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谷(정곡)
異名: 左郑谷(Zhèng Gǔ)
중국 당(唐)나라 말기 시인. 7세부터 시를 잘 지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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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白 (이백, 701~762)
李白(이백, 701~762)
異名: 본명 이태백(李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자 태백(太白)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촉나라 장밍현(오늘날의 쓰촨성)
주요작품: 《청평조사(淸平調詞)》
중국 당나라 시인.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며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隴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 ·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 ·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랬다. 그가 43세 되던해인 724년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만 지어 올렸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나게 되었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 ·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
이백 관련 한시
早發白帝城(조발백제성)
淸平調詞(청평조사) 一首(1수) 二首(2수) 三首(3수)
聽蜀僧濬彈琴(청촉승준탄금)
夏日山中(하일산중)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
이백 관련 고사성어
磨斧作針(마부작침) |
異名: 본명 이태백(李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자 태백(太白)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촉나라 장밍현(오늘날의 쓰촨성)
주요작품: 《청평조사(淸平調詞)》
중국 당나라 시인.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며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隴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 ·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 ·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백은 당시 부패한 당나라 정치에 불만이 많았고 자신의 정치적 재능으로 발휘할 기회를 바랬다. 그가 43세 되던해인 724년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만 지어 올렸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나게 되었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 ·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
이백 관련 한시
早發白帝城(조발백제성)
淸平調詞(청평조사) 一首(1수) 二首(2수) 三首(3수)
聽蜀僧濬彈琴(청촉승준탄금)
夏日山中(하일산중)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
이백 관련 고사성어
磨斧作針(마부작침) |
Location:
Sichuan, China
樂雷發 (악뇌발, Lè Léifā)
樂雷發(악뇌발)
異名: 乐雷发(Lè Léi fā), 낙뢰발
송대(宋代) 시인.
중국 문학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시 문학은 당송 시대를 거치며 완성 단계에 이른다.
그 중 송시(宋詩)는 이민족의 침략과 불안한 정치 현실 속에서 당시를 뛰어넘어 고전 시가의 새 지평을 연 중국 고전 시가이다. 송시는 화려한 봄꽃에 비유되는 당시와 달리 포근하면서도 은은한 멋으로 가을 국화에 비유되곤 한다. 이는 철저한 문치를 내세웠던 송대의 시대의식이 시 속에 고스란히 투영된 결과이다.
당시의 완성도 높은 시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아픔과 사회 문제 등을 깊이 있게 다루어 당시와는 다른 독자적인 시 세계를 보여 주었다.
송대는 성리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성적 사유 세계가 찬란하게 꽃피었던 시기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라 안팎이 혼란하여 정치적 파벌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북방 이민족의 침략으로 북송이 멸망하는 비운을 맞기도 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국가 존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인들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 좌절은 클 수밖에 없었고 이는 시인 자신이 몸담은 조정을 향한 질타, 떠올리기조차 싫은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 그리고 자신의 실존에 대한 번민의 형태로 시 속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또한 금의 건국으로 한족과 이민족 사이의 갈등이 불가피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세계관을 확장해 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국토 회복에 대한 열망은 육유나 문천상 등의 애국 시인들의 출현을 불러오기도 했다.
송대 시인들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남녀 간의 애정, 자연 풍류 등 개인적 서정의 표출은 억제했고, 시대 의식이나 성리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주제를 적극적으로 시에 담아내고자 했다. 이로써 송시는 시 세계가 개인의 감성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비판과 실천적 문제로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고전 시가의 새 지평을 열었다.
송시는 당시의 완성도 높은 시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아픔과 사회 문제 등을 깊이 있게 다루어 송시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했다. 왕우칭, 양만리 등은 소재를 일상생활로 확장하여 도공이나 화전민, 농가의 모습 등을 시 속에 진실하게 담아냈으며, 매요신과 소식 등은 고양이를 제사 지내거나 바위 아래 놓인 개미의 모습을 보며 자유롭게 시상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는 통찰력 있는 세계관과 개성적인 표현으로 진일보한 송시의 일면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악뢰발 관련 한시
秋日行村路(추일행촌로)
異名: 乐雷发(Lè Léi fā), 낙뢰발
송대(宋代) 시인.
중국 문학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시 문학은 당송 시대를 거치며 완성 단계에 이른다.
그 중 송시(宋詩)는 이민족의 침략과 불안한 정치 현실 속에서 당시를 뛰어넘어 고전 시가의 새 지평을 연 중국 고전 시가이다. 송시는 화려한 봄꽃에 비유되는 당시와 달리 포근하면서도 은은한 멋으로 가을 국화에 비유되곤 한다. 이는 철저한 문치를 내세웠던 송대의 시대의식이 시 속에 고스란히 투영된 결과이다.
당시의 완성도 높은 시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아픔과 사회 문제 등을 깊이 있게 다루어 당시와는 다른 독자적인 시 세계를 보여 주었다.
송대는 성리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성적 사유 세계가 찬란하게 꽃피었던 시기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라 안팎이 혼란하여 정치적 파벌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북방 이민족의 침략으로 북송이 멸망하는 비운을 맞기도 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국가 존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인들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 좌절은 클 수밖에 없었고 이는 시인 자신이 몸담은 조정을 향한 질타, 떠올리기조차 싫은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 그리고 자신의 실존에 대한 번민의 형태로 시 속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또한 금의 건국으로 한족과 이민족 사이의 갈등이 불가피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세계관을 확장해 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국토 회복에 대한 열망은 육유나 문천상 등의 애국 시인들의 출현을 불러오기도 했다.
