應形無窮 (응형무궁)

應形無窮(응형무궁)

應 응할 응 | 形 모양 형 | 無 없을 무 | 窮 다할 궁, 궁할 궁 |

새로운 상황에 맞도록 적시에 적응해야 승리를 유지할 수 있다.

응형무궁은 손자병법에 나온 전쟁에서 거둔 승리는 반복되지 않으므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다시 승리하기 어려우며 끝없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수 있어야 승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전승불복 응형무궁(戰勝不復 應形無窮)’에서 가져왔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應形無窮(응형무궁) | 戰勝不復應形無窮(전승불복응형무궁) |

吟風弄月 (음풍농월)

吟風弄月(음풍농월)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대하여 시를 지어 읊음.

泣斬馬謖 (읍참마속, qìzhǎnmǎsù)

泣斬馬謖(읍참마속)

泣斩马谡(qìzhǎnmǎsù)

泣 울 읍,바람 빠를 립(입),원활하지 않을 삽 | 斬 벨 참 | 馬 말 마 | 謖 일어날 속 |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신하(臣下)를 법(法)대로 엄정히 처단(處斷)하여 기강을 바로 세움을 이르는 말.


'울며 마속(馬謖)의 목을 베다'라는 뜻으로 《삼국지(三國志)》의 〈촉지(蜀志)·마속전(馬謖傳)〉에서 유래된 말이다.

촉(蜀)나라의 제갈 량(諸葛亮)은 마속의 재능을 아껴 유비(劉備)의 유언을 저버리면서까지 중용하였다. 그러나 제 1차 북벌(北伐)때 가정(街亭)의 전투 책임자로 임명한 마속(馬謖)이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자기의 얕은 생각으로 전투를 하다 참패를 가져왔다. 마속은 우수한 장수요, 제갈량과는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마량(馬良)의 아우였지만 제갈량은 한중으로 돌아오자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 뒤(泣斬馬謖) 장병들에게 사과를 한 것이다.

장관이 제갈량을 보고 "앞으로 천하를 평정하려 하는 이때에 마속 같은 유능한 인재를 없앴다는 것은 참으로 아까운 일입니다." 하고 말하자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손무가 싸워 항상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군율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이같이 어지러운 세상에 전쟁을 시작한 처음부터 군율을 무시하게 되면 어떻게 적을 평정할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유래하여 읍참마속은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엄정하게 법을 지켜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유래: 십팔사략(十八史略),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마속전(馬謖傳)


관련 한자어

유의어

一罰百戒(일벌백계) |

참조어

言過其實(언과기실) | 白眉(백미) |


십팔사략, 삼국지, 삼국지:촉지, 삼국지:촉지:마속전

十八史略, 三國誌, 三國誌:蜀志, 三國誌:蜀志:馬謖傳

陰地轉陽地變 (음지전양지변)

陰地轉陽地變(음지전양지변)

陰 그늘 음, 침묵할 암 | 地 땅 지 | 轉 구를 전 | 陽 볕 양 | 地 땅 지 | 變 변할 변 |

음지(陰地)가 바뀌어 양지로 변한다는 뜻으로, 운이 나쁜 사람도 좋은 운을 만날 때가 있음

[출전]
열상방언(洌上方言)

隱忍自重 (은인자중)

隱忍自重(은인자중)

마음 속으로 참으며 몸가짐을 자중함.


반의어

輕擧妄動(경거망동)

飮水思源 (음수사원)

飮水思源(음수사원)

飮 마실 음 | 水 물 수 | 思 생각 사, 수염이 많을 새 | 源 근원 원 |

물을 마실 때 수원(水源)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근본을 잊지 않음을 일컫는 말


남북조(南北朝)시대, 북주(北周)에 유신(庾信)이라는 문인(文人)이 있었다. 자(字)는 자산(子山)이었다.

서기 554년, 그는 양(梁)나라 원제(元帝) 소역(蕭繹)의 명을 받들어 서위(西魏)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장안(長安)에 도착하였다. 유신이 고국을 떠나와 있던 동안, 양나라는 서위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유신은 당시 문단(文壇)에서 그 명망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서위의 군주는 그를 강제로 장안에 잡아두고 대관(大官)으로 삼았다. 유신은 고향을 떠나 북조(北朝)에서 28년 동안 머무르며 고향을 매우 그리워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런 마음을 유자산집(庾子山集) 칠권의 징주곡(徵周曲)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일을 먹을 때는 그 열매를 맺은 나무를 생각하고[落其實者思其樹],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네[飮其流者懷其源].

飮水思源 이란 음수지원(飮水知源) 이라고도 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음수지원(飮水知源) |

呂不韋 (여불위)

呂不韋(여불위)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92년 ~ 기원전 235년)는 중국의 전국시대 진나라의 승상이다.


