弄璋之慶 (농장지경)

弄璋之慶(농장지경)

아들을 낳은 경사.

老子 (노자)

老子(노자)

중국 고대의 철학자, 도가(道家)의 창시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명 이이(李耳). 자 담(聃).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 지금의 河南省 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에서 장서실(藏書室)을 관리하던 수장실사(守藏室史)를 하였다. 공자(BC 552~BC 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둔할 것을 결심해 서방(西方)으로 떠나는 도중에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이라고도 하는데, 도가 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老益壯 (노익장)

老益壯(노익장)

老 늙을 노(로) | 益 더할 익, 넘칠 일 | 壯 장할 장 |

①나이는 들었으나 기력(氣力)은 더욱 좋아짐 ②또는, 그런 사람

old but vigorous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한(東漢)시기, 부풍군(扶風郡) 무릉현(茂陵縣)에 부풍군의 독우(督郵)를 지낸 마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군 태수의 명령으로 죄인들을 장안(長安)으로 압송하게 되었다. 그는 죄수들의 형편을 동정하여 그만 도중에서 그들을 풀어주고, 자신은 관직을 버리고 변방으로 도망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조정으로부터 대사면(大赦免)을 받고, 과거의 일을 다시 추궁 당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며 항상 열심히 일하였다. 몇년 지나지 않아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가축들도 그 수효가 많아져서, 그는 매우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변방으로 도망온 사람들에게 자주 "대장부가 뜻을 세웠으면, 생활이 궁핍할수록 그 의지를 굳게 하고, 나이가 들수록 그 정신을 왕성하게 해야한다[大丈夫爲者 窮當益堅 老當益壯]"라고 말했다.

老益壯(Live to agreen old age)이란 나이는 비록 많지만 그 활동과 정신이 더욱 강성해짐을 나타내는 말이다.


출전

後漢書(후한서) 마원전(馬援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老當益壯(노당익장) | 老当益壮(lǎodāngyìzhuàng) | 老益壯(노익장) |

勞而無功 (노이무공)

勞而無功(노이무공)

勞 일할 노(로) | 而 말 이을 이, 능히 능 | 無 없을 무 | 功 공 공

①애를 썼으나 공이 없음 ②얻은 것 없이 헛수고만 함


온갖 애를 썼으나 아무런 보람이 없다는 뜻으로 '도로무공(徒勞無功)'이라고도 한다.

'莊子(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옛날과 지금이란 물과 육지나 같은 게 아닙니까. 주나라와 노나라는 배와 수레나 같은 게 아닙니까[古今非水陸與 周魯非舟車與(고금비수륙여 주노비주차여]? 지금 주나라의 방식을 노나라에 행하려 한다는 것은 마치 육지에서 배를 밀고 가려는 것과 같습니다[今蘄行周於魯 是猶推舟於陸也(금기행주어노 시유추주어육야)]. 수고롭기만 했지 아무런 성과도 없을 것이며 자신에게 반드시 재앙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勞而無功 身必有殃(노이무공 신필유앙)]."

'荀子(순자)' 정명편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말은 막연해서 갈피를 잡을 수 없고, 번잡하고 통일이 없으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기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말은 하지만 요령이 없고, 몹시 애는 쓰지만 공이 없다"고 하였다.

'관자(管子)'의 형세편에도 "옳지 못한 것에 편들지 말라. 능하지 못한 것을 강제하지 말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르지 말라. 이와 같은 것을 가리켜 수고롭기만 하고 공이 없다고 말한다"고 하였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勞而無功(노이무공) | 萬事休矣(만사휴의) | 徒勞無益(도로무익) | 徒勞無功(도로무공) |

綠衣紅裳 (녹의홍상)

綠衣紅裳(녹의홍상)

여인의 고운 옷차림.

綠陰芳草 (녹음방초)

綠陰芳草(녹음방초)

푸른 나무 그늘과 꽃다운 풀. 곧 여름의 자연 경치.

弄瓦之慶 (농와지경)

弄瓦之慶(농와지경)

딸을 낳은 경사.

論語 (논어)

論語(논어)

《논어》(論語)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의 하나이다.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路遙知馬力日久見人心 (노요지마력일구견인심)

路遙知馬力,日久見人心(노요지마력 일구견인심)

路 길 로, 길 노, 울짱 락, 울짱 낙 | 遙 멀 요 | 知 알 지 | 馬 말 마 | 力 힘 력, 힘 역 | 日 날 일 | 久 오랠 구 | 見 볼 견, 뵈올 현 | 人 사람 인 | 心 마음 심 |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세월이 흘러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같이 살아 보아야 알고, 말은 타 보아야 안다.

A Long Road Tests a Horse’s Strength


출전

명심보감(明心寶鑑) 교우편(交友篇)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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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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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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勞心焦思 (노심초사)

勞心焦思(노심초사)

마음을 졸이며 생각에 골몰한다. 근심걱정이 많다

老生之夢 (노생지몽)

老生之夢(노생지몽)

인생은 한 바탕의 꿈과 같이 허무함.

鹿死誰手 (녹사수수)

鹿死誰手(녹사수수)

鹿 사슴 녹(록) | 死 죽을 사 | 誰 누구 수 | 手 손 수 |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는가라는 뜻으로, 승패(勝敗)를 결정(決定)하지 못하는 것을 이르는 말


진서(晉書) 석륵재기하(石勒載記下)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진(西晉)말기, 중국 5호16국(五胡十六國)의 하나인 후조(後趙)의 제1대 황제 석륵(石勒:재위 319∼333)은 재간이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석륵은 외국의 사신들을 연회에 초대하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석륵은 신하인 서광(徐光)에게 말했다.

"그대가 보기에 나는 이전의 어느 제왕(帝王)과 비교될 것 같소?"

서광은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폐하의 지모(智謀)와 무용(武勇)은 모두 한(漢)나라 고조(高祖)인 유방(劉邦:재위 BC 202∼BC 195)을 능가합니다."

석륵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말은 너무 지나치오. 내가 만약 한나라 고조를 만났더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부하가 되어, 그의 지휘를 받으며 한신이나 팽월 같은 장군들과 실력을 겨루었을 것이오. 만약 한나라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를 만났더라면, 나는 그와 함께 중원(中原)에서 함께 말을 달리며 재간을 겨루어,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는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이오[未知鹿死誰手]."

양쪽의 실력이 비슷해 누가 이길지 모를 정도로 미리 승부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지위나 정권을 사슴에 비유하였는데, 천하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라는 뜻에서 제위의 다툼을 비유하는 중원축록(中原逐鹿)과 비슷한 말이다.


출전

진서(晉書)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角逐(각축) | 中原逐鹿(중원축록) | 逐鹿(축록) |



路逢狹處難回避 (노봉협처난회피)

路逢狹處難回避(노봉협처난회피)

길 좁은 곳에서 원수를 만나면 피하기 어렵다는 뜻.

景行錄 曰, 恩義 廣施。人生何處不相逢。讐怨 莫結。路逢狹處 難回避。

"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라. 인생이 어느 곳에서든지 서로 만나지 않으랴? 원수와 원한을 맺지 말라. 길 좁은 곳에서 만나면 피하기 어렵다"라고 경행록에 나와있다.


관련 속담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


경행록, 명심보감, 명심보감:계선편, 원수

景行錄, 明心寶鑑, 明心寶鑑:繼善篇

怒髮衝冠 (노발충관)

怒髮衝冠(노발충관)

怒 성낼 노(로) | 髮 터럭 발 | 衝 찌를 충, 뒤얽힐 종 | 冠 갓 관 |

노한 머리털이 관을 추켜 올린다는 뜻으로, 몹시 성낸 모양(模樣)을 이르는 말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가인 사마 천(司馬遷:BC 145?∼BC 86?)이 저술한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나오는 이야기.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이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는 귀중한 보물을 갖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은 화씨벽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혜문왕에게 진나라의 15성(城)과 바꾸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혜문왕은 화씨벽을 주더라도 15성을 얻지 못한채 속을 것만 같고, 그렇다고 주지 않으면 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 걱정되었다.

혜문왕은 인상여를 사신으로 임명하여 진나라에 보냈다. 소양왕이 큰 나라의 위세를 부리며 성을 내주지 않고 인상여가 가져간 화씨지벽을 빼앗으려 하자 인상여는 진나라 소양왕의 무례한 행동을 크게 꾸짖었는데, '매우 분노하여 머리카락이 곤두서 갓이 벗어질 정도였다[怒髮上衝冠]'고 전해진다.


송나라 흥화군(興化軍) 선유(仙遊) 사람인 임예(林豫)는 신종(神宗) 희녕(熙寧) 9년(1076) 진사(進士)가 되었다. 일찍이 통리군(通利軍)을 맡아 소식(蘇軾) 형제와 친하게 사귀었다. 소철(蘇轍)이 폄적(貶謫)되자 그가 사(詞)를 지어 보냈는데, 그 안에 “화난 머리카락이 관을 뚫었고, 비장한 마음은 돌에 비긴만 하네.[怒髮衝冠 壯心比石]”란 구절이 있었다.


출전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怒發大發(노발대발) | 怒髮上衝冠(노발상충관) | 노발충천(怒髮衝天)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老馬之智 (노마지지, lǎomǎzhīzhì)

老馬之智(노마지지)

老马之智(lǎomǎzhīzhì)

老 늙을 노(로) | 馬 말 마 | 之 갈 지 | 智 슬기 지,지혜 지 |

늙은 말의 지혜(智慧)라는 뜻으로, ①연륜이 깊으면 나름의 장점(長點)과 특기가 있음 ②저마다 한가지 재주는 지녔다는 말

An old dog for a hard road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저마다 장기(長技)나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한비자(韓非子)》설림(說林) 상편에 있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 오패(五覇)의 한 사람이었던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의 일이다. 어느 해 봄, 환공은 명재상 관중(管仲)과 대부(大夫) 습붕(隰朋)을 대동하고 고죽국(孤竹國:하북성(河北城)내)을 정벌하였다. 그런데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그해 겨울에야 끝이 났다. 그래서 혹한 속에 지름길을 찾아 귀국하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전군(全軍)이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져 떨고 있을 때 관중이 말하였다.

“이런 때 늙은 말의 지혜가 필요하다[老馬之智可用也(노마지지가용야)].”

즉시 늙은 말 한 마리를 풀어 놓았다. 그리고 전군이 그 뒤를 따라 행군한 지 얼마 안되어 큰길이 나타났다[乃放老馬而隨之 遂得道行(내방노마이수지 수득도행)].

또 한번은 산길을 행군하다가 식수가 떨어져 전군이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습붕이 말하였다.

“개미란 원래 여름엔 산 북쪽에 집을 짓지만 겨울엔 산 남쪽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짓고 산다. 흙이 한 치[一寸]쯤 쌓인 개미집이 있으면 그 땅속 여덟 자[一仞≒8자≒2.4m]쯤 되는 곳에 물이 있는 법이다.”

군사들이 산을 뒤져 개미집을 찾은 다음 그곳을 파 내려가자 과연 샘물이 솟아났다.

이 이야기에 이어 한비는 그의 저서《한비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관중의 총명과 습붕의 지혜로도 모르는 것은 늙은 말과 개미를 스승으로 삼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음에도 성현의 지혜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노마지지란 여기서 나온 말인데, 노마식도(老馬識道)·노마지도(老馬知道)라고도 하며, 요즈음에도 ‘경험을 쌓은 사람이 갖춘 지혜’란 뜻으로 사용된다.

[유래]
韓非子(한비자) : 說林上(설림상) |


참조 한자어

동의어

老馬知途(노마지도) | 老馬識途(노마식도) : 老马识途(lǎomǎshítú) | 识途老马(shítúlǎomǎ) |


韓非子(한비자) : 說林上(설림상) |

綠林 (녹림, lùlín)

綠林(녹림)

绿林(lùlín)

綠 푸를 록 | 林 수풀 림


도둑의 별칭.