송대 시인들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남녀 간의 애정, 자연 풍류 등 개인적 서정의 표출은 억제했고, 시대 의식이나 성리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주제를 적극적으로 시에 담아내고자 했다. 이로써 송시는 시 세계가 개인의 감성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비판과 실천적 문제로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고전 시가의 새 지평을 열었다.
송시는 당시의 완성도 높은 시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아픔과 사회 문제 등을 깊이 있게 다루어 송시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했다. 왕우칭, 양만리 등은 소재를 일상생활로 확장하여 도공이나 화전민, 농가의 모습 등을 시 속에 진실하게 담아냈으며, 매요신과 소식 등은 고양이를 제사 지내거나 바위 아래 놓인 개미의 모습을 보며 자유롭게 시상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는 통찰력 있는 세계관과 개성적인 표현으로 진일보한 송시의 일면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악뢰발 관련 한시
秋日行村路(추일행촌로)
白居易 (백거이, Bái Jūyì, 772~846)
백거이 [白居易, 772~846]
異名: 호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자 낙천(樂天)
국적: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뤄양[洛陽] 부근 신정[新鄭]
주요저서: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816)
중국 중당 기(中唐期)의 시인. 작품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 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一代)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했다. 주요 저서에는《장한가(長恨歌)》,《비파행(琵琶行)》등이 있다.
Bai Juyi, a Tang Dynasty poet
자 낙천(樂天). 호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본적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 출생.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유명하다.
807년 36세로 한림학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좌습유(左拾遺)가 되어 유교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정치 ·사회의 결함을 비판하는 일군의 작품을 계속 써냈다. 《신악부(新樂府) 50수》(805)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811년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814년 태자 좌찬선태부(左贊善太夫)에 임용되었으나, 이듬해에 일찍이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시가의 대상이 되었던 고급관료들의 반감을 사서 주장[九江]의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다. 그 곳에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문학에 대한 반성을 거쳐 명시 《비파행(琵琶行)》(816)을 지었다. 818년 중저우자사[忠州刺史]가 되었으며, 임기를 마치고 장안(長安)에 돌아오자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하여 822년 자진해서 항저우자사[杭州刺史]가 되었다. 항저우의 아름다운 풍광(風光)에 촉발되어 시작(詩作)은 계속되었고, 문학적 지기(知己)로서 트고 지내던 원진(元拂)과 만나게 되어 그것을 계기로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50권, 824)을 편집하였다. 825년 쑤저우자사[蘇州刺史]로 전임하였으나 827년에는 중앙으로 불리어 비서감(秘書監)에 임명되었다.
829년 58세가 되던 해 뤄양에 영주하기로 결심, 허난부[河南府]의 장관이 되었던 때도 있었으나 대개 태자보도관(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만의 직책에 자족하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하는 나날을 보냈다. 831년 원진 등 옛친구들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황혼을 의식하고 뤄양 교외의 룽먼[龍門]의 여러 절을 자주 찾았고 그 곳 향산사(香山寺)를 보수 복원하여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불교로 기울어졌다. 이에, 문학에 대한 충동도 번뇌로 보여서 참회하는 입장에서 ‘광언기어(狂言綺語)’의 문집인 《유백창화집(劉白唱和集)》 5권, 《백씨문집(白氏文集)》 60권을, 다시 65권, 67권을 834∼839년에 걸쳐 마음의 증표로서 연고 있는 사찰에 봉납하였다. 842년 71세 때 형부상서(刑部尙書)의 대우로 퇴직하였는데, 《백씨문집》은 70권에 이르렀다. 그 뒤로도 ‘광영(狂詠)’은 계속되었고 정부의 불교탄압정책을 풍자하는 작품을 통해서 자기 시대의 종말을 예감하고 인생의 마무리로서 75권의 전집을 편정(編定), 그것이 완성된 이듬해 그 생애를 마쳤다. 이 밖에 시문(詩文)을 짓는 편의를 위해서 고사성어를 모은 《백씨육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 30권도 있다.
그 긴 생애 동안에 그의 문학은 자주 변모하였다. 즉, 젊은 날의 낭만주의적인 경향은 지적인 빛을 띠며 이상주의적 입장으로 옮겨갔고, 문학의 존재의의를 주장하며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다가 이윽고 정치나 사회 가운데서 개인을 발견하여 자기의 내면을 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다시 개인에 비추어 널리 인간의 생활 자세를 추구하여 인생의 지혜를 표상하는 문학을 지향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정형(定型)의 한계적 조건하에서 언어의 온갖 기능을 다 구사하는 ‘창화(唱和)’라는 새로운 형태의 창조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 속에 일관하고 있던 것은, 문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며 생활의식이나 생활감정이 뒷밤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었다. 따라서 제재는 경험적이고 언어는 일상성을 띠며, 발상은 심리의 자연에 따르고,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一代)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하였다.
그의 생존시에 이미 그의 시는 민중 속에 파고들어, 소치는 아이나 말몰이꾼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고, 배나 절의 기둥이나 벽에 써붙여지기도 하였으며, 멀리 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는 한국에도 일찍부터 전해져 널리 애송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백씨장경집》 75권 가운데 71권이 있고, 《백향산시집》 40권도 있다. 현존하는 작품수는 3,800여 수이고, 그 중에서 《비파행》 《장한가》 《유오진사시(遊悟眞寺詩)》는 불멸의 걸작이다.
異名: 호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자 낙천(樂天)
국적: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뤄양[洛陽] 부근 신정[新鄭]
주요저서: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816)
중국 중당 기(中唐期)의 시인. 작품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 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一代)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했다. 주요 저서에는《장한가(長恨歌)》,《비파행(琵琶行)》등이 있다.
