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後竹筍 (우후죽순)

雨後竹筍(우후죽순)

비 온 뒤에 돋는 죽순. 곧 어떤 일이 일시에 많이 일어남을 비유.

柳宗元 (유종원, 773~819)

柳宗元(유종원, 773~819)

異名: 柳宗元(LiǔZōngyuán), 자 자후(子厚) , 유하동(柳河東) ·유유주(柳柳州)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창안[長安]
주요저서: 《유하동집(柳河東集)》,《외집(外集)》,《보유(補遺)》


유·도·불(儒道佛)을 참작하고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했던 중국 중당기(中唐期)의 시인. 《천설(天說)》,《비국어(非國語)》,《봉건론(封建論)》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자구(字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정채함은 특히 뛰어났다.


당나라 한유(韓愈),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 등과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이다.

자 자후(子厚). 장안(長安) 출생. 유하동(柳河東)·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른다. 관직에 있을 때 한유(韓愈)·유우석(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었다. 혁신적 진보분자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획하였으나 실패하여 변경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좌절과 13년간에 걸친 변경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한유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적이었다. 한유가 전통주의인 데 반하여, 유종원은 유·도·불(儒道佛)을 참작하고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천설(天說)》《비국어(非國語)》《봉건론(封建論)》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 우언(寓言) 형식을 취한 풍자문(諷刺文)과 산수(山水)를 묘사한 산문에도 능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하였는데, 그 자구(字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정채함은 특히 뛰어났다. 시는 산수의 시를 특히 잘하여 도연명(陶淵明)과 비교되었고,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 등과 당시(唐詩)의 자연파를 형성하였다. 송별시 ·우언시(寓言詩)에도 뛰어나 우분애원(憂憤哀怨)의 정을 표현하는 수법은 굴원(屈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저서에 시문집 《유하동집(柳河東集)》(45권) 《외집(外集)》(2권) 《보유(補遺)》(1권) 등이 있다.


三戒(삼계)


溪居(계거)

迂直之計 (우직지계)

迂直之計(우직지계)

迂 멀 우 | 直 곧을 직 | 之 어조사 지 | 計 꾀 계 |

가까운 길을 곧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는 병법의 지혜.


먼 길로 돌아가면서도 곧바로 가는 것과 같은 우회하는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한다는 의미다. ‘迂’는 구불구불하여 돌아가는 길이고 ‘直’은 곧은길이니, 목적을 위해서 수단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간단히 '우직' 혹은 '이우위직(以迂爲直)'이라고도 한다.

손자(孫子) 군쟁편(軍爭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가까운 길을 먼 길인듯 가는 방법을 적보다 먼저 아는 자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先知迂直之計者勝]. 이것이야말로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원칙이다[此軍爭之法也]." 손자는 이 말에 덧붙여 설명하기를 “군쟁 중에서 어려운 점은 먼 길을 곧은 길로 삼고, 근심거리를 오히려 이로움으로 만드는데 있다. 따라서 그 길을 구불구불 가는 것처럼 하여 적을 이익으로 유인하면 나중에 출발한 군대가 먼저 도착하는 것이니 이는 우직지계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軍爭之難者, 以迂爲直, 以患爲利. 故迂其途, 而誘之以利, 後人發, 先人至, 此知迂直之計者也]”

병법의 핵심은 상대의 허점을 알아내고 교란시켜서 적을 오판에 빠뜨리는 것이다. 장수란 군대를 출동시킴에 있어 우회(迂廻)의 전략을 취함으로써 바로 적의 허를 찌르라는 것이다. 즉 적의 눈과 마음을 빼앗아 아군의 기동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나중에 출발해도 먼저 도착한다는 뜻이다. 즉 적이 예측한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기동하는 것이다. 상대가 보기에 도무지 불가능한 기동을 택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전쟁의 승리로 귀결된다는 말이다.

쌍방의 군대가 서로 승리를 다투어 전쟁에서 먼저 기회를 잡아 유리한 장소와 시간을 장악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핵심이다. 적군과 아군 가운데 누가 이러한 지점에 먼저 도착할 수 있고, 유리한 시간에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지가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이라는 것이다. 유리한 시간이란 사기가 충만한 군대로 이미 지친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유리한 지점이란 우세한 병력을 취약한 환경에 처한 적진에 투입하는 것을 뜻한다. 아군이 유리한 지형을 선점(先占)하게 되면 적을 견제하기는 쉽다. 물론 그 전제는 적의 예측을 뒤흔드는 변화무쌍한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는 것이다. 상황의 변화에 따른 무궁무진한 용병의 원칙에서 중심은 바로 ‘우직지계’인 셈이다.