이 말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전한(前漢) 말기에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이 왕위를 찬탈하여 천자(天子)가 되고, 국호를 신(新)이라 고친 다음 모든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개혁정책이 너무 급격하여 혼란만 빚었고, 백성은 극도의 생활고에 빠져 새 왕조를 원망하게 되었다. AD 14년(천봉 4) 왕광(王匡) ·왕봉(王鳳) 일당이 이들 난민을 모아 녹림산(綠林山)에서 반기를 들었는데, 그 무리가 수백 명이었다. 그러자 관군에 쫓긴 마무(馬武) ·왕상(王常) ·성단(成丹) 등이 몰려와 함께 녹림산에 근거지를 차리고 마을을 공략하였는데, 이들의 세력이 몇 달 사이에 8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 후 이들은 형주자사(荊州刺使)가 이끈 관군 2만명과 싸워 크게 이기고, 세력이 커져 5만명이 되었을 때 유수(劉秀:光武帝)와 유현(劉玄)이 군사를 일으키자 이들과 합류하여 왕망을 위협하는 큰 세력을 이루었다. 녹림은 원래 산 이름이지만, 왕광의 무리가 굶주린 백성을 모아 이 곳을 근거지로 도둑질을 하였기 때문에 이 후부터 도둑의 소굴을 녹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호지(水滸誌)》와 당(唐)나라 이섭(李涉)이 지은 우도시(遇盜詩)에도 도둑을 가리켜 녹림의 호객이라 하였다.

路柳牆花 (노류장화)

路柳牆花(노류장화)

누구든지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밑의 꽃이라는 뜻으로 기생 또는 몸을 파는 여자

駑馬十駕 (노마십가)

駑馬十駕(노마십가)

駑 둔한 말 노, 둔할 노 | 馬 말 마 | 十 열 십 | 駕 멍에 가 |

둔한 말도 열흘 동안 수레를 끌 수 있다는 뜻으로, 재주 없는 사람도 노력(努力)하고 태만(怠慢)하지 않으면 재주 있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비유(比喩ㆍ譬喩)


중국 주(周)나라의 유학자(儒學者)인 순자(荀子)의 사상을 집록(輯錄)한 순자(荀子) 수신편(修身篇)에 나오는 말이다.

'천리마는 하루 만에 천 리를 달리는데, 둔한 말도 열흘 동안 달리면 이에 미칠 수 있다[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則亦及之矣].'

또한 '반 걸음이라도 쉬지 않으면 절룩거리며 가는 자라도 천리를 갈 수 있고, 흙을 쌓는데도 멈추지 않고 쌓아나가면 언덕이나 산을 이룰 것이다'라는 말도 있다.

駑馬란 걸음이 느린 말을 가리키며, 재능이 없고 무능한 사람을 비유하기도 한다. 말이 수레를 끌고 다니는 하루 동안의 노정(路程)을 일가(一駕)라 하니, 十駕란 곧 열흘간의 노정을 말한다.

駑馬十駕란 둔한 말이 열흘 동안 수레를 끌고 다니다라는 뜻이다. 이는 곧 재주 없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에 미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영어의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라는 표현과 비슷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출전

순자(荀子) 수신편(修身篇)

老當益壯 (노당익장)

老當益壯(노당익장)

老当益壮(lǎodāngyìzhuàng)

老 늙을 노(로) | 當 마땅 당 | 益 더할 익, 넘칠 일 | 壯 장할 장 |

①늙을수록 더욱 강인한 마음과 뜻을 지녀야 함. ②나이는 들었으나 기력(氣力)은 더욱 좋아짐 ③또는, 그런 사람

old but vigorous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를 섬긴 명장 마원(馬援)은 열 두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느 어렸을 때부터 큰 뜻을 품고 있었으며, 그의 형들도 그 장래(將來)를 주목(注目)하고 있었다.맏형 마황(馬況)은 그에게 『시경(詩經)』을 읽으라고 일렀지만, 마원은 케케묵은 책을 읽는 것을 싫어하고, 변지로 가서 목축을 하고 싶어했다. 마황은 아우 마원이 장래(將來)에 반드시 대성할 것이라 보고 그 소원을 들어 주었다.그 후 얼마 안 가서 뜻하지 않게 마황이 죽었다. 마원은 몹시 슬퍼하며, 과부가 된 형수를 잘 섬기고 아우로서의 예절(禮節)을 다했다. 그리고 북쪽 변지로 가는 것은 부득이 중단(中斷)해야만 했다. 뒤에 그는 시골 관원(官員)이 되었다. 한번은 죄인을 호송한 일이 있었다. 호송 도중 죄인의 신상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달아나게 해주었다.마원도 북쪽 변경으로 도망가서 이름을 감춘 채 숨어 지내고 있었다. 다행히 대사면령이 내려 묵은 죄를 용서받은 그는 그 땅에 눌러 살면서 전부터 하고자 했던 목축업을 시작했다. 그의 선조가 예전에 그 곳에서 관원(官員) 노릇을 했기 때문에 많았는데, 모두들 그를 우두머리로 삼았다. 그는 목축과 함께 농업에도 종사(從事)했으며, 얼마 안 가서 소와 양이 수천 마리, 곡물이 숨나 석이나 되는 부자가 되었다.그는 항시 친구(親舊)에게 말했다. "대장부는, 곤란(困難)할 때는 의지를 보다 굳세게 갖고, 늙어서는 더욱 더 왕성해야만 한다(大丈夫爲志 當益堅 老當益壯)"그리고 또 말했다. "가멸지더라도 사람에게 베풀지 않으면 수전노일 뿐이다."그는 그 말대로 실천했다. 모은 돈이나 물건은 모조리 친척(親戚)이나 친구(親舊)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늘 수수한 옷차림으로 일에만 열중(熱中)했다.

출전
後漢書(후한서) 마원전(馬援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老當益壯(노당익장) | 老当益壮(lǎodāngyìzhuàng) | 老益壯(노익장) |

論功行賞 (논공행상)

論功行賞(논공행상)

공적의 크고 작음을 따져 그에 알맞은 상을 준다는 말.


삼국시대의 魏(위)나라 文帝(문제) 曹丕(조비)는 병으로 죽기 며칠 전에 曹叡(조예)를 황태자로 정했다. 이 자리에서 문제는 장군이자 일가가 되는 曹眞(조진)과 曹休(조휴), 유교와 법에 정통한 陳群(진군), 원로인 司馬懿(사마의) 등 네 사람에게 뒷일을 간곡히 부탁했다.

문제의 죽음은 과연 吳(오)나라와 蜀(촉)나라에 위나라를 공격하는 기회를 주었다. 조예가 明帝(명제)로 등극한지 3개월 뒤 오나라의 孫權(손권)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의 江夏郡(강하군)을 공격했다.

태수인 문빙이 공격을 막았다. 조정에서는 응원군을 보내 문빙을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명제는 조정 중신들의 건의를 듣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오나라는 전통적으로 水戰(수전)에 강하다. 그런데도 그들이 배를 버리고 육상의 싸움에 도전한 것은 우리쪽의 무방비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무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못가서 지칠 것이다. 지금 문빙의 군대가 잘 버티고 있으니 攻守(공수)의 세력이 뒤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과연 얼마 뒤 손권은 후퇴했다. 오나라 장군 제갈근과 장패도 위나라를 공격해왔지만 대장군 사마의가 善戰(선전), 이들을 격파하고 장패를 목벴다. 용장 조휴도 오나라의 別動隊(별동대)를 격파했다.

삼국지는 싸움이 끝난 뒤 위나라 장병들의 「공에 따라 나누어준 포상은 그 공에 합당하게 각각에 주어졌다(論功行賞各有差․논공행상각유차)」라고 적고 있다.

弄假成眞 (농가성진)

弄假成眞(농가성진)

장난삼아 한 것이 참으로 한 것처럼 됨.

內憂外患 (내우외환)

內憂外患(내우외환)

内忧外患(nèiyōu wàihuàn)。

內 안 내, 들일 납 | 憂 근심 우 | 外 바깥 외 | 患 근심 환 |

내부(內部)에서 일어나는 근심과 외부(外部)로부터 받는 근심이란 뜻으로, 나라 안팎의 여러 가지 어려운 사태(事態)를 이르는 말


국어(國語) 진어(晉語)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 중엽에 막강한 세력의 초(楚)와 진(晉) 두 나라가 대립한 시대가 있었다. 진나라 여공이 송(宋)나라와 동맹을 맺어 평화가 실현되었으나 수년 후 초나라 공왕(共王)이 정(鄭)나라와 위(衛)나라를 침략하였다. 다음해 진나라와 초나라의 군대가 언릉에서 마주쳤다.

당시에 진나라의 내부에서는 극씨(郤氏)ㆍ낙서(樂書)ㆍ범문자(范文子) 등의 대부(大夫)들이 정치를 좌우할 만큼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초나라와 충돌하기 전에 낙서는 진나라에 항거한 정나라를 치기 위하여 동원령을 내린 후, 스스로 중군(中軍)의 장군이 되고 범문자는 부장(副將)이 되어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막상 진과 초의 두 군대가 충돌하게 되자 낙서는 초나라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범문자는 이에 반대하여, ‘제후(諸侯)로 있는 사람이 반란하면 이것을 토벌하고, 공격을 당하면 이를 구원하여 나라는 이로써 혼란해진다. 따라서 제후는 어려움의 근본이다’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
“오직 성인만이 안으로부터의 근심도, 밖으로부터의 재난도 능히 견디지만[唯聖人能外內無患(유성인능외내무환)], 성인이 아닌 우리들에게는 밖으로부터의 재난이 없으면 반드시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근심이 있다[自非聖人 外寧必有內憂(자비성인 외녕필유내우)]. 초나라와 정나라는 놓아두고 밖으로부터의 근심을 내버려두지 않겠는가.”


관자(管子) 계(戒)편의 이야기.

춘추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음식을 들지도 않으며 외전(外殿)에서 지내고 있었다. 궁녀들을 관장하는 여관(女官)이 궁녀들에게 임금이 곧 거동하실거라며 외전에 나가서 임금을 모시도록 지시하였다. 궁녀들이 모시겠다고 몰려오자, 환공은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곧 거동하리라는 소리를 누가 하더냐?"

궁녀들의 말을 들은 환공이 곧 여관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다. 여관의 대답은 이러했다.

"저는 임금께서 내우(內憂)가 있거나 외환(外患)이 있으면 외전에서 주무시고 음식을 들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임금께서 외전에서 지내시는 것은 다른 내우는 없으나, 필시 외환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非有內憂, 必有外患]. 그래서 저는 임금께서 곧 거동하시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낸 여관에게 환공은 감동하였다.


출전

국어(國語) 진어(晉語) | 관자(管子) 계(戒)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內憂外亂(내우외란) | 近憂遠慮(근우원려)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來語不美去語何美 (내어불미거어하미)

來語不美去語何美(내어불미거어하미)

來 올 내 | 語 말씀 어 | 不 아닐 불 | 美 아름다울 미 | 去 갈 거 | 語 말씀 어 | 何 어찌 하 | 美 아름다울 미 |

①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② 말은 누구에게나 점잖고 부드럽게 해야 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己所欲施於人(기소욕시어인) | 自業自得(자업자득) |


관련 속담·격언

동의어·유의어

¶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

¶ Do as you would be done by. 자신이 대접 받고 싶은 만큼 남에게 해 주어라. (서양 속담)
¶ So always treat others as you would like them to treat you. (Matthew 7, 12)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마태오의 복음서 7장 12절)
¶ Whatever someone sows, that is what he will reap. (Galatians 6, 7)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6장 7절)
¶ You get what you give. 자업자득(自業自得)


http://blog.naver.com/goldenrule50/20132731277
http://www.catholic.org/bible

難兄難弟 (난형난제, nànxiōngnàndì)

難兄難弟(난형난제)

难兄难弟, nàn xiōng nàn dì

難 어려울 난 | 兄 맏 형 | 難 어려울 난 | 弟 아우 제


고난이나 재난을 함께한 사람.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람. 함께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 서로 같은 곤경에 처한 사람.


관련 한자어

구분

难兄难弟(nánxiōngnándì)

難兄難弟 (난형난제, nánxiōngnándì)

難兄難弟(난형난제)

难兄难弟(nán xiōng nán dì)

難 어려울 난 | 兄 맏 형 | 難 어려울 난 | 弟 아우 제 |


양자(兩者) 중에 어느 편이 낫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쓰이는 말.


형 노릇 하기도 어렵고 동생 노릇 하기도 어렵다는 뜻으로, 양자(兩者) 중에 어느 편이 낫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사용된다. 《세설신어·덕행(世說新語·德行)》에 나오는 말이다.

동한(東漢)시기, 영천(潁川)의 허(許)지방에 진식(陳寔)이라는 유명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매사에 공정하였다. 그는 생활이 검소하여 집안에 하인을 두지 않았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의 이름은 기(紀)이고 자(字)는 원방(元方)이었으며, 작은 아들은 이름이 담(湛)이고 자(字)는 계방(季方)이었다. 이들 또한 모두 명망이 드높은 인물들이었다.