Bai Juyi, a Tang Dynasty poet
자 낙천(樂天). 호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본적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 출생.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유명하다.
807년 36세로 한림학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좌습유(左拾遺)가 되어 유교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정치 ·사회의 결함을 비판하는 일군의 작품을 계속 써냈다. 《신악부(新樂府) 50수》(805)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811년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814년 태자 좌찬선태부(左贊善太夫)에 임용되었으나, 이듬해에 일찍이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시가의 대상이 되었던 고급관료들의 반감을 사서 주장[九江]의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다. 그 곳에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문학에 대한 반성을 거쳐 명시 《비파행(琵琶行)》(816)을 지었다. 818년 중저우자사[忠州刺史]가 되었으며, 임기를 마치고 장안(長安)에 돌아오자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하여 822년 자진해서 항저우자사[杭州刺史]가 되었다. 항저우의 아름다운 풍광(風光)에 촉발되어 시작(詩作)은 계속되었고, 문학적 지기(知己)로서 트고 지내던 원진(元拂)과 만나게 되어 그것을 계기로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50권, 824)을 편집하였다. 825년 쑤저우자사[蘇州刺史]로 전임하였으나 827년에는 중앙으로 불리어 비서감(秘書監)에 임명되었다.
829년 58세가 되던 해 뤄양에 영주하기로 결심, 허난부[河南府]의 장관이 되었던 때도 있었으나 대개 태자보도관(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만의 직책에 자족하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하는 나날을 보냈다. 831년 원진 등 옛친구들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황혼을 의식하고 뤄양 교외의 룽먼[龍門]의 여러 절을 자주 찾았고 그 곳 향산사(香山寺)를 보수 복원하여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불교로 기울어졌다. 이에, 문학에 대한 충동도 번뇌로 보여서 참회하는 입장에서 ‘광언기어(狂言綺語)’의 문집인 《유백창화집(劉白唱和集)》 5권, 《백씨문집(白氏文集)》 60권을, 다시 65권, 67권을 834∼839년에 걸쳐 마음의 증표로서 연고 있는 사찰에 봉납하였다. 842년 71세 때 형부상서(刑部尙書)의 대우로 퇴직하였는데, 《백씨문집》은 70권에 이르렀다. 그 뒤로도 ‘광영(狂詠)’은 계속되었고 정부의 불교탄압정책을 풍자하는 작품을 통해서 자기 시대의 종말을 예감하고 인생의 마무리로서 75권의 전집을 편정(編定), 그것이 완성된 이듬해 그 생애를 마쳤다. 이 밖에 시문(詩文)을 짓는 편의를 위해서 고사성어를 모은 《백씨육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 30권도 있다.
그 긴 생애 동안에 그의 문학은 자주 변모하였다. 즉, 젊은 날의 낭만주의적인 경향은 지적인 빛을 띠며 이상주의적 입장으로 옮겨갔고, 문학의 존재의의를 주장하며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다가 이윽고 정치나 사회 가운데서 개인을 발견하여 자기의 내면을 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다시 개인에 비추어 널리 인간의 생활 자세를 추구하여 인생의 지혜를 표상하는 문학을 지향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정형(定型)의 한계적 조건하에서 언어의 온갖 기능을 다 구사하는 ‘창화(唱和)’라는 새로운 형태의 창조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 속에 일관하고 있던 것은, 문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며 생활의식이나 생활감정이 뒷밤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었다. 따라서 제재는 경험적이고 언어는 일상성을 띠며, 발상은 심리의 자연에 따르고,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一代)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하였다.
그의 생존시에 이미 그의 시는 민중 속에 파고들어, 소치는 아이나 말몰이꾼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고, 배나 절의 기둥이나 벽에 써붙여지기도 하였으며, 멀리 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는 한국에도 일찍부터 전해져 널리 애송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백씨장경집》 75권 가운데 71권이 있고, 《백향산시집》 40권도 있다. 현존하는 작품수는 3,800여 수이고, 그 중에서 《비파행》 《장한가》 《유오진사시(遊悟眞寺詩)》는 불멸의 걸작이다.
Location:
Shanxi, China
文天祥 (문천상, Wén Tiānxiáng, 1236~1282)
문천상 [文天祥, 1236~1282]
異名: Wén Tiānxiáng, 호 문산(文山), 자 송서(宋瑞), 이선(履善)
국적: 중국 남송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중국 장시성[江西省] 지수이현[吉水縣]
주요저서: 정기가(正氣歌), 문산전집
13세기 중국 남송의 정치가, 시인. 송나라(남송)가 원나라에 항복하자 저항하다 체포되었고 쿠빌라이칸이 그의 재능을 아껴 몽고에 전향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자 송서(宋瑞) ·이선(履善). 호 문산(文山). 장시성[江西省] 지수이현[吉水縣] 출생. 1255년 20세때 진사에 수석으로 합격한 수재였다. 1259년 몽골군의 쓰촨성[四川省] 침입으로 합주(合州)가 포위되고 천도설이 유력하게 대두되자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천도를 강경히 반대하는 글을 올려 그날로 면직되었다. 후에 복직하였으나, 가사도(賈似道)와 의견이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
이듬해 원(元)나라 군대가 남하하여 수도 임안(臨安)에 다다르자 문관으로서 근왕병(勤王兵) 1만명을 이끌고 임안 방위에 급히 참가하여 분전(奮戰)하였다. 송(宋)나라가 원나라에 항복하자 공제(恭帝)의 명을 받아 원나라로 가서 강화를 청하였다. 원나라의 총수(總帥) 백안(伯顔)과 회견하면서 항론(抗論)하다가 구류되었다.