전쟁사에 남은 수많은 명전투는 병력으로나 전세로나 월등 열세에 빠진 쪽이 어떻게 해서 이겼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힘과 지혜의 싸움인 전쟁에서 우직지계는 상식적인 사고를 뒤집어 생각해보는 것이 병법의 기초임를 말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迂直之計(우직지계) | 以迂爲直(이우위직) | 後人發先人至(후인발선인지) |

旭日昇天 (욱일승천)

旭日昇天(욱일승천)

아침 해가 하늘에 떠오름. 또는 그와 같은 기상.

牛耳讀經 (우이독경)

牛耳讀經(우이독경)

소귀에 경 읽기, 아무리 말해도 소용 없음

pouring water on a duck´s back. preaching to the wind. to play the lute to a cow—to give things of value to those who will not understand or appreciate it.


유의어

대우탄금(對牛彈琴) 소에게 거문고를 들려준다는 말로,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참된 도리를 말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 홍명집(弘明集) 이혹론(理惑論)

우이송경(牛耳誦經) 쇠귀에 경 읽기.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 주어도 알아듣지 못함

마이동풍(馬耳東風) 따뜻한 봄바람이 불면 사람들은 기뻐하는데 말의 귀는 봄바람이 불어도 전혀 느끼는 낌새가 없다는 뜻.

반의어

문일지십(聞一知十)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 논어 공야장(公冶長)

雲外蒼天 (운외창천)

雲外蒼天(운외창천)

雲 구름 운 | 外 바깥 외 | 蒼 푸를 창 | 天 하늘 천 |

어두운 구름 밖으로 나오면 맑고 푸른 하늘이 나타난다는 뜻으로, 온갖 난관(難關)을 극복(克服)하면 성공(成功)한다는 말. 절망(絶望)해서는 안된다는 격려(激勵)의 말로 사용(使用)함

右往左往 (우왕좌왕)

右往左往(우왕좌왕)

右 오른쪽 우, 도울 우 | 往 갈 왕 | 左 왼 좌 | 往 갈 왕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사방으로 왔다 갔다 함

교수신문에서 선정한 2003년 올해의 사자성어


2003년 | 올해의 사자성어 | 교수신문

禹王 (우왕)

禹王(우왕)

사문명(姒文命), 禹王(Yǔ Wáng), 대우(大禹), 하우(夏禹), 융우(戎禹), 제우(帝禹)


우(禹)는 성이 사(姒), 이름이 문명(文命)이며, 대우(大禹), 하우(夏禹), 융우(戎禹), 제우(帝禹) 등으로도 일컬어진다.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순의 선양(禪讓)을 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하왕조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8년간 재위하였으며 과로로 죽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100세까지 살다가 회계산(會稽山: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紹興縣> 경내)에 묻혔다고 한다.


우는 전욱의 증손이자 곤(鲧)의 아들로 하후씨(夏后氏) 부락의 장이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우의 아버지 곤이 치수의 실패로 피살된 후에 순임금은 우에게 아버지를 대신하여 계속 치수의 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우는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상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용을 중시하고 매사에 솔선수범하였다. 그는 치수에 실패한 아버지의 교훈을 거울삼아 철저한 현지 조사를 거쳐 강바닥에 쌓인 토사를 제거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는 직접 공사현장을 감독하면서 동분서주 한 결과 13년만에 홍수의 피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 13년 동안에 그는 세 번이나 자신의 집앞을 지나갔지만 한번도 집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첫 번째 집앞을 지날 때 그는 아기를 낳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내의 신음소리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우의 부하는 그에게 집안으로 들어가 보기를 권했지만 그는 시간을 지체하다 치수를 그르치게 될까 염려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두 번째 집앞을 지날 때는 그의 아들이 아내의 품에 안겨 그에게 손짓을 하며 부르고 있었지만 그는 손으로만 응답하고 그냥 지나갔다. 세 번째 집앞을 지날 때는 그의 아들이 달려와 그를 끌고 집으로 들어가려 하였지만, 그는 치수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아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그냥 지나갔다.

치수에 임하는 자세와 그 성과로 우는 많은 민심을 얻어 염황부락연맹의 후계자로 추대되었다. 순임금이 죽은 후 그는 왕위를 계승하였다.