진원방(陳元方)의 아들 장문(長文)과 그의 사촌, 즉 원방의 동생 계방(季方)의 아들 효선(孝先)이,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덕이 더 훌륭하다고 주장하다가 결말이 나지 않으므로 할아버지인 진식(陳寔)에게 가서, 이에 대한 판정을 내려주실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진식은 "원방도 형 되기가 어렵고 계방도 동생 되기가 어렵다[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라고 대답하였다고 한 데서 유래한 고사성어이다.


출전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


관련 한자어

유의어

莫上莫下(막상막하) |

구분

难兄难弟(nànxiōngnàndì) |

狼狽 (낭패, lángbèi)

狼狽(낭패)

狼狈(lángbèi)

狼 이리 낭(랑) | 狽 이리 패,낭패할 패 |


① 다리 없는 두 마리의 이리가 처한 곤경. 패(狽)와 낭(狼)은 다 이리의 일종으로서 낭은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으며, 패는 그와 반대이므로 그 두 짐승이 같이 나란히 걷다가 서로 사이가 벌어지면 균형을 잃고 넘어지게 되므로 당황하게 되는 데서 유래한 말 ② 계획(計劃)하거나 기대(期待)한 일이 실패(失敗)하거나 어긋나 딱하게 됨


'낭패'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 생활 중에 자주 쓰이는 말이다. 어떤 일을 도모했을 때 잘 풀리지 않아 처지가 고약하게 꼬이는 경우에 사용한다.

'낭'이나 '패'나 한결같이 개사슴록(犬)변으로 이뤄졌다. 한자에서 犬변이 들어 있는 글자는 모두 동물이거나 또는 동물의 특성을 함축한 글자다.

예를 들면 여우 호(弧), 개 구(狗), 삵쾡이 리(狸), 돼지 저(猪), 고양이 묘(猫) 등등이다.

낭(狼)과 패(狽)도 마찬가지다. 낭과 패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낭(狼)은 태어날 때부터 뒷다리 두 개가 없거나 아주 짧다. 그런가 하면 패(狽)는 앞다리 두 개가 없거나 짧다. 그런 이유로 걸을 때 狈(패)는 낭의 몸에 앞다리를 걸쳐야 했다. 하지만 두 마리가 같이 걸으려면 어지간히 사이가 좋지 않고서는 넘어지기 일쑤였다.

낭과 패의 성품을 분석해 보면, 낭은 성질이 흉포하지만 지모(智謀)가 부족하다. 반대로 패는 순한 듯 싶은데도 지모가 뛰어나다. 그래서 함께 먹이를 찾으러 나갈 때엔 패의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도 마음이 바뀌면 문제가 생긴다. 서로 고집을 피우면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곤경에 처한 의미가 파생되었다.

[출전]
後漢書(후한서) : 李杜列傳(이두열전) | 酉陽雜俎(유양잡조) : 卷十六 |


간사하고 꾀가 많다는 뜻의 교활(狡猾)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 역시 개사슴록 (犬)변이다. 교(狡)나 활(猾)도 모두 동물 이름이다. 물론 실존하는 것은 아니며 전설상의 동물이다.

《산해경》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 동물에 대한 특성이 있다.

교(狡)는 옥산(玉山)에 살며 개와 같지만 표범 무늬를 하고 있다. 머리에는 쇠뿔을 달고 있으니 그 형상이 괴이하다. 울음소리 역시 개와 비슷하다고 적혀 있다. 한가지 특별한 것은 이놈이 나타나면 그해엔 여지없이 풍작이다. 그런 점에서 교는 길조이며 어느 누구나 반긴다.

교(狡)의 주변에는 활(猾)이 있다. 이놈은 아주 간악하다. 사는 곳은 요광산 (堯光山)인데 몸뚱이에는 돼지털이 나 있으며 동굴 안에서 겨울잠을 잔다. 한소리 기합을 지르듯 울어대면 온 천하가 큰 혼란에 빠져 버린다. 사람들은 모두 흉조의 상징이기 때문에 활을 두려워 한다.

교(狡)나 활(猾)은 산 속에서 호랑이 같은 맹수를 만나면 스스로의 몸을 구부려 공처럼 만들어 버린다.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삼키려 들면 재빨리 입안으로 들어가 내장으로 굴러가 그것을 파먹는다. 배가 아파 호랑이가 날뛰면 맘껏 내장을 뜯어 먹는다. 그리고 호랑이가 죽으면 그제야 유유히 뱃속에서 빠져 나온다.

[출전]
山海經(산해경) : 南山經, 西山經 |


망설여 결행하지 못하는 뜻의 유예(猶豫)라는 말도 동물에서 나왔다. 유(猶)는 의심이 많은 동물이다. 이놈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나무 위로 숨어 버린다. 유의 본래 뜻은 원숭이다. 예(豫)는 상(象)자가 있으므로 코끼리다. 아마 지금의 큰 코끼리보다 더 커서 매우 동작이 느렸을 것이다.


참조 한자어

유의어

狼狽不堪(낭패불감) | 進退兩難(진퇴유곡) | 進退惟谷(진퇴양난) |

참조어

到處狼狽(도처낭패) ①하는 일마다 모두 실패(失敗)함 ②가는 곳마다 뜻밖의 화를 입음 |

勸上搖木(권상요목) 나무에 오르라 하고, 흔들어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남을 부추겨 놓고 낭패를 보도록 방해(妨害)함이라는 말 |

觸處逢敗(촉처봉패) 가서 닥치는 곳마다 낭패를 당(當)함 |


後漢書(후한서) : 李杜列傳(이두열전) | 酉陽雜俎(유양잡조) : 卷十六 | 山海經(산해경) : 南山經, 西山經 |

狼狽爲奸 (낭패위간)

狼狽爲奸(낭패위간)

狼 이리 랑(낭) | 狽 이리 패 爲 할 위 | 奸 범할 간 |

서로 결탁하여 나쁜 일을 함을 비유한 말.

당(唐)나라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陽雜俎)의 이야기. 狼과 狽는 모두 이리를 뜻하는 말이만, 狼은 앞 다리가 길고 뒷 다리가 짧은 이리이고, 狽는 앞 다리가 짧고 뒷 다리가 긴 이리이다. 狼은 狽 없이 혼자서 일어설 수 없고, 狽는 狼 없이 걸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狼과 狽는 항상 한 몸이 되다시피 하여 양을 훔치러 다녔으나, 울타리가 높고 단단하면 그들은 그걸 무너뜨릴 수 없었다. 이럴 때면 狼은 狽의 목에 올라타고 狽는 긴 두 다리를 이용해 일어섰다. 그런 후 狼은 울타리 너머로 긴 앞 다리로 뻗쳐 양을 잡아챘던 것이다.

이리(狼)의 다리는 사실 앞뒤의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으나 狽는 가공의 동물인 것 같다. 실패나 사고, 또는 아주 난처한 상황 을 뜻하는 말로 흔히 쓰이는 낭패(狼狽) 라는 말은, 다리의 길이가 다른 두 이리를 묶어 걷게 하면 기우뚱거리며 넘어지게 된다는 점에서 유래되었다.


관련 한자어

참조어

狼狽(낭패) |

囊中之錐 (낭중지추, nángzhōngzhīzhuī)

囊中之錐(낭중지추)

囊中之锥(náng zhōng zhī zhuī)

囊 주머니 낭 | 中 가운데 중 | 之 갈 지 | 錐 송곳 추 |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뜻.


전국시대(戰國時代) 말엽,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동생이자 재상(宰相)인 평원군(平原君)을 초(楚)나라에 보내어 구원군을 청하기로 했다. 20명의 수행원이 필요한 평원군은 그의 3000여 식객(食客)중에서 19명은 쉽게 뽑았으나, 나머지 한 명을 뽑지못한 채 고심했다. 이 때에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나리,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하고 나섰다. 평원군은 어이없어 하며 "그대는 내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하고 물었다. 그가 "이제 3년이 됩니다."하고 대답하자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법이오. 그런데 내 집에 온 지 3년이나 되었다는 그대는 단 한 번도 이름이 드러난 일이 없지 않소?"하고 반문하였다. 모수는 "나리께서 이제까지 저를 단 한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신다면 끝뿐이 아니라 자루(炳)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하고 재치있는 답변을 하였다. 만족한 평원군은 모수를 수행원으로 뽑았고,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모수가 활약한 덕분에 국빈(國賓)으로 환대받고, 구원군도 얻을수 있었다.

[출전]
史記(사기) : 平原君虞卿列傳(평원군우경열전) |


관련 한자어

유의어

鶴立鷄群 학립계군 | 出衆 출중 | 錐處囊中 추처낭중 | 錐囊 추낭 | 絶倫 절윤 | 白眉(백미) | 拔群 발군 | 群鷄一鶴 군계일학 | 鷄群一鶴 계군일학 | 鷄群孤鶴 계군고학 |

참조어

毛遂自薦(모수자천) | 三寸之舌(삼촌지설) |


史記(사기) : 平原君虞卿列傳(평원군우경열전) |

落穽下石 (낙정하석)

落穽下石(낙정하석)

落 떨어질 낙 | 穽 함정 정 | 下 아래 하 | 石 돌 석 |

우물 아래에 돌을 떨어뜨림. 다른 사람이 재앙을 당하면 도와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재앙이 닥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下穽投石(하정투석) |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
¶ 불 붙는데 키질한다.
¶ 불 난데 풀무질한다.
¶ 타는 불에 기름 끼얹는다.

南田北畓 (남전북답)

南田北畓(남전북답)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모든 논

羅雀掘鼠 (나작굴서)

羅雀掘鼠(나작굴서)

그물 라 | 참새 작 | 팔 굴 | 쥐 서 |


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다는 뜻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新唐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통치 말기, 장순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충직한 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주도 많고 무인답게 담력 또한 컸으며 대의가 분명한 그런 인물이었다. 정치가 부패하자 변방의 안록산(安祿山)은 군대를 일으켜 당나라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서시 756년, 진원(眞源) 현령 장순(張巡)은 군대를 동원하여 안록산 토벌에 나섰다. 이듬해,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安慶緖)는 윤자기(尹子琦)를 보내 십만 대군으로 장순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당시 장순에게는 겨우 삼 천명의 병력 뿐으로 수적으로 열세였다. 윤자기의 군대는 어떤 때에는 하루에 20여 차례나 공격을 해 왔지만, 장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윤자기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우세하였지만, 성(城)을 함락하지 못하며, 몇 달 동안 대치하게 되었다. 장순은 몇 달 동안 구원군을 기다렸지만 그들이 오지 않자, 성 안의 식량과 풀이 다 바닥날 상황이었다. 형세가 급박하게 변하자 장순은 부하 남제운(南霽雲)을 보내 포위망을 뚫고 임회(臨淮) 태수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위급한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임회태수는 장순의 명성을 시기하여, 그들의 위급함을 보고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윤자기는 강공(强攻)으로는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바꾸어 장순에게 투항을 권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쉴새 없이 공격해 오는 적들을 모두 물리쳤다. 얼마 후, 성안의 식량이 점점 줄어들자, 군인들은 매일 한 수저의 쌀만을 먹었다. 이에 장순은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심지어는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으며, 갑옷과 활에 붙어있는 소가죽을 삶아서 굶주림을 달래라고 하였다(至羅雀掘鼠, 煮鎧弩以食).

장순은 지휘관의 입장에서 자식같은 병사들의 몸부림을 안타깝게 여겨 자기 아내를 죽여 국을 끓여서 병사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악화되어 갔고, 더 이상 성을 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성으로 진격해 들어오는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순이 항복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복을 요구하는 반란군들을 향해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는 청청병력 같은 소리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반란군은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장순의 부하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의 죽음과 바꾼 충성심에 새삼 고개를 떨구게 되었다.

脫穎而出 (탈영이출)

脫穎而出(탈영이출)

脫 벗을 탈 | 穎 이삭 영 | 而 말 이을 이 | 出 날 출 |

脫穎而出이란 모든 재능이 완전하게 드러남을 비유한 말이다.