그 동안에 임안은 함락되고, 송나라는 멸망하였다. 포로가 되어 북송(北送)되던 중 탈주하여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에서 제왕을 칭하고 있던 탁종(度宗)의 장자 익왕(益王)을 받들었다. 잔병(殘兵)을 모아 싸웠으나 광둥성[廣東省] 오파령(五坡玲)전투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독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대도(大都: 北京)로 송치되어 3년 간 감옥에 갇혔다.
원나라의 세조(쿠빌라이칸)가 그의 재능을 아껴 벼슬을 간절히 권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사형되었다. 시(詩)에도 능하여 옥중(獄中)의 작 《정기가(正氣歌)》로 유명하다. 문집에《문산전집》이 있다.
주요 작품
集杜詩(집두시)
異名: Wén Tiānxiáng, 호 문산(文山), 자 송서(宋瑞), 이선(履善)
국적: 중국 남송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중국 장시성[江西省] 지수이현[吉水縣]
주요저서: 정기가(正氣歌), 문산전집
13세기 중국 남송의 정치가, 시인. 송나라(남송)가 원나라에 항복하자 저항하다 체포되었고 쿠빌라이칸이 그의 재능을 아껴 몽고에 전향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자 송서(宋瑞) ·이선(履善). 호 문산(文山). 장시성[江西省] 지수이현[吉水縣] 출생. 1255년 20세때 진사에 수석으로 합격한 수재였다. 1259년 몽골군의 쓰촨성[四川省] 침입으로 합주(合州)가 포위되고 천도설이 유력하게 대두되자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천도를 강경히 반대하는 글을 올려 그날로 면직되었다. 후에 복직하였으나, 가사도(賈似道)와 의견이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
이듬해 원(元)나라 군대가 남하하여 수도 임안(臨安)에 다다르자 문관으로서 근왕병(勤王兵) 1만명을 이끌고 임안 방위에 급히 참가하여 분전(奮戰)하였다. 송(宋)나라가 원나라에 항복하자 공제(恭帝)의 명을 받아 원나라로 가서 강화를 청하였다. 원나라의 총수(總帥) 백안(伯顔)과 회견하면서 항론(抗論)하다가 구류되었다.
그 동안에 임안은 함락되고, 송나라는 멸망하였다. 포로가 되어 북송(北送)되던 중 탈주하여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에서 제왕을 칭하고 있던 탁종(度宗)의 장자 익왕(益王)을 받들었다. 잔병(殘兵)을 모아 싸웠으나 광둥성[廣東省] 오파령(五坡玲)전투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독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대도(大都: 北京)로 송치되어 3년 간 감옥에 갇혔다.
원나라의 세조(쿠빌라이칸)가 그의 재능을 아껴 벼슬을 간절히 권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사형되었다. 시(詩)에도 능하여 옥중(獄中)의 작 《정기가(正氣歌)》로 유명하다. 문집에《문산전집》이 있다.
주요 작품
集杜詩(집두시)
杜審言 (두심언, Dù Shěnyán, ~708)
두심언(杜審言, 648?~708)
별칭: 杜审言, Dù Shěn yán, 자 필간(必簡)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중국 당나라 초기의 시인. 국자감 주부(國子監主簿), 수문 관 직학사(修文館直學士)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젊어서부터 문명을 떨쳐 이교(李嶠) ·최융(崔融) ·소미도(蘇味道)와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라 불렸다. 무후조(武后朝)의 궁정시인으로서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과 견주었다.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출생이라고 하나, 일설에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이라고도 한다. 자는 필간(必簡). 진(晉)의 명장이고 학자이기도 하였던 두예(杜預)의 자손이며, 성당(盛唐)의 대시인 두보(杜甫)의 조부이다. 670년 진사에 급제하고 측천무후(則天武后)와 중종을 섬겼으나, 한때 북(北)베트남의 교지(交趾)에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죄에서 풀려나온 후 국자감 주부(國子監主簿) ·수문관 직학사(修文館直學士)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젊어서부터 문명을 떨쳐 이교(李嶠) ·최융(崔融) ·소미도(蘇味道)와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라 불렸다고 하며, 또한 무후조(武后朝)의 궁정시인으로서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과 견주었다고 하나, 오늘날 시 43수만이 전할 뿐이다.
두심언 관련 한시
和晉陵路丞早春游望(화진능노승조춘유망)
별칭: 杜审言, Dù Shěn yán, 자 필간(必簡)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중국 당나라 초기의 시인. 국자감 주부(國子監主簿), 수문 관 직학사(修文館直學士)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젊어서부터 문명을 떨쳐 이교(李嶠) ·최융(崔融) ·소미도(蘇味道)와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라 불렸다. 무후조(武后朝)의 궁정시인으로서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과 견주었다.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출생이라고 하나, 일설에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이라고도 한다. 자는 필간(必簡). 진(晉)의 명장이고 학자이기도 하였던 두예(杜預)의 자손이며, 성당(盛唐)의 대시인 두보(杜甫)의 조부이다. 670년 진사에 급제하고 측천무후(則天武后)와 중종을 섬겼으나, 한때 북(北)베트남의 교지(交趾)에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죄에서 풀려나온 후 국자감 주부(國子監主簿) ·수문관 직학사(修文館直學士)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젊어서부터 문명을 떨쳐 이교(李嶠) ·최융(崔融) ·소미도(蘇味道)와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라 불렸다고 하며, 또한 무후조(武后朝)의 궁정시인으로서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과 견주었다고 하나, 오늘날 시 43수만이 전할 뿐이다.