생애

정치와 자본의 결탁

여불위는 조(趙)나라 출신의 거상으로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던 진나라의 공자 영자초를 엄청난 돈과 상인다운 치밀함으로써 도왔다. 실례로 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에 의하면 영자초는 여불위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그의 지혜를 빌려 초나라 출신의 화양부인을 초나라 옷을 입고 만남으로써 부인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후에 진나라의 태후가 되는 자신의 애첩 조희를 이때 공자 영자초에게 주었다. 당시 조희는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으며 그 아이가 바로 진시황제이다. 그 후 공자 영자초가 귀국하여 진나라의 왕의 위에 오르자 여불위는 진나라의 승상이 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진 장양왕이 죽고, 13세의 어린 나이로 영정이 왕의 위에 오르자 상국이 되어 중부(仲父)로 불리며 왕을 도왔다. 후에 여불위는 태후 조씨의 밀통사건에 연루되어 파면 당하고 음독자살하였다.

일자천금

기원전 239년 여불위는 전국의 식객들을 모아 여씨춘추를 편찬하였다. 그는 완성된 여씨춘추를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성 성벽에 진열하며, 이 글에 한자라도 더하거나 깎는다면 천금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리하며 일자천금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여불위에 관한 주요 정보는 사마천의 사기의 '여불위전'과 유향의 전국 그리고 설원(說苑)이 있다.


일화

그는 조나라에서 영자초를 보았을 때 기화가거(奇貨可居)란 말을 남겼다.


관련 작품

呂氏春秋(여씨춘추) |


http://ko.wikipedia.org/wiki/여불위

陰德陽報 (음덕양보)

陰德陽報(음덕양보)

남이 모르게 덕을 쌓은 사람은 뒤에 남이 알게 복을 받는다는 뜻.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재상이던 손숙오(孫叔敖)의 고사가 대표적이 예다. 《일기고사(日記故事)》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손숙오가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밖에서 놀다가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보고 죽여서 묻어 버렸다. 그런 다음 집으로 돌아와 끼니를 거르면서 고민하였다. 이를 이상히 여긴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었다. 손숙오가 울면서, “머리 둘 달린 뱀을 본 사람은 죽는다고 들었습니다. 아까 그걸 보았습니다. 머지않아 나는 죽어 어머니 곁을 떠날 것입니다. 그것이 걱정됩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그 뱀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었다. 손숙오가 “또 다른 사람이 볼까봐 죽여서 묻어 버렸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말을 다 들은 어머니는 “남모르게 덕행을 쌓은 사람은 그 보답을 받는다[陰德陽報]고 들었다. 네가 그런 마음으로 뱀을 죽인 것은 음덕이니, 그 보답으로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머니의 말대로 장성한 손숙오는 재상의 자리에까지 나아갔다. 초나라 장왕(莊王) 때의 일이다. 손숙오의 고사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오늘날에는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차후로 발생할 희생을 자신으로 마감하겠다는 대아의 정신이 더욱 커보인다.

殷鑑不遠 (은감불원)

殷鑑不遠(은감불원)

殷 성할 은, 은나라 은, 검붉은빛 안 | 鑑 거울 감 | 不 아닐 불 | 遠 멀 원 |

은(殷)나라 왕이 거울삼을 만한 것은 먼 데 있지 않다는 뜻으로, 본받을 만한 좋은 전례(前例)는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

An example is not far to seek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은 폭군으로 유명하나, 원래는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여 왕자다웠다. 그러다가 유시씨(有施氏)의 나라를 정벌(征伐)했을 때에 공물로 보내 온 매희(妹嬉)라는 여인에 빠진 나머지 온갖 사치와 음락을 계속하는 바람에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百姓)들의 원망이 높아졌다. 기원전 16세기경 이러한 걸왕의 죄를 보다 못한 상(商)부락의 지도자인 탕(湯)은 천명이라 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상나라를 세웠다. 기원전 14세기경에는, 상나라의 왕 반경(盤庚)은 수도를 은(殷)지역으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상나라를 은나라라고도 하게 되었다.

은(殷)나라는 약 600년 후 주왕(紂王)에 이르러 망했다. 주왕도 출중한 지혜와 무용을 지녔으나, 유소씨(有蘇氏)의 나라를 정벌(征伐)했을 때에 공물로 보내온 달기(妲己)라는 여인에 빠져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세월을 보냈다. 보다 못한 신하(臣下)가 이를 간하기라도 하면 도리어 엄벌에 처했다.

삼공(三公) 중 뒷날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되는 서백(西伯)이 간하다가 갇혔는데, 그는 『시경(詩經)』의 대아(大雅) 탕시(蕩詩)의 구절을 인용하여 "은(殷)의 왕이 거울삼을 만한 것은 먼 데 있지 않고, 하나라 걸왕 때에 있다[殷鑑不遠在夏后之世]."하고 간했다. 음락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던 주왕은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했다.


출전

시경(詩經)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覆車之戒(복거지계) | 商鑑不遠(상감불원) | 殷鑑不遠(은감불원) | 殷鑒不遠(은감불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