사기(史記) 평원군우경(平原君虞卿)열전의 이야기. 전국시기,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의 식객(食客) 모수(毛遂)는 3년여를 묵으면서, 이제껏 어떠한 재능을 발휘해 본적이 없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기원전 257년, 진(秦)나라의 공격으로 조(趙)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이 포위되었다. 평원군은 효왕(孝王)의 명으로 초(楚)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러 가게 되었다. 출발하려는 순간, 갑자기 모수가 나서서, 초나라까지 수행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모수는 군께서 저에게 좀더 일찍 기회를 주셨더라면, 저의 모든 재능이 일찍 드러났을 것입니다[乃穎脫而出]라고 했다.

이에 평원군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데리고 초나라로 떠났다. 평원군은 초왕과의 협상에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때, 모수가 한 손에는 칼을 뽑아 들고, 또 한 손으로는 초왕의 옷깃을 잡은채, 초왕을 설복시켜 동의를 얻어 내게 되었다.


관련 한자어

참조어

囊中之錐(낭중지추,nángzhōngzhīzhuī) | 毛遂自薦(모수자천,Máosuìzìjiàn) | 因人成事 (인인성사) | 脫穎而出(탈영이출) |

樂而不流 (낙이불류)

樂而不流(낙이불류)

기쁘면서도 지나치게 들뜨고 휩쓸리지 말라는 뜻

낙이불류 애이불비 가위정야(樂而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


출전

삼국사기 '잡지(雜誌) 악(樂)'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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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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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男兒須讀五車書 (남아수독오거서)

男兒須讀五車書(남아수독오거서)

두보(杜甫)가 한 말로, 남자라면 다섯 수레 정도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뜻.

亂臣賊子 (난신적자)

亂臣賊子(난신적자)

亂 어지럽힐 란 | 臣 신하 신 | 賊 해칠 적 | 子 아들 자 |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

孟子 등문공(藤文公) 하편에는 맹자의 제자인 공도자가 제기한 논쟁에 관한 맹자의 답변이 실려 있다. 맹자는 자신이 논쟁을 피하지 않는 이유를 인의(仁義)의 실천을 위한 것으로 설명하였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은 두려워 하였다[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라는 구절이 나온다.

후한서 '동탁전(董卓傳)'에도 너희들은 반역하여 천자를 핍박하니, 역적들중에도 이제껏 너희같은 자들은 없었다[亂臣賊子未有如汝者]라는 구절이 보인다.

南史:卷50 (列傳第四十)

南史(남사)
李延壽(이연수)


列傳第四十

劉瓛明僧紹庾易劉虯

瓛篤志好學,博通訓義。年五歲,聞舅孔熙先讀管甯傳,欣然欲讀,舅更為說之,精意聽受,曰:「此可及也。」宋大明四年,舉秀才,兄璲亦有名,先應州舉,至是別駕東海王元曾與瓛父惠書曰:「比歲賢子充秀,州閭可謂得人。」

除奉朝請不就,兄弟三人共處蓬室一間,為風所倒,無以葺之。怡然自樂,習業不廢。聚徒教授,常有數十。丹陽尹袁粲於後堂夜集,聞而請之,指聽事前古柳樹謂瓛曰:「人謂此是劉尹時樹,每想高風;今複見卿清德,可謂不衰矣。」薦為秘書郎,不見用。

後拜安成王撫軍行參軍,公事免。瓛素無宦情,自此不復仕。袁粲誅,瓛微服往哭,並致賻助。

齊高帝踐阼,召瓛入華林園談語,問以政道。答曰:「政在孝經。宋氏所以亡,陛下所以得之是也。」帝咨嗟曰:「儒者之言,可寶萬世。」又謂瓛曰:「吾應天革命,物議以為何如?」瓛曰:「陛下戒前軌之失,加之以寬厚,雖危可安;若循其覆轍,雖安必危。」及出,帝謂司徒褚彥回曰:「方直乃爾。學士故自過人。」敕瓛使數入,而瓛自非詔見,未嘗到宮門。

上欲用瓛為中書郎,使吏部尚書何戢喻旨。戢謂瓛曰:「上意欲以鳳池相處,恨君資輕,可且就前除。少日當轉國子博士,便即所授。」瓛笑曰:「平生無榮進意,今聞得中書郎而拜記室,豈本心哉。」

後以母老闕養,拜彭城郡丞,司徒褚彥回宣旨喻之,答曰:「自省無廊廟才,所願唯保彭城丞耳。」上又以瓛兼總明觀祭酒,除豫章王驃騎記室參軍,丞如故。瓛終不就。武陵王曄為會稽太守,上欲令瓛為曄講,除會稽郡丞。學徒從之者轉眾。

永明初,竟陵王子良請為征北司徒記室,瓛與張融、王思遠書曰:

奉教使恭召,會當停公事;但念生平素抱,有乖恩顧。吾性拙人間,不習仕進,昔嘗為行佐,便以不能及公事免黜,此眷者所共知也。量己審分,不敢期榮,夙嬰貧困,加以疏懶,衣裳容發,有足駭者。中以親老供養,褰裳徒步,脫爾逮今,二代一紀。先朝使其更自修正,勉勵於階級之次,見其襤縷,或複賜以衣裳。袁、褚諸公,鹹加勸勵,終於不能自反也。一不復為,安可重為哉。昔人有以冠一免,不重加於首,每謂此得進止之儀。又上下年尊,益不願居官次廢晨昏也。先朝為此,曲申從許,故得連年不拜。既習此歲久,又齒長疾侵,豈宜攝齋河間之聽,廁跡東平之僚?本無絕俗之操,亦非能偃蹇為高,此又聽覽所當深察者也。近初奉教,便自希得托跡客遊之末,而固辭榮級,其故何邪?以古之王侯大人,或以此延四方之士,有追申、白而入楚,羨鄒、枚而游梁,吾非敢叨夫曩賢,庶欲從九九之遺跡,既于聞道集泮不殊,而幸無職司拘礙,可得奉溫凊,展私計,志在此耳。除步兵校尉,不拜。

瓛姿狀纖小,儒業冠於當時,都下士子貴游,莫不下席受業,當世推其大儒,以比古之曹、鄭。性謙率,不以高名自居,之詣於人,唯一門生持胡床隨後。主人未通,便坐門待答。住在檀橋,瓦屋數間,上皆穿漏,學徒敬慕,不敢指斥,呼為青溪焉。竟陵王子良親往修謁。七年,表武帝為瓛立館,以楊烈橋故主第給之,生徒皆賀。瓛曰:「室美豈為人哉,此華宇豈吾宅邪?幸可詔作講堂,猶恐見害也。」未及徙居,遇疾。子良遣從瓛學者彭城劉繪、順陽範縝將廚于瓛宅營齋。及卒,門人受學者並吊服臨送。

瓛有至性,祖母病疽經年,手持膏藥,漬指為爛。母孔氏甚嚴明,謂親戚曰:「阿稱便是今世曾子。」稱,瓛小名也。年四十餘,未有婚對。建元中,高帝與司徒褚彥回為瓛娶王氏女。王氏穿壁掛履,土落孔氏床上,孔氏不悅。瓛即出其妻。及居母憂,住墓下不出廬,足為之屈,杖不能起。此山常有鴝鵒鳥,瓛在山三年不敢來,服釋還家,此鳥乃至。

梁武帝少時嘗經伏膺,及天監元年下詔為瓛立碑,諡曰貞簡先生。所著文集行於世。

初,瓛講月令畢,謂學生嚴植之曰:「江左以來,陰陽律數之學廢矣,吾今講此,曾不得其彷佛。」學者美其退讓。時濟陽蔡仲熊禮學博聞,謂人曰:「五音本在中土,故氣韻調平。今既東南土氣偏詖,故不能感動木石。」瓛亦以為然。仲熊執經議論,往往與時宰不合,亦終不改操求同,故坎稟不進,歷年方至尚書左丞,當時恨其不遇。

又東陽婁幼瑜字季玉,著禮捃拾三十卷。

瓛弟璡字子璥,方軌正直,儒雅不及瓛而文采過之。宋泰豫中,為明帝挽郎。齊建元初,為武陵王曄冠軍征虜參軍。曄與僚佐飲,自割鵝炙。璡曰:「應刃落俎,是膳夫之事。殿下親執鸞刀,下官未敢安席。」因起請退。與友人會稽孔逖同舟入東,於塘上遇一女子,逖目送曰:「美而豔。」璡曰:「斯豈君子所宜言乎,非吾友也。」於是解裳自隔。或曰:與友孔徹同舟入東,徹留目觀岸上女子。璡舉席自隔,不復同坐。兄瓛夜隔壁呼璡,璡不答,方下床著衣立,然後應。瓛怪其久,璡曰:「向束帶未竟。」其立操如此。

文惠太子召璡入侍東宮,每上事輒削草。尋署射聲校尉,卒于官。

時濟陽江重欣亦清介,雖處闇室,如對嚴賓,而不及璡也。重欣位至射聲校尉。

顯字嗣芳,瓛族子也。父琉字仲翔,博識強正,名行自居。幼為外祖臧質所鞠養。質既富盛,恒有音樂。質亡後,母沒十許年,琉每聞絲竹之聲,未嘗不歔欷流涕。梁天監初,終於晉安內史。

顯幼而聰敏,六歲能誦呂相絕秦、賈誼過秦。琅邪王思遠、吳國張融見而稱賞,號曰神童。族伯瓛儒學有重名,卒無嗣,齊武帝詔顯為後,時年八歲。本名頲,齊武以字難識,改名顯。天監初,舉秀才,解褐中軍臨川王行參軍,俄署法曹。

顯博涉多通。任昉嘗得一篇缺簡,文字零落,示諸人莫能識者,顯見雲是古文尚書所刪逸篇。昉檢周書,果如其說。昉因大相賞異。丁母憂,服闋,尚書令沈約時領太子少傅,引為少傅五官。約為丹陽尹,命駕造焉。于坐策顯經史十事,顯對其九。約曰:「老夫昏忘,不可受策;雖然,聊試數事,不可至十。」顯問其五,約對其二。陸倕聞之擊席喜曰:「劉郎子可謂差人,雖吾家平原詣張壯武,王粲謁伯喈,必無此對。」其為名流推賞如此。

五兵尚書傅昭掌著作,撰國史,顯自兼廷尉正,被引為佐。及革選尚書五都,顯以法曹兼吏部郎。後為尚書儀曹郎。嘗為上朝詩,沈約見而美之,命工書人題之于郊居宅壁。後兼中書通事舍人,再遷驃騎鄱陽王記室,兼中書舍人。後為中書郎,舍人如故。

顯與河東裴子野、南陽劉之遴、吳郡顧協連職禁中,遞相師友,人莫不慕之。顯博聞強記,過於裴、顧。時波斯獻生師子,帝問曰:「師子有何色?」顯曰:「黃師子超不及白師子超。」魏人送古器,有隱起字無識者,顯案文讀之無滯,考校年月,一字不差。武帝甚嘉焉。

遷尚書左丞,除國子博士。時有沙門訟田,帝大署曰「貞「。有司未辯,遍問莫知。顯曰:「貞字文為與上人。」帝因忌其能,出之。後為雲麾邵陵王長史、尋陽太守。魏使李諧至聞之,恨不相識。歎曰:「梁德衰矣。善人國之紀也,而出之,無乃不可乎。」王遷鎮郢州,除平西府諮議參軍,久在府不得志。大同九年終於夏口,時年六十三。

凡佐兩府,並事驕王,人為之憂,而反見禮重。友人劉之遴啟皇太子為之銘志,葬於秣陵縣劉真長舊塋。

子莠、恁、臻。臻早有名,載北史。顯從弟彀字仲寶。形貌短小,儒雅博洽,善辭翰,隨湘東王在蕃十餘年,寵寄甚深。當時文檄皆其所為。位吏部尚書、國子祭酒。魏克江陵,入長安。

明僧紹字休烈,平原鬲人,一字承烈。其先吳太伯之裔,百里奚子孟明,以名為姓,其後也。祖玩,州中從事。父略,給事中。僧紹明經有儒術,宋元嘉中,再舉秀才,永光中,鎮北府辟功曹,並不就。隱長廣郡嶗山,聚徒立學。魏克淮北,乃度江。

升明中,齊高帝為太傅,教辟僧紹及顧歡、臧榮緒,以旌幣之禮,征為記室參軍,不至。僧紹弟慶符為青州,僧紹乏糧食,隨慶符之鬱洲,住弇榆山,棲雲精舍,欣玩水石,竟不一入州城。