두심언 관련 한시
和晉陵路丞早春游望(화진능노승조춘유망)
杜甫 (두보, Dù Fǔ, 712~770)
두보 [杜甫, 712~770]
이름: 본명 두보(杜甫, Dù Fǔ), 호 소릉(少陵), 자 자미(子美)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시
출생지: 중국 허난성[河南省] 궁현[鞏縣]
주요작품: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널리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주요 작품에는 《북정(北征)》,《추흥(秋興)》 등이 있다.
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 ·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東四川]의 쯔저우[梓州] ·랑저우[閬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東端)의 쿠이저우[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 ·후난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 ·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訓뭍)에 뛰어났으며,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두보(杜甫) 관련 한시/b>
春望(춘망)
春夜喜雨(춘야희우)
참조
성당(盛唐)
중국 당(唐) 300년은 시에 있어서 황금시대로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의 4가지로 당시(唐詩)를 구분하고 있다. 그 중에 성당(盛唐)은 시문학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로, 현종(玄宗)의 개원(開元) 원년(713)에서 숙종(肅宗)의 상원(上元) 2년(761)에 이르는 48년간을 말한다. 성당 전반기에는 이백(李白), 후반기에는 두보(杜甫)가 활약하였고 대표적 시인에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고적(高適), 왕창령(王昌齡) 등이 있다.
이름: 본명 두보(杜甫, Dù Fǔ), 호 소릉(少陵), 자 자미(子美)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시
출생지: 중국 허난성[河南省] 궁현[鞏縣]
주요작품: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널리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주요 작품에는 《북정(北征)》,《추흥(秋興)》 등이 있다.
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 ·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東四川]의 쯔저우[梓州] ·랑저우[閬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東端)의 쿠이저우[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 ·후난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 ·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訓뭍)에 뛰어났으며,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두보(杜甫) 관련 한시/b>
春望(춘망)
春夜喜雨(춘야희우)
참조
성당(盛唐)
중국 당(唐) 300년은 시에 있어서 황금시대로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의 4가지로 당시(唐詩)를 구분하고 있다. 그 중에 성당(盛唐)은 시문학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로, 현종(玄宗)의 개원(開元) 원년(713)에서 숙종(肅宗)의 상원(上元) 2년(761)에 이르는 48년간을 말한다. 성당 전반기에는 이백(李白), 후반기에는 두보(杜甫)가 활약하였고 대표적 시인에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고적(高適), 왕창령(王昌齡) 등이 있다.
顧況 (고황, Gù Kuàng, 727~816)
顧況(고황, 727~816)
異名: 顾况(Gù Kuàng)
당대의 또 다른 시인인 顧況(약715-814년)은 “越泥는 옥처럼 아름답다”는 말로 越窯 청자가 옥처럼 윤택한 빛깔임을 형용한 바 있다.
고황(顧況)이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무렵 15세의 백거이가 수도인 장안(長安)에 있던 고황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당시 고황은 나이 50여세였는데, 어린 소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그의 이름 '거이(居易)'를 빗대어 "장안의 쌀값이 비싸니 살아가기 어려울 것(長安米貴, 居住不易)"이라며 비꼬았다. 그러나 백거이가 시 〈부득고원초송별〉를 보여주자 "이런 재주가 있다면 살아가기가 쉬울 것(有才如此, 居亦容易)"이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언덕 위에 우거진 풀들(離離原上草),
해마다 한 번 시들었다 무성해진다네(一歲一枯榮).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野火燒不盡),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난다네(春風吹又生).
방초는 멀리 뻗어 옛길을 덮고(遠芳侵古道)
맑은 하늘 푸른 빛은 황폐한 성까지 닿네(晴翠接荒城).
또 그대를 떠나보내니(又送王孫去)
이별의 슬픔 가득하다네(萋萋滿別情).
異名: 顾况(Gù Kuàng)
당대의 또 다른 시인인 顧況(약715-814년)은 “越泥는 옥처럼 아름답다”는 말로 越窯 청자가 옥처럼 윤택한 빛깔임을 형용한 바 있다.
고황(顧況)이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무렵 15세의 백거이가 수도인 장안(長安)에 있던 고황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당시 고황은 나이 50여세였는데, 어린 소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그의 이름 '거이(居易)'를 빗대어 "장안의 쌀값이 비싸니 살아가기 어려울 것(長安米貴, 居住不易)"이라며 비꼬았다. 그러나 백거이가 시 〈부득고원초송별〉를 보여주자 "이런 재주가 있다면 살아가기가 쉬울 것(有才如此, 居亦容易)"이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언덕 위에 우거진 풀들(離離原上草),
해마다 한 번 시들었다 무성해진다네(一歲一枯榮).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野火燒不盡),
봄바람 불면 다시 돋아난다네(春風吹又生).
방초는 멀리 뻗어 옛길을 덮고(遠芳侵古道)
맑은 하늘 푸른 빛은 황폐한 성까지 닿네(晴翠接荒城).
또 그대를 떠나보내니(又送王孫去)
이별의 슬픔 가득하다네(萋萋滿別情).