우의 왕위 계승에 관해서는 또 다른 설이 전해오고 있다. 즉 곤과 우 부자는 동일한 방법으로 치수를 하여 두 사람 모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곤과 우의 신위를 함께 모셔두고 3대를 함께 제사지냈다. 치수 방면에서는 두 사람의 역량이나 성과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곤이 피살된 것은 우가 부락연맹의 장으로 추대되었기 때문이라는 정치적인 이유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요순(堯舜) 시대는 부계씨족사회의 말기였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하에서 요순은 보수세력의 대표이고, 곤은 신흥세력의 대표였다. 곤의 모든 행위는 씨족사회의 낡은 전통과 제도를 파괴하였으며, 특히 그는 폭력으로써 "선양(禪讓)"이라는 민주적인 제도를 위협하면서 요임금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기도하였다. 이에 요임금은 극도로 분노하여 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곤을 사형에 처했다.

우는 아버지가 피살된 뼈아픈 교훈을 거울삼아 총명하게 처신했다. 그는 매사에 공손하고 신중하면서 순임금의 명령을 잘 이행하여 마침내 순임금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이에 순임금은 곧바로 왕위를 그에게 선양하였다.

우는 부락연맹의 장이 된 후에도 여전히 직무에 충실하면서 근검절약을 생활화하였다. 그는 농사를 중시하여 관개수로 정비에 힘을 쏟았다. 그의 정치세력도 황하유역에서 장강유역으로 확대되었으며, 그는 양적(陽翟: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에서 살았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이미 군대, 관리, 형벌, 감옥 등의 공권력을 구비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때에 이미 초기 형태의 국가가 출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홍수의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우임금은 당시에 구주(九州)에서 생산되는 청동으로 9개의 솥(鼎)을 만들고 그 위에 구주를 대표하는 기이한 동물들을 주조하여 국가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임금은 만년에 이르러 각 부락장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고요(皐陶)를 그의 후계자로 선발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고요가 요절하자 다시 고요의 아들 백익(伯益)을 후계자로 삼았다.

禹王에게는 啓,宰,罕의 세 아들이 있었고, 모두가 賢明한 人物들이었다. 중신들은 "임금께서는 세 분의 아드님이 계시옵고, 그들은 한결같이 賢明하시옵니다.그런데 어찌하여 王位를 後孫에게 繼承시키지 아니 하시고 他人에게 물려주려 하시옵니까?"라고 말했으나, 禹王은 고개를 크게 흔들며 말했다.

"天下는 어느 個人의 것이 아니다. 내 아들들이 賢明하다는 것은 나 또한 알고 있으나 王位를 世襲하게 되면 그것이 先例가 되어 天下는 한 사람의 차지가 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그런 弊端을 未然에 防止하려면 王의 자리는 반드시 賢明한 弟子에게 물려 줘야 옳으니라."

우임금은 왕위에 있은 지 8년째에 각 부락의 장들을 묘산(苗山: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 경내)으로 불러모았다. 모두들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여 우임금에게 각자 예물을 바쳤다. 우임금은 부하에게 명령하여 예물의 수를 확실히 세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후세 사람들은 묘산을 '회계산'(會稽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집회에서 남방의 방풍씨 부락(防風氏部落: 지금의 절강성 덕청현<德淸縣>)의 장이 늦게 도착하였다. 우임금이 크게 진노해 있는데 방풍씨가 자신의 힘만 믿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지라 즉시 그를 끌어내려 죄상을 낱낱이 열거한 후 사형에 처했다.

집회가 끝난 후 우임금은 과로한 탓에 앓아눕고 말았다. 여전히 병을 무릅쓰고 업무를 처리하다가, 이해 8월 회계산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하들은 평소 검소했던 그의 생활신조에 따라 단지 3벌의 옷과 3촌(寸)의 박관(薄棺)으로 그를 장사지내고 회계산에 안장하였다.

禹王이 遺言을 남기고 世上을 떠났으므로 王位는 마땅히 伯益이 물려받아야 할 形便이었다. 그러나 伯益은 王位에 欲心이 없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先王의 賢明한 子息들을 물리치고 自己가 王位에 오른다는 것은 先王에 對한 待接이 아닌 것 같아 그날로 箕山속으로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孫子兵法]


관련 한자어

一言九鼎(yìyánjiǔdǐng)

말 한 마디가 구정(九鼎)만큼 무겁다. 일언이 중천금이다. 구정(九鼎)은 중국 하(夏)나라 우왕(禹王) 때 전국의 아홉 주(州)에서 거두어들인 금으로 만들었다는 솥을 가리키는데, 구주(九州)를 상징하며 주(周)나라 때까지 대대로 천자에게 전해진 보물이었다고 함.


