病入膏肓 (병입고황)

病入膏肓(병입고황)

병이 몸 속 깊이 들어 고치기 어렵게 되었음을 이르는 말

壁上觀 (벽상관, bìshàngguān)

壁上觀(벽상관)

壁上观(bìshàngguān)

壁 벽 벽 | 上 윗 상 | 觀 볼 관 |


수수방관하다. 강 건너 불 보듯 하다. 내버려 두다.


남은 싸우는데 성벽 위에서 바라만 보다. 《사기·항우본기(史記·項羽本紀)》에서, 진(秦)나라 군사가 조(趙)나라 거록(巨鹿)을 포위하여 초(楚)나라 장수 항우(項羽)가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는데, 지원을 나온 다른 장수들은 진(秦)나라 군대의 위세에 눌려 모두 성벽 위에서 바라만 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함.

[출전]
史記(사기) : 項羽本紀(항우본기) |


관련 한자어

동의어

作壁上观(zuòbìshàngguān) |

유의어

坐观成败(zuòguānchéngbài) 타인의 성패에 대해 수수방관하다 |


사기 | 사기:항우본기 | 항우

史記 | 史記:項羽本紀 | 項羽

兵不厭詐 (병불염사)

兵不厭詐(병불염사)

兵 군사 병 | 不 아닐 불 | 厭 싫을 염 | 詐 속일 사 |

한비자(韓非子) 난일(難一)에는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초(楚)나라와 전쟁을 하고자 구범(舅犯)에게 견해를 묻는 대목이 기록되어 있다.

"초나라는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이 일을 성취하려면 어찌해야 되겠는가?"

진 문공의 물음에 구범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제가 듣건대, 번다한 예의를 지키는 군자는 충성과 신의를 꺼리지 않지만, 전쟁에 임해서는 속임수를 꺼리지 않는다고 합니다(戰陣之間, 不厭詐僞). 그러니 적을 속이는 술책을 써야 할 것입니다."

진 문공은 구범의 계책에 따라, 초나라의 가장 약한 우익(右翼)을 선택하였다.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신속하게 그곳을 공격함과 동시에 주력부대는 후퇴하는 것으로 위장하여 초나라 군대의 좌익(左翼)을 유인해냈다. 진 문공은 곧 좌우에서 협공하여 초나라 군대를 쳐부술 수 있었다.

조조(曹操)도 삼국연의(三國演義) 23회에서 兵不厭詐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兵不厭詐는 군불염사(軍不厭詐)라고도 하는데, 이는 전쟁에서는 모든 방법으로 적군을 속여야 함을 말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軍不厭詐(군불염사) | 兵不厭詐(병불염사) |

別無長物 (별무장물)

別無長物(별무장물)

別 나눌 별, 다를 별 | 無 없을 무 | 長 길 장, 어른 장 | 物 물건 물 |

필요한 것 이외에는 갖지 않음. 검소한 생활(生活)


당(唐) 나라 때 태종(太宗:598~649)의 지시로 644년에 편찬한《진서(晉書)》의〈왕공전(王恭傳)〉에 나오는 말이다.

동진(東晉:317~419) 시대에 청렴결백하고 지조가 있는 인격자 왕공(王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태자(太子)의 스승을 지낸 사람이었지만 생활이 매우 검소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청렴결백에 대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였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곳인 회계(會稽:지금의 저장성)에서 수도인 건강(建康:지금의 난징)으로 아버지와 함께 갔을 때의 일이다. 화려한 도시의 모습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그의 질박하고 검소한 생활은 건강에서도 변함이 없었는데, 친척인 왕침(王枕)이 찾아왔다. 왕침 또한 태자의 스승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대나무 돗자리에 않아서 정답게 대화를 나누었다. 왕침은 왕공이 그 돗자리를 대나무의 명산지인 회계에서 가져왔을 것이므로 몇 개가 더 있겠지라는 생각에 돗자리가 매우 마음에 들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공은 주저하지 않고 그냥 주어 버렸고, 자신은 들에 널려 있는, 하찮은 풀로 엮은 자리를 깔고 생활하였다.

우연히 이 소식을 들은 왕침은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다시 돌려주려고 하다가 일단 왜 그랬는지 물어보았다. 왕공이 “나에게 그 돗자리는 별무장물(別無長物)이네[恭作人無長物]”라고 대답하였다. 왕침은 왕공의 검소한 생활에 새삼 경의를 표시하고 우의를 더욱 돈독히 하였다.

별무장물은 왕공의 청렴결백하고 검소한 생활을 표현한 것에서 유래하며, 자신에게 불필요한 물건은 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출전

진서(晉書) 왕공전(王恭傳) | 세설신어(世說新語) 덕행(德行)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別無長物(별무장물) |

世有三亡 (세유삼망)

世有三亡(세유삼망)

세상을 망하게 하는 것 3가지. 난(亂)이 치(治)를 공격하면 망하고, 사(邪)가 정(正)을 공격하면 망하고, 역(逆)이 순(順)을 공격하면 망한다는 의미.