泰始季年,岷、益有山崩,淮水竭齊郡,僧紹竊謂其弟曰:「夫天地之氣,不失其序,若夫陽伏而不泄,陰迫而不蒸,於是乎有山崩川竭之變。昔伊、洛竭而夏亡,河竭而殷亡,三川竭岐山崩而周亡,五山崩而漢亡。夫有國必依山川而為固,山川作變,不亡何待?今宋德如四代之季,爾志吾言而勿泄也。」竟如其言。

齊建元元年冬,征為正員郎,稱疾不就。其後帝與崔祖思書,令僧紹與慶符俱歸。帝又曰:「不食周粟而食周薇,古猶發議,在今甯得息談邪?聊以為笑。」

慶符罷任,僧紹隨歸住江乘攝山。僧紹聞沙門釋僧遠夙德,往候定林寺。高帝欲出寺見之,僧遠問僧紹曰:「天子若來,居士若為相對?」僧紹曰:「山藪之人,政當鑿壞以遁;若辭不獲命,便當依戴公故事。」既而遁還攝山、建棲霞寺而居之,高帝甚以為恨。昔戴顒高臥牖下,以山人之服加其身,僧紹故雲。

高帝后謂慶符曰:「卿兄高尚其事,亦堯之外臣。朕夢想幽人,固已勤矣。所謂'徑路絕,風雲通'。」仍賜竹根如意、筍籜冠,隱者以為榮焉。勃海封延伯者,高行士也,聞之歎曰:「明居士身彌後而名彌先,亦宋、齊之儒仲也。」永明中,征國子博士不就,卒。

僧紹長兄僧胤能言玄,仕宋為江夏王義恭參軍,王別為立榻,比之徐孺子。位冀州刺史。子慧照,元徽中,為齊高帝平南主簿,從拒桂陽,累至驃騎中兵參軍,與荀伯玉對領直。建元元年,為巴州刺史,綏懷蠻蜒,上許為益州刺史,未遷卒。僧胤次弟僧暠亦好學,宋大明中再使魏,于時新誅司空劉誕。孝武謂曰:「若問廣陵之事,何以答之?」對曰:「周之管、蔡,漢之淮南。」帝大悅。及至魏,魏問曰:「卿銜此命,當緣上國無相踰者邪?」答曰:「聰明特達,舉袂成帷,比屋之甿,又無下僕。晏子所謂'看國善惡。'故再辱此庭。」位至青州刺史。

僧紹子元琳、仲璋、山賓並傳家業,山賓最知名。

山賓字孝若,七歲能言名理。十三,博通經傳,居喪盡禮,起家奉朝請。兄仲璋痼疾,家道屢空,山賓乃行幹祿,後為廣陽令,頃之去官。會詔使公卿舉士,左衛將軍江祏上書薦山賓才堪理劇。齊明帝不重學,謂祏曰:「聞山賓談書不輟,何堪官邪。」遂不用。

梁台建,累遷右軍記室參軍,掌吉禮。時初置五經博士,山賓首應其選。曆中書侍郎,國子博士,太子率更令,中庶子。天監十五年,出為持節、都督緣淮諸軍事、北兗州刺史。普通二年,征為太子右衛率,加給事中。遷禦史中丞,以公事左遷黃門侍郎。四年,為散騎常侍。東宮新置學士,又以山賓居之。俄以本官兼國子祭酒。

初,山賓在州,所部平陸縣不稔,啟出倉米以振百姓。後刺史檢州曹,失簿,以山賓為耗損。有司追責,籍其宅入官。山賓不自理,更市地造宅。昭明太子聞築室不就,有令曰:「明祭酒雖出撫大蕃,擁旌推轂,珥金拖紫,而恒事屢空。聞構宇未成,今送薄助。」並詒詩曰:「平仲古稱奇,夷吾昔擅美,令則挺伊賢,東秦固多士。築室非道傍,置宅歸仁裏。庚桑方有系,原生今易擬。必來三徑人,將招五經士。」

山賓性篤實,家中嘗乏困,貨所乘牛。既售受錢,乃謂買主曰:「此牛經患漏蹄,療差已久,恐後脫髮,無容不相語。」買主遽追取錢。處士阮孝緒聞之,歎曰:「此言足使還淳反朴,激薄停澆矣。」

五年,又假節攝北兗州事,後卒官,贈侍中,諡曰質子。山賓累居學官,甚有訓導之益,然性頗疏通,接于諸生多狎比,人皆愛之。所著吉禮儀注二百二十四卷,禮儀二十卷,孝經喪服義十五卷。

子震字興道,亦傳父業,位太子舍人,尚書祠部郎,余姚令。

山賓弟少遐字處默,亦知名,位都官尚書。簡文謂人曰:「我不喜明得尚書,更喜朝廷得人。」後拜青州刺史。太清之亂奔魏,仕北齊,卒于太子中庶子。子罕,司空記室。

明氏南度雖晚,並有名位,自宋至梁為刺史者六人。

庾易字幼簡,新野人也,徙居江陵。祖玫,巴郡太守。父道驥,安西參軍。

易志性恬靜,不交外物,齊臨川王映臨州,表薦之,餉麥百斛。易謂使人曰:「走樵采麋鹿之伍,終其解毛之衣,馳騁日月之車,得保自耕之祿,于大王之恩亦已深矣。」辭不受,以文義自樂。安西長史袁彖欽其風,贈以鹿角書格、蚌盤、蚌研、白象牙筆。並贈詩曰:「白日清明,青雲遼亮,昔聞巢、許,今睹台、尚。」易以連理幾、竹翹書格報之。

建武三年,詔征為司空主簿,不就,卒。子黔婁。

黔婁字子貞,一字貞正。少好學,多所講誦。性至孝,不曾失色於人。南陽高士劉虯、宗測並歎異之。仕齊為編令,政有異績。先是縣境多猛獸暴,黔婁至,猛獸皆度往臨沮界,時以為仁化所感。

徙孱陵令,到縣未旬,易在家遘疾,黔婁忽心驚,舉身流汗,即日棄官歸家。家人悉驚其忽至。時易疾始二日,醫雲欲知差劇,但嘗糞甜苦。易泄利,黔婁輒取嘗之,味轉甜滑,心愈憂苦。至夕,每稽顙北辰,求以身代。俄聞空中有聲曰:「征君壽命盡,不復可延。汝誠禱既至,政得至月末。」及晦而易亡。黔婁居喪過禮,廬於塚側。

梁台建,黔婁自西台尚書儀曹郎為益州刺史鄧元起表為府長史、巴西梓潼二郡太守。及成都平,城中珍寶山積,元起悉分與僚佐,唯黔婁一無所取。元起惡其異眾,厲聲曰:「長史何獨為高?」黔婁示不違之,請書數篋。尋除蜀郡太守,在職清素,百姓便之。元起死於蜀郡,部曲皆散,黔婁身營殯斂,攜持喪柩歸鄉里。

東宮建,以中軍記室參軍侍皇太子讀,甚見知重。詔與太子中庶子殷鈞、中舍人到洽、國子博士明山賓遞日為太子講五經義。遷散騎侍郎,卒。弟于陵。

於陵字子介,七歲能言玄理。及長,清警博學,有才思。齊隨王子隆為荊州,召為主簿,使與謝朓、宗夬抄撰群書。子隆代還,又以為送故主簿。子隆為明帝所害,僚吏畏避莫至,唯於陵與夬獨留經理喪事。永元末,除東陽遂安令,為人吏所稱。

梁天監初,為建康獄平,遷尚書功論郎,待詔文德殿。後兼中書通事舍人,拜太子洗馬。舊東宮官屬通為清選,洗馬掌文翰,尤其清者。近代用人,皆取甲族有才望者,時于陵與周舍並擢充此職。武帝曰:「官以人清,豈限甲族。」時論以為美。累遷中書黃門侍郎,舍人如故。後終於鴻臚卿。弟肩吾。

肩吾字慎之,八歲能賦詩,為兄于陵所友愛。初為晉安王國常侍,王每徙鎮,肩吾常隨府。在雍州被命與劉孝威、江伯搖、孔敬通、申子悅、徐防、徐摛、王囿、孔鑠、鮑至等十人抄撰眾籍,豐其果饌,號高齋學士。王為皇太子,兼東宮通事舍人。後為安西湘東王錄事、諮議參軍,太子率更令,中庶子。簡文開文德省置學士,肩吾子信、徐摛子陵、吳郡張長公、北地傅弘、東海鮑至等充其選。齊永明中,王融、謝朓、沈約文章始用四聲,以為新變,至是轉拘聲韻,彌為麗靡,複踰往時。簡文與湘東王書論之曰:

比見京師文體,懦鈍殊常,競學浮疏,爭事闡緩,既殊比興,正背風騷。若夫六典三禮,所施則有地,吉凶嘉賓,用之則有所,未聞吟詠情性,反擬內則之篇,操筆寫志,更模酒誥之作。遲遲春日,翻學歸藏,湛湛江水,遂同大傳。

吾既拙于為文,不敢輕有掎摭,但以當世之作,曆方古之才人,遠則楊、馬、曹、王,近則潘、陸、顏、謝,觀其遣辭用心,了不相似。若以今文為是,則昔賢為非,若以昔賢可稱,則今體宜棄。俱為盍各,則未之敢許。又時有效謝康樂、裴鴻臚文者,亦頗有惑焉。何者?謝客吐言天拔,出於自然,時有不拘,是其糟粕。裴氏乃是良史之才,了無篇什之美。是為學謝則不屆其精華,但得其冗長;師裴則蔑絕其所長,唯得其所短。謝故巧不可階,裴亦質不宜慕。故胸馳臆斷之侶,好名忘實之類,決羽謝生,豈三千之可及,伏膺裴氏,懼兩唐之不傳。故玉徽金銑,反為拙目所嗤,巴人下俚,更合郢中之聽。陽春高而不和,妙聲絕而不尋。竟不精討錙銖,覆量文質,有異巧心,終愧妍手。是以握瑜懷玉之士,瞻鄭邦而知退,章甫翠履之人,望閩鄉而歎息。詩既若此,筆又如之。徒以煙墨不言,受其驅染,紙劄無情,任其搖襞。甚矣哉,文章橫流,一至於此。

至如近世謝朓、沈約之詩,任昉、陸倕之筆,斯文章之冠冕,述作之楷模。張士簡之賦,周升逸之辯,亦成佳手,難可複遇。文章未墜,必有英絕,領袖之者,非弟而誰。每欲論之,無可與語,思吾子建,一共商榷。辨茲清濁,使如涇、渭,論茲月旦,類彼汝南。朱白既定,雌黃有別,使夫懷鼠知慚,濫竽自恥。相思不見,我勞如何!

