門外漢(문외한)
어떤 일에 직접 관계가 없는 테 밖의 사람. 그 일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
無信不立 (무신불립)
無信不立(무신불립)
無 없을 무 | 信 믿을 신 | 不 아닐 불 | 立 설 립 |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뜻으로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믿음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라는 뜻으로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자공(子貢)이 정치(政治)에 관해 묻자, 공자는 말했다.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그러자 공자는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나머지 두 가지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묻자 공자는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로부터 사람은 다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여기에서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삼국지(三國志)》에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로 북해(北海) 태수를 지낸 공융(孔融:153∼208)은 조조(曹操:155∼220)의 공격을 받은 서주(徐州) 자사 도겸(陶謙)을 구하기 위해 유비(劉備:161∼223)에게 공손찬(公孫瓚:?∼199)의 군사를 빌려서 도겸을 도와주게 하였다. 공융은 군사를 가지면 유비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비에게 신의를 잃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BC 552∼BC 479)의 말에 따라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성인은 '예부터 내려오면서 누구든지 죽지만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하였습니다. 저는 군대를 빌릴지라도 이곳으로 꼭 돌아올 것입니다"
이처럼 ‘무신불립(無信不立)’은 믿음과 의리가 없으면 개인이나 국가가 존립하기 어려우므로 신의를 지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無 없을 무 | 信 믿을 신 | 不 아닐 불 | 立 설 립 |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뜻으로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믿음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라는 뜻으로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자공(子貢)이 정치(政治)에 관해 묻자, 공자는 말했다.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그러자 공자는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나머지 두 가지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묻자 공자는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로부터 사람은 다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여기에서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삼국지(三國志)》에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로 북해(北海) 태수를 지낸 공융(孔融:153∼208)은 조조(曹操:155∼220)의 공격을 받은 서주(徐州) 자사 도겸(陶謙)을 구하기 위해 유비(劉備:161∼223)에게 공손찬(公孫瓚:?∼199)의 군사를 빌려서 도겸을 도와주게 하였다. 공융은 군사를 가지면 유비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비에게 신의를 잃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BC 552∼BC 479)의 말에 따라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성인은 '예부터 내려오면서 누구든지 죽지만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하였습니다. 저는 군대를 빌릴지라도 이곳으로 꼭 돌아올 것입니다"
이처럼 ‘무신불립(無信不立)’은 믿음과 의리가 없으면 개인이나 국가가 존립하기 어려우므로 신의를 지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文選 (문선) 蕭統 (소통)
文選(문선) 蕭統(소통, 501~531)
중국 양(梁)나라의 소통(蕭統:昭明太子)이 진(秦) ·한(漢)나라 이후 제(齊) ·양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책.
구분: 시문선집
저자: 소통(蕭統:昭明太子)
시대: 중국 양(梁)
30권. 여기에 실린 문장가는 130여 명으로, 이 중에는 무명작가의 고시(古詩)와 고악부(古樂府)도 포함되어 있다. 편차(編次)는 문체별로 부(賦) ·시(詩) ·소(騷) ·조(詔) ·책(策) ·표(表) ·서(序) ·논(論) ·제문(祭文) 등 39종으로 나누었다. 시는 443수이고, 부(賦) ·소(騷)에서 제문까지의 작품 317편을 수록하였는데, 그 중 부가 가장 많다. 소통은 자신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주로 침사(沈思) ·한조(翰藻)의 내용과 형식의 글을 취하였는데, 이는 그 자신의 문학관인 동시에 6조(六朝)시대 일반 학자들의 신조이기도 하였다.
《문선》은 수(隋)나라에 이르러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당(唐)나라에 들어와 성행하였다. 그 중에서 이선(李善)이 주(註)한 문선이 가장 유명하며, 그는 매권을 둘로 나누어 60권으로 하였다. 그 후 현종(玄宗) 개원(開元) 6년(718), 당시의 공부시랑(工部侍郞) 여연조(呂延祚)가 여연제(呂延濟) ·유량(劉良) ·장선(張銑) ·여향(呂向) ·이주한(李周翰) 등 5명을 모아 주를 달게 한 것이 이른바 《5신주(五臣註)》이고, 거기에 이선의 주를 합하여 《6신주문선(六臣註文選)》이라고 한다.
송(宋)나라의 대중상부(大中祥府) 9년(1016), 처음으로 문선이 교각(校刻)되면서부터 이를 전문으로 배우는 이른바 선학(選學)이 생기게 되었는데, 한유(韓愈) ·두보(杜甫) 등도 문선을 존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당나라 때에는 사부(詞賦)로써 선비를 등용하였으므로, 문선학이 아주 성행하여, 마침내 6경(六經)에 견주게까지 되었다.
관련 한자어
三國名臣序(삼국명신서찬) 袁宏(원굉, 328~376) 千載一遇(천재일우) |
중국 양(梁)나라의 소통(蕭統:昭明太子)이 진(秦) ·한(漢)나라 이후 제(齊) ·양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책.
구분: 시문선집
저자: 소통(蕭統:昭明太子)
시대: 중국 양(梁)
30권. 여기에 실린 문장가는 130여 명으로, 이 중에는 무명작가의 고시(古詩)와 고악부(古樂府)도 포함되어 있다. 편차(編次)는 문체별로 부(賦) ·시(詩) ·소(騷) ·조(詔) ·책(策) ·표(表) ·서(序) ·논(論) ·제문(祭文) 등 39종으로 나누었다. 시는 443수이고, 부(賦) ·소(騷)에서 제문까지의 작품 317편을 수록하였는데, 그 중 부가 가장 많다. 소통은 자신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주로 침사(沈思) ·한조(翰藻)의 내용과 형식의 글을 취하였는데, 이는 그 자신의 문학관인 동시에 6조(六朝)시대 일반 학자들의 신조이기도 하였다.
《문선》은 수(隋)나라에 이르러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당(唐)나라에 들어와 성행하였다. 그 중에서 이선(李善)이 주(註)한 문선이 가장 유명하며, 그는 매권을 둘로 나누어 60권으로 하였다. 그 후 현종(玄宗) 개원(開元) 6년(718), 당시의 공부시랑(工部侍郞) 여연조(呂延祚)가 여연제(呂延濟) ·유량(劉良) ·장선(張銑) ·여향(呂向) ·이주한(李周翰) 등 5명을 모아 주를 달게 한 것이 이른바 《5신주(五臣註)》이고, 거기에 이선의 주를 합하여 《6신주문선(六臣註文選)》이라고 한다.
송(宋)나라의 대중상부(大中祥府) 9년(1016), 처음으로 문선이 교각(校刻)되면서부터 이를 전문으로 배우는 이른바 선학(選學)이 생기게 되었는데, 한유(韓愈) ·두보(杜甫) 등도 문선을 존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당나라 때에는 사부(詞賦)로써 선비를 등용하였으므로, 문선학이 아주 성행하여, 마침내 6경(六經)에 견주게까지 되었다.
관련 한자어
三國名臣序(삼국명신서찬) 袁宏(원굉, 328~376) 千載一遇(천재일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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