山海經(산해경)

憂愁思慮 (우수사려)

憂愁思慮(우수사려)

근심과 걱정.

牛杏馬勃 (우수마발)

牛杏馬勃(우수마발)

쇠오줌과 말똥, 즉 아무 소용이 없는 말이나 글.

雲上氣稟 (운상기품)

雲上氣稟(운상기품)

속(俗)에서 벗어난 고상한 기품.

愚夫愚夫 (우부우부)

愚夫愚夫(우부우부)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

牛步萬里 (우보만리)

우보만리(牛步萬里)

듬직한 소의 걸음으로 만 리를 걸어가다.


소 | 꾸준함

愚問賢答 (우문현답)

愚問賢答(우문현답)

愚问贤答[yúwènxiándá]

愚 어리석을 우 | 問 물을 문 | 賢 어질 현 | 答 대답 답 |

어리석은 질문(質問)에 현명(賢明)한 대답(對答)

a wise answer to a silly question

于良史 (우량사, Yú Liángshǐ)

于良史(우량사)

于良史(Yú Liángshǐ)


생몰 연대가 확실치 않지만 당나라 현종(玄宗)·대종(代宗)·덕종(德宗) 때 활동하였던 시인이며, 관직은 시어사(侍御史)을 지냈다. 시를 잘 지어 자못 높은 명예를 얻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하는 작품은 《전당시(全唐詩)》에 실린 7수뿐이다.


우량사 관련 한시

春山夜月(춘산야월)

雲泥之差 (운니지차)

雲泥之差(운니지차)

구름과 진흙의 차이라는 뜻으로, 사정이 크게 다르다는 경우에 쓰는 말.

a great difference

愚公移山 (우공이산, Yúgōngyíshān)

愚公移山(우공이산)

愚公移山[Yúgōngyíshān]

愚 어리석을 우 | 公 공평할 공 | 移 옮길 이, 크게 할 치 | 山 메 산 |


우공(寓公)이 산을 옮기다. 《열자·탕문(列子·湯問)》에 나오는 말로서 남이 보기엔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지만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마침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Like the Foolish Old Man who removed the mountains—with dogged perseverance


원래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태형(太形 또는 태행 太行) ·왕옥(王屋) 두 산은 둘레가 700리나 되는데 원래 기주(冀州) 남쪽과 하양(河陽) 북쪽에 있었다. 북산(北山)의 우공(愚公)이란 사람은 나이가 이미 90에 가까운데 이 두 산이 가로막혀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을 덜고자 어느 날 가족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저 험한 산을 평평하게 하여 예주(豫州)의 남쪽까지 곧장 길을 내는 동시에 한수(漢水)의 남쪽까지 갈 수 있도록 하겠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하냐?"

모두 찬성하였으나 그의 아내만이 반대하며 말하였다.

"당신 힘으로는 조그만 언덕 하나 파헤치기도 어려운데, 어찌 이 큰 산을 깎아 내려는 겁니까? 또, 파낸 흙은 어찌하시렵니까?"

우공은 흙은 발해(渤海)에다 버리겠다며 세 아들은 물론 손자들까지 데리고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와 광주리 등으로 나르기 시작하였다.

흙을 발해만(渤海灣)까지 운반하는 데 한 번 왕복에 1년이 걸렸다. 이것을 본 친구 황해의 지수(智搜)라는 사람이 그를 비웃으며 만류하자 그는 정색을 하고 대답하였다.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다. 그 손자는 또 자식을 낳아 자자손손 한없이 대를 잇겠지만 산은 더 불어나는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는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

지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산신령(蛇神)이 산을 허무는 인간의 노력이 끝없이 계속될까 겁이 나서 옥황상제에게 이 일을 말려 주도록 호소하였다. 그러나 옥황상제는 우공의 정성에 감동하여 가장 힘이 센 역신(力神) 과아씨(夸蛾氏)의 두 아들을 시켜 두 산을 들어 옮겨, 하나는 삭동(朔東)에 두고 하나는 옹남(雍南)에 두게 하였다고 한다.


출전·유래

列子(열자) 湯問(탕문) |


관련 한자어

유의어

塵合泰山 진합태산 | 點滴穿石 점적천석 | 積土成山 적토성산 | 積塵成山 적진성산 | 積水成淵 적수성연 | 積小成大 적소성대 | 十伐之木 십벌지목 | 水滴穿石 수적천석 | 水積成川 수적성천 山溜穿石 산류천석 | 磨斧作針 마부작침 | 磨斧爲針 마부위침 |

참조어

風燭殘年(풍촉잔년)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