及簡文即位,以肩吾為度支尚書。時上流蕃鎮,並據州拒侯景,景矯詔遣肩吾使江州喻當陽公大心。大心乃降賊,肩吾因逃入東。後賊宋子仙破會稽,購得肩吾欲殺之,先謂曰:「吾聞汝能作詩,今可即作,若能,將貸汝命。」肩吾操筆便成,辭采甚美,子仙乃釋以為建昌令。仍間道奔江陵,曆江州刺史,領義陽太守,封武康縣侯。卒,贈散騎常侍、中書令。子信。劉虯字靈預,一字德明,南陽涅陽人,晉豫州刺史喬七世孫也。徙居江陵。

虯少而抗節好學,須得祿便隱。宋泰始中,仕至晉平王驃騎記室、當陽令。罷官歸家靜處,常服鹿皮袷,斷穀,餌術及胡麻。齊建元初,豫章王嶷為荊州,教辟虯為別駕,與同郡宗測、新野庾易並遺書禮請之。虯等各修箋答而不應命。

永明三年,刺史廬陵王子卿表虯及同郡宗測、宗尚之、庾易、劉昭五人,請加蒲車束帛之命。詔征為通直郎,不就。竟陵王致書通意,虯答曰:「虯四節臥疾病,三時營灌植,暢餘陰於山澤,托暮情於魚鳥,甯非唐、虞重恩,周、邵宏施。」

虯精信釋氏,衣粗布,禮佛長齋,注法華經,自講佛義。以江陵西沙洲去人遠,乃徙居之。建武二年,詔征國子博士,不就。其冬虯病,正晝有白雲徘徊簷戶之內,又有香氣及磬聲。其日卒,年五十八。虯子之遴。

之遴字思貞,八歲能屬文。虯曰:「此兒必以文興吾宗。」常謂諸子曰:「若比之顏氏,之遴得吾之文。」由是州裏稱之。時有沙門僧惠有異識,每詣虯必呼之遴小字曰:「僧伽福德兒。」握手而進之。

年十五,舉茂才,明經對策,沈約、任昉見而異之。吏部尚書王瞻嘗候任昉,遇之遴在坐,昉謂瞻曰:「此南陽劉之遴,學優未仕,水鏡所宜甄擢。」即辟為太學博士。昉曰:「為之美談,不如面試。」時張稷新除尚書僕射,托昉為讓表,昉令之遴代作,操筆立成。昉曰:「荊南秀氣,果有異才,後仕必當過僕。」禦史中丞樂藹即之遴之舅,憲台奏彈,皆令之遴草焉。後為荊州中從事,梁簡文臨荊州,仍遷宣惠記室。之遴篤學明審,博覽群籍,時劉顯、韋棱並稱強記,之遴每與討論,鹹不過也。

累遷中書侍郎,後除南郡太守。武帝謂曰:「卿母年德並高,故令卿衣錦還鄉,盡榮養之理。」轉西中郎湘東王繹長史,太守如故。初,之遴在荊府,常寄居南郡,忽夢前太守袁彖謂曰:「卿後當為折臂太守,即居此中。」之遴後牛奔墮車折臂,右手偏直,不復得屈伸,書則以手就筆,歎曰:「豈黥而王乎?」周舍嘗戲之曰:「雖複並坐可橫,政恐陋巷無枕。」後連相兩王,再為此郡,曆秘書監。

出為郢州行事,之遴意不願出,固辭曰:「去歲命絕離巽,不敢東下;今年所忌又在西方。」武帝手敕曰:「朕聞妻子具,孝衰於親,爵祿具,忠衰於君。卿既內足,理忘奉公之節。」遂為有司奏免。後為都官尚書、太常卿。

之遴好古愛奇,在荊州聚古器數十百種,有一器似甌可容一斛,上有金錯字,時人無能知者。又獻古器四種於東宮。其第一種,鏤銅鴟夷榼二枚,兩耳有銀鏤,銘雲:「建平二年造。」其第二種,金銀錯鏤古鐏二枚,有篆銘雲:「秦容成侯適楚之歲造。」其第三種,外國澡灌一口,有銘雲:「元封二年,龜茲國獻。」其第四種,古制澡盤一枚,銘雲:「初平二年造。」

時鄱陽嗣王范得班固所撰漢書真本獻東宮,皇太子令之遴與張纘、到溉、陸襄等參校異同,之遴錄其異狀數十事,其大略雲:「案古本漢書稱永平十六年五月二十一日己酉,郎班固上,而今本無上書年月日子。又案古本敘傳號為中篇,今本稱為敘傳,又今本敘傳載班彪事行,而古本雲「彪自有傳」。又今本紀及表志列傳不相合為次,而古本相合為次,總成三十八卷。又今本外戚在西域後,古本外戚次帝紀下。又今本高五子、文三王、景十三王、孝武六子、宣元六王雜在諸傳帙中,古本諸王悉次外戚下,在陳項傳上。又今本韓彭英盧吳述雲:「信惟餓隸,布實黥徒,越亦狗盜,芮尹江湖。雲起龍驤,化為侯王。」古本述雲:「淮陰毅毅,仗劍周章,邦之傑子,實惟彭、英。化為侯王,雲起龍驤。」又古本第三十七卷解音釋義,以助雅詁;而今本無此卷也。」

之遴好屬文,多學古體,與河東裴子野、沛國劉顯恒共討論古籍,因為交好。時周易、尚書、禮記、毛詩並有武帝義疏,唯左氏傳尚闕,之遴乃著春秋大意十科,左氏十科,三傳同異十科。合三十事上之。帝大悅,詔答曰:「省所撰春秋義,比事論書,辭微旨遠,編年之教,言闡義繁。丘明傳洙、泗之風,公羊宗西河之學,鐸椒之解不追,瑕丘之說無取。繼踵胡母,仲舒雲盛,因循谷梁,千秋最篤。張蒼之傳左氏,賈誼之襲荀卿,源本分鑣,指歸殊致,詳略紛然,其來舊矣。昔在弱年,久經研味,一從遺置,迄將五紀。兼晚秋晷促,機事罕暇,夜分求衣,未遑披括。須待夏景,試欲推尋,若溫故可求,別酬所問也。」

始武帝于齊代為荊府諮議,時之遴父虯隱在百里洲,早相知聞。帝偶匱乏,遣就虯換穀百斛。之遴時在父側,曰:「蕭諮議躓士,雲何能得舂,願與其米。」虯從之。及帝即位常懷之。侯景初以蕭正德為帝,之遴時落景所,將使授璽紱。之遴預知,仍剃發披法服乃免。先是,平昌伏挺出家,之遴為詩嘲之曰:「傳聞伏不鬥,化為支道林。」及之遴遇亂,遂披染服,時人笑之。

尋避難還鄉,湘東王繹嘗嫉其才學,聞其西上至夏口,乃密送藥殺之。不欲使人知,乃自製志銘,厚其賻贈。前後文集五十卷。

子三達字三善,數歲能清言及屬文。州將湘東王繹聞之,盛集賓客,召而試之。說義屬詩,皆有理致。年十二,聽江陵令賀革講禮還,仍覆述,不遺一句。年十八卒。之遴深懷悼恨,乃題墓曰「梁妙士」以旌之。之遴弟之亨。

之亨字嘉會,年四歲,出後叔父嵩。及長好學,美風姿,善占對。武帝之臨荊州,唯與虯談。虯見之遴之亨,帝曰:「之遴必以文章顯,之亨當以功名著。」後州舉秀才,除大學博士,仍代兄之遴為中書通事舍人。累遷步兵校尉,湘東王繹諮議參軍,敕賜金策並賜詩焉。

大通六年,出師南鄭,詔湘東王節度諸軍。之亨以司農卿為行台承制,途出本州北界,總督眾軍,杖節而西,樓船戈甲甚盛。老小緣岸觀曰:「是前舉秀才者。」鄉部偉之。是行也,大致克復,軍士有功皆錄,唯之亨為蘭欽所訟,執政因而陷之,故封賞不行,但複本位而已。久之,帝讀陳湯傳,恨其立功絕域而為文吏所抵。宦者張僧胤曰:「外聞論者,竊謂劉之亨似之。」帝感悟,乃封為臨江子。固辭不拜。

之亨美績嘉聲,在朱異之右,既不協,懼為所害,故美出之,以代之遴為安西東湘王繹長史、南郡太守。上問朱異曰:「之亨代兄喜不?兄弟因循,豈直大馮、小馮而已。」又謂尚書令何敬容曰:「荊州長史、南郡太守,皆是僕射出入。今者之亨便是九轉。」在郡有異績,吏人稱之。卒,荊土懷之,不復稱名,號為大南郡小南郡。

子廣德,亦好學,負才任氣。承聖中,位湘東太守。魏平荊州,依于王琳。琳平,陳太建中,曆河東太守,卒官。

之亨弟之遲,位荊州中從事史。子仲威,少有志氣,頗涉文史。梁承聖中,為中書侍郎。蕭莊稱尊號,以為禦史中丞,隨莊終鄴中。

坦字德度,虯從弟也。仕齊曆孱陵令,南中郎錄事參軍,所居以幹濟稱。

梁武帝起兵,時輔國將軍楊公則為湘州刺史,帥師赴夏口。西朝議行州事者,坦求行,乃除輔國長史、長沙太守,行湘州刺史。坦嘗在湘州,多舊恩,道迎者甚眾。齊東昏遣安成太守劉希祖破西台所選太守范僧簡于平都,希祖移檄湘部,於是始興內史王僧粲應之,湘部諸郡,悉皆蜂起。州人鹹欲泛舟逃走,坦悉聚船焚之。前湘州鎮軍鍾玄紹潛應僧粲,坦聞其謀,偽為不知,因理訟至夜,城門遂不閉以疑之。玄紹未及發,明旦詣坦問其故。久留與語,密遣親兵收其家。玄紹在坐未起,而收兵已報具得其文書本末。玄紹即首伏,於坐斬之,焚其文書,餘党悉無所問。

梁天監初,論功封荔浦子。三年,遷西中郎長史、蜀郡太守,行益州事。未至蜀,道卒。

論曰:劉瓛弟兄,僧紹父子,並業盛專門,飾以儒行,持身之節,異夫苟得患失者焉。庾易、劉虯取高一代,其所以行己,事兼隱德,諸子學業之美,各著家聲。顯及之遴見嫉時主,或以非罪而斥,或以非疾而亡,異夫自古哲王屈己下賢之道,有以知武皇之不弘,元後之多忌。梁祚之不永也,不亦宜哉。

南山玄豹 (남산현표)

南山玄豹(남산현표)

南 남녘 남, 나무 나 | 山 뫼 산 | 玄 검을 현 | 豹 표범 표 |

남산의 검은 표범. 배고픔을 견뎌야 무늬가 박힌다. 공부를 차곡차곡 쌓아야 문득 반짝이는 지혜를 갖게 된다는 뜻.

[출전]
열녀전, 주역

주역엔 '군자는 표범처럼 변한다.'는 '군자표변'(君子豹變)으로 등장.

南史:卷12

南史(남사)
李延壽(이연수)


卷12


列傳第二後妃下

梁文獻張惶後武德郗皇后武丁貴嬪武阮修容簡文王皇后元徐妃敬夏太后敬王皇后陳武宣章皇后文沈皇后廢帝王皇后宣柳皇后後主沈皇后

天監元年五月甲辰,追上尊號為皇后,諡曰獻。

穆之字思靜,晉司空華六世孫也。少方雅,有識鑒。初為員外散騎侍郎,深被始興王浚引納。穆之鑒其禍萌,求為交址太守,政有異績。宋文帝將以為交州刺史,會病卒。子弘籍字真藝,齊初為鎮西參軍,卒於官。梁武踐阼,追贈穆之光祿大夫,加金章紫綬。贈弘籍廷尉卿。弘籍無子,從父弟弘策以子纘嗣,別有傳。

武德郗皇后諱徽,高平金鄉人也。祖紹,宋國子祭酒、領東海王師。父曄,太子舍人,早卒。後母宋文帝女尋陽公主也,方娠,夢當生貴子。及後生,有赤光照室,器物盡明,家人怪之。巫言此女光高,將有所妨,乃于水濱祓除之。

後幼明慧,善隸書,讀史傳。女工之事,無不閑習。宋後廢帝將納為後,齊初,安陸王緬又欲結婚,郗氏並辭以女疾,乃止。齊建元末,嬪于武帝,生永興公主玉姚、永世公主玉婉、永康公主玉嬛。及武帝為雍州刺史,殂于襄陽官舍,年三十二。其年歸葬南徐州南東海武進縣東城裏山。中興二年,武帝為梁公,齊帝詔贈後為梁公妃。及武帝踐阼,追崇為皇后,諡曰德。陵曰修陵。後父曄,贈金紫光祿大夫。

後酷妒忌,及終,化為龍入于後宮井,通夢於帝。或見形,光彩照灼。帝體將不安,龍輒激水騰湧。于露井上為殿,衣服委積,常置銀鹿盧金瓶灌百味以祀之。故帝卒不置後。

武丁貴嬪諱令光,譙國人也。祖父從官襄陽,因居沔北五女村,寓於劉惠明廡下。貴嬪生於樊城,初產有神光之異,紫氣滿室,故以「光」為名。相者雲「當大貴」。少時與鄰女月下紡績,諸女並患蚊蚋,而貴嬪弗之覺也。鄉人魏益德將娉之,未及成,而武帝鎮樊城,嘗登樓以望,見漢濱五采如龍,下有女子擘絖,則貴嬪也。又丁氏因人以相者言聞之於帝,帝贈以金環,納之,時年十四。貴嬪生而有赤志在左臂,療之不滅;又體多疣子,至是無何並失所在。德後酷忌,遇貴嬪無道,使日舂五斛,舂每中程,若有助者,被遇雖嚴,益小心祗敬。嘗於供養經案側,髣佛若見神人,心獨異之。