以亂攻治者亡(이란공치자망) 以邪攻正者亡(이사공정자망) 以逆攻順者亡(이역공순자망)

范曄 (범엽, 398~445)

范曄(범엽, 398~445)

자: 위종(蔚宗)
국적: 중국 남조(南朝) 유송(劉宋)
활동분야: 역사학
출생지: 중국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송(宋)의 역사가로서 후한서(後漢書)를 편찬하였다.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송(宋, 420~479)의 역사가로서 자(字)는 위종(蔚宗)이고, 산음(山陰, 지금의 浙江省 紹興)에서 태어났다. 송(宋) 문제(文帝, 424~453) 때인 432년(元嘉 9년), 선성(宣城) 태수(太守)로 좌천되어 있으면서 오(呉, 222~280)의 사승(謝承), 설형(薛瑩), 화교(華嶠), 동진(東晋, 316~420)의 사마표(司馬彪, ?~306), 사침(謝沈), 원산송(袁山松), 장번(張璠) 등이 쓴 7종의 <후한서(後漢書)>와 유진(劉珍) 등이 편찬한 <동관한기(東觀漢記)>, 원굉(袁宏, 328~376)이 쓴 <후한기(後漢紀)> 등을 참고하여 기전체(紀傳體)의 <후한서(後漢書)>를 편찬하였다.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부터 헌제(献帝, 재위 189~220)까지 후한(後漢)의 13대(代) 196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함께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인 ‘25사(史)’ 가운데에서도 으뜸인 ‘4사(四史)’로 꼽힌다.

범엽(范曄)은 순양(順陽, 지금의 河南省 淅川) 출신의 강남(江南) 사족(士族) 명가(名家)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진(晋)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조부인 범녕(范寧)이 12권의 <춘추곡량전집해(春秋榖梁傳集解)>를 저술하는 등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420년, 송(宋)이 건국된 뒤 범엽(范曄)은 벼슬을 하여 상서외병랑(尚書外兵郎), 신채태수(新蔡太守), 상서이부랑(尚書吏部郎), 비서감(秘書監)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성격이 오만(傲慢)하여 관직 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432년, 범엽은 선성(宣城) 태수(太守)로 좌천되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10권의 본기(本紀)와 80권의 열전(列傳)으로 된 <후한서(後漢書)>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그 뒤 좌위장군(左衛將軍), 태자첨사(太子詹事) 등을 역임하면서 10여년 동안 <후한서(後漢書)>의 저술에 몰두하였다.

436년(元嘉 13년), 문제(文帝)가 중병(重病)에 빠지자 그의 동생인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 409~451)이 집정(執政)하였다. 유의강(劉義康)은 북벌(北伐)에 큰 공을 세운 단도제(檀道済, ?~436)의 세력을 제거하며 권력을 잡았지만, 440년(元嘉 17년) 문제(文帝)는 그를 강주자사(江州刺史)로 내쫓았다. 범엽(范曄)은 유의강(劉義康)을 황제로 옹립하려다가, 445년(元嘉 22년) 서담지(徐湛之)의 밀고(密告)로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범엽(范曄)이 죽었을 때, <후한서(後漢書)>는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남조(南朝) 양(梁, 502~557)의 유소(劉昭)는 동진(東晋)의 사마표(司馬彪)가 저술한 <속한서(續漢書)>에서 율력(律曆), 예의(禮儀), 제사(祭祀), 천문(天文), 오행(五行), 군국(郡國), 백관(百官), 여복(輿服) 등의 ‘팔지(八志)’ 부분에 주석(註釋)을 붙여 30권의 <보주후한지(補注後漢志)>를 편찬하였다. 이로써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이루어진 <후한서(後漢書)>의 체재(體裁)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북송(北宋, 960~1126) 초기까지 <후한서(後漢書)>는 90권의 본기(本紀), 열전(列傳)과 30권의 <보주후한지(補注後漢志)>가 따로 간행되었다. 본기(本紀), 열전(列傳)에는 당(唐, 618~907) 시대에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의 둘째아들인 장회태자(章懐太子) 이현(李賢, 654~684)이 붙인 주석(註釋)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북송(北宋) 진종(眞宗, 재위 997~1022) 때인 1022년(宋 眞宗 乾興 원년), 손석(孫奭)은 이현(李賢)의 주석(註釋)을 덧붙인 90권의 본기(本紀), 열전(列傳)에 유소(劉昭)가 주석(註釋)을 붙인 30권의 지(志)를 합하여 간행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후한서(後漢書)>의 판본(板本)이다.

범엽(范曄)은 문장(文章)이 자유롭고 수려(秀麗)해 이름이 높았고, <쌍학시서(雙鶴詩序)>, <락유응조시(樂游應詔詩)>, <화향방(和香方)>, <잡향고방(雜香膏方)>, <백관계차(百官階次)> 등의 시문(詩文)을 남겼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쌍학시서>와 <락유응조시> 외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범엽(范曄) 관련 작품

후한서(後漢書)

繁文縟禮 (번문욕례)

繁文縟禮(번문욕례)

번거롭게 형식만 차려서 까다롭게 만든 예문