.

나중에 유곤은 조적이 조정에 중용되어 외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곤은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나는 창을 베개 삼아 잠을 자며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오랑캐 무리를 몰아내는 데 뜻을 두었으며, 늘 조적 선생이 나보다 먼저 공을 세우게 될까 염려하였다[吾枕戈待旦, 志梟逆虜, 常恐祖生先吾着鞭]"라고 하였다. 먼저 공을 세우는 것을 비유하는 선착편(先着鞭)이라는 고사성어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 고사는 《진서(晉書)》의 유곤전(劉琨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침과대단은 군무(軍務)에 전념하여 편안히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나 항상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는 군인의 자세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비슷한 표현으로 침과대적(枕戈待敵:창을 베고 적을 기다림), 침과좌갑(枕戈坐甲:창을 베고 갑옷을 깔고 앉음), 침과이대(枕戈以待:창을 베고 기다림), 침과침갑(枕戈寢甲:창을 베고 갑옷을 입고 잠을 잠) 등이 있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枕戈待旦(침과대단) | 침과대적(枕戈待敵) | 침과이대(枕戈以待) | 침과좌갑(枕戈坐甲) | 침과침갑(枕戈寢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