龔自珍 (공자진, Gōng Zìzhēn)
龔自珍(공자진, 1792~1841년)
異名: 龚自珍(Gōng Zìzhēn), 자 슬인(璱人), 이옥(爾玉), 호 정암(定庵), 일명 공조(鞏祚)
국적: 중국 청
공자진(龔自珍, 1792~1841년, 저장성(浙江省) 인화현(仁和縣, 인허시엔) 출생)은 중국 청나라 후기의 학자, 사상가, 시인이다. 자는 슬인(璱人), 이옥(爾玉)이며, 호는 정암(定庵), 일명은 공조(鞏祚)이다.
생애
그는 유명한 고증학자인 단옥재(段玉裁)의 외손으로서 어렸을 때 직접 단옥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일찍부터 예민한 학문재질과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38세에 진사(進士)가 된 후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하고 예부주사(禮部主事)의 미관(微官)에서 그쳤다. 23세부터 25세에 걸쳐서 《명양론(明良論)》, 《을병지제저의(乙丙之際著議)·숙의(塾議)》, 《평균편(平均篇)》을 저술하여 전제정치의 해악을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28세 때 유봉록(劉逢祿)에게서 공양학을 연구하고, 친구 위원(魏源)과 함께 정치 개혁을 강조하였다. 글솜씨가 뛰어나고 시를 잘 썼다고 한다. 만년에는 불교, 특히 천태종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술은 앞에 서술한 것 외에도 《농종(農宗)》, 《정역(正譯)》, 《기해잡시(己亥雜詩)》 등 많이 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진 부분도 많다. 그러나 대체로 《공자진전집》에 수집되어 있다.
異名: 龚自珍(Gōng Zìzhēn), 자 슬인(璱人), 이옥(爾玉), 호 정암(定庵), 일명 공조(鞏祚)
국적: 중국 청
공자진(龔自珍, 1792~1841년, 저장성(浙江省) 인화현(仁和縣, 인허시엔) 출생)은 중국 청나라 후기의 학자, 사상가, 시인이다. 자는 슬인(璱人), 이옥(爾玉)이며, 호는 정암(定庵), 일명은 공조(鞏祚)이다.
생애
그는 유명한 고증학자인 단옥재(段玉裁)의 외손으로서 어렸을 때 직접 단옥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일찍부터 예민한 학문재질과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38세에 진사(進士)가 된 후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하고 예부주사(禮部主事)의 미관(微官)에서 그쳤다. 23세부터 25세에 걸쳐서 《명양론(明良論)》, 《을병지제저의(乙丙之際著議)·숙의(塾議)》, 《평균편(平均篇)》을 저술하여 전제정치의 해악을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28세 때 유봉록(劉逢祿)에게서 공양학을 연구하고, 친구 위원(魏源)과 함께 정치 개혁을 강조하였다. 글솜씨가 뛰어나고 시를 잘 썼다고 한다. 만년에는 불교, 특히 천태종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술은 앞에 서술한 것 외에도 《농종(農宗)》, 《정역(正譯)》, 《기해잡시(己亥雜詩)》 등 많이 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진 부분도 많다. 그러나 대체로 《공자진전집》에 수집되어 있다.
高啓 (고계)
高啓(고계)
異名: 高启(Gāo Qǐ), 호 청구자, 자 계적
국적: 중국
활동분야: 시
출생지: 중국 쑤저우
주요저서: 《고청구시집》(19권)
주요작품: 《청구자가》 《심호은군》
중국의 원말(元末)·명초(明初)의 시인. 근체시(近體詩)에서는 주로 강남의 수향(水鄕:강·호수 등 물이 많은 지방)의 풍물을 담백하게 노래했고, 고체(古體)에서는 역사나 전설에서 취재한 낭만을 노래하였다. 대표작인《청구자가(靑邱子歌)》는 분방한 환상을 엮어 나가면서 시인의 사명을 노래한, 중국문학사상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자 계적(季迪), 호 청구자(靑邱子). 쑤저우[蘇州] 출생. 생애의 대부분을 원나라 말기의 내란시대에 보냈으며, 명나라의 통일 후 잠시 난징[南京]에서 취직한 외에는 쑤저우에서 소지주(小地主)로서 생활하였다. 명태조(明太祖)의 공신배제정책(功臣排除政策)의 여파로 39세에 살해되었다. 전원생활을 사랑하는 자유인이었으며, 원송(元宋) 이후의 중국에 대두한 시민층의 한 전형이었다.
그의 시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싱싱하고 경쾌하며 또 평이하다. 근체시(近體詩)에서는 주로 강남의 수향(水鄕:강·호수 등 물이 많은 지방)의 풍물을 담백하게 노래했고, 고체(古體)에서는 역사나 전설에서 취재한 낭만을 노래하였다.
대표작인 《청구자가(靑邱子歌)》는 분방한 환상을 엮어 나가면서 시인의 사명을 노래한, 중국문학사상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고소잡영(姑蘇雜詠)》(132수)은 유서 깊은 고도(古都) 쑤저우의 명승고적에 붙여서 쓴 시를 모은 것으로, 사실(史實)과 전설과 자연미와 환상을 섞어 짠 작품이다.