天監元年五月,有司奏為貴人,未拜;其年八月,又奏為貴嬪,居顯陽殿。及太子定位,有司奏曰:「皇太子副貳宸極,率土鹹執吏禮。既盡禮皇儲,則所生不容無敬。王侯妃主常得通信問者,及六宮三夫人雖與貴嬪同列,並應以敬皇太子之禮敬貴嬪。宋元嘉中,始興、武陵國臣並以吏敬敬王所生潘淑妃、路淑媛。貴嬪于宮臣雖非小君,其義不異,與宋泰豫朝議百官以吏敬敬帝所生,事義政同。謂宮僚施敬,宜同吏禮,詣神獸門奉箋致謁,年節稱慶,亦同如此。且儲妃作配,率由盛則,以婦踰姑,彌乖從序,謂貴嬪典章,一與太子不異。」於是貴嬪備典章禮數,同乎太子,言則稱令。

貴嬪性仁恕,及居宮接馭,自下皆得其歡心。不好華飾,器服無珍麗。未嘗為親戚私謁。及武帝弘佛教,貴嬪長進蔬膳。受戒日,甘露降於殿前,方一丈五尺。帝所立經義,皆得其指歸,尤精淨名經。普通七年十一月庚辰,薨,移殯於東宮臨雲殿,時年四十二。詔吏部郎張纘為哀冊文,有司奏諡曰穆,葬甯陵,祔於小廟。簡文即位,追崇曰太后。

貴嬪父道遷,天監初,為曆陽太守。廬陵威王之生,武帝謂之曰:「賢女複育一男。」答曰:「莫道豬狗子。」世人以為笑。後位兗州刺史、宣城太守。

文宣阮太后諱令嬴,會稽余姚人也。本姓石。初,齊始安王遙光納焉。遙光敗,入東昏宮。建康城平,為武帝采女。在孕,夢龍罩其床。天監七年八月,生元帝于後宮。是日大赦。尋拜為修容,賜姓阮氏。嘗隨元帝出藩。大同九年六月,薨于江州正寢,時年六十七。其年十一月,歸葬江寧縣通望山,諡曰宣。元帝即位,有司奏追崇為文宣太后,還祔小廟。

承聖二年,追贈太后父齊故奉朝請石靈寶散騎常侍、左衛將軍、封武康縣侯,母陳氏武康侯夫人。

簡文王皇后諱靈賓,琅邪臨沂人也。祖儉,齊太尉、南昌文憲公。父騫,金紫光祿大夫、南昌安侯。後幼而柔明,叔父暕見之曰:「吾家女師也。」天監十一年,拜晉安王妃。生哀太子大器、南郡王大連、長山公主妙挈。大通三年十月,拜皇太子妃。太清三年三月,薨於永福省,時年四十五。其年,簡文即位,追崇為皇后,諡曰簡。大寶元年九月,葬莊陵。

元帝徐妃諱昭佩,東海郯人也。祖孝嗣,齊太尉、枝江文忠公。父緄,侍中、信武將軍。妃以天監十六年十二月拜湘東王妃,生世子方等、益昌公主含貞。妃無容質,不見禮,帝三二年一入房。妃以帝眇一目,每知帝將至,必為半面妝以俟,帝見則大怒而出。妃性嗜酒,多洪醉,帝還房,必吐衣中。與荊州後堂瑤光寺智遠道人私通。酷妒忌,見無寵之妾,便交杯接坐。才覺有娠者,即手加刀刃。帝左右暨季江有姿容,又與淫通。季江每歎曰:「柏直狗雖老猶能獵,蕭溧陽馬雖老猶駿,徐娘雖老猶尚多情。」時有賀徽者美色,妃要之於普賢尼寺,書白角枕為詩相贈答。既而貞惠世子方諸母王氏寵愛,未幾而終,元帝歸咎於妃;及方等死,愈見疾。太清三年,遂逼令自殺。妃知不免,乃透井死。帝以屍還徐氏,謂之出妻。葬江陵瓦官寺。帝制金樓子述其淫行。初,妃嫁夕,車至西州,而疾風大起,髮屋折木。無何,雪霰交下,帷簾皆白。及長還之日,又大雷震西州聽事兩柱俱碎。帝以為不祥,後果不終婦道。

敬夏太后,會稽人也。普通中,納于湘東王宮,生敬帝。承聖元年冬,拜晉安王國太妃。紹泰元年,尊為太后。明年冬,降為江陰國太妃。

敬王皇后,琅邪臨沂人也。承聖元年十一月,拜晉安王妃。紹泰元年十月,拜皇后。明年,降為江陰王妃。父僉自有傳。陳武宣章皇后,諱要兒,吳興烏程人。本姓鈕,父景明為章氏所養,因改姓焉。後母蘇,嘗遇道士以小龜遺己,光采五色,曰「三年有征」。及期,後生,紫光照室,因失龜所在。後少聰慧,美容儀,手爪長五寸,色並紅白。每有期功之服,則一爪先折。武帝先娶同郡錢仲方女,早卒,後乃聘後。後善書計,能誦詩及楚辭。帝為長城縣公,後拜夫人。永定元年,立為皇后。追贈後父梁散騎侍郎景明特進、金紫光祿大夫,加金章紫綬。拜後母蘇安吉縣君。二年,安吉君卒,與後父葬吳興。明年,追封後父為廣德縣侯,諡曰溫。

武帝崩,後與中書舍人蔡景曆定計,秘不發喪。時衡陽獻王昌未至,召文帝。及即位,尊後為皇太后,宮曰慈訓。廢帝即位,後為太皇太后。

光大二年,後下令黜廢帝為臨海王,命宣帝嗣立。太建元年,複為皇太后。二年三月丙申,崩於紫極殿,時年六十五。遺令喪事並從儉約,諸饋奠不用牲牢。其年四月,群臣上諡曰宣,祔葬萬安陵。

後親屬無在朝者,唯本族兄鈕洽官至中散大夫。

文沈皇后諱妙容,吳興武康人也。父法深,梁安前中錄事參軍。後年十歲余,以梁大同中歸於文帝。武帝之討侯景,文帝時在吳興,及後並被收,景平,乃獲免。武帝踐阼,後為臨川王妃。文帝即位,為皇后。追贈後父法深光祿大夫,加金章紫綬,封建城縣侯,諡曰恭。追贈後母高為綏安縣君,諡曰定。廢帝即位,尊後為皇太后,宮曰安德。

時宣帝與僕射到仲舉、舍人劉師知等,並受遺輔政。師知與仲舉恒居禁中,參決眾事,而宣帝為揚州刺史,與左右三百人,入居尚書省。師知忌宣帝權重,矯敕令還東府理州務。宣帝將出,毛喜止帝曰:「今若出外,便受制於人,如曹爽願作富家公不可得也。」宣帝乃稱疾,召師知留與語,使毛喜先入,言之於後。後曰:「今伯宗年幼,政事並委二郎,此非我意。」喜又言於廢帝,廢帝曰:「此自師知等所為,非朕意也。」喜出報宣帝,帝因囚師知。自入見後及帝,極陳師知之短。仍自草敕請畫,以師知付廷尉,其夜於獄賜死。自是政歸宣帝。後憂悶,計無所出,乃密賂宦者蔣裕,令誘建安人張安國使據郡反,冀因此圖帝。安國事發被誅,時後左右近侍頗知其事,後恐連逮黨與,並殺之。

宣帝即位,以後為文皇后。陳亡入隋,大業初自長安歸於江南,頃之卒。

後兄欽,襲爵建城侯,位尚書左僕射。欽素無伎能,奉己而已。卒,諡曰成。子觀嗣,頗有學識,官至禦史中丞。

廢帝王皇后,琅邪臨沂人也。天嘉元年,為皇太子妃。廢帝即位,立為皇后。廢帝為臨海王,後廢為妃。至德中薨。後生臨海嗣王至澤。至澤,光大元年為皇太子,太建元年,襲封臨海嗣王。陳亡,入長安。後父固自有傳。

宣柳皇后諱敬言,河東解縣人也。曾祖世隆,祖惲,父偃,並有傳。後九歲,幹理家事,有若成人。侯景之亂,後與弟盼往江陵,依梁元帝,帝以長城公主故,待遇甚厚,以配宣帝。承聖二年,後生後主于江陵。及魏克江陵,宣帝遷于關右,後與後主俱留穰城。天嘉二年,與後主還朝,後為安成王妃。宣帝即位,立為皇后。後美姿容,身長七尺二寸,手垂過膝。初,宣帝居鄉里,先娶吳興錢氏,及即位,拜貴妃,甚有寵。後傾心下之,每尚方供奉物,其上者皆推于貴妃,而己禦其次焉。宣帝崩,始興王叔陵為亂,後主賴後與吳媼救而獲免。後主即位,尊後為皇太后,宮曰弘範。是時新失淮南地,隋師臨江,又國遭大喪,後主患創不能聽政。其誅叔陵,供大行喪事,邊境防守及百司眾務,雖假後主之敕,實皆決之於後。後主創愈,乃歸政焉。後性謙謹,未嘗以宗族為請,雖衣食亦無所分遺。陳亡,入長安。隋大業十二年,薨於東都,年八十三。葬於洛陽之芒山。

後主沈皇后諱婺華,吳興武康人也。父君理自有傳。後母即武帝女會稽穆公主,早亡。時後尚幼,而毀瘠過甚。及服畢,每歲時朔望,恒獨坐涕泣,哀動左右,內外敬異焉。太建元年,拜為皇太子妃。後主即位,立為皇后。

後性端靜,有識量,寡嗜欲,聰敏強記,涉獵經史,工書翰。後主在東宮,而後父君理卒,居憂處別殿,哀毀逾禮。後主遇後既薄,而張貴妃有寵,總後宮之政,後澹然未嘗有所忌怨。而身居儉約,衣服無錦繡之飾,左右近侍才百許人,唯尋閱圖史及釋典為事。嘗遇歲旱,自暴而誦佛經,應時雨降。無子,養孫姬子胤為己子。數上書諫爭,後主將廢之,而立張貴妃,會國亡不果,乃與後主俱入長安。及後主薨,後自為哀辭,文甚酸切。

隋煬帝每巡幸,恒令從駕。及煬帝被殺,後自廣陵過江,於毗陵天靜寺為尼,名觀音。貞觀初卒。

張貴妃名麗華,兵家女也。父兄以織席為業。後主為太子,以選入宮。時龔貴嬪為良娣,貴妃年十歲,為之給使。後主見而悅之,因得幸,遂有娠,生太子深。後主即位,拜為貴妃。性聰慧,甚被寵遇。

後主始以始興王叔陵之亂,被傷,臥於承香殿。時諸姬並不得進,唯貴妃侍焉。而柳太后猶居柏梁殿,即皇后之正殿也。而沈皇后素無寵於後主,不得侍疾,別居求賢殿。

至德二年,乃於光昭殿前起臨春、結綺、望仙三閣,高數十丈,並數十間。其窗牖、壁帶、縣楣、欄檻之類,皆以沈檀香為之,又飾以金玉,間以珠翠,外施珠簾。內有寶床寶帳,其服玩之屬,瑰麗皆近古未有。每微風暫至,香聞數裏,朝日初照,光映後庭。其下積石為山,引水為池,植以奇樹,雜以花藥。後主自居臨春閣,張貴妃居結綺閣,龔、孔二貴嬪居望仙閣,並複道交相往來。又有王、季二美人,張、薛二淑媛,袁昭儀、何婕妤、江修容等七人,並有寵,遞代以遊其上。以宮人有文學者袁大舍等為女學士。後主每引賓客,對貴妃等游宴,則使諸貴人及女學士與狎客共賦新詩,互相贈答。采其尤豔麗者,以為曲調,被以新聲。選宮女有容色者以千百數,令習而歌之,分部疊進,持以相樂。其曲有玉樹後庭花、臨春樂等。其略雲:「璧月夜夜滿,瓊樹朝朝新。」大抵所歸,皆美張貴妃、孔貴嬪之容色。

張貴妃發長七尺,鬒黑如漆,其光可鑒。特聰慧,有神彩,進止閑華,容色端麗。每瞻視眄睞,光彩溢目,照映左右。嘗於閣上靚妝,臨於軒檻,宮中遙望,飄若神仙。才辯強記,善候人主顏色。薦諸宮女,後宮鹹德之,競言其善。又工厭魅之術,假鬼道以惑後主。置淫祀于宮中,聚諸女巫使之鼓舞。

時後主怠於政事,百司啟奏,並因宦者蔡臨兒、李善度進請,後主倚隱囊,置張貴妃于膝上共決之。李、蔡所不能記者,貴妃並為疏條,無所遺脫。因參訪外事,人間有一言一事,貴妃必先知白之,由是益加寵異,冠絕後庭。而後宮之家,不遵法度,有絓於理者,但求恩于貴妃,貴妃則令李、蔡先啟其事,而後從容為言之。大臣有不從者,因而譖之,言無不聽。於是張、孔之權,熏灼四方,內外宗族,多被引用,大臣執政,亦從風而靡。閹宦便佞之徒,內外交結,轉相引進。賄賂公行,賞罰無常,綱紀瞀亂矣。及隋軍克台城,貴妃與後主俱入井,隋軍出之,晉王廣命斬之於青溪中橋。

論曰:飲食男女,人之大欲存焉,故聖人順于人情而為之度。王宮六列,士室二等,皆隨事升降,以立節文。若夫義篤閫闈,政刑邦國,古先哲王有以之致化矣。夫後妃專夕,配以德升,姬嬙並禦,進非色幸,欲使情有覃被,愛罔偏流,專貞內表,妖蠱外息,乃可以輔興君德,燮理陰政。

宋氏因晉之舊典,聘納有方,俔天作儷,必四嶽之後。自元嘉以降,內職稍繁,所選止於軍署,徵引極乎廝皁,非若晉氏采擇,濫及冠冕者焉。而愛止帷房,權無外授,戚屬餼賚,歲時不過肴漿,斯為美矣。及文帝之傾惑潘嫗,謀及婦人;大明之淪沒殷姬,並後匹嫡,其為喪敗,亦已甚矣。

齊氏孝、昭二後,並有賢明之訓,惜乎早世,不得母臨萬國。有婦人焉,空慕周典,禎符顯瑞,徒萃徽名。高皇受命,宮禁貶約,衣不文繡,色無紅采,永巷貧空,有同素室。武帝嗣位,運藉休平,壽昌前興,鳳華晚構,香柏文檉,花梁繡柱,雕金鏤寶,照燭房帷,趙瑟吳趨,承閑奏曲,事由私蓄,無損國儲。明帝統業,矯情儉陋,奉己之制,曾莫雲改。東昏喪道,侈風大扇,哲婦傾城,同符殷、夏,可以垂誡,其在斯乎。梁武志在約己,示存宮掖,雖貴嬪之徽華早著,誕育元良,唯見崇重,無聞正位。徐妃無行,其殲滅也宜哉。

陳武撫茲歸運,奄開帝業。若夫儷天作則,燮隆王化,則宣太后其懿焉。文、宣宮壼,無聞於喪德;後主嗣業,實敗于椒房,既曰牝晨,亦唯家之索也。

南史 (李延壽)

南史(남사)
李延壽(이연수)

南史(nánshǐ)

구분: 역사서
저자: 이연수(李延壽)
시대: 중국 당


중국 당(唐)의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사서(史書). 기전체(紀傳體)로 송(宋), 남제(南齊), 양(梁), 진(陳) 등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의 네 왕조의 역사를 기술한 중국 25사(二十五史)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 당(唐)의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사서(史書)로 중국 각 왕조(王朝)의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25사(二十五史) 가운데 하나이다. 송(宋, 420~479), 남제(南齊, 479~502), 양(梁, 502~557), 진(陳, 557~589) 등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420~589) 남조(南朝)의 네 왕조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서술하였다. 유유(劉裕)가 진(晋)의 공제(恭帝)에게 양위(讓位)를 받아 송(宋)을 건국한 420년(宋 武帝 永初 원년)부터 진(陳)이 수(隋) 문제(文帝)에게 멸망된 589년(陳 後主 禎明 3년)까지 170년 동안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70권 등 모두 80권으로 되어 있다.

남사(南史)의 편찬은 이연수(李延壽)의 아버지인 이대사(李大師, 570~628)부터 시작되었다. 이대사(李大師)는 종래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각 왕조의 역사 기술이 공정하지 못하고 일관성과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고, 이를 하나의 체재(體裁)로 통일하여 통사(通史)를 만들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이연수(李延壽)는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계승하여 643년부터 659년까지 17년 동안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국가들의 사서(史書)와 기록들을 연구, 정리하여 본기(本紀) 12권, 열전(列傳) 88권의 북사(北史)와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70권의 남사(南史)를 편찬하였다.

남사(南史)는 송서(宋書), 제서(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등에 기록된 남조(南朝) 국가들의 역사를 정선(精選)하여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서술이 간략하고 남조(南朝)의 역사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편찬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간행되자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4서(書)는 잘 읽히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남사(南史)는 지(志)와 표(表)가 따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 청(淸) 시대에 주가유(周嘉猷)가 남북사표(南北史表) 6권을 만들었으며, 지(志)는 수서(隋書)의 내용으로 보완한다. 또한 남사(南史) 79권(卷)의 ‘이맥전(夷貊傳)’에는 조선(朝鮮), 마한(馬韓), 진한(辰韓),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등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한반도 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史料)로 쓰인다.


관련 고사성어

列傳

卷12 列傳第2 后妃下

徐娘半老(서낭반로,Xúniángbànlǎo) |

卷50 列傳第40 劉瓛 明僧紹 庾易 劉虯

嘗糞(상분) |


十八史略, 십팔사략, 二十四史, 이십사사

濫觴 (남상)

濫觴(남상)

사물(事物)의 연원, 발생

男負女戴 (남부여대)

男負女戴(남부여대)

남자는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간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살곳을 찾아다닌다

羅浮少女 (나부소녀, luófúshàonǚ)

羅浮少女(나부소녀)

罗浮少女(luó fú shào nǚ)

羅 벌일 나(라),그물 나(라) | 浮 뜰 부 | 少 적을 소 | 女 계집 녀(여)


미인(美人)을 이르는 말. 나부산(羅浮山)에 있던 매화의 정령이 미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함. '나부(羅浮)'는 중국 광동(廣東)성 증성(增城)현의 동쪽에 있는 지명이다.

落落長松 (낙락장송)

落落長松 (낙락장송)

가지가 축 늘어진 큰 소나무

難得糊塗 (난득호도)

難得糊塗(난득호도)

難 어려울 난 | 得 얻을 득 | 糊 풀 호 | 塗 진흙도

(어리석은데 총명한척 하기도 어렵지만) 총명한데 어리석어 보이기는 (더욱) 힘들다는 뜻. 뛰어난 사람이 때로는 바보처럼 위장하여 풍랑이 많은 세상에서 살아사는 도가적 삶의 처세술을 보여주는 의미.

It's difficult to be careless all the time; wise people rarely get confused, but sometimes it's better to pretend to be bewildered.

중국 청대의 유명한 화가 겸 서예가 정섭(鄭燮, 1693-1765, 호: 板橋)이 쓴 말. 자신을 본 모습을 숨기고 일을 도모하는 것을 뜻한다. 중국인들이 매우 좋아하는 어구로서 속과 겉이 다른 중국인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어느날 정판교는 정묵이라는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옥의 담장에 문제로 이웃과 소송이 붙었으니 편지를 써서 흥화현 지현에게 부탁이었다. 정판교는 서신을 다 읽고 다음과 같이 시를 써서 회신했다.

“천리나 편지를 보낸 것이 담장 하나 때문인가? 그에게 몇 자를 양보하면 또 어떤가? 만리장성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어찌 진시황은 보이질 않겠는가.”

그리고 나중에 어리석기도 어렵다는 뜻의 난득호도(難得糊塗)란 글과 손해보는 것이 복을 받는 것이라는 뜻의 흘휴시복(吃虧是福)라는 두 개의 큰 글자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

“난득호도(難得糊塗)”란 글에 대하여 정판교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聰明難,糊塗難,(총명난, 호도난)
由聰明轉入 糊塗更難。(유총명전입 호도갱난)
放一著 退一步,當下心安,(방일착 퇴일보, 당하안심)
非圖後來 福報也。(비도후래복보야)

총명하기도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렵다.
총명한 사람이 어리석게 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생각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서면, 그 순간 마음은 편해진다.
뜻하지 않고 있노라면 후에 복으로써 보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흘휴시복(吃虧是福)”이라는 글자에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고 한다.

滿者損之機 (만자손지기)
虧者盈之漸。(휴자영지점)
損於己則盈於彼。(손어기즉영어피)
各得心情之半。(각득심정지반)
而得我心安卽平 (이득아심안즉평)
且安福卽在時矣。(차안복즉재시의)

가득 차면 덜어지게 되어 있고
비어 있으면 점점 차게 되어 있다.
자기가 손해 보면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본다.
그러면 각자 심정의 절반씩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얻게 되니,
어찌 바로 복을 받은 때가 아니겠는가.

南橘北枳 (남귤북지)

南橘北枳(남귤북지)

淮水(회수)의 남쪽인 淮南(회남)의 귤나무를 회수의 북쪽인 淮北(회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로 변해버린다는 말로 처지가 달라짐에 따라 사람의 기질도 변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춘추시대 齊(제)나라에 안영이란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어느해 안영이 사신으로 楚(초)나라에 가게 되었다.평소 안영이 비상한 인물이라는 소문을 듣고 있던 초나라 靈王(영왕)은 이 기회에 그를 시험해 볼 욕심이 생겼다.그런데 안영은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외모는 볼품이 없고 키도 아주 작았다.

영왕이 안영에게 물었다. “제나라에는 인재가 별로 없는 모양이지요. 당신같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는 걸 보면.” 안영의 보잘 것 없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비웃는 말이었다.

그러나 안영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우리 제나라는 한가지 원칙을 세워두고 있죠.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작은 나라에는 작은 사람을 보내는 것이지요. 저는 작은 사람중에서도 가장 작기 때문에 이렇게 초나라에 오게 된 겁니다.”

영왕이 한방 얻어맞은 꼴이 되었는데 마침 그때 捕吏(포리)가 죄수를 끌고 지나갔다. 왕이 물었다. “그 죄수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제나라 사람인데 절도 죄인 입니다.”

포리의 대답을 듣고 초왕이 안영에게 물었다.“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합니까.” “회남쪽의 귤을 회북땅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어버립니다(南橘北枳 남귤북지). 제나라 사람은 도둑질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라는데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한 것을 보면 초나라 풍토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연거푸 두방을 얻어맞은 영왕은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難攻不落 (난공불락, nángōngbúluò)

難攻不落(난공불락,nángōngbúluò)

쳐 부수기 어려운 성지(城地)

南柯一夢 (남가일몽)

南柯一夢(남가일몽)

덧 없이 지나간 한 때의 부귀나 행복을 일컫는 말.

南郭濫吹 (남곽남취)

南郭濫吹(남곽남취)

南 남녘 남, 나무 나 | 郭 둘레 곽, 성곽 곽 | 濫 넘칠 남(람), 함부로 남(람), 동이 함 | 吹 불 취 |

남곽(南郭)이 함부로 분다는 뜻으로, 학예(學藝)에 전문(專門) 지식(知識)도 없이 함부로 날뜀을 두고 이르는 말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 상편에는 남곽처사(南郭處士)라는 무능한 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은 생우(笙竽)라는 관악기의 연주를 매우 즐겨 들었다. 그는 많은 악사들이 함께 연주하는 것을 특히 좋아하여, 매번 300명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악기를 연주하게 하였다.

우를 전혀 불지 못하는 남곽(南郭)이라는 한 처사(處士)가 선왕을 위하여 우를 불겠다고 간청하였다. 선왕은 흔쾌히 그를 받아들여 합주단의 일원으로 삼고, 많은 상을 하사하였다. 남곽은 다른 합주단원들의 틈에 끼여 열심히 연주하는 시늉을 했다. 몇 해가 지나, 선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민왕(緡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민왕은 아버지인 선왕과는 달리 300명의 합주단이 연주하는 것을 즐겨 듣지 않고 단원 한 사람이 단독으로 연주하는 것을 즐겨 들었다. 난처해진 남곽은 자신의 차례가 돌아 오자 도망치고 말았다.

南郭濫吹(남곽이 우를 함부로 불다)는 남우충수(濫竽充數)라고도 한다. 이는 무능한 자가 재능이 있는 척하거나, 실력이 없는 자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근래에는 '濫竽充數(남우충수)'란 말이 중요한 자리에 참석해 자신을 낮춰 겸손을 부릴 때 쓰는 말로 뜻이 바뀌어 사용되기도 한다.


출전

한비자(韓非子) | 시경(詩經)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南郭濫吹(남곽남취) | 濫竽(남우) | 濫竽充數(남우충수) | 濫芋充數南郭濫吹(남우충수남곽남취) | 濫吹(남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