이 밖에 《고청구시집(高靑邱詩集)》(19권)과 사집(詞集)인 《구현집(扣舷集)》(1권)이 전한다. 《고청구시집》에 실려 있는 대표작의 하나인 《심호은군(尋胡隱君)》에 그의 시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渡水復渡水 도수부도수
看花還看花 간화환간화
春風江上路 춘풍강상로
不覺到君家 불각도군가
물을 건너고 또 물을 건너
꽃을 보며 다시 또 바라보면서
봄바람 부는 강가 길을 걸어가노라니
어느새 그대 집에 다다랐도다
異名: 高启(Gāo Qǐ), 호 청구자, 자 계적
국적: 중국
활동분야: 시
출생지: 중국 쑤저우
주요저서: 《고청구시집》(19권)
주요작품: 《청구자가》 《심호은군》
중국의 원말(元末)·명초(明初)의 시인. 근체시(近體詩)에서는 주로 강남의 수향(水鄕:강·호수 등 물이 많은 지방)의 풍물을 담백하게 노래했고, 고체(古體)에서는 역사나 전설에서 취재한 낭만을 노래하였다. 대표작인《청구자가(靑邱子歌)》는 분방한 환상을 엮어 나가면서 시인의 사명을 노래한, 중국문학사상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자 계적(季迪), 호 청구자(靑邱子). 쑤저우[蘇州] 출생. 생애의 대부분을 원나라 말기의 내란시대에 보냈으며, 명나라의 통일 후 잠시 난징[南京]에서 취직한 외에는 쑤저우에서 소지주(小地主)로서 생활하였다. 명태조(明太祖)의 공신배제정책(功臣排除政策)의 여파로 39세에 살해되었다. 전원생활을 사랑하는 자유인이었으며, 원송(元宋) 이후의 중국에 대두한 시민층의 한 전형이었다.
그의 시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싱싱하고 경쾌하며 또 평이하다. 근체시(近體詩)에서는 주로 강남의 수향(水鄕:강·호수 등 물이 많은 지방)의 풍물을 담백하게 노래했고, 고체(古體)에서는 역사나 전설에서 취재한 낭만을 노래하였다.
대표작인 《청구자가(靑邱子歌)》는 분방한 환상을 엮어 나가면서 시인의 사명을 노래한, 중국문학사상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고소잡영(姑蘇雜詠)》(132수)은 유서 깊은 고도(古都) 쑤저우의 명승고적에 붙여서 쓴 시를 모은 것으로, 사실(史實)과 전설과 자연미와 환상을 섞어 짠 작품이다.
이 밖에 《고청구시집(高靑邱詩集)》(19권)과 사집(詞集)인 《구현집(扣舷集)》(1권)이 전한다. 《고청구시집》에 실려 있는 대표작의 하나인 《심호은군(尋胡隱君)》에 그의 시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渡水復渡水 도수부도수
看花還看花 간화환간화
春風江上路 춘풍강상로
不覺到君家 불각도군가
물을 건너고 또 물을 건너
꽃을 보며 다시 또 바라보면서
봄바람 부는 강가 길을 걸어가노라니
어느새 그대 집에 다다랐도다
賈島 (Gǔdǎo, 777~841)
賈島(777~841)
가도, 贾岛, Gǔdǎo
중국(中國) 당(唐)나라 때의 시인(詩人). 자는 낭선(浪仙). 하북(河北) 범양 사람. 처음에 출가(出家)하여 법호를 무본(無本)이라 하였다가 후(後)에 한 유와 가까이 사귀게 되어 환속(還俗)하였다. '조숙 지변수 승고 월하문(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이란 구절의 퇴고(推敲)에 관(關)한 일화는 유명(有名)하다.
일찍이 중이 되어 無本(무본)이라 하였다. 시 읊기를 좋아하며 항상 시구를 찾아 명상하였으며, 비록 귀인들을 만나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하루는 서울에서 말을 타고 가면서 '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조숙지변수, 승고월하문)'이라는 시구를 지었는데, 堆(퇴)자와 敲(고)자 중에서 어느자가 좋은지 고심하다가 京兆尹(경조윤) 韓愈(한유)와 충돌하는 것도 알지 못했다. 충돌한 사연을 들은 한유가 敲(고)자가 좋다고 했다. 이후 한유와 布衣交(포의교)를 맺고 환속하여 長江(장강)의 主簿(주부)를 지냈다. 저서(著書)로 長江集(장강집)이 있다.
시(詩)
送無可山人 (송무가산인, sòngwúkěshānrén)
가도, 贾岛, Gǔdǎo
중국(中國) 당(唐)나라 때의 시인(詩人). 자는 낭선(浪仙). 하북(河北) 범양 사람. 처음에 출가(出家)하여 법호를 무본(無本)이라 하였다가 후(後)에 한 유와 가까이 사귀게 되어 환속(還俗)하였다. '조숙 지변수 승고 월하문(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이란 구절의 퇴고(推敲)에 관(關)한 일화는 유명(有名)하다.
일찍이 중이 되어 無本(무본)이라 하였다. 시 읊기를 좋아하며 항상 시구를 찾아 명상하였으며, 비록 귀인들을 만나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하루는 서울에서 말을 타고 가면서 '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조숙지변수, 승고월하문)'이라는 시구를 지었는데, 堆(퇴)자와 敲(고)자 중에서 어느자가 좋은지 고심하다가 京兆尹(경조윤) 韓愈(한유)와 충돌하는 것도 알지 못했다. 충돌한 사연을 들은 한유가 敲(고)자가 좋다고 했다. 이후 한유와 布衣交(포의교)를 맺고 환속하여 長江(장강)의 主簿(주부)를 지냈다. 저서(著書)로 長江集(장강집)이 있다.
시(詩)
送無可山人 (송무가산인, sòngwúkěshānrén)
姜夔 (강기, Jiāng Kuí, 1155~1221)
姜夔(강기, 1155~1221)
異名: 姜夔(Jiāng Kuí), 백석도인, 자 요장
국적: 중국 남송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요주 번양(지금의 장시성에 속함)
주요저서: 《백석도인시집》 《백석도인가곡》
주요작품: 〈양주만〉〈영롱사범〉
중국 남송 때의 시인이자 사인(詞人). 사(詞)에는 〈양주만(揚慢)〉등 시대를 영탄한 작품들과 자신의 괴로운 심사를 절실하게 담았다. 시에는 〈제야자석호귀초계(題夜自石湖歸苕溪)〉등의 칠언절구를 지어 자신의 방랑생활을 노래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다. 그밖에 시 이론에도 밝았다.
자는 요장(堯章)이며 백석도인(白石道人)이라고도 불린다. 요주(饒州) 번양(지금의 江西省에 속함) 출신이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라 한양(漢陽)에서 살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양주(揚州)·강회(江淮)·상주(湘州)·악주(鄂州)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30세 때 시인 소덕조(蕭德藻)와 친교를 맺었는데, 이후 강기는 소덕조에 의지하면서 호주(湖州:지금의 折江省에 속함)에 정착하였다.
강기는 다재다능하여 시사(詩詞) 이외에 서예에서도 일가를 이루었고, 음률에도 정통하였다. 그러나 과거시험에는 운이 없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문명(文名)을 널리 떨쳤으나 평생을 불우하게 보냈고 만년에는 친구들에게 의지하고 살면서 궁색한 생활을 하였다. 죽은 뒤에는 장례를 치를 수도 없어서 친구였던 장라(張羅)가 주선하여 겨우 전당문(錢塘門) 밖에 안장할 수 있었다.
사(詞)에는 〈양주만(揚州慢)〉 등 시대를 영탄한 작품들과 자신의 괴로운 심사를 절실하게 담은 〈영롱사범(玲瓏四犯)〉 〈탐춘만(探春慢)〉 등이 있다. 강기의 사는 "성당(盛唐)의 이백과 두보와 같다"거나 "사인 중의 두보"라는 등의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 창작태도는 매우 엄정하고 근명하였으며, 예술적 조탁과 연마에 치중하는 편이었다.
강기의 시는 처음에는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웠지만 나중에는 당시(唐詩)의 영향을 받아 일가를 이루었다. 〈제야자석호귀초계(題夜自石湖歸苕溪)〉 〈호상우거잡영(湖上寓居雜詠)〉 등의 칠언절구는 자신의 방랑생활을 노래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인데, 시구의 조탁이 정묘하고 시상이 그윽하며 운격이 청명하다.
시 이론에도 밝아 《백석도인시설(白石道人詩說)》에서는 선배들의 창작 경험을 흡수하고 자신의 창작이론도 수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백석도인시집(白石道人詩集)》 《백석도인가곡(白石道人歌曲)》 《백석시사집(白石詩詞集)》 등이 있으며, 시 180여 수와 사 80여 수가 남아 전한다.
異名: 姜夔(Jiāng Kuí), 백석도인, 자 요장
국적: 중국 남송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요주 번양(지금의 장시성에 속함)
주요저서: 《백석도인시집》 《백석도인가곡》
주요작품: 〈양주만〉〈영롱사범〉
중국 남송 때의 시인이자 사인(詞人). 사(詞)에는 〈양주만(揚慢)〉등 시대를 영탄한 작품들과 자신의 괴로운 심사를 절실하게 담았다. 시에는 〈제야자석호귀초계(題夜自石湖歸苕溪)〉등의 칠언절구를 지어 자신의 방랑생활을 노래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다. 그밖에 시 이론에도 밝았다.
자는 요장(堯章)이며 백석도인(白石道人)이라고도 불린다. 요주(饒州) 번양(지금의 江西省에 속함) 출신이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라 한양(漢陽)에서 살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양주(揚州)·강회(江淮)·상주(湘州)·악주(鄂州)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30세 때 시인 소덕조(蕭德藻)와 친교를 맺었는데, 이후 강기는 소덕조에 의지하면서 호주(湖州:지금의 折江省에 속함)에 정착하였다.
강기는 다재다능하여 시사(詩詞) 이외에 서예에서도 일가를 이루었고, 음률에도 정통하였다. 그러나 과거시험에는 운이 없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문명(文名)을 널리 떨쳤으나 평생을 불우하게 보냈고 만년에는 친구들에게 의지하고 살면서 궁색한 생활을 하였다. 죽은 뒤에는 장례를 치를 수도 없어서 친구였던 장라(張羅)가 주선하여 겨우 전당문(錢塘門) 밖에 안장할 수 있었다.
사(詞)에는 〈양주만(揚州慢)〉 등 시대를 영탄한 작품들과 자신의 괴로운 심사를 절실하게 담은 〈영롱사범(玲瓏四犯)〉 〈탐춘만(探春慢)〉 등이 있다. 강기의 사는 "성당(盛唐)의 이백과 두보와 같다"거나 "사인 중의 두보"라는 등의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 창작태도는 매우 엄정하고 근명하였으며, 예술적 조탁과 연마에 치중하는 편이었다.
강기의 시는 처음에는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웠지만 나중에는 당시(唐詩)의 영향을 받아 일가를 이루었다. 〈제야자석호귀초계(題夜自石湖歸苕溪)〉 〈호상우거잡영(湖上寓居雜詠)〉 등의 칠언절구는 자신의 방랑생활을 노래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인데, 시구의 조탁이 정묘하고 시상이 그윽하며 운격이 청명하다.
시 이론에도 밝아 《백석도인시설(白石道人詩說)》에서는 선배들의 창작 경험을 흡수하고 자신의 창작이론도 수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백석도인시집(白石道人詩集)》 《백석도인가곡(白石道人歌曲)》 《백석시사집(白石詩詞集)》 등이 있으며, 시 180여 수와 사 80여 수